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눈의 감정이 속삭인다

프로젝트 세카이 마후유 x 카나데

<상술된 내용과 같이 ‘고금저문집’ 에서는 뱀을 질투의 상징으로 묘사하였습니다. 다른 이를 질투한 경험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본문에 제시된 내용에 대한 의견을 서술해봅시다.>

언젠가 작문 수업의 과제로 주어진 문항을 앞에 두고, 아사히나 마후유는 한참 동안 아무런 문장도 쓰지 못했다. 소녀에게 있어 질투란 막연하게 부정적인 어감을 가진 단어일 뿐, 구체적인 기억과 엮인 감정은 아니었다. 사전적 의미라는 건조한 정보값으로만 전달되는 개념은 어딘가 꺼림칙하기만 하였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품어서는 안될 나쁜 무언가, 정도.

질투는 결핍과 불안을 토양 삼아 싹튼다. 욕망도, 그를 바탕으로 하는 절박함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질투심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겠지. 아사히나 마후유는 그와 같은 삶을 살아왔다. 마냥 순진했던 어린 시절에는 보살펴주고 관심을 기울여주는 부모가 세상의 전부였기에 소녀는 부족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느낄 여지가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맞을까. 항상 한 발 앞서 딸을 위한 계획을 세워두고 그에 따르는 지원을 아끼지 않는 걸로 애정을 입증하는 부모의 방식에 어렸던 마후유는 의문을 품지 않았다. 자식을 보살피는 부모의 마음은 일방적이더라도 무결하기에, 자식된 입장에서 마땅히 그에 따라야만 한다는 무언의 강요가 아사히나 가의 가풍을 이루고 있었다. 어찌 됐건 어린 시절 마후유는 딱히 결핍을 체감한 적이 없었고, 같은 나이대의 또래들을 보며 안달날 정도의 부러움을 느낄 일도 없었다.

자신이 오롯한 행복을 양식으로 삼아 자라난 게 아니었음을 알게된 이후에는, 타인에 대해 무관심해졌기에 소녀는 질투를 품지 못했다. 남을 바라보며 그와 비교할 마음이 없기에 시샘할 이유가 없었고, 그들과의 관계에 어떠한 기대도 남겨두지 않았기에 불안을 품을 여지 또한 없었다. 날이 갈수록 마후유 자신의 감정에 무디게 변해가던 와중이었다. 질투심의 부재가 만들어낸 공백은 딱히 체감되지도 않았다.

종종 그녀 자신이 질투의 대상이 되는 일은 있었다. 누가 봐도 예쁘다고 할 외모가 부러워. 주변 사람들 모두에게 인정받는 능력이 부러워. 어째서 너는 평범한 나와 달리 뭐든 다 잘하는 거야. 불공평하고 치사해. 질시를 넘어 원망마저 묻어나는 눈길을 느낄 때마다 마후유는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애착이든 미움이든, 어째서 다들 타인에게 일방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쏟아내려고 하는 건지.

<등교길에 만난, 담을 훌쩍 뛰어넘어 사라진 고양이를 부럽게 여긴 적이 있었습니다.>

고민 끝에 쓴 첫 문장을, 마후유는 곧 두 줄 그어 지워버렸다. 어쩌다 만난 길고양이에게 질투를 품다니. 어째서 그때의 자신이 떠올린 마음이 질투라고 할 수 있을지 설명할 수 없었다. 스스로도 설득하지 못하는 문장을 남들이 이해할 수 있을 리 없겠지. 다시 비어버린 답지에 소녀는 지어낸 답안을 채워나갔다. 시험에서 저보다 좋은 결과를 거둔 친구를 질투한 적이 있었습니다. 합당하지 못한 이유로 친구를 질투하는 모습은 흉하고 간교하여, 마치 독기 오른 뱀처럼 보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흔히 질투의 사례로 돌아다니는 이야기를 붙여 적당히 꾸며내 써내려간 답안은 보기에 그럴듯해서 마후유는 그를 제출하였다.

악인 이아고가 말하기를, 질투는 사람의 마음을 희롱하다 집어삼키는 초록 눈을 가진 괴물이니 부디 그에 주의하소서. 초록 눈을 가진 괴물. 열망도 애착도, 그를 향한 간절함도 품을 줄 모르게 되어버린 자신은 그 괴물과 마주치는 일이 영영 없을 터. 맹목적인 사랑과 그로부터 피어난 질투에 대해 호소하는 노래들이 주기적으로 인기 차트와 추천 목록에 올라왔지만 그를 들으며 소녀는 어떠한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는 감정이다. 자신은 이토록 무의미한 내용의 가사를 쓸 일이 없겠지. 알지도 못하는 걸 묘사할 수는 없으니.

그렇게, 아사히나 마후유는 확신을 했었다.


“호시노 씨, 회수한 설문지들, 신청란에 기입된 내용에 맞춰 분류하면 돼.”

“네, 맡겨주세요.”

“기본적으로 희망하는 쪽으로 배정할 예정이지만 인원이 한쪽으로 너무 쏠리면 조정을 해야하거든. 따로 쌓아두면 시각적으로 차이를 바로 알 수 있을 거야.”

“아까 언뜻 확인했을 때는 비슷한 비율로 나뉜 듯 보였어요.”

“그래? 후후, 1학년들은 의욕 가득하구나.”

