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단풍 여행 4중 세계선 콜라주

프로젝트 세카이 25시 여러 조합

*첫째 날 09 : 40, 역에서 / 요이사키 카나데 x 시노노메 에나

기차의 출발 시간은 오전 10시 20분이었다. 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은 9시 45분. 그리고 시노노메 에나가 역에 도착해 상대를 기다리기 시작했던 시간은 오전 9시 10분. 30분이라는 시간 동안 에나는 역 한켠의 의자에 앉아 전날 약속 상대와 나눴던 메신저의 대화 내역을 질리지도 않고 반복해서 읽었다. ‘그럼 에나, 내일 봐’ 란 말로 맺어졌던 지난 밤의 대화, ‘일어났어. 나갈 준비 할게’ 로 시작된 아침의 연락, 몇 분 전 도착한 ‘이제 곧 역에 도착해’ 란 문자까지. ‘나도 곧 도착할 거야’ 라는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전송하고는 에나는 기대감에 찬 숨을 포옥 내쉬었다.

정해진 시간보다 훨씬 이르게 도착해서 미리 준비를 해두는 자세는 평소의 시노노메 에나와는 별 관계가 없는 미덕이다. 아가씨는 대체로 정해진 시간에 딱 맞게 도착하는 쪽을 선호했고, 상대에 따라서는, 그러니까 기다리는 쪽이 하나 뿐인 남동생일 경우에는 의도한 것마냥 늦게 약속 장소에 도착하고는 했다. 지금처럼 한참 일찍 도착해 설렘 속에 상대를 기다리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오늘 만나기로 한 이가 소녀에게 얼마나 각별한 존재인지 새삼 확인할 필요는 없겠지.

고작 30분을 기다린 건 대단한 일도 아니다. 단풍이 예쁘기로 유명한 여행지의 숙박권을 얻게 되었는데, 괜찮다면 둘이서 다녀오지 않을래. 몇 시간 동안 망설이고 망설인 끝에 간신히 보냈던 메세지에 흔쾌히 수락하는 답이 돌아왔던 그 순간부터 에나는 오늘의 여행을 기다려왔던 터였다. K와 둘이서만 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다는 기쁨과 혹여나 그 아이의 마음이 바뀌는 건 아닐지 괜한 염려 속에 보름이란 시간을 보냈다. 그 기다림의 결실을 곧 거둘 수 있게 되는 거다. 그러니 철저하게 준비해야만 하겠지. 손거울을 꺼내 에나가 여태 몇 번이나 반복했던 자기평가를 다시 시작하려고 했을 때였다.

“에나. 기다렸지.”

오가는 통근객들이 만들어내는 부산스런 소음 사이로, 가냘픈 목소리가 신비할 정도로 뚜렷하게 전달되었다.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그 아이, 요이사키 카나데를 보고서 에나는 거의 튀어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막 도착했어, 하고 답할 생각이었으나 입에서는 그 대신 작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에나는 카나데의 앞으로 총총 걸어갔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다시 위로 눈길이 움직였다.

“세상에, 카나데. 너무 예뻐......”

“에나가 저번에 맞춰줬던 구성으로 입고 왔어.”

그렇게 말하며 카나데는 수줍게 웃었다. 넋을 잃고 자신을 바라보는 에나를 위해 의상 모델마냥 두 손을 살짝 들고 양옆으로 살짝 몸을 돌려보인다. 머리에는 작은 챙이 달린 하얀색 팔각 빵모자를 쓰고, 길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은 곱게 빗어내려 순수하게 장식용의 분홍 리본을 하나 달아두었다. 입고 있는 나들이 원피스는 은방울꽃을 모티브로 한 장식이 들어간 우아한 검은색으로, 어깨를 덮는 케이프가 달려있어 사랑스러운 이미지에 멋스러움을 더했다. 전체적인 인상이 훌륭하다보니 소녀가 끌고 온 검은색 소형 캐리어마저 의도해서 맞춘 장식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늘상 실내복 차림으로만 지내며 자기 관리를 부실하게 하던 와중에도 타고난 미모를 유감없이 선보였던 아가씨였다. 그랬던 그녀가 제대로 꾸며입고 나왔으니 개개인의 사소한 미적 취향 따위는 단숨에 바스라뜨릴 압도적인 아름다움이 눈 속에서 개화하는 청초한 겨울꽃처럼 자리잡는 건 지극히 마땅한 일이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늦추고 흘끔거리는 시선을 던진다. 그러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이목을 잡아끄는 미소녀가 이 자리에 있다. 패션 잡지를 산처럼 쌓아두고 뒤적거려도 이 정도로 아름다운 모델을 찾기란 쉽지 않겠지. 수많은 사람들이 카나데에게 매료되고 있단 사실에 뿌듯함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누군지도 모르는 불특정 다수가 카나데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점에 불길 같은 짜증이 치솟아 에나는 카나데를 이끌고 좀 더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당신들에게 보여주려고 카나데가 이렇게 꾸미고 나온 게 아니란 말이야.

“큰일이네. 카나데가 너무 예뻐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쳐다보겠어.”

“과장이야, 에나. 나보다 에나에게 사람들 시선이 모일 거라고 생각해. 오늘도 에나, 언제나처럼 예쁘게 하고 나왔고.”

“정말? 에헤헤, 나름 신경 썼는데 카나데가 보기에 괜찮다면 다행이다. 으응, 좋아. 결정. 여행 내내 카나데랑 사진 잔뜩 찍어야지. 찍을 때마다 인생에 업적으로 삼아도 좋을 사진이 나올 거야.”

이야기 나온 김에 한 장 찍어둘까나. 즐겁게 흥얼거리듯 말하고서 에나는 단말기를 꺼내들었다. 여행 중에 쓸 생각으로 셀카봉도 챙겨왔지만 역에서부터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겠지. 자가 촬영으로 설정을 맞추고 단말을 들어올리자 화면에 두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살짝 눈치를 살피다가 에나는 자연스럽게 카나데의 곁으로 몸을 붙였다. 서로 간의 간격이 사라지고 어깨가 맞닿는다. 거리를 약간 좁혔을 뿐인데도 은은하게 좋은 향이 감돌기 시작해 아찔해진다. 카나데도 따라서 살짝 몸을 기울여주는 걸 확인하고서, 터질 듯한 두근거림 속에 에나는 렌즈의 각도를 맞췄다.

“그, 그럼 찍을게.”

“으응.”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좋은 사진이 나오게끔 힘을 보태야만 한다고 생각한 건지 카나데는 오른손을 들어올려 브이자를 만들어보였다. 귀여워, 카나데가 너무 귀여워. 사진을 찍을 수 없을 지경으로 손이 떨리지 않게끔 필사적으로 정신을 가다듬으며 에나는 심호흡을 했다. 이 사진, 평생 바탕화면으로 설정해둬야겠다. 인쇄해서 포토 카드로도 만들어둬야지. SNS에도 올릴 거야.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친구랑 같이, 라고 써둘까? 아, 그치만 SNS에 올리면 모르는 사람들의 관심이 멋대로 따라붙을 건데, 카나데에겐 폐가 되려나. 그렇다면 둘만의 비밀 사진으로 남겨두는 쪽도 좋아.

[찰칵]

“미안해. 나 눈 감아버렸을지도.”

“괜찮아. 그쪽도 소장용으로 가치는 충분해.”

“소장용?”

“아, 아니, 여행하는 동안 사진 찍을 기회는 많으니까! 아, 시간 좀 봐. 슬슬 기차 타야겠네.”

“그렇지. 그럼 갈까.”

한 손으로 캐리어의 손잡이를 꾹 쥐고는 카나데는 자연스럽게 남는 손을 에나에게 내밀었다. 손을 맞잡으면 보드라운 살결의 감촉과 함께 기분 좋게 따스한 체온이 전해졌다. 당연하다는 듯 손을 잡은 채 나란히 걸어가는 이 순간도 사진으로 남길 수 있다면 좋을 건데. 행복함을 느끼게 되는 모든 순간을 프레임 속에 보존하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다가 에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여행은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벌써부터 초조해하고 있으면 최고의 시간을 제대로 즐길 수 없겠지.

카나데, 고마워. 둘이서만 여행가고 싶다는 억지를 들어줘서. 소리내어 전할 용기는 없어서 입속으로 그를 중얼거리고는, 에나는 동행하는 이를 살짝 돌아보았다. 시선을 느끼고는 카나데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소녀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기분좋게 웃었다.


*첫째 날 13 : 05, 숙소에서 / 아사히나 마후유 x 요이사키 카나데

“예약하신 분의 성함이 어떻게 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사히나 마후유에요.”

“네에, 확인했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시면 곧 예약하신 호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한 걸음 뒤에서 기다리며 요이사키 카나데는 프론트의 직원을 상대하고 있는 아사히나 마후유의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기차를 타고 단풍이 예쁘기로 유명한 거리에 도착해 제법 운치 좋은 숙소에 도착한 현 시점에서도 자신들 둘이서만 여행을 왔다는 사실에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답은 곧바로 나온다.

부모가 부부 동반 임원 여행이란 건수로 며칠 동안 집을 비우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만 하더라도 마후유는 그게 별 의미가 없는 소식이라는 듯 무심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소녀의 일상은 미리 짜여진 시간표대로 굴러가고 있었고 부모가 집을 비운다고 하더라도 붙박힌 일과에 별다른 변화가 생기길 기대할 수 없을 터였다. 그 사실이 괴로웠던 걸까. 모든 게 무의미하고 시시하다는 투로 이야기를 하면서, 마후유는 카나데의 침대에 웅크리고 누운 채로 한숨을 푹 쏟아내었다. 그래, 당연하다는 듯이 남의 집에 찾아와서는 말이다.

평소에는 할 수 없을 가벼운 일탈이라도 저질러보는 게 어떨까. 의외의 전환점이 되어줄지도 몰라. 무기력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이를 격려해주고자 별 생각없이 그런 제안을 했을 뿐이다. 가벼운 일탈이라고 하면? 구체적 예시를 요구하는 마후유에게 적당한 대답을 해주려고 허둥대다가 당일치기 여행이라든가, 하며 확신없는 답을 꺼내들었던 게 폭약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셈이었다. 여행이란 일탈을 벌인다고 하면 같이 책임져줄 각오가 있느냐고 다그치듯 물어오는 마후유에게 카나데는 자신도 함께 책임지겠다는 장절한 선언을 정신없이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은 지켜야만 하는 법. 그리하여 소녀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게 되었다는 거다.

