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 밑 소인들은 반지를 숨기지 않았다

프로젝트 세카이 마후유 x 카나데

“고백받았어.”

말하는 어조가 워낙에 평이했기에 소녀는 상대가 이번에 마신 차에 대해 품평을 남기는 걸로 착각하였다. 그랬기에, 한 박자 늦게 말의 의미를 인지하고 어깨를 움찔 떨어버렸다. 복숭아꽃차에서 복숭아 과즙 맛이 나는 건 어떻게 된 일인지, 과실의 달콤함과 꽃의 향긋함은 별개의 사안 아니었는지에 대해 고민하던 내용은 싹 잊어버리게 된다. 고백을 받아? 누구에게? 기습을 당해 어지러워진 정신으로 맥락을 더듬다가 소녀는 상대를 쳐다보았다. 깔끔하게 비운 찻잔을 앞에 둔 그녀가 물끄러미 시선을 마주해왔다.

“고, 고백? 어, 어, 언제?”

“엊그제였나. 저번 주였나. 정확히는 기억 안 나.”

“누, 누구에게 받은 거야?”

“학교 후배. 이름은 몰라.”

“고백받았다며? 아는 사이 아니야?”

“이야기 해본 적 없어. 아니, 있었을까. 모르겠어. 기억에는 없어.”

무심하게 답하는 아사히나 마후유를 바라보다가, 요이사키 카나데는 어깨에 들어간 힘을 느슨하게 풀었다. 마후유의 태도로 보아 적어도 누군지 모를 상대의 고백은 성사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누군가와 사귀게 되었어’ 라는 보고는 아니란 의미다. 다행이다.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가 카나데는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왜 자신이 안도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라고, 그렇게 스스로의 마음을 애써 속인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소녀는 아직 차가 남아있는 잔을 두 손으로 붙들었다. 희미하게 잔류하는 온기가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고백받아서, 마후유는 어떻게 했어?”

“미안해, 라고 했어. 그거 외엔 할 말이 없었으니까.”

“그랬구나. 엄청난 일이었네.”

“잊을만하면 있는 일이야.”

“뭐? 이전에도 그런 적 있었어?”

“응. 학교에서는 가끔, 주로 예비교에서 남자들이. 대화 한 번 한 적도 없는데 갑자기 불러세워선 좋아한다고 말해.”

마후유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진다. 그게 마후유에게 있어 상당한 불쾌감의 표현이라는 걸 이해하고는 카나데는 다시금 안도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울적해지는 기분을 어쩌지 못한다. 잊을만하면 고백받는 건가. 그럴만도 하다. 마후유는 예쁘고 좋은 의미로 다재다능하며, 대외적으로는 밝은 성격에 어른스러운 면모를 갖춘 아이니까. 인간관계 원만, 성적 우수에 체력도 우수, 궁도부 소속에 학생회의 일원, 친구들에게 늘 상냥하게 웃는 얼굴을 보여주는 아가씨. 겉으로 보이는 세계를 하이틴 드라마 한 편으로 편집한다면 분명 메인 히로인 역할로 캐스팅 될 소녀. 연애에 대한 몽상적인 기대감을 품고 사는 청춘들에게 아사히나 마후유란 존재는 꿈만 같은 연애 경험을 보장해줄 금빛 티켓으로 보일 테다. 저 아이랑 사귈 수 있다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일 건데, 하면서. 고백받는 일 따위 지금 그녀가 보이는 반응대로 잊을만하면 반복되는 일상사겠지.

“마후유는 인기인이네. 고백이라......나에겐 대사건으로 느껴지는데 말야.”

“귀찮고 번거롭고 시시하기만 할 뿐이야. 조금도 좋을 게 없어. ‘거절해도 원망하지 않을게.’ 라고 말하는데, 멋대로 좋아한다고 말하는 주제에 원하는 대로 답해주지 않으면 원망한단 자체가 사리에 맞지 않을 거란 생각은 못하는 걸까. 선심 쓰듯 말하다니.”

“으응......”

“실제로, 원망하기도 하지. 시선이 느껴져서 돌아보면 숨길 생각도 없이 노려보고 있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나에 대해 수군거리고. 난데없이 좋아한다고 말하고는,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고 그 다음엔 멋대로 미워하기 시작하다니......후후, 다들 자기 좋을대로의 감정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려는 망집을 순수한 애정이란 이름으로 치장하고 싶어하는 거야.”

“확실히 곤란하겠구나.”

“그래서, 상대가 누구든 더는 이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아졌어. 같은 학교의 애들도, 예비교의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들도 불편할 뿐이니까.”

말을 마치고는 아가씨는 식탁 아래에 내려두었던 자신의 가방을 들어올려 무릎 위에 놓았다. 덮개를 열고는 무언가를 찾는 듯 뒤적거린다. 앞면에 ‘고백 사절’, 뒷면에 ‘수작 걸면 죽인다’ 라고 적힌 티셔츠라도 입을 생각인 걸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겠지. 언젠가 통신판매 사이트에서 본 적 있는 충격적인 상품을 떠올렸다가 카나데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는 사이 마후유는 찾던 물건을 꺼내 식탁 위에 놓았다.

와인색의 작은 상자였다. 카나데의 작은 손바닥 위에 올려도 앙증맞게 크기가 딱 맞아떨어질 상자. 표면에는 어떠한 장식도 문구도 보이지 않는다. 무슨 상자인 걸까. 호기심을 품었다가, 문득 그렇게 생긴 상자에 일반적으로 어떤 물건이 들어있는지를 유추하고는 카나데는 작게 숨을 들이삼켰다. 막상 내용물을 짐작하고 나니 그 외에 다른 가능성이 있을 리 없다는 확신까지 들었다.

“이건......”

“반지야. 학교에선 교칙 때문에 무리겠지만 예비교에서라도 한번씩 이걸 끼고 다닌다면 다들 좋을대로 착각해줄 거라고 생각했어. 카나데가 생각하기엔 어때?”

