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CP] 꿈꾸는 전기양과 전기양의 꿈 02

나나미 형제 (류스이) 중심 사이버펑크 세계관 날조글

자살 및 자살 방조 / 중독 치사 / 정신질환 / 인간 소모품화 / 신체 훼손과 개조 / 행동 강요와 학대 

상기 요소를 포함한 비윤리/비도덕적 소재가 사용되었으므로 열람에 주의해주세요.

논CP를 의도한 글로, 작중 묘사되는 사랑은 형제애/가족애일 뿐 성애가 아닙니다. 


이튿날 아침 류스이는 SAI를 데리러 본가를 찾았다. 오늘 중이면 언제든 상관없을 터였으나 뒤숭숭한 기분 탓인지 눈이 일찍 떨어졌고, 어차피 할 일이라면 빠르게 해치우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그것을 형이 살던 집에 데려다주고 나면 신경 쓸 일은 없었다. 아버지는 주기적으로 확인하라고 했을 뿐 매일 같이 보라고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생각날 때마다 들러 상태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터였다. 지금까지처럼 자주 연락하고 장기간 만나지 못 했다고 초조해할 까닭은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별채 내 침실 앞에 서자 간헐적인 부스럭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다.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구나. 류스이는 씁쓸해졌다. 저 너머에 있는 게 진짜 형제였더라도 이런 기분이 들었을까? 답은 구태여 끌어내지 않았다. 류스이는 얼굴에 걸린 무표정을 더 단단히 하고 문을 열어젖혔다. 인사치레 없이 할 말은 딱 하나뿐이었다. “가자.” 그렇지만 류스이는 입을 열지 못 했다.

열 수 없었다.

“안녕, 류스이.”

소리내기 전 짧게 숨을 들이마시는 버릇을 포함해, 익숙한 목소리가 고막을 지나 머릿속에 스몄을 때 류스이는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어젯밤부터 아침까지 가슴을 주무르던 감정,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방법, 어떻게든 유지하고 싶었던 평정.

“SAI….”

그리고 결단코 굽히지 않으리라 자신했던 각오.

“미안해, 여기 오기 싫어하는 거 아는데 괜히 나 때문에….”

듣는 상대가 얼이 나간 것도 모른 채, SAI는 중얼거렸다.

“그래도 고마워. 너도 알다시피 나도 본가는 조금… 오래 있고 싶지 않았는데, 빨리 데리러 와줘서 기뻐. 그렇다고는 해도 이렇게 일찍 올 줄은 몰랐지만.”

“…….”

“아침 안 먹었으면 어디라도 들렀다 갈래? 전에 우리 집 근처에 있는 식당 아침 메뉴가 맛있다고 했잖아. 아, 프랑수아가 기다리고 있으려나? 어때, 류스이?”

“…….”

“류스이?”

잇대어지는 마디마디를 귀에 새기지 못 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어떻게 반응할지 판단할 수 없을 뿐이었다. 목소리, 말투, 어조, 표정, 체형, 신장, 버릇, 무엇도 빠짐없이 기억 속 모습 그대로인 형제가 보였다. 단 하나 차이가 있다면 일 년여 전쯤부터 확연하게 짙어진 죽어가는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 그것만이 달랐다. 병세가 짙어지기 전 진정으로 살아있던 SAI가 지금 눈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갑자기 손등 위로 온기가 번졌다. 조심스러우면서도 확연하게 손가락을 얽어오는 행동도 생경하지 않게 겪은 적 있는 것이었다.

“걱정했구나, 류스이….”

적금색 눈 속에 지나칠 정도로 깊은 자책과 애틋함을 안고 올려다보는 얼굴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안.” 그것이 그리 전하고 싶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류스이는 머릿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이건 그저 내 형제를 흉내 낼 뿐인 거짓된 존재라고. 맞대어진 시선 안쪽에는 신경다발 대신 조리개가, 목에는 성대 대신 음성 합성 장치가, 손가락 안에는 뼈마디 대신 무르고 여린 금속재가 차 있을 터였다.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SAI….”

그렇지만.

“보고 싶었어.”

그리움 자체였던 사람이, 죄책감을 부추겨 견딜 수 없게 했던 존재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게 현실이었을 사랑이 바로 여기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보고 싶었어, SAI….”

무덤덤한 목소리 속에는 발화자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가라앉아 있었다. 상대는 절대 몰랐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기분이. 이제 류스이는 다른 말을 쏟고 싶어졌다.

