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선로의 섬

프로젝트 세카이 마후유 x 카나데

누군가가 생전 안하던 일을 하겠다고 나서면 그건 위험 신호라고 했던가. 그 뜬금없는 행동이 심경의 변화를 암시하는 지표로 보이지 않더라도 촉각을 곤두세울 일이다. 일상의 궤적을 벗어나는 행동은 예측할 수 없는 결과값을 만들어낸다.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면 관심을 기울여야만 하겠지. 당사자가 따라붙는 관심을 곤란하게 여기더라도 주의 깊은 관찰은 불가결하다.

요이사키 카나데가 지명도 생소한 장소까지 외출을 하겠다고 나선 건 분명 뜬금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단종되어 사후 지원도 끊긴 하드웨어 샘플러가 고장나서, 망가진 부품의 대체물을 구한다는 게 이유였다. 추억이 깃든 기계를 수리해서 계속 쓰고 싶다는 소망은 납득할만했다. 단종된 기기의 부품을 구할 방도가 중고 거래 뿐이었다는 사정도 참작 가능하다. 하지만 굳이 현장 교환을, 그것도 전철을 통하더라도 시간이 걸리는 장소에서 거래하자는 요구를 덜컥 수락했단 건 기묘했다. 그렇게나 중요한 물건인 걸까. 집 근처의 편의점에 다녀오는 일도 부담스러워하는 애가 고작 부품 하나를 구하겠다고, 전철을 타야할 거리로 외출을 하겠다니.

그렇게 멀리 외출할 거라면 동행할게. 카나데의 보고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극히 충동적으로 아사히나 마후유는 마이크에 대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3시 반 정도에 외출하는 거지? 학교 일과가 끝나자마자 나올테니 만나서 같이 가자. 조곤조곤 전하는 목소리에 평소보다 힘이 실린다. 생각지도 못한 참견에 놀랐는지 상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아마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을 그 아이가, 얕은 침묵 끝에 조심스레 되묻는다. 괜찮아? 마후유, 바쁘지 않아? 하고.

아사히나 마후유의 일상은 명확한 목적 의식이 결여된 상태더라도 숨가쁘게 돌아갔다. 일정표를 따른다면 친구의 외출에 따라나설 여유 같은 건 없었다. 그나마 궁도부의 활동은 없는 날이다. 방과 후 학생회에는 일이 있었던가? 예비교에서 이름난 강사가 특별 초빙되어 강연을 할 예정이라는 건 기억난다. 담당한 학생들 중 상당수를 유명 대학에 입학시킨 대단한 사람이라고 했었지. 학부모들 사이에서 한층 입소문을 타는 사람이었던가. 학습에 있어서 독특한 방법론을 제시하는 강사라고.

특별 강연은 제법 긴 시간 진행된다고 했다. 따로 자료도 배부한다고 했고, 문답 시간도 있을 거라고 들었다. 그렇다면 해가 완전히 떨어진 뒤에 어둑해진 거리를 따라 귀가하리라. 자신 몫으로 따로 남겨진 저녁 식사를 하고, 미지근한 물로 몸을 씻어내는 걸로 무미건조하고 밋밋한 하루를 끝낸다. 숨돌릴 틈도 없이 짜여진 일과에 갑작스런 외출 일정이 들어갈 틈이 있을 리가. 문득 그 모든 게 지긋지긋하게 느껴져서 마후유는 신경질적으로 한숨을 쏟아냈다.

<딱히 다른 일정은 없어.>

내뱉은 말이 아무렇게나 내던진 주사위마냥 허공을 굴렀다. 왜 그런 거짓말을 꺼낸 건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유명 강사의 강연이 어땠는지 그녀의 어머니는 분명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할 터였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마후유는 나름의 변명거리를 떠올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 자신을 납득시키기 위한 핑계였다. 익숙하지도 않은 장소에서 누군지도 모를 상대를 만나 거래를 하겠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한 일이다. 이런 문제에 있어 카나데는 다소 미덥지 못하다. 안전을 생각해서라도 같이 가줘야만 하는 거다. 특별 강연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럴 때에는 어쩔 수 없다. 카나데도 자신도, 피차 평소 안하던 짓을 해버리는 셈이다.

