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ow white in Six feet under

프로젝트 세카이 마후유 x 카나데

아사히나 마후유는 착한 아이다.

정말이지, 아사히나 마후유는 착한 아이다. ‘착하다’ 는 표현의 정의가 다소 협소할지라도, 그녀를 두고 착한 아이라고 평하는 이들의 의도는 가감없이 표출되고 전달된다. 유치원에 들어가던 시절부터 의무교육 시기를 지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마후유는 단 한순간도 빠짐없이 언제나 착한 아이였다. 이 세상 부모들 태반이 꿈꾸는 ‘공부 잘하고 말 잘 듣고 괜한 짓은 하지 않는’ 이상적인 자녀상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아이.

그토록 흠결없는 딸을 두었다는 사실은 아사히나 부부의 가장 큰 자랑거리이자 남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자부심의 근원이었다. 딸인 자신으로 인해 기뻐하는 부모를 보며 소녀는 한층 필사적으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곤 했다. 어째서 이렇게나 자신을 꾸며내야 하는지 알 수가 없게된 나날도 있었으나, 스스로를 찾고자 하는 방황은 사춘기의 통과 의례 정도로 간단히 치부되었다. 실마리조차 제대로 잡을 수 없는 문제를 하염없이 붙들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 하나 이해하지 못한 채로 아이는 보다 쉬워보이는 해법을 선택했다. 사랑하고 사랑하는 부모의 말에 따라, 그들을 계속해서 기쁘게 하는 방향으로.

자신이 그렇게나 갈망했다는 의대로의 진학은 어렵지는 않았다. 그 무엇도 마음에 담아둘 게 없었기에 일상은 오로지 책을 들여다보며 정해진 내용을 암기하는 절차의 반복으로 채워질 뿐이었고, 현 사회의 교육 체계는 마음없이 단순 작업을 반복하는 사람을 ‘우수하다’ 고 판단했다. 합격 발표가 전해진 날 아사히나 부부는 기뻐하며 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정말로 장하다고, 지금까지의 노력에 걸맞게 앞으로 마후유의 인생엔 행복만이 가득할 거라고 확언하며.

착한 아이란, 부모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는 존재다. 그랬기에 아사히나 마후유는 이제 마땅히 행복만이 가득한 인생을 살아가야만 했다. 적어도, 누가 보기에도 행복하다 싶은 인생을, 꾸며내야만 하였다. 자식이 달성해내는 인생게임의 점수가 부모의 얼굴이 된다는 세상이었다. 사회로부터,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1점이라도 더 높게 평가를 받아야만 그만큼 부모도 행복을 체감할 터였다.

6년에 걸친 의대 생활의 끝에 국가 시험을 앞뒀을 때였다. 딸이 시험에 합격할 거란 사실을 아사히나 부부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고, 자식의 미래를 장기적으로 생각해 일반의보단 전문의를 목표로 하는 게 더욱 타당할 거라는 결론까지 진즉에 내려둔 상태였다. 임상연수 과정 이후 시니어 단계까지 거쳐 자격 시험에 도전하는 게 좋겠다며, 참으로 사려깊게 말하는 부모를 앞에 두고 이제 20대 중반에 접어든 아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그랬듯 딸로서 그녀가 해야할 일은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었으니.

“좋은 상대를 만나는 일도 인생의 행복을 결정하는, 정말로 중요한 사안이란다.”

이어서 나온 이야기는 평생 공부만 하며 살아온 아가씨에겐 아무래도 생소한 내용이었다. 부모는 딸의 결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아이에게 누군가와 교류하고 관계를 만들어가는 일에 대해 단 한 차례도 적당한 조언을 해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마음 쓰인 걸지도 모른다. 아사히나 부부는 그들이 생각하기에 적당한 상대를 점찍어두기까지 하였다. 마후유로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지경으로 어지럽게 돌아가는 흐름이었다.