2학년과 3학년은 멀리 나가지 않아도 된단 이유로 교문 앞 진입로 청소를 희망한다고 적어둔 학생들이 대부분일 게 뻔하다. 지역 사회에 이바지하는 시민 의식을 함양하기 위해 학업 시간을 할애해 대외 봉사 활동을 한다는 행사의 취지 따위, 해야할 일도 많고 고민할 문제도 많은 사춘기 소녀들에겐 와닿지 않는 이야기겠지. 학급 회의 때 ‘수험 대비 공부를 하는 게 무엇보다 우선’ 이란 말을 꺼내는 아이들의 수는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날 터. 지금은 순수한 마음으로 봉사를 희망하는 1학년생들도 내년에는 귀찮다는 표정을 하고서 설문지를 작성할지도 모른다.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스스로를 격려하듯 고개를 한 차례 힘주어 끄덕이고는, 호시노 이치카는 맡은 작업에 집중했다. 요령 부리는 법이라곤 전혀 모르지 않을까 싶게끔 진중한 얼굴을 하고, 한결같이 단정함이 묻어나는 자세를 유지하는 모습이 제법 믿음직하다. 1학년 학급 위원으로 이치카가 오게된 건 마후유에게 잘된 일이었다. 성실하고 올곧은 후배 대신 같은 학년의 뺀질거리는 애들과 위원 업무를 했다면, 마지막엔 전부 마후유 자신이 일을 도맡아 처리하고 있었으리라. 누구에게나 상냥한 모범생으로 있어야만 한다는 압박 속에 반사적으로 ‘맡겨줘’, ‘내가 할게’ 같은 말을 몇 번 꺼내다보면 어느 순간 그런 상황이 되어버리니.

“생각보다 설문지의 양이 많네요. 기분 탓인지 평소보다 배는 되어보여요.”

“이쪽은 설문지가 아니라 구청이나 상가 관리회처럼 외부로 보낼 서류들이야. 이러한 취지로 학교에서 활동을 할 예정이니 협조를 부탁한다고 알려야 하니까 말야. 설문지는 전 학년 분 합쳐서 여기서 여기까지.”

“그러네요. 용지부터 다르구나. 종이가 겹겹이 쌓인 광경에 잠시 압도되었나봐요.”

“이렇게 보니 확실히 이번에는 쌓인 분량이 상당하네.”

“얼마 전에도 이렇게 종이가 한가득 모여있는 걸 정리했던 거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이치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고민하다가 묘한 기시감의 정체를 떠올리지 못한 건지 석연치 않은 표정을 하고서 다시 설문지를 분류해나간다. 인쇄물을 배부하고 회수하는 작업은 교내에서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일이니 그와 같은 기시감을 느낄 법도 하였다. 당장 지난 번 학급 위원 일을 했을 때에도 지금보다 분량이 좀 적었을 뿐, 서류 정리를 했던 건 마찬가지였었다. 그 외에 산더미처럼 쌓인 종이랑 마주할만한 일이란.

“교실에서 과제를 모아서 제출하는 일을 맡았었다거나? 아니면 밴드 활동 관련으로 악보 정리를 했던 걸지도 모르겠네.”

“악보? 아, 맞아. 기억났어요! 요이사키 씨의 집을 방문했을 때 악보 정리를 했었거든요. 그때 일이 떠올랐었어요.”

“응?”

반복적으로 움직이고 있던 손이 우뚝 멈췄다. 상대가 꺼낸 말을 제대로 들었으나, 그와는 별개로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마후유는 눈을 멍하게 깜박거렸다. 요이사키 가를 방문했을 때라니. 호시노 씨가 요이사키 가에, 그 아이의 집에 찾아갔었단 말인가.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 장치 틈새로 이물질이 하나 끼어든 것마냥, 단숨에 머릿속이 어지럽게 휘감긴다. 아니, 자신이 상대의 말을 뭔가 다른 의미로 이해한 게 아닐까. 아무리 얼굴을 알게된 사이가 되었다곤 해도 그 아이가 다른 사람을 선뜻 자신의 집으로 초대할 리가 없는데. 그 요이사키 카나데가, 설마.

“저, 그게, 요이사키 씨는 작곡 전반에 경험이 풍부하신 편이고, 가상악기와 편곡 프로그램을 능숙하게 다루신다고 들어서, 관련해서 이야기도 나눠보고 조언도 받고 싶었거든요. 기회가 될까 싶었는데, 호나미가 가사 대행 업무로 방문할 때 같이 찾아뵙는 걸로 약속을 잡았었어요.”

“아아, 그랬었구나.”

자신이 서늘할 정도로 굳은 표정을 내보이고 있단 사실도 모른 채 생각에 잠겨있다가, 이치카가 덧붙인 설명을 듣고서야 마후유는 표정을 풀고 자상한 선배에게 어울리는 온화한 얼굴로 되돌아왔다. 대략적인 정황을 그려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지난 번 성사된 만남 이후로 이치카는 카나데에 대해 상당한 호감을 가지게 된 모양이었다. 그럴만도 하다. 진지하게 작곡에 임한 경험이 있는 사람일수록 카나데가 만든 곡에 보다 깊게 매료된다. 단순히 ‘듣기에 좋다’ 선에서 그치지 않고, 깊이감을 이해하게 되는 거다. 기술적으로도 감각적으로도 정교한 동시에 자유로운 곡조에는 요이사키 카나데 특유의 색채가 흐른다. 지향점과 방향성이 다르더라도,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투명한 음색에 매료되어 카나데와의 교류를 원하게 되지 않을까.

저번의 모임에서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긴 했었다. 하지만 이제 한 차례 인사를 했던 사이. 양쪽 다 수줍음 많고 매사 조심스러운 성격이니, 메신저로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눴을 리 없다. 애시당초 채팅으로 ‘안녕하세요’ 하고 첫 운을 띄우기라도 했을까. 그래서, 지난 번처럼 중간에 다리를 놓아줄 상대가 나선다. 예의 가사 대행 아가씨로부터 이야기를 전해듣고서 카나데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으리라. 그렇게, 일전의 구성에서 마후유만 빼놓은 채로 두 번째 모임이 요이사키 가에서 열렸던 거다.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마후유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문제될 부분은 딱히 없지만.

“그나저나 모처럼 손님 맞이를 했는데 거기서 악보 정리를 했다니. 카나데도 참, 호시노 씨가 찾아가기로 한 날에도 방 정리를 제대로 해두지 않은 모양이네. 저번에도 말했었지만 카나데는 작곡에 집중하면 다른 일에 좀처럼 신경을 돌리지 못하는 편이어서 그래.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아줘.”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본격적인 작곡가의 이미지란 느낌이라, 역시 요이사키 씨는 대단하시구나 싶었다고 할까요. 그토록 많은 오선지를 빼곡하게 채울 정도로 작업에 몰두하다니......저는 노트 한 장 채우기도 어려워하는데 말이에요.”