“으응, 괜찮지 않을까. 일방적으로 고백하려는 사람이라면 그 이전에 마후유를 관찰하고 있을 거니까, 반지를 낀 모습을 본다면 이미 마후유에게 소중한 사람이 있다고 짐작하고 물러날 거라고 생각해.”

“......그래. 소중한 사람이 있다고.”

카나데가 꺼낸 말의 한귀퉁이를 따라서 중얼거리고는 마후유는 달칵, 자신이 있는 방향으로 상자를 열었다. 집어드는 손끝에 은빛의 얇은 고리가 붙들려 올라온다. 덩굴의 형태를 모사하여 위쪽으로 얇은 잎사귀 형태의 세공을 넣은 반지였다. 별도의 장식이 달리지 않은, 약간의 금속을 사용해 만들었을 반지는 경제력을 갖춘 어른들에게는 꼬마들의 장난감처럼 보일만한 물건이었다. 고등학생이 자기 용돈을 모아 살 수 있을 정도의 악세사리. 하지만 그렇기에, 꿈꾸는 마음만으로도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할 줄 아는 아이들에게 은반지는 숭고한 의미를 지니는 증표가 된다.

마후유는 들어올린 반지를 자신의 왼손 약지에 천천히 꼈다. 은빛 상징이 소녀의 손가락을 장식한다. 그 광경을 카나데는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왼손 약지의 반지. 나에게는 소중한 사람이 있습니다, 라는 소리없는 선언. 베나 아모리스, 사랑의 혈맥이 곧장 심장으로 이어진다는 왼손 약지에 소중한 상대와 나눈 상징을 채운다는 의미. 비록 위장에 불과하더라도 이 순간 마후유는 반지를 꼈다. 그를 바라보며 카나데는 저도 모르게 옷의 소매를 꾸욱 감아쥐었다. 가슴이 술렁였다. 마후유, 언젠가는 누군가와 진심으로 반지를 나눠끼게 될까. 그 사람과 손을 마주잡고 서로 바라보며 환하게 웃어보일까. 분명 마후유만큼이나 멋지고 대단한 사람이 상대이겠지. 그를 상상하면 안타까운 감정이 불길처럼 마음을 태우기 시작해서......

“카나데.”

“으, 으응?”

“반지, 한 쌍을 묶어 파는 상품 밖에 없었어. 내게 필요한 건 하나 뿐이야. 그래서 하나가 남아.”

“응.”

“......집에 두고 다닐 수는 없어. 그렇다고 매번 들고 다니기는 곤란해. 버리기는 다소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니......하나는, 카나데에게, 맡겨두고 싶어.”

“응. 으음......어어?”

혼자만의 상념에 빠져 울적해져 있다가, 열린 상자를 자신에게로 쭉 밀어넘기는 마후유의 행동에 카나데는 정신을 차렸다. 상자 속에 남은 은빛 고리가 수줍게 빛나고 있다.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눈만 깜박이고 있는 카나데를 빤히 쳐다보다가 마후유는 짝이 되는 반지를 집어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상체를 카나데에게로 기울여서는, 손바닥 위에 반지를 올리고 그를 살며시 내민다.

“맡아줄래?”

“괘, 괘, 괜찮아? 내가, 내가 받아도......그러니까, 어디까지나 맡아두는 거지? 그러네, 우리 집에 두면 필요할 때 언제든 다시 찾아갈 수도 있을 거고. 응, 으응! 나라도 괜찮다면 맡겨줘.”

“원한다면 카나데가 껴도 돼.”

반지를 받아드는 손이 가늘게 떨렸다. 얇은 은반지는 가벼워서 손바닥 위에 놓았을 때에도 별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현실에 반지가 존재하고 있는지, 자신이 꿈을 꾸는 중이 아닌지 괜한 의심이 들어 카나데는 몇 번이고 손에 들어온 반지를 만져보았다. 작고 둥글고 매끄럽게 기분좋은 감촉. 잎사귀 형태가 희미하게 세공된 모양새는 반지에 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지금 마후유의 왼손 약지에 자리잡은 반지와 짝이 되는 반지.

껴도 된다고 마후유가 말해줬지만 그게 자신도 따라서 왼손 약지에 껴도 좋다는 의미인지 확신이 없어서 카나데는 흘끗 눈치를 살폈다.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알아챈 건지 마후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러니까, 괜찮은 거지. 결심을 굳히고 카나데는 자신의 약지 끝에 반지를 가져갔다. 손이 떨리고 있는 게 여실히 보인다. 심장 뛰는 소리가 세계를 채운다. 카나데는 한 차례 심호흡을 했다. 굉장한 의식을 앞둔 듯한 긴장감마저 들었다. 마음 속으로 박자를 세다가 손가락에 천천히 반지를 끼워넣는다. 유독 얇고 가는 편인 카나데의 손가락에 기분 좋을 정도로 딱 맞게 반지가 자리를 잡는다.

소녀는 멍한 얼굴로 반지를 낀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기쁘다. 하염없이 기뻐서 눈물이 날 정도로. 오로지 하나의 마음으로 가슴이 가득 차버린다. 신디사이저 앞에 앉는다면 지금의 감정을 지쳐 쓰러질 때까지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을 거란 기묘한 자신감마저 들었다. 반지를 맡아주기로 했을 뿐인데 감격해서 울어버린다면 보기 우스울 거야. 겁이 많은 소녀의 일면이 걱정스레 속삭이기 시작해서, 카나데는 흠칫 어깨를 떨고는 소매로 눈가를 문질렀다. 그래, 어디까지나 맡아둘 뿐이니까. 그치만 그렇더라도 좋아. 반지를 맡길 상대로 날 선택했다는 사실이 기뻐. 휘몰아치는 감정 속에서 어떻게든 태연함을 꾸며내고는 카나데는 마후유에게 힘껏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절대 잃어버릴 일 없게 정성을 다해 보관해둘게. 언제나 새것처럼 보이게 관리도 열심히 할테니까. 마후유가 맡겨준 반지, 목숨보다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을 거야.”

