언젠가 너와 함께 달에서 춤을 출 거야

프로젝트 세카이 카나데 x 에나

“소문대로의 위용이네. ‘정상에 트뤼플을 올린 초코 시럽 가득 캐슈넛 퓌레 가득 호화 극치 가을맞이 계절 한정 몽블랑’ 이란 이름 그대로야. 이건 어느 각도에서 찍어도 반응을 잔뜩 끌어내는 사진이 되겠어!”

“그 이름을 다 외웠구나. 직원도 주문 받을 때 그냥 한정 몽블랑이라고만 하던데.”

“홍보하는 걸 봤을 때부터 반드시 먹을 거라고 점찍어뒀거든. 아이리가 같이 와줘서 다행이야.”

“다 먹을 수 있겠어?”

“물론 다 먹어야지! 당분 보급을 해야 머리도 돌아갈 거고.”

그 전에 예법을 지켜서, 사진 먼저. 각도를 따라 테이블 옆으로 빙빙 돌아가며 단말기의 렌즈를 들이미는 시노노메 에나의 행동에 맞춰, 모모이 아이리는 피식 웃으며 옆으로 살짝 몸을 기울여주었다. 아이리 자신도 음식이 나올 때마다 기념 사진을 하나씩은 꼭 찍는 편이니 먹을 것을 앞에 두고 찰칵- 소리가 연이어 울려퍼지는 게 어색하지 않다. 지금 흐름으로 봐서는 한 입 먹은 다음에도 연출한 사진을 몇 장이나 더 찍을 듯 싶지만.

“하아, 먹어서 힘을 내야만 해. 요즘 작업 이래저래 막힌 느낌이라 곤란하단 말야.”

“그래, 그럴 땐 따지지 말고 팍팍 먹어줘야지.”

“같이 작업하는 애가 지금까지와는 분위기가 다른 걸 가지고 왔거든. 항상 서늘하고 찌를 것마냥 날카로운 느낌으로 모든 걸 묘사했으면서, 이번엔 답지 않게 유순하달까 부드럽달까......그런 걸 가지고와서 뭔가 묘해. 바뀐 건 좋지만 변화폭도 크고 너무 갑작스러워. 그런데 그걸 보고 카나데는 곧바로 뭔가 알아차리곤 데모까지 만들어둔 곡을 처음부터 새로 바꾸고는 이쪽이 좀 더 어울릴 거라고 그러고, 그런 기분이 들었던 거구나- 하며 이해한다는 듯 말해주고......”

“결과적으로 에나 네가 담당하는 아트워크도 새로 맞춰야만 하게 된 거구나.”

“난 그 애들이 말하는 세계를 따라가지 못하겠는데, 둘이서만 통하는 게 있는 것마냥......”

단말기를 내려놓고 소녀는 울적함이 스며든 중얼거림을 흘렸다. 그러다가 이마를 팍 구기며 숟가락과 포크를 집어든다. 접시 위의 웅장한 산맥의 한 귀퉁이가 재난이라도 맞은 듯 한순간에 잘려나갔다. ‘한 입 먹어볼까나-’ 하는 깜찍한 느낌의 설정 사진을 찍을 생각이 싹 사라진 건지 에나는 몽블랑 조각을 입에 밀어넣고 신경질적으로 그를 씹어삼켰다. 크림이랑 슈가 파우더가 입가에 묻어 진한 화장이라도 한 듯 새하얗다. 평소의 에나라면 저런 실수 하지 않았을 건데.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리는 자신도 포크를 들어올렸다.

“재능 있는 사람들이란 다 그런 걸까.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회로 같은 게 있는 거야.”

“오히려 천재들끼리는 자기 세계관이 확고한 탓에 기본적인 소통도 되지 않거나 매사 심하게 충돌한다고 하잖아.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협업을 해왔다면 에나도 그 사람들과 통하는 감각을 가지고 있는 거야.”

“그런 곡을 만들고, 그런 가사를 쓰는데......그치만, 그런가. 이야기는, 통하려나.”

“에나는 이상이 높은 만큼 기준도 엄격하게 두는 편이니까, 가끔 스스로에게 가혹해지는 게 문제라구. 목표를 가지고 있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늘 노력하는 대로 하면 만족할만한 결과물도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랬음 좋겠는데. 카나데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인가. 포크 끝에 남은 크림을 핥아낸 다음 아이리는 친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에나와 만날 때마다 카나데라는 이름을 많이도 들었던 터였다. 원래는 ‘K’ 로 지칭하던 상대를 최근 들어 카나데라고 부르게 되었지. 자신을 인정해주고 응원해주는 상대는 각별할 수밖에 없다. 진심 가득한 노력을 알아줬다는 기쁨은 행위에 의미를 부여해주고 원동력이 되리라. 하지만 그에 의존하게 되어 주객이 전도된다면 곤란하다. 그림을 그리면 알아주는 너로 인해, 알아주는 너를 위해서만 그림을 그리게 된다면 그건 이미 속박이지 않은가. 사람들이 웃어주는 게 좋다는 이유만으로 원치 않는 무대에 끌려다니는 신세와 다를 게 없어진다. 에나는 이상이 높으니까 그리 쉽게 자신의 중심을 다른 누군가에게 맡기지 않겠지만. 결론짓고는 아이리는 그 이상 말을 꺼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한동안 달콤한 산맥을 자르고 뒤집는 소리만이 흐른다. 시노노메 에나도, 모모이 아이리도 활발하고 대화 나누기를 좋아하는 성격의 소유자다. 동시에 눈치가 빠르고 분위기를 잘 읽기도 하지. 대부분의 경우 그녀들의 수다는 상대가 던져주고 받아주는 작은 단서에서 시작된다. 대화하는 상대방이 생각에 잠겨 침묵에 빠져드는 동안, 무리해서 자기 이야기를 꺼내 어떻게든 말을 이어보려는 강박은 가지고 있지 않다. 고민 속에서, 그리고 배려 속에서 몽블랑의 시식회가 이어지던 와중이었다.

“저거, 무슨 기자회견 같은 건가?”

옆 자리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이 침묵 사이로 퐁당 잔물결을 만든다. 말이 들려온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가, 그쪽 테이블의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는 쪽으로 소녀들은 고개를 돌렸다. 카페 창문 바깥, 맞은 편 상가 외벽에 모니터 4개를 모아붙인 크기의 스크린으로 사람들의 눈길이 모이고 있었다. 평소 CM이나 공익 광고, 짧은 시사 방송 같은 게 제공되던 화면 중심에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비쳤다. 눈꼬리 입꼬리 모두 아래로 축 늘어지고, 안색도 파리해 음울함이 묻어나는 인상의 소유자였다. 들이밀어진 마이크에 대고 남성이 뭐라고 말을 하고 있었으나, 카페 내부에는 그 소리가 들리진 않았다.

“그거잖아. 월면 여행을 민간에 서비스할 수 있을 정도로 관련 기술을 개발하겠다던 연구진. 당시 시연한 기술이 꽤 인상적이어서 세계적인 경쟁력이 있다고 한 때 엄청 주목받았지? 지원도 많이 받았을 거고.”

“그런 게 있었나? 아, 혹시 같은 학교 출신 사람들이 한다고 했던 그거야?”

“그럴걸? 동아리였나 뭐였나 다섯 명 전부 학생 때부터 같이 시작했대서 아름다운 우정이 빛을 본 거라고, 어디서 실화 기반 영화로도 나올 거라고 그랬었는데.”

“지금 나오는 거 보면 그리 좋게 흘러가지는 못한 거 같네.”

