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세카] 카나데&미즈키 서사 감상 + 캐해석 + 관계해석
NCP에 가까운 조합을 추구하기에 해시태그로 카나미즈, 미즈카나를 둘 다 표기합니다.
25시, 나이트 코드에서 메인 스토리, 카네이션 리콜렉션, 시크릿 디스턴스, 그리고 지금, 리본을 묶고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후회 없는 한 해를 보낼 수 있도록 함께 힘내 봅시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해, 미즈키의 개학식에서.
중학생 카나데와 당시의 아버지에게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카나데의 유년시절은 평범했습니다.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긴 했지만 그게 슬픔의 원인이 되기보다는 행복한 추억 그 자체로 남아있을 수 있을 정도로 평탄하고 안온한 나날이었습니다.
한편, 미즈키의 유년시절은 미즈키의 중학교 3학년 시절만 봐도 그렇지 못했으리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설령 평온했더라도 게임 내에서 일찌감치 나오고 전개될 수 있던 카나데에 비할 순 없었겠지요.
그러나 공통적으로 두 사람 모두 암울한 시간을 겪어야 했고 마침내는 사라지고 싶다고 염원하기에 이릅니다. 그런 둘에게 ‘후회 없는 한 해’는 존재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사람이라는 한 유기체가 세상이라는 우주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기까지, 실의와 낙담과 절망과 포기가 얼마나 누적되었겠나요. 후회 없는 시간이란 게 있을 수도 있단 걸 알았다면 사라지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실제로 카나데와 미즈키가 후회를 바라보게 되는 건 좀 더 미래의 이야기입니다. (25시, 나이트 코드에서의 곡 <후회한다 쓰고 미래>)
그런 식으로, 후회조차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고 있을 때, 두 사람은 만나게 됩니다.
카나데와 미즈키
평온했던 카나데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가 정신적, 물리적 한계에 부딪히며 끝나게 됩니다. 보호자가 위태로워지면서 피보호자 또한 위태로워지는 건 매우 가슴 아프게도 그다지 이상하지 않은 일입니다. 다만 카나데의 경우는 케이스가 특이했습니다. 하나 뿐인 보호자의 정신적, 물질적 위기를 구원할 수 있는 재능이 카나데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카나데의 그 구원으로 카나데도, 카나데의 아버지도 행복해져야 마땅할텐데, 안타깝게도 사건은 그렇게 흐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의지할 곳도 터놓을 곳도 없는 상황에서 카나데는 아버지가 쓰러진 원인이 본인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곡이 누군가를 벼랑으로 내몰았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누군가를 벼랑 끝에서 끌어올려 줄 만한 곡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지게 됩니다. 마치 ‘~하는 일이 자해나 다름없다고? 괜찮아. 그런 식으로 자해하지 않았으면 자살하고 말았을걸?’이라는 글귀를 떠오르게 하는 순간입니다. 이치에 맞지 않고 논리적이지 않더라도, 자기 자신을 탓하고 속죄를 갈구하는 것 외에 슬픔을 해소할 방법이 카나데에게 없다시피 했으니까요.
그렇게 카나데가 자기 몸도 돌보지 않고 작곡에 몰두하게 된 뒤, 미즈키가 카나데의 곡 중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당시의 미즈키의 시간은 상실이라는 단어로 모든 게 요약될 수 있던 시기였습니다. 유일하게 좋아하던 애니메이션은 종영을 앞두게 되었고, 뒷담화와 차별, 편견, 따돌림으로 가득찬 학교 생활에서 유일한 도피처였던 친구는 한 학년 위였던 탓에 졸업했으며, 끊임없이 자신과 가까운 곳에서 편을 들어주었던 혈육은 한 달 뒤면 해외로 떠날 예정이었죠. 사회가 미즈키라는 사람을 수용하려 하지 않는 탓에 미즈키에게는 마음 붙일 만한 장소가 극히 적을 수밖에 없는데, 그런 미즈키가 진심으로 좋아하고 아끼는 것들이 하나도 아니고 전부 손 닿지 않는 곳으로 멀어지려 했습니다.