“......그래.”

왕가의 비보를 맡아달라는 명령을 받은 개국공신마냥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금방 사랑스럽게 헤헤 웃음지으며 손가락에 낀 반지를 소중하게 품에 꼬옥 끌어안는다. 그런 카나데를 바라보다가 마후유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살짝 움직인 입꼬리에서 라일락 색채의 애정이 옅게 피어났다. 반지를 매만지고 있는 카나데를 따라서, 마후유는 자신도 끼고 있는 반지를 슬쩍 쓰다듬었다. 매개체를 통해 이어진다는 감각. 어째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도 작은 고리 하나에, 의미를 담은 증표에 집착하는지를 아가씨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요이사키 카나데가 아사히나 마후유로부터 반지를 받았던 날. 그게 지금으로부터 대략 5주 전의 일이었다.


그 날은 아침부터 일진이 사나웠다. 어두운 세상에 동이 틀 때까지 밤새 작업을 하다가 밀려드는 졸음기에 침대 위로 쓰러진 게 아마 오전 6시 경이었다. 그대로 정오를 넘길 때까지 푹 잠들 수 있었다면 참으로 좋았으련만, 어디에서 무슨 공사를 하는 건지 지축을 뒤흔드는 굴착기 소리와 공기를 잡아찢는 용접기 소리가 온 세상을 어지럽히기 시작하여 카나데는 얕은 잠에서 깨고 말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 순하고 상냥한 성품의 소유자조차 신경질적으로 짜증을 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소음은 요란스러웠다.

귀마개 대용으로 헤드셋을 쓰고 잠을 청해보려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커터 돌아가는 날카로운 소리가 허공을 난도질했다. 적당한 박자로 반복되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폭력적인 형태를 하고 있는 이상 음악이라고 불러줄 수 없다. 알 수 없는 근원지를 거점으로 하여 파상공세를 이어가는 소음의 물결에 백기를 들고서 카나데는 비척비척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애시당초 굵은 신경줄의 소유자도 아니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힘겨운 순간에는 위안이 필요한 법. 카나데는 소중한 오르골을 모셔둔 선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르골의 옆에 놓아둔 작은 종이상자를 집어든다. 투박하게 생긴 종이상자는 다소 볼품없게 보이더라도 지난 달부터 일종의 안전 금고 역할을 맡고 있었다. 보안 장치 하나 달려 있지 않다만 그래도 금고에 들어갈만한 중요한 귀중품을 보관하는 중이다. 단순히 돈으로 가치를 계산할 수 없는 귀중품. 꼭 닫힌 뚜껑을 열면, 그 속에는 은빛의 증표가......

“......어?”

텅 비어있는 상자 안을 확인하고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히 있어야 할 물건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린다. 멍하게 눈을 깜박이다가 카나데는 뚜껑을 뒤집어보았다. 통에 담긴 요구르트도 아니고 뚜껑 뒷면에 물건이 붙어있을 리는 없지만. 아무 것도 붙어있지 않은 뚜껑 뒷면을 확인한 다음 카나데는 입을 작게 벌렸다. 한순간에 졸음기가 싹 날아가버린다.

“어라, 어디 갔지?”

당황하며 상자가 놓여있던 주변을 확인해봐도 반지는 보이지 않았다. 선반 아래의 바닥을 훑어본 다음 카나데는 충격과 절망이 뒤섞인 표정을 하고서 머리를 감싸쥐었다. 분명 여기에 있어야만 하는데. 속으로 처절하게 외침을 삼키지만 별 의미는 없다. 현실을 부정하려고 상자 안을 다시 들여다봐도 텅 빈 상태 그대로다.

반지를 ‘맡아두기로’ 했던 날 이후, 카나데는 틈만 나면 반지를 꺼내보았다. 중요한 물건을 엄숙하게 보관하기에는 그리 좋지 않은 방식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악상이 떠오르지 않아 답답한 기분이 들 때에 반지를 왼손 약지에 끼고는 살살 표면을 매만지고 있으면 마법처럼 그 아이를 위한 선율이 떠올랐다. 반지를 매개로 하여 그 아이를 떠올리게 되는 감각은 기묘하리만큼 두근거리고 기분 좋아서, 소녀는 일련의 행위에 중독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그래도 잠깐만 만져보고 다시 상자에 넣어두곤 했으나, 시간이 흐르며 경계심도 살짝 무뎌지고 말아 최근에는 반지를 낀 채 잠들기도 했었다.

어제도 반지를 꺼내봤었다. 그 기억만큼은 뚜렷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반지를 상자에 되돌려둔 기억은 떠올리지 못한다. 어디에 놓아뒀던 거지? 애시당초 손가락에서 반지를 뺐던 기억도 희미해. 모르는 사이에 손에서 빠진 건가? 필사적으로 지난 하루의 궤적을 더듬어봐도 명쾌한 해답이 나오지 않아 카나데는 울상이 되었다.

절대 잃어버리는 일 없게 잘 보관해둘 거라고 큰소리 쳤으면서 지금 어디에 반지를 뒀는지 제대로 떠올리지도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마음 한켠에서 그리 소중하게 여기지 않아서 소홀하게 취급하다가 잃어버린 게 아니냐는 매도의 목소리가 울린다. 절대로 그렇지 않은데. 진심으로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항변하려고 해봤자 반지를 잃어버린 죄가 있는 이상 발언권조차 없으리라. 마후유도 그처럼 생각할까. 요이사키 카나데가 반지를 소홀하게 취급했다고. 만약 마후유가 지금의 사건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렇구나. 잃어버렸구나. 절대 잃어버리는 일 없이 정성을 다해 보관해줄 거라고 했었으면서. 목숨보다 소중하게 간직할 거라고 했으면서. 말이라는 건 꺼내기는 참 쉬운 모양이야. 사전에서 뭔가 있어보이는 단어를 따라 읽기만 하면 되지. 절대라든가, 정성이라든가, 목숨이라든가. 그러네. 카나데는, K는......목숨도 그리 소중하지 않은 걸까?’