“흐음, 찾아보니 내부 고발이래. 초기 인원을 유지하겠다고 능력 부족한 사람까지 계속 자리에 앉혀뒀단 걸 계획 실패 원인으로 지목했나봐. 옛 친구끼리 서로 고발하다니, 영화화는 무리려나.”

적당한 이야깃거리를 확보했다는 듯 떠들어대는 옆 자리 사람들의 대화가 그대로 전달된다.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불쾌해진 아이리가 미간을 찌푸리는 동안 에나는 멍하니 창문 너머로 보이는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잘은 몰라도 저 울적한 얼굴의 남자가 내부 고발자겠지. 옛 친우를 계획 실패의 원흉으로 지목하는 남자의 발언은 곧 끝났고, 화면에는 내용을 요약하는 자료가 흘러갔다.

별일이 다 있네. 그렇게 곁눈질로 보고 넘겨버리는 게 맞을 사건이었다. 월면 여행 계획이든 그와 관련된 과학적 기술이든 시노노메 에나의 관심사는 아니다. 그럼에도 휴대폰을 두드려 관련 기사를 찾는다. ‘우애의 아폴로 호는 미아가 되는가’. 비탄을 새겨넣은 헤드라인 아래로 이어지는 기사에는 조금 전 기자회견을 하던 남성의 사진도 걸려있었다. 그 아래로 어질러진 연구실 가운데에서 활짝 웃으며 어깨동무를 한 남녀 다섯을 찍은 사진이 뒤를 잇는다.

기나긴 세월에 걸친 사연이었으나, 요약하면 안쓰럽게 간결해지는 이야기였다. 사회에 나온 뒤 마주하게 된 필드는 학교의 실험실과는 너무나 달랐다. 같이 떠들고 웃고 힘내는 분위기만으로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프로의 세계는 상냥하지 않았다. 다섯이서 언젠가 달에 도착하자는 꿈을 말하며 시작한 길이었으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섯의 힘만으로는 많은 게 부족했다. 한 때 서로가 서로를 지지해주던 친우들은 각자 다른 분야를 맡아야만 했고, 모든 관심을 자신에게 할당된 업무에만 쏟을 수밖에 없었다. 서로의 단점을 커버해줄 여력도, 각자의 장점을 부각해줄 여유도 있을 리 만무했다. 한 사람의 능력 부족은 곧 전체의 일정을 무너뜨렸다.

그가 무능하거나 실력이 없는 친구는 절대 아닙니다. 친우를 고발한 남자가 울먹이는 눈으로 말한다. 같이 학교를 다니던 시절 그는 우리 중 가장 독창적인 제안자였어요. 하지만, 명확한 납기일이 존재하는 업계에서는 다른 게 요구되었을 뿐입니다. 그는 무슨 일이든 맡은 바 일정을 맞추질 못했어요. 우리들 외의 다른 사람들과 교류 또한 전혀 못했죠. 조율을 맡겼을 때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지 않으면 다행이었지요. 그건, 그런 쪽으로는 재능이 없었던 거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는 재능이 없었어요. 그런데도 우리는 그를 팀에서 제할 수 없었죠. 시작부터 함께 해온 친구라는 이유 하나로 말입니다.

그도 알고 있었을 거에요. 다섯이서 처음 계획을 세울 때부터 그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었죠. 달에 도착하는 날 그 자리에서 축하의 티파티를 열자. 차를 마시면서 다함께 춤을 추는 거야. 질리지도 않게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언젠가부터 그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더군요. 다른 사람이 웃으며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내도 시선을 돌리고 반응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가 팀의 발목을 잡고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죠. 다만 누구도 나쁜 사람이 되기 싫었던 겁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 나쁜 사람이 되었군요.

저희는 달에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내부 고발은 쏟아지는 눈물로 얼룩진 사과로 끝났다. 다시 재생할까요? 눈치없는 프로그램이 그처럼 묻는다. 기사에 첨부된 영상이 끝난 뒤에도 에나는 화면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느 새 귀에 꽂았던 이어폰을 천천히 빼내는 손이 약하게 떨렸다.

“에나, 뭘 보고 있는 거야?”

“......어? 아아, 오늘 찍은 사진 반응이 얼마나 왔으려나 확인해봤어. 역시 다들 이 가게 몽블랑에 관심이 많았구나.”

“그래, 그런 거라면 다행이다. 기분 전환 하려고 나왔으니 제대로 충전해서 돌아가는 게 좋아.”

“맞아. 엄청 기대했다구. 마지막 한 입까지 만끽하지 못하면 무조건 손해야. 그렇지, 한 입 먹는 모습도 사진 찍어야지. 아이리, 도와줘-”

“알겠어.”

왜 이렇게 속이 답답하지. 그림 계정에 새로 올린 작품에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을 때보다 훨씬 더 괴롭고 짜증나.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왈칵 울음을 터뜨리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며 에나는 미소를 지었다. 자아, 모두가 탐내는 계절 한정 몽블랑이야. 이렇게 예쁘게 한 조각 잘라서, 당장이라도 한 입 베어먹을 듯한 구도로 사진을 찍어야지. 분명 귀여울 수밖에 없어. 이쪽으로 단말기의 렌즈를 향하고 있는 아이리에게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에나는 필사적으로 즐거움을 위장했다. 찰칵- 녹음된 셔터 소리가 재차 울린다.

“아아- 즐겁네. 기대한 대로야.”

“에나......”

“당연히, 즐겁지.”

손가락이 ‘등록’ 이라 쓰여진 글자를 누른다. 사진이 업로드되고, 따로 설정해둔 커스텀 알림음이 경쾌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좋아요’ 가 하나, 둘, 그리고 잔뜩.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깊어질 뿐인 바닷물을 들이키며 에나는 힘없이 웃었다. 잘라둔 몽블랑 조각을 입에 넣고 씹는다. 기대했던 달콤함 대신 어째서인지 비참함과 닮은 떫은 맛이 났다.


<맞아, 그러고보니 신기록을 세운 곡이 올라왔었다던데. 백색장미세계선이란 시리즈를 냈던 그룹의 곡이랬나?>

<응. 굉장한 조회수로 처음부터 2단계 전당부터 시작했다고 화제였어. 근데......>

<시작부터 2단계? 그런 게 가능해? 업로드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 요건을 충족했단 말이잖아?>

<그러니 화제가 된 거겠지? 유키는 들어봤어?>

<아니, 참고가 된다면 지금 찾아볼게.>

어차피 작업의 진도도 막혔던 터라 에나는 캔버스 프로그램을 대기줄로 내리고 영상 공유 사이트를 열었다. 굳이 검색을 할 필요도 없이 인기 영상 일람에 방금 이야기 나온 곡이 올라와 있는 게 보였다. 업로드 날짜는 불과 며칠 전인데 찍혀있는 조회수의 단위가 오류가 아닌지 의심될 지경으로 높다. 얘네 사용해선 안될 프로그램이라도 쓴 거 아닌가. 전체적인 스타일이 다른 편이라 영역이 겹치는 편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같은 분야에 있는 상대이다보니 뾰족한 경쟁심이 생기고 만다. 에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도대체 얼마나 잘 만들었길래 그러는 거람.

영상을 클릭하고 잠깐의 시간이 흐른다. 찌푸려졌던 눈썹에 힘이 빠졌다가, 다시금 찌푸려진다. 뾰로통한 기색이 강했던 표정은 순수한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눈은 흘러가고 있는 영상을 따라가며 깜박임조차 잊는다. 하지만 귀는, 솔직히 흥미를 잃어버린 상태다. 들리는 음에 더 이상 뇌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건조해진 눈을 깜박이고는 에나는 나이트코드의 상태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누구도 별다른 말은 하고 있지 않다. 정확히는, 뭐라 이야기를 꺼내기 애매한 걸지도.

