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CP] 꿈꾸는 전기양과 전기양의 꿈 03

나나미 형제 (류스이) 중심 사이버펑크 세계관 날조글

자살 및 자살 방조 / 중독 치사 / 정신질환 / 인간 소모품화 / 신체 훼손과 개조 / 행동 강요와 학대 

상기 요소를 포함한 비윤리/비도덕적 소재가 사용되었으므로 열람에 주의해주세요.

논CP를 의도한 글로, 작중 묘사되는 사랑은 형제애/가족애일 뿐 성애가 아닙니다. 


2주, 아니면 하루가 더 지나 보름만이었을 것이다. 보살펴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 하는 상태가 된 SAI를 목도한 순간 어느 정도로 참담한 기분이 들었는지─전에 없이 절망적이라는 점을 포함해─류스이는 상기하려 하지 않으려 했다. 프랑수아에게는 설거지와 빨래를 부탁한 뒤 쓰레기장과 다름없어진 작업실 벽장 속에, 본인도 버려진 쓰레기 일부인 것처럼 누워있던 형을 안고 욕실로 움직였을 때 기분도 곱씹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옷을 벗을 기력조차 없는 것을 겨우 씻기고 닦아준 뒤에나 류스이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프랑수아가 의사를 불렀으니 조금만 기다려. 아직 잠들면 안 돼.”

일방통행이 아닌 대화가 시작된 것도 그때였다. 그나마 깨끗한 상태로 유지되어 있던─이유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지만─침실로 형을 데려가고, 본인이 갈아입을 것을 포함해 적당한 옷을 찾아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을 때. 작업실에 버려져 있던 쓰레기 종류로 미루어 보아 보름 내내 굶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어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한 찰나였다.

“류스이, 나 추워….”

내쉬어지기 무섭게 끊어져 버린 실낱같은 목소리는 동생으로 하여 더 다급히 움직이게 했다. 덜 마른 머리카락에 몸을 감싸고 있는 것도 가운 겸용인 커다란 타월 한 장뿐이었으니 추위를 호소하는 것도 당연한 일일 거라고─

“안아줘….”

그가 춥다고 느끼고 있는 것은 몸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안아줘, 류스이….”

파리한 입술이 전하는 요구는 말할 필요도 없이 위태로운 동시에 희미했지만, 기이하게도 류스이는 무척이나 선명하면서 절절하게 귓속에 새겨 넣을 수 있었다. 류스이가 침대 위에 올라 마주 앉자 SAI는 동생이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그 품속으로 가느다란 몸을 내던졌다. 축축한 감촉이 가슴에 스미기 무섭게 무게감이 전해지고, 얼음장을 안은 듯한 냉랭함이 번졌으나 류스이는 굴하지 않았다. 이윽고 길고 두꺼운 팔이 상체를 감싸자 SAI는 그 속을 더 파고들며 다시 물거품 같은, 그러나 또렷한 목소리를 형제에게 들려주었다.

“따뜻해.”

“따뜻해, 류스이….”

“따뜻해….”

한 마디씩 거듭될 때마다 먹먹한 감정이 차오르는 걸 억누르려는 것처럼 동생은 형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우리를 감싸고 있던 차가운 기운이 한 걸음 물러나고 안정된 호흡 사이로 곱게 감긴 눈이 비치자, 류스이는 한 손을 들어 가슴에 닿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온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아가는 형을 느끼고 있자면 저 역시 안온한 기운에 감겨 그대로 꺼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류스이….”

자각이 착각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심장 소리가 들려….”

안온해지기는커녕 심박이 처음보다 빨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된 건, SAI가 문득 속삭였을 때였다.

“그런가….”

왜인지 모르게 계면쩍은 기분이 든 탓에 류스이는 쓰다듬던 손길을 멈추고 어깨를 감싼 팔을 느슨히 풀었다. 얼굴 밖으로 드러나려는 감정을 통제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면 제발 올려다보지 말라고 간절히 바랐을지도 몰랐다. 뒤이어 엄습한 상황은, 쑥스러운 기분을 들키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당혹스러우면서도 강렬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사─”

가녀린 두 팔이 허리를 꽉 조이고 그 위로 머리가 처박히듯 가슴에 닿은 것은 슬슬─이 낯선 기분이 심중을 완전히 장악하기 전에─그를 내려놓자고 생각한 것과 거의 동시였다. 류스이는 반사적으로 튀어 나가려는 소리를 눌러 삼킨 뒤 형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다시 새까만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한 것은, 동생이 몸을 들썩일 때마다 행여나 떨어질까 우려스럽기라도 한 것인지 없는 힘을 짜내 팔을 더 단단히 두르는 SAI의 몸짓을 알아차렸을 때였다. 다행인지 무엇인지 부끄러운 기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애틋한 심정이 빈자리를 차지했고, 안타까운 마음이 무거워질 때마다 고동이 점차 무르익어 가는 것을 류스이는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SAI도 분명히 듣고 있겠지….’

‘아니.’

‘듣고 있는 게 아니라….’

