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글 6

프로젝트 세카이 마후유 x 카나데

“이거 봐, 요즘 입소문 탔다는 배스밤이라는데 물에 넣으면 엄청 예쁜 색이 나온대. 노을 하늘에 몸을 담그는 기분이라나.”

“노을이라기보다는 홍차물을 담아둔 거 같은데.”

“감수성 없네. 노을이야, 노을! 무슨 아저씨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딱 봐도 예쁘잖아.”

“투명하게 맑은 느낌이긴 하네.”

“괜히 인기 많은 게 아니겠지. 보기에 산뜻한 기분이 들어야 목욕한 다음에도 개운한 거야. 아사히나가 보기엔 어때? 예쁘지?”

어떤 대답을 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빙긋 웃으며 ‘응, 예쁘네’ 하며, 어디까지나 흐름에 어울려주는 시늉이나 했겠지만. 다만 이쪽의 반응을 요구하며 들이밀어진 휴대폰 화면 속 광고 전단의 내용은 어렴풋하게 인상에 남는다. 인형놀이의 소품마냥 아기자기하고 동글동글하게 생긴 하얀 욕조 안으로 작게 노을이 찰랑이고 있었다. 옅게 레몬빛 필터가 씌워진 사진 아래로 간결한 문구가 필기체로 말한다. 욕조 속, 차츰 저물어가는 하늘에 잠겨.

아사히나 마후유는 물욕에 간단히 넘어가 어쩌지 못할 충동에 사로잡히는 부류의 인간은 아니다. 오히려 그와 같은 충동이 부족한 편이라고 해야하겠지. 대저 물욕이란 그를 가지게 된 자신이 얼마나 행복할지를 상상하며 품는 기대감에서 피어나는 것. 기대감이 없다면 물욕도, 욕망 그 자체도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추지 못하는 법이다. 아가씨는 기대감을 품는 일에 서글플 정도로 서툰 편이었다. 무언가를 얻는 걸로 행복해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상상하는 게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진 건 언제부터였을까.

그러니 어쩌다 마주친 진열대에 시선이 머물게 되었던 건 어디까지나 같은 반 아이들이 나누던 대화가 생각났기에, 언뜻 보았던 사진 속 광경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욕조 속 하늘 시리즈>, <새벽녘, 맑은 오후, 노을, 밤하늘>. 예쁘게 포장된 입욕제들이 채워진 진열대 위로 반짝이는 효과가 들어간 판넬이 시선을 붙든다. 노을만 있는 게 아니었구나. 새롭게 알게된 사실에 소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마후유, 뭘 보고 있는 거니?”

저도 모르게 긴장하여 흠칫 어깨를 떨어버린다. 딱히 문제될 일을 한 건 아니지? 반사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보고는, 아가씨는 유순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입욕제들로 가득한 진열대를 한 차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가, 상대는 다시금 마후유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무엇을, 무슨 이유로 보고 있었는가. 질문을 받았다면, 대답을 해야만 한다. 한 차례 발표를 앞두었을 때마냥 호흡을 가다듬은 뒤, 마후유는 밝은 어조로 이야기를 꺼냈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새로 나온 입욕제에 대해 말했었거든요. 색이 예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마침 팔고 있길래 어떤 걸까 궁금했어요.”

“그랬구나. 이렇게 따로 코너까지 마련해두다니,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을만하네.”

딸의 이야기를 듣고는, 아사히나 여사는 진열대 쪽을 흘깃거렸다. ‘호평 판매 중’ 이라 적혀있는 판넬이 유독 눈에 밟히는 듯 눈길을 주다가, 작게 코웃음치며 고개를 돌린다. 하여간 애들을 상대로 하는 상술이란. 이런 걸 좋아하는 애들이 꼭 있기는 하지. 어련히 알만하다는 듯 중얼거리고는 어깨를 으쓱거린다.

“다들 오랜 시간 앉아서 공부하느라 이래저래 지칠 거니까, 이런 제품에도 관심을 많이들 가지겠구나.”

“그게, 그럴 거 같아요.”

“나쁘지 않구나. 그렇지만, 그런 만큼 피로 회복에 효과가 좋은 물건을 써야하지 않을까. 엄마가 보기엔 이 제품은 그리 실용적이진 않을 거 같네. 불필요하게 색소 덩어리만 잔뜩 들어가서, 물감이랑 다를 게 없지.”