“깔끔하고 괜찮은 숙소네.”

“그, 그러게.”

부모가 돌아오는 기한에 걸리지 않게 1박 2일의 여정을 계획하고, 그 일자에 걸친 예비교의 강의를 죄다 취소해버린 거만 해도 놀라울 정도로 과감한 행보라고 할만했다. 거기에서 몇 걸음 더 나가서 아사히나 마후유는 평소 도통 쓴 적이 없어 제법 모아두었던 용돈으로 왕복 기차표와 숙소의 예매까지 단숨에 끝내버렸다. 생각의 속도로도 따라잡을 수 없는 행동력에 휘둘린 끝에 카나데는 이제 생전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상대와 1박 2일의 여행을 하게 되었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1박 2일의 여정이라니.

마후유는 둘이서만 여행을 왔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 걸까. 그녀도 이런 경험이 처음일 건데. 고민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며 카나데는 흘끗 옆을 돌아보았다. 안내를 기다리는 동안 숙소의 정경을 둘러보고 있는 마후유에게서 불안감 같은 건 엿보이지 않았다. 아침에 역에서 만났을 때부터 마후유는 쭉 평온한 모습이었다. 아니, 어딘가 조금 들뜬 상태인 걸지도.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땐 서늘한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걸로 보이겠지만, 같이 지내온 경험이 이제는 제법 쌓인 카나데는 미세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두 분이서 여행 오셨나봐요? 사이가 좋으신 모양이네요.”

“네에, 둘도 없이 친한 사이에요.”

“어머, 부럽네요. 마침 이 시기에 단풍이 제일 예쁘게 물들거든요. 이제 곧 성수기에 접어들 시점이라 이번 주까지가 딱 인파도 없이 한적하면서 풍경을 즐기기 최적의 환경이에요. 아무쪼록 두 분이 소중한 추억을 만들고 가셨음 좋겠어요.”

“감사합니다.”

예약한 호실로 안내받는 동안 직원이 건네오는 말에 마후유는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을 하였다. 마후유가 착한 아이인 상태로 꺼내는 말은 대체로 단정하고 예쁘게 꾸며졌을지언정 속은 공허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둘도 없이 친한 사이라는 표현이 그녀의 입에서 나온 순간 카나데는 묘하게 간지러운 기분에 흠칫 어깨를 떨었다. 둘도 없이 친한 사이. 속으로 따라 중얼거려본다.

고풍스러운 정원을 중심에 두고 감싸듯 넓게 객실들을 배치한 ㄷ자 형태의 건물이었다. 정원의 테두리를 감싸고 있는 낮은 돌담 아래로 꽃을 떨구기 시작한 수국화가 녹빛 군집을 이루고 있었다. 바닥에 하얀 돌이 고르게 깔려있고 입구로부터 매화 나무들이 나란히 길을 만들고 있는 정원은 감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놓여있는 석등 또한 하나하나가 정교한 예술품처럼 조각되어 단순한 장식보다는 값어치 있는 문화재처럼 느껴졌다. 숙소 자체가 하나의 관광지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정원, 예쁘다.”

“저희 관의 자랑이랍니다. 소등 시간을 제외하고 개방해두니 원하실 때 돌아보셔요.”

중앙의 정원만큼이나 건물 내부의 정결함과 예스러움도 훌륭했다. 아늑한 목조 건물은 벽면의 깊어진 색에서 흘러온 세월이 묻어났다. 그럼에도 낡았다는 인상은 주지 않는다. 설비만큼은 제대로 신식으로 유지되고 있는 덕분에 숙소 내부는 흠잡을 곳 없이 깔끔했다. 이토록 훌륭한 숙소를 저축분이 있었다고는 해도 고등학생의 용돈 수준에서 예약할 수 있었던 건 직원이 말한대로 비수기에서 성수기로 넘어가기 직전에 여행 일자를 잡은 덕분이리라.

“묵으실 방은 특별실로, 관내의 설비는 자유롭게 이용하셔도 됩니다. 체크아웃은 내일 정오가 되기 전까지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셔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호출해주세요.”

호실의 문을 열어주고는 직원은 정중하게 인사한 뒤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소녀들 외에는 달리 숙박객이 없어서 조용한 공간에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만 타박타박 울렸다. 마치 곡의 마지막에 여운을 남기는 아웃트로의 연출 같네. 작아지다가 마침내 침묵 속에 잠길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카나데는 자신의 손을 잡아끄는 마후유에 의해 정신을 차렸다. 들어가자. 나직하게 말하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인다.

특별실이라는 등급에 걸맞을 정도로 설비가 훌륭한 방이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막아주게끔 카펫이 꼼꼼하게 깔린 방은 두 사람이 쓰기에 부족함 없이 넓었다. 푹신하게 이불이 깔린 커다란 침대 뒤로 작은 발코니가 있고, 우아하게 트인 공간에는 마주앉아 차를 마실 수 있는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안락한 의자에 앉으면 발코니의 창문을 통해 정원의 풍경을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을 터였다. 해가 떠 있는 낮에는 색색의 단풍을, 다가올 밤에는 정원 곳곳에 설치된 석등의 은은한 불빛을. 이 이상 낭만적인 공간도 달리 없을 정도였다.

“잠깐만......”

그럼에도 요이사키 카나데는 방금 깨달은 엄청난 문제에 대해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침대, 하나야? 그러니까......마후유랑 나랑 같이?”

“응.”

“어, 어째서?”

“그렇게 예약을 했으니까.”

당연한 게 아니냐는 듯 대답하는 마후유를 바라보다가 카나데는 침대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푹신하고, 넓고, 좋아보이는 침대다. 카나데가 평소 잠들던 침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좋으리라. 잠든 채로 옆으로 두 번 굴러도 아래로 떨어질 염려가 없을 만큼 커다란 침대. 그럼에도 마후유와 둘이서 잠든다는 조건을 거는 순간 그 크기는 별 의미가 없게 느껴지고 만다. 어쨌든 같은 침대에서 잔다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요이사키 카나데는 아사히나 마후유와 1박 2일의 여행을 와서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함께 밤을 보내게 되었다.

“그래도 괜찮은 거야?”

“......오히려 문제될 게 있어? 이미 카나데의 집에서 한 침대를 쓰기도 했잖아.”

“그, 그건 경우가 다르다고 생각해. 동시에 누웠던 거도 아니고.”

“......”

당황하며 얼버무리는 카나데를 지긋하게 바라보다가 마후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미간 또한 살짝 찌푸린 상태가 되었으나 시선 둘 곳을 정하지 못하고 머뭇대는 카나데는 그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여행지에서 둘이서만 한 침대를 쓰게 되었다는 어마어마한 사실에 압도되어 다른 일을 신경 쓸 여유가 없어진 모양이었다. 고작 침대를 같이 쓰는 일을 이렇게나 어려워하다니. 그 부분에 괜히 마음이 쓰여서 마후유는 뾰족한 형태의 감정을 느꼈다. 그러한 심경이 작게 삐죽 튀어나오는 입술로 표현된다.

“......알겠어. 카나데는 곤란한 거지?”

“곤란하다고 해야하나......”

“직원에게 방을 바꿔달라고 말하면 되잖아. 침대가 따로 나뉘어진 방으로. 다른 손님들도 없어보이고 여기가 제일 좋은 방이니 아래 등급의 호실로는 바꿔줄 거야. 카나데가 말해. 이전에 침대를 공유한 적도 있는데다 둘이서만 여행을 올 사이이긴 한데 도저히 같은 침대를 쓸 수 없을 거 같으니 닿을 일 없게 떨어져서 잘 수 있는 방으로 바꿔달라고 설명해. 난 상관없어.”

“그렇게 하길 원하는 건 아닌데.”

“......”

“......마후유, 혹시 화난 거야?”

“별로.”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마후유의 심기가 불편하단 사실을 카나데는 눈치챘다. 그건, 아사히나 마후유가 요이사키 카나데의 앞에서는 가면을 쓰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함께 보낸 시간이 길어질수록 조금씩 더 솔직한 면모를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마후유는 솔직하게 마음을 전하고 있는 거야. 그를 깨닫는 순간 카나데는 같은 침대에서 잠드는 일이 그리 문제도 아니라는 점을 인정했다. 사실, 그저 괜히 수줍음을 느꼈을 뿐이다. 둘이서 함께 잠드는 게 곤란하지도, 싫지도 않다. 싫었다면, 애초에 이 여행에 함께하지도 않았겠지.

“......생각해보니 이 방이 좋을 거 같아. 특별실이고, 마후유도 여러 모로 생각해서 예약했겠지.”

“......”

“그리고 마후유와는 같은 침대에서 자도, 좋아.”

방금 뭐라고 말한 거지. 상대를 달래기 위해 꺼낸 말이 어떤 의미로 전달될지, 한 박자 늦게 깨닫는다. 마후유와는 좋다. 그렇게 말해버렸다. 물론 있는 그대로의 본심을 털어놓았을 뿐이다. 순진한 아가씨는 어떠한 흑심도 품은 적 없다. 하지만 간결하게 축약된 언어는 의도한 적 없는 의미도 제멋대로 머금은 상태로 전달되곤 하는 법이다. 마후유, 곤란한 방향으로 받아들였으면 어쩌지. 그런 쪽의 의미는 아니었다고 덧붙여 말하면 더 이상해질 건데.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드러나는 귀가 새빨갛게 붉다. 잘 익어서 물든 과실처럼 달콤해보이는 카나데의 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마후유는 연달아 몇 차례 눈을 깜박여대며 고개를 돌렸다. 매사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아가씨였기에, 그 사소한 반응이 흡사 무척이나 겸연쩍어하는 모습으로 비친다. 그래, 그렇다면 문제없네.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작디 작다.

“......그럼 침대 문제는 해결된 거지. 짐을 풀어두고 나가자. 카나데, 정원에 가보고 싶은 거 같고.”

“응. 저렇게 잘 다듬어진 공간을 걷다보면 좋은 악상이 떠오를지도 모르겠어.”

“돌아본 뒤 들어와서, 카나데가 차를 타줘. 카나데가 타준 차를 마시고 싶어.”

“차를 마시고 싶다니, 정말?”

“저번보다는 제대로 탈 줄 알게 되었는지 확인도 해볼 겸.”