‘미안해, SAI….’

네 죽음을 부정해서 미안해. 너는 내게 행복해지라고 말했는데 나는 너를 배신해서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너에 대한 모든 게 미안해…….

“미안해….”

입에 고였다는 걸 깨달을 새도 없이 소리는 튀어 나갔다.

“괜찮아.”

돌아올 리 없을 답이 돌아왔다.

“지금 여기에 있잖아.”

보일 리 없는 얼굴이 보였다.

요컨대 SAI는 동생이 껄끄러운 본가에 저만 남겨둔 일을 사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터였다. 이윽고 얽었던 손을 빼는 대신 조심스럽게, 한편으로는 친근하게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 속에서 류스이는 확신했다. 진짜 SAI였어도 그처럼 말했으리라는 것을. 죄의식에 짓눌려가는 동생을 가엾게 여겼으리라는 걸 알기 때문에 류스이는 더더욱 죄스러워졌다.

 

SAI는 본인이 과로로 쓰러져 한동안 본가에서 신세를 졌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정신질환 증세를 처음 보인 게 몇 년 전 일인 만큼 스스로 온전하지 못 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나, 지속적인 치료로 상당히 호전되어 일상생활에 큰 문제는 없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판단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당연히 모른 채로 말이다.

그가 밝은 표정을 보일 때마다 류스이는 SAI가 마지막으로 웃었던 게 언제인지, 어떤 식으로 웃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만 생각했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떠오르는 모습은 한정적으로 변해갔다. 퀭한 눈을 반쯤 감은 채 얼빠져 있는 모습, 신경안정제가 가진 부작용으로 깰 줄 모르고 잠만 자는 모습, 실제 몸에는 큰 이상이 없는데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며 갑자기 헐떡거리던 모습만이.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었는데.’

‘괜찮아질 수 있었는데.’

‘만일 그랬다면….’

‘그랬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미련을 품는 것은 저답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류스이는 후회를 멈추지 못 했다. 가장 힘겨울 때는 본능과 이성이 교차하며 현실을 깨닫게 하는 순간이었다. 저것은 SAI가 아니라고 끊임없이 의식하다가도 무심결에 똑같이 여겨버리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 진실이 사고를 강타하고 지울 수 없는 기억 앞에 데려다 놓았다. 매분 매초 불행하게 죽어가다가 스스로 절명을 앞당긴 형제를 발견했던 순간에. 그것은 SAI의 일부를 가졌을 뿐인 모조품에 불과한데 왜 매번 이끌리고 괴로워하길 반복하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고, 정신이 차갑게 식어갈 때쯤이면 류스이는 어김없이 생각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어….’

답하는 것도 늘 같았다.

‘단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거잖아.’

‘SAI를 배반하는 것 같아서.’

‘그를 볼 낯이 없어서.’

‘아닌가?’

남는 것은 그치지 않는 고뇌뿐이었다.

 

그날 류스이는 회사 일을 마치고 사흘 만에 SAI를 찾았다. 부재한 동안 프랑수아에게 대신 SAI가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해달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때마침 집사도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터라 며칠간 그를 혼자 둘 수밖에 없었다. 이때 류스이는 그를 잘 지켜보라는 아버지 명령을 성실하게 따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이제 그런 것은 어쩌든 좋았다.

“SAI, 자고 있나?”

현관에 들어서서 류스이는 자연스레 물었다. 밤이 몰고 온 어둠까지 섞여 집 안이 온통 깜깜했던 탓에 좀체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원격 제어 시스템으로 등을 전부 켤 수도 있었지만, 혹시나 그가 수면 중이라면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기시감이 일기 시작한 것은 그대로 몇 걸음 내디뎠을 때였다. 복도 끝에 있는 작업실에서 은은히 번지는 푸른빛을 보았을 때는 돌연히 걸음이 멈추었다. 그 빛이 모니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판단한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SAI….”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하는 것을 자각하는 것보다 빠르게 류스이는 복도를 달렸다. 몇 보 되지 않는 거리였으나 그사이 온갖 상념이 목을 졸랐다. 생生과 연결된 실이 끊어진 채 의자에 늘어져 있는 형체까지 떠올리고 났을 때는 호흡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SAI!”

류스이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거칠게 문을 열었다. 방에 불을 밝히자 보이는 의자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섯 대나 되는 모니터를 포함해 컴퓨터는 켜져 있었으나 그것을 조작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뺘학….”