“아......”

“별 생각없이 마냥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런 건 보통 싸구려란다. 보기에 화려할 뿐 실속은 없지. 제대로 도움이 되는 건 이런 일반 매장이 아니라 전문점을 찾아야만 해. 마후유에게 정말 필요하다면 엄마는, 보다 도움이 되는 좋은 걸로 골라주고 싶네.”

입술이 끝부터 말라드는 기분에 마후유는 침을 삼켰다. 딱히 실용적인 용도로 입욕제에 관심을 보였던 건 아니었다고, 저걸 사용하면 정말로 사진에 나왔던 그대로 욕조 속에 노을이 번질지 약간의 호기심을 가졌을 뿐이었다고 말하는 건 이제와서 무리다. 수준 떨어지는 불필요한 주제로 의미없이 수다 떨기나 좋아하는 애들은 가급적 멀리하라고, 언젠가 주의를 들은 적이 있었음을 아가씨는 떠올렸다. 수준이 떨어진단 건 교양이 없다는 의미였던가. 교양없게 행동하는 딸로 보여서는 안될 일이다. ‘싸구려’ 라는 표현에 담긴 못마땅함을 감지하고는 마후유는 재차 마른 침을 삼켰다.

“여러 가지로 생각해주셔서 기뻐요. 그럼, 필요하게 되면 말씀드릴게요.”

“그래, 그렇게 하렴.”

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사는 잠시 멈췄던 걸음을 다시금 내딛었다. 어머니의 곁에 보폭을 맞춰 따라붙고는, 더는 괜한 곳에 시선을 주는 일이 없게끔 마후유는 의식적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아직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마후유도 그 나이 아이답게 원하는 걸 사달라고 부모를 졸랐던 적이 없진 않았다. 맘처럼 되지 않는다고 우는 소리를 내면 부모의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이 한순간 번졌기에 차마 그렇게는 행동하지 못했지만, 조심스럽게 원하는 게 있다고 말을 꺼내면 원하는 인형과 그림책을 선물받는 일 정도는 가능했으니. 일단은 아이에게 사줄만한 물건으로 부모가 납득을 했기에 어렸던 마후유는 털이 폭신폭신한 토끼 인형을 끌어안은 채 좋아하는 동화책을 읽을 수 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규칙이 바뀌어버린다. 초등학생이 된 마후유가 또래들과 비교해 한층 어른스럽기를 부모는 원했다. 어른스러운 아이는 인형 같은 장난감에 집착하지 않고, 글자보다 그림이 더 많은 책을 찾지도 않을 터였다. 새로 동화책을 사고 싶어하는 딸에게 부모는 대신 학습 도서 전집을 권했다. 어린애 눈높이에 맞는 유치한 이야기들로 채워진 동화책보다 이해하기 쉽게 간단한 상식들로 채워진 학습 도서가 마후유에게 훨씬 도움이 될 거라고. 다소 어려운 책도 일찍부터 읽을 수 있어야 훗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부모의 설득은 집요하면서도 무거웠다. 어린 아이의 입장에서 선택권은 애시당초 없는 셈이었다.

부모의 기대와 맞지 않는 소망은 그렇게 언제나, 일방적으로 설득당했다. 같은 나이대의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화제 삼는 흔하면서 일상적인 욕망들은 수준 낮은 관심사로 치부되었다. 부모는 딸에게 많은 것을 해주고 싶어했으나, 어디까지나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애정을 증명하길 원했다. 마후유가 받을 수 있는 선물이 항상 ‘유의미’ 한 형태가 되는 건 필연적이었다. 입학 선물로 새 책가방, 생일 선물로 전자 사전, 새 학기 선물로 만년필 세트, 그리고 다시금 입학 선물로 손목시계.

친구들에게서 받는 선물들도 가치 평가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생일을 맞아 자잘한 장신구, 장난감 따위의 선물을 받아 그를 챙겨온 날이면, 그를 본 아사히나 여사는 어딘가 불편한 표정을 짓고는 하였다. 말로는 딸의 생일을 챙겨준 친구들의 마음이 고맙다고 했지만, 교양없는 애들이 딸의 친구로 행세한단 사실이 여사는 지독하게도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가끔씩 대청소를 할 때마다, ‘필요없는 건 버려도 괜찮겠니?’ 라는 말과 함께 그때의 선물들이 하나둘 모습을 감추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 따님이랑 같이 시장 보시는 중이신가봐요. 따님이 어머님을 쏙 빼닮았네.”

