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는 날에

프로젝트 세카이 마후유 x 카나데

3월의 하늘은 맑았다.

봄이 시작되는 시기였지만 불어오는 바람에는 포근함을 시샘하는 겨울의 질투가 묻어났다. 목의 리본을 매만진 다음, 아사히나 마후유는 가디건을 걸쳤다. 거울을 마주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아가씨는 찬찬히 자신의 모습을 훑었다. 단정한 교복에 붉은 리본, 짙은 검은색 스타킹. 지난 몇 년 동안 매일 같이 입으며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옷차림. 하지만, 이렇게 입는 것도 오늘로 마지막이다. 그를 떠올리고는, 잔잔한 아쉬움을 느끼는 게 맞을지 가벼운 해방감을 느끼는 게 맞을지 아가씨는 잠시 생각하였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게 아닐지.

준비를 마치고 드레스룸을 나서면, 거실의 소파에 앉아있는 아버지의 모습만이 보였다. 부엌 쪽에도, 현관 쪽에도 어머니는 보이지 않는다.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는 마후유를, 그녀의 아버지가 가라앉은 눈으로 응시한다. 짧지만 길게 늘어지는 정적. 상황을 이해하고는 마후유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납득을 삼키는 웃음기에서는 쓴맛이 흐른다. 딸의 일생에 단 하루 밖에 없는 날이지만, 어머니 되는 이는 배웅조차 할 여력이 없는 모양이었다. 속이 따끔거리는 불쾌감에 사로잡히면서, 동시에 마후유는 옅은 안도감 또한 느꼈다.

“......마후유, 정말 혼자 다녀와도 괜찮겠니.”

“괜찮아요. 더 이상, ‘아이’ 가 아니잖아요.”

“......”

딸의 대답에 아버지는 더는 말이 없었다. 시선을 바닥으로 떨군 표정에는 여러 감정들이 뒤섞인 듯 보여서, 마후유는 그의 기분을 쉽게 짐작할 수 없었다. 약간의 섭섭함, 약간의 회한, 약간의 막막함과, 그리고 어쩌면, 약간의 죄책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든, 그 감정은 그의 몫일 따름이다. 더는 말을 꺼낼 기미를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아가씨는 현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의 구두가 마치 신어주길 기다리듯 현관에 말끔한 모습으로 놓여있었다. 깨끗하게 닦아둔 표면에서 어둑한 광택이 흘렀다. 구두를 닦아서 놓아둔 게 아버지일지, 혹은 어머니일지 잠시 추측하다가, 지금으로선 의미를 가질 수 없을 생각을 접고는 마후유는 구두를 신었다. 기분 좋을 정도로 발에 딱 들어맞는 신발의 가벼운 무게감에 아가씨가 뒷굽을 톡톡, 바닥에 대고 두드린 순간이었다.

“식이 마친 다음 연락하거라. 필요하다면 데리러 가마.”

“......알겠어요.”

“......따로 용무가 있다면, 너무 늦지는 말거라.”

“네.”

‘네’ 라고 대답하는 모습은, ‘착한 아이’ 처럼 보였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하였다가 마후유는 입꼬리를 살짝 꺾으며 웃었다. 변함없이 착한 아이였다면 오늘 아침 홀로 집을 나서는 일은 없었을 터이니. 유치원, 초등학교, 그리고 중학교 시절 그러하였듯 부모의 손에 이끌려 학교로 향하고 있었겠지. 하루 종일 부모의 시선을 의식하여 바른 자세를 하고는, 사방을 향해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고, 찍고, 또 찍었으리라. 그 모든 일련의 절차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채로.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남기고 현관을 나선다. 열렸던 문이 저 자신의 무게에 밀려 덜컥, 닫힌다. 집으로부터 몇 걸음 멀어진 다음 아사히나 마후유는 한 차례 크게 기지개를 켰다. 기나긴 잠에서 막 깨어난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미아먀스자카 여학원의 졸업식이 있는 날이었다. 그리하여, 아사히나 마후유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졸업을 하게 되는 날이기도 하였다. 단순히 학업 이외의, 수많은 것들로부터.