<이거, 곡은, 뭐라고 해야하나......>

<음악이 허접하네.>

<와, 와아. 유키, 표현이 강해.>

<Amia도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니야? 주가 되는 멜로디가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분량만 늘이기 위해서 반복되는 파트를 너저분하게 연이어 붙여뒀어. 곡 길이로 보아 후크송을 만들 생각도 아니었을 건데. 상승의 이미지를 그리고 싶은 건지, 아래로 추락하는 이미지로 끌어가고 싶은지도 불명확해. 어디선가 들어본 음을 헝겊처럼 기워둔 결과물을, 허접하다고 말해선 안 돼?>

<그건, 아무래도 명성에 비하면 이번 곡이 다소 초라하긴 하네. 저 그룹의 작곡 담당이 기복이 심한 편이라고 하더라구. 이번엔 아무래도 시기가 나빴던 거려나. 조회수는 많이 나왔지만 그에 비하면 ‘좋아요’ 수는 상대적으로 낮으니 세간의 평가도 냉정하단 말이겠고.>

<최근은 ‘좋아요’ 의 수치도 집계에 반영한다고 했었지. 멋진 기록을 세웠는데 전당 입성 이상은 가기 어렵겠네......>

<에헷, 그럼 이번 분기 명예 전당 기록은 우리 25시가 받아가도록 할까!>

Amia의 야심찬 선언에 K만 응해준다. 그렇게 될 수 있게끔 열심히 하겠다는 K의 말에 조회수보다 더 중요한 게 있지 않느냐는 유키의 서늘한 핀잔이 콕 이어진다. 친구들이 제각기 떠드는 동안 에나는 말없이 예의 영상을 다시 재생하였다. 이상한 일 아닌가. 누가 들어도 별로인 곡에, 어떻게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인 걸까. 개인이 가볍게 행하는 클릭 따위 어떠한 무게감도 없을 듯 싶지만, 깃털도 쌓이면 선반을 무너뜨린다. 수치로 계산되는 조회수는 명확한 척도가 되는 거다. 현대 사회의 인터넷 기반 서비스 중 그 척도를 무시할 수 있는 사업은 단 하나도 없다. 그 정도로 무게감을 가진 지표가 내리는 결론은 유권적인 판결이나 마찬가지다. 판결문이 이미 확정된 사안에 대해 심문을 반복한다. 어떻게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였다고, 그대는 생각하는가?

“......”

사실은 이유를 알고 있다. 하지만 인정하기 싫다. 죽을 만큼 싫다. 손끝을 파르르 떨면서 에나는 스크롤을 내렸다. 어마무시한 조회수에 비례하여 수많은 댓글들이 창을 채운다. 이번엔 다소 아쉽지만 다음을 기대한다는 솔직하면서도 응원을 잊지 않는 반응들 사이로, 보다 날것의 의견들이 박혀있다. 곡이야 어떻든 이 그룹의 일러스트는 항상 최고니까 말야. 나도 아트워크를 보러 들어왔단 느낌이려나. 이 그룹 일러스트 담당 선생님은 항상 대단하시지. 그림을 감상하는 동안 곡이 흘러나온단 기분으로 접하면 충분히 좋아. 분위기 좋은 아트 갤러리를 거니는 감각으로. 그림만으로도 이 영상은 가치가 있어.

“......아, 아아.”

그림이 좋을 뿐이라고? 그럼 뭐야. 오로지 그림으로 인해- 그림이 탁월하단 이유 하나로 이 영상이, 단시간 내에 우리가 올렸던 영상보다 배는 차이가 나는 관심을 받았단 거야? K가, 카나데가 만드는 곡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할 이런 음악이, 전하고자 하는 마음도 그를 표현하려는 노력도 없이 구색만 맞추려고 든 음악이, 그저 감싸고 있는 표지가 좋다는 이유로 이토록 세간의 주목을 받았단 게 정당해? 누구 책임인 거지? 누구 탓으로 카나데가 이런 녀석들보다 ‘수치 상으로’ 인정을 덜 받게 된 거야?

“......나는, 나는......”

영상이 반복된다. 음소거가 걸려 함께 나오는 음악이 사라지더라도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발하는 아트워크들이 직사각형 창의 무대 위에서 춤을 춘다. 선의 예술, 색채의 마법. 그 자체로 완결되는 완전성을 가진 미를 확보한 그림은, 자격 미달의 음악조차 그 존재 가치를 인정해주며 고결한 성모처럼 품어준다. 그 광경은 어쩔 수 없이 만약을 생각하게끔 만들어버린다. 저 흠잡을 곳 없는 아트워크가 그에 걸맞는 훌륭한 곡을 장식하고 있었다면. 비상을 바라는 소녀에게 제대로 된 순백의 날개를 달아줄 수 있었던 거라면.

작업 중이었잖아. 딴짓하고 있지 말자. 한순간이라도 빨리 완성해서 그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거야.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움직여 에나는 마우스를 끌어내렸다. 대기줄에 내려뒀던 캔버스를 활짝 펼친다. 아직 구체적인 형상조차 취하지 못한 흔적이 하얀 여백 위를 달리고 있다. 순간 반사적으로 핫-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이게, 유키가 가사를 쓰고 K가 그를 바탕으로 만든 곡을 감쌀 그림이라니. 간결명료하면서도 절박함을 넘치게 담은 훌륭한 문장과 그를 보듬고 응원하는 구원의 선율을 감히 상징하겠다고 나서는 형상이라니. 그 아이들이 만드는 세계를 따라가지 못해서 간신히 발버둥을 쳤을 뿐인 결과물 주제에.

저희는 달에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으읍.>

<무슨 소리?>

<에나낭? 무슨 일이야?>

<왜 그래?>

쓰고 있던 헤드셋을 집어던지고 뛰쳐나간다. 목을 치밀고 올라오는 구토감을 억누를 수 없었다. 화장실 문을 닫아걸고 변기를 붙든 채 에나는 비명을 질렀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이를 악물며 견뎌냈던 기억들이 허락도 없이 쏟아져나왔다. 너에게는 그림의 재능이 없다. 본교 미술과의 입학 후순위 대기자로 배정되셨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지. 이번에는 아쉽지만, 시상 내역에 들지 못하셨습니다.

“우윽, 흐으으윽.”

그 아이들은 곁을 지키며 계속 지켜봐주겠다고 했어. 내가 그리는 그림이 좋다고 말해줬어. 그 애정, 그 온기, 모두 진짜였다는 걸 알아. 너희들 곁에서는 천천히라도 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치만 그게 그저 나의 이기심에 불과한 거라면? 너희들은 나보다 훨씬, 훨씬 더 뛰어나잖아. 그처럼 대단한 너희들이 날 좋아해준단 사실이 기뻐. 하염없이 눈물 지을 만큼이나 기뻐. 하지만 어째서야. 너희가 그리는 세계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내가 너희의 인정을 받아도 좋은 걸까?

내가 아니라 너희들만큼이나 탁월한 그림 담당이 멤버로 있었어야 마땅한 게 아니었을까. 그 사람은 분명 어려움 없이 너희들이 말하는 세계를 캔버스 위에 표현해줬을 거야. 호불호조차 꺼내들 수 없을 압도적인 결과물. 같은 타블렛과 프로그램으로 그려졌을 작품은 옅어지는 슬픔 속에 피어오르는 위안을 숭고하게 묘사하겠지. 하나의 감정마다 가장 걸맞는 하나의 색채를. 한 소절의 가사는 별이 되고 흐르는 곡조는 깊은 밤하늘이 되어 하나의 곡은 오롯한 천체를 그려낼 거야. 작게 걸려있는 표지만으로도 매혹되어 찾아온 이들 모두가 이어지는 선율에 감동받을 게 분명해. 지금보다 몇 배는 많은 사람들이 곡을 들어줄 거고, 그들 모두가 K의 탁월한 재능에 대해 감탄하고, 감화되겠지.

