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례지만 요이사키 가를 회복 포인트로 써도 될까요

프로젝트 세카이 마후유 x 카나데

<아, 죽었다.>

느슨한 침묵을 깨고 톡 튀어나온 말은 뜬금없어서, 고개를 숙인 채 제각기 다음 곡을 위한 작업 아이디어를 모으던 이들 모두의 주목을 끌어버린다. 죽었다니, 뭐가? 나이트코드 멤버들의 작업은 어디까지나 곡을 만들고 가사를 입히며 거기에 어울리는 아트로 꾸며진 MV를 제작하는 선에서 그친다. 졸리고 어지러워서 죽을 거 같아, 라는 한탄은 마감을 앞두고 있을 때 간혹 나오긴 해도 ‘죽었다’ 라는 표현을 쓸 일은 아무래도 없다는 거다.

<Amia, 방금 무슨 말이야? 죽었다니?>

<앗차, 나 뮤트 상태가 아니었구나. 아핫, 별 거 아냐.>

<별 거 아니긴. 딴짓하고 있었지? 슬슬 다음 곡 제대로 준비하기로 했잖아.>

<그치만 아직 딱히 이거다! 하고 떠오른 게 없으니 다들 고민 중이잖아. 숨 돌리는 과정이 필요했다구. 그리고 이거, 배경음도 상당히 좋아서 말이지.>

<배경음? 뭔데?>

<우후후, 역시 K는 반응을 해주네. 링크 올릴게.>

나이트코드의 채팅창에 올라온 주소를 다들 눌러본다. 숨을 돌리려고 딴짓을 했던 Amia처럼 나머지 멤버들도 아직 번뜩이는 영감도, 대략적인 청사진도 얻지 못해 고민 중이었던 터였다. 밤의 선율을 노래하는 아가씨들은 최근 있었던 여러 활동들을 통해 새로운 영역에 접하는 경험이 보다 좋은 결과물을 위한 실마리가 될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니 당장의 막막함에서 피하기 위한 방책에 불과하더라도 잠깐 숨돌리는 체험에 어울려줄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고 할까.

<이건 웹게임?>

<정확히는 인기 웹소설 하나가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될 예정인데, 그 작품의 홍보용 게임이야. 단순한 구성이지만 제법 파고드는 재미가 있다고 호평받고 있길래 직접 확인해보는 중이었지.>

<Amia의 말대로네. 핵심이 되는 멜로디를 귀에 익게끔 반복해주고 빠른 템포로 속도감을 붙이면서도 잔잔한 구간 또한 제대로 어필하고 있어. 기억에 오래 남을 인상적인 곡이야.>

<그치! 메인 화면의 곡은 주제가로 쓰일 곡을 어레인지한 거래. 그 곡 외에도 세 번째 스테이지에 도달했을 때 나오는 BGM이 상당히 좋아.>

<세 번째 스테이지라......나한텐 허들이 높을 거 같은데.>

<흐응, 조작법은 그리 어렵지 않은 모양이네. 한번 해볼까.>

잠깐 시도해보다가 곧바로 백기를 든 K와 일단 부딪쳐보잔 마음으로 게임을 시작한 에나낭과 달리 유키, 아사히나 마후유는 첨부된 정보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현실에서의 삶에 지쳐가던 여고생이 이세계로 전이되고, 어쩌다 신검을 얻게된 뒤 자신보다 앞서 전이되었던 동향의 타락한 소녀 마법사를 저지한다는 게 대략적인 줄거리인 모양이었다. 세라복 차림에 진한 흑발을 뒤로 묶은 소녀가 푸른 빛이 감도는 검을 쥐고 메인 화면 중앙에 멋들어진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저쪽에 있을 때의 나는 무엇 하나 내 의지대로 이뤄내지 못했어. 하지만 여기에서는 반드시 그 아이를 포함해 모두를 구해낼 거야’. 비장함마저 감도는 대사가 소녀의 머리 위에 깜박이는 걸 지켜보다가 마후유는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어디까지나 홍보용으로 만든 게임답게 그 골자가 복잡한 편은 아니었다. ‘게임 시작’ 을 누르면 자세를 취하고 있던 소녀가 그대로 앞으로 달려나가며 모험이 시작되었다. 장애물을 뛰어넘거나 검기로 적을 격파해가며 가능한 멀리 도달한 기록을 세우는 게 게임의 핵심이었다. 네트워크로 공유되는 명예의 전당에 어마어마한 기록을 세운 사람들이 잔뜩 있는 걸로 봐서, 게임의 심플함이 오히려 부담없이 도전할 의욕을 불태워 절묘한 흡입력을 선사하는 모양이었다. 현재 최고 기록 420km라. 마라톤 풀 코스를 10차례 연달아 돌파할 수 있는 비범함을 갖추고 있어야 이런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걸지도. 실없는 생각을 떠올리며 마후유는 게임을 시작했다.