SAI는 스스로 듣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내가 살아있다는 증명으로 말미암아 너 역시 아직 살아있다고 느끼고 싶었던 거라고.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매달릴 이유가 없잖아.

“류스이….”

내 말이 틀렸나?

“내 심장도, 이렇게 뛰고 있을까?”

추측에 답을 제시하듯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무렵에 SAI가 물었다.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 같은 목소리는 그대로였지만, 류스이는 변함없이 또렷하게 귓가에 담을 수 있었다.

“당연하지. 이 순간에도 이 안에서, 네가 살아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을 거다.”

오래전부터 착실히 죽어가기 시작해 당장 몇십 분 전까지만 해도 산송장과 다름없었던 그가 여전히 생生을 붙들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자 류스이는 자신 있게 외치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은 이제 납작한 가슴을 짚고 작은 온기도 흘리지 않으려 애썼다. 돌연히 벅차올라 말문이 막히지 않았다면 거침없이 쏟아냈을 터였다.

이미 많이 멀어져 버렸지만 되돌아갈 수 있어, SAI. 내가 여기에 있잖아. 네가 필요로 한다면 얼마든지 안아줄게. 계속 곁에서 지켜봐 줄게. 웃는 법을 잊지 않고 언제나 따뜻했던 진정으로 살아있는 너를 원해. 그러니 제발─

“왜?”

더는 죽지 마.

“어째서….”

바람은 한순간에 어그러졌다.

“나는….”

잇대어지는 목소리는 변함없이 희미한 동시에 선명하다고 하는 모순을 가지고 다가왔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직감은 돌풍처럼 류스이의 심중을 엄습했다. 그렇지만 피할 수 없었다. 손바닥 안에는 아무것도 모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것, 완전히 잘못 판단했다고 판단하는 것, 가느다란 몸이 더는 제게 의지하지 않고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끼는 것.

절망으로 굳어버린 얼굴과 마주하여 원망 섞인 소리를 듣는 것도 전부─

 

아직도 살아있는 건데?

 

“하.”

쉽게 잠들지 못 할 거라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 모르는 틈에 수마가 다시 찾아왔고, 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도로 떠나 가버렸다는 사실을 안 것은 맹렬한 우레가 한 차례 더 울부짖고 사라진 뒤였다. 지워버리는 게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보이지 않게 파묻어 놓고 싶었던 기억이 꿈이라는 형태로 되살아났다는 사실을 인지한 것은, 여전히 바깥 상황 같은 건 전혀 모른 채로 곤히 잠들어 있는 얼굴을 눈에 담았을 때였다.

“뺘….”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숨소리와 미미하게 움직이는 어깨를 통해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지만, 류스이는 구태여 한 손을 그 입술에 닿을 듯 말 듯 가져다댔다.

‘살아있어….’

‘아직은.’

조금 뒤 류스이는 손가락을 거두고 침대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흐트러진 이불을 끌어올려 어깨를 덮어주고 앞머리를 매만져 주는 동안에도 SAI는 눈을 뜰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나 그는 끝까지 조용히 움직였다. 침실 밖으로 나와 선 복도는 내리깔린 어둠만큼 쓸쓸했다. 멀리서 전해지는 빗소리만이 텅 빈 공간을 흐릿하게 채울 따름이었다.

 

이제 그만 쉬라고 SAI를 처음 설득한 날 이후에도 류스이는 곧잘 그에게 설교했다. 예정에 없는 작업은 나서서 하지 마라.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어라. 간간이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는 것도 잊지 마라. 업무를 제외하고 또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미루지도 참지도 말고 하고,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라면 개의치 않고 내게 말해도 괜찮다. 언제든 기다리고 있을 테니.

SAI에게 일은 버릴 수 없는 의무이자 삶에 대한 태도 자체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마땅히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무의식에 배어있는 강박은 때때로 초조하고 불안한 기색으로 발현되었고 “이러다가는 아버지에게 혼날지도 몰라….” 대놓고 두려움을 표하게 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류스이는 그에게 멈추는 법을 가르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었다.

‘SAI에게도 이렇게 말해주었다면….’

후회가 잔존하는 한은 끝없이 그러할 터였다.

다행스럽게도 SAI는 일과 휴식 사이 균형 잡는 방법을 느리게나마 익혀갔고, 그 과정에서 동생과 저 사이 미묘하게 존재하던 거리감도 서서히 좁혀갔다. 류스이 입장에서는 본래 SAI와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뿐이었지만, SAI에게 그 사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고통과 절망으로 이루어진 기억 없이 나와 친밀할 뿐인 형제는 언제나처럼─필연적으로─존재에 대한 감사와 죄의식을 동시에 안겼다. 불행은 둘 중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 가늠하는 것은 자해나 다름없다는 걸 인정했을 무렵 찾아왔다.

“류스이, 당주께서 지금 상황을 상당히 불편해하고 계신다. 그것에게 문제가 생기면 보고하라고 말씀하셨다는데 왜 말을 듣지 않는지 모르겠구나.”

어느 날 호출을 받고 나간 자리에서 숙부가 그리 전했을 때 류스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하는 게 어째서 이상한 것인지, 오로지 일에만 매달려 기계처럼 사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지 물을 수도 있었지만, 가족을 상대로는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 입을 다물었다.