죽는다. 죽는다. 죽어버린다. 얼음장처럼 새하얗게 서리가 낀 라일락 꽃잎 더미에 압사당해버린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되어 머리카락 끝을 꾹꾹 잡아당기다가 카나데는 힘껏 고개를 내저었다. 잃어버린 채로 울면서 포기할 생각은 없다. 당연히 되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보면 반지는 집 안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카나데는 집 밖으로 외출을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몇 차례 외출을 했던 때에도 반지는 들고 가지 않았었다. 게다가 어제까지는 확실히 있었던 거잖아? 물건에 발이 달리지 않은 이상 집을 벗어나진 않았겠지. 온종일 집에만 머무는 자신의 생활 방식에 한껏 찬사를 보내고는 소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일단 그럼, 여기부터 찾아봐야......”

고개를 돌리면 악보와 메모장 더미가 언덕처럼 쌓이고 빈 물통이 정물화의 피사체마냥 굴러다니는 방의 풍경이 시야에 잡힌다. 빠르게도 마음이 꺾이려는 걸 가까스로 견뎌내고는 카나데는 마구잡이로 쌓아둔 악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종이의 끝을 맞춰 악보들을 정리해 구석에 일렬로 놓아나간다. 들어올린 악보 사이로 반지가 톡 떨어지길 기대하지만 방의 정리가 대충 끝날 때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잠이 부족한 몸으로 허리를 숙이며 돌아다닌 게 벌써부터 부담이 되어 카나데는 침대에 걸터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아까 작업을 끝내고 침대에 풀썩 엎어질 때 반지가 빠진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카나데는 침대를 확인해보았다. 이불을 들춰보고 베개를 뒤집어본다. 매트릭스와 벽면 사이의 틈새를 살피기도 한다. 어디에서도 반지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하고 소녀는 축 늘어지고 말았다. 생각 같아서는 침대를 옆으로 밀어내고 살펴보고 싶지만 지금의 상태로 가구를 옮기기란 무리다. 조금만 쉬고 PC와 신디사이저 아래의 공간도 확인해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카나데가 살며시 눈꺼풀을 내린 순간이었다.

초인종 소리를 듣고 카나데는 그게 공사장에서 들려오는 소음의 일부가 아닌지 잠시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오전 시간에 요이사키 가를 찾아올 사람은 없었으니. 이번 주에는 인터넷으로 물건을 주문한 적도 없었다. 실내에 흐르는 녹음된 기계음이 명확하게 초인종 소리임을 인식하고서 카나데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누군지는 몰라도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고, 상냥한 소녀는 그를 무시할 수 없었다. 일간지 구독을 권유하는 사람이어도 정중하게 거절은 해야한다.

“누구시죠?”

“아, 요이사키 씨. 저에요.”

“모치즈키 씨?”

상대의 목소리를 듣고서 카나데는 서둘러 현관의 잠금을 풀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더라. 모치즈키 호나미가 파견 가정부로 일을 하러 와주는 날이 맞기는 하다. 그렇지만 그녀가 일을 하러 찾아오는 건 오후 시간대인데. 의아해하며 현관을 열면, 차분한 인상의 어여쁜 소녀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목례를 해온다. 마주 인사를 하고서 카나데는 상대를 집으로 맞아들였다.

“실례할게요.”

“어서 와. 그런데 무슨 일이야?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왔네.”

“어머, 문자를 보냈는데 전달이 되지 않았나봐요. 죄송해요. 확실히 요이사키 씨의 의견을 확인하고 왔어야 했는데. 지금 시간대에 오면 폐가 되었을까요.”

“으응, 아냐. 그런데 이 시간에 와도 괜찮아?”

시선이 호나미가 입고 있는 옷에 머문다. 밝은 베이지색 가디건 아래로 입고 있는 건 분명 교복이다. 학교에 가는 날인 건 틀림없이 맞다. 오늘은 주말이 아닌 평일이니까. 의아함 섞인 카나데의 눈길을 알아채고는 호나미는 웃으며 설명을 이었다.

“오늘 저희 학교 강당에서 외부 인사들이 참여하는 행사가 열릴 예정이어서요. 설비를 보조하는 학생들 외에는 일찍 귀가하게 되었어요. 저, 집에서 매실청을 만들어서 조금 챙겨왔는데, 아무래도 가능한 일찍 가져다드리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오전에 일하러 가도 괜찮을지 연락을 드렸어요. 제대로 답을 듣고 왔어야 했는데 너무 섣부르게 행동하고 말았네요.”

“그랬구나. 오히려 내가 제때에 연락을 확인하지 못해서 미안해. 그리고 모치즈키 씨가 일찍 와줘서 덕분에 살았어. 큰일이 생겼거든.”

“큰일이라니요?”

식탁 위에 매실청이 담긴 병을 올려두고는 호나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카나데를 돌아보았다. 큰일이 생겼다는 말에 카나데의 안위를 염려하는 기색이 가득하다. 걱정할 정도로 심각한 일은 아니라고 첨언하려고 하다가, 생각해보니 충분히 심각한 사건이 맞는 듯 싶어 카나데는 입을 다물었다. 분명 심각하다. 요이사키 카나데의 향후 인생이 걸린 중대사일지도 모른다.

“반지가 보이지 않아. 집 어딘가에 있을 건데,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아서 곤란해하던 참이었어.”

“반지인가요? 요이사키 씨에게 중요한 물건이죠?”

“응, 친구에게 받은 거야. 내가 맡아두기로 한 거라 절대 잃어버려선 안되는데......”

“친구에게......”