<뭐냐구 이거! 왜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았는데 계속 체력이 줄어드는 거야. 첫 스테이지도 못 넘어가겠어.>

<시작할 때 안내에 나오잖아. 장애물에 부딪치거나 적에게 공격당하지 않아도 달리는 동안 체력이 조금씩 소모된다고. 중간중간에 나오는 회복 포인트를 놓치지 않고 확보해야 오래 달려나갈 수 있는 거야.>

<그건 현실적인 설정이네. 확실히 어디 부딪치지 않더라도 걷기만 해도 체력 소모가 상당하지.>

<아하하, K가 그렇게 말하니 마음이 좀 무거워진다. 혹여나 이세계로 전이될 경우를 대비해서 조금씩 운동을 해두는 게 어떨까.>

<이세계는 미쿠가 기다려주는 세카이로 충분해......>

<으으으, 두고 봐. 세 번째 스테이지까지 가서 그 좋다는 BGM 들어줄 테니까!>

홍보용으로 단순하게 만들어진 게임치고는 배경 그래픽의 미려함과 오브젝트들의 다양함이 상당했다. 유적이 드문드문 보이는 초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첫 번째 스테이지는 최초의 난관답게 그리 어려운 기믹은 등장하지 않았다. 평소 게임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으나 마후유는 금방 규칙에 적응하였다. 길이 여러 갈래로 나뉘는 통에 자칫 잘못하다간 회복 포인트를 놓칠 위험이 있었으나 아가씨의 반사신경으론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게임이 비겁하고 치사해. 틱틱대는 중얼거림이 회선을 통해 전달되는 걸로 보아서 같은 구역에 도전하고 있는 에나낭의 입장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지만.

회복 포인트의 종류는 꽤나 많아서 각각의 상호작용이 제법 볼거리였다. 한 차례 치열한 구간을 지나치면 먹음직한 과실이 맺힌 나무, 맑은 물이 솟아오르고 있는 샘, 쓰다듬어주면 애교를 부리는 야생 고양이 등이 소녀 검사를 맞이하였다. 별다른 전투가 없어도 반절 가까이 줄어드는 체력은 소녀가 과일을 먹거나 고양이를 쓰다듬는 동안 경쾌한 효과음과 함께 쭉 차올랐다. 홀로 420km를 주파하는 주인공에게도 숨 돌릴 여유는 필요하다는 걸까. 이번에는 요정들이 연주하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걸로 체력을 회복하고 있는 캐릭터를 쳐다보며 마후유는 눈썹을 까닥거렸다.

<세 번째 스테이지는 바람 계곡이야. 불어오는 바람이 연상되게끔 오카리나와 실로폰의 맑은 음으로 구성된 BGM이네.>

<뭐어어어? 유키 너 도착한 거야? 어떻게?>

<간단해. 회복 포인트를 잘 활용하면 돼.>

<우와, 정론이긴 한데.>

<아아악! 짜증나! 됐어, 딴짓은 여기까지!>

낚싯대 장난감을 노린 사냥에 실패하여 잔뜩 성이 난 고양이마냥 소리를 내고는 에나낭은 작업으로 돌아갔다. 숨 돌리기에 나쁘지 않았다고 평하고는 K도 원래의 궤도로 돌아가고, 친구들과 실컷 논 걸로 만족한 Amia도 집중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만 문장을 고르는 작업으로 돌아갈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마후유는 명령을 기다리는 캐릭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원래의 세계에 있을 땐 무엇 하나 자기 의지로 이루지 못했다고 했던가. 만약 여기서 게임을 중단해버린다면 이 아이는 이번에도 실패하는 셈이 되겠지. 전자 세계의 캐릭터에게 멋대로 인격을 부여하는 건 헛웃음 나올 지경으로 우스운 일이 분명했으나, 누군가의 절망으로 맺어지는 이야기는 꾸며낸 허상일 뿐이라도 꺼림칙했다. 동화책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늘 그 속에 희망이 빛나고 있지 않았던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아가씨는 기왕 시작한 놀이에 좀 더 어울려주기로 했다.

초원에서 늪지로, 늪지에서 계곡으로, 계곡에서 설원으로, 설원에서 마침내 소녀 마법사가 기다리고 있는 탑으로. 자신을 평생토록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원래 세계에 복수하고자 이세계의 생명력을 끌어모아 차원을 넘는 대파멸의 주술을 영창하는 마법사. 그를 막기 위해 주인공은 결전에 돌입한다. 마력 수정을 하나 깨트리고, 계속 달려가서 하나 더,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심부에 위치한 수정까지. 경계를 찢으며 형성된 마법진이 서서히 사라져간다.

술법이 파훼된 이후에도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하얗게 탈색될 지경으로 힘을 끌어내 불완전한 복수나마 이루려는 마법사를, 소녀 검사는 신검을 내던지고 달려가 품에 끌어안는다. 네가 견뎌왔던 고통, 품어왔던 슬픔, 모두 내가 곁에서 나눠질게. 절대로 혼자 두지 않을테니까. 그 말을 듣고 마법사는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던 지팡이를 놓쳐버린다. 멋대로 구원해주겠다고 나서면 내가 저것들을 용서할 거라고 생각해? 생각 짧고 충동적인데다 멍청하기까지 한 너만 힘들어질 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마법사는 자신을 품어주는 검사의 옷깃을 꼬옥 붙든다.