상당히 규모가 큰 가정용품 전문 기업의 대표이사 자리에 30대라는 젊은 나이로 올라간 능력 있는 남자라고 했던가. 끝없는 노력으로 자수성가를 했다기보단, 정계에 단단한 연이 있는 가문의 힘을 빌린 거라고 했다. 딱히 흠잡을 구석은 아니다. 오히려 그 지점이 어른들에겐 한층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10살 가까이 나는 나이차는 그리 문제될 게 없다는 게 부모의 설명이었다. 학생의 시각에선 막막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사회에 나오면 나이 차이란 별다른 장애가 되지 않는다며. 그들이 그렇다면 필시 그럴 터였다. 결혼하는 남녀 간의 균형에 대해 마후유는 어떠한 기준도 떠올리지 못했으니.

“조만간 그쪽 집안 사람들과 함께 자리를 가지기로 했단다. 바로 둘이서 선을 보는 거보단 처음엔 부모와 동행하는 게 마후유의 입장에서도 마음이 편할 거고 말이야.”

“하지만,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는데......”

“그렇지. 하지만 지금껏 꾸준히 노력해온 마후유라면 이미 충분히 대비가 되었을 거라고 엄마는 생각해. 그리고 한번씩 의학서를 놓고 바깥에 다녀오는 일도 중요하잖니. 기분전환을 위해 나들이 다녀오는 거라고 생각하렴.”

“도쿄 내 최고급 호텔에서 만나기로 해뒀어. 그보다 좋은 나들이 장소도 없을 거야. 평소 가족끼리 가던 곳보다 훨씬 좋은 곳이란다.”

“그럼, 그 전에 우리 딸에게 어울릴 예쁜 옷을 새로 맞춰야겠네. 돈이 얼마든 들어도 상관없으니, 마후유가 세계에서 최고로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 옷을 맞춰줄게. 그 어떤 남자라도 한눈에 반할 정도로 말이지.”

딸의 앞에서 금전적 지원을 아끼고 있지 않음을 강조하는 건 일종의 의식이었다. 차마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부모의 내리사랑을 막연하면서도 다소 구체적인 액수로 어림잡을 수 있게 해주는 걸로, 아이의 마음에 경외와 부채감이 맺히게 만들 수 있으니. 여전히 흐름을 따라가기 버거워서 입술을 옅게 달싹이다가, 마후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두 분께서 저를 이렇게나 생각해주셔서 한없이 기뻐요.

사춘기 시절 묵직하게 시작하여 가벼우면서 아프게 끝나버리는 풋사랑조차 해본 적 없었던 아가씨였다. 언뜻 보기에도 타고난 미모를 숨기지 못하여 시선을 잡아끄는 그녀에게 은근슬쩍 관심을 표하는 상대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런 부류는 별볼일 없는 시시한 것들이니 아예 눈길도 줘선 안된다는 어머니의 조언이 있었고, 마후유는 착실하게 그 말에 따랐을 따름이었다. ‘사람을 만나는 건 대학에 간 다음에’. 그런 말도 또한 들었던 듯 싶지만, 막상 대학에 진학한 이후로도 의사가 되고자 하는 목표에 붙들려 아가씨는 유의미한 인간 관계를 쌓지는 못했다. 늘 상대에 대해 무심한 듯 공허한 시선을 한 그녀에게 선뜻 다가오려는 사람이 해가 지날수록 점점 없어진 탓도 컸다.

그랬는데, 결혼인가. 한참 동안 치수를 잰 끝에 떠넘기듯 발치에 놓인 정숙한 분위기의 검은 이브닝 드레스를 뒤적거리며 마후유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아주 어렸을 적 읽었던 동화책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흰 토끼의 뒤를 쫓아가다가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소녀의 이야기. 꼭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자신의 몸은 엄지만하게 작은데 세상 모든 사물이 지나치게 커다란 장소에 홀로 떨어진 것마냥. 지독한 괴리감이 일상을 채우고 있으나, 아가씨는 어째서 그 감각이 괴로울 정도로 불편한 건지는 잘 알 수 없었다. 잘 알 수 없는 문제는, 부모가 마땅한 답을 내려주지 않을 경우 잊어버리는 편이 나았다.