그렇게 말하고는 마후유는 카나데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마후유의 눈이 부드럽게 미소지은 듯 하다고, 카나데는 생각했다.


*첫째 날 17 : 45, 단풍 거리에서 / 아사히나 마후유 x 시노노메 에나

“안전 설비 수리 중이라서 개방하지 않는다니, 말도 안돼. 내가 얼마나 기대하고 왔는데......”

이걸로 다섯 번째다. 지난 한 시간 동안 시노노메 에나가 같은 주제로 질리지도 않고 한탄을 터뜨리고 있는 횟수를 셈해보며 아사히나 마후유는 눈썹을 작게 까닥거렸다. 현실을 직시하는 과정에서 감정 변화가 순차적으로 일어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지만, 오늘의 시노노메 에나에겐 적용되지 않는 법칙인 모양이었다. 냉혹한 현실과 맞닥뜨린 직후 아가씨는 제법 어른스럽게, 별다른 감정적 동요를 내비치지 않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란 말과 함께 발걸음을 돌렸던 터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는 걸로 끝을 맺었으면 좋았을 건데. 지금까지 에나는 어쩔 수 없는 사안에 대해 장장 다섯 차례에 걸쳐 체념과 분노, 우울과 달관이 반복되는 변주곡을 상연하고 있었다.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언젠가 도쿄 시청에서 주관한 콘테스트에 우승한 어느 화가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에나는 종종 하곤 했다. 우승작은 시청 내부의 홀 벽면을 장식하게 되었고, 에나와의 데이트 중에 그 장소를 방문한 마후유도 예의 그림을 보았던 터였다. 붉게 타오르는 노을을 중앙에 두고 좌우로 그만큼이나 곱게 타오르고 있는 단풍 세계를 화폭에 담아낸 그림은 마후유가 보기에도 탁월했다. 노을과 단풍을 칠한 검붉은 배합의 물감은 단순히 그 순간 존재했던 풍경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괴이쩍을 정도의 생동감을 내뿜고 있었다. 캔버스 위에 남겨진 모든 흔적들이 그저 과거의 풍경을 기록하는 매개에 그치지 않고, 그만의 존재감을 확보했다는 인상이었다. 문외한의 시선으로도 그림에서 흘러넘치는 생명력을 읽어낼 수 있을 정도라면, 그림에 각고의 뜻을 품고 있는 에나에게 그 그림이 얼마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지.

그 그림이 그려진 장소가 바로 여기 단풍 거리의 전망대였다는 이야기이다. 둘만의 여행을 목표로 하여 계획을 세우긴 했었으나, 시노노메 에나에게는 그만큼이나 중요한 다른 목표도 있었던 셈이다. 그 광경을 실제로 볼 수 있다니. 기차를 타고 오면서 에나는 감격에 차 중얼거리기도 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노을이 떨어지는 광경을 그 전망대에서 보고 말 거야. 결의에 찬 선언을 하기도 했던가. 그처럼 컸던 기대감이, 전망대의 자물쇠 걸린 문 옆으로 붙어있는 안내문에 의해 처참하게 깨지고 만 거다.

“왜 굳이 지금 와서 수리를 한다는 거야. 단풍이 물들기 시작할 무렵에. 다른 시기도 얼마든 있을 건데. 겨울에 하면 되잖아. 아니면 봄에, 아니면 여름에! 왜 지금이냐고, 도대체 이해가 안되네.”

“중요한 시기인데도 폐쇄하고 수리하는 걸 보면 불가피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생긴 거겠지.”

“그건 그렇겠지만. 모르는 건 아닌데, 그래도......”

에나는 역시 귀찮은 면이 있네. 생각한 문장을 곧바로 툭 내뱉지 않은 건 아사히나 마후유 나름 학습이 이루어진 덕분이다. 직설적으로 툭 던지는 말에 으르릉대는 반응으로 화답하는 상대와 수백 번 대화하고 수십 번 얼굴을 마주하고, 그러다가 몇 번의 데이트 약속을 잡기도 하며 나름의 유대감을 가지게 되지 않았던가. 교류 속에서 에나에게는 그녀 특유의 화법이 있다는 점을 마후유는 이해하게 되었다. 이해하게 되었다는 건, 무심하게 대하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 어설프더라도 배려는 할 수 있게 된 거다.

“이래서야 기껏 계획을 세워 여기로 여행을 온 의미가 없어지잖아......”

“......”

눈썹이 얕게 꿈틀거린다.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는 해도 완벽할 수는 없다. 투덜거리는 말에는 순간의 감정이 실려있을 뿐 별 무게감은 없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으나, 마음은 그렇지가 않다. 마후유는 설명하기 힘들게 가슴 부근이 꾹 조여드는 듯한 불편한 감각을 느꼈다. 에나가 같이 여행을 다녀오자고 권유를 해줬을 때와는 정반대의 기분이었다.

가족이 며칠 동안 집 비우게 되었다며. 어차피 따로 할 일도 없을 건데 나랑 여행이나 다녀올래.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서. 내심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평정을 가장하는 티를 숨기지 못하며 에나가 그렇게 말을 꺼냈을 때 마후유는 일정을 떠올려보기에 앞서 고개부터 끄덕였었다. 왠지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기에. 어깨에서 부드럽게 힘이 풀리는 듯한, 안온하고 다정한 기분이었기에.

그런 식으로 권유를 해왔으면서, 자신을 옆에 두고 여행의 의미가 없어진단 말을 하다니. 기대가 깨어진 실망감에서 나온 말이라는 걸 알아도 마음이 괴로워진다. 시노노메 에나에게 있어 아사히나 마후유보다도 시청에 걸려있던 붉은 노을과 낙엽의 그림이 더 우선 순위를 가지는 걸까. 고작 그 그림이 담고 있던 풍경을 직접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하여 자신들의 여행에 어떠한 의미도 부여할 수 없게 되는 걸까. 여행에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에나를 곁에 두고 자신은 그저 침묵하며 듣고만 있어야 하는 걸까. 그건, 싫다.

“에나, 따라와.”

“뭐? 어디 가는데? 야, 잠깐......”

자신의 손목을 붙들고는 성큼성큼 앞서 걸어가는 마후유의 행동에 놀라 에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물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아플 정도로 꾸욱 붙잡은 손목, 뒤를 돌아봐주지 않는 보랏빛의 물결, 꾹꾹 누르듯 내딛는 걸음. 정신없이 뒤따라 걸어가는 와중에 에나는 멍하게 생각하였다. 혹시, 화난 걸까. 내가 툭 던진 말에 기분이 상해서. 생각하다가 아가씨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이 녀석이 그렇게 섬세할 리 없잖아.

맑았던 가을 하늘이 단풍처럼 물들어간다. 거리를 채우고 있던 관광객들이 인근의 식당으로 모여들고, 한산해진 거리에 장식용 등을 내걸 준비를 하는 상인들이 부산스럽게 돌아다닌다. 가을이란 계절 속에서 더없이 가을에 어울리는 시간으로 접어드는 거리를 따라 두 소녀는 걸어나갔다. 어디 가냐고 물어도 답을 해줄 기색이 없었기에 에나는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말없이 걸어나가고, 말없이 뒤를 따라간다.

걸음을 멈춘 건 작은 물길 위로 뻗은 다리의 중간 지점이었다. 단풍 거리로 들어서는 초입에 자리하고 있는 다리였다. 흐르는 물을 따라 열린 공간에는 시야를 차단하는 건축물이 하나도 없다. 양쪽 물가를 따라 촘촘하게 솟은 단풍의 경계선 사이로 열린 하늘에 지평선을 넘어가는 노을이 걸린다. 높이야 다르겠지만, 그 그림과 비슷한 구도잖아. 그를 깨닫고는 에나는 입을 작게 벌렸다. 저물어가는 것들이 품고 있는 붉은 생명력을 원료로 타오르는 풍경. 오직 이 시간에만 볼 수 있을 광경을 바라보다가, 에나는 고개를 돌려 동행을 쳐다보았다. 마후유는 말없이 노을을 쳐다보고 있었다. 노을 속 묽어진 빛이 아가씨의 옆얼굴을 적시며 선을 뚜렷하게 만든다.

“예쁘네.”

타는 노을과 단풍의 세계를 바라보다가 마후유는 짧게 평했다. 마후유의 얼굴을 훔쳐보고 있다가 그 말에 깜짝 놀라며 에나는 급히 시선을 돌렸다. 혼자서 괜히 민망함을 느끼며 발끝을 꼼지락댄다. 속상해하고 있는 날 생각해서 여기로 데리고 와준 거야. 신경써줘서 고마워, 라고 말하는 게 좋을지 생각을 하지만 쉽게 그처럼 솔직한 말이 나오지 않는 게 문제였다. 그래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으면 어색하겠지.

“의외네. 누가 묻지 않았는데도 네가 먼저 그런 감상을 말하다니.”

“의외야?”

“아무래도 그렇지? 여태 네가 무뚝뚝한 모습만 보였으니 말야. 그런 말도 보통은 하지 않았고.”

에나의 말에 마후유는 고개를 돌렸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에나의 얼굴에 머문다. 왜 갑자기 사람 민망하게 그렇게 쳐다보는 건데. 그렇게 톡 쏘아붙이려고 하지만 분위기가 만들어내는 마력 때문인지 에나는 입술만 벙긋거렸을 뿐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정말로 묘한 분위기였다. 그 기묘함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생각도 못한 배려를 받았다는 두근거림이 심장을 자극하는 탓인지, 노을 속에서 한층 멋지게 보이는 그 얼굴에 홀린 탓인지.

“......에나, 예쁘네.”

“뭐?”

“지금까지는 별로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뜬금없이 무슨 소리람. 눈을 깜박이며 대화를 곱씹다가 에나는 한순간 얼굴에 열기가 훅 차오르는 감각을 느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런 의미인 거야?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마후유의 눈동자를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아 에나는 황급히 몸을 돌려버렸다. 지평선 너머로 해가 잠기고 일순간 붉게 타올랐던 하늘은 어둑해지고 있었다. 붉은 기가 빠져나가는 세상 속에서 소녀는 홀로 새빨갛게 물드는 얼굴을 숨기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첫째 날 23 : 30, 숙소에서 / 시노노메 에나 x 아키야마 미즈키

“에나, 클렌징 잘 썼어. 많이는 안 썼다?”