“아하하, 그런 부분이 카나데의 살짝 곤란하면서도 좋은 점이긴 해. 호시노 씨가 좋은 쪽으로 받아들여줘서 다행이야.”

상대가 좋은 사람이란 믿음이 생기면 그 이후에 접하는 정보는 기대에 맞는 형태로 인식하게 된다고 했던가. 그렇다곤 해도 상냥한 시선이다. 쌓여있는 악보, 줄지어 놓여있는 빈 컵라면 용기, 텅 비어서 굴러다니는 에너지 음료 캔. 제대로 정리하지 않아 엉망이었을 그 방의 풍경을 보고서도 ‘본격적인 작곡가가 살아가는 모습’ 으로 이해해주는 건 분명 명확한 선의이겠지. 집안 사정이나 개인의 생활상 따위를 캐묻지 않고 순수하게 상대가 품고 있는 의지와 열망을 알아봐주는 상대는 흔치 않다. ‘비슷한 나이대임에도 이미 본격적인 작곡가 같은’ 상대에 대해 말하며 감명받은 표정을 하고 있는 후배를 빤히 바라보다가 마후유는 빙긋 미소지었다.

다른 누군가가 카나데에 대해 좋게 평해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카나데의 재능을 알아봐주고, 노고를 이해해주며, 나아가 그녀의 존재를 소중히 여겨준다면 기쁘겠지. 그런 측면에서 호시노 씨의 반응은 반갑다. 하지만 동시에 마후유는 묘한 거북함을 느꼈다. 호의적이라고는 해도 결국에는 사람을 재어보고 평가를 내리는 게 아닌가. 호시노 씨는 이제 고작 카나데와 한두 차례 만나본 사이잖아. 아직은 카나데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을 내리기엔 이르지 않니? 요이사키 카나데란 아이에 대해, 오래도록 곁에서 지켜봐온 게 아닌 이상 모르는 일 투성이일 건데.

아아, 그건 아니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인상이 어떤지에 대해서 얼마든 말할 수 있는 거잖아. 헐뜯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닌 이상 이렇게 말을 꺼내는 편이 자연스러운 거야. 의식적으로 입가의 미소를 유지하며 마후유는 어수선한 속내를 가라앉혔다. 순간이지만 불편한 기분이 되었던 연유를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좋은 이야기가 나왔다면 살갑게 반응해주는 게 마땅한 일이다.

“카나데와 작곡에 관해 대화는 많이 나눴어?”

“주로 요이사키 씨가 쓰는 가상악기와 보조 프로그램들에 대해 들었어요. 구하기 쉬우면서 다루기 좋은 제품을 추천받기도 했고, 장치의 설정이나 프리셋에 대해 알려주시기도 했구요. 곡을 만들 때의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는데 참고가 많이 되었어요.”

“마음가짐이라......혹시 카나데가 나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도 했으려나?”

“네. 서클의 곡을 만들 때 항상 도움을 받고 있다고, 아사히나 선배님이 없었다면 지금만큼 해낼 수 없었을 거라고 하셨어요.”

“그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는 거네. 필사적으로 구원하려는 이와 언제까지나 구원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이. 지금으로서는 잠금을 풀어낼 열쇠조차 없는 사슬로 서로를 묶어버린 관계. 요이사키 카나데와 아사히나 마후유가 나눴던 약속에 대해서 눈앞의 후배는 들은 바 없는 게 분명했다. 물론 그렇겠지. 그에 관해 말하자면 필연적으로 아사히나 마후유가 깊게 잠겨들었던 어둠에 대해서도 말해야만 한다. 배려심 깊고 신중한 카나데가 사연 담긴 이야기를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생각없이 꺼냈을 리 없다. 호시노 이치카가 보기에 두 사람의 관계는 같이 음악 서클 활동을 하고 있는 친구, 그 정도려나.

“좀 더 오래 여러 주제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호나미가 일하는 동안의 시간만 빌리기로 했던 터라, 시간이 금방 흘러가버려 아쉬웠어요.”

“즐거웠겠다. 분명 카나데도 호시노 씨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기뻤을 거야. 관심 있는 주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를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까. 새로 곡을 만들 아이디어를 얻었을 수도 있고.”

“그랬다면 좋겠어요. 사실, 작곡에 전념하고 싶으셨을 건데 제가 찾아가서 방해가 되었던 건 아닌가 싶었거든요. 직접 차를 내려주시기도 하고, 셋이서 식사 준비를 하느라 이래저래 시간을 빼앗아버려서......”

“응? 요리를 했어? 카나데가?”

“네에. 함께 볶음면을 만들어서 먹었었어요. 대부분 호나미가 만들고 요이사키 씨와 전 옆에서 보조하는 정도였지만요.”

“그건, 의외네......”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 선 카나데의 모습이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마후유가 알고 있는 카나데는 시간을 빼앗기기 싫어 컵라면 하나로 끼니를 떼워버리고는 그 이후로 간식도 먹지 않는 아이다. 간혹 나이트코드의 회선 너머로 친구들이 염려하는 말을 해도 아가씨의 식습관은 도통 바뀌지 않았던 터였다. 그랬던 주제에, 그녀가 직접 나서서 요리를 했단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듣게 되다니.

찾아와준 손님에게 예를 다한다는, 카나데 나름의 정성 표현이었을까. 방식이 서투르긴 해도 카나데는 늘 다른 사람을 챙기려고 하는 편이다. 마후유가 요이사키 가를 방문할 때에도 매번 카나데는 집주인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무척이나 아팠던 그때에는 사과를 갈아주거나 수건을 바꿔주며 병간호를 해줬었고, 그 이후의 방문 때에는 어설프게나마 차를 끓여주거나 구성이 엉성한 다과를 내주곤 했었다. 그렇지만, 요리인가. 손님으로 온 이치카에게 방 정리를 돕게 만들었다는 미안함이 덧붙여져서 평소보다 한층 힘을 내려고 했었던 게 아닐지.