그러던 중 동영상 사이트에서 우연히 듣게 된 카나데의 음악은 결코 밝은 곡이 아니었고, 고통이라는 개념을 정면으로 직시하는 느낌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미즈키의 마음 안에서 잔잔하게 울리게 됩니다. 고통에서 벗어나자고 주장하지도 않고, 고통을 위로하지도 않은 채 그저 자신에게도 이러한 고통이 있으며 괴로움을 부정할 생각도, 그 괴로움에서 뒤돌아 도망치려 하지도 않는 마음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즈키가 가진 괴로움은 누군가에 의해 위로될 수 없으며, 이해받을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는 종류입니다. 사회가 힐난하고 무시하며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고 있는데, 누군가가 미즈키에게 괜찮다고 말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 말로 인해 학교에서 미즈키를 두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사라지나요? 사회가 미즈키를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식으로 변화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헛된 위로나 이해를 입에 담는 대신 ‘나도 이런 고통을 짊어지고 있고 그게 내 안에서 사라지는 일은 없다’며 담담하게 고하는 카나데의 곡이야말로 미즈키에게 더없는 위안이 됩니다.
동시에 카나데의 곡은 ‘너와 비슷한 괴로움을 이렇게 짊어지고만 있는 사람이 여기에도 있다’며 손을 내밀어 주듯 다정하고 작은 빛을 담고 있고, 미즈키는 그 빛을 분명하게 포착해냅니다. 카나데가 원하는 것도, 미즈키가 원하는 것도 고통에 함몰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라지고 싶다는 소망은 곧 사라지지 않아도 되고 싶다는 소망과도 같으니까요.
하여 미즈키는 이런 감상을 가지게 됩니다.
‘카나데의 곡은, 마치 나 자신을 곡으로 만든 것 같아.’
한편, 카나데도 미즈키의 영상을 보며 같은 감상을 느낍니다. 카나데가 제안해 준 영상 제작에 관심은 있지만, 서클을 이루는 데에는 선뜻 승낙 의사를 밝히기 어려워하는 미즈키에게 자신의 곡을 위해서가 아닌 미즈키가 창작을 했으면 한단 말을 건네면서요.
“왜냐하면 미즈키가 만드는 건 무척 괴롭고 다정하니까.”
서로가 서로의 창작물에서 자기 자신을 본다는 건 무척 드물고 진귀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명하게 된 까닭은 둘 모두 괴로움 속에서도 치유를 염원하기 때문일 겁니다. 조용한 곳을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시끄러운 것도 나쁘지 않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요.
한편, 카나데의 이러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미즈키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합니다. 카나데의 그 말이 분명한 힘이 되었기 때문이 오히려 망설임은 커집니다. 미즈키는 좋아하는 것들이 모두 끝나 버린 시점에 서 있습니다.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 주는 사람에게마저 언젠가 거절당한다면, 그때야말로 완전히 무너져버릴 것을 직감하기 때문입니다. 이해받고 생각이나 느낀걸 얘기하고 그로부터 좋은 작품을 만드는 건 즐겁고, 좋아하는 일을 솔직하게 즐거워하며 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지금까지 이해받지 못한 적이 너무 많고 그에 따라 상처가 계속해서 누적되어 왔기에 두려운 마음이 좋아함을 앞서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혼란은 더 나아가 ‘나는 여기에 있어도 되는 사람인 걸까’라는 존재 단위의 불안을 다시 한 번 가지게 합니다.
그런 미즈키에게 결정적으로 괜찮다고 해 주는 건 미즈키의 이해자 중 하나였던 손윗형제입니다.
“‘아무래도 상관 없다’에서 ‘이래도 되는 걸까’라고 고민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진일보야.”
미즈키의 불안을 정확하게 꿰뚫는 이 말은 미즈키가 자신이 새삼 어떤 꼭짓점 위에 서 있는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또한 사라지고 싶을 정도로 이것저것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지 않을 만한 사건과 만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해도 되는 걸까라고 망설이게 된다는 사실은 카나데와 미즈키의 교차점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사라지고 싶다는 감각을 한 발 앞서 휘청거리며 딛고 일어선 카나데가 작곡을 했고, 그런 카나데의 곡을 미즈키가 발견했으니까요.