“다 쓴 다음 사후보고로 말하기는. 미즈키 네 꺼 따로 챙겨왔잖아.”

“헤헤, 에나가 쓰는 브랜드는 어떠려나 궁금했단 말이지. 대신 에나도 내 꺼 써도 괜찮아.”

“됐네요. 난 이미 다 씻었고.”

그렇지, 에나가 먼저 씻었지. 그랬기에 지금 시노노메 에나가 하얀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걸터 앉은 채 있는 거고. 이제 남은 한 사람도 씻고 나왔으니 잘 준비는 전부 끝난 셈이다. 그를 생각하고서, 아키야마 미즈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미 화장기가 씻겨나간 얼굴에 찬물을 몇 차례나 끼얹으며 마음의 준비를 하려고 했건만, 다시금 긴장감이 올라오는 걸 어찌하지 못한다.

숙소에 처음 들어섰을 때만 하더라도 미즈키는 여유만만한 태도였다. 두 사람이 같이 지내기에 딱 알맞은 넓이에 인테리어도 귀여운 숙소의 환경에 만족하며 여기저기 살펴보다가, 커다란 침대 하나만 놓여있는 걸 확인하고서 아가씨는 소악마처럼 웃음을 지었던 터였다. 큰일이네. 침대 하나 뿐이잖아. 이대로는 나랑 에나낭이랑 둘이서 같이 자야만 하는 거 아냐? 싱글싱글 웃으며 폭신한 침대에 털썩 걸쳐앉았던가. 먼저 찌르고 들어가면 부끄러워진 상대가 발끈하며 뭔가 대꾸를 해줄 거고, 티격태격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 공기 중에 아무래도 좋을 가벼움만이 남게될 거라는 게 나름의 계산이었다.

그럴 생각으로 예약한 방인데. 덤덤하게 답한 에나가 짐을 풀어내리는 걸 지켜보며 미즈키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아니, 의도적으로 더블 베드 숙소로 예약한 거라고? 숙박권이 생겼다며 권유를 해오길래 당연히 받을 때부터 선택의 여지 없이 정해진 곳으로 오게된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뭐야. 에나는 의도적으로 한 침대에서 잘 생각이었단 거야?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미즈키는 잠깐 동안 호흡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뒤돌아선 채로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그녀를, 짐을 풀던 에나가 의아함 섞인 눈으로 쳐다보며 지나갔던 게 점심 무렵의 일이었다.

잠들 때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면 된다. 그렇게 판단을 미뤄두고서 미즈키는 관광지에서의 하루를 에나와 함께 즐겁게 보냈다. 단풍나무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둘이서 걷기도 하고, 온갖 방식으로 단풍을 넣어둔 디저트들을 잔뜩 시켜 나눠서 먹기도 했으며, 포토존이라고 할만한 장소는 죄다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어댔다. 에나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언제나 그랬듯이 너무나 즐거웠기에 미즈키는 숙소에 대한 걱정은 어느 순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럼, 잘까?”

“으, 으응.”

자정으로 향해가는 시간. 평소라면 지금부터 그들의 활동이 시작되었겠지만, 오늘 두 사람은 관광지에 놀러온 관광객의 입장이었다. 낮에 그토록 열심히 돌아다닌 탓에 확실히 피곤하기도 했다. 체력이 어느 정도 있는 미즈키가 그렇게 느끼고 있다면 에나는 한층 노곤한 상태일 게 분명하다. 기왕 여행을 왔으니 트럼프 게임 같은 거라도 하면서 밤샘하지 않을래, 따위의 제안 씨알도 먹히지 않겠지. 난 바닥에서 잘게, 라고 말하면......에나의 성격을 생각해봤을 때 그도 통하지 않을 건 뻔하다. 분위기만 이상해지리라. 그렇다면, 그렇다면 말이지.

“미즈키, 수면등으로 조명 바꿔줘.”

“그, 그 전에 잠깐!”

작게 하품을 하다가 미즈키가 외친 소리에 에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과 에나의 사이드백을 집어들고 침대로 쪼르르 다가와서, 미즈키는 그를 침대 중앙에 길게 늘어뜨려놓았다. 하얀 이불보 위로 길쭉한 경계선을 만들어낸다. 양쪽으로 양분된 침대로 흘끗 시선을 주었다가 에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미즈키를 쳐다보았다. 절묘한 장난을 생각해냈을 때마냥 의기양양하게 미소지으며 미즈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후후, 확실히 정해두고 자야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선 넘어오면 안돼! 라는 거지. 에나, 이런 부분에 민감할 거잖아? 이렇게 해야 안심하고 잘 수 있을 거 같아서.”

“이런 거 하고 싶지 않은데.”

“그치만 신경 쓰이잖아. 다른 사람이랑 같은 침대에서 자는데 혹시나......”

“그렇게 해야할 상대랑은 애시당초 같은 방에서 잘 생각 안해. 미즈키, 바보야?”

“그, 그건......”

몰아붙이는 말에 대꾸할 말이 궁해졌는지 미즈키는 입고 있는 분홍색 귀여운 잠옷을 손으로 꾸깃꾸깃 쥐었다. 에나의 기분을 생각한단 핑계를 대고 있지만 결국엔 미즈키 자신이 도망치려고 꾀를 짜내고 있을 뿐이다. 하여간 이런 면에선 변함없이 겁쟁이란 말이야. 제법 오래 함께 지내온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제는 손에 잡힐 듯 보여서, 에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럴 때는 붙들고 입씨름을 해봤자 의미없다. 이미 내려진 결론을 밀어붙이는 게 제일. 그렇게 생각하며 에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명 스위치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 은은한 수면등을 켜고는 나머지 조명들을 꺼버린다. 달콤한 꿈에 잠겨들 수 있을 듯한 안온한 빛이 밤의 어둠 위로 살짝 덧씌워졌다.

“올려둔 거 치워. 자는데 방해돼.”

“에나......”

“이상한 소리 더 하면 화낼 거야? 오늘 제법 즐거워서 나 기분이 꽤 좋거든. 안 좋은 기억을 남길 필요는 없잖아?”

“......하여간 막무가내야.”

잠시 머뭇거리지만, 어떻게 하더라도 지금의 흐름에서 이길 수 없음을 알고서 미즈키는 체념했다. 애시당초 자신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건 장난스럽게 가벼운 공기가 깔려있을 때 뿐이다. 아무래도 좋은 사안으로 자신이 장난을 걸고, 아무래도 좋은 사안에 대해 굳이 또 네가 반응을 해주고. 지금처럼 이상하게 간지러우면서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는 도저히 네게 저항할 엄두가 나지 않아. 경계선이랍시고 올려둔 사이드백을 미즈키는 침대 아래로 내렸다. 침대로 올라오며 에나는 새침하게 훗, 작게 웃음을 흘렸다.

“으응, 생각해보니 잘 때 상대방이 등을 돌리고 있으면 불안해서 잠을 제대로 못 잘 거 같기도 하네. 미즈키라면 그렇게 하지 않겠지? 굳이 침대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서 잔다거나.”

“아하하, 에나, 은근 요구사항이 많잖아.”

“평범하게 자면 된단 이야기야. 자, 이리 와.”

손을 잡고는 이불 속으로 끌어들인다. 물에 발을 담그기조차 무서워하는 공주에게 다가온 인어가, 겁내지 않아도 된다며 달래주며 바다 속의 세상으로 초대하듯이. 푸른 물보라 대신 하얀 이불 끝자락이 넘실거린다. 같은 이불 속에 들어온 채로, 미즈키는 자신의 손을 천천히 어루만져주는 에나의 손길을 느꼈다. 항상 그랬다. 괜찮다는 얼버무림을 방패 삼아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던 경계를 막무가내로 열어버리곤, 그 너머로 들어와 손을 뻗어줬었다. 뭐가 괜찮다는 거야. 제대로 도와달라고 말했어야지. 그렇게 말해줬던가.

손을 잡고서,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같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다. 잠을 청하지만 잠들 수 있을 리 없다. 희미한 조명에 눈이 익숙해져서 함께 누워있는 이의 얼굴이 뚜렷하게도 보였다. 예쁜 밤갈색의 머리카락, 새침하고 도도하면서도 한순간도 상냥함을 잃어버리지 않는 눈동자, 장난스레 웃을 때도- 화가 나서 찡그릴 때도- 감정을 견디지 못해서 울어버릴 때도 곱디 고운 아름다운 얼굴. 같은 침대에서 자는 일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하게 행동하던 네가, 지금은 수줍음을 견디지 못하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어깨를 떨고 있다. 그를 보면서, 잠들 수 있을 리가.

“에나.”

“......왜?”

“손 계속 잡고 있을 거야? 이렇게 하고 있으면, 나도 에나도 전혀 못 잘 거 같은데.”

“......”

대답해주지 않고 잡은 손을 한층 꼬옥 붙들어온다. 이게 대답인 셈일까. 작게 웃어버리고는 미즈키는 자신도 상대의 손을 꼬옥 쥐었다. 매순간 확신을 안겨주던 온기가 명확하게 스며든다. 그렇구나, 사실은 네가 같이 여행을 가자고 말해줬던 그 순간부터 나도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이렇게나 따뜻하고, 따뜻해서.

“잘 자, 에나.”

“......잘 자.”

속삭이는 목소리로 전해지는 인사는 달콤할 정도로 다정했다.


*둘째 날 07 : 15, 숙소에서 / 요이사키 카나데 x 시노노메 에나

여행지에서 맞이하는 아침이 얼마나 완벽한지를 묘사할 문장들은 많다. 커튼 틈새로 흘러드는 아침 햇살의 빛깔에 녹아들 수도, 도시의 참새들과는 전혀 다른 울음소리를 내는 산새의 지저귐에 귀를 기울일 수도, 포근한 이불 위로 넘실거리기 시작한 가을 냄새가 나는 서늘한 아침 공기에 집중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구태여 그 모든 요소들을 짚고 넘어갈 필요는 없었다. 시노노메 에나는 이번 여행에서 얼마나 완벽한 아침을 맞이하고 있는지를 단 하나의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곁에서 그 아이의 숨소리가 들렸다.