희미한 소리는 증폭한 불안을 뚫으며 다가왔다. 깨달았을 때 류스이는 이미 책상 맞은편 붙박이장 문을 밀어 열고 있었다.

“웃….”

난데없이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온 탓인지 한껏 웅크린 자세로 잠들어있던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뒤척였다. 작업복을 입은 채였다면 상의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쓰는 것으로 얼굴을 감추었을지도 몰랐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SAI는 현재 사회 체계를 긍정하는 도시 신봉자가 본다면 불경하다는 말을 내뱉을 법한 무심한 홈웨어 차림이었다. 품이 남는 셔츠 속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작은 가슴을 보았을 때 류스이는 비로소 불안이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으음…. 류스이?”

잠시 뒤 마침내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킨 SAI는, 느릿느릿 마른세수하고서는 동생을 올려다보았다. 눈에는 피곤한 기색이 비쳤으나 지쳤다고 할 정도는 아니고 그저 잠이 깨지 않아 나른한 듯 보였다.

“벽장에는 왜 들어가 있어?”

류스이는 안도가 한숨으로 바뀌어 쏟아지려는 걸 겨우 눌러 삼키고, 낼 수 있는 한 담담한 목소리를 내고자 애쓰며 입을 열었다.

“피곤해서 잠깐 눈 좀 붙이려고….”

쇳소리 섞인 목소리는 벽장을 침실 취급하는 것에 어떠한 이상함도 느끼지 못 한다는 투였다. 그도 그럴 것이 SAI는 어려서부터 벽장을 단순한 수납공간이 아닌 오롯이 혼자서 쓸 수 있는 휴게실 정도로 여기고는 했다. 어른들 몰래 게임을 하거나 간식을 먹을 때 특히 애용했고, 조카들이 괴롭히는 걸 피해 숨는 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좁고 어두워 아늑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멀쩡한 침대를 두고 그 안에서 자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지금처럼, 또 떠나기 얼마 전처럼.

그날은 현관부터 복도 끝까지 온 집 안에 불이 켜져 있었고, 바로 전날에도 SAI를 만나러 들렀던 때였다. 어제 만난 SAI는 다소 입맛이 없어 보였던 것을 제외하면 병세가 나날이 심각해지는 한중간인 것치고는 상태가 나쁘지 않아, 류스이도 드물게 번뇌 없이 그를 마주할 수 있었다. 아무리 식욕이 없어도 인근에 있는 가게에서 파는 커리만큼은 꿀떡꿀떡 잘 먹던 형이었기 때문에 저녁거리도 포장해 온 참이었다.

“SAI, 있어?”

문제는 집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디를 몇 번이고 두리번거려도 검은 머리털 한 뭉치도 보이지 않았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까스로 가닥을 잡은 것은 작업실 모니터만 꺼져있을 뿐 본체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고, 확신은 책상 맞은편 붙박이장 미닫이문 틈으로 눈에 익은 옷소매가 끼어있는 것을 발견한 무렵에 찾아왔다. 조심스럽게 열어젖힌 문 안쪽에 화석처럼 웅크린 채 잠들어있는 모습을 발견한 순간 기분이 어떠했는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뺘하….”

난데없이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온 탓인지 SAI는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뒤척였다. 그러고는 무의식 속에서 얼굴을 가릴 만한 것을 찾는지 가느다란 손으로 허리께를 더듬다가 이윽고 찬찬히 눈을 떴다. 류스이는 형의 잠을 깨운 것이 안도감이 만들어낸 제 시선인지, 한 손에 쥔 독특하게 맛있는 음식 냄새인지 알지 못 했다. 적금색 눈동자를 비추며 동생과 시선을 교환하는 것, 오뚝하게 솟은 코를 미묘하게 들썩거리는 것, SAI는 두 가지를 동시에 행했고 잠시 뒤 입술을 우물거렸다.

“류스이….”

“일어났나.”

“응.”

그가 저를 우선으로 여겨주었을 때 류스이는 뿌듯한 기분을 감추지 못 하고 빙그레 웃었다. 경쟁 상대가 겨우 음식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짧은 단잠으로는 해소할 수 없을 노곤함과 눈 밑에 짙게 발린 어둠은 지울 수 없지만, 온전한 정신으로 저와 마주 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뻐 견딜 수 없었다.

“벽장에는 왜 들어가 있어?”