“흑, 흐윽......알고 있었잖아. 알고 있었으면서......최악, 최악이야......”

알고 있었기에 더 매달리려고 했다. 다른 누구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좋아. K가 나를 봐주고 있어. K, 나를 인정해주고 손을 잡아줬던 K. 그걸로도 충분해. 그 사실에서 필사적으로 행복을 얻으면서, 나이트코드의 멤버로서 자신을 당연하게 생각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면 조금씩이나마 나아질 거니까 언젠가는 목표에 닿을 거라는, 현실도피라고 부르는 게 알맞을 목표를 걸어놓고 안주하고 있었다.

“내가, 모두의, 카나데의 발목을 잡고 있는 거야......”

절망의 무게가 그대로 죄책감으로 변모한다. 주저앉은 채로 소녀는 흐느낌을 삼켰다. 비참했다. 몇 년 전 아비로부터 폭거나 다름없는 판결을 받았을 때보다도 비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저 가장 처음 K의 눈에 들어왔을 뿐인 그림쟁이. 그 일생일대의 행운을 두고 스스로의 능력이라고 한껏 착각하며 영광의 자리를 찬탈한 범재. 친구들의 상냥함에 기생하여 자신을 위한 낙원을 그리는 비겁자. 고작 그런 수준 밖에 되지 않는 주제에.

사랑은 희생조차 불사하는 마음에서 피어난다고 했던가. 한동안 자신은 K의, 요이사키 카나데의 하염없는 애정을 받으며 지냈다. 그녀가 만들어준 울타리 속에서 냉정한 현실을 잊고 즐겁게 웃을 수 있었다. 그래서는 안되는 거다. 더 이상 고개 돌려 부정할 수도 없게 되었다면, 이번에는 자신 쪽이 희생을 할 차례다. 희생하여 지금껏 받은 애정에 보답하는 게 소중한 이를 위하는 도리이겠지.

여기서 그만두자. 모두에게 이 이상 폐 끼치지 말고. 화장실 천장을 힘없이 올려다보며 에나는 입고 있는 옷의 소매를 쥐어뜯었다. 충격과 그로 인한 상처 속에 잠긴 채로 떠올리는 생각은 끝없는 나선을 그리며 아래로 떨어지기만 할 뿐이다. 서글픔과 분노, 절망과 체념이 반복해서 거무튀튀하고 새까만 색채로 심상을 채운다. 누군가가 진심을 담아 위로를 건네며 극단적인 생각은 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하더라도 소녀는 그를 거부하고 스스로에게 벌을 내리려고 하겠지. 부정의 감정으로 단단하게 세운 감옥 속에 갇혀서.

“......하아.”

휴지를 뜯어 입가를 닦아낸 뒤 쓰레기통에 던져넣는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에나는 벽면을 짚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갓 태어난 새끼 사슴마냥 후들거리는 다리로 걸음을 옮기다가, 화장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다. 방으로 돌아가는 얼마 안되는 거리 동안 에나는 자신에게 내리는 처벌안을 써내려나갔다. 지금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하지만 대놓고 말해서는 안될 거야. 착한 친구들은 분명 자신을 붙잡아주리라. 그들의 위로가 전해주는 온기에 결심은 약해지고 말겠지.

나쁘기만 한 건 아냐. 여전히 목표는 쫓아갈 수 있어.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는 화가가 되는 게 목표잖아. 고독함을 벗 삼아 독기 속에서 계속 그려나가자. 가속도가 붙을 때까지. 새로운 인재를 받아들여 친구들 또한 한층 빠르게 달려나갈 수 있을 거야. 그래, 이건 어쩌면 하나의 기회일지도. 좀 더 본격적으로 프로의 작업 세계에 대해 독자 연구를 하자. 모든 시간을 개인 그림을 위해서만 쏟자. 언젠가 다들 이해해주겠지. 그때에 다시 친구로 연락을 이어갈 수 있을지도 몰라.

이번 작업까지만 마무리 짓는 거다. 지금까지 인정해주고 아껴준 마음에 대한 보답으로, 감사를 담아 마지막이 될 그림을 완성하리라. 그러면서 대신 자리를 채워줄 사람을 찾으면 된다. 아무나 받아들일 수는 없지. 엄격한 잣대와 기준으로 사람을 골라서, 자신은 오롯하게 채우지 못한 공백을 부탁하자. 그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 모두를 위해 옳은 길이야.

<돌아왔어. 갑자기 미안해. 낮에 먹은 몽블랑이 조금 안 좋았나봐.>

<저번에 말했던 계절 한정 몽블랑? 사진으로 보기에도 양이 제법 되던데 억지로 다 먹은 건 아니지?>

<으윽, Amia 여전히 쓸데없이 예리하네. 확실히 약간 무리했어. 후우, 오늘은 조금 일찍 들어갈게. 상태가 별로야.>

<푹 쉬어, 에나낭. 오늘도 수고했어.>

<고마워, K......>

그 아이의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간신히 다잡은 마음의 결심이 볼품없이 흔들린다. 카나데,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고 말해줘. 나로도 충분하다고 말해줘. 그렇게 갈망하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워 에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혹여나 자신의 추한 면모가 회선을 통해 공유될까 싶은 기분에 소녀는 서둘러 모든 프로그램을 종료했다.

내일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자.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며 에나는 멍하게 생각했다. 부족함을 눈감아주고 포근하게 안아주는 그룹 내에서 자격없는 안온함을 누리며 백일몽에 빠져 시간을 보내지 말고, 매순간 뼈를 깎아내는 고통을 견뎌내며 자신의 한계를 마주하자. 이제부터 제대로 혼자서 걸어가는 거야. 다짐을 삼키고는 소녀는 눈을 감았다. 차올랐던 눈물이 귓불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최악의 슬럼프였다. 구체적인 방향성도 잡지 못한 상태로 시노노메 에나는 선 하나조차 확신을 가지고 그리지 못했다. 러프조차 나오지 않아 나이트코드의 멤버들에게 진행 상황에 대해 보고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에나의 그림이 보고 싶다며 살랑살랑 웃어대던 Amia도 곧 기묘함을 눈치챈 건지 어느 순간 말을 아꼈다. K도 중간 보고를 독촉하지 않는다. 거기에 안도하면서도 에나는 절망감을 느꼈다. 스스로의 부족함이 지긋지긋할 지경이었다. 역시 난 카나데의 곁에 있을 자격이 없어. 수도 없이 그를 중얼거리며 에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진도가 나가지 않는 걸 끝도 없이 붙들고 있어도 의미없으니 개인 그림이라도 그리는 게 좋을까. 탈출구를 갈망하며 시도한 길은 더한 가시밭으로 이어진다.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오로지 펜을 붙들고만 있어도 ‘이 정도면 나름 노력했다’ 고 자평할만한 결과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멋모르고 미술과가 있는 유명 고등학교로 진학할 꿈이나 꾸고 있던 중학생 시절의 자신이 훨씬 있어보이는 그림을 그렸을지도. 자괴감이 지나칠 정도로 차올라서 에나는 오히려 웃어버렸다.

“오늘도 밤샜냐.”

“꺼져.”

“......뭔 말을 못 걸겠네.”