“......그랬구나. 카나데가 요리를 하는 건, 지금껏 본 적 없었는데.”

딱히 카나데가 만든 요리를 먹어보고 싶은 건 아니다. 지금의 자신은 어차피 카나데가 정성을 담아 만들어낸 음식을 제대로 음미하지도 못하겠지. 뜨거운 물을 붓는 걸로 짠- 완성되는 컵라면 이상의 레시피를 카나데가 소화해낼 리도 없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마찬가지로 뜨거운 물을 붓는 걸로 완성되는 차를 대접받았었던 걸로도 충분하다. 괜한 가치 부여를 할 필요도, 그를 두고 비교하는 생각을 품을 이유도 없단 거다.

그저, 조금 신경 쓰일 뿐이다. 한 학년 후배들 사이에 나란히 서서, 식사 준비를 하며 카나데가 어떤 시간을 보냈을지 생각하게 되는 거다. 무척이나 긴 머리카락을 가리기 위해 카나데의 머리에 후배들이 위생천으로 귀여운 삼각모를 만들어줬겠지. 거기에 평소 전혀 쓰지 않았을 앞치마도 둘렀을 거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 식재료는 있는지 따위의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을까. 식칼 다루는 솜씨가 그야말로 어설픈 탓에 지켜보기 조마조마해진 후배들이 보다 안전한 일을 부탁하는 해프닝이 있었을지도. 면이 살짝 눌러붙거나 야채가 조금 타버렸더라도 멋쩍게 웃으며 그릇에 요리를 담아내는 순간도......

상상해봐도 의미는 없다. 그 자리에 아사히나 마후유는 없었으니까.

“......”

불만을 품을 이유는 없었다. 카나데에게 비슷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걸로 호감을 갖게된 이치카가 따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을 뿐이고, 카나데가 그를 마후유에게 알릴 이유는 딱히 없었다. 지난 번의 모임은, 중간 다리를 놓아준 인연으로 불려나갔던 거고. 애시당초 마후유 자신이 굳이 그 자리에 따라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다고 대꾸하지 않았던가. 아마 이번에 카나데가 약속에 대해 말을 꺼냈어도 아가씨는 비슷하게 반응했으리라. 호시노 씨와 카나데가 만나기로 한 거잖아. 굳이 내게 알려줄 필요가 있어? 하며.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드는 기분이 들어서 마후유는 숨을 낮게 내쉬었다. 쏟아내는 숨에 습기찬 열기가 섞여 탁하게 느껴졌다. 불쾌하리만큼 묵직하게 내려앉는 감정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 하나 나쁠 게 없는데 왜 이렇게 속에 매캐한 기분이 차오르는 건지. 혹시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걸까. 최근에 자신이 무리를 했었는지 돌아보며 아가씨는 손등으로 이마를 한 차례 닦아냈다.

“맞아. 다음 번엔 아사히나 선배와 같이 요이사키 씨를 만나도 괜찮을까요? 두 분이 작업하는 과정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거든요.”

“그건, 으음......”

기분 나쁠 이유가 없음에도 이토록 마음이 불편한 건 어떻게 된 일일까. 아까 전부터 손 놓고 있던 서류 뭉치를 눈길로 더듬고 있다가 마후유는 고개를 들었다.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마냥 신나서 잔뜩 들떠있는 후배와 시선이 마주친다. 밝게 미소짓고 있는 입술과 반짝이는 눈동자를 번갈아 살피다가 마후유는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호시노 씨는 무엇도 잘못하지 않았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보다 호시노 씨, 우리들, 계속 이야기만 하고 있으면 제 시간에 일을 끝내지 못할 거 같아.”

“앗, 죄송해요. 사담을 너무 길게 늘어놓았네요.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응,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되니까 말야.”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되어버린 이치카가 서둘러 작업을 재개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마후유는 자신이 처리해야할 서류로 눈길을 돌렸다. 인쇄된 양식을 훑어봐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조금 전 후배에게 작업에 집중하지 못한다고 책망했으면서, 정작 자신이 멍하게 넋을 놓고 있다니. 치졸한 짓을 했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이야기를 끊지 않았다면 원인 모를 불쾌함을 감당하지 못했을 터였다.

요이사키 카나데와 아사히나 마후유가 작업하는 과정에 대해서, 인가. 함께 음악 서클로 활동하지 않겠느냐는 뜬금없는 제안이 오고갔던 그 날로부터 두 사람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작품 활동을 위한 교류를 이어왔다. 한동안 카나데가 떠올린 곡의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에 대한 답을 해주는 건 마후유 밖에 없었다. 나이트코드의 채팅 로그에는 K와 유키의 대화만이 길게 이어졌었다. 이후 다른 두 사람이 들어오게 되긴 하였지만, 맡은 바 분야가 다른 탓에 단순한 감상 이상의 영역에서 의견을 내는 건 여전히 마후유만의 역할이었다. 그건, 어느 순간부터 지극히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리고 일련의 사건이 있었다. 소녀가 더 이상 어떤 기대도 품지 않으려고 했던 날, 카나데는 마후유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 곡을 만들겠노라 선언했다. 구원을 약속하는 그 아이를 마주하며 마후유는 옅게 조소를 삼키고, 가벼운 동정심을 품으며, 동시에 희미한 기대감과 낯선 안도감을 느꼈었다. 카나데는 계속해서 작곡을 하리라. 아사히나 마후유를 위한 곡을 쓰면서, 그 과정 내내 아사히나 마후유의 의견을 묻고, 때로는 결과물을 두고 아사히나 마후유에게 세밀한 조율을 받는 거다. 마치, 요이사키 카나데의 창작 세계에 작곡과 관련하여 의지할 수 있을 상대는 유일하게 한 사람 밖에 없는 것마냥.