달리 일정은 없어. 재차 말한다. 어딘가 억지를 부리는 아이 같은 어조였다. 잠시 뜸을 들이다 카나데는 수긍했다. 마후유가 괜찮다면 나도 좋아, 하며. 자신도 따라가면 한 사람만 빼놓고 모임을 하게 되는 셈이니 그래서야 에나낭이 안쓰러워진다며 아키야마 미즈키가 킥킥 웃으며 말하고, 야간 학교의 어중간한 출석 시간만 아니었다면 자신이 카나데와 외출했을 거라며 시노노메 에나는 볼멘소리를 흘린다. 별 무게감 없는 대화가 오고가는 흐름은 언제나와 같이 느슨한 분위기여서, 마후유는 뻣뻣해졌던 어깨에 긴장을 풀었다.

두 소녀가 느릿하게 달리는 전철에 나란히 서 있게 된 건 그와 같은 연유에서였다.

평소에는 이용할 일이 좀처럼 없을 노선이었다. 도심을 길게 관통해서 뻗어가는 노선은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좋게 말하면 옛스러운 정취가 묻어났고, 나쁘게 말하면 설비 전반이 노후화된 상태였다. 이용하는 사람의 수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명소를 찾는 관광객들로 가끔씩 붐비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군데군데 색이 벗겨져 희뿌연 자국이 보이는 차내에서는 세월을 먹은 카펫에서 날법한 희미한 먼지 내음이 감돌았다. 추위를 몰아내겠답시고 난방을 돌리고 있으나 바깥 바람이 흘러드는 틈새가 많은지 효율은 그리 좋지 않았다. 열기가 나오고 있는 부근은 후덥지근하고, 구석으로 갈수록 공기가 차갑다. 소녀들이 서 있는 자리는 열기가 그대로 쏟아지는 지점이어서, 카나데는 아까 전부터 노곤하게 풀린 눈을 하고 있었다. 그를 흘끗 살폈다가 마후유는 유리창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양쪽으로 촘촘하게 들어찬 목조 건물의 군집을 두고 좁다란 길목을 따라 깔린 선로로 열차가 달린다. 가끔 한쪽으로 2차선 도로가 나타나거나 폭이 좁은 풀밭이 펼쳐지기도 한다. 좁게 뻗은 구간이 계속 이어지나 싶더니 한순간 대로 중앙으로 나아가 자동차들 사이를 달리는 노면 전철이 되어버린다. 이런 구조이니 속도를 낼 수 있을 리 없다. 전철이 나아가는 속도가 느릿한 탓에 지나가는 풍경을 쳐다보고 있으면 골목길을 따라 천천히 산보하는 기분이 들었다.

“생각했던 거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네.”

목적지까지 남은 역의 갯수를 셈해보고는 카나데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집에서 역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만 따져보고 그 이외의 거리는 전철만 타면 순식간에 해결될 거라고 낙관했던 모양이었다. 살면서 제대로 된 외출이라곤 하지 않으니 그런 쪽으로 현실감이 없을 법도 하지. 기운이 빠진 건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카나데는 다른 승객들이 일찌감치 자리를 차지한 좌석 쪽을 흘끗 살폈다. 그러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마후유와 시선을 마주하고는 멋쩍게 웃어보인다.

“전철을 탈 뿐이라면 거리가 좀 멀어도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카나데의 생활 반경을 생각하면 무리한 시도라고 예상은 했어. 그러니 같이 가겠다고 했던 거야.”

“미, 미안해.”

“미안해할 필요 없어. 내가 따라가겠다고 했던 거고.”

“......”

뭔가 말하려듯이 입술을 옴싹이다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카나데는 유리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걸까. 희미하게 떠오른 호기심이 갑자기 들이닥친 요란한 소음에 잠겨버린다. 전철 바깥으로 철도 건널목의 차단기가 내는 경보음이 한순간 선명해졌다가 곧바로 멀찍이 사그라들었다. 도로변을 따라 나아가던 전철이 어느 새 개활지를 달리고 있었다. 건물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던 유리창에 정오를 기점으로 한껏 투명해졌다가 조금씩 탁해지기 시작한 겨울 오후의 햇살이 쏟아졌다. 창 너머로 보이는 너른 억새풀밭의 풍경은 조금 전까지 이어지던 목조 건물들의 장벽과 인상이 너무나 달라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목적지인 역에 도착하자마자 소녀들은 입고 있던 겉옷을 재차 여몄다. 오고가는 통행인이 그리 없는 덕에 거래하기로 한 상대를 찾는 일은 수월했다. 개찰구 근처의 펜스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감색 정장차림의 여성을 발견하고서, 잠시 머뭇거리던 카나데는 잰걸음으로 앞서나갔다. 평소보다 한층 가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거래하기로 하신 분이신가요, 하고.