시간이 흘러가고, 흘러간다. 달력의 넘어간 페이지는 의미없는 쓰레기가 되어 찢겨진 채 버려지고, ‘약속’ 이 되었다는 날은 결국엔 찾아온다. 약속의 날, 아사히나 여사는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딸의 외견을 계속해서 확인하였다. 곱슬거림이 조금이라도 덜하게 빗어넘긴 머리카락은 곁에서 보기에 깔끔한지, 특별히 주문해 맞춘 드레스가 볼륨감 있는 몸매를 확실히 잡아주고 있는지, 혹여나 화장이 어설픈 부분은 없는지. 그 과정은 흡사, 결착에 나서기 전 자신의 검이 제대로 관리가 되었는지 확인하는 무사의 행동을 연상하게 만든다. 오늘의 아사히나 마후유는 그녀의 부모에게 있어 ‘확실하게 잘 드는 검’ 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만 하는 걸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사히나 가의 차고에 있는 차는 타지 않는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부모는 운전기사가 수행하는 차량을 일회성으로 렌트한 모양이었다. 아사히나 일가가 목적지에 도착한 뒤 차량에서 내리는 광경을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을 터인데도, 부모에게는 그게 상당히 신경쓰이는 문제인 듯 싶었다. 그쪽 집안은 운전수를 대동하는 게 일상인 걸까. 이 또한 딸의 입장을 헤아려 격을 맞추기 위한 섬세한 노력인 거라면.

약속 장소인 호텔로 향하는 도중 부모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말했다. 여러 정세를 둘러 말하고 있으나 축약하면 간단해지는 이야기였다. 정계 재계에 걸쳐 대단한 영향력을 가진 집안이니, 만약 문제없이 결혼이 성사된다면 아사히나 가에 있어서도 큰 경사가 될 거란 말은 알기 쉬울 정도로 단순했다. 아사히나 마후유의 ‘아사히나’ 가 중요하단 거겠지. ‘마후유’ 란 부분은 사실,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부모조차 그녀를 ‘아사히나 집안의 딸’ 로만 인식하고 있는 거라면.

설령 그럴지라도 거기에 무슨 불만을 가질 수 있을까.

“처음 뵙겠습니다. 아사히나 마후유라고 합니다.”

일찍 도착해 미리 자리를 지키고 있던 아사히나 가족과 달리, 상대 가문 사람들이 약속 장소로 나온 건 미리 맞춰둔 시간에서 정확히 5분이 흐른 다음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소곳하게 예를 갖추는 아가씨를 향해 낯선 시선들이 모여들었다. 위아래로 천천히 훑어나가는 눈길들은 끈적거린다기보다는, 오히려 기묘할 정도로 건조했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에 대해 점수가 매겨지고 있는 거야. 그를 인지하며 마후유는 마른 침을 삼켰다.

다행히 그들 모두 ‘아사히나 가의 여식’ 의 첫인상에 대해 만족한 모양이었다. 개중 가장 발언권이 강한 걸로 보이는 노년의 남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착석한 이후, 살갑게 오가는 안부 인사를 통해 분위기는 금방 느슨하게 풀어졌다. 집안 어른들이 마후유와 이어주기로 점찍었다는, 그들 중 젊은 축에 속하는 남자가 부러 친근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전달받은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미인이셔서 놀랐습니다, 하고. 실제로 만나기도 전에 사진을 통해 외모를 품평했다는 게 유쾌하게 꺼낼 수 있는 말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재치있는 농담을 들은 양 웃음을 지었다.

종마를 연상하게 만드는 인간이었다. 짝짓기를 위해 선정된 개체라는 점에서 종마라고 불러도 딱히 어폐가 없기도 하였다. 오히려 그런 방식으로 자신이 내세워졌단 사실에 자랑스러움을 느낄 부류로 보인다. 사회에서 인정받는 우수한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 그만을 뭉쳐 만들어놓은 자의식에 의거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존재란 인간이라기보단 괴이에 가까울 터였으나, 양쪽 집안 어른들은 그런 남자를 제법 고평가하는 분위기였다.