하늘은, 맑다. 올려다보던 시선을 거두며 아가씨는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3월의 하늘은, 다행히도 맑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가씨는 할머니 댁으로 전화를 걸었다. 몇 차례 신호음 끝에 수화기 너머로 들린 목소리는 친숙했다. 한껏 들떠서 저도 모르게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아가씨는 상대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휴양차 시골에 있는 할머니 댁에 머물게 된 거니 가능한 자주 산책을 하는 게 좋을 거란 말에 차분한 웃음소리와 함께 그러겠다는 답이 돌아온다. 그쪽은 하루 일정이 어떻게 되냐는 물음에, 어제에 이어 오늘도 중요한 예정이 있다고 다소 힘을 실은 목소리로 답한다.

아가씨에게 있어, 어제는 정신없이 바쁜 하루였다. 그녀의 도움 요청에 응해 나와준 친구들은 가장 먼저 헤어 살롱으로 아가씨를 이끌었다.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에 주눅이 든 아가씨가 냅킨을 두른 인형마냥 의자에 대롱대롱 앉아있는 동안, 자기들끼리 열이 오른 친구들이 양쪽에서 번갈아가며 온갖 의견을 피력한다. 그러니까 길이는 적당히 유지하면서 단정하게, 인 거죠. 앞머리는 눈썹에 닿게. 왼쪽에서 한 마디를 꺼내면 오른쪽에서 다섯 마디가 튀어나오는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직원 덕분에, 살롱의 전신 거울 앞에서 아가씨는 한층 깔끔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 된 자신을 마주할 수 있었다.

헤어 살롱에서 1시간을 소모했다면, 시부야 109의 의류 매장에서는 4시간, 혹은 그 이상을 보내게 되어버린다. ‘보기에 귀엽고 사랑스러운 느낌’ 이란 전제에서는 의견이 일치하였지만, 추상적인 드레스 코드를 명확한 형태로 규정하는 과정에 있어서 전문가 두 사람의 의견차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건물 내에 존재하는 모든 옷들을 돌아가며 한번씩 시착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강행군 속에 아가씨가 거의 탈진하기 직전이 되어서야, ‘어울리게끔 귀여우면서 단정한 코디’ 에 대한 친구들의 의견은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응, 완벽해. 최고로 귀여워! 입을 모아 외치며 엄지를 치켜드는 친구들을 향해 간신히 웃음을 지어보였던가.

“괜찮은, 거겠지.”

어제 골라왔던 옷을 차려입은 뒤,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몸을 돌려보며 요이사키 카나데는 웅얼거림을 삼켰다. 워낙 감각이 없는 그녀 자신에 비해 패션과 트렌드에 훨씬 정통한 친구들의 보증을 받았으니 분명 선택이 잘못되진 않았을 터였다. 지금까지 외견을 꾸미는 일에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아온 탓에 무얼 하더라도 어색함이 묻어난다는 게 문제였다. 앞으로 조금씩 익숙해져야지. 생각하며 이전보다 짧아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긴다.

아직은 바람이 차가운 시기였다. 봄이란 계절에 어울리게 살랑살랑 가벼운 원피스 차림을 제안하는 아키야마 미즈키의 발언에 말도 안된다며 벌컥 성을 내고는, 카나데는 따뜻하게 입어야만 한다며 겉옷부터 챙긴 시노노메 에나의 판단이 맞았던 셈이었다. 겉옷은 에나가 골라주고, 치마는 미즈키가 한참의 고민 끝에 엄선해줬지. 마지막으로 현관을 나서기 직전, 자신을 감싸고 있는 옷 하나하나에 친구들의 애정이 담겨있음을 떠올리며 카나데는 미소를 지었다.

졸업식은 오전 10시부터 진행된다고 했었다. 지금 시계가 알리고 있는 시각은 8시 20분. 늦어버리는 편보다는 이르게 도착하는 편이 낫다. 그리고 들러야만 하는 장소도 있으니. 그리 서두를 필요는 없지만, 묘하게 심장이 두근거리는 기분을 느끼며 카나데는 걸음을 재촉했다. 놓쳐서는 안될 중대사를 앞두고 있을 때에 느끼게 되는, 멀찍이 정차하고 있는 기차를 향해 달려가야만 할 듯한 긴장감. 이건, 오히려 일종의 기대감과도 같은 걸까.