카나데의 말을 따라 중얼거리며 호나미는 생각에 잠긴 표정을 하였다. 어쩌면 언젠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도와주고 싶은 사람, 마음을 담아 만든 곡을 전하고 싶은 상대, 그리고......반지를 맡겼다는 친구. 대화를 나누던 카나데가 의아하게 여길 정도로 혼자 상념에 빠져있다가, 카나데의 눈길을 눈치채고는 호나미는 온화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랬군요. 반지, 찾아야겠네요. 그럼 오늘은 좀 더 구석구석 청소를 하도록 할게요. 시간 여유는 넉넉하니까요.”

“부탁할게. 그렇지만 정해진 시간만큼만 찾아봐줘도 충분해. 여유 시간이 생겼다면 모치즈키 씨 자신을 위해 써야하니까.”

“업무 계약과 상관없이 제가 요이사키 씨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도 있으니까요.”

“고마워......”

원래 정해진 업무 외의 수고를 끼치고 싶진 않으나 호나미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였기에 카나데는 그 이상 사양하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대신 솔직하게 고맙다는 마음을 전한다. 깔끔하게 정리하고 치우는 일에 영 익숙하지 않은 카나데였다. 청소의 방법론을 모르고 있으니 같은 일을 해도 얼마 되지도 않는 체력 소모가 한층 커질 수밖에. 호나미라면 아까 카나데가 진땀을 흘리며 치웠던 방을 훨씬 빠른 시간 내에 수월하게 정리할 터였다. 능숙한 솜씨로 집을 치워나가다보면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반지도 찾아낼 수 있겠지. 그런 면에서 마침 오늘 호나미가 이른 시간에 요이사키 가에 방문해준 건 그야말로 천운이라고 할만했다.

방을 마저 정리한 뒤 두 사람은 같이 PC와 신디사이저 주변을 살펴보았다. 신경 쓰고 있던 침대 아래도 휴대폰의 조명을 빌려 확인해보았다. 여기엔 없는 거 같네요. 호나미의 확인 선언에 카나데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적어도 방 안에 있길 기대했는데, 일이 조금씩 더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심란해하는 카나데를 곁눈질로 살피다가 호나미는 이불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리며 침대 위쪽을 재차 둘러보았다. 역시 반지처럼 보이는 물건은 보이지 않는다.

“분명 어딘가에 있을 건데......”

“가끔씩 그런 경우가 있죠. 당연히 그 즈음에 있어야하는 물건이 사라져서 한참 찾아도 나오지 않고 말이에요. 그러다가 나중에 생각도 못한 곳에서 발견하게 되구요.”

“모치즈키 씨도 그런 일을 겪는구나. 나하고 다르게 꼼꼼하게 잘 챙기고 지낼 거란 인상이어서 이런 일로 곤란하지 않을 줄 알았어.”

“저도 집에서는 자주 실수를 해요. 누구나 그럴 거에요. 어련히 있을 거라고 생각한 물건이 보이지 않아서 찾으러 다니고 말이에요.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마루 밑에 작은 소인들이 살고 있고, 그들이 사람들 몰래 물건을 들고가서 쓰다가 다른 곳에 되돌려두는 거라고 생각했대요. 귀여운 이야기이죠? 그래서 저도 집에서 찾는 물건이 보이지 않으면 가끔 소인들이 들을 수 있게 말하고는 해요. 지금 꼭 필요한 물건이니, 빌려간 거라면 되돌려주세요. 돌려주시면 보답을 할게요- 하고.”

“그렇게 하면 되돌려줄까?”

“후훗, 제 나름대로 심란함을 가라앉히려고 하는 행동일 뿐이지만요. 그래도 가끔씩은 그렇게 말한 뒤 정말 찾던 물건이 나타나기도 해서, 그럴 때에는 애플 파이를 조금 잘라내어 책상 위에 두곤 했어요. 한번도 그들이 챙겨가진 않았지만요.”

말하고 난 뒤 부끄러운 일면을 보였다고 생각한 건지 호나미는 쑥스럽게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동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게 기원을 올리고 그에 대해 보답을 한다는 게 왠지 마음에 들어 카나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작은 소인들이 반지를 들고간 거라면 돌려달라고 정중히 말하고 싶었다. 무엇을 보답으로 주겠다고 말하면 그들이 좋아할까.

컵라면은 역시 별로일까. 뜨거운 물을 부어놓고 3분 만에 소인들이 그를 챙겨가지도 못하겠지. 애시당초 컵라면은 찬장 가득 있으니 요이사키 가에 소인들이 살고 있다면 원할 때마다 얼마든 그를 빼돌릴 수 있을 터였다. 보답이라고 말하기엔 메리트가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다른 공물이어도 좋다.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준비할 수 있다. 색색의 사탕들도, 잘 구워낸 빵도, 수입해서 들여온 고가의 쿠키도. 반지를 되찾을 수만 있다면 조금도 비싸지 않다.

“......정말로 소중한 물건이야. 반드시 돌려줬으면 좋겠어. 꼭 보답할게.”

두 손을 꼬옥 맞잡고 기도하는 자세로 카나데는 작게 중얼거렸다. 어린 꼬마들이나 믿을 단순한 동화다. 꾸며낸 이야기에 현실성이야 없겠으나, 그럼에도 환상 속 요정들에게 기원을 올리고 싶단 마음이 들 정도로 소녀는 간절했다. 그 아이가 맡겨준 마음을, 거기에서 흘러넘치는 따스한 감정을 오롯하게 담아둔 증표를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 곁에서 지켜보는 이에게도 절박함이 느껴지게끔 필사적으로 기도하는 카나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호나미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나머지 장소의 청소도 이어진다. 지난 밤 한숨도 잠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 호나미가 조금이나마 눈을 붙이기를 권했으나, 카나데는 고집스럽게 곁에서 청소를 도왔다. 한순간이라도 빨리, 어딘가에서 반지가 모습을 드러내길 바라며 조금씩 집을 청소해나간다. 세탁실의 빨래를 하나하나 살펴보고, 드레스룸 옷장에 걸어둔 옷들의 주머니도 확인해봤으나 여전히 반지는 보이지 않았다. 흡사 허공으로 증발해버린 게 아닐까 싶게끔.