고개를 들어 맞은 편 자리에 앉아있는 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고 이치카는 바쁘게 설문지 분류에 몰두하고 있었다. 조금 전 음악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던 순간 후배의 얼굴을 마후유는 재차 떠올렸다. 그런 얼굴을 할 정도로, 그렇게나 좋아할 수 있다니. 경험의 부족함은 시간이 흐르면 해결될 문제다. 이치카가 품고 있는 열정을 생각한다면 그 시간조차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터. 드높은 꿈에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기술과 경험을 갖추게 된 이치카는, 그녀가 말했던 소망처럼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공명을 일으키는 곡을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상대가 주변에 있다면, 카나데는 분명 음악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싶어하겠지.

“......”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떠올리게 된다. 그 아이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조언을 바탕으로 삼아 곡을 만드는 광경을. 난관에 봉착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고 연락하게 되는 상대가 아사히나 마후유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는 경우를. 여전히 ‘유키’ 를 위한 곡을 만드는 걸 목표로 삼고 있음에도 작업의 대부분을 ‘유키’ 가 아닌, 보다 탁월하면서 스스로의 내면을 명확하게 표현할 줄 아는 작곡가와 공유하는 미래를.

더 이상 자신이 그 아이의 세계에서 ‘가장’ 이란 수식어를 취하는 대상이 되지 못하는 순간이 오게 된다면. 유일하면서도 우선되는 존재가 될 수 없게 된다면. 그저 알고 지낼 뿐인 한 사람의 지인으로 여겨지게 된다면. 그건, 이루 말할 수 없게 부당하다. 부당하다고 말할 근거 따위 아무래도 좋다. 그래서는 안되는 거다. 자신이 모르고 있는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타인의 입을 통해 전해듣고 싶지 않다. 그 아이에 대한 건 마땅히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고 있어야만 할 터인데.

들고 있던 문서의 한쪽 귀퉁이가 구겨졌음을 뒤늦게 눈치채고 마후유는 서둘러 접힌 면을 펼쳤다. 종이를 구겨쥐었던 손바닥의 안쪽에서 땀으로 인한 습기가 느껴졌다. 열기 섞인 숨을 쏟아내고는 의식적으로 미소를 짓는다. 내면이 복잡하게 뒤엉키는 순간일수록 정교하게 꾸며낸 미소를 입가에 걸어두는 게 좋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체득했던 바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둘까. 아직 여유 기간도 있고, 무리해서 서둘러 끝낼 필요는 없겠네.”

마후유가 툭 꺼내든 말에, 알아보기 어렵게 악필로 적힌 설문지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이치카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서둘러 끝낼 필요가 없는 일이라고는 해도 어중간하게 남겨둘 이유도 없다. 분류가 끝나지 않은 더미를 치워뒀다가 나중에 작업을 재개할 때 다시 배치해두는 쪽이 훨씬 번거롭다. 아직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닐 건데. 흘끗 시계를 살피는 눈길에서 후배가 품고 있는 의문이 엿보인다. 오늘 이 이후에 개인적인 일이 조금 있어서 말야. 미안해하는 기색으로 마후유가 덧붙인 말을 듣고서야 이치카는 명쾌하게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사히나 선배,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호시노 씨도 수고했어. 언제나 도움을 받고 있네.”

“저야말로 항상 도움을 받고 있는 걸요. 그럼, 이만 들어가보겠습니다.”

“응, 조심해서 돌아가.”

빈 교실의 자물쇠를 닫고는, 열쇠를 손에 든 채로 마후유는 후배를 배웅했다. 정중하게 고개를 꾸벅 숙여보인 이치카가 뒤돌아섰다. 후배가 멀어지는 간격에 맞춰 입가의 미소가 천천히 가라앉는다. 찰랑이는 진한 검은색의 머리카락이 복도 끝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무표정한 얼굴로 마후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남은 건 교실 열쇠를 반납하는 일 뿐이다. 서둘러야 하는 개인적인 일 같은 건 없으니 이대로 귀가하게 되겠지.

밤이 이르게 찾아드는 계절이었다. 창문 밖의 풍경에 아직 불그스름한 기는 없었으나 어두워지는 건 금방일 터였다. 추위 때문에 다들 실내에 머무는 건지 바깥으로 보이는 교정은 이미 적막했다. 복도를 걸어가며 훑는 눈길로 창 밖을 쳐다보다가 유리 표면 위로 희미하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마후유는 문득 조금 전 헤어진 후배에 대해 생각했다. 정확히는, 후배의 단정하게 흘러내리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예쁜 머리카락이었다. 옛 화가들이 그린 미인도를 설명할 때 짙은 묵빛의 긴 머리카락이란 표현이 빠지지 않는 이유를 납득하게 될 정도로 호시노 이치카의 머리카락은 고왔다. 얼굴을 마주하게 되면 반사적으로 곱게 내리뻗은 머리카락에 시선이 끌릴 정도로. 그랬기에 음반 매장에서 마주쳤던 사람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했을 때 카나데가 머리카락이 예뻤다, 란 말만 반복했던 거겠지. 머리카락이 예쁜 사람이었다고, 몇 번이고 그 말만.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귀 앞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매만진다. 꽃잎의 즙으로 물들인 듯 깊은 보랏빛이 감도는 머리카락은 곱슬하게 휘어져서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자신의 머리카락이 보기에 예쁜지, 그런 생각을 마후유는 해본 적이 없었다. 머리카락은 머리카락일 뿐, 거기에 무슨 가치 부여를 한다는 말인가. 누군가가 머리카락이 예쁘다고 칭찬해줬어도 그녀는 한 차례 방긋 웃어보이곤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게 분명하다.

그랬는데, 지금은 기묘하게도 신경이 쓰인다. 자신의 머리카락은 예쁜 걸까. 몇 번이고 머리카락이 예쁘다는 칭찬을 들은 호시노 씨와 달리, 그저 그런 편인 걸까. 카나데가 그에 대해 말해준 적은 없었으니까. 예뻤다면 말해줬겠지. 유키의, 마후유의 머리카락 또한 아름답다고. 풀어내리는 순간 곱슬거리며 피부를 간지럽히기 시작하는 머리카락은, 차분하게 물결치며 아래로 쭉 뻗어내리는 머리카락에 비해 매력이 없는 거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람.”