[딸랑]

작년까지 종종 방문하던 가게는 이른 아침 시간엔 문을 열지 않는 모양이었다. 약간의 발품을 팔게 된다. 역앞에 위치한 꽃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문에 달린 종이 흔들리며 소리를 내었다. 카나데가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꺼내며 안으로 발을 들이자 한지 다발을 묶고 있던 백발의 노인이 성큼성큼 곁으로 다가왔다. 살갑게 말을 걸며 물건을 판매하는 요령 좋은 장사꾼으로는 보이지 않는 상대였다. 유독 커다랗게 보이는 안경알이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게, 묘하게 대하기 어렵다는 인상에 한 점을 더한다.

“꽃다발을 하나 사려고 하는데요......”

“누구에게 줄 거요?”

“네?”

“부모님에게 드리는 건가? 어디, 지금 시기를 생각하면 학교 은사? 아니면, 애인인가? 좋아하는 사람?”

연달아 나열되는 말에 밀려 입만 벙긋거리게 되어버린다. 친구에게 줄 거라고 간단히 답하면 되련만, 좋아하는 사람이란 단어가 가슴에 맺힌다. 좋아하는 사람, 아사히나 마후유.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말없이 가슴에 손을 올리는 여자아이를 쳐다보다가, 노인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한지 다발을 놓아둔 작업대로 걸어갔다. 비닐을 바탕에 깔고는 하얀색 커다란 한지가 작업대 중앙에 펼쳐졌다.

“고백하는 거요?”

“아, 아니에요. 그게, 친구 졸업식이라......”

“좋아는 하고?”

“그건......”

다시금 말이 없어지는 반응에서 대답을 읽은 건지 노인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안개꽃이 한지 위로 뿌려지듯 놓이고, 그 사이로 분홍 안개꽃이 수줍게 섞여든다. 좋아허겠지. 좋아허니까 꽃단장을 하고 가는 게지. 손님에게 들릴락 말락 작게 중얼거리며, 노인은 능숙한 솜씨로 꽃다발을 만들어나갔다. 노란빛 프리지아와 묶어 작약을 한껏 채우고, 다소 이질적이지만 그렇기에 확연하게 눈에 들어오는 붉은 장미 한 송이를 더한다.

“꽃으로 치자면 어떤 사람이요?”

“꽃이요?”

“아가씨가 보기에 그 사람이 어떤 꽃처럼 느껴지는지.”

풍성하게 차오르는 꽃송이들의 향연을 바라보고 있다가, 돌연 묻는 말에 카나데는 눈을 깜박였다. 그녀, 아사히나 마후유가 꽃이라고 생각한다면. 아까 전 누구에게 꽃다발을 주려고 하는지 물음을 들었던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금방 답할 말이 떠오른다.

“보라색, 진한 보라색이에요. 보랏빛 라일락.”

“그렇구먼.”

잠시 가게 뒤편으로 들어갔던 노인이 보랏빛 꽃잎들이 달린 꽃가지를 가져와 다발에 더한다. 한지를 둘러쥐고 솜씨 좋게 매듭을 묶으며 노인은 느긋하게 콧노래를 불렀다. 서정적이고 차분한 음색이었다. 음악에 관해 일가견이 있는 카나데였지만, 노인이 부르는 콧노래에 원래 가사가 붙어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라일락 꽃향기 속, 잊을 수 없는 추억에’ 란 가사가 반복되는 구절을 흥얼거리며 노인은 꽃다발을 완성했다.

“친구 졸업식 잘 다녀오고, 좋은 하루 보내요.”