다른 누군가와 마주치려고 방 바깥으로 나온 게 아니다. 목이 말라서, 미쳐버릴 정도로 갈증이 심해져서 뭐든 좋으니 마시기 위해 부엌으로 나왔을 뿐이다. 등교 준비를 하고 있는 동생, 시노노메 아키토가 말을 걸어오는 상황 자체가 짜증나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쏘아붙인 뒤 에나는 냉장고를 열었다. 오렌지맛 영양 젤리팩을 집어들고 뚜껑을 연다. 차갑고 달콤한 액상 젤리가 혀를 적시는 게 기분 좋아서 에나는 굳었던 얼굴을 약간이나마 풀었다.

“무슨 일 있었지.”

“없어.”

“온종일 독기 오른 얼굴로 있는데 잘도 그렇겠다.”

“흥, 그게 나빠? 독기 오르지 않고서 해낼 수 있는 일 따위 없는 세상이야.”

“독기 외에는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으니 문제라고. 매번 죽을 상이긴 했어도 적어도 눈이 죽은 적은 없었잖아.”

“......네가 상관할 일 아니야. 학교나 가.”

무언가 더 말하려고 하다가, 손바닥을 신경질적으로 내저으며 차갑게 거부 의사를 밝히는 누나를 보며 아키토는 입을 다물었다. 목을 적신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이상 더는 볼일이 없었으므로 에나는 동생을 남겨두고 방으로 돌아왔다. 알지도 못하면서 시건방진 소리를 하고 있어. 뒤늦게 울컥 감정이 솟아오르려고 했으나 에나는 그를 되삼켰다. 동생의 지적에 짜증을 낼 기력도 없었다. 눈이 죽었다니, 그렇게 보이는 건가.

무너지듯 침대에 누우며 에나는 이불 사이로 던져둔 단말기를 집어들었다. 전원 꺼진 액정에 그녀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탁하게 풀린 동공을 마주하고 있다가 전원을 켠다. 새로운 알림이 도착했다는 표시가 셀카 업로드용 SNS 아이콘 위로 깜박이고 있었다. ‘좋아요’ 잔뜩 들어왔나보다. 조금도 흐뭇하지 않은 수확을 습관적으로 확인하려고 하다가 에나는 움직이려는 손가락 끝을 멈춰세웠다.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대신 25시의 그림을 담당해줄 사람을 구해야만 하였다. 무너지고 바스라진 끝에 마지막으로 남은 책임감이 소녀의 의식을 내리눌렀다.

“......그림, 또 새로 올렸네.”

에나 자신의 그림 계정이 있는 SNS에는 창작 활동을 위주로 게시글을 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개중에는 프로인 이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화제가 되었던 영상, 백색장미세계선 시리즈의 아트워크를 담당했던 작가 또한 계정을 개설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붙들고 있는 작품 외에도 짧은 주기로 가볍게 그린 그림들을 올려 사람들의 반응도 좋은 편이었다. 오늘도 아침부터 그림 몇 점을 올린 모양이었다. ‘다음 작품 준비로 바빠지기 전에, 가볍게 낙서 몇 장-’. 별 무게감 없이 쓰여진 문장 아래로 그림들이 이어진다.

이걸 낙서라고 부르면서 올리다니, 그건 겸손이야? 아니면 도발? 조롱하는 거지? 피를 쏟아내는 심정으로 선을 긋고 색을 칠해나가도 이런 걸 그리지 못하는 사람 앞에서 이런 수준은 낙서에 불과하다며 살랑살랑 흔들어대는 거잖아. 단말기를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 속에서 간신히 이성을 유지하며 에나는 화면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질투 속에 스스로가 초라하고 비참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그들의 그림. 그린 본인은 낙서라고 명명한 아트워크들이 재능의 차이를 여실히 실감하게 만드는 칼날로 변해 소녀의 폐부를 깊게 찌른다. 한 차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에나는 킥킥 웃음을 쏟아냈다. 유키, 아사히나 마후유의 재능이 부럽긴 해도 그녀가 싫지는 않았던 이유를 이제서야 깨닫는다. 그거야 그 아이는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었으니까. 잔혹할 정도로 가시적으로 재능의 차이를 눈앞에 들이밀지는 않았으니까.

“잘났어, 정말. 잘난 사람 옆에는 잘난 사람들만 모인단 거지. 대화하는 사람들도 전부 유명한 작가들 뿐이잖아.”

다음 작품도 응원한다는 댓글들이 수두룩하게 달리지만 작가가 답해주는 건 마찬가지로 이 바닥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이들에게로 한정된다. 그 중에는 에나가 이전부터 주목하던 그림 작가도 있었다. 에나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예술 세계를 한 발 먼저 완성해낸 게 아닐까 싶은 사람이었다. 그 뒤를 따라가고 싶어서 몇 번이고 그가 올리는 그림을 살펴보곤 했었지. 서로 아는 사이였구나. 주고 받는 대화를 훑어보며 아랫입술을 잘근 씹다가 문득 에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25시의, 자신들이 올린 영상의 링크가 게시되어 있다. 정말로 훌륭해서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는, 절절한 멜로디가 마음 속으로 스며든다는 찬사가 해당 작가의 게시글로 이어졌다. 칭찬은 어디까지나 곡과 가사에 한정되어 이어질 뿐이었으나 그럼에도 에나는 K의 곡과 유키의 가사가 유명인들 사이에서도 인정받고 있단 사실에 옅게나마 행복감을 느꼈다. 길게 이어지는 찬사는 자그마한 부러움으로 맺어지고 있었다. 자신도 이런 식으로 그룹 활동을 해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게 남겨진 글 아래로 백색장미세계선의 그림 작가가 답을 잇는다. 해보면 좋은 경험이 될 거야.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협업하는 게 생각 이상으로 즐겁거든. 기회가 된다면 꼭 해봐.

“......”

성실하게 활동하는 사람이라는 건 지켜봐온 시기가 있기에 알고 있다. 작품 세계도 기존 25시의 스타일에 잘 맞는 편일 거고. 나이대는 20대 초반. 멤버들보단 나이가 많긴 하지만 심하게 괴리가 생길 정도는 아닐 거야. 성별은 여자라고 했었지. 직접 만나본 적도 없기에 속단할 수는 없지만 선을 지키는 진중함과 말을 고를 줄 아는 신중함은 있어보여. 괜찮으려나. 사실 이 이상의 조건을 갖춘 상대도 달리 없을 터.

단말을 들고 있던 팔이 풀썩 무너져 침대 위를 나뒹굴었다. 끈 풀린 인형과도 같은 자세로 누워 에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머리가 멍했다. 졸음과는 다른, 불쾌한 피로감이 전신에 들러붙었다. 아아, 이대로 침대가 나를 집어삼켜버렸으면 좋겠다.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렇게 한탄을 삼키다가 소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뒤로 미루지 마. 지금 쪽지를 써서 보내. 각오했던 거 아니야?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건 시노노메 에나 자신이었지만, 시노노메 에나 자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25시 나이트코드의 그림 담당을 맡고 있는 사람이라는 간결한 자기소개와 그를 입증할 첨부 자료로 서두를 열고, 일신 상의 사정으로 활동을 계속 이어나가기 어렵게 되었다는 설명과 함께 폐가 되지 않는다면 자리를 이어받아줬음 좋겠다는 부탁으로 여백을 채워나간다. 몇 번이고 내용을 확인한 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신을 누른 다음, 에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뜨뜻한 습기가 손바닥을 적시는 게 느껴졌다.

<연락 감사합니다. 상황은 이해했어요. 하지만, 그래도 괜찮으신 건가요? 지금까지 다른 분들과 함께 쭉 해오셨던 거잖아요.>

“괜찮을 리가, 없잖아......”