“......”

둘의 이야기는 이후에도 이어집니다. 애니메이션 본편을 기대해주세요! 클리어 축하 문구가 나온 이후로는 오로지 기록 갱신을 목표로 하는 스테이지 루프가 이어지는 모양이었다. 거기까지 붙들고 있을 생각은 없었기에 마후유는 창을 종료했다. 스스로를 내던지며 구원을 약속하는 대화에서 기시감을 느낀다. 마지막 장면에서 소녀 검사의 품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던 소녀 마법사의 모습이 왜인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재밌었던, 걸까.”

확신없는 어조로 중얼거리고는 마후유는 검지로 턱을 톡톡 두드렸다. 무언가에 흥미를 느끼고 몰두했던 경험은 생소했다. 봤던 동화책을 수십 번이나 다시 읽고, 학예제의 주역을 맡아 대본을 달달 외울 때까지 들여다봤던 건 전부 어린 시절의 추억. 어느 정도 나이가 찬 이후로는 마땅히 흥미를 붙일 곳 없는 무감한 삶의 연속이었을 뿐이다.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고자 곡을 만들 때조차 그 과정은 일련의 공정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기계적이었던 터. 그나마, 나이트코드의 멤버들을 만난 이후에는 희미하지만 ‘무언가를 원하는’ 감정을 품을 줄 알게되었다. 그러니, 괜찮지 않을까. 둘의 이야기는 이후로도 계속된다고 했다. 나중에 Amia에게 애니메이션은 어떻게 찾아볼 수 있는지 물어봐야지. 마음을 정한 다음 마후유는 필기장을 펼쳤다.


“얘 또 자네. 아까도 졸다가 수학에게 혼나더니. 저기, 일어나보세요. 밤에 안 잤어?”

“아으, 잠이 안 오는데 어쩔 수 없잖아. 으윽, 힘들어. 하으......남은 수업 빠지고 힐링 카페라도 갔음 좋겠다.”

“힐링 카페라고 해봤자 수면실 비슷하게 해둔 곳이잖아. 굳이 돈 내고 갈 필요가 있나?”

“나처럼 예민한 사람에겐 필요해! 하아, 조금이라도 잘 거니 말 걸지 마.”

“누가 보면 세상에서 제일 열심히 사는 줄 알겠네. 이 중에서 당당하게 피곤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아사히나 뿐 아냐? 그치?”

“그치- 아사히나는 누가 봐도 모범생이니까.”

멍하게 허공을 주시하고 있다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마후유는 정신을 차렸다. 제법 추켜세워주는 말을 했다구, 괜찮았지? 그렇게 말하는 듯 씩 웃고 있는 급우들을 쳐다본 뒤 아가씨는 방긋 미소를 모사했다. 잘은 몰라도 어른들에게 착한 아이라고 칭찬을 받았을 때와 비슷하게, 겸손함과 쑥스러움이 묻어나는 느낌으로. 분위기를 보아하니 대충 알맞게 반응한 모양이었다. 만약 이게 시시하기 짝이 없는 버라이어티 퀴즈게임 방송이었다면 ‘딩동’ 하는 알림음이 울렸을지도.

“그러고 보면 아사히나가 학교에서 조금이라도 조는 모습 한번도 본 적 없는 거 같아. 피곤해하는 모습도 보인 적 없고. 수업 때도 쉬는 시간에도.”

“어, 그러게. 아사히나, 평소에 몇 시간 정도 자는 거야?”

“으응, 평범한 정도로 잔다고 생각해.”

“부활동도 하고 학생회 일도 하잖아. 가끔 제일 먼저 등교해서 앉아있을 때도 있고. 역시 대단하네.”

이번엔 어떻게 웃어야하지. 마냥 환하게? 아니면 입꼬리를 조금 낮춰서 차분한 느낌으로 보이게? 갈등하다가 어중간하게 감정이 뒤섞인 미소를 꾸며낸다. 다행히도 모여있는 애들 중 누구도 마후유의 감정에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문제없다. 다행이네. 다행인가? 이야기의 주제가 금방 옮겨갔음을 확인하고서 마후유는 슬며시 표정을 지워버렸다. 딩동, 딩동.

교단에 선 선생이 훈계조로 하는 말도, 급우들이 제멋대로 떠드는 말도, 부활동 중 후배들이 따라다니며 조잘대는 말도 죄다 시시하기 짝이 없다. 사막의 언덕길을 따라 모래 더미가 흘러내리는 소리마냥 푸석하고 건조하다. 아무 짝에도 의미없는 정보값만을 담고 있는 주제에 사람의 발목을 놓아주지 않고 흐름 속으로 끌어들이려고 한다. 하염없이 사막을 헤매는 중인 방랑자로선 덫이나 다름없는 유사에서 빠져나갈 방도가 없다. 그러니 마냥 미소지을 수밖에. 보세요, 전 웃고 있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조금도 이해 못하고 실상 관심도 없지만, 적어도 당신이 하는 말에 알맞게 반응하고 있어요.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답게.