조금 먼저 앞서 나간 사람을 따라 힘내서 함께 나아가 보기. ‘이렇게 하고 싶어’라는 마음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한 걸음에 불과하지만, 자신이 나아갈 수 있던 동기인 카나데를 앞에 두고 미즈키는 마침내 결심합니다.
즐거움은 온통 감각할 수 없을 정도로 멀어지고, 괴로움은 차마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채 이야기될 장소를 찾을 수 없던 때에 만난 두 명은 그렇게 다른 두 명과 함께 곡을 만드는 서클을 결성하여 [25시, 나이트 코드에서] 주기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이러하니 시간이 흘러, 카나데가 아버지 건으로 다시금 자책에 시달리며 우산 쓰는 것도 잊고 황량하게 도시를 걸을 때 카나데의 손을 잡고 함께 빗속을 걷는 사람이 미즈키인 건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미즈키가 카나데의 곡, 즉 카나데의 고통과 치유를 향한 마음을 모두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그것들이 자신의 것과 닮았기에 카나데와 함께하게 된 사람이니까요.
내키지 않아하고 의욕이 없는 상태의 사람을 억지로 끌고 따뜻한 카페로 데려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그 대상이 ‘그런 상태일 때의 자기 자신’과 닮았다면 더더욱 행동으로 옮기기 어려운 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즈키는 카나데의 마음을 향한 배려와 카나데의 미래를 위한 갈림길 사이에서 후자를 위해 기꺼이 무리에 억지인 결정을 하길 감행합니다.
스토리에서 특별히 조명되진 않은 부분입니다만, 사실 이때의 미즈키는 굉장한 용기를 냈을 겁니다. 카나데는 이미 실의로 인해 나이트 코드 일원에게 예민하게 군 바 있고, 자기만의 바운더리를 존중받은 경험이 드물어 타인의 바운더리를 함부로 침범하지 않고자 하는 성격인 미즈키가 자기처럼 아끼는 카나데에게 힐난의 말을 듣는 건 무척 괴로운 일일 텐데, 그런 괴로운 가능성을 무릅쓰고 카나데의 손을 잡고 이끈 거니까요.
다행히 미즈키의 그러한 행동은 카나데에게 필요한 행동이 맞았기에 카나데는 미즈키의 설득을 듣게 됩니다. 더 나아가 결코 먼저 사정을 묻지 않는 미즈키에게 보답과도 같게도, 카나데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먼저 이야기를 꺼냅니다.
숱한 공통분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바로 그 공통분모로 인하여) 상대의 자초지종은 결코 알지 못했던 미즈키는 카나데가 왜 누군가를 구하는 곡에 그토록 얽매여 있는지 알게 되고, 이 순간 자신이 꼭 전해야만 하는 말을 건넵니다.
“있지, 카나데. 카나데는 아직 아무도 구하지 못한 것처럼 말하지만…… 그래도 말야, 적어도 예전의 나는 구했어.”
이 말에 거짓은 전혀 섞여 있지 않지만, 미즈키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었습니다. 아버지 건은 카나데가 잘못해서 벌어진 사건이 아니며, 그러니 스스로에게 벌을 주듯 곡을 만드는 일은 그만하라는 만류 말이지요. 하지만 미즈키야말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어두운 절망의 구렁 속에서는 구렁 바깥의 사람이 아무리 말해도 결코 와닿지 못한다는 것을요. 누군가가 그렇게 말해 주길 기다리고 원하는 사람도 존재하는 건 맞지만, 그 사람이 카나데는 아닙니다.
카나데에게 지금 와 닿을 수 있을 말을 꺼낸 미즈키는, 이 말과 함께 왜 카나데가 자신을 구하게 되었는지, 자신이 어떤 수렁 속에 있었는지를 조심스레 풀어 헤쳐 보여줍니다.
그리고 때마침 그친 비와 아주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한 햇빛, 마침내 찾아낸 카나데의 카네이션 밭은 그런 두 사람에게 펼쳐질 미래를 암시하는 듯합니다.
카나데, 그리고 미즈키
두 사람을 놓고 보았을 때, 가장 도드라지는 건 두 사람이 자신과 타인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카나데와 미즈키 둘 다 자신의 안위를 먼저 챙기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웃어주는 걸 우선시하는 성격이지요. 이는 언뜻 배려심으로 보이고, 성격의 일부인 것도 맞지만, 그보다는 ‘자기 자신’을 중시하고 주장할 까닭을 찾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후천적 이타심이 더 커 보입니다.