묵직해진 장바구니를 들고 매장의 계산대에 도착했을 때, 붙임성 좋게 보이는 점원이 살갑게 이야기를 건네왔다. 기쁜 듯 웃으며 대화를 받아주는 어머니의 곁에서 착하고 의젓한 딸에 어울리게 생긋 웃는 얼굴을 지어보이며, 마후유는 괜한 생각들을 머리에서 지워냈다. 가슴이 괴롭게 안타까울 일은, 딱히 무엇도 없었다.


둘이서 시장을 보는 건 이번이 세 번째였다. 하염없이 비가 쏟아졌던 날은, 한참 눈물을 흘린 탓에 지쳐 잠든 이를 남겨두고 그 아이 홀로 당장 필요할 물건들을 구하러 가까운 거리의 편의점을 들렀던 터였다. 비가 그친 다음 날, 짧은 기간이어도 생활을 위해 필요한 물건들은 생각 외로 많았고, 소녀들은 처음으로 같이 인근 매장을 방문했었다. 그 아이의 집에 머무는 기간이 ‘당분간’ 으로 어떻게든 확정되었던 날에는, 그에 맞춰 필요한 물건들을 조달하기 위해 두 번째 외출을 하였다. ‘마후유에게 필요할 거니까’ 란 말과 함께, 비상시를 대비해 모아뒀다는 돈을 꺼내 의자와 헤드셋을 구매하는 그 아이의 곁에서 마후유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는, 세 번째. 일상적인 소비품을 챙기기 위해 시장을 보는 걸로는 처음이다. 생활에 필요로 하는 품목의 가짓수가 몇 없고, 그마저도 인터넷을 통해 배송 주문을 하는데 익숙해진 아이에게는 장바구니를 챙겨들고 시장을 보는 게 다소 어색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함께 외출한단 점은 마냥 좋은지, 같이 시장 다녀오지 않겠느냐 말을 꺼내자 곧바로 곁에 따라붙었지만. 아직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대와 혹여나 만날 일이 없게끔 인근 주민들만이 이용할법한 지역 매장을 방문하느라 조금 멀리 걷게 되어서, 매장 입구에 도착했을 때에는 상정했던 것보다 조금 더 늦은 시간이 되어있었다.

일단은 식료품 코너로. 카레로 괜찮을까? 묻는 그녀에게 마후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도 식단이 아침 저녁으로 카레였다는 사실을 굳이 상기시킬 필요는 없었다.

가사대행 업무를 맡아주는 아이가 요이사키 가에 찾아올 때마다 넉넉하게 요리를 해두고 가긴 하지만, 신선도를 생각한다면 만들어둔 음식을 이틀 이상 남겨둘 수는 없었다. 다음 가사대행 일자까지는 알아서 식사를 챙겨야만 하였다. 그 사이에 남겨지는 공백을 지금껏 요이사키 카나데는 컵라면과 에너지 바, 에너지 드링크, 그리고 또다른 컵라면 따위로 해결해왔던 터였다. 자기 혼자 끼니를 해결하는 건 그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곁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마후유가 건강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으니까. 제법 진지한 얼굴로 선언했던가.

진지한 얼굴로 선언한다고 해서 지금껏 제대로 요리를 한 적 없이 살아왔다는 과거가 바뀌지는 않는다. 마음만 앞서 마후유에게 ‘건강한’ 식단을 챙겨주려는 카나데의 시도는 식재료의 탄내가 얼마나 오래 부엌에 남을 수 있는지를 확인하게 되는 결과로 끝났다. 물을 담아둔 냄비를 옮기다 엎지르기도 하고, 껍질을 깔끔하게 벗겨내지 않은 양파를 썰다 미끄러진 칼에 손을 다칠 뻔하기도 한다. 보다못한 마후유가 가세하여 재료 손질을 도운 덕분에, 적어도 카레라이스 정도는 그럴듯하게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후유도, 카나데도, 같은 식단이 반복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니 고형 카레를 넉넉하게 3통 집어들어 담는다. 요리용으로 미리 채썰어둔 야채들을 담아둔 묶음과, 용도에 맞게 가공된 육류 팩도 챙긴다. 식탐이 워낙에 없는 탓에, 재료를 고르는 과정은 극히 담백하게 진행되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레시피에 적혀있는 내용만큼만 챙기는 걸로 충분하니.