고개를 내젓고는 마후유는 멈췄던 걸음을 내딛었다. 뭐가 문제인지 모를 일이었다. 최근 들어 익숙하지 않은 감각을 느끼는 경우가 많아지긴 했다. 그래도 대부분의 경우 생소한 감정은 곧 편안하고 포근한 형태로 마음 한 켠에 자리잡고는 하였다. 지금처럼 불쾌하게 들러붙어서 떠올릴 이유가 없는 잡념에 빠지게끔 종용한 적은 없었다. 자신을 찾기 위해선 이와 같은 감각에도 익숙해져야만 하는 걸까. 카나데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면 무언가 실마리를 얻을 수 있으려나.

“......”

말하기 싫다. 내키지 않는다. 어차피 카나데는 이미 새로 만들 곡의 컨셉을 정하고 그를 바탕으로 작업에 들어간 상태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지는 경험을 했다고 보고를 해봤자 별달리 쓸만한 소재가 되지도 않을 거다. 아무런 말도 하지 말자. 오늘 호시노 씨와 있었던 일도, 카나데가 말도 없이 후배들과 만남을 가졌던 일에 대해서도. 마음을 정하고는 마후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정보다 일찍 귀가했으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녁 약속이 있어서 외출하니, 식사를 챙겨먹으라는 쪽지와 함께 랩으로 둘둘 감아둔 접시들이 식탁 위에서 마후유를 기다렸다. 가방을 내려두고 옷을 갈아입은 뒤 마후유는 텅 빈 식탁에 앉았다. 생강을 넣은 돼지고기 볶음에 오이 가지 절임, 표고버섯을 넣은 양배추 롤, 마지막으로 두부 된장국. 반찬 대부분이 식어있었으나 상관하지 않고 수저를 들어올린다. 따뜻하든 식었든 어차피 그녀에게는 별 상관없는 문제였다.

잡다한 대화가 결여된 식사는 금방 끝났다. 뒷정리를 하고서 마후유는 방으로 돌아와 PC 앞에 앉았다. 기계가 부팅되는 동안 따로 복습해야하는 과목이나 해결해야할 과제가 있었는지 생각해본다. 모처럼 해야할 일이 별로 없는 날이었다. 뭘 하는 게 좋을지 잠시 고민하다가 나이트코드를 기동한다. 아직 이 시간대라면 접속하고 있는 상대가 없겠지만, 아무렴.

<아무리 그래도 그렇......어라, 유키다.>

<일찍 왔네.>

<안녕.>

예상과는 달리 두 사람이나 접속하고 있다. 서버에 연결되는 순간 툴툴거리는 기색으로 무언가를 말하던 Amia의 목소리가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반겨주는 Amia와 에나낭에게 답하며 마후유는 작업에 필요한 프로그램과 웹사이트를 하나하나 열어나갔다. Amia 쪽은 그렇다쳐도 에나낭은 지금쯤 학교에 있을 시간인데 접속하고 있는 걸 보면 일정에 변경이 있었나 싶다. 접속하고 있으면 접속하고 있는 거고, 굳이 사정을 캐물을 생각은 없지만.

<유키, 들어봐! 에나낭이 내게 엄청 못된 짓을 했다구!>

<뭐가 엄청 못된 짓이야. 애시당초 그리 심각한 문제도 아니잖아. 오해할만한 말은 하지 마.>

<심각한 문제거든! 위자료를 다발로 가져다줘도 해결 못할 사안이거든! >

<하여간 과장은.>

<......무슨 일인데.>

<’네가 보이는 풍경이 봄으로 물들어’ 란 작품, 알고 있어?>

<몰라.>

요즘 굉장히 인기 있는 작품인데, 하는 Amia의 중얼거림 뒤로 제법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가 최근 연재하기 시작한 인터넷 투고 만화, 소위 넷코믹이라는 에나낭의 부연 설명이 붙는다. 에나낭이 평소부터 좋아하던 일러스트레이터로, 그녀는 작가의 인지도를 통해 작품을 접한 모양이었다. Amia 쪽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어서 접한 걸로 보이고. 어쨌든 그렇게 둘 다 해당 작품이 게시될 때마다 꾸준하게 따라가며 감상해왔다는 게 상황 설명의 요지였다.

작가가 생업과 무관하게 취미 삼아 투고하는 작품인 탓에 연재가 정기적이지 않은데, 이번에 올라온 연재분을 에나낭 쪽에서 먼저 본 게 문제였다. 이야기의 내용보다 작가의 구도 연출이나 묘사 기법에 중점을 두고 감상하는 에나낭은, Amia와의 대화 도중 별 생각없이 새로 나온 부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에 관해 언급해버렸다. 그 부분에서의 연출과 구도가 굉장히 독특하던데, 어떻게 참고할 수는 없으려나- 하면서. 이야기의 흥미에 초점을 두고 작품을 보던 Amia에게는 날벼락도 그런 날벼락이 없었으리라.

<네타바레는 범죄야 범죄! 절름발이가 범인이다, 라든가 범인은 Y, 라든가 멋대로 말했던 사람들 전부 감옥에 갔다구!>

<아니, 미리 말해버린 건 미안한데 너무 당연한 전개였지 않아? 예측하지 못하는 쪽이 이상한 수준이라고? 뻔히 그렇게 흘러갈 거 알았잖아.>

<아니거든요. 어떻게 될지 전혀 짐작할 수 없어서 완전 흥미진진 두근두근 절호조였는데? 둘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너무 궁금해서 잠들지 못한 탓에 한동안 하루 7시간 밖에 못 잤는데?>

<억지 부리긴. 원칙적으로 네타바레가 나쁜 게 맞지만, 이건 네타바레라고 할만한 내용도 아니었어. 유치원생이 봐도 어떻게 이어질 건지 알아맞출걸. 설마 그 정도로 눈치가 없는 편이라고 말할 생각은 아니지?>

<좋아, 그럼 유키에게 판결을 내려달라고 하자. 누가 보더라도 뻔한 내용인지 어떤지 말야. 유키, 괜찮지?>

대답할 여유도 두지 않고 곧바로 채팅창을 통해 웹페이지 주소가 전달된다. 넷코믹답게 분량 압박이 덜하고 읽기 편한 양식이라 부담없이 볼 수 있다는 에나낭의 말에 Amia가 들뜬 기색으로 동조했다. 돌아가는 걸 보니 애시당초 가벼운 투닥거림이었을 뿐, 자기들이 재밌게 본 작품을 다른 사람이 접하게 만드는 게 더 흥미진진해진 모양이었다. 잠시 생각하다가 마후유는 흐름에 어울려주기로 했다. 어차피 급하게 해야할 일도 없다. K가 아직 접속하지 않았으니 신곡의 진척에 대한 점검도 나중에 해야할 거고.