계산을 마치고 손을 한번 흔들어준 다음, 볼일이 끝났다는 듯 노인은 한지 다발을 정리하는 작업으로 돌아갔다. 이미 등을 돌려버린 상대에게 감사하다고 허리 숙여 인사를 한 뒤 카나데는 꽃집을 나섰다. 문에 달린 종이 다시금 딸랑, 바람 흘러가는 듯 맑은 소리를 내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면 9시 5분. 느긋하게 걸어가도 30분이면 도착할 터였다. 그렇지만, 늦어버리는 편보다는 이르게 도착하는 편이 낫다. 작은 체구인 그녀로는 약간 버거운 느낌마저 들게끔 풍성한 꽃다발을 품에 꼭 끌어안고는 카나데는 걸음을 옮겼다. 올려다보면, 다행히도 여전히 하늘은 맑았다.


학교에 도착한 이후 그리 바쁠 일은 없었다. 졸업식을 앞두고 이런저런 번거로운 일들을 도와줄 수 있겠냐고 선생과 학생회 사람들로부터 부탁을 들었기는 하지만, 최근 들어 무리한 탓에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핑계로 그를 거절했던 터였다. 딱히 컨디션 불량인 건 아니지만, 뭐 어떤가. 한번씩 적당한 거짓말을 하는 건 스스로를 위해 이롭다. 그런 진리를 그들 모두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건지, 슬며시 빠져나가려는 마후유를 탓하는 상대는 없었다.

딱 하나 청을 들어준 건 있었다. 히노모리 시즈쿠의 부탁이었다. 이걸로 마지막이니 함께 궁도부 부실을 잠시 다녀오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마후유는 받아들였다. 감상에 빠져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는 게 아닐까 하는 예상과는 달리, 사로로 내려가 천천히 거니는 동안 시즈쿠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사선에 서서 시즈쿠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가 지금 이 순간 자체를 음미하고 있음을 이해한다. 어울려줘서 고마워, 아사히나 씨. 이만 돌아갈까. 그렇게 말하는 시즈쿠의 얼굴에서 차분한 깊이감을 느끼며, 마후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들, 졸업 안하시면 안되나요? 억지라는 건 물론 알고 있지만, 그래도!”

뜻하지 않게 후배들에게 붙들린 건 궁도부 부실을 나오는 길에서였다. 내년부터 새롭게 부장을 맡게된 후배는 벌써부터 울먹거리는 표정이었다. 우리가 나가줘야 새로 신입생들이 들어와 궁도부를 계속 이어나가지 않겠니. 화사하게 웃으며 시즈쿠가 꺼낸 말에도 막무가내로 고개를 내젓기만 한다. 이제 2학년이 되는 1학년생들은 2년 선배들을 대하기 막막한 감이 있는지 한 걸음 물러나 있었으나, 2년의 세월을 함께 보낸 한 학년 아래의 후배들에게 있어 마후유와 시즈쿠 두 사람은 대체할 존재가 없는 선배들인 모양이었다.

“아사히나 선배, 혹시, 괜찮으시다면......선배의 단추를 제가 받아가도 될까요?”

“단추?”

유독 뒤를 따라다녔던 후배가 불쑥 꺼낸 말에 마후유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보니 그런 게 있었지, 미신 같은 졸업식의 풍습. 교복 두 번째 단추가 심장에 가까운 곳에 있기에, 당신의 마음을 받아간단 의미로 사모하는 이의 단추를 뜯어간단 이야기는 종종 들어봤던 터였다. 굳이 그런 일을 해야하는 의미는 와닿지 않았으나, 원한다면 못해줄 건 아니라고 마후유는 생각했다. 손을 들어 앙가슴 부근을 더듬다가 가디건을 교실에 벗어두고 왔음을 깨닫기 전까지는.

“선수치기는! 아직 졸업식 하지도 않았잖아. 나중에 정정당당하게 말씀드려.”

“지금도 정정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있거든!”

“피잇, 그럼 히노모리 선배! 선배의 단추는 제가 예약해둘래요!”

“어머나. 미안해. 단추를 준다면 주고 싶은 상대가 있어서.”