청소하지 않은 장소로 부엌과 욕실만 남겨둔 시점에서 호나미는 휴식을 제안했다. 카나데의 안색이 좋지 않은데다 그럼에도 반지 수색을 멈출 기색이 아니었기에 누군가가 그를 말려줘야만 했다. 안색이 창백해진 카나데를 식탁 의자에 앉히고는 호나미는 가져온 매실청으로 따뜻한 차를 탔다. 초조함과 불안감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앞에 두고서야 카나데는 시선을 한 점에 두었다.

“신경 써줘서 고마워, 모치즈키 씨.”

“이 정도는 당연한 걸요. 반지, 분명히 찾을 수 있을 거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응......”

위로해주는 상냥함와 챙겨주는 배려가 고맙지만 울적함을 완전히 지워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카나데는 호나미에게 웃어보인 뒤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기분좋은 온기가 목 아래에서 전신으로 포근하게 퍼져나갔다. 몸에 힘을 풀면서 그제서야 카나데는 자신이 상당히 지쳐있는 상태임을 자각했다. 목은 목각 인형의 그것마냥 뻣뻣하고 어깨는 누군가 내리누르는 듯 묵직하다. 반지만 돌아온다면 안심하고서 그대로 잠들고만 싶을 지경으로 피곤하다. 모치즈키 씨가 중간에 말려주지 않았다면 분명 무리하고 말았을 거야. 다시금 상냥한 상대에게 감사하면서 카나데는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반지를 준 친구분이 무척 소중한 상대인 모양이네요. 청소를 하면서 요이사키 씨가 반지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몇 번이나 들었거든요.”

“응, 소중해. 그 아이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가족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게, 혼자 지낸 시기가 좀 길었던 터라 계속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눠주는 상대가 소중하다고 해야할까......별 거 아닌 주제로 이야기를 꺼내도 어색하지 않은 사람. 그래서, 잃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어. 건네받은 반지도 그 아이가 사라지지 않게끔 내가 붙들어둘 수 있는 연결 고리가 되어줄 거라고 믿어. 그러니 절대로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그렇군요......”

“그 이전에, 반지를 맡아두기로 했을 때 솔직히 기뻤거든. 그 아이가 날 믿어주고 있구나 싶어져서. 그러니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그러고보니 받으신 게 아니라 맡아두신 거라고 했죠?”

“한 쌍인 반지인데 그 애는 하나만 있으면 된대서 남는 하나를 내가 맡아주기로 했었어.”

“아.”

카나데의 설명을 듣고는 호나미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가방의 지퍼를 열어둔 채로 돌아다니는 사람을 발견했을 때, 말을 걸어 그를 알려줘야하는지 고민할 때의 표정. 혹은 하늘을 읽고 점쳐 세계의 진실을 알게된 무녀가 그 내용을 순진한 사람들에게 알리는 게 맞을지 고뇌할 때의 표정. 얼굴 주변으로 꽃등에가 끊임없이 날아다니는 것마냥 심란함 섞인 눈을 하고 있다가 호나미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삼키고는 묵직하게 내려앉는 한숨을 푹 내쉰다.

“확실히, 그러네요. 엄청나게 중요하겠네요......”

“응.”

“......어머, 찻잔이 빈 줄 몰랐어요. 좀 더 타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맛있었어.”

“그럼 치우도록 할게요.”

“아, 내가 마신 잔은 내가 치울게.”

이미 평소보다 호나미에게 여러모로 신세를 지고 있는 중이라 잔을 치우는 정도는 직접 해야겠다고 카나데는 생각했다. 생각만 앞선 탓에 몸이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을 줄은 몰랐지만. 서둘러 내뻗은 팔에 톡 부딪친 잔이 옆으로 쓰러졌다. 차를 다 마신 다음이라 다행히 내용물을 엎지르지는 않았으나 잔에 넣어두었던 찻숟가락이 식탁 아래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람. 일을 줄여주려다가 오히려 한층 복잡하게 만들어버리다니. 당황한 카나데가 속으로 자책하고 있는 사이 호나미가 몸을 숙여 찻숟가락을 집어들었다. 정확히는, 집어들려고 하였다. 상체를 숙인 채로 가만히 멈춰있다가 호나미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요이사키 씨. 반지, 찾은 거 같아요.”

“엇, 진짜? 어디에?”

“서랍장 아래의 틈새에......여기, 이 아래에 있어요.”

호나미의 말을 듣자마자 카나데는 무릎을 바닥에 대고는 틈새를 들여다보았다. 어둑해지는 부근에 은빛으로 빛나는 물체가 보였다. 거기에 있었구나. 안도감이 차오르면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느슨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가 카나데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쩌다가 저기로 반지가 굴러들어간 건지 알 수는 없으나 찾은 이상 한순간이라도 빨리 꺼내야만 하였다.

“길쭉한 막대 같은 걸로 긁어내면 꺼낼 수 있을......”

“괜찮아. 저 정도 깊이라면 손으로 꺼낼 수 있어.”

“앗, 잠깐......”

마음이 급해져서 행동이 먼저 나가버린다. 한쪽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로 상체만 앞으로 쭉 내민다. 반지가 있는 위치가 틈새에서 그리 깊지도 않다. 카나데의 얇은 손가락이라면 그 정도는 무리없이 들어갈 터였다. 예상대로 틈새로 밀어넣은 손가락의 끝에 반가운 감촉이 닿았다. 됐다! 속으로 환호성을 삼키며 카나데는 더듬더듬 손가락을 고리에 걸쳤다. 그리고는 힘껏 끌어낸다.