무뚝뚝한 얼굴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여성은 거래 상대가 어린 여자애임을 확인하고는 표정을 느슨하게 풀었다. 후 불면 날아갈 듯 가녀리게 생긴 아이에게 먼 걸음을 하게 만들었단 점이 미안해진 걸까. 인사를 주고받고는 일전에 배송 문제로 괜히 귀찮은 일이 생겨서 직접 만나 거래하는 걸 고집했다는 사족을 늘어놓다가 여성은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마후유에게 눈길을 주었다.

시간이 오래 걸릴 일은 아니었다. 무슨 말을 꺼내든 조금도 흥미없단 기색을 하고 있는 이의 존재는 불필요한 잡담을 잘라내고 빠르게 본론을 이끌어내게끔 만든다. 현금이 가지런하게 담긴 봉투를 내밀고, 카나데는 물품이 든 종이 가방을 받아들었다. 조심해서 들어가라고 배웅해주는 여성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카나데는 마후유에게로 다가왔다. 끝난 거야? 그렇게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여보인다.

“무겁지 않아? 들어줄까?”

“괜찮아, 그 정도로 무겁진 않아. 게다가 마후유는 이미 무거워보이는 짐을 들고 있는걸.”

마후유는 흘끗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과목별로 참고서를 하나씩 챙겨뒀을 뿐인데도 카나데의 지적대로 들고 있는 가방은 제법 묵직했다. 카나데를 따라가야한다는 핑계로 예비교를 빠질 생각이었으면서, 습관적으로 원래 일정에 맞춰 책들을 챙겨온 거였다. 자신은 땡땡이조차 제대로 칠 줄 모르는 인간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고는 마후유는 옅게 실소했다.

돌아가는 도중, 전철의 창밖으로 여기까지 오면서 펼쳐졌던 풍경이 되감기며 흘러갔다. 억새풀밭과 목조 건물들로 이루어진 골목을 지나 온통 회색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도심지에 도착하면 이 짧은 여정도 끝나리라. 해가 짧아진 계절이었음에도 바깥은 아직 밝았다. 특별 강연은 지금쯤 시작했을까. 아사히나 마후유의 자리를 비워둔 채로, 학원생들 모두 창백하게 긴장한 표정으로 집중하고 있겠지.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마후유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제라도 예비교로 가야만 할까. 불가피한 사정으로 늦어졌다고 말한다면 배부하는 자료라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쪽이나마 필기할 내용을 잡아낼 수도 있겠지. 강연이 어땠는지 확인을 받게 된다면 그나마 자연스럽게 대답할 수 있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가다가 소녀는 눈을 감았다. 우스운 일이었다. 강연 따위 빠지더라도 아무 상관 없어, 라고 무덤덤하게 반응하는 아사히나 마후유의 바로 곁에, 혹여나 남들보다 뒤처지는 게 아닌지, 그리하여 부모님께 불필요한 걱정을 끼치게 되는 게 아닌지 초조해하며 겁내는 아사히나 마후유가 있다. 한쪽 일면이 다른 면모를 경멸하고, 동시에 역으로 무책임하다며 비난한다. 어느 쪽이 진정한 아사히나 마후유라고 해야할지, 그녀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다.

“예정보다 훨씬 많이 걸어다녔네. 지친다아.”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마후유는 감았던 눈을 떴다. 조금 전 정차한 역에서 탔는지 여성 두 명이 근처에 서 있었다. 둘 다 커다란 캐리어를 하나씩 끌고 있고, 억양에 묘하게 낯선 강세가 들어가는 걸로 보아 다른 지역에서 온 관광객인 모양이었다. 지친다며 운을 띄운 쪽은 말과는 달리 아직 여유가 있는지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었고, 동행하는 쪽이 오히려 눈을 내리깐 채 무기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야, 3박 4일이란 일정도 금방 지나가는구나. 그래도 재밌었다. 계획했던 대로 놓치는 일 없이 잘 챙기기도 했고. 도쿄 여행, 나쁘지 않았네.”

“......돌아가기 싫어.”

“우는 소리 해도 어쩔 수 없어. 이젠 일상으로 복귀해야만 하는 차례인 걸세, 제군.”

“이런 여행으로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아. 그건 확실히 알겠어. 고작 며칠 눈속임을 한 거 뿐이야. 모든 게 시시해지는 기분이 드는 생활로 돌아가야만 하는 거, 견디기 힘들어. 지긋지긋해.”