“그럼 아사히나, 조심해서 돌아가.”

“오늘도 학생회 일로 남는다니, 너무 무리하지 마.”

“응, 다들 내일 봐.”

방과 후가 되면 그나마 숨쉴 여유가 생긴다. 급우들은 어디까지나 지인일 뿐으로, 이런 날 굳이 방과 후의 학교에 남으면서까지 마후유를 기다려주겠단 상대는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업무 상 거래를 위해 교류하는 경우보다 무의미한 관계겠지. 무엇도 들어있지 않은 상자를 예의범절과 내숭이라는 포장지로 장식하고 인맥망이라는 진열장에 보란 듯이 놓아뒀을 뿐이다. 어차피 그 정도 거리감이 대하기 편하다. 체념을 닮은 조소를 삼키고는, 오늘 전교에 배부되었던 설문지 중 2학년의 몫을 회수하여 품에 안고서 마후유는 학생회실을 향해 총총 걸어갔다.

복도를 따라 쭉 걸어가서 계단을 올라간다. 문득 마후유는 지난 밤 건드려봤던 게임을 떠올렸다. 어쩌면 지금 자신이 스테이지 위를 뛰어가고 있는 주인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한 발 뛰어나갈 때마다 조금씩 깎여나가던 체력. 아사히나 마후유도 지금 상당히 지친 상태겠지. 지치고 피곤한 상태가 무엇인지도 체감하지 못하던 시절도 있었으나 이제는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고 있다. 피곤해. 걸음을 멈추고 마후유는 옆을 돌아보았다. 오후의 햇빛으로 닦여나가 투명해진 유리창에 아가씨 자신의 모습이 유령처럼 옅게 비쳤다.

“2학년에게 배포된 설문지 회수해왔어요. 오늘 출석하지 않은 1명, 조퇴한 1명 외에는 전원 참여 확인했습니다. 누락된 2명은 내일 확인하도록 할게요.”

“수고했어, 아사히나 씨. 역시 빈틈없이 꼼꼼하네. 혹시 괜찮다면 분류해서 정리하는 거도 부탁할 수 있을까?”

“네에, 물론이에요.”

이게 게임이었다면 ‘죄송한데 오늘은 피곤해서 이만 쉬고 싶어요’ 라고 말하는 게 올바른 조작이었을지도 모른다. 마후유는 ‘물론이에요’ 라고 답했고, 실수에 대한 대가로 보이지 않는 체력이 뭉텅 깎여나가는 걸 직감했다. 반사신경 따위 이럴 때는 하등 쓸모가 없구나. 이러다간 저번처럼 또 귀가 도중 쓰러지게 될지도. 수고해줘, 그렇게 말하며 손을 척 들어올리는 학생회 임원에게 기꺼운 미소를 지어보이곤 마후유는 비어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현실에도 회복 포인트가 존재했던가. 과실을 먹고 샘물을 마시던 캐릭터를 떠올린다. 먹고 마시는 건, 아사히나 마후유에게 그리 의미가 없다. 배고픔은 느끼지 않게 해주겠지만 그게 회복을 뜻하는 건 아니지. 애교 부리는 고양이를 쓰다듬는 건, 아가씨의 곁에 스스럼없이 다가와주는 귀여운 생명체가 이 세상에 있을지부터가 문제다. 도망치지 않으면 다행, 털을 곤두세우고 필사적으로 마후유를 적대할지도 모른다.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작고 귀여운 존재가, 있었나?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마후유는 설문지를 분류하던 손을 우뚝 멈췄다.

미쿠, 그리고......요이사키 카나데.

미쿠라면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지금 당장이라도 불러낼 수 있다. 그 아이라면 서툴게나마 마후유를 위해 애교를 부려주겠지. 주인의 상처를 핥아주려는 강아지마냥 의욕을 내다가, 고맙다고 칭찬해주면 기뻐하며 헤헤 웃어보일 게 분명하다. 카나데는......힘껏 노력한다는 점에선 마찬가지일까. 하지만 그 과정은 묘하게 다르리라. 자신이 기입했던 설문지를 들어올린 순간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가 마후유는 손을 빠르게 움직여나갔다. 답답하게 쌓여있던 설문지 더미가 순식간에 줄어든다.

“끝났어요.”

“벌써? 아사히나 씨답네.”

“그럼 전 오늘 이만 돌아가볼게요. 중요한 일정이 있어서요.”