둥근 장지문 형태의 창문을 통해 아침 햇살이 실내로 스며들었다. 잘 짜맞춰진 다다미 방 중앙에 원없이 넓게 펼쳐둔 침구는 일어나기 싫을 정도로 기분좋게 포근하고 푹신했다. 두툼한 이불에 폭 빠져있는 아가씨들은 둘 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체질은 아니었고, 오전 7시에 들러붙는 졸음의 유혹을 이겨내기란 아무래도 불가능했다. 어쩌다 눈을 뜨기는 했으나 에나는 여전히 비몽사몽이었다.

뜨이지 않는 눈을 손등으로 부비적거리고는 곁을 돌아본다. 새하얀 이불 위로 길게 자수를 놓은 양 은빛 머리카락이 흩뿌려져 있었다. 몸을 살짝 웅크린 채로 요이사키 카나데는 달콤한 꿈을 꾸는 중이었다. 아마도 베개를 꾹 쥐고 있었을 오른손이 살짝 풀린 채 열려있는 게 하얀 꽃송이 같았다. 평온함 속에 풀어진 얼굴은 깊게 잠든 와중에도 아름다웠다. 일정한 간격으로 숨을 쉬는 모습조차도 귀엽고 사랑스럽다. 잠든 모습을 보고 있을 뿐인데 왠지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기분이야. 잠기운이 가시는 걸 느끼며 에나는 말없이 눈을 깜박여댔다.

가을의 하늘은 청명하게 높고, 가을의 바람은 스산하면서도 맑으며, 가을의 아침은 호수처럼 고요하다. 일출 때부터 아침을 알리던 이름 모를 새조차 지쳐 날아가버린 뒤에는, 세상은 가라앉은 수면처럼 조용해져서 곁에 잠든 이의 숨소리마저 선명히 들리게 된다. 카나데가 있는 방향으로 돌아누워 평온하게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에나는 멍하게 귀를 기울였다. 작게 들이마시고, 편안하게 내쉬고. 반복되는 소리는 단조로울 터인데도 한참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무의식 중에 자신도 그 아이와 같은 속도로 숨을 쉬고 있음을 에나는 깨달았다.

“......너무 좋아.”

지난 밤에 대단한 일을 하지는 않았다. 식후에 차를 마시고, 숙소를 배경으로 한참 둘이서 사진을 찍고, 지친 카나데를 데리고 세면을 한 다음 불을 끄고 이불 위에 나란히 함께 누웠다. 하나로 이어진 이불 아래로 손을 맞잡은 채로 늘 나누던 대화와 크게 다르지도 않은 이야기를 실컷 했다. 졸려서 점점 말수가 적어지는 카나데가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도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지나간 시간이 지금으로 이어진다. 그 모든 게 에나는 하염없이 좋았다.

형태를 이루고 있는 선이 하나같이 그토록 곱고 얇으면서도, 속눈썹만큼은 선명하게 진하다. 카나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에나는 지금껏 놓치고 있었던 굉장한 발견이라도 해낸 듯 새삼 두근거림을 느꼈다. 얼굴 때문에 이토록 좋아하게 된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 고아한 눈꽃과도 같은 미모에 마음이 녹아버린 부분도 분명 있긴 했다. 이처럼 잠든 카나데의 얼굴, 앞으로 더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을 흘려보내는 게 아쉬워져서 에나는 사진을 남기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잠든 사이 멋대로 사진을 찍는 게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건 알고 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거야. 딱 한 장만 찍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에나는 자신의 단말기를 찾아 팔을 뻗어 머리맡을 더듬거렸다. 다다미 특유의 까슬한 질감이 손가락에 느껴지다가 딱딱한 게 톡 닿는다. 전원을 켜고 액정을 확인하고서 에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시계가 7시 30분이라는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여기 여관, 7시부터 9시까지 식당을 개방하니 내려와서 아침 식사를 하라고 했었지. 깨끗하게 씻은 단풍을 장식으로 올린 하얀 쌀밥에 따뜻한 된장국, 취향에 맞춰 카레라이스나 하이라이스, 특산 튀김 등을 골라 먹으면 되는 뷔페풍이랬나. 숙소 후기에도 빠짐없이 아침 식사가 훌륭했단 이야기가 있었던 걸 생각하면 놓쳐선 안될 일정이었다. 더 늦기 전에 카나데를 깨워서 식사하러 가는 게 좋으려나. 에나가 그렇게 고민을 떠올린 순간이었다.

“으음......”

입속으로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카나데가 몸을 움직였다. 잠결에 살짝 뒤척이는 와중에 손이 움직여서, 마치 에나의 옷 소매를 붙드는 자세가 된다. 입을 희미하게 옴싹거리다가 다시금 푹 깊은 잠에 빠지는 모습은 그야말로 자그마한 소동물. 사람의 손바닥 위에 올라와 전해지는 체온으로 사르르 녹아버린 작은 눈토끼 같다. 푹신한 침구는 평소 어지러운 환경에서 최소한의 수면만 챙기며 살아온 소녀에게 벗어나기 힘든 단잠을 선사해주는 모양이었다.

깨워선 안되겠다. 카메라의 셔터음도 내지 말아야지. 결론을 내리고는 에나는 단말기를 옆으로 밀어두었다. 카나데가 행복한 꿈을 꾸고 있다면 그를 지켜주고 싶었다.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그 속에서 누구를 떠올리고 있는지 알 수 없더라도 좋아. 푹 자고 일어난 다음 기운을 차린 모습으로 네가 환히 웃어준다면 그걸로 충분해. 자신을 알아봐주고 소중하게 대해준 사람이 영원토록 행복하길 기원하는 건, 사랑에 빠진 소녀라면 누구나 품게 되는 마음이겠지.

카나데의 곁에 붙어서 눕고는 에나는 작게 하품을 했다. 방을 밝히는 아침 햇살이 희롱하는 탓에 눈을 뜨기는 했지만 졸린 건 여전했다. 그렇다면 그냥 카나데와 함께 체크아웃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걸칠 때까지 좀 더 자버리자. 둘이서 특별한 늦잠을 즐기는 거야. 입소문을 탈 정도로 호화스럽다는 아침 식사를 놓치게 되는 건 조금 아쉽긴 하지만 사실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다. 끼니는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산 도시락으로 떼워도 충분하다. 어느 쪽이 특별하고 중요한지 저울에 걸고 따질 필요도 없다.

“카나데, 잘 자.”

마음 속에 가득찬 감정으로 물들인 한 마디를 속삭인다. 대답 대신 고른 숨소리만이 들려온다. 빙긋 웃고는 에나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여행지에서 맞이하는 완벽한 아침이었다.


*둘째 날 13 : 20, 단풍 거리에서 / 아사히나 마후유 x 요이사키 카나데

가을은 식욕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식욕에 지고 말았다, 라는 표현은 적어도 아사히나 마후유에게는 쓰일 일이 없을 터였다. 아가씨 본인부터가 자신에게는 식욕 따위 없다고 단언했겠지. 죽지 않기 위해 할당량을 채우는 것마냥 최소한의 양만 챙겨먹을 뿐. 사정을 알고 있기에 나이트코드의 멤버들은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참새가 모이 한 입 쪼아먹는 듯 깨작거리는 마후유를 탓하지 않았다. 뒷풀이로 모인 자리에서 아가씨가 주문했던 음식을 반절 가까이 남기는 일에도 다들 익숙해졌고 말이다.

그랬기에 이번 여행에서 아사히나 마후유가 보여주는 식도락 대장정에 요이사키 카나데가 놀라움을 느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첫째 날 점심 식사로 나온 소바를 남김없이 먹은 걸 시작으로, 마후유는 거리를 둘러보는 동안 군것질로 단풍 경단 하나와 꼬치튀김 하나를 먹었다. 특별실에 따로 제공되는, 모밀장어와 소고기 완자를 전채로 시작되는 코스 요리도 마지막 디저트로 나온 단팥죽까지 빠짐없이 모두 맛봤다. 중간에 나온 야채 절임과 두부 찜을 약간 남기긴 했으나, 나온 음식들의 양을 생각한다면 조금은 남기는 편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일식과 양식 중 어느 쪽으로 할 건지 묻는 말에 양식이라고 답한 다음, 오전 8시에 맞춰 제공된 버터 발린 모닝롤과 달걀 프라이, 소시지와 스프까지 깔끔하게 먹었다. 거기에 이어 점심 식사라는 명목으로 키츠네 우동을 먹고 나온 게 방금 전이었다.

지난 저녁의 일이다. 마후유, 맛있어? 저녁 식사 때 계란말이를 오물오물 맛보고 있는 마후유에게 카나데는 약간의 기대감을 품으며 그렇게 물었다. 맛을 다시 느낄 수 있게된 걸까. 마후유를 괴롭게 만드는 사슬 하나가 풀려나간 걸까. 그렇다면 좋을 건데.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카나데를 물끄러미 마주 바라보다가, 씹고 있던 음식을 삼키고는 마후유는 고개를 내저었다. 잘 모르겠어. 무슨 맛인지는 몰라. 그래도, 오늘은 먹고 싶어.

카나데가 곁에 있어줘서 먹고 싶단 생각이 든 걸지도. 덧붙여 나온 그 말에 순수하게 들떠서 카나데는 그 다음 이어진 마후유의 요청에 별 생각없이 기꺼이 응해줬다. 일품요리로 나온 구운 생선살을 젓가락으로 집어 마후유의 입에 넣어준다. 몇 차례나 그를 반복하다가, 마무리 식사를 가져온 종업원이 그 광경을 보고는 정말로 친한 친구 사이이신 듯 하다고 웃으며 꺼낸 말에 카나데는 정신을 차렸다. 자각 못하고 있었지만 마후유에게 아- 를 했던 거구나. 머리카락까지 붉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지경으로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아가씨는 자기 몫으로 나온 밥을 말없이 푹푹 삼켰었다.

“어제 오늘 잔뜩 먹었네......”

평소 하루 끼니를 작은 컵라면 두 개 정도로 해결하며 지낸 카나데였다. 그에 맞춰 작아진 위장에 1박 2일 식도락 여정 동안 잔뜩 음식을 밀어넣는 건 버거운 감이 없잖아 있었다. 점심으로 우동까지 먹은 건 역시 조금 지나쳤을지도. 평소 먹는 양이 얼마 되지 않아 위가 작은 건 매한가지일 터인데도 마후유는 조금도 힘든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식후 산책으로 거리를 걷고 있는 지금도 느긋하게 노점들을 살피는 중이다. 도미빵을 판다는 노점 근처에서 마후유가 걸음을 멈췄을 때, 카나데는 속으로 또? 를 외치고 말았다.