“너도 참. 여행은 마지막 마무리까지 좋아야 좋은 추억으로 남는다?”

“같이 온 상대가 너란 시점에서 이미 좋은 추억 따위 없어.”

“또 그런다.”

무게감이 느껴질 정도로 묵직한 한숨을 쏟아내고는 여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문득 가까이에 있는 이의 존재감을 느낀 건지 곁으로 흘끗 눈길을 흘린다. 오가는 대화에 이끌려 그들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던 소녀와 눈이 마주친다. 피곤함에 잠겨 탁하게 보이는 눈동자에는 타인을 향한 일말의 관심도 엿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본인 스스로에게도 그리 의미를 두고 있지 않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텅 비어있는 눈빛. 마후유와 의미없는 시선 교환을 한 차례 하고서는 여성은 고개를 푹 숙였다.

“네가 돌아가지 않으면 사무실이 큰일이잖아. 한 사람의 공백이 얼마나 크다구.”

“잘됐네. 그대로 와르르 무너지라고 해.”

“말은 그렇게 해도 막상 내일이 되면 착실하게 출근할 거면서.”

“......”

대화가 끊어진 이후의 공백을, 때마침 흘러나온 안내 방송이 채운다. 다음 역이 어디인지, 어느 방향의 문이 열리는지 안내하는 방송이 나오는 동안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주변에 깔리기 시작한 침묵이 마후유는 낯익었다. 체념해버려서, 그 어떤 말을 꺼내더라도 거기에 의미를 찾을 수 없게된 사람이 만들어내는 적막함이었다.

“......여기보다 더 멀리 어딘가로 가버리고 싶어.”

작게 내뱉은 중얼거림이 마지막이었다. 지친 얼굴의 여성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공기를 바꿀 생각인지 동행하고 있는 쪽이 여행 중 찍은 사진을 같이 보자며 단말기를 꺼내들어 짐짓 쾌활하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조금 전보다 한층 큰 목소리였음에도 마후유는 더 이상 그들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들을 이유가 더는 없었기 때문일지도.

돌아가기 싫다. 문득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학교, 예비교, 그리고 집. 일상을 경유하는 지점 하나하나가 기묘하리만큼 낯설고 거북하다. 견디기 힘들게 싫은 기분이 들게 만드는 것들이 모여 일상의 궤적을 그린다. 떠올리기만 해도 숨막히는 기분이 드는 장소에 돌아가야만 하다니, 그건 자학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러니 소망하고 만다. 지긋지긋한 일상으로 돌아가기 싫다고.

“이제 한 정거장 남았네.”

“......”

“괜찮다면 역 주변에서 같이 저녁 식사, 하지 않을래? 조금 이른가.”

곁에서 카나데가 꺼낸 말에 마후유는 답하지 않았다. 닫혀있는, 잠시 뒤 역에 도착하면 열리게 될 문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 탁하게 침잠하는 의식이 이 이후에 이어질 일들을 멋대로 예측한다. 역에 도착하여 서둘러 카나데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서, 마음의 여유를 잃은 채로 황급히 집으로 향하겠지. 현관을 열고 들어서면 어머니와 마주치리라. ‘오늘 하루 잘 보냈니?’ 라는 무의미한 발화 다음으로 ‘그 선생님의 강연은 어땠니? 소문대로였으려나.’ 하고, 곧바로 본론이 튀어나올 거다. 그러면, 그러면......어떻게 행동하는 게 좋을까.

강연은 불참했어요. 오늘따라 그럴 기분이 아니었거든요.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사정을 말한다면 어머니는 크게 실망하겠지. 그렇게나 착하던 딸이 더 이상 착한 아이가 아니게 되었다며 염려할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거짓말이라도 해야할까. 학생회에서 긴급하게 처리해야할 일이 생겨버려서, 오늘은 그쪽을 우선했다고 말한다면 아쉬움이 남는 기색은 보이더라도 납득할지도 모른다. 딸이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나름의 역할과 지위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에 부모는 만족감을 느끼는 모양이었으니. 평소 마후유가 거짓말을 일삼는 편도 아니니 딱히 의심하지는 않을 터. 그래, 그렇게 둘러댄다면 변함없이 착한 아이로 남아있을 수는 있는 거야.

......웃기지도 않네. 언제부터 거짓말을 하는 녀석이 착한 아이가 될 수 있었지?