“어? 어어, 그래. 수고했어.”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평소와는 달리 상대가 말을 이어나갈 틈을 주지 않고 자기 할 말을 해버린 다음, 마후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묘하게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학생회실을 빠져나오자마자 아가씨는 단말기를 꺼내들었다. 타자를 치는 손가락이 군무를 추듯 빠르다. 카나데, 지금 집에 있지? 찾아가도 될까. 앞뒤 자르고 본론만을 화살처럼 쏘아보낸 뒤 마후유는 한숨을 작게 쏟아내었다. 발걸음을 내딛지 못한다. 답장이 오기 전까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잠시.

<괜찮아. 위치는 기억하고 있어?>

<기억하고 있어. 곧 갈게.>

<응, 기다리고 있을게.>

조금 전과는 다른 무게감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마후유는 걸음을 옮겼다. 지금 시간대가 아니라면 요이사키 가에 들를 수 없다. 해가 떨어진 다음에도 집 바깥에 머무는 걸 아가씨의 부모는 절대로 이해해주지 않겠지. 그게 지쳐서 망가지기 시작한 딸이 자신의 영혼을 조금이나마 달래기 위해서라고 할지라도. 그러니 지금은 요이사키 가로 간다. 귀가한 뒤, 늦은 시간이나마 세카이로 들어가 미쿠의 곁에 머물러야겠다고 마후유는 생각했다.

요이사키 가에 방문하는 건 이걸로 세 번째였던가. 처음은 감기로 쓰러졌을 때 카나데에게 구조되어서, 두 번째는 도와줬던 보답 겸 첫 방문 때 잃어버렸던 학생증을 찾으러,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 편의점에 들러 가벼운 선물이라도 사가는 게 좋을지 고민하다가 마후유는 그를 지나쳤다. 시간의 여유도 그리 많지 않고 마음에도 여유가 없다. 무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나마 자각한 순간부터 묵직한 피곤함이 사슬로 이어진 닻처럼 의식을 끌어내려 둔하게 만들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다는 소망만을 떠올린다.

[딩동]

초인종을 누르고서 마후유는 현관 옆 벽면에 등을 대고 기대었다. 착한 아이를 연기해야하는 상대의 집에 방문했다면 절대로 이처럼 행동하진 않았겠지. 아무리 피곤해도 그를 내색하지 않고 두 손을 앞으로 공손하게 모은 채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여기서는 그럴 필요 없잖아. 아까 전, 학생회실을 빠져나올 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며 마후유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하였다. 현관 너머로 총총 다가오는 가벼운 인기척을 감지하고 저도 모르게 옅게 웃는다.

[덜컥]

“마후유?”

“여기 있어.”

오늘도 언제나의 청남색 져지 차림인 그녀가 열린 문틈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는 마후유는 몸을 바로 세웠다. 시선이 마주치자 카나데는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하얀 꽃잎들의 다정한 내음이 묻어날 듯한 웃음이었다.

“오늘 하루 힘들었구나. 어서 들어와.”

신기한 일이었다. 오늘 얼굴을 마주했던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아사히나 마후유가 감당하고 있는 피로감에 대해 눈치채지 못했는데, 요이사키 카나데만큼은 곧바로 힘들었을 거란 점을 이해해준다. 카나데가 특별한 걸까. 아니면 지금의 자신이 무척 알기 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착한 아이로 꾸며내지 않아도 괜찮다는 안도감 속에 엉망인 얼굴을 해버리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겠지. 카나데의 앞에서까지 표정 맞추기 게임을 하고 싶지는 않아.

카나데를 따라 현관 안으로 들어선다. 요이사키 가는 언제나처럼 어둑한 분위기였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대임에도 창문에 블라인드와 커튼을 제대로 걷지 않고 대부분의 조명을 꺼둔 탓에 실내에는 그늘이 지고 있었다. 문의 걸쇠를 채우고 카나데는 먼저 거실로 통하는 길목으로 올라섰다. 구두를 벗느라 잠시 멈춰선 마후유에게로 불쑥 손을 내민다.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잠시 멍하게 상대를 쳐다보고 있다가, 그게 들고 있는 가방을 받아주겠다는 신호임을 마후유는 간신히 알아차렸다.

“......고마워.”

“이렇게 가방을 받아드니, 뭔가 이 말을 해야할 거 같아. 그러니까......다녀오셨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후유는 카나데를 쳐다보았다. 귀가한 이의 짐을 받아주며 수줍게 상대를 맞이하는 새색시가 이 자리에 있다. 희미한 눈웃음에도 짧은 인사말에도 교태는 묻어있지 않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상대를 반기는 담백한 행동에서 두근거림을 느끼게 된다. 방금 뭔가 알게될 것만 같았어. 뭐였을까. 멈춰버린 자신을 바라보며 의아해하는 카나데에게, 마후유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번 더 해줘.”

“응?”

“방금 했던 거, 한번 더 해줘.”

“방금 했던 거? 그게......다, 다녀오셨어요.”

“......한번 더 해줘.”

“그, 그만할래. 마후유도 빨리 들어와.”