“이 호박. 엄청 크네.”

“그러게.”

담백하게 시장을 본다는 게, 중간에 다른 길로 빠지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연약한 팔로는 도저히 들어올릴 수 없을 듯 커다란 호박이 길목에 놓여있어 그를 구경하느라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안내방송이 나오던 스피커에서 처음 듣는 CM송이 흘러나와 멈칫 자리에 멈춰서기도 한다. 호박, 카레에 넣고 싶냐고 묻는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내젓기도 하고, 생소한 멜로디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빤히 바라보는 눈길을 알아차리고 멋쩍은 표정을 짓기도 한다. 시식코너마다 걸음을 멈추고, 자신은 먹지 않고 하나씩 카나데의 입에 넣어준다. 고작 식료품 코너를 돌아보는데에만 제법 긴 시간이 흘러간다.

“다음 번엔, 카레 말고 다른 레시피도 시도해볼게.”

“딱히. 계속 카레로도 상관없어.”

“그래도, 다양하게 시도하다보면 좀 더 마후유의 마음에 드는 음식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무엇을 입에 담아도 매한가지로 밋밋함 밖에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 있어, 조금이나마 더 맛있다 느끼는 음식을 찾을 수도 있으니 계속해서 노력해보겠다고- 그와 같은 시도가 무의미하지 않을 거라고 확언해주는 사람의 존재란. 물끄러미 곁을 돌아본다. 눈이 마주치자 그 아이는 쑥스러워하는 표정으로 헤헤 웃음을 지었다. 일단은, 혼자서도 요리할 수 있는 기본기부터 갖춰야하는 게 아닐까. 괜히 한 차례 쿡 찌르는 말을 꺼내면 곧바로 풀죽은 얼굴이 되어버리지만.

“......응?”

식료품 코너를 나서면, 이어지는 건 생활용품 코너다. 칫솔과 더불어 여분의 치약, 티슈, 샴푸 같은 건 저번에 사뒀던 터였다. 가볍게 지나치면 되는 구간에서 마후유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어딘가 기억에 남아있는, 익숙한 모양새의 판넬들이 붙은 진열대가 있었다. ‘호평 판매 중’ 이란 문구가 ‘스테디셀러!’ 란 표현으로 바뀌고, 넘칠 듯 채워져 있던 제품들이 드문드문 몇 개만 남아있다는 게 달라졌을 뿐.

스테디셀러란 홍보문이 붙어있긴 하지만, 이제와서는 딱히 주력으로 밀어주는 인기 상품은 아닌 모양이었다. 상품과 맞춤으로 디자인된 진열대도 예전에 쓰던 걸 버리지는 않고 계속 쓸 뿐인지 구석구석 먼지가 끼어있었다. 몇 개 되지 않게 남아있는 재고가 모두 팔리면 눈에 띄는 이 진열대도 쓰임새를 다하고 퇴직하게 되는 걸지도 모를 일이다.

“......”

딱히, 입욕제를 필요로 하는 건 아니다. 애시당초 따뜻한 물을 채운 욕조에 들어가는 걸로 전신에 들러붙은 무력감과도 같은 피로가 풀어지는 편리한 경험을 해본 적도 없다. 반신욕만으로 가벼운 기분이 될 수 있다니, 그게 가능한 사람들은 얼마나 마음 편하고 낭만적인 인생을 사는 건지. 다만 욕망이라고 칭하기도 애매한 호기심이 마음을 간지럽히고 있을 뿐이다. 채워놓은 물이 정말로 하늘의 풍경을 담을 수 있을지 확인해보고 싶다는, 유치한 궁금증.

“입욕제구나. 마후유, 필요해?”

“......딱히. 써본 적 없어. 그냥......”