문이 넓게 열린다. 열린 문 바깥으로 역 내부를 오고가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희미하게 흘러들고, 차내에는 역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울렸다. 캐리어의 바퀴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여행객으로 보이던 사람들이 열린 문으로 걸어나갔다. 도심지답게 환승할 수 있는 노선이 많은 역이다보니 그들에게도 이곳이 목적지인 모양이었다. 내려야하는데. 그렇게 생각은 하면서, 마후유는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

싫다. 나가기 싫다. 아직 스스로를 온전히 책임지지 못하는 무력한 자신이 달리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예측 그대로의 비참한 일상을 답습하게 될 뿐이다. 이미 늦어버린 강연에 뒤늦게라도 참석하겠다며 예비교를 향해 허겁지겁 뛰어가기도 싫고, 미리 짜맞춰둔 거짓말을 연습삼아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집으로 돌아가기도 싫다. 그 따위로 안쓰럽게 행동하는 자신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으면서 마후유는 주춤,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문이 닫히고 세상이 급격히 조용해졌다. 다른 승객들이 내리고, 혼잡한 역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사라지고, 안내 방송이 멈춘 공간은 기묘하리만큼 고요했다. 한순간이나마 주변이 진공 상태로 포장된 게 아닐까 싶게끔. 그러다가 덜컹, 차체가 한 차례 흔들린 다음 열차가 출발한다. 창밖으로 소녀가 내려야만 했던 목적지가 흐릿한 흔적이 되어 빠르게 흘러갔다.

문득 비어있던 손에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서 마후유는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제서야 동행하던 이의 존재를 떠올린다. 곁으로 다가와 손을 잡아주며 카나데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조금 전의 역에서 내려야만 했다고 말하거나, 뭔가 문제가 생겼냐고 캐묻거나 하는 일은 없다. 그저 맞잡은 손에 살며시 힘을 실을 뿐이다. 괜찮아, 곁에 있을 테니까. 시선이 닿은 순간 카나데의 푸른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마후유는 느꼈다.

어째서 목적지에서 내리지 않았던 건지 사정을 설명하지 않는다. 어째서 목적지에서 내리지 않고 하염없이 전철에 몸을 맡기고 있는 건지 다그치며 묻지 않는다. 다음 역에서도, 다다음 역에서도, 그 다음 역에서도 두 사람은 전철에서 내리지 않았다. 각자 한쪽 손에 짐을 들고, 비는 손을 서로 맞잡은 채.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고 창문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이전에는 한번도 와본 적 없는 미답지를 바라본다. 회색 콘크리트의 숲에서 빠져나온 뒤 열차는 길게 뻗은 도로 하나와 나란하게 언덕을 달리고 있었다.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를 도로와 나란하게.

“꽤 멀리까지 온 걸까.”

“......”

종점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흘렀다. 멋모르고 차량 기지까지 끌려오는 넋나간 승객이 생기지 않게끔 주의를 주는 건지 방송은 짧은 간격으로 몇 차례나 반복되었다. 전철에서 내리면, 도착한 곳은 인적 드문 역이었다. 양쪽으로 철로를 놓고 있는 섬 형태의 플랫폼은 4량의 열차가 들어와도 비좁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작았다. 시설 관리는 되고 있는 모양이었으나 눈길이 닿는 모든 게 낡아있었다. 내부 판넬이 누렇게 변색된 자판기, 먼지 눌러붙은 자국이 지워지지 않은 채 달려있는 커다란 아날로그 시계판, 흙먼지가 발자국 형태로 그대로 남아있는 계단. 그 모든 게 이 종점의 유동 인구가 거의 없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시부야 역처럼 도심에 위치한 역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역 바깥으로는 방음판 비슷한 구조물도 존재하지 않아 넓은 간격으로 남겨진 공터 너머로 가정집들이 보였다. 그 위로 노을로 흠뻑 젖어든 하늘이 밀려든다. 온통 노을이 스며든 세계에 작은 섬으로서 이 장소가 남겨진 기분이었다. 해가 저물고 있는, 하지만 아직 밤이 되지는 않은 세상은 묘하게 몽환적이어서- 현실감을 흐트러뜨린다.

“......파도 소리가 들리는 거 같아. 가까이에 바다가 있으려나.”

“잘 모르겠어.”

“으음, 그럼 내가 착각한 걸지도.”