마후유의 부탁이라면 웬만해서 들어주는 카나데이긴 하지만, 의미 모르게 부끄러움을 강요하는 지점까지 어울려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가족을 마중하는 흉내를 두 차례 했을 뿐인데, 그걸로 얼굴이 확연히 붉어진 채로 카나데는 마후유의 가방을 품에 안고서 거실로 들어가버렸다. 좀 더 듣고 싶었는데. 아쉬움 비슷한 무언가를 느끼며 마후유는 벗은 구두를 가지런하게 정돈했다.

거실에서 이어지는 주방에는 이미 차를 끓일 준비가 모두 갖추어진 상태였다. 물이 담긴 주전자는 이제 막 끓기 시작해 증기를 내며 달칵이는 소리를 내고 있고, 식탁에 놓인 작은 찻주전자 안엔 미리 계량을 맞춰둔 찻잎이 들어있다. 그 옆으로 잘 닦아둔 찻잔 둘도 보기 좋게 놓여있고. 지난 번 방문 때의 다소 처참했던 티타임을 만회하려고 노력한 걸까. 자신이 보낸 연락을 받은 뒤 부산스레 차 끓일 준비를 했을 카나데를, 마후유는 상상으로 그려보았다.

“자, 여기. 뜨거우니 천천히 마셔. 저번하고 같은 차야. 사과 향이 나는 차.”

“그렇구나. 잘 마실게.”

저번과 같은 차인가. 그때처럼 맛은 느껴지지 않겠지. 그럼에도 이 차를 한 모금 마시는 걸로 자신이 어느 정도 회복될 거란 사실을 마후유는 알았다. 육체의 회복은 어떨지 몰라도, 마음의 회복이란 결국 행위 의미를 찾는 순간 이루어지는 법이다. 요이사키 카나데가 손수 타준 차를 마신다는 건 아사히나 마후유에게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일이다. 따뜻한 차를 목 너머로 넘기는 순간 말라붙어가던 영혼에 한 줄기 단비가 뿌려진다. 마후유는 살며시 몸의 긴장을 풀었다.

“오늘도 일찍 돌아가야만 하는 거지?”

“응, 다섯 시 반 정도에 일어날 거야.”

“그렇구나. 한 시간 남짓 남았네.”

“......오늘은 왜 온 건지 이유를 묻지 않는구나.”

“마후유가 필요로 해서 온 거라고 생각하니까. 내가 그만큼 도움이 되어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지금 이걸로도 충분해.”

손에 들고 있는 잔을 살짝 흔들어보이며 대답한다. 그 대답에 카나데는 눈에 보이게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헤헤 웃음짓는 걸로 보아 저번의 티타임에 비해 한층 제대로 된 결과를 선보였다는 점에 아가씨 나름 자신감을 갖게 된 거겠지. 한 잔 더 마시겠냐고 권해오는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마후유는 잔을 내밀었다. 바닥까지 내려갔던 수위가 다시금 쪼르르 차오른다.

“마후유, 잠깐이라도 눈 붙였다가 갈래?”

“여기서?”

“저번에도 이야기했지만 마후유는 충분히 수면을 확보하지 않고 지내는 편이니까.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설득력이 없긴 하겠지만, 조금이라도 편히 자고 일어나면 좋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다면 어디서? 침대? 카나데의 방, 내 방보다 훨씬 엉망인 환경인데도?”

“그, 그건......”

말문이 막히는 걸로 보아 생활 환경은 저번과 그리 달라진 게 없는 모양이다. 사방에 악보와 기록지들이 다발로 쌓이고, 쓰고 남은 부산물들이 적당히 구석으로 몰려있던 굉장한 광경 그대로라는 이야기. 평범한 사람이라면 도저히 안온한 수면을 이룰 수 없을 환경에서 카나데는 매일을 보내고 있다. 네가 늘 잠을 청하곤 하는 자리에서 잠든다면 저번처럼 그리운 꿈을 꾸게 될까.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마후유는 문득 졸음이 밀려드는 걸 느꼈다.

“자고 있는 동안, 옆에 있어줄 거야?”

“응, 있어줄게.”

“......알겠어. 조금 잘래.”

잘 마셨습니다. 인사를 하며 내려놓는 잔에 아직 반쯤 차가 남아있지만 누구도 그를 탓하지 않는다. 카나데의 뒤를 따라 걸어가며 마후유는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피곤함과 그로 인한 졸리움의 감각을 한동안 망각했던 몸이 뒤늦게나마 신호를 보내고 있다. 어렸을 적에는 졸린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며 엄마 손에 이끌려 침대로 가고는 했었지. 폭신한 이불에 감싸이면 깊게 잠들어서, 늘 더없이 안온한 꿈을 꿨었다. 꼭 어렸을 때로 돌아간 기분이야. 생각나는대로 말하고, 웃고, 울기도 하던 아사히나 마후유로. 생각하며 작게 하품을 한다.

“변함없이 어질러진 상태네.”

“집안일을 도와주는 분이 내일 오실 예정이라......”