들어도 그만 듣지 않아도 그만일 대화가 오가는 사이에 앉은 자리의 모란처럼 미소를 짓고 있다가, 마후유는 문득 곁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도 모르게 어딘가에 설치되었을 스피커를 찾는다. 조금 전까지 중후한 클래식이 흐르던 라운지에 생경한 음악이 샘물처럼 차올랐다. 직전에 나왔던 음악과 대비되어 상대적으로 가벼운 곡조란 인상이 있었으나, 가만히 듣고 있으면 음계마다 차분하게 채워진 무게감이 느껴졌다. 어떠한 반주도 없이 관악기, 아마도 오보에의 독주로 이어지는 부분은 연약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늘었지만 곧 정갈한 합주로 넘어가며 일순 보였던 의도적인 위태로움을 지워냈다. 덧없이 아래로 추락하기 직전 단단한 반석 위로 올라선 듯한 감각.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게 안도감임을 깨달으며, 마후유는 충격을 느꼈다. 고작 음악을 들었을 뿐인데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되다니.

“듣기에 생소한 곡이네요. 요즘엔 이런 곡도 플로어에 내보내는군요.”

“부인께서는 처음 들으시는 모양이로군요. 요즘 굉장히 인기를 끌고 있는 신세대 작곡가의 곡이라고 합니다. 듣자하니 마침 오늘 여기에서 초청회를 하는 거 같던데, 그래서 호텔 측에서 이 곡을 틀어둔 게 아닌가 싶네요.”

“아아, 신세대 작곡가라니. 제가 교양이 그리 폭넓지 못해서 과거 이름난 거장들의 곡만 듣다보니 트렌드를 전혀 따라가질 못했네요. 어쩜, 다양한 분야에서 이토록 아는 게 많으시니, 우리 마후유와도 여러 주제로 즐겁게 대화를 하실 수 있겠어요.”

“하하, 살면서 이래저래 주워들은 게 많을 뿐입니다. 여담인데 이 곡을 만든 작곡가, 여성인데 상당한 미인이라고 하더군요. 운이 좋으면 오늘 여기서 얼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싱글거리는 기색으로 남자가 말하자 곁에 앉은 노년의 남성이 헛기침을 짧게 한다. 적절하지 않은 말을 했다는 자각은 들었는지 남자는 마후유를 쳐다보며 한쪽 눈을 찡긋해보였다. 물론 한눈 팔지 않고 아사히나 양만을 바라보고 있을 생각입니다만. 주워섬기는 말에 부모가 즐겁다는 듯 웃음소리를 내었기에, 일순 머뭇거리다가 마후유는 따라서 웃어보였다.

다시금 아무런 의미도 없을 대화로 돌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마후유는 세계를 채우는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하나의 소리가 그 다음의 소리로 이어질 뿐인데, 그 흐름에서 수많은 심상이 피어올랐다가 사그라들기를 반복하였다. 눈물처럼 뚝뚝 흘러내리는 소나기 속에 남겨졌다가, 다음 순간 비 갠 뒤 맑은 하늘이 보이는 기분에 옅은 상쾌함을 느끼게 된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고립되는가 싶다가, 저 멀리 뚜렷하게 반짝이는 빛을 찾아낸 듯 안도감에 한숨짓게 된다. 음악이란 건 이토록 마술 같은 기교였던가. 교양을 쌓아야만 한다는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세계의 명곡들을 듣던 때는 이런 체험, 전혀 하지 못했었는데.

신세대 작곡가라면, 젊은 편에 속하겠지.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일까. 성별은 여성. 어떤 사람이 이런 곡을 만드는 걸까.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누르는 누군가의 모습을 상상해보려고 하다가 마후유는 포기했다. 평생 고형의 지식들만을 수동적으로 삼키며 살아온 자신은 약간의 정보값들을 바탕으로 막연한 상상을 떠올리지도, 그를 하나의 이미지로 구체화시키지도 못한다. 굳어버린 영혼으로는 이토록 자유롭게 피어오르는 선율을 일부 모방조차 하지 못하겠지. 어쨌든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리라. 그렇게 상상을 맺고는, 아가씨는 주먹을 꾸욱 감싸쥐었다.

“저, 잠시......”