그래서 무심결에 물었는지 모른다. 답은 알고 있었으나 아프지 않은 그 목소리를 더 듣고 싶어서. “피곤해서 잠깐만 쉬려고.” 그것이 절망을 앞당기는 스위치가 될 거라고는 당연히 예상하지 못 했고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총에 맞은 뒤였다.

“그건, 네가 술래니까.”

SAI는 동생 얼굴에 핏기가 일순에 가신 것도 모른 채 덧붙였다.

“숨바꼭질은 들키지 않고 숨는 게 중요하니까, 여기만 한 데가 없는걸.”

“…….”

“왜 그래, 류스이? 숨바꼭질 재미없어졌어?”

SAI는 피로한 눈을 느리게 끔뻑거렸다. 동생이 답하지 않자 직전보다는 조금 더 빠르게 깜박이고는 “하여간 무엇이든 빨리 질려한다니까….” 도리가 없다는 투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쯤에 이르자 류스이는 SAI가 저를 몹시도 기이하다는 기색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지만, 마땅히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안도의 파도를 따라 떠올랐던 웃음기는 경악과 혼란에 침몰한 지 오래였고 남은 것은 낙담이라 이름 붙은 잔해뿐이었다. 이제는 대놓고 의아스럽게 고개를 기웃거리던 SAI가 벽장에서 기어 나와 눈높이를 보다 가까이 해주었을 때, 류스이는 미세하게 떨리던 입술을 간신히 벌려 소리 낼 수 있었다.

“SAI, 내가 몇 살이지?”

할 수 있는 한 담담하게 말하고자 애썼으나 말에 담긴 내용도, 상황도, 기분도, 전부 평정을 해쳤다.

“아직 생일 안 지났으니까 5살. 아무리 네가 싫어도 그 정도는 기억한다고.”

오히려 차분한 것은 SAI 쪽이었다.

“내 집사 이름은?”

비참해할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류스이는 부리나케 질문을 이었다.

“뭐?”

“나하고 같이 사는 집사 이름, 알잖아.”

“…….”

SAI는 당황스레 눈꺼풀을 떨 뿐 대답하지 못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프랑수아와 만난 것은 10대 중반, 그는 10대 후반일 무렵이었으니. 지금 정신으로는 모르는 게 당연했다. “집사라니, 무슨….” 곧이어 귀에 박힌 중얼거리는 소리는 판단에 근거를 더하는 동시에 심중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더 큰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지금 들고 있는 거….”

나른한 눈길은 이제 형제가 오른손에 쥐고 있는 봉투로 옮겨갔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류스이의 내면에서는 두 가지 감정이 상충했다. 보나 마나 기억하지 못 할 거라는 낙담과 그래도 혹시나 모른다는 희망이. 둘 중 무엇을 붙들고 싶은지는 고민할 거리도 안 되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그가 가장 선호하는─어려서부터 좋아했고, 짧은 입으로도 잘 먹을 수 있으며, 모친과 추억도 서려 있다는─음식이니만큼 어느 정도 자신감도 있었다. 강하게 바라면 바랄수록 돌아오는 절망 역시 커질 거라는 사실은 애석하게도 몸소 실감하고 난 뒤에나 알아차릴 수 있었고 말이다.

“냄새나는 거 가지고 들어오면 형님들이 싫어해. 알잖아….”

SAI는 꾸지람치고는 지나치게 날카로운 소리를 들었던 어느 한때를 회상하기라도 하는지 어깨를 감싸며 몸서리쳤다.

“얼른 밖에 내놓고 와. 아니면 버리든지.”

남은 말이 귓구멍을 쑤시는 것과 동시에 류스이는 딱, 하고 짤막하면서도 명확한 소리가 어딘가에서 울려 퍼지는 것을 들었다. 버릇처럼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흡사한 그것은 무언가가 단숨에 끊어지는 소리고, 무언가는 마지막 동아줄 같던 바람이며, 어딘가는 다름 아닌 제 가슴속이라는 것을 파악하는 데는 찰나 같은 시간만 걸렸다. 그때 류스이는 이성이고 무엇이고 감정을 실어 소리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어제는 멀쩡했잖아! 내가 누군지, 네가 누군지, 여기가 어디고 무얼 하고 있는지 전부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잖아! 왜 하루도 안 지나 다시 병이 든 건데? 왜 더 심각해졌다고 느끼게 하는 건데? 왜 잠깐도, 겨우 잠시도, 내가 온전한 너와 시간을 보낼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

종국에는 그러한 충동조차 빠르게 사그라졌지만 말이다.