카나데는 보호자와 얽힌 이슈로 인해 자신을 사실상 죄인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혹은 그에 준하는 어떤 것)을 증명하고 실현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에 자연히 자기보다 타인을 중시하며, 더 나아가 자신의 호불호, 이해득실, 편리나 안정, 심지어는 잠이나 식사 등의 기본적인 욕구마저 경시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미즈키의 경우 누구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고 그저 좋아하는 자신의 모습과 상태를 유지하고 싶을 뿐인데 사회가 이를 이단으로 규정, 배척함에 따라 사회로부터 고립되면서 자기 자신이라는 아이덴티티를 유지하거나 정립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왔습니다. 스스로의 있을 곳에 자격과 온당함을 논하는 카나데와 다른 점인 만큼 미즈키는 카나데처럼 타인을 더 우선시한다거나, 자신의 욕구를 희생하기보다는 타인과 거리를 벌리며 결코 그 거리를 좁히려 하지 않지만, ‘내가 사회의 요구사항에만 맞추면 아무 문제 없다’는 경험을 너무나 숱하게 해야 했기에 선택의 순간에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일에 거부감을 가지진 않습니다. 그 정도로 체념을 학습해 버린 탓입니다.
그런 두 사람에게 자기혐오가 없다면 거짓일 겁니다. 둘의 자화상은 스스로에게 혹은 세상에게 끊임없이 비난받고 지탄받고 있지요. 손가락질 받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요원하기만 하고, 사라지고 싶다는 욕구도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내가 무언가를 들고 있는데 주변이 그 무언가를 두고 계속 손가락질한다면 누구라도 손에 든 걸 놓아버리고 싶을 테지요. 그렇게만 하면 그걸 들고 있다는 이유로 내가 손가락질의 한가운데에 서 있을 필요가 없어지니까요. 여기에, 그것이 자신에게 소중한 거라면 고통과 괴로움은 가중됩니다. 하물며 그게 ‘자기 자신’이라면 더더욱 맨정신으로 버티고 서 있기는 힘듭니다.
이런 때에 주변 사람들의 도움은 아쉽게도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들의 지지가 필요하지 않다는 건 아닙니다. 만일 주변에 정말로 아무도 없었다면 카나데든 미즈키든 그 누구든 상황 속에서 더 빠르게 침몰하고 무너져 내렸을 겁니다.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건 다름 아닌 동시간성 때문입니다. 세상이라는 넓은 범위로부터 손가락질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 상황의 돌파구가 되어주지 못하는 이상, 제아무리 가깝고 힘이 되는 사람이더라도 주변 사람들이란 손가락질하는 세상의 일부로써 그 세상 속에 너무 쉽게 파묻히게 되어 버리니까요.
특정한 누군가가 마법처럼 상황의 돌파구가 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만, 그런 문제라기보다는 환경이 사람을 옥죈다면 더 넓고 더 새로운 환경이 필요하다는 논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미즈키와 같은 염원을 가지고 있던 카나데는 미즈키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줄 수 있었으며, 카나데에게 일말이나마 구해지면서(rescue) 미즈키 또한 카나데와 카나데의 곡에 새로운 세상을 보여줄 수 있게 됩니다.
이런 관계성을 가진 둘은 여타의 ‘소중한 관계’가 걷는 길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미즈키가 카나데를 존중하고, 카나데가 자신의 문제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상 둘 사이에는 무지가 놓여 있을 거고, 거리감이 어느 수준 이상으로 좁혀지지 않을 것이며, 허물 없는 친구처럼 막역지우가 되기도 어렵겠지요.
하지만 주변의 여느 사람이 채워주지 못하는 공간을 서로가 서로에게 분명하게 차지하고 있습니다. 카나데를 때로는 무리해서 이끌어주면서도 지금의 상황에서 와 닿을 말을 조심스럽고 세심하게 고르며 카나데가 카나데만의 수렁에서 빠져 나오길 기다려줄 사람은 미즈키 뿐이고, 미즈키가 익숙한 체념을 하지 않아도 되게 해 주는 동시에 있는 그대로의 미즈키를 인지하고, 미즈키가 가진 남들과 다른 점을 인지하지 않아 주면서도 계속해서 미즈키 근처에서 미즈키에게 바스라질 것 같으면서도 결코 희미해지지 않을 빛을 건네 줄 사람은 카나데 뿐이니까요.