운을 떼고는 마후유는 잠시 망설였다. 이런 자리에서는 꽃을 꺾으러 다녀오겠다고 말하는 게 예법인 걸까. 혹여나 그게 우스꽝스러운 실수라 부모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결과가 되어버리면 어쩌지. 아가씨가 망설이는 사이, 어련히 눈치를 챘는지 저쪽 집안의 부인이 빙긋 웃으며 고갯짓을 해보였다. 따라 웃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마후유는 작은 핸드백을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복도에도 예의 음악은 흐르고 있었다. 딱히 화장실을 가고 싶었던 건 아니었기에 마후유는 느릿한 걸음으로 호텔 복도를 나아갔다. 무슨 용건으로 그 자리에서 나오려고 한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초청회에 대해 알리는 포스터가 호텔 로비에 붙어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곡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왔을지, 뜻모를 호기심이 차올라 가슴 깊은 곳을 간지럽힌다. 이상해, 정말 이상해. 왜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 걸까. 속으로 중얼거림을 삼키며, 어딘가 있을지도 모를 안내문을 찾으려고 아가씨가 고개를 두리번거린 순간이었다.

[툭]

“앗.”

“으앗, 죄, 죄송해요.”

마주 다가오던 상대와 가볍게 어깨가 닿아서, 마후유는 황급히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민폐를 끼쳤으니 사과해야만 한다. 그처럼 생각하지만 똑같은 결론을 내린 듯한 상대 쪽이 한 발 앞선다. 차분하고 고운 목소리로 사과를 하고서 상대는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길게 흘러내린 은빛 머리카락이 몸짓을 따라 우아하게 흔들렸다. 작고 새하얀 꽃들이 오밀조밀하게 군집을 이루며 피어난 화원 같아. 상대를 바라보며 잠시 멍하게 있다가, 마후유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따라서 고개를 작게 숙인다.

“아니에요. 제가 그만 다른 생각에 빠져서. 폐가 되었습니다.”

예를 갖추는 건 그걸로 충분하다. 서로 멋쩍은 듯 웃어보이고는 지나쳐서 각자 가던 방향으로 향하면 된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맞은 편의 여성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마후유 또한 오도카니 그곳에 머문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상대의 푸른빛 눈동자가 아름답다고, 문득 마후유는 생각했다. 관찰당하고 있음에도 이상하게 불쾌하지 않았다. 끈적하지도, 건조하지도 않다. 점수를 매기고 있는 게 아니다. 다만, 바라봐주고 있을 뿐.

잠깐의 시간 동안 마후유 또한 상대를 관찰하게 된다. 예쁘게 다듬어져서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은빛 머리카락, 마후유보다 한 뼘 정도 작을 키에 그에 걸맞는 아담한 몸집, 입고 있는 건 긴 기장의 치마가 인상적인 검은색 여성 정장, 제법 무게감 있는 의복과는 다소 맞지 않게 순하고 어려보이는 얼굴, 그 부조화로 인해 생겨나는 귀엽다는 인상. 힘껏 피어난 작고 하얀 꽃송이가 사람이 된다면 이와 같을까. 기분 탓인지 좋은 향기가 느껴져. 저도 모르게 작게 숨을 들이삼켰을 때였다.

“저기, 괜찮으신가요?”

“......네?”

“어딘가, 힘들어보이는 표정을 하고 계셔서요. 혹여나 불편하신 부분이 있으신가 싶어서. 아, 괜한 간섭을 한 거라면 죄송해요.”

일방적으로 말을 하다가 스스로 화들짝 놀라며 재차 사과를 한다. 어딘가 허둥거리는 기색으로 자신을 대하는 상대를 바라보다가 마후유는 작게 풋, 웃음을 지었다. 상냥한 사람이구나. 그런 그녀가 보기에 자신은 힘들어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는 걸까. 누가 보더라도 무난하게 받아들일 얼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도와는 달리 완벽한 모습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별일 아니에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그럼.”

“앗, 그게.”

목례를 하고 지나치려다가 붙드는 듯 튀어나온 소리를 듣고 마후유는 걸음을 멈췄다. 망설이는 듯 잠시 우물거리다가 꽃송이처럼 새하얀 아가씨는 결심이라도 한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딴엔 작게 심호흡하는 소리가 마주하는 사람에게도 훤히 닿는다.

“저기, 오늘 여기서 제가 피아노 연주를 하기로 되어있거든요. 괜찮으시다면, 부족한 실력이지만......”