“아, 일….”

동생이 어떤 심경인지 알 턱이 없을 SAI는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류스이를 영문을 모르겠다는 것처럼 바라보다가, 켜져 있는 컴퓨터를 발견하고는 내려놓을 수 없는 의무를 행하러 움직였다. 책상 앞에 앉아 모니터 화면을 밝히는 행동은 지체가 없었고 자각도 없어 보였다. 조금 전까지 무얼 하고 있었는지, 누구와 대화하고 있었는지, 지금 몸 상태─서서히 죽어가고 있는─가 어떤지, 무엇이 저를 이렇게 만든 건지 의식할 능력을 잃은 채 SAI는 기계처럼 움직일 뿐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나 SAI는 그 무렵에 이미 전자 드러그에 손을 대고 있었고, 일시적 기억 퇴보는 전자적 중독물질이 가지고 있는 주된 부작용 중 하나였다. 다만 오랫동안 앓아 온 정신불안이 증세를 악화한 거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고, 빠르게 나아질 방도가 없다는 점에서 류스이는 원망을 억누를 수 없었다. SAI가 그렇게 되도록 기대하고 의도했으며 끝내는 완전히 망가뜨린 세계를.

“SAI….”

망가진 감각 속에서 혈육의 목소리조차 듣지 못 해, 절대 돌아보지 않는 등에서 어떤 절망을 느꼈는지─

“아, 일….”

류스이는 되새길 수 없었다. 되새겨지도록 저 자신을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만해.”

저를 지나쳐가려는 팔목을 낚아채는 행동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렇다기보다는 의식 없이 행한 것이었다.

“그만해, SAI.”

류스이는 계속해서 말했다.

“오늘 할 만큼 했잖아, 그만해.”

“그렇지만….”

당황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강권에 SAI는 마땅히 머뭇거리는 낌새를 내비쳤다. 그라고 해서 작은 방 안에 갇혀 일만 하고 싶지는 않을 터였다. 그 이상으로 두려운 게 없었더라면 “알았어….” 하고 마지못해서라도 대답했을지 몰랐다. 아버지, 가족, 회사가 거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 한다고 하는 가정은 또다시 SAI를 죽이려 들었다. 원래 SAI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 SAI 역시 내려놓을 수 없는 의무에 짓눌려가고 있었고, 류스이는 두 번 다시 같은 일을 겪을 수 없었다.

“하고 싶은 걸 말해봐.”

“뭐?”

“지금 하고 싶은 일을 말해봐. 사소한 거라도 좋아.”

류스이는 책상 앞에 놓인 의자를 당겨와 SAI를 앉히고, 저를 바라보도록 돌린 뒤 팔목을 놓아주었다. SAI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연달아 벌어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리송한 걸 넘어 난해하다는 기색까지 어렸지만, 동생이 건넨 질문에 순순히 답변하기는 했다.

“몇 달 전에 사놓고 아직 못 한 게임 하고 싶어.”

“그리고?”

“7-E1번 블록에 있는 커리 가게에 가고 싶고….”

“그리고?”

“너하고 프랑수아하고 셋이 집에서 영화 보고 싶어. 이왕이면 공포 영화로. 보고 싶은 게 있는데, 혼자서는 무서워서….”

그 작은 가슴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서운 장면이라도 상상했는지 SAI는 어깨를 살짝 움츠리다가, 행여 동생이 비웃지는 않을지 눈치를 살폈다. SAI가 공포 장르에 강하지 않다는 건 어려서부터 잘 아는 사실이었지만, 이제는 그가 겁이 많다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류스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또, 없어?”

“또, 음,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싶어. 지금도 그렇게 하고는 있지만, 내 말은….”

SAI는 말을 멈추었다. 할 말이 없어서, 더 말하고 싶지 않아서, 이 같은 이유로 멈춘 것이 아님을 화자도 청자도 깨닫고 있었다. 나나미 이름을 가진 이들에게 있어서 반항으로 여겨질 만한 말을 언행을 하는 것은 신성모독과 같아,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다는 사실을 문득 상기한 탓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류스이는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포기하지 못 했다고 하기에는 내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취급하고, 포기했다고 하기에는 능력을 높게 사 자주 불러다 쓰는 계륵으로 여기고 있는 현실을.