흐느낌 속에서 흘러나온 비명은 나지막했다. 괜찮을 리가 없잖아. 이건 카나데와 나의 인연이야. K가 내게 약속해준 자리라고. 다른 누군가에게 이 자리를 내주고 싶을 리가 있겠어. 그럼에도, 달에 닿을 능력이 없는 자신이기에, 이렇게 해야만 하는 거다. 괜찮아요. 부탁 드릴게요. 당신이 제가 감히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채워주세요. 그리하여 제 소중한 친구들이 언젠가 달에 도착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정리되지 않고 흘러넘치는 생각을 간신히 규격에 맞춰 언어화하여 사리에 맞게 써넣는다. 그 모든 과정이 소녀에게는 지독한 자학으로 느껴졌다.

연락은 K에게 하길 부탁한다고 말하며, 그 아이의 연락처를 남긴다. 잠시 공백을 두고 있다가 그렇게 하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걸로 됐다. 잘 끝난 거야. 생각하며 에나는 웃었다. 그 이외의 생각은 떠올릴 수가 없었다. 대신해줄 사람을 구하게 된다면 그 아이들에게 사과하고,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 뒤 물러날 계획이었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할 거란 사실을 에나는 깨닫고 있었다. 실은 처음부터 잠적할 마음이 아니었던가. 이제 이 사람이 나 대신 너희들과 같이 해줄 거야. 그러니 안녕. 내가 언젠가 성공하기 전까진 연락하지 말아줘.

“......이제 내 그림에만 집중할 거야. 죽을 각오로 그리자.”

세카이에도 이제는 가선 안되겠구나. 이 순간부터 그 곳은 내게 허락된 공간이 아니야. 미쿠에게, 린에게 작별인사라도 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렇게 하는 순간 필시 자신은 무너지고 말겠지. 기기에서 세카이로 향할 수 있는 길을 막아버리고 에나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괴로울 정도로 졸음이 밀어닥쳤다. 자고 일어나면, 이젤을 세우고 캔버스를 걸어야지. 괜찮아, 앞으로 미술 도구를 사러갈 때 외에는 외출도 하지 않을 거니까. 그래, 만만한 세상이 아냐. 독기를 품지 않고는 무엇도 해낼 수 없는 세계. 난 결단을 내렸어. 그런 문제일 뿐이야.

잠든 소녀는 악몽을 꾸었다. 더 높이 날아 밤하늘의 달에 도착하기를 원하는 파랑새가 몸을 가볍게 해야한단 강박 속에 자신의 깃털을 뽑아내고 마침내는 소중히 생각하던 날개를 잘라내는 꿈이었다. 날개를 잃은 새는 피투성이 후회 속에 아래로 추락한다. 떨어지고, 떨어져서......


시간의 흐름을 제대로 인지할 수 없었다. 창문 밖이 밝아졌다가 어두워졌고, 피할 수 없는 일정에 맞춰 학교를 다녀오기도 했으나 무감각하게 생활을 반복하는 일과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길게 이어지는 시간 기록표에서 기점으로 삼을 자신의 행위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기에 감각은 끝없이 공허 속을 방황하였다. 어제와 다를 게 없는 오늘을 보내고, 하루의 끝에 오늘보다 나을 거라 기대할 수 없는 내일을 맞이한다.

무의미한 삶 속에서 유의미한 결과물이 나올 리 없겠지. 몇 시간 전 신경질적으로 앞면을 찢어버렸던 캔버스를 이젤에서 내려놓고서 에나는 자신이 끝장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얼핏 하였다. 말라붙은 목 너머로 삼키는 침에서 괴로울 만큼 씁쓸한 맛이 났다. 실력이 붙을 때까지 반복하면 된다고 쉽게들 말하지만, 진창이나 다름없는 바닥을 더듬고 있는 입장에서는 그 반복의 과정에서 어떠한 확신도 가질 수가 없는 법이다. 한 발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미로의 출구를 찾는 일과 다를 게 없다. 제대로 노력해서 나아가고 있는 중이야. 그렇게 따스하게 말해주는 등불이라도 있다면.

“......생각하지 않기로 했잖아.”

독기를 품어. 오로지 혼자만의 힘으로 절벽을 기어올라갈 거라는 독기를. 빠드득- 소리가 날 지경으로 어금니를 깨문 다음 에나는 손바닥을 들어 스스로 뺨을 후려갈겼다. 눈물이 핑 솟아오를 정도의 고통에 정신이 약간이나마 명료해진다. 입안에 옅게 번지는 피맛을 삼키고는 에나는 다음 캔버스를 이젤에 올렸다. 무엇을 그릴 건지 구체적으로 떠올린 건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손을 멈춰선 안될 터였다.

단말이 진동하는 소음이 방 안에 울린다. 흠칫 놀라며 에나는 침대 쪽을 돌아보았다. 나이트코드 프로그램을 지워버리고 잠적한 이후 단말은 쉴새없이 메신저를 통해 연락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그를 확인할 엄두를 내지 못하면서도 에나는 멤버들의 연락처를 차단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내심 기대했던 걸지도 모른다. 사라지길 택한다면 애들이 그런 자신을 붙잡아 줄 거라고. 역시 날 찾아주는구나. 소중한 이들의 염려를 재료 삼아 환희하는 내면의 자신이 너무나 혐오스러워 에나는 쌓여가는 연락에서 어떻게든 시선을 돌려왔었다.

“......카나데?”

이제는 새로운 멤버가 그룹에 발을 들였으리라. 그렇게 만든 건 자신이지만 그를 확인해주는 소식을 듣고 싶지는 않다. 연락이 도착했다는 신호를 마주하기만 하여도 마음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어, 단말의 전원을 아예 꺼버리려고 하다가 에나는 손을 멈췄다. 미리보기로 짧게 노출되는 문장은 하염없이 걱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다. 눈을 깜박이다가, 신호가 가지 않게끔 연결된 데이터를 끊고서 에나는 메세지를 확인하였다.

<오후 4시부터 여름 축제 때 갔었던 공원의 입구에서 기다릴게. 오늘은 학교 가는 날이 아니지? 에나가 올 때까지 계속 기다릴 거니까, 꼭 와줘.>

그리 길지 않은 문장을 몇 차례나 다시 읽고서 에나는 이마를 움켜쥐었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하지. 나가기 싫어. 지금 이 상태로 카나데를 마주하고 싶지 않아. 상냥하게 위로해주는 말을 들을 용기도, 책임감 없다며 질책하는 말을 마주할 각오도 없어. 자리를 떠맡기고 도망친 건 자신이지만, 그 자리가 더 이상 네 것이 아니라는 확언을 카나데로부터 듣는다면 견딜 수 없을 거야. 하지만 카나데, 계속 기다릴 거라고 말했잖아. 오늘처럼 햇빛 강한 날 아무리 오후 시간대여도 바깥에서 계속 기다리는 건 몸에 무리가 갈 건데.

시계의 시침이 12를 가리키고, 뒤이어 1에서 멈춘다. 2를 거쳐서 마침내 3을 향해 나아간다. 그 시간 동안 에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끝도 없이 고뇌했다. 자신을 불러낸 카나데가 무슨 이야기를 할 건지 예측이 되면서도 동시에 조금도 감이 잡히지 않아 에나는 미칠 것만 같았다. 시뮬레이션 속에서 자신은 사과하고, 흐느껴울고, 화내고, 마침내는 카나데의 소매를 붙들고 늘어져 애원하고 있었다. 한동안 계속해서 차올랐던 자기 혐오가 극에 달해 에나는 몸을 뒤틀며 말라붙은 신음을 흘렸다.