“카나데는 그 사람이 와주지 않으면 악보에 깔려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도 상관없어? 평소에도 조금씩 치워두는 게 좋지 않아?”

“그, 그렇지. 유념하겠습니다......”

“......외부인에게 너무 의존하지 마. 어차피 거래 관계인 상대......”

말을 꺼내려다가 입을 닫는다. 굳이 그렇게까지 말할 이유는 없다. 그 이상으로, 괜히 그처럼 쏘아붙였다가 카나데가 그렇지 않다고 답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도 않다. 봄에는 꽃이 남아있는 가지를, 가을에는 아직 붉게 타오르는 단풍잎을 가져다줬어.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들었던 내용을 지금 다시 들어봤자 좋을 건 없겠지.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방을 돌아보며 마후유는 생각했다. 카나데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자신들, 나이트코드 멤버들 외의 존재가 알고 있단 점에 불만이 생기는 걸까. 제멋대로의 억지. 애시당초 자신들은 카나데에게 외부인이 아닌 건가. 작게 내쉬는 한숨이 탁하다.

“시간이 되기 전에 깨워줄게. 혹시 모르니 알람도 맞춰두고.”

“옆에 있어줄 거라고 했잖아. 그 동안 날 놔두고 작업하면 안돼. 나를 구할 곡이라도, 나중에 만들어.”

“알겠어.”

정돈되지 않아서 다소 너저분하게 보이긴 하지만, 카나데의 침대는 제법 넓고 푹신하게 기분좋다. 게다가 깔아둔 요, 덮는 이불 모두 은은하게 좋은 향기가 나기도 하고. 카나데의 곁을 걸을 때 미풍 속에서 잔물결치는 긴 머리카락에서 묻어나던 향기. 쓰러진 자신을 간병하던 때처럼 침대 옆 바닥에 앉는 카나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마후유는 손을 내뻗어 져지 소매를 붙들었다.

“그 자세로 있으면 불편하지 않아? 카나데도 침대로 올라와.”

“응?”

“......무릎 베개 해줘.”

마후유의 요구에 일순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가, 이어지는 작은 중얼거림에 카나데는 포근하게 웃었다. 알겠어, 그거라면. 답해주고는 소녀 또한 침대 위로 올라온다. 하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침대 위로 흩어졌다. 한 차례 뒤로 쓸어넘겨 정리하고는 카나데는 조심스레 자세를 잡으며 앉았다. 여기 머리를 올려도 좋아. 그렇게 말하는 듯 자신의 허벅지를 손으로 톡톡 건드리는 카나데에게로 다가가, 마후유는 몸을 웅크리며 누웠다. 겉으로 보기에 마냥 가늘고 얇게만 느껴지는 허벅지는 의외로 기분좋게 폭신했다.

“괜찮아?”

“괜찮아, 편해.”

“다행이다. 잠깐이지만 푹 쉬어.”

“......고마워.”

살아가며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사히나 마후유에게 오로지 요구 밖에 하지 않는다. 마후유, 충분히 안전권에 들어갈 성적을 유지하렴. 아사히나, 숙제 좀 보여주면 안될까. 아니, 베끼는 게 아니라 맞는지 확인만! 아사히나 씨, 괜찮다면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약식 보고서 작성까지만 부탁하고 싶어. 아사히나, 대회에 나갈 사람은 역시 너 밖에 없다. 마후유, 아사히나, 아사히나 씨. 간혹 일방적인 호의만을 던져두곤 그걸로 저울을 맞췄다고 여기기도 하지. 아냐, 맞지 않아. 한순간도 균형을 이뤘던 적이 없어.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마후유의 요구를 귀담아 들어주는 이가 있다. 그게 아무리 우스꽝스럽고 의미없는 요구일지라도. 갑자기 집에 찾아가고 싶다거나, 같은 말을 다시 해주길 원한다거나, 무릎 베개를 해줬으면 한다거나, 막무가내로 곁에 있어달라고 한다거나. 아가씨가 그런 요구를 하는 마음을 이해해주고 있기에, 웃으면서 그를 받아들여주는 거다.

“잘 자, 마후유.”

“......”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포근해서 좋다. 한가득 따스한 향기가, 그 아이의 냄새가 났다. 카나데가 만드는 음악 뿐만이 아냐. 어쩌면 난 카나데의 존재 그 자체에 구원받고 있는 걸지도 몰라. 혹여나 지금의 따스함이 기분 좋은 꿈일지도 몰라서, 조금만 현실을 깨달아도 거기서 깨어버릴거라 염려해서 마후유는 꾸욱 눈을 감았다.

카나데의 곁에 있기만 해도 자신은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을 테다. 때로는 귀찮은 함정이나 다름없는 책무에 시달리고, 말이 통하지 않는 마물과 동급인 작자들을 상대하느라 체력이 깎여나가겠지. 나아가 살아가는 매 순간 걸음마다 조금씩 지쳐버리겠지만 지금처럼 이 아이의 품에 안겨들면 회복할 수 있으리라. 조금 더 살아볼게. 조금 더 나아가볼게. 너의 존재에 의지해서 좀 더 미래를 그려볼게. 보답마냥 그렇게 속삭임을 남기면서.