“네?”

“아, 아니에요.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실례했습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소리를 의아함 섞인 거부로 이해한 걸까. 무안했는지 하얀 아가씨는 한순간에 얼굴을 붉히더니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마후유가 뭐라고 말을 잇기도 전에 목례를 하고는 순식간에 자리를 떠난다. 서두르는 걸음으로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눈길로 쫓다가 마후유는 홀로 벙긋거리던 입술을 닫았다. 오늘, 여기서, 피아노 연주.

초청회를 알리는 포스터는 찾기 쉬웠다. 로비의 벽면에 붙은 안내문을 마후유는 천천히 눈으로 훑었다. 조금 전 마주쳤던 그녀의 모습이 포스터에 크게도 나와있었다. 새로운 시대를 연 천재 작곡가, 상냥한 선율, 호젓하면서 안온한, 새롭게 발표하는 곡을 직접 연주, 오늘을 가리키는 날짜, 그리고, 요이사키 카나데. 카나데. 소리내지 않고 그 이름을 불러보고는 마후유는 눈을 깜박였다. 하얀 꽃송이를 닮은 그녀의 이름이었다. 또한, 태어나서 처음으로 전율을 느끼게 만든 곡을 작곡한 이의 이름이었다.

마후유가 자리로 돌아왔을 즈음 이미 대화는 거의 끝나가는 분위기였다. 지나치게 긴 시간 자리를 비운 걸 책망하듯 어머니가 눈치를 주었고, 마후유는 가슴이 쪼그라드는 죄책감을 느끼며 시선을 떨구었다. 다음 번엔 당사자인 두 사람만 만남을 가지는 걸로 하자며 양쪽 집안 어른들끼리 합의를 마친 뒤, 사람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업차 만남을 가진 외판원들이 할법한 동작으로 퇴장하는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마후유는 어머니의 고갯짓을 깨닫고 걸음을 옮겼다.

플로어의 스피커는 침묵하고 있었다. 요이사키 카나데가 그녀만의 천재성을 바탕으로 자아낸 선율은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 아쉬움이란 갈증과 닮아있구나. 마른 침을 삼키며 마후유는 생각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밍밍한 맛이 감도는 물을 한 모금 들이켰었음에도 목이 말라 견딜 수가 없었다. 한 모금의 수분을, 한 마디의 선율을 간절히 원하게 된다. 지금껏 자신이 헤매고 있던 곳은 차디찬 밤의 사막이었던 걸까. 불현듯 이는 답답함에 아가씨가 가슴 부근으로 손을 끌어올린 순간이었다.

한 차례 박수치는 소리가 파도처럼 울린다. 마후유는 걸음을 멈추었다.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라운지 한쪽에 흡사 재즈바의 형태처럼 갖추어진 무대가 보였다. 한 대의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 그 주변을 밝히는 온화한 조명, 무대를 중심으로 둥글게 배치된 테이블과 좌석들. 박수치는 사람들의 손이 억새밭의 허연 풀잎처럼 흔들렸다. 갈채 속에서 새하얀 그녀가 인사한다. 그게, 이런 자리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대본 따위 존재하지 않는 게 빤히 느껴지는 어설픈 인사를 하고는 쑥스럽게 미소를 짓는다.

괜찮으시다면, 부족한 실력이지만......오늘 제가 연주하는 자리에 참석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당신이 들어준다면, 그래서 조금이나마 웃을 수 있게 된다면 좋겠어요.

“아......”

이제부터 그녀가 직접 연주하는 곡이 세계를 가득 채울 예정이었다. 그를 위해 스피커는 침묵하기로 한 거겠지. 가늘고 고운 손가락이 피아노의 건반을 부드럽게 누르는 광경을 상상한다. 그로 인해 흘러넘칠 그만의 음악 세계를 또한 상상한다. 녹음되어 몇 차례나 재생되었을 음악도 그렇게나 아름다웠다. 그 어디에도 박제되지 않고 오직 이 장소에서만 연주될 곡이 얼마나 장엄하고 고결할지, 거기까지는 차마 상상하지도 못한다. 듣고 싶어. 당신이 연주하는 곡을 듣고 싶어. 원하고 또 원해서 안타까움마저 느끼게 되어버린다.