시침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미 3을 벗어난 시침이 4를 향하는 중이다. 에나가 올 때까지 계속 기다릴 거니까. 카나데의 메세지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카나데, 정말로 계속해서 날 기다려줄 거야? 내가, 재능 없는 내가 한참을 늦게 너희들의 뒤를 따라가더라도 기다려주는 거니. 지금은 괜찮더라도, 나중에는 다들 후회할지도 모르잖아. 재능없는 동료를 단지 인연으로 이어진 관계라는 이유 하나로 잘라내지 못하고 곁에 둬서, 그로 말미암아 꿈꾸던 모든 걸 놓치게 된다면.

“......아.”

무거워진 눈꺼풀을 잠깐 감았다가 뜨면, 방은 이미 어두워진 이후였다. 커튼을 열어둔 창으로부터 오후의 햇빛이 비쳐들지 않는 상황에 의아해하다가 에나는 튕겨오르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지금 몇 시야, 몇 시인 거야. 정신없이 조명을 켜고 시계를 들여다본다. 8에 가까이로 다가가는 시침을 확인하고서 에나는 거의 앞으로 구르듯 문으로 향했다. 자고 일어나 부스스한 머리를 손질할 생각도, 외출용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는 생각도 떠올리지 못한다. 캔버스화를 구겨신고서 현관 밖으로 뛰어나간다.

카나데, 아직까지 기다리고 있을까. 정신없이 달리며 에나는 생각했다.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카나데라면 몇 시가 되더라도 약속한 그대로 기다리고 있을 거란 확신이 마음 한켠에 자리하고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엄청난 실수를 해버린 거다. 바깥 외출에 익숙하지 않을 애를 얼마나 기다리게 만든 거야. 전력으로 달리는 일에 몸이 익숙하지 않은 탓에 숨이 목끝까지 차올랐으나 에나는 멈추지 않았다. 앞으로 나뒹구는 한이 있더라도 멈출 생각은 없었다.

공원의 입구, 한쪽으로는 산책하기 좋은 언덕길로 이어지고 다른 쪽으로는 야외 광장으로 이어지는 분기점의 장소. 뒤편으로 야외 주차장으로 뻗어지는 길목에 서 있는 하얀 머리카락의 소녀가 보인다. 다른 생각을 떠올릴 겨를도 없이 에나는 그 아이의 앞으로 달려나갔다. 멈춰서는 순간, 그 아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 순간 안도감과 미안함이 박동하는 심장을 통해 전신으로 흘러넘쳤다. 주저앉으려는 몸을 간신히 추스려 에나는 비틀비틀 앞으로 걸어나갔다.

“에나!”

“미, 미안해. 하아, 나, 엄청 늦었어. 후우, 카나데가, 기다리고 있단 거, 아는데도......”

“괜찮아. 와줄 거라고 믿고 있었으니까.”

“흐윽, 카나데......”

꼴사나운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눈물부터 쏟아지는 걸 어찌 막을 수가 없었다. 와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는 그 말 한 마디가 좋아서, 카나데의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안심해버리는 자신이 있어서 눈물이 멎지를 않는다. 언제나의 청남색 져지 차림을 하고 모자 하나만을 눌러쓴 채 몇 시간을 기다렸을 그녀가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소리내어 엉엉 울면서 에나는 카나데가 이끄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흘끗 따라붙지만 거기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에나가 와줘서 기뻐. 나와줄 거라고 믿었지만, 만에 하나 나오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도 했거든.”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아, 큰일이다. 에나가 와줘서 너무 안심했나봐. 어떤 식으로 마음을 전하는 게 좋을까 많이 생각해뒀었는데, 말하기로 해둔 게 하나도 기억나지 않네.”

“카나데......”

“그치만 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어. 하나는 생각났다. 에나랑 같이 이걸 듣고 싶었어.”

길가의 벤치에 앉아서 카나데는 자신의 단말로 연결된 이어폰 한 쪽을 에나에게 내밀었다. 조심스레 그를 끼고는 카나데의 곁에 앉는다. 저번처럼 카나데가 작곡한 곡을 들려주려는 걸까. 카나데는 복잡한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더라도 마음을 담은 선율로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전할 수 있는 아이니까. 그렇게 생각하기도 잠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고서 에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잘 알고 있는 노래, 이제는 이런 식으로 듣는 게 어색하지 않은 목소리.

“이거......”

“기억해? 같이 활동하기 전, 내가 업로드했던 곡을 에나가 불러줬던 거야. 그때의 감상을 에나에게 제대로 전한 적이 없었던 거 같아서.”

“그, 그랬었나? 내가 멋대로 노래 불렀다며 올렸던 거니까......”

“나, 듣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위안을 주는 곡을 만들기로 했지만 처음엔 확신이 들지 않을 때가 많았어. 과연 내가 만드는 곡이 힘을 줄 수 있을까. 오히려 상처를 입히는 건 아닐까. 음은 나름 다듬어서 듣기에는 나쁘지 않은 결과물을 냈지만, 이걸 업로드를 해도 문제가 없는 걸까. 날마다 고민했던 거 같아.”

“카나데가 만드는 곡은 항상 최고야! 올려도 되는 게 당연하잖아!”

“아하하, 그때는 지금 에나처럼 칭찬해주는 사람도 없었거든. 그래서, 기뻤어. 내가 올린 곡을 누군가가 맑은 목소리로, 이렇게 즐겁게 불러주는구나......내가 자아낸 선율이 이런 형태로 누군가에게 닿았구나, 하고.”

카나데의 말을 듣고 에나는 멍하게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었다. 과거의 자신이 불렀던 노래. 어쩌다가 접하게 된 곡이 서늘한 듯 하면서도 부드럽고 상냥해서, 완전히 반해버린 채로 따라서 노래를 불렀었지. 그리고 그걸 업로드 했었다. 이렇게나 멋진 곡에 조금이나마 자신의 색을 더해 공개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며. 그게 카나데에게 그런 의미로 전해졌었다니.

“그래서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유키도, Amia도, 그리고 에나낭도. 내게 확신을 준 사람들과 같이 곡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거기에 더해 에나는 그림으로 내가 만드는 곡을 표현해줬어. 그건 정말 멋진 일이었거든.”

“그, 그치만 나보다 훨씬 더 카나데가 원하는 바를 훌륭하게 표현해낼 수 있는 사람들도 많을 거야. 카나데가 처음 시작하던 때와는 달라. 내가 그리는 그림보다 더 호소력 있고, 사람들이 알아주는......속된 말로 보다 잘 팔리는 그림을 그려낼 수 있는 작가들이 이제는 기꺼이 카나데와 작업하길 원할 거라구.”

“......팔리는지 팔리지 않는지의 잣대로 사람을 들여다보는 건 잔인한 짓이야. 충분히 자기 자신을 표현해낼 수 있는 사람을 구석으로 몰아넣고, 무너지게 만들어. 그런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거야? 멋대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난 용서할 수 없어. 에나, 날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줘.”

“그런 말이 아니고......물론, 당연히 나도, 카나데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 그저......나 때문에 전체적인 완성도가 떨어지게 된다면......”

“에나.”

과거의 시노노메 에나가 혼신의 힘을 다해 즐겁게 부르던 곡이 끝난다. 아직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는 친구를 바라보다가, 카나데는 자리에서 일어나 에나를 마주보았다. 에나 또한 고개를 들어 카나데와 시선을 맞췄다. 조금 쌀쌀해진 가을 저녁의 바람이 길게 흘러내린 은빛 머리카락을 적시며 흘러간다.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수면처럼 부드럽게 흔들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푸른 눈동자가 맑게 빛났다. 카나데는, 요이사키 카나데는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에나였기 때문에 같이 하길 원했어. 그림을 그려줄 상대가 누구든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에나였기에 연락했던 거야.”

“카나데......”