“카나데, 저거......”

“으응, 괜찮아. 먹고 싶다면 먹는 게 좋다고 생각해.”

“먹는 게 아냐.”

거대한 도미빵의 주둥이 속으로 집어삼켜져 단팥에 파묻히는 상상을 하다가, 카나데는 마후유가 가리키고 있는 방향을 확인했다. 도미빵 노점 옆으로 색색의 아크릴 장식을 모빌마냥 달아둔 노점이 보였다. 단풍을 넣어 만든 장신구들이 진열대를 채우고, 주렁주렁 엮인 열쇠고리들 옆으로 수수한 느낌의 책갈피들도 달려있었다. ‘마음에 드는 단풍잎을 가져오시면 멋진 추억으로 만들어서 드립니다’. 큼지막하게 붙어있는 간판이 노점의 핵심 서비스를 잘 설명해주고 있었다.

“예쁘다. 마후유, 맘에 드는 게 있어?”

“단풍, 주워오면 장식으로 만들어주는 걸까. 추억......”

“예에- 아가씨들. 맘에 드는 예쁜 단풍잎을 찾아서 가져오면 저렴한 가격에 책갈피나 열쇠고리로 만들어주고 있어요. 단풍잎 여러 개가 있으면 하바리움 보틀 같은 거도 가능해.”

“해볼래?”

카나데의 말에 마후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관광객들의 발에 밟히지 않은 단풍잎을 찾으려면 거리 외곽을 따라 돌아보는 게 좋다는 노점 주인의 조언에 따라 둘은 단풍잎으로 흠뻑 칠해진 길을 따라걸었다. 오래 걸리지 않아 야트막한 비탈에 우뚝 솟은 나무 몇 그루 아래로 상태가 깨끗한 단풍들이 융단처럼 깔린 장소를 찾아내곤 아가씨들은 조심스레 바닥을 살피기 시작했다.

어제 여행지에 도착한 이후로 한껏 보았던 단풍이었다. 가볍게 예쁘다- 하는 감상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중 하나를 따로 골라내려고 하니 쉽지가 않다. 완전히 붉게 익은 단풍도, 물들어가던 와중 떨어진 듯한 단풍도, 샛노랗게 되어 봄날의 개나리 같은 단풍도 모두 예뻤다. 맵시 있게 생긴 단풍도, 안정감이 있을 정도로 큼지막한 단풍도 각자 매력적이었다. 찢어지거나 말라버린 잎들을 제외하더라도 시선이 가는 후보가 넘칠만큼 많았다. 가을 단풍의 이미지를 생각한다면 완연하게 붉으면서 잎이 뾰족하게 솟은 형태가 좋을까. 웅크리고 앉아 후보들을 심사하다가, 살며시 어깨에 닿아오는 손길에 카나데는 고개를 들었다.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마후유의 손에 단풍이 여러 개 들려있었다.

“정했어?”

“못 정하겠어. 뭐가 더 좋은 건지 알 수가 없어.”

“마후유가 보기에 예쁜 단풍잎이면 좋지 않을까?”

“그걸 모르겠어. 이 중에 어느 잎이 예쁜 건지, 보다 가치가 있는 건지......내겐 전부 똑같게 느껴져. 그렇지만......”

“아무 거나 고르고 싶진 않은 거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마후유가 왠지 슬퍼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다고 카나데는 생각했다. 마후유는 선택을 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거야. 마후유가 자신의 의지로 의미와 가치를 찾아내고 자신의 선택에 대해 설명하기도 전에 주변에서 멋대로 값어치를 매기는 그들만의 기준을 들이밀어왔으니까. 계속해서 본인의 의지가 부정당하는 경험이 계속된다면 누구도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되겠지. 그게 단지 장식에 어울릴 소재를 하나 골라내는 가벼운 일이어도.

그렇다면 자신이 대신 골라주는 걸로 마후유를 도와줄 수 있는 걸까. 그건 그저 판단을 내려주고 결론을 들이미는 상대가 잠시 동안 요이사키 카나데로 바뀔 뿐이지 않은가. 마후유는 노력하고 있어. 자신이 마주하는 세상에 대해 제대로 느끼고, 생각하고, 표현하려고 힘내고 있는 거야. 그를 응원하기 위해 곁에 있어주기로 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을 하자.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는 카나데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지금 집어든 단풍잎들은 마후유가 보기에 애매하더라도 나름 괜찮았던 애들인 거지? 마후유가 그 애들을 선택할 때 느꼈던 걸 나한테 이야기해줬으면 좋겠어. 그걸 듣다보면 정할 수 있을지도 몰라.”

“......설명하기 어려워. 별 생각없이 고른 거니까.”

“응, 그래도 괜찮아. 별 거 아니어도 마후유가 말해준다면 난 들을게.”

“......”

지나치게 어려운 과제를 받아들었을 때 어린 아이들이 보이는 반응마냥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가, 마후유는 주워든 단풍잎들을 보았다. 하나하나 살피다가 흘끔 카나데를 쳐다본다.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카나데는 마후유를 기다려주었다. 얼마든 시간이 걸려도 괜찮아. 그렇게 말하듯 곱게 깔린 단풍 위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이건, 줄기 부분이 상하지 않고 선명하게 남아있어서 골랐어. 고민하다가 꺼내든 첫 마디는 단순하면서도 또한 솔직했다. 첫 번째 후보에 대해 말한 뒤 마후유는 다음 잎을 가리켰다. 이건 붉은 기랑 초록 바탕이 반반 나뉘어 있길래 골랐고, 이건 잎맥이 사람의 혈관처럼 보여서 골랐어. 천천히 설명을 이어가다가 마후유는 개중에 마땅히 맘에 든 이유를 표현하지 못하는 후보는 바닥에 내려놓았다. 한 차례 순회가 끝나도 처음부터 심사가 반복되어 들고 있는 단풍이 하나하나 줄어든다. 이건 뼈대가 튼튼해보여서, 굳이 가공하지 않더라도 오래 유지될 듯 싶기에 골랐어. 그렇게 말했을 때에는 아가씨의 손에는 양쪽 각각 하나씩 두 개의 단풍잎만 남아있었다.

“치열한 경합전이었네.”

“이 두 개는, 양쪽 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그럼 둘 중에 하나를 내가 받아갈게. 마후유가 마음에 든다고 생각한 단풍을 하나 받을 수 있으면 기쁠 거야.”

“......그래, 그러면 되겠네.”

잠시 생각하다가 마후유는 들고 있던 단풍 중 하나를 카나데에게 내밀었다. 뼈대가 튼튼해보여서 생기가 오래 유지될 거라고 말한 단풍이었다. 선택받은 단풍잎은 주변에 깔린 다른 단풍잎들과는 달리 어딘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마후유가 골라줬다는 사실에서 그만의 의미가 생겼기 때문일까. 타오르는 불꽃 같은 단풍을 들여다보다가 카나데는 밝게 웃었다. 마후유, 고마워. 진심을 담아서 감사 인사를 전한다. 그를 듣고는 마후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택받은 단풍잎들이 열쇠고리에 담긴 보물로 가공되는 동안, 소녀들은 노점 앞에서 손을 잡은 채 기다렸다. 가까워진 거리감이 부끄럽기는 했으나 마후유가 다가와주는 상황이 싫지 않아 카나데는 이어진 손을 살며시 매만졌다. 손을 맞잡은 정도로 부끄러워하기에는 이미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잔 사이가 되기도 했고. 친구끼리 사이가 좋구만. 열쇠고리 하나의 가공을 끝낸 노점 주인이 지나가며 던진 말에 어깨를 움찔거리긴 했으나 손을 풀지는 않았다.

아크릴 틀 안에 단풍을 넣었을 뿐인 열쇠고리는 별다른 장식 없이 지극히 수수한 형태이긴 했으나, 안에 든 단풍이 훌륭하게 보존되어 오히려 그 수수함이 돋보였다. 귀중품의 가치란 결국 자신이 얼마만큼의 의미를 그에 부여하는지에 달렸다고 했던가. 그런 면에서 카나데는 여행의 추억이 담긴 열쇠고리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영원히 보존된 단풍잎은 주웠던 순간 그대로 강렬한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열쇠고리 속 단풍잎을 볼 때마다 이번 여행이 생각날 터였다. 마후유와 함께 다녀온 단풍 여행의 기억.

“......카나데는 언제나, 내게 의미를 주는 사람이구나.”

“응?”

“여행이라는 일탈, 해봐서 좋았다고 생각해.”

아마도 일탈에 같이 해준 게 카나데여서. 뒤에 붙은 말은 곁에 있는 이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마후유가 말해주는 ‘좋았다’ 라는 감상만으로도 기쁜 건지 다정하게 미소짓는 카나데를 바라보다가 마후유는 손에 들어온 열쇠고리를 소중하게 쥐고 품에 꼬옥 안았다. 가을의 색채가 소녀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물들여가고 있었다.


*둘째 날 15 : 15, 역 앞 거리에서 / 아사히나 마후유 x 시노노메 에나

“저기, 바쁘지 않다면 캐리커쳐 초상화 하나 어때요? 한 장당 1,000엔-”

기차 출발 시간이 될 때까지 역 주변의 기념품 가게를 둘러보기로 하고 나선 길이었다. K와 Amia에게 줄 여행 선물을 정하지 못하고 첫 번째 가게를 나왔다가 두 아가씨는 달갑지 않은 상대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일부 땋아내리긴 했지만 정돈되지 않고 덥수룩한 머리카락, 눌러쓴 동글 안경, 껴입은 적갈색 코트는 결이 빳빳하고 소매에는 물감 자국이 휘장처럼 남겨져 있다. 코트 주머니로 붓펜 하나가 머리를 툭 내밀고 옆구리에 큼지막한 스케치북을 들고 있는 모습부터, 어딘가 나사가 살짝 풀린 느낌으로 순박하게 헤헤 웃고 있는 표정까지 그야말로 거리의 예술가라고 할만한 인물상이었다. 그러니까, 유명 관광지나 행사장에 가면 어렵지 않게 마주칠 수 있는 그런 사람들.