웹페이지에 접속하면, 화사한 색감의 표지가 방문객을 반겼다. 바람에 벚꽃 조각이 날리는 봄날을 배경으로 여자아이 다섯 명이 둘, 셋으로 살짝 떨어져 교정을 걷는 그림이었다. 동글동글하게 귀여운 그림체 위로 입혀진 파스텔 톤의 색감이 아름다웠다. 일견 단순하게 배치한 걸로 보이는 구도도 가만히 살펴보면 보기에 편안한 느낌을 주는 형태로 잡혀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에나낭이 이 작품을 그린 일러스트레이터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이유를 알만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표지에서 둘로 떨어진 쪽에 속해있던 ‘R’ 이라는 여자애였다. 상냥한 성격에 남을 돕기 좋아하는 ‘R’ 은 주변의 권유로 최근 유행한다는 문자 친구 매칭 서비스를 접한다. 같은 나이대의 친구를 찾아준다는 어플을 통해 ‘M’ 이란 상대를 만난 ‘R’ 은 인기 마스코트 캐릭터를 엄청나게 좋아한단 공통점을 알게 되어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관계로 발전한다.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들과도 친하게 지내긴 하지만, ‘M’ 과 나누는 대화는 훨씬 더 즐겁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하면서.

몇 달 동안 교류를 나누며, 부모님을 따라 자주 전학을 다녔던 탓에 현실에선 친구를 제대로 사귈 수가 없었다는 ‘M’ 의 사정을 알게 된다. 거기에 더해 이번에 또 전학을 가게 되었다는 사실도. 울적해하는 문자 친구를 달래주다가 ‘R’ 은 ‘M’ 이 전학 가는 학교가 자신이 다니고 있는 학교임을 알게 된다. 놀라운 우연에 대해 말할지 고민하다가 ‘R’ 은 그 사실을 비밀로 하고 ‘M’ 이 전학오기를 기다렸다.

전학생으로 눈앞에 나타난 ‘M’ 은 소녀들이 좋아하는 마스코트 캐릭터 이상으로 아담하고 귀여운 여자아이였다. 눈앞에서 ‘M’ 을 만나고서 ‘R’ 은 생전 겪은 적 없었던 떨림을 느낀다. 현실에서는 내성적이고 붙임성 없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M’ 은 새로운 분위기에 좀처럼 섞여들지 못했다. 사정을 알고 있는 ‘R’ 은 미리 들어뒀던 정보를 바탕으로 현실에서도 ‘M’ 과 둘도 없는 친구가 되는데 성공한다. 그렇게, 낮에는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로, 저녁에는 문자로 교류하는 비밀스런 친구로 이중적인 관계를 맺어나간다.

무척이나 친한 친구가 생겨서 기쁘다는 ‘M’ 의 속마음을 문자를 통해 전해듣고서 의기양양해진 것도 잠시, 친한 친구도 생겼으니 좀 더 용기를 내어 여러 아이들과 친해질 수 있었음 좋겠다는 ‘M’ 의 소망에 ‘R’ 은 고민에 빠진다. 자신이 ‘M’ 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M’ 은 단지 사람 대하는 경험이 부족하고 처음 말을 붙이는 걸 어려워할 뿐이니, 몇 차례 계기를 만든다면 주변의 성격 좋은 애들과 친해질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자신이 평소 친하게 지내왔던 애들과 ‘M’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려는 ‘R’ 의 분투가 시작된다. 관심사의 폭이 좁고 모르는 분야에 대해선 말을 거의 이어나가지 못하는 ‘M’ 을 어떻게든 보조해서 대화에 끌어들이고, 아이들에게 ‘M’ 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려고 여러 방면에서 노력한다. ‘R’ 의 상냥함은 헛되지 않아서 주변 아이들은 곧 ‘M’ 의 좋은 점을 알아봐주고 그녀와 어울리게 되었다.

애정의 총량은 변함없더라도 그를 표현하는데에는 제약이 있다고 했던가. 친하게 지내는 상대가 늘어났기에, 자연스럽게 ‘M’ 이 ‘R’ 과 교류하는 시간은 줄어들게 되어버린다. 그건 결코 관계에 소홀해졌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었으나, 그를 알면서도 ‘R’ 은 서운함을 느낀다. 소녀에게 있어서 ‘M’ 은 단순히 새로 전학 온 아이가 아니었기에. 사정을 알지도 못하는 다른 애들이 ‘M’ 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에, ‘R’ 은 점점 이유 모를 짜증을 삼킨다.

불길은 생각지도 못한 계기로 치솟는다. 어느 날 ‘M’ 의 가방에 새로 나온 마스코트 캐릭터의 열쇠 고리가 걸려있음을 발견하고서 ‘R’ 은 그에 대해 묻는다. 그리고 그녀가 다른 친구 두 명과 같이 하라주쿠에 있는 굿즈 매장을 다녀왔음을 알게 된다. 셋이서 같이 샀다며 각자 굿즈를 들어보이는 ‘M’ 과 다른 친구들을 보며 ‘R’ 은 힘없이 웃는다. 그 마스코트 캐릭터를 좋아한다는 건 자신들을 이어준 공통점이었는데.