멋쩍게 웃으며 카나데는 근처에 있는 벤치에 조심스레 앉았다.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는 말에 마후유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멀리 어디선가 철도 차단기의 경보음 비슷한 소리가 띵동띵동, 희미하게 들려왔다. 공기는 서늘하게 맑았다. 불어오는 바람에서 겨울 바다의 내음은 느껴지지 않는다. 바다라니, 그렇게까지 멀리 왔다는 기분은 들지 않는데.

마후유는 카나데의 곁에 앉았다. 벤치만큼은 제대로 청소하고 있는지 낡긴 했지만 나름 깔끔했다. 나란하게 앉은 채로 소녀들은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각자 역 내부를 두리번거리며 살피거나,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본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하늘이 물결치는 기분이 들었다. 밀려드는 잔 파도처럼 노을이 하늘 중심부에 한껏 퍼졌다가 다음 순간 일제히 가장자리로 밀려난다. 밀려들었다가, 빠져나갔다가. 밀려들었다가, 다시금 빠져나갔다가.

“......카나데. 둘이서 어딘가 멀리, 떠날래?”

문득 튀어나온 그 말을 듣고서 카나데는 그리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시선을 돌려 마후유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그녀가 올려다보고 있는 하늘로 따라서 눈길을 향한다. 그렇게 잠시. 자신이 꺼낸 말이 얼마나 공허하고 무책임한지 가늠해보다가 마후유는 낮게 웃음을 흘렸다. 실질적으로 ‘가출’ 의 계획 따위 하루치도 세우지 못할 주제에, 같이 도망치자는 말을 꺼내고 있다니. 이어진 모든 걸 자신의 의지로 끊어낸 다음 도망친다는 결정은, 겁쟁이는 절대로 내리지 못할 어마어마한 결단일 터인데.

“어디로?”

“그건, 몰라. 그냥, 더는 괴롭지 않을 곳으로. 누구도 간섭하거나 훼방놓지 않을, 그런 곳......”

형편 좋은 이상향을 현실에서 찾아낼 수 없다는 사실이야 알고 있다. 이상향이라고 칭하기에는 눈물겨울 정도로 하찮은 수준이란 점도 자각한다. 그렇더라도, 아무래도 좋다.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해버릴 뿐이다. 말이야 해볼 수 있지 않은가. 더는 답답한 기분이 되지 않고, 괴로움에 가슴을 두드릴 필요가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문득, 자신들이 지금 앉아있는 이 장소도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을 소녀는 하였다. 노을 바다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외딴 섬. 노을빛 물결이 찰랑이는 수면을 따라 가끔씩 탑승객 없는 빈 열차가 들어오는 철로만이 길게 뻗어있을 뿐, 그 이외의 바깥 세계는 한없이 멀리 떨어진 장소. 낡은 벤치에 앉아,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철도 차단기의 경보음을 메트로놈 신호로 삼아 카나데가 곡을 만든다. 그녀가 새로운 곡을 만들어주길 기다리며, 등을 맞대고 앉은 채 마후유 자신은 역의 천정에 달린 원형 시계를 빤히 바라본다. 초침이 째깍 움직이면 1초의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매순간 새삼스레 깨달으며, 그렇게나 알차고 촉박하게 쓰도록 강요당하던 시간을 마음껏 낭비해버리는 거다.

얼마나 좋을까. 해가 저물어가는 세계에서 카나데가 다정한 멜로디로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자신은 그 리듬에 맞춰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단둘이서, 그 외에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순간을 영원토록 공유하고. 겉보기엔 볼품없고 황량하더라도, 네가 속삭여주는 음악을 통해 비로소 완전해지는 낙원에서.

카나데는 말이 없었다. 의미없는 제안에 답이 돌아오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마후유는 침묵을 받아들였다. 답하기 곤란한 말을 꺼낸 쪽이 나쁜 거니까, 아무렴. 마찬가지로 사라져버리고 싶은 입장이 아니냐고 쏘아붙인 적도 있었지만, 카나데에게는 카나데만의 사정이 있다. 서로가 다를 거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며 퉁쳐버리고는, 그러니 같은 결론에 도달해야만 한다며 매달리는 건 비뚤어진 소유욕에서 나오는 집착이겠지. 언제나 곁을 지켜주겠다는 이의 존재에 안심해서, 계속해서 더 많은 걸 요구하게 되어버리는 이기심.

“......예전에, 멀리 떠나려고 했던 적이 있었어.”