세간에서 말하는 ‘구원’에 카나데와 미즈키는 해당되지 않기도, 해당되기도 합니다. 세간에서 말하는 ‘가깝고 소중한 사람’에 카나데와 미즈키는 해당되지 않기도, 해당되기도 합니다. 연애적 사랑의 의미에는 결코 해당되지 않겠지만, 한 인간이 한 인간의 삶이 행복하길 바라고 그걸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있는 힘껏 보탠다면 그걸 사랑 외에 다른 단어로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
카나데와 미즈키의 관계를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 단어가 비록 세상에 없을지라도, 둘이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과 방향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건 아닙니다. 명확하게 정의내릴 수 있는 단어가 없다면 없는대로도 괜찮지 않나 합니다. 중요한 건, 카나데와 미즈키는 각자 처한 어둠 속을 나아가는 중이라는 거지요. 함께요.
짧은 사담과 주접
카나데가 누군가를 구하기 위한 강박에 빠져 있는 만큼 눈앞에 당장 구함이 시급한 대상인 마후유에게 집중하고 있다 보니, 카나데와 미즈키의 이러한 관계성이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오르내리거나 주목받지는 않는 편입니다. 미즈키 쪽도 카나데와 적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만큼 또렷한 가시적 관계나 갈등을 가진 다른 관계에 비해 카나데의 비중이 크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적고요.
그렇지만 이 둘의 서사는 ‘미즈키가 [25시, 나이트 코드에서]에 합류하게 된 계기가 카나데이며 & 카나데가 자기 안에 응어리진 걸 털어놓는 방법을, 욕구를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 카나데를 이끌어 주는 인물이 미즈키다’라고만 요약해도 그 강렬함이 충분히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프로세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각자 좋아하는 관계성이 다른 거야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요.)
그런 이유로 저는 카나데와 미즈키의 관계성을 무척 사랑하고, 그 어떤 강렬한 빛도 그저 눈을 멀게만 하는 상황에 잠겨 있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정의되지 않는 어스름 빛(twilight light)이 되어 주고 있음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편입니다.
또, 조금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저는 미즈키와 같은 상황에 처해 온 사람입니다. 자신과 관련된 것을 포기해야만 주변 사람들로부터 받아들여질 수 있었고, 사람들이 바라는 모습을 취할 때만 사회의 일원으로 기능될 수 있던 탓에 자신에 관한 많은 부분을 상당히 모릅니다. 그래서 미즈키에게 손윗형제를 비롯해 미즈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가족들이 있는 모습을 보고 부러워하면서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얼마나 자주 했는지 모릅니다.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가장 맹렬하게 부정당하곤 하니까요.
그렇기에 프로세카 스토리를 보며 카나데가 미즈키와 만나 주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곧잘 했습니다. 미즈키에게 가장 도움/구명이 되는 존재라면 카나데 뿐이라고도 감히 생각하고 있고요. 그런 만큼 선뜻 가까워질 수 없는 두 인물의 관계에 발도 동동 구르게 되고, 더 가까워지고 그럼으로써 더 원활히 치유해 나갔으면 하는 욕심이 있지만, 그건 제가 관찰자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욕심입니다. 카나데와 미즈키에게는 각자에게 맞고 소화 가능한 치유의 속도가 있음을 압니다. 그러니 지금까지와 같이 앞으로도 이 청소년들이 너무 외롭지 않게, 너무 아프지 않게 미래를 향해 천천히 나아갈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저와 같이 둘의 관계성을 마찬가지로 아끼고 사랑하는 분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혼자 속으로만 가지고 있던 생각과 감상을 써내릴 기회를 가지게 되어 무척 감사드립니다. 모쪼록 읽으시는 분께도 둘의 잔잔한 평화를 바라는 마음이 전해졌으면 합니다.
─세상의 모든 카나데와 미즈키가 평온하길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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