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글 7

프로젝트 세카이 마후유 x 카나데

하필이면. 정말이지 하필이면- 이라고, 요이사키 카나데는 한탄한다. 1980년에 제작된 고전 호러 스릴러 영화가 하필이면 느긋하게 숨을 돌리던 저녁 시간 눈에 들어온 게 사태의 시발점이었다. 물론, 단순히 무서울 뿐인 영화라면 카나데가 자발적으로 그를 감상할 일은 없었겠지. 호러 스릴러란 장르에 맞지 않게 고명한 클래식 음악가가 삽입곡을 담당한 작품이었다는 게, 음악을 사랑하는 아가씨의 눈길을 붙들어버렸다. 하필이면.

‘현악기, 타악기, 첼레스타를 위한 악장’ 을 배경곡으로 삼아 완성된 영상을 보고 싶다는 욕망에, 카나데는 한참 동안 낡은 서양식 호텔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괴기스러운 이야기를 지켜보았다. 낮게 긁는 바이올린 현의 떨림음을 누군지 모를 존재의 기척마냥 연출하는 기법에 사로잡혀서, 음산하게 뻗은 복도를 조심스레 걸어가는 등장인물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타박, 타박, 타박 이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뚝, 불길한 침묵 속에 각도가 고정된 채로 끌어옮겨지는 카메라워크, 한참 멀리 떨어져 있을 호텔 로비 쪽에서 돌연 울리는 전화벨 소리, 갑작스런 소란에 당황한 등장인물이 미간을 찌푸리며 뒤쪽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관객을 겁주는 요소에만 집중하는 싸구려 영화와는 달리 거장의 손길 속에 정제된 연출을 갖춘 고전 명화였다. 그렇기에 이야기가 끝맺어지고 스탭롤이 올라가기 시작했을 때, 카나데는 약간 무서운 부분이 있었을 뿐 전반적으로 볼만한 작품이었단 평가를 속으로 내렸다. ‘약간 무서운 부분’ 이 나올 때마다 폭죽 터지는 광경을 목도한 고양이마냥 허우적거렸단 사실에 대해, 아가씨 스스로는 딱히 자각이 없었을 거고.

“으......”

살짝 무서운 영화를 봤더라도 하루 정도 지나면 일상의 다른 일들로 기억이 덮어씌워져 그리 영향을 받지는 않게 되었으리라. 그럼에도, 하필이면 그런 날 깊은 밤에 눈이 뜨이고 만다. 턱에 닿을 정도로 이불을 끌어올린 상태로 카나데는 몸을 떨었다. 저녁 식사 이후 물을 많이 마셨던가? 딱히 그랬던 거 같지는 않지만. 하지만 어쨌든 간에 화장실을 가야만 한다고 몸이 외치고 있다. 실내의 모든 조명이 꺼지고, 바깥에서는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이 시간대에.

물론 알고 있다.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 바깥으로 일어서봤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 이제 성인이 된 아가씨는 그 정도 사리분별은 할 줄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서운 건 어쩔 수가 없는 일. 먼지 묻은 붉은 카펫이 길게 깔린 복도를 저벅저벅 걸어다니는 미치광이 살인귀가 지금 이 순간 어둠 속에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상상만으로도 머리카락이 바싹 곤두서는 느낌이 들어버린다. 조심조심 걸어서 방문을 여는 순간, 언제나의 거실 풍경 대신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은 낡은 호텔 로비의 정경이 모습을 드러내는 건 아닐까. 멋대로 이어지는 상상은 꼬리를 물고, 형상 없는 공포를 한층 거대하게 키운다.

검게 물든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디선가 영화의 삽입곡이었던 'Midnight, The Stars and You' 가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몸서리를 치며 카나데는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참고 다시 잠을 청한다’ 는 어중간한 해결책이 통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 나이가 되어서 침대에 지도를 그리게 된다면 그만큼 비참한 일도 달리 없을 터. 몇 차례 심호흡을 하고서 카나데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 정말로 간단한 일 아닌가. 침대에서 일어나, 더듬더듬 조심스레 문까지 다가간 뒤,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서, 물론 조명이 꺼져있는 탓에 엄청나게 어두컴컴하겠지만! 복도 전등의 스위치는 벽을 더듬으며 찾으면 되니까. 그런 다음, 화장실에 다녀오면 되는 거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다. 발이 움직이지 않아서, 카나데는 망연히 앉은 자리를 지키고만 있었다. 유치원에 다니는 꼬마도 혼자 해낼 수 있을 일을 반복해서 마음 속으로 시뮬레이션 하고 있으면, 중간중간 불길한 상상이 툭 튀어올라 얼마 안되는 용기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하나 둘 셋 하고 일어서자. 그렇게 단호하게 결심하고 셋을 센 다음, 엉덩이를 살짝 들었다가 다시 주저앉으며 카나데는 스스로에게 깊은 실망감을 느꼈다. 이 바보. 고작 무서운 영화를 봤단 걸로 혼자 화장실도 가지 못하고 있다니.

“......카나데?”

“히익!”

REDRUM, REDRUM, REDRUM, Huh. 살인귀의 중얼거림이 귓가에 닿은 것마냥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깨를 움찔거렸다가, 카나데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침대의 곁에서 누군가가 상체를 일으키는 실루엣이 보였다. 조명이 없기에 흐릿한 윤곽만이 보일 뿐이지만 상대가 누구인지는, 카나데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를 인지하는 순간 막막하게 차올랐던 두려움이 한순간 가라앉는다. 망망대해에서 등대를 발견한 듯한, 강렬한 안도감.