나지막하게 흘러나온 그 말을 듣고 마후유는 곁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맞닿은 순간 카나데는 빙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버지께서 쓰러진 다음이었어. 입원 수속을 하고, 할머니와 함께 뭐가 뭔지 모를 서류들을 정리하고, 그렇게 처음 며칠은 정신없이 흘러가느라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볼 겨를도 없었지. 슬펐는데, 분명 견디기 힘들게 슬펐는데 그걸 표현할 여력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하염없이 우시는 건 할머니 쪽이었어. 혼자 남게된 내가 가엽다고, 불쌍하다고 손을 붙잡고 우시는데, 할머니가 슬퍼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간신히 내가 잠겨든 슬픔의 무게감을 가늠할 수 있었어. 아, 내가 그만큼이나 서글픈 상황에 놓인 거구나, 하고.”

“......”

“희박해졌던 감각은 갑자기 돌아오더라. 며칠 지나서, 자고 일어난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오며 ‘아빠?’ 하고 부른 다음, 거기에 답해줄 사람이 더는 여기에 없단 사실을 한 발 늦게 깨달은 거야. 그게, 견딜 수 없이 괴로웠어.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대로 주저앉은 채로 울고, 또 울고. 어지러울 지경으로 울고 난 다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여기에 있고 싶지 않다고. 나 외에 가족들 누구도 더는 없는 집이, 내가 우는 소리 외엔 무엇 하나 들리지 않는 적막함이 못 견디게 미웠어. 벗어나고 싶단 생각만 들었어.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로 떠나면 놓쳐버렸던 안온함을 되찾을 수 있을 거란, 착각. 이성적인 판단도, 현실 감각도 그 순간에는 의미가 없었거든.”

이야기의 흥미를 돋우기 위해 동화의 도입부에 막무가내로 우겨넣은 비극의 서사를 쓰여진 그대로 읽어나가는 것마냥, 카나데는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아핫, 작게 헛웃음을 삼킨다. 그게 채 아물지 않은 상처가 건드려진 순간 몸을 움찔거리게 되는, 일종의 통증 반응임을 마후유는 뚜렷하게 느꼈다. 반사적으로 카나데의 손을 잡는다. 존재를 확인하는 듯, 동시에 위로하는 듯 희고 가냘픈 손등을 쓰다듬는다.

“어디로 갈 건지 알 수 없어서, 일단은 그냥 집을 나왔던 기억이 나. 갈 수 있는 곳은 몇 없었는데도.....고작해야 할머니 댁, 아니면, 어머니가 계신 곳 정도였을까. 하지만, 전혀 상관없는 곳으로 떠나버리고 싶었던 거라......근처의 정류장으로 가서 버스를 탔었어. 노선도 확인하지 않고 탔으니, 몇 번이었는진 기억 안 나. 맨 뒷자리에 웅크리고 앉아서 창밖을 봤어. 가도 가도 모르는 장소로 이어져서......”

“......”

“그대로 있다보면 어딘가에 도착하기는 하겠구나. 체념한 채로 그렇게 생각했던 거 같아. 어쨌든 간에, 더는 비참하고 슬픈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 닿을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

포말처럼 흩어지던 노을이 점차 찌꺼기를 남기며 새까맣게 가라앉고 있었다. 소녀들의 얼굴에 그늘이 깊게 지는 듯 보일 즈음, 오래된 전자기기가 기동하는 진동음과 함께 역 구석구석의 조명들이 순차적으로 켜졌다. 벤치 주변으로 다소 탁해진 백열광이 흘렀다. 무게감 있는 극을 연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정한 듯한 조명 속에서 소녀들은 서로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운전하던 아저씨가 스피커로 방송을 했어. 곧 운행하는 노선이 갈리게 되는데, 뒤에 있는 학생은 목적지가 어디인 거냐고. 둘러보니 남아있는 승객은 나 밖에 없었어. 당황해서 답하려고 했는데, 말이 나오지 않는 거야. 그게, 목적지가 없었으니까. 그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어디로 가고 싶은 건지 명확하게 정해두지 않은 채로 마냥 걸어나가서는 결국엔 길을 잃어버릴 거라고.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 채,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되어버릴 거라고.”

“......”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으니 혹시 가출하는 거냐고 묻더니, 집이 어디인지 말하라고 하더라고. 돌아갈 곳은, 아직은 답할 수 있었으니까. 대답을 듣고는 아저씨는 버스를 세웠어. 길 건너에 있는 정류장으로 가서 어느 노선의 버스를 타라고 말하는 거야. 그럼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고민할 일이 있으면 적어도 자기가 있는 게 어디인지 스스로가 알고 있는 장소에서 하는 게 맞다고. 시기를 놓치게 되면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고.”