“저기, 엄마......”

아사히나 마후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무엇을 하든 간에 부모로부터 허락을 받는 게 착한 아이가 되는 조건이었다. 그 옛날, 지금보다 한참 작았던 시절 밖에 나가 같은 학급의 친구들과 놀아도 괜찮냐고 허락을 구하려고 했던 때와 똑같은 심정으로, 아가씨는 자신의 부모를 쳐다보았다. 부모도 지금 진행되고 있는 초청회의 광경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옅게 희망을 품는다. 분명, 분명 더없이 가슴 따뜻한 체험이 될 거에요. 잠시만 그녀가 연주하는 걸 지켜보고 가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음악이란 걸 느낄 수 있게 해주세요.

“아까 이야기 나온 젊은 작곡가라는 게 저 사람인 모양이구나.”

“그런가봐요.”

“음반 회사도 쉽지 않은 모양이야. 아이돌 산업이 하는 방식으로 얼굴 마담을 내세워 이목을 끌 생각이나 하고. 요즘엔 고상한 음악을 듣는 사람들도 몇 안되니 장사를 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겠지.”

옅은 희망이 한순간에 바스라진다. 입술을 약하게 달싹이며, 마후유는 자신의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입꼬리를 슬쩍 뒤틀며 웃는 얼굴에서는 경멸과 냉소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자, 마후유. 어서 돌아가자꾸나.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시간을 알차게 써야하지 않겠니.”

“......으읏.”

부모의 판단은 틀리지 않을 터였다. 교양에 도움이 되는 수준 높은 음악에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를 의심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마후유는 속이 찢겨나가는 듯한 원통함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흘러나오던 선율을 그들도 또한 듣지 않았던가. 그 곡에 담긴 애절함과 간절함, 그래서 밀려드는 따스함을 어째서 몰라주는 것인지. 갈증 속에서 죽어가는 자신이 이렇게나 애타게 그를 원하고 있는데.

착한 아이였잖아요. 한순간도 빠짐없이 착한 아이로 살아왔잖아요. 평생 남을 해치던 칸다타도 생전 단 한 차례 선행을 행한 적이 있었단 이유 하나로 무간지옥에 빠진 뒤 실낱 같은 거미줄을 붙들 기회를 얻지 않았던가요. 어째서 한순간의 구원조차 용납하지 않는 건가요. 싫어요. 싫어요. 정말로 싫어요. 원하지 않는 공부, 원하지 않는 직장, 원하지 않는 결혼, 원하지 않는 미래, 그 무엇도 따라가고 싶지 않은데. 그럼에도 그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라면, 적어도 이 순간 가슴을 따뜻하게 채워주는 음악이라도 듣고 싶을 뿐인데.

“......네.”

작게 끄덕이며 대답한다. 어머니가 빙긋 미소를 지어보인다. 잠시 멈췄던 걸음이 다시금 앞으로 나아간다. 가족 셋이서 나란히.

상대가 제법 괜찮은 남자였다며 아버지가 말한다. 좋은 집안에서 자란 사람다운 면모가 느껴졌다고 어머니가 덧붙인다. 그런 사람과 만날 수 있게 되어서 마후유에게 행운이라고 말한다. 다음 번 만남 땐 자연스러운 느낌이 나게끔 새로 옷을 맞추는 게 좋겠다고 말한다. 혹여나 연애에 너무 빠져 시험을 소홀하게 여겨선 안된다고 말한다. 사랑 때문에 한 차례 실패하는 경험을 해보는 게 청춘 아니겠냐고 웃으며 말한다. 단 한 차례도 실패하는 걸 용납했던 적이 없었으면서.

건물을 나서자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전화로 택시를 호출하는 부모의 곁에 멍하게 서 있다가, 마후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희미한 비를 뿌리고 있는 하늘은 온통 먹구름으로 뒤덮인 채였다.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흐릴 뿐이다. 자신을 매장하고 있는 세계의 천정은 오로지 잿빛일 뿐이구나. 생각하며 아가씨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바람에 흩날린 빗방울이 뺨을 적셨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