“지금부터 하나씩 하자.”

그러지 않았다면 이런 제안을 건네고 한껏 휘둥그레진 채 끔뻑거리는 눈동자를 볼 수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류스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SAI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엿보였다. 류스이는 그 심정을 부추기고 싶기라도 한 듯 허리를 굽히고 입꼬리를 당기며 속삭였다.

“우선 나가서 저녁을 먹은 다음 게임이든 영화 시청이든 하고 싶은 걸 하자고. 프랑수아에게 연락해서 오라고 할 테니. 간식도 만들어 오라고 하는 게 좋겠군. 그리고 내킬 때 아무 때나 자. 일어날 때까지 옆에 있어 줄 테니.”

“…….”

“먹고 싶은 거 있어?”

질문과 동시에 휴대전화를 꺼내 드는 손을 멍하니 쫓는 얼굴에서 류스이는 SAI가 이 이상 반문하지 않을 것을 확신했다. 물론 불안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로 커다란 눈망울을 요동치게 했고,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은 내면을 기고 있을 갈등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그렇지만 이조차 괄목할 만한 일이라고 류스이는 생각했다. 오로지 타의에만 따르도록 길러진─그러도록 제조된─존재가 스스로 판단으로 뜻을 결정하는 지금이 류스이에게 얼마나 값지게 다가오는지 어느 누구도 가늠하지 못 할 것이었다.

“지난번에 가져왔던 컵케이크나 도넛….”

웅얼웅얼, 소심하게 내쉬면서도 의사만큼은 명확히 표현하는 말소리에 류스이는 응당 미소 지었다.

“그래, 좋아.”

그러고는 벽장 아래 칸에 떨어져 있던 외출복을 주워 SAI에게 건넸다.

앞서서 방에서 나온 것은, 그쯤에는 불안해하는 낌새가 거의 다 가셨음에도 SAI가 나갈 생각이 없는 것처럼 옷은 입지 않고 저를 빤히 올려다보면서였다. 왜? 류스이는 소리 내어 묻는 대신 고개를 기울였고 SAI는 이제 못마땅하다는 기색이 되었다. 꼭 이런 이상한 상황에서만 눈치가 떨어지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건지, SAI로서는 판단할 수 없었으나 어느 쪽이든 할 말은 같았다.

“안 나가?!”

건네받은 옷을 꽉 쥐며 외치는 목소리에는 스스러운 기운이 가득했다. 떠밀리듯이 복도로 나와 내쫓긴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라는 걸 인지했을 때 류스이는 얼떨떨한 기분에 휩싸였다. 형제 사이에 옷 갈아입는 걸 보는 게 무슨 대수라고. 그에게는 없으나 내게는 있는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면 놀라 기절할 게 틀림없었다. 대규모 정전 사태로 이 일대 전력 공급이 중단되었던 여름날 둘이 홀딱 벗다시피 한 채로 하루를 넘게 보냈던 날이나, 일하느라 빨랫감이 쌓인 것도 세탁기가 고장 난 것도 뒤늦게 알아차려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는 연락을 받고 갔던 날이나, 다리를 세울 힘조차 없어 내가 욕조까지 따라 들어가 씻겨주고 닦아주고 나체인 걸 끌어안고 있었던 날이나…….

안아줘, 류스이…….

‘그런 기억은 안 갖고 있는 게 낫지….’

류스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등을 기댄 문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없었다면 온통 깜깜하다고만 느꼈을 터였다. 부정적인 발상은 저답지 않다는 걸 잊은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이 같은 생각이 잇따라 들었다. 이 복도 전체가 제 심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만 같다고. 형을 잃은 날부터 제 안에 아침은 오지 않았고, 얼마 뒤 SAI가 나타나기는 했으나 어스름을 완전히 몰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이따금 형만큼이나 반짝여 더없는 따뜻함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진짜 내 형제는 아니라는 진실이 결국에는 류스이를 본래 있을 곳으로 되돌려놓고는 했다. 언제 꺼질지 모르는 희미한 빛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어둠 속으로.

‘네게도 똑같이 물었다면 지금도 같이 있을 수 있었을까?’

답을 구할 방도도 까닭도 없다는 걸 류스이는 재차 가슴에 새겨 넣었다. 이윽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그는 애써 미소 지어 보였다. 아무 문제도 없다는 것처럼. 너는 영원히 모르기를 바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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