상상해버리게 된다. 어딘지 모를 장소로 떠나서, 돌아오지 않게 되었을지도 모를 카나데를. 그리하여 자신이 카나데를 만나지 못하게 되었을 경우를. 만에 하나, 라는 가정을 떠올리기만 하여도 심장이 옥죄어드는 기분이 들어서 마후유는 저도 모르게 카나데와 맞잡고 있던 손에 꾸욱 힘을 넣었다. 아아, 꼴보기 흉한 이기심이다. 자신은 멋대로 사라져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주제에, 다른 이가 훌쩍 사라지는 건 이렇게나 두려워하다니.

손을 세게 움켜쥐어오는 마후유의 행동에 흠칫 놀랐다가, 카나데는 곧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친구를 바라보았다. 곱게 미소 짓는 입술이, 상냥함 깃든 푸른 눈동자가 언제나의 안도감을 전한다. 괜찮아, 곁에 있을 거니까. 불안해하고 있는 이에게 한없는 위안이 되어주는, 요이사키 카나데 특유의 상냥함.

“마후유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괴로움을 느끼고 있는지,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오만한 거겠지. 그래도, 나름의 공감을 하고 있어.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기분도, 떠나고 싶다는 마음도.”

“......응.”

“내가, 같이 찾을게. 마후유가 도달하고 싶은 장소가 어디인지, 명확하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도와줄 테니까. 길을 잃게 되더라도 둘이서 손을 잡은 채로 헤맨다면 괜찮을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할게. 그러니, 포기하지 말아줘.”

어째서 그렇게까지, 타인인 나를 위해 너 자신을 바치는 맹세를 할 수 있는 걸까. 그 때에도, 지금도. 네가 이렇게 행동하게끔 만드는 근원은 여전히 너만의 괜한 고집인 거니. 굳게 다짐하는 표정을 짓고서 눈을 마주해오는 카나데를 바라보다가, 마후유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입술 사이로 번지는 숨이 뜨거웠다. 카나데의 존재를 뚜렷하게 느낄 수 있는 순간마다 그랬듯, 아니 그보다 훨씬 더 가슴 안쪽이 따뜻하게 달아올라서는.....

“......자각하고 있어? 카나데, 매번 언젠가의 일만을 약속할 뿐이야. 내게 마냥 기다려달라고만 하고.”

“그건, 알고 있어. 그치만 절대 빈말은 아니니까.”

“그럴수록, 난 카나데를 믿고 기다리는 거 외엔 어쩔 도리가 없어져. 책임질 수 있어? 맹세할 수 있는 거야?”

“응, 맹세할게.”

“어떻게?”

번듯한 대답 대신,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머뭇거리는 반응만이 돌아온다. 맹세의 방법론에 대해 필사적으로 고민하는 상대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마후유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마법 같은 일이었다. 그토록 마음을 괴롭게 만들던 기분이 거짓말 같이 사라지고, 포근하고 간질간질하게 기분 좋은 감각이 가슴을 가득 채운다. 여전히 낯설어서 명확한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감정이었다. 아직까지는.

역을 출발하는 열차가 곧 정차할 거라는 안내 방송이 플랫폼에 울렸다. 약간의 잡음이 섞여나오는 방송이 한 차례 더 반복될 즈음, 소녀들이 도착했던 방향과 반대쪽의 철로에 미끄러지듯 열차가 들어섰다. 오로지 두 명의 승객을 태우기 위해 전철의 문이 열린다. 비어있는 좌석에 소녀들은 나란히 앉았다.

출입문이 닫히고, 전철이 출발하기 직전 특유의 정적이 깔린다. 출입문의 창 너머로 보이는 역의 조명등들을 보며 마후유는 아까 전 떠올렸던 노을의 섬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상대에게 전했던 물음에 대해서도 생각하였다. 카나데, 둘이서 어딘가 멀리 떠나지 않을지 묻는 말에는 아직 답해주지 않았어. 언젠가 자신이 어디에 도달하고 싶은지 확실하게 정할 수 있게 된다면, 한번 더 물어볼 수 있을까. 그때의 자신이 그리고 있는 이상향에, 둘이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섬을 떠난 열차는 어둠 깔린 선로 위를 고요하게 달렸다. 서로에게 몸을 기댄 채 잠든 소녀들은 함께 고른 숨소리를 냈다. 안온하고, 부드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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