하지만, 그렇다면 카나데는 어디서 회복해야만 하는 거지. 가시밭길의 스테이지를 달려가고 있는 건 그녀 또한 마찬가지다. 카나데가 타인인 자신에게 기꺼이 상냥함과 위안을 나눠주듯이, 그녀 또한 어디에선가 위안을 얻어야만 할 터. 할 수 있다면 자신이 카나데에게 언제든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을 한다. 그게 얼마나 주제넘은 생각인지 마후유는 깨닫고 있다. 텅 비어서 무엇 하나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지금의 자신은 어찌나 무력한지.

“......카, 나데......”

“응, 마후유.”

“......”

“......잠결에 말한 걸까.”

그러니 카나데, 꼭 나를 구원해줘. 내가 마주하는 세상에 다시금 색채와 온기가 돌아온다면, 내가 보이는 풍경을 있는 그대로 올곧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그때에는 내가 너의 곁을 지켜줄게. 동화의 마지막에 늘 나오잖아. 저주는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해주되는 순간 곧 축복이 될 거야. 나를 묶고 있던 속박을 화사하게 태워서 그 불빛으로 네가 마주하는 밤의 그늘을 지워줄게. 내가 네가 이룬 구원의 증거이자 상징이 되어서, 나아가 너를 위한 아침 햇살이 될게.

아사히나 마후유는 꿈을 꾸었다. 짧더라도, 포근하고 행복한 꿈이었다.


“오늘도 자냐. 얜 밤마다 도대체 뭘 하는 거야.”

“새로 올라온 게시물 없나, 궁금해지는 시간이 마침 새벽이니까 유혹에 지고 말았나봐.”

“좀 있음 수학 들어올 건데 어제처럼 또 혼나도 난 모른다?”

“......냅둬......”

벌벌 떨리는 손이 올라와 느릿하게 허공을 휘젓는다. 상관하지 말고 내버려두라는 신호가 안쓰럽기 그지없어서 소녀들은 서로 시선을 나누며 킥킥 웃어댔다. 제대로 수면 시간을 챙기지 않으니 여드름 때문에 고생하지. 놀리는 말에 힘없이 휘적이던 손이 사납게 허공을 움켜쥐고 부르르 주먹을 떨어댔지만 곧 제풀에 지쳐 푹 늘어졌다.

“아니,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야. 나도 시험 기간에 급하게 준비하느라 하루 안 자고 버티면 피부 완전 뒤집어진단 말이지.”

“그건 누구나 그렇지 않나. 괜히 불면이 미용의 적이라고 하는 게 아니잖아.”

“제대로 잠도 안 자는데 피부가 좋은 사람이 있다면, 그거 약간 그런 거잖아. 아무리 먹어도 살 안 찌는 사람.”

“우우, 싫다 진짜.”

“어제 아사히나, 평범한 정도로 잔다고 했잖아. 아사히나는 피부 엄청 깨끗하고 고우니까, 그 평범한 정도만큼 따라서 자면 충분하려나?”

“평범한 정도라는 표현, 애매하거든. 그거 말고도 다른 관리법이 있는 거 아냐? 봐, 오늘따라 아사히나, 평소보다 얼굴색도 엄청 좋아보여.”

자신에게로 모여드는 시선을 느끼며 아가씨는 눈을 깜박였다. 어떤 표정을 짓는 게 맞을까. 이런 상황에서 너무 환하게 웃으면 잘난 척 하는 걸로 보일지도 몰라. 입꼬리를 유지하며 겸손하게 보이게? 그보다 평소보다 얼굴색이 좋다니.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으려나. 생각하다가 마후유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눈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가며 도도한 곡선을 그린다. 화장품 광고 속 모델처럼 미소짓는 마후유를 보고서 여자애들은 잠시 입을 뻐끔대었다.

“오, 오오, 확실히 평소하고 다르네. 아사히나, 오늘따라 강렬해.”

“알려주세요, 아사히나 선생님! 어떤 관리법을 쓰시는 거죠?”

대부분의 아이들은 흥미롭단 정도로 넘어가지만, 개중 한 아이가 정말로 굉장한 비법이 있을 거라 믿는지 눈을 반짝이며 파고들었다. 어떻게 답하는 게 좋으려나. 언제나처럼 대충 웃어보이며 대화 주제가 바뀔 때까지 시간을 끌면 될까. 어차피 사실에 가깝게 말해줘도 누구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겠지. 말해봤자 의미없는 내용이라면 입에서 꺼낼 필요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가씨는 묘한 충동을 느꼈다. 가볍게라도 한 마디 남기고 싶다는 충동.

“......간단해. 회복 포인트를 잘 활용하면 돼.”

비밀 이야기를 한다는 듯 낮게 속삭이고는, 아가씨는 키득거림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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