네가 나만의 친구였으면 좋겠어. 무슨 주제든 나와 이야기하고, 나로 인해 웃고, 그리하여 그 미소를 내게만 보여주길 원해. 처음에는 분명 그렇게 될 일이었는데, 괜한 참견으로 모든 걸 망쳐버린 거야. 주변의 다른 녀석들은 너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잖아. 너란 아이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나란 말야. 하나 뿐인 문자 친구가 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너는 나만을 봐주게 될까. 내가 이렇게 흉한 질투심을 품고 있는 아이여도 괜찮다고 받아들여줄까.

독백 속에서 ‘R’ 은 두 명의 친구와 같이 걸어가는 ‘M’ 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표지의 바로 그 장면대로.

<유키, 어디까지 봤어?>

<......>

<읽는데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건데.>

<......표지의 장면이랑 이어지는 곳까지.>

<아, 그럼 거의 다 따라잡았네. 조금 더 보면 문제의 최근 연재분이야. 정말이지, 에나낭이 너무했다구.>

스크롤을 내리면 다음 연재분의 웹페이지로 자동으로 넘어간다는 안내 표시가 떴으나 마후유는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뻔하게 알만하다는 그 이후의 내용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새롭게 사귄 친구들 사이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M’ 과, 몇 걸음 떨어진 뒤에서 그런 그녀를 가라앉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R’ 의 모습이 화면에 고정되어 머무른다. 그렇게, 한동안.

익숙한 알림음이 귓가에 울린다. 나이트코드 서버의 상태창에 네 개의 초록등이 점멸한다.

<K, 안녕!>

<K, 어서 와.>

<안녕. 다들 들어와 있었구나.>

<있지, K, 들어봐. 에나낭이 말야.>

<K에게도 말할 생각이야?>

질린다는 에나낭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Amia는 에나낭이 저지른 어마어마한 악행에 대해 다시 한번 일장 고발을 이어나갔다. 두 번째로 상연되는 에나낭와 Amia의 투닥거림을 들으며 K는 즐거운 듯 맑게 웃었다. Amia의 하소연은 아까와 마찬가지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아무쪼록 K도 작품을 보고 판단을 내려달라는 예의 결론으로. 그 과정을, 마후유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두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하니 궁금해지네.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면 읽어볼까.>

<그럼 링크 보내줄......>

<안 돼.>

<응?>

<K는, 보면 안 돼.>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K가, 카나데가 이 작품을 보게 된다면.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저도 모르게 부정의 말을 꺼내고 있었다. 그녀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한 친구들이 당황하여 꺼낼 말을 고르는 동안 마후유는 두 손으로 뺨을 감싸쥐었다. 따끔거릴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자신의 몸에서 올라오고 있음을 깨닫고는, 소녀는 낯선 전율을 느꼈다. 감기에 걸린 게 아닌데도 이토록 얼굴이 뜨거워져서는.

<K는 보면 안된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유키의 말은, 그러니까, 작업이 우선이란 말이지? 그러고보니 아직 새로 수정한 부분을 전달하지 않았었네.>

<뭐어? 그런 게 어딨어. K에게도 숨 돌릴 여유는 있어야 한다구.>

<......일단은 신곡의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우선이야.>

<아니, 너 말야.>

<유키의 말이 맞아. 우선 순위를 지키는 건 중요해. 작업을 하기 위해 나이트코드에 모인 거니까. 추천해준 작품은 나중에 볼게.>

따지는 말을 꺼내려는 에나낭을 달래고는 K는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은 남아있는 듯 싶었지만 우선 순위에 따른다는 말에 어느 정도 납득은 한 건지 에나낭은 한숨을 쉬고는 하고 있던 작업을 재개했다. 관심사를 주제로 이어지던 대화가 끊긴 게 아쉬운지 나중에 꼭 찾아보라는 말을 덧붙이고는 Amia 또한 소재를 모으는 일로 돌아갔다. 파일을 전송할게. 회선을 통해 전해지는 그 말에 마후유는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는 모습이 상대에게 보일 리도 없건만.

어째서 카나데가 ‘R’ 과 ‘M’, 둘의 이야기를 읽지 않았으면 했던 걸까. 어렴풋하게나마 마후유는 스스로의 행동을 이해하였다. ‘M’ 에게 집착하면서 질투심을 품는 ‘R’ 의 모습을 카나데가 접하지 않았으면 했던 거다. 그저, 싫었다. 그토록 치졸하게 행동하는 존재에 대해 카나데가 냉혹한 평가를 내리는 게 두렵다. 일방적으로 독점욕을 품는 사람과는 역시 같이 지내기 곤란하겠네. 여러모로 부담스러워. 그녀가 그런 감상이라도 말해버린다면. 내가 이렇게 흉한 질투심을 품고 있는 아이여도 괜찮다고 받아들여줄까. ‘R’ 의 독백을 떠올리며 예의 단어를 따라서 중얼거린다. 질투심. 흉한 질투심.

네가 계속해서 나를 위해 곡을 만들었으면 좋겠어. 텅 비어있는 나의 세계를 너의 세계로부터 흘러넘치는 곡조로 채워줘. 그러는 동안 이야기를 나눌 상대를 필요로 한다면, 둘이서 대화를 나누는 거야. 겨울의 심상을 연주해줘. 하얗게 내리는 눈에 대해 연주해줘. 그 이외의 소재들은 아무래도 좋으니까. 너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나라고 말해줘. 누구보다 가까운 존재라고 확언해줘. 그리고......내 머리카락이 예쁘다고 속삭여줘.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다고.

질투는 사람의 마음을 희롱하다 집어삼키는 초록 눈을 가진 괴물이니 부디 그에 주의하소서.

<유키, 듣고 있어?>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전송된 파일을 내려받은 뒤로 넋을 놓고 있었다. 곡을 듣고 의견을 달라고 한 이후로 어떠한 답도 돌아오지 않아 재차 이름을 부른 모양이었다. 유키, 듣고 있어? K가, 카나데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에 묘한 희열을 느끼면서 마후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의사표현이 상대에게 전달되지 않는단 사실은 물론, 알고 있지만.

<듣고 있어, K.>

말하고는, 마후유는 희미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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