생각만 앞선 탓에 무리하게 벌인 행동에는 몸이 의도대로 따라주지 않는 법이다. 그렇지 않아도 연약한 팔 하나로 상체를 지탱한 와중에 반지를 붙든 팔을 뒤로 힘껏 끌어당겼으니 균형이 유지될 리가 없었다. 스스로 끌어당긴 움직임을 제어하지 못하고 카나데는 기우뚱 옆으로 크게 넘어가고 말았다. 요이사키 씨! 이름을 부르는 호나미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린다. 딩동, 기계음이 세계의 나머지 여백을 채우는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는 구르듯 넘어가서 식탁에 부딪칠지도. 충격을 줄이려면 몸을 웅크려야 해. 그렇게 생각한 순간 뻗어온 팔이 소녀를 감쌌다.

콰당, 하는 소리가 울린 듯 싶다. 무릎과 팔뚝 부근이 알싸하게 아팠다. 그런 와중에도 카나데는 손끝에 느껴지는 반지의 존재를 확인했다. 다행이다, 찾았어. 안도하다가, 손 주변으로 느껴지는 폭신하고 말랑한 감촉을 깨닫는다. 그 뒤를 이어 주변을 둘러싼 달콤하면서 차분한 향기를 인식한다. 무척 따뜻해. 그렇게 생각하며 카나데는 몸을 살짝 움직였다. 순간 낮은 신음이 허공을 적셨다.

“......모치즈키 씨?”

화들짝 놀라며 카나데는 상황을 살폈다. 자신이 호나미에게 반쯤 안겨든, 혹은 반쯤 올라탄 자세를 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호나미는 부엌의 바닥에 엉거주춤하게 누워있었다. 넘어지려는 카나데를 자신이 있는 쪽으로 끌어당긴 탓에 그대로 뒤로 넘어진 모양이었다. 입술에 꾸욱 힘을 넣은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걸로 보아 그녀도 통증을 느끼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호나미가 누운 주변에 달리 부딪칠 물건이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잘못했으면 큰 사고로 이어졌을지도 몰라.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하며 카나데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요, 요이사키 씨, 괜찮으신가요?”

“난 괜찮아. 모치즈키 씨, 다치지 않았어? 내가 섣부르게 행동하는 바람에......”

“저도 괜찮아요. 그냥 등이 조금 따가워서......”

“미안, 정말 미안해.”

“사과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다치지 않으셨다니 다행이에요. 그보다, 그게......저, 가슴이 답답해서......”

그 말에 눈을 깜박이다가, 그제서야 카나데는 자신의 손이 호나미의 가슴을 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일단 손을 물려야한다는 생각 밖에 떠올리지 못하고 번쩍 팔을 들었다가 카나데는 뒤로 넘어질 뻔 하였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는 서둘러 호나미가 일어설 수 있게 여유를 만들어준다. 그럼, 그 기분좋게 뭉클한 감촉은. 생각을 떠올렸다가 카나데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사고를 친 거만 해도 미안한데 거기에 어마어마한 결례까지 저지르고 말았다니.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뺨을 한 대 세게 후려갈기고만 싶다. 자기 체벌과 상대의 용서는 별개의 사안이겠지만, 그럼에도.

“미, 미안해. 그런 상태인 줄 몰랐어.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니라......”

“아, 아하하, 괜찮아요. 사고라는 건 알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같은 여자끼리구요.”

“그래도, 미안해.”

“신경쓰지 마세요. 그보다 반지는 꺼내셨나요?”

“응. 덕분에 찾았어.”

“다행이네요. 소중한 물건이니 이제 잃어버리지 마셔요.”

호나미가 상체를 일으킬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 도와준 다음, 카나데는 손에 들어온 반지를 확인하였다. 윗부분에 잎사귀 형태가 작게 새겨진 얇은 반지. 마후유에게 맡았던 그 반지가 다시 돌아왔음을 확인하고서 카나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호나미의 말대로 두 번 다시 잃어버리지 않게끔 신경쓰겠다고 다짐한다. 반지를 언제 꺼내고 넣어뒀는지 출납 기록부를 만들거나, 아니면 마후유가 돌려달라고 할 때까지 한순간도 빼지 않고 계속 끼고 있는 거야. 뜨거운 각오를 마음에 새기고서 카나데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저기.”

카나데와 호나미의 눈이 동시에 깜박인다. 어느 쪽도 입을 열지 않았고, 들려온 말소리 또한 둘 중 누구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기묘한 한기가 어깨를 타고 아래로 흘러내리는 기분을 느끼며 카나데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엌의 창문이 열린 채였다. 열린 창을 통해서 누군가가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개수대 위에 달린 건조대 옆으로 반쯤 가려진 얼굴이 보인다. 라일락을 닮은 보랏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채 화사하게 웃고 있는 그녀. 절반만 보이는 얼굴에 한쪽 눈이 길게 미소를 짓는다. 미소 짓는 눈과, 짙고 짙은 보랏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카나데는 몸이 굳어버렸다.

“마, 마후유......”

“초인종을 눌렀는데 반응이 없어서, 게다가 안에서 큰 소리도 나고, 걱정되어서 여기로 와봤어.”

“저, 저기......”

“괜찮다면 문, 열어줄래?”

초인종, 울렸던 듯도 하다. 다만 거기에 반응할 정신이 없었을 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카나데는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후유, 모치즈키 씨가 일하러 오는 날 겹쳐서 온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다가 카나데는 곧 상황을 이해하였다. 두 사람, 같은 교복을 입고 있지 않은가. 학교 일정으로 호나미가 일찍 하교했다면 마후유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터. 이르게 끝난 학교 때문에 비어버린 시간이 생겼고, 굳이 일찍 귀가하고 싶지 않았다면 마후유가 향할 장소는 정해져 있다.