상대하지 말고 그냥 가자고 하겠지. 동행하는 이의 반응을 짐작하며 아사히나 마후유는 다소 곤란한 처지에 주로 내보이곤 하는 어색함 깃든 미소를 지어보였다. 거리감을 명확히 두는 웃음과 함께 한쪽 손을 정중하게 들어 거부 의사를 내비치면 웬만한 사람들은 그 이상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완곡한 거절이 가끔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눈치가 없거나 눈치가 없는 척 하는 사람들을 상대할 때가 그랬다. 걱정마세요. 예쁘게 그려드릴게요. 스케치북을 만지작거리며 오히려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은 분명 그런 부류에 속할 터.

“괜찮지 않아? 어차피 시간도 좀 남고. 그려달라고 해봐.”

“에나?”

“어머, 잘 생각하셨어요. 자아, 이쪽으로 오세요.”

배신당한 끝에 팔려가는 처지가 되어 마후유는 주춤거리며 길거리 화가의 뒤를 따라갔다. 고개를 슬쩍 돌리면 짐짓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상황을 관망하고 있는 시노노메 에나가 보인다. 아마도 호기심이 생겼으리라. 평생 그림 그리는 일 밖에 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도 그밖에 남지 않아서 약간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또한 그림을 그리기로 했을, 거리의 자유로운 예술인이 과연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을지. 만족스러울 만큼의 결과를 내지 못하는 그녀 자신의 붓과 견주어서 이름 모를 상대가 휘두르는 붓이 얼마만큼의 역량을 보여줄지. 일종의 호승심일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견본으로 삼아 그려달라고 하기에는 괜한 저항감이 생겨 대신 동행인을 들이밀었으리라.

어중간하게라도 일단 가면을 쓰게 되면 타인의 부탁을 거절하기 힘들게 되어버리는 마후유였다. 따라오라는 곳으로 따라가고, 앉으라는 곳에 앉는다. 간이 이젤 앞에 놓여있는 작은 나무 의자는 좌우 균형이 묘하게 맞지 않아 앉아있기가 고역이었다. 엉거주춤하게 자세를 유지하며 앉은 채로 아가씨는 애써 미소를 유지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스케치북을 펼치는 화가는 그 미소를 손님이 만족하고 있다는 신호로 여긴 모양이었다.

“여기서 계속 초상화 그려주는 일을 하시는 건가요?”

“으응, 지금 시기에만 와요. 단풍이 필 시기라, 사람들이 많이 오니까. 다른 계절엔 더 좋은 장소에서 하죠. 관광지도 가고, 행사가 열린다면 도쿄나 오사카 같은 곳에서도 하고.”

“흐응.”

“뭐, 꼭 속물적인 이유로만 정하는 건 아니구요. 전 사람들이 근심 없이 웃는 모습을 그리는 게 좋거든요. 그런 얼굴을 볼 수 있는 장소가 관광지 외에는 흔하지 않으니 말이에요.”

살갑게 미소 짓는 아이를 연기해내는 마후유의 모습이 하얀 종이 위에 새겨진다. 비스듬하게 화가 뒤에 선 채로 조금씩 채워져가는 그림을 훔쳐보며 에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선 하나를 그어내릴 때 손의 동작을 살피고, 그렇게 그려진 선들이 어떤 형태로 실재를 모방하는지 지켜본다. 어딘가 퉁명스러운 듯 하면서도 호기심이 어린 표정을 하고 있다가, 오고가는 대화 도중 ‘근심 없이 웃는 모습’ 이란 표현이 나온 순간 에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에나, 꼭 시험 감독관처럼 행동하고 있네. 모델의 자리에서 두 명의 화가를 지켜보며 마후유는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저희를 불러세운 거도 근심 없이 웃는 모습이어서 그랬던 건가요?”

“그보다는 먼저 와주는 손님은 별로 없다보니 반사적으로 호객 행위를 한 거긴 하지만, 그러네요. 저 분들은 여행을 즐기고 있구나, 하는 인상에 말을 걸긴 했어요.”

“그렇군요......”

그 이후로 대화는 없었다. 에나는 말없이 화가가 마후유의 초상화를 그리는 과정을 구경하였고, 화가 또한 작업에만 집중해서 잡다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마후유 또한 미소를 유지한 채 침묵을 지켰다. 10분, 그보다는 조금 더 걸렸을까. 완성했어요. 그 말과 함께 내밀어진 종이 위에는 얼굴선이 한층 뚜렷하게 강조된 라일락 아가씨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눈꺼풀의 묘사와 눈 아래의 음영 표현이 강렬하여 순하게 웃고 있는 모습임에도 전해지는 인상은 진했다. 특징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게 캐리커쳐 기법의 특징임을 감안해도 독특한 묘사법이었다. 그림체로 성격을 추정해본다는 심리 테스트 같은 걸 적용해보면,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보기보다 자의식이 강하다는 식의 평가가 나올지도 모른다.

지폐 하나를 받아들고는 신나서 손까지 흔들어주는 화가를 뒤로 하고서 마후유와 에나는 자리를 떠났다. 보여줘. 그렇게 말하고는 에나는 마후유가 들고 있던 그림을 받아들었다. 뒤에서 과정을 내내 지켜봤지만 완성된 작품을 면밀히 분석하는 건 별개의 사안인 모양이었다. 그림을 훑어보는 동안 걸음은 자연히 늦어진다. 보폭을 맞추면서 마후유는 에나를 가만히 살폈다. 살짝 찌푸려졌던 눈썹이 위로 치켜세워졌다가 느슨하게 처진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쉰다. 그 짧은 시간에 말이지. 작게 내뱉는 말에 묻어나는 옅은 감정은 아마 울적함이리라.

“내가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겠다고 나서면, 돈을 내줄 사람들이 있으려나. 지금 실력으로......”

두 번째 기념품 가게를 돌아보던 중에 에나는 불쑥 그렇게 말을 꺼냈다. 마땅히 대답해줄 말이 생각나지 않았고, 말을 꺼낸 이 또한 대답을 기대하고 있지 않은 듯 보였기에 마후유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나이트코드의 다른 멤버들이었다면 어떻게 대응했을까. 자신은 기꺼이 돈을 낼 거라고 다독여주거나 호객 행위는 자신이 맡아주겠다며 분위기를 바꾸려고 했을지도. 순백색 상냥함도 분홍색 다정함도 마후유로선 흉내낼 자신이 없다.

세 번째로 찾은 가게에서 여행 기념 선물들을 고른 다음 둘은 기차역 내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초콜렛 아포가토를 앞에 두게 되었을 때에도 에나는 기분이 나아지지 않은 듯 보였다. 음식을 먹기 전 사진을 찍는 중요한 절차도 생략하고 곧바로 아이스크림에 숟가락을 푹 내리꽂는다. 달콤함을 한 입 맛본 다음에도 기운을 내지 못하는 에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마후유는 입을 열었다.

“에나, 날 그려줘.”

“뭐니, 갑자기. 신경 써주지 않아도 돼.”

“어차피 한동안 기다려야만 해. 어렵게 생각하고 있을 시간에 연습이라도 하라는 거야.”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너 진짜 말 듣기 좋게 한다.”

“도움이 됐어?”

“되겠냐. 하아, 자극은 되네. 그래, 그러지 뭐. 어차피 할 거도 없는데.”

쿡쿡 찔러대는 손길에 잔뜩 성이 난 고양이마냥 눈꼬리를 치켜올리고 상대를 흘겨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에나는 자신의 짐에서 그림 도구들을 꺼내들었다.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이거라도 한다. 가볍게 심심풀이라도 하겠다는 듯 말하긴 했으나, 스케치북을 펼치고 펜을 든 순간 에나는 더없이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야, 좀 예쁜 표정 지어봐. 그렇게 툭 던지는 말을 한 다음에는 더 이상 입을 열지도 않았다.

예쁜 표정을 지으라고 주문받기는 했으나 마후유는 변함없이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였다. 애시당초 변화가 있기를 기대하지도 않았던 건지 에나는 말없이 그림을 그려나갔다. 구도를 잡기 전 펜을 들고 축을 잡아보기도 하다가, 마후유의 얼굴을 흘끔 바라보고는 선을 그어나가는 작업을 반복해나간다. 여행의 끝자락에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소녀는 사라지고,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때마다 손등으로 슥 닦아내고는 자신이 깎아나가는 세계에 집중하는 소녀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매장 내에 흐르는 곡이 하나 끝나고, 다음 하나가 끝난다. 10분 남짓되는 시간은 이미 지났다. 15분, 그리고 20분. 고작 한 입 먹은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고 있는 광경을 바라봤다가 마후유는 다시 에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됐다.”

열기 오른 한숨이 작게 흘러나온다. 달성감과 충족감, 아쉬움과 속상함이 뒤섞인 한숨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에나는 완성된 그림을 마후유에게 넘겨주었다. 얼굴선이 날카롭게 그려진 그림 속의 마후유는 서늘하다고 할까, 일견 사납게 날뛰는 감정을 머금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강렬한 인상을 주는 건 분명하나, 일반적으로 초상화 제작을 부탁하는 쪽에서 기대할 이미지는 아니었다. 말하자면 특정 ‘사람’ 을 중심으로 묘사한 그림이라기보다는, 그 ‘사람’ 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낸 다소 추상적인 그림이란 느낌이었다. 표현력이 부족한 건 아니다. 그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냥 좋아해줄 방향성이 아닐 뿐.

“팔릴만한 그림은 아니지? 내가 사람을 묘사하는데 서툰 부분이 있기도 하고. 그거만 문제는 아니겠지만.”

“......좋았어.”

“뭐가?”

“날 그려줄 때 에나의 모습이, 좋았어. 그림을 그릴 때 에나는 그런 얼굴을 하는구나. 나이트코드로 작업할 때에는, 보이지 않으니까.”

“......뭐야, 그게. 감상을 말해줄 거면 그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라구.”

핀잔을 주듯 말하면서도 에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뒤늦게 주문했던 음식 생각이 났는지 숟가락을 들었다가 이미 녹아 액체가 되어버린 아이스크림을 확인하고는 멋쩍게 어깨를 으쓱거린다.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 나온 그림이니까, 또한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말을 덧붙일까 하다가 마후유는 생각을 바꿨다. 모든 걸 언어로 전할 필요는 없는 법이다. 에나 또한 그렇게 느끼고 있겠지.

“그림, 줄게. 여행 기념으로 가져.”

“그래.”

“여백에 예명 남기는 건, 나중에......내가 유명해지고 나서 해줄테니까. 그때 다시 제대로 네 초상화를 그려줄게.”