여태 사용해본 적도 없고 그래서 필요성조차 느끼지 않는 물건을 사는 건, 결국엔 낭비일 뿐이겠지. 마음 속에 있는 철없는 꼬마가 괜히 떼를 쓰고 있을 뿐이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후유는 뒷말을 흐렸다. 그냥, 정말로 다른 근거를 대지도 못하고- 그냥. 입소문을 전해들었던 날 품었던 사소한 호기심을 채우고 싶다는, 오로지 그 억지가 이유일 뿐인데.

흐리던 말끝을 채우지 못하고 말이 없어진 소녀를, 곁에 있는 소녀는 살며시 바라본다. 침묵으로 늘어지는 머뭇거림에 어떠한 재촉도 하지 않는다. 시선을 돌려 다소 뿌옇게 색이 바랜 판넬들을 카나데는 바라보았다. 새벽녘, 맑은 오후, 노을, 밤하늘. 욕조에 담긴 네 개의 하늘이 사진에 담겨 각각의 선반 위로 붙어있었다.

“예쁘다. 정말 욕조 속에 하늘이 담긴 거 같네.”

“......”

“있지, 마후유는 저 중에 뭐가 제일 마음에 들어?”

의견을 묻는 말은, 그를 말하는 이가 카나데라는 점에서 이제는 익숙하다. 어떻게 느꼈는지, 무엇을 떠올렸는지, 어느 쪽이 더 좋은지. 대부분의 사람들, 나아가 피를 나눈 가족들조차 신경쓰지 않는 아사히나 마후유의 생각과 기분에 관심을 가지고는 이야기를 경청해준다. 말해봤자 딱히 의미없을 거라 스스로 예단하게 되는 의견조차, 그녀라면 들어주겠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주며.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지는 공허한 긍정이 아닌, 차근차근 쌓아올린 공감을 통해 이루어지는 존중.

그리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고, 솔직하게 말해버려도 카나데라면 비웃지 않을 터. 단지 호기심을 품었을 뿐이라는 고백도 차분하게 들어주리라. 그렇게 생각하면, 안심하게 되어버린다. 이유 모를 불안감에 흐리던 뒷말이 무엇이었는지 조금씩 떠올릴 수 있게 된다.

“......사진만 봐서는 모르겠어. 써본 적이 없었으니까 실제로는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되지 않아서. 그래서, 궁금했어.”

“그랬구나. 나도, 입욕제는 여태 써본 적이 없었으니까, 상상이 잘 되지 않네.”

“응......”

“그럼, 이번 기회에 하나 사볼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정말 사진처럼 예쁠지 나도 궁금해졌어.”

그래도 되는 걸까. 자신의 마음 속에 남아있는, 떼를 쓰는 어린 꼬마의 요구를 들어줘도 쓸데없는 낭비가 되는 게 아닌 걸까. 입술을 달싹이다가, 입으로 대답을 전하는 대신 마후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산대의 대기줄에 작게 압축된 노을 하늘을 하나 내려두고는, 아가씨는 묘한 두근거림을 느꼈다. 일과를 마친 뒤 욕조에 몸을 담그는 건 어디까지나 하루를 마치는 절차일 뿐, 그를 기대했던 적은 여태껏 딱히 없었다. 오늘은, 조금 다르다. 카레라이스 재료들로 가득찬 장바구니를 들고 지금 머물고 있는 곳- 그녀의 집으로 돌아가면, 욕조에 따뜻한 물을 가득 받을 계획이었다. 끄트머리까지 차오른 물에 노을 하늘을 채워넣으리라. 찰랑이는 노을 속에 발끝을 담그고.

“카나데.”

“응?”

“입욕제, 같이 쓸 거지?”

하나 밖에 사지 않았으니, 같이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당연한 결론.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사안에 대해, 확인차 작게 물음을 던진다. 계산을 앞두고 지갑을 꺼내들다가, 마후유가 속삭인 말을 듣고는 카나데는 헛숨 삼키는 소리를 내었다. 앞쪽 손님의 계산을 돕고 있던 직원이 무슨 일이 있는지 의아한 얼굴로 이쪽을 돌아본다. 요란하게 소리를 낸 게 부끄러웠는지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새빨갛게 붉어진 얼굴로 카나데는 마후유를 황망히 바라보았다. 길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달아오른 귀가 언뜻 보였다. 노을의 색채로 물든 그 귀가 예쁘다고, 마후유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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