현관을 열면 상냥함이 느껴지는 미소를 지은 마후유가 서 있다. 그게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미소라는 걸 카나데는 이해했다. 오늘 요이사키 가에는 다른 때와는 달리 외부인이 한 명 있는 상태니까. ‘실례합니다’ 하고, 지금까지 한번도 보인 적 없는 모습으로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는 아가씨는 구두를 벗고 실내로 들어섰다. 주춤거리며 서 있는 호나미를 보고는 부드럽게 웃음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여보인다. 그 모든 행동 하나하나로부터 새까맣게 타오르는 라일락 꽃잎들이 사방으로 휘날리는 환각이 보여 카나데는 손등으로 두 눈을 문질렀다.

“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카나데로부터 이야기는 종종 들었어요. 평소 도움을 많이 받고 지낸다고. 지금 보니 같은 학교였군요. 우연이네요.”

“1학년인 모치즈키 호나미에요. 그게, 제가 후배가 되니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후훗, 그럴까? 아사히나 마후유, 2학년이야. 늘 카나데를 보살펴줘서 고마워. 물론 어디까지나 금전을 주고받는 거래로 하는 거겠지만, 그래도 그 이상의 정성이라는 게 있는 거니까. 카나데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모치즈키 씨는 계약 관계를 넘어서는 정성을 많이 쏟아주는구나 싶더라구.”

“네, 네에......”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는 마음은, 소중하지.”

말하고는 마후유는 감명받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절제를 유지하면서도 다소 과장을 섞은 듯한 행동은 흡사 카메라를 의식하고 움직이는 배우의 몸짓처럼 보였다. 눈치를 살피는 호나미에게 긴장하지 않아도 좋다는 듯 친근함 섞인 눈웃음을 보이고는, 마후유는 뒤에서 쭈뼛거리며 서 있는 카나데에게로 몸을 돌렸다. 입술은 여전히 미소를 흉내내고 있지만 눈빛만큼은 솔직하게 변모하는 그 모습이란.

“그나저나, 아까 반지 이야기가 나온 거 같았는데.”

“그게, 그러니까......”

“나중에 이야기하자?”

주고받는 말의 흐름이 날카롭게 갈아둔 칼로 단숨에 썰려나가는 느낌이었다. 한 마디로 대화를 묶어두고는 마후유는 제 집 마냥 식탁 의자에 앉았다. 자신의 존재를 신경쓰지 말아달라는 듯 얌전히 앉은 자리를 지키는 마후유를 살피다가, 호나미는 남은 집안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부엌을 청소하고는 곧바로 식사 준비를 이어나간다.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는 와중에 음식을 하는 소리만이 공간을 채운다. 하얀 쌀밥에 맑은 된장국, 메추리알 조림, 토란줄기 볶음으로 구성된 식사가 준비되었을 때, 마후유의 앞에도 수저가 놓였다. 맛있네. 식사를 마친 다음 마후유가 웃으며 평한 말은 간결했다.

“그럼, 요이사키 씨, 오늘은 이만 들어가볼게요.”

“으, 으응. 오늘도 고마웠어.”

“네에, 저, 그게, 아사히나 선배님도 만나뵈어서 기뻤어요.”

“나도 좋았어. 다음에 학교에서 마주치면 인사할게. 모치즈키 씨, 조심해서 들어가.”

마중하는 역할을 마후유가 맡는 게 기묘할 정도로 어색하지 않다.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본다면 여기가 아사히나 가이고, 집주인이 마후유일 거라고 짐작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송구함마저 느껴지는 표정을 하고서 세 번이나 고개를 숙여보인 다음 호나미는 현관문을 나섰다. 열렸던 문이 닫히는 광경이 천천히 감기는 영상처럼 보였다. 서서히 닫히다가, 묵직하게 쿵.

침묵이 찾아든다. 몇 초 동안 끝날 기약 없이 늘어지던 침묵은 마후유의 걸음소리로 깨어졌다. 저벅저벅 현관으로 다가간 다음 마후유는 잠금 장치에 손을 올렸다. 걸쇠를 건드리는 손동작이 일순 멈춘다. 그 자세로 두어 차례 숨을 내쉬다가 마후유는 안쪽에 서 있는 카나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섬세하게 조각해넣은 두상처럼 이목구비 뚜렷한 아름다운 얼굴이 완벽한 무표정을 드러내고 있다. 후배를 향해 내보이던 위장된 상냥함은 이 순간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

“카나데.”

“마, 마후유......”

“있지, 아까 전 바깥에서 창문을 통해 카나데를 봤을 때, 왜인진 모르겠지만 굉장히......불편하고 힘든 기분을 느꼈어. 가슴이 꽉 조이면서 숨쉬기가 힘들어서, 싫었어. 명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그 순간 내 안에 무언가가 살아있는 것마냥 꿈틀거려서는. 싫다고 생각해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무언가가 내 안에 있었던 거야.”

“그건......”

“그게 뭐였을까? 카나데는 알겠어?”

라일락 꽃잎이 파도처럼 넘실거린다. 불꽃처럼 타오르며 지평선을 태우는 꽃잎의 물결이었다. 분명 타오르고 있음에도 한겨울 지표를 훑으며 흘러드는 바람처럼 차갑고 서늘하다. 언어를, 감정을 물질로 구현할 수 있다면 지금 이 공간은 서리 맺힌 채 피어나는 라일락의 군락지가 되어있겠지. 하얀 소녀는 얼음과 꽃잎이 뒤엉켜 만들어낸 감옥 속에 꼼짝도 못한 채 갇혀있게 되었을 거고. 마후유, 미안해. 그렇게 말하려고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말한다면, 그녀가 물으리라. 미안하다니, 뭐가?

“카나데, 이야기 좀 해.”

철컥. 잠금 장치가 채워지는 소리가 형틀의 사슬이 묶이는 소리처럼 울린다. 죽는다. 죽는다. 죽어버린다. 얼음 섞인 북풍이 밀어닥칠 것을 예견하면서 소녀는 어깨를 움츠렸다.

* 시금치 님께서 글 내용에 맞춰 삽화를 주셨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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