“알겠어.”

네가 말하는 언젠가의 미래에도 나는 당연히 그림을 그려줄 수 있게끔 가까이에 있는 거구나. 묘한 감정을 느끼며 마후유는 건네받은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누군지 모르는 상대가 그려준 빙긋 웃고 있는 자신의 초상화보다, 에나가 그려준 무표정한 자신의 초상화가 마음에 들었다. 언젠가의 미래에는 내가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을 네가 그려주게 될지도. 그렇게 생각하고는 마후유는 이번 여행의 기념품을 챙겼다. 추억을 다루듯, 소중하게.


*둘째 날 18 : 50, 기차에서 / 시노노메 에나 x 아키야마 미즈키

역에서 출발할 때만 하여도 단풍을 닮은 노을빛이 찰랑이던 창문은 이제 검게 물들어 실내 조명을 고스란히 반사하는 거울처럼 변해있었다. 캔버스 위로 어둠을 도료삼아 구석구석 칠하면 이런 형태가 되겠지. 어둠이 만들어낸 거울에 깜짝 놀랄 정도로 귀여운 여자아이가 비치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가, 스스로를 두고 깜짝 놀랄 정도로 귀엽다는 수식어를 떠올렸단 지점에서 아주 약간 민망함을 느끼며 시노노메 에나는 시선을 돌렸다.

기차 내부는 침묵하도록 명령이 내려온 것마냥 조용했다. 같은 열차칸 내에 다른 승객들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제각기 선을 지키며 목적지까지의 시간을 보내는 모양이었다. 말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는 공간 내에 달리는 기차가 간헐적으로 덜컹이는 소리만이 하나의 기점처럼 자리매김한다. 차체가 흔들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함 속에서는 어쩐지 멍해져서, 없던 졸음마저 살며시 다가오게 된다. 작게 하품을 했다가 에나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까지 잠들기는 좀 그랬다.

“으음......”

곁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흐른다. 굳이 고개를 돌려 그를 확인하지 않고 에나는 미소를 지었다. 세상 모르고 잠든 이를 두고 살짝 놀리는 말을 해보자. 아키야마 미즈키는 지난 밤 뭐가 그리 부끄러웠는지 한숨도 제대로 잠들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에나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졸음이 한껏 묻어있는 눈을 하고서 ‘좋은 아침’ 하고 인사를 했었던가. 바보, 뭐가 좋은 아침이라는 거야. 당장이라도 풀썩 엎어져 잠들 거 같은 얼굴을 하고서는. 그런 주제에 여행 둘째 날에는 또 열심히 놀러다녔단 거다. 그렇게 하루를 보냈으니, 기차에 올라탔을 때 미즈키가 어떤 상태였을지는 굳이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

일전에 기차에서 사먹는 도시락의 맛 운운하는 말을 했었지만 애석하게도 아키야마 미즈키에게 이번 여행에서 기차에서 파는 도시락을 먹을 기회는 없다. 정신없이 잠든 애를 굳이 깨워서 식사를 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도착한 다음 역 주변의 가게에서 파는 라멘이라도 같이 나눠먹고서 헤어지지 뭐. 늦은 시간 다른 누군가와 같이 식사를 하는 사진을 올린다면 재밌는 반응들이 많이 붙을지도 모른다. 깜짝 놀랄 정도로 귀여워서 어쩔 수 없이 SNS 상의 인기인인 시노노메 에나가 감당해야할 스캔들이라는 거다.

“그런 나하고 단둘이 여행을 왔으면서도 갈피를 못 잡고, 빙빙 돌기만 하고 말야. 이 바보.”

잠든 상대는 대답이 없다. 항변도 하지 못하겠지. 일방적으로 콕콕 찌르는 말을 하고서 에나는 괜히 멋쩍어진 기분에 콧노래를 작게 흥얼거렸다. 지난 이틀 간의 기억이 벌써 오래된 추억처럼 그립게 느껴졌다. 즐거웠지. 정말로 즐거워서 다음에도 이렇게 둘이서 여행을 왔으면 좋겠다, 몇 번이나 생각했었다. 미즈키도 같은 기분이었을까.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만......이런 부분에서만 유독 솔직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상대이다보니.

덜컹. 차체가 한 차례 더 가볍게 흔들린다. 물병 내의 수면이 희미하게 떨릴 수준의 진동이었다. 딱히 몸의 균형이 깨어질 충격은 아니었으나, 그 여파로 좌석에 앉은 채 잠들었던 미즈키의 상체가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미즈키. 놀라서 그 아이의 이름을 속삭이며, 에나는 자신의 어깨로 상대의 머리를 받아주었다. 나름 부드럽게 대처해낸 걸까. 에나의 어깨를 베개삼은 채로 미즈키는 여전히 곤하게 잠든 모습이었다.

“......정말이지.”

틈만 나면 장난칠 기회를 엿보며 항상 가벼운 분위기를 유지하려는 주제에, 언제나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려는 강박을 가지고 있는 미즈키였다. 제대로 깨어있는 상태였다면 에나의 어깨에 이처럼 기대는 모습을 절대로 보여주지 않았겠지. 기대어오는 미즈키의 몸이 생각보다 무게감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게 나름 기분좋아서 에나는 두근거림을 느꼈다. 이처럼 자신에게 기대어 잠든 미즈키가 무척이나 어린 아이처럼 느껴졌다.

“좀 더 어리광 부려도 되는데.”

아아, 잠들어있다고 안심해서 무슨 말이든 해버리고 있네. 전해지지는 않을 거라는 비겁한 안도감 속에 쭉 전하고 싶었던 말을 곁에서 속삭인다는 충족감을 느낀다. 왠지 굉장한 반칙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에나는 쿡쿡 웃었다. 이 순간이 로맨스 소설의 한 장면이었다면 사실은 잠들어 있지 않았다, 같은 흔한 전개가 이어지겠지만 지금의 아키야마 미즈키는 확실하게 잠든 상태다. 그거야, 그렇게나 바보 같은 이유로 하룻밤을 꼬박 새웠는걸. 바보, 바보 미즈키.

반칙이라 부를만한 전능한 권한을 얻은 기분이 되어 에나는 잠든 미즈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감겨있는 눈을 따라 쭉 뻗은 속눈썹이 예쁘다. 끝에 달아둔 분홍색의 인조 속눈썹도 벚꽃잎의 작은 조각 같아서 귀엽다. 하얗게 보드라운 뺨도 콕 찔러보고 싶게 사랑스럽고, 숨을 내쉬느라 작게 벌어진 입술도 꽃잎처럼 고왔다. 이 새침하면서도 부끄럼 많은 장난꾸러기가 이렇게나 무방비한 모습으로 내게 기대고 있다니. 그와 같은 감상을 떠올렸다가, 문득 에나는 굉장히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지금 이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두자. 그래서 나중에 미즈키에게 보여주는 거야. 글쎄 말야, 돌아오는 기차에서 쿨쿨 잠들어서는 세상 모르고 내게 기대고 그랬다니깐? 정말이지 큰일이었어. 그렇게 놀리는 말을 하면 미즈키, 얼굴이 새빨개져선 어쩔 줄 몰라할 게 분명하다. 앞으로도 얄밉게 이쪽을 놀리려고 들 때마다 사진을 꺼내드는 거다. 언제까지 우려먹을 거야! 비겁해! 치사해! 그렇게 투덜대며 부끄러워하는 미즈키를 상상해보고는 에나는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이렇게나 깊게 잠들었다면 물건을 꺼내드는 몸짓 정도에 깨어나지도 않겠지. 추측대로 에나가 가방에서 단말기를 꺼내들었을 때에도 미즈키는 꿈나라에 빠져있었다. 의기양양해져서 에나는 단말의 카메라를 기동했다. 어떻게 찍어야 최대한 미즈키가 부끄러움을 느낄 사진이 나오려나. 일단 이쪽의 여유를 과시하게끔 승리의 브이자를 그려보이는 거다. 연하의 귀염둥이가 몸을 기대며 다가와도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한 연상의 나. 완벽하네. 이미 승전보를 받아든 지휘관마냥 으스대며 에나는 단말의 액정을 쳐다보았다.

“......어라.”

화면에 렌즈에 잡히고 있는 광경이 보인다. 좌석에 나란히 앉아있는 두 사람이 비치고 있는 건 맞았다. 한쪽이 정신없이 잠들어 다른 쪽에게 기대고 있다는 점도 문제없다. 예상과 다른 건, 깜짝 놀랄 정도로 귀여운 여자아이 쪽이다. 화면에 비친 소녀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촉촉하게 젖은 듯 아련함마저 엿보이는 눈을 하고서는, 곁의 아이가 작게라도 몸을 움직일 때마다 움찔 어깨를 떨며 반응을 해버린다. 화면으로 확인하지는 못하겠지만, 곁에 앉은 이를 살짝 돌아볼 때에는 눈길에서 애틋함과 다정함이 일곱 빛깔 물감처럼 번지겠지. 누구야 이건. 뻔히 답을 알면서도 에나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만큼이나 자신이 이토록 한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이래서야......완전히 사랑에 빠진 여자애가 아닌가.

[찰칵]

사진을 한 장 찍고는 단말을 든 손을 아래로 내린다. 이건, 미즈키에게 보여줄 수 없다. 놀리려고 했다간 오히려 놀림 당하게 되리라. 아니면, 둘 다 아무 말도 못하게 되거나. 처음 둘이서 여행을 다녀왔단 기념으로 남겨둘 뿐이야. 누구에게 보여줄 생각으로 찍은 건 절대로 아니니까. 나중에 앨범을 확인하며 이 사진만큼은 숨김 설정을 해둬야겠다고 결심하며 에나는 눈을 꾸욱 감았다. 뺨을 타고 후끈대는 기운이 올라왔다. 자신의 감정을 선명하게 자각한 순간 뒤따르는 열기였다.

“......미즈키, 전부 너 때문이야.”

잠든 상대는 대답이 없다. 괜히 탓을 해대는 칭얼거림에도 반응해주지 못한다. 한숨을 푸욱 내쉬며 에나는 창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덜컹, 차체가 흔들렸다. 아니, 어쩌면 두근대며 심장이 뛴 소리일지도 모른다. 두근, 두근. 고요한 기차에서 소녀는 한참 동안 자신의 심장이 두근대는 감각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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