시즈쿠의 선언에 실망하면서도 동시에 납득하는 기색이 번진다. 주고 싶은 상대가 이미 정해져 있단 말에 더는 조를 분위기가 아니게 되었는지, 졸업식 이후에도 인사하겠다는 말과 함께 후배들은 두 사람을 풀어주었다. 착한 아이들이야. 궁도부 부실로 들어가는 후배들을 바라보며 시즈쿠가 행복감 깃든 어조로 중얼거린 말에 마후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교실로 돌아오면 시계는 9시 40분을 알리고 있었다. 의자 위에 두었던 가디건을 걸치고서 마후유는 창가로 다가갔다. 졸업식을 앞두고 깨끗하게 청소했는지 유독 투명하게 느껴지는 유리창 너머로 운동장의 정경이 보였다. 지난 3년이란 세월 동안 종종 내려다보고는 했던 풍경이었다. 1년 전의 자신은 어떤 심정으로 바깥을 바라보았더라. 2년 전에는, 그리고 3년 전에는. 벌써 아득하게 풍화된 기억처럼 느껴지는 과거를 떠올리다가, 마후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야마스자카 여학원의 교문으로 여자아이가 들어서고 있는 게 보였다. 찰랑이는 새하얀 머리카락이 선명하게 보여서는.

졸업식이 시작하기 15분 전부터는 교실에서 자리를 지키라고 말을 들었던 터였다. 하나 알게된 사실이 있다면, 그딴 규칙을 어기더라도 하늘이 두쪽으로 갈라지진 않는다는 점이다. 계단을 두칸씩 뛰어서 내려가며 마후유는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교내 복도에서 뛰어다니지 말라는 교칙도 절찬리에 어기는 셈이 되었다. 졸업식인 오늘, 지금 일탈을 감행하지 않는다면 언제 불량 학생이 되어보겠는가.

미야마스자카 여학원의 교정은 넓다. 본관 건물 외에도 체육관과 부속 건물도 세워져 있어 처음 방문하는 사람은 본관의 입구로 찾아오는 길을 직관적으로 찾아내지 못하고 가끔 헤매고는 했다. 그녀 또한 가야할 길을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방문객들이 차량을 주차해두는 장소로 바뀐 운동장 한쪽 구석에서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그 아이를 발견하고는, 마후유는 한 차례 깊게 숨을 들이삼켰다. 그리고는 외친다.

“카나데!”

넓은 운동장에 그 아이의 이름이 작게 메아리친다. 졸업식 준비가 한창 진행 중일 강당까지 소리가 닿았을지도. 깜짝 놀라며 돌아보는 카나데에게, 마후유는 손을 흔들어보였다. 큰 보폭으로 뛰어오는 마후유를 발견하고는 카나데 또한 총총히 마주 달려온다. 품에 안고 있는 커다란 꽃다발이 만개하는 생명력을 품은 듯 흔들렸다.

“마, 마후유. 안녕. 하아, 하으......”

“올 거라고, 생각 못했는데.”

“축하해주고, 하아, 싶었으니까. 미리 말을, 해둘 걸 그랬네.”

“......적당히 괜찮은 서프라이즈였어.”

그 말에 안심한 듯 풀어진 미소를 지으며 헤헤 웃는다. 어쩜 이리도 순진한지. 따라서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마후유는 카나데를 살폈다. 예쁘게 다듬은 머리카락, 여지껏 요이사키 가의 옷장에서 찾아보기 어려웠을 사랑스러운 코디의 옷차림, 하얗고 노랗고 붉고 거기에 보랏빛을 머금은 꽃다발. 단지 친구의 졸업식에 올 뿐이라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공을 들인 게 아닌지.

“졸업 축하해. 여기, 꽃다발인데......”

“아직 졸업식 시작하지 않았거든.”

“앗, 그, 그러네! 그럼 나중에 줄게!”

“후훗, 그래.”

“그리고, 그게, 부모님은?”

“안 오셨어. 오늘은 나 혼자.”

다소 긴장하는 기색으로 주변을 살피는 카나데를 보며 빙긋 웃고는 마후유는 답했다. 그렇구나.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힘이 없다. 대답을 듣고는 안심하는 대신 풀죽은 기색이 되는 그녀를 바라보며, 역시 너는 상냥하구나, 생각하게 된다. 그 상냥함으로 인해 지금 우리가 함께 이 자리에 서 있어. 소리내어 꺼냈다간 갑작스러울 수밖에 없을 말은 속으로 삼킨다.