“내가 찾고 있는 게 누구든 상관없이 그저 그림을 그려줄 뿐인 존재라면, 달리 대신할 사람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지금 찾고 있는 건 우리들의 그림 담당, 시노노메 에나인걸.”

“......나, 나는......”

“에나, 말해줘. 우리들의 세계에 시노노메 에나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달리 있을 수 있을까?”

있을 리가 없다.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은 자리였고,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결국 한순간도 그를 포기하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미련만이 남아서 안에서부터 썩어들어갔겠지. 그러니 차라리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할걸. 25시의 멤버 자리는, K의 도우미로 곁을 지키는 자리는 언제까지나 에나낭, 시노노메 에나의 자리로 남아있는 게 마땅하니까. 누구에게도 내주지 않을 거야. 대신할 수 있는 사람 따위 없어. 소리 높여 그렇게 선언하려고 하지만, 눈물이 터져나와서 에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카나데의 두 손을 마주 쥐고 하염없이 울 수밖에 없었다. 씻겨나가는 서러움과 차오르는 안도감이 교차되며 윤무곡을 연주한다.

아이처럼 울고 있는 에나를 카나데는 품으로 꼬옥 끌어안아주었다. 카나데의 품에 안긴 채로 에나는 지칠 때까지 울었다. 울고 울어서 우는 소리조차 내지 못할 때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듯 필사적으로 자신의 옷자락을 붙들어오는 에나의 행동 또한 카나데는 받아들였다. 소중한 이가 다시 곁으로 돌아와주었단 사실만으로도 소녀는 기쁘고 기뻤다.

“흑, 흐윽......흡, 아하하, 나 진짜, 꼴불견이겠다.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들 쳐다보고 있을 거야.”

“걱정 마. 내가 가려주고 있어.”

“그거도 포함해서 부끄러워......그치만, 기뻐. 하아, 카나데에게 이런 흉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에나, 나하고, 우리하고 계속 같이 가줄 거지?”

“이제와서 못난 소리를 계속 하고 있을 순 없잖아. 대신 해달라고 부탁드렸던 분께 폐를 끼쳤다고 말씀드려야겠네......”

“아, 그러고보니 그 사람이 에나를 만나면 전해주라고 부탁했었어.”

뒤늦게 떠올렸다는 듯 카나데가 꺼낸 말에 에나는 축축하게 젖은 눈을 깜박거렸다. 자신의 단말을 톡톡 두드리다가 카나데는 맑게 웃으며 화면을 에나에게 보여주었다. 손등으로 물기를 닦아낸 뒤 그를 들여다본다. 가볍고 경쾌한 선으로 그려낸 긴 흑발의 아가씨가 밝은 얼굴로 무언가를 외치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 사람, 대신 해주기로 했던 작가의 상징 캐릭터였던가. 그녀가 힘껏 전한다. ‘To. 에나낭. 앞으로도 활동 응원할게요.’.

“에나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더니, 알겠다고 하며 이걸 전해달랬어. 다음 곡 기대하고 있으니, 에나와 함께 열심히 해달라고 하더라구.”

“그랬, 구나......”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에나, 천천히 나아가도 좋으니 같이 곡을 만들어가자. 분명 혼자서는 닿지 못할 곳까지 우리는 갈 수 있을 거야.”

“......응.”

카나데, 잠시만 더 이렇게 하고 있어도 될까. 자신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채 속삭이는 에나에게 카나데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끄덕이는 움직임을 느끼고는 소녀는 소녀에게로 한층 꼬옥 파고들었다. 상냥하고 포근한 그 아이의 향기가 세상을 가득 채운다. 지금은 그걸로도 충분하였다.


“자, 그럼......이번 곡도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어.”

“고생 많았어, 다들.”

“수고했어. 정말로.”

Amia, 아키야마 미즈키의 경쾌한 선창을 따라 모두들 잔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유키, 아사히나 마후유가 들고 있는 레모네이드 잔이, K, 요이사키 카나데가 들고 있는 사과 주스 잔이, 에나낭, 시노노메 에나가 들고 있는 초코칩 프라푸치노 잔이 동시에 달칵 테이블 위로 내려온다. 자신의 잔에 담긴 사이다를 한 모금 마신 다음 미즈키는 장난스레 눈을 찡긋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야, 이번엔 아무래도 오래 걸렸네. 그래도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야.”

“에나가 한 때의 긴 방황을 했으니까.”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반성도 많이 했고. 그거랑 별개로 그 표현 뭔가 좀 그래.”

“에나가 뒤늦게 사춘기의 성장통을 겪고 왔으니까.”

“더 이상하잖아!”

“그래그래, 결과적으로 호평을 들었으니 좋았다는 걸로.”

미즈키의 말대로 새로 올린 곡에 대한 반응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마후유가 새롭게 써낸 가사에 맞춰 기존에 올리던 곡들과 전체적인 스타일에 제법 변화가 가해진 결과물을 냈음에도 그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게 특기할만했다. 역시 변화점이 많았던 그림 쪽은 평가가 어땠으려나. 평소보다 반응을 확인해보기에 심적 부담이 커서 아직은 의식적으로 찾아보는 걸 피하고 있던 터였다. 결국에는 궁금함을 이기지 못해 찾아보게 되겠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다.

“하아, 어쨌든 나름대로 급하게 그린다고 지쳤으니까 오늘은 한숨 돌릴 거야. 카나데도 나 때문에 이번에 힘들었으니 푹 쉬어야 해. 자아, 이거도 맛있으니 한 입 먹어. 아앙-”

“에나도 참. 아아-”

“뭔가 에나, 원래도 그랬긴 했지만 이제 한층 더 카나데를 챙기게 되었네.”

“......”

스파게티의 면을 돌돌 말아 카나데의 입에 넣어주는 에나를 바라보며, 미즈키는 피식 웃음을 짓고 마후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입을 오물거리며 음식을 씹는 카나데를 행복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가, 시선을 알아차리고는 에나는 맞은편을 향해 혀를 살짝 내밀어보였다. 테이블 양쪽으로 나뉘는 자리에서 재빨리 카나데의 옆을 차지하지 못한 쪽이 안일했던 거니까.

모두와 함께 작품을 만드는 게 기쁘다. 지금처럼 페밀리 레스토랑에 모여 뒷풀이를 하는 순간이 즐겁다. 역시 25시의 멤버로 그림을 그리는 일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인정해주고 믿어주는 친구들 덕분에 독기를 품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안주하게 되어 온몸을 내던질 필사의 각오를 하지 못하는 겁쟁이가 될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나아가기로 했으니 괜찮지 않을까. 조금 걸음이 늦더라도 모두가 기다려줄 거라고 믿으며 오늘 한 걸음, 그리고 내일 한 걸음을 내딛는 거야.

단번에 높게 날아오르는 재주를 모르는 파랑새가 밤하늘의 달에 도달하려면 아득히 긴 시간이 필요하리라.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응원해주는 목소리를 따라 계속해서 날갯짓을 하다보면 언젠가 꿈에 그리던 달에 도착하겠지. 그날이 찾아오게 된다면 네가 엮어준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를게. 노래를 부르며 너와 함께 춤을 출 거야. 네가 있어줬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앞으로도 계속 내 곁에 있어주길 원한다고 기뻐 눈물을 흘리며 고백하고 싶어.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달의 위에서.

“......나, 다음에도 잔뜩 힘낼게. 좀 더 잘할 수 있게 될 거니까.”

그 아이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며 에나는 작게 속삭였다. 속삭임을 들은 그 아이가 이쪽을 바라봐준다. 부드럽게 미소를 그리는 입술은 변치 않을 약속을 전하고 있었다.

* 여라 님께서 글 내용에 맞춰 일러스트를 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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