“미안, 깨웠어?”

“......뭐하고 있어?”

“그게, 그냥......”

“......”

어둠 속이라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지만, 아마도 뚱한 눈길이 이쪽을 향하고 있으리라. 무안함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카나데는 머뭇거렸다. 솔직하게 이유를 말하기에는 아무래도 부끄러웠다. 어린애 같은 문제로 끙끙 앓고 있었단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하고, 그녀가 다시 잠들면 조용히 화장실에 다녀와야겠다. 생각을 정리한 카나데가 말을 꺼내려고 한 순간이었다.

“......화장실에 가고 싶은 거지?”

“어엇......”

“같이 가자.”

그녀가 먼저 침대에서 일어선다. 한 차례 쭉 기지개를 켜고는, 침대 위를 더듬어 카나데의 손을 찾아내 꼭 움켜쥔다. 살며시 이끄는 손길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뒤 카나데는 주춤주춤 걸어나갔다. 달칵, 눌리는 소리와 함께 한순간에 어둡던 침실에 빛이 가득 흘러넘쳤다.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가, 간신히 빛에 적응한 다음 실눈을 뜨면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 아사히나 마후유의 모습이 시야에 잡힌다. 어딘가 새침한 기색이 엿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다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마후유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겁쟁이.”

“윽......”

속삭이는 목소리로 놀리는 말을 던지고는 마후유는 방문을 열었다. 카나데를 괴롭히던 불길한 상상과는 달리, 문 너머로는 항상 생활하던 공간이 모습을 보였다. 한쪽으로는 부엌과 이어지는 거실이 자리잡고 있다. 몇 시간 전에 거실의 소파에 함께 나란히 앉아 예의 영화를 봤었지. 다소 무서운 장면이 나올 때마다 숨 삼키는 소리를 내며 놀라는 카나데를 빤히 쳐다보던 마후유였으니, 지금과 같은 상황이 생길 거란 사실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거실이 있는 반대쪽으로는, 짧게 뻗은 복도의 끝에 목적지인 화장실이 있다.

기나긴 고뇌의 순간은 고난을 극복한 이후에 돌아보면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하찮게 느껴진다고 했던가. 화장실의 밝은 조명 아래에서 오늘 밤의 시련을 끝맺은 다음, 카나데는 길게 한숨을 쏟아내었다. 환한 공간에 들어서고 나니, 조금 전까지 침대에 갇혀 괴로워하던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돌이켜볼 여유가 생겨 아가씨는 민망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거울 너머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여자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아직도 밤에 혼자 화장실에 가는 게 무섭니? 겁쟁이 요이사키 카나데.

화장실을 나서면 복도에 가만히 서 있는 마후유가 보였다. 복도 천장 무드등의 은은한 불빛을 멍하게 올려다보는 모습에는 졸음기가 그리 엿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잠을 깨우고 말았나보네. 미안한 마음을 품으며 카나데는 연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미안. 괜한 걸로 깨웠네.”

“그러네. 시간도 새벽 3시. 어중간한 시각이야.”

“미, 미안......”

“......후후, 그래도 다행일까. 같이 살지 않았다면, 카나데, 아침이 될 때까지 혼자 무서워하고 있었겠지.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한 채로.”

“그, 렇지는 않았겠지만......”

‘정말?’ 이라고 묻는 것마냥 마후유가 고개를 쓱 들이밀었다. 뒤로 엉거주춤하게 물러나며 카나데는 ‘만약’ 의 경우에 대해 상상해보았다. 만약 요이사키 카나데가 아사히나 마후유와 함께 살아가는 지금을 선택하지 않았었다면. 그랬다면, 어쩌다 무서운 영화를 보게 되어버린 날 밤에, 정말로 한참 동안 머뭇거리기만 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애시당초, 그 영화를 보기는 했을지. 대충 가벼운 방식으로 끼니를 해결한 다음 혼자만의 공간에 잠겨들었을 게 뻔하다. 삽입곡을 한번 들어보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영화를 틀더라도 곁에서 함께 봐줄 이가 있기에, 편안한 기분으로 혼자서는 하지 않을 시도를 해볼 수 있었던 거니까.

“그럼, 다시 자러 가자.”

“다시 잘 수 있겠어? 불 꺼도 무섭지 않아?”

“그렇게까지 겁내는 거 아니거든. 정말, 그냥 조금 신경 쓰였을 뿐인데.”

“......딱히 잘 기분이 들지 않아. 카나데 때문에 완전히 잠이 깨버렸어.”

“그래도 지금 안 자면......”

“내일, 어차피 일정 없잖아. 늦게 일어나도, 문제 없고.”

잠을 깨웠으니, 카나데가 확실히 책임져.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옅게 웃음기가 묻어난다. 그래서야 곤란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카나데는 허리를 감아오는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가볍게 밀어붙이는 몸짓에, 부드럽게 끌어안는 행동으로 답한다. 벽을 따라 더듬어나가던 손이 조명의 스위치를 건드렸다. 새벽 3시의 어둠 속으로 되돌아가는 공간이 더는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야, 지금부터의 장르는 연인들만의 로맨스일 거니까.

* Untitled 님께서 글 내용에 맞춰 일러스트를 주셨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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