운동장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이제 곧 졸업식이 진행될 예정이니, 졸업생과 방문객 모두 강당으로 모여달라는 안내 음성이 뒤를 잇는다. 주차장이 된 운동장에 드문드문 돌아다니던 방문객들이 안내를 맡은 학생들의 유도에 따라 강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리도 가자.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리려는 카나데를, 마후유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마후유?”

“......그게.”

심장이 뛰고 있었다. 아침에 집을 나선 이후 께름칙하게 남았던 마음 속 잿가루가 지금은 완전히 씻겨나간 기분이었다. 부모를 동반하지 않고 홀로 졸업식을 치를 예정이었다. 지켜보는 이 없이 오로지 혼자가 된 감각을 느끼며 졸업장을 받아들 생각이었다. 딸의 성장을 대견해하며 눈물짓는 다른 가정의 부모들 사이에서 담담함을 지킬 마음의 준비를 했었다. 그랬었는데.

널 붙들고 있는 건 오른손. 비어있는 왼손이 위로 움직인다. 건드리는 건 가디건에 달린 두 번째 단추. 뛰고 있는 심장을 상징하는 자그마한 단추가 손가락 사이에 잡힌다. 꽈악 움켜쥐고 잡아당기면, 토독- 가볍게 뜯어지는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나온다. 그저 조그마한 조각일 뿐일지라도 이게 나름의 상징이 되어 의미를 전할 수 있다면, 다른 누군가가 아닌 너에게 주길 원해. 소망을 떠올리며 마후유는 교복 리본을 풀었다. 풀어진 붉은 리본과 작은 단추가 왼손에 남는다.

“졸업식의 단추와, 리본이야. 의미를 알고 있다면......카나데, 받아줄래?”

졸업식에 건네받는 단추는, 사모하는 이의 마음이 담긴 증명. 전해지는 리본은 맺어진 인연의 상징. 건네받은 단추와 리본을 가만히 내려보다가, 카나데는 그를 꾸욱 움켜쥐었다. 평생 소중하게 간직할게. 맹세하는 목소리가 물기에 잠긴 듯 흐릿하게 들렸다. 평생, 이라고 했어. 확답을 받는 것마냥 말을 하고는 마후유는 카나데의 손목을 붙들었던 손을 놓았다.

강당의 입구에서 둘은 잠시 헤어졌다. 아사히나 마후유는 졸업생이 있을 곳으로, 요이사키 카나데는 졸업생의 가족들이 있는 방문객의 자리로. 작게 손을 흔들어주는 카나데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마후유는 자신의 학급이 있는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교실에서 자리를 지키라는 지침을 무시하고 중도 합류를 하는 셈이 되었으나, 그에 대해 뭐라고 하는 이는 딱히 없었다.

졸업식은 식순대로 금방 진행되었다. 딱히 와닿는 부분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 이전까지 있던 학교 행사들과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단 하나, 졸업장을 수여받기 위해 단상으로 올라간 순간 마후유는 묘하게 가슴이 떨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간 우수한 학생으로 학원의 명예를 드높여준 점에 대한 치하의 말과 함께 전달된 졸업장은 보기보다 무거워서, 존재감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졸업장을 받아들고 돌아선 마후유의 눈에 그 아이의 모습이 들어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있는 힘껏 박수를 치며, 그 아이는 울고 있었다. 뺨을 적시는 눈물을 닦아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의 형태로 입증된 성취가 마치 자신의 일인 듯.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마후유는 밝게 웃었다. 이 순간마저 하나의 트로피로 삼으려는 카메라 렌즈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더없이 환하게.

졸업장을 받아든 우리들은, 분명 여기서 한층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카나데.

“다음은 2학년 후배들이, 떠나는 선배님들을 향한 송별곡을 합창하도록 하겠습니다. 들어주세요. <여행을 떠나는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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