“네 아버지가 신경 쓰여 할 만한 일을 저지르지 마라.”

직후 SAI를 만난 뒤에는 숙부가 전하고 간 말은 엄중한 경고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저가 없던 사이 아버지에게 어떠한 전언이라도 들은 것인지 겁이 섞인 울적한 낯으로 웅크려있는 SAI를 보았을 때 류스이는, 오래전에 너덜너덜해진 심경이 아예 갈가리 찢겨 조각난 그대로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SAI가 낯선 장소, 낯선 사람 사이에서는 평소 하던 일의 반의반의 반도 못 할 만큼 능률이 떨어지는 편임을 죽기 전에 증명해 두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그를 제게 맡기는 대신 진즉에 붙잡아 가두었을지 몰랐다. 도구는 도구답게 굴면 될 뿐이라는 그에게 있어서는 진리와 같은 발상으로 말이다.

그렇게 SAI는 죽음으로도 벗어날 수 없었던 길 위에서 또다시 죽어갈 처지가 되었고, 류스이 역시 부정에 고개 숙였다. 형제가 생生을 잃는 모습을 관망하는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 그를 구제하는 것─

‘이렇게 몰아붙이는 세계는 필요 없어.’

‘전혀 갖고 싶지 않아.’

‘전혀.’

‘전혀….’

이 세계를 전과 같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전부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절망에 비탄을 멈출 수 없었다.

 

프랑수아가 따로 정리하지 않았다면 활동복은 벗어둔 자리에 그대로 놓여있을 터였기 때문에, 류스이는 드레스룸이 아닌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행여나 집사를 깨울까 싶은 생각에 가능한 한 기척을 지우고 조용히 움직였으나 노련한 고용인을 이기는 것은 역시나 쉽지 않았다.

딱─ 스위치 조작하는 소리와 동시에 거실이 밝아진 것은 옷을 거의 다 갖추어 입고 호신용 총격 장치를 배터리를 확인할 무렵이었다.

“외출하십니까?”

단정한 파자마 차림인 집사는 뜻하지 않게 잠에서 깬 것치고 졸린 기운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다만 목소리는 평소보다 가라앉아 그 역시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느끼게 했다.

“기분 전환 좀 하고 싶어서.”

가시지 않는 잠기운에 류스이도 쇳소리 섞인 목소리를 냈다. 폭우가 쏟아지는 새벽에 기분 전환이라니, 다른 사람이라면 필시 어처구니없어하며 캐물었을 터였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하고.

“알겠습니다.”

그처럼 물을 것도 답할 것도 없다는 듯 반응하는 게 아니라.

“혹시라도 내가 늦는다면 프랑수아, 네가 SAI를 집에 데려다줘. SAI한테는 항만에 일이 있어 나갔다고 해주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점심쯤에 연락한다고도 전해주면 좋겠군.”

안 그러면 괜히 신경 쓰여 할 테니. 류스이는 남은 말을 덧대는 대신 허리춤에 찬 총집을 한 번 더 확인하고서는 “네, 알겠습니다.” 집사가 답하는 목소리를 새겼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그러고는 마지막 배웅을 뒤로 한 채 밖을 나섰다.

 

늦겨울과 초봄 사이에 걸친 새벽이고, 여전히 비가 매섭게 쏟아지고 있던 탓에 공기는 차가운 걸 넘어 시릴 수준이었다. 의복에 장치된 체온 유지 장치가 아니었다면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얼어붙었을 게 분명했다.

거주하는 맨션에서 시가지로 이어지는 통로를 따라 걸으며 류스이는 비가 내리는 풍경을 조용히 내다보았다. 빗줄기가 어찌나 굵고 촘촘한지 유리창 밖으로 작고 어슴푸레하게나마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 가로등이 세워져 있다고 판단할 수조차 없었을 터였다. 밖에서 느끼는 새벽 빗소리는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신호음 같았다. 그게 아니면 다른 것이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일지도 몰랐고 말이다. 오랫동안 부동했던 신념, 의지 같은 것들이.

불현듯 걸음을 멈춘 것은 통로 끝에 거의 다 이르러, 창 너머로 번화한 시가지가 보이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비 탓에 당연히 온전한 풍경을 눈에 담을 수는 없었지만, 한낱 가로등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찬란한 빛무리가 그것이 그 자리에 있음을 증명해 주었다.

시간과 환경에 상관없이 반짝임을 잃지 않는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영원히 바래지 않을 것처럼만 느껴졌고, 류스이는 그것이 이 세계 전체를 압축해 보여주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 일도 겪지 않았다면 지금도 저 빛을, 세계를, 너무나도 갖고 싶다며 갈망하고 욕망에 부추겨지기만 했을 것이었다.

‘지금은 달라.’

‘지금은.’

이제는.

“그럴 수 없어….”

무의식을 타고 나온 목소리는 차가운 숨결을 타고 흩어졌다. 그치지 않는 무거운 빗소리 속에서 류스이는 물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보이기 시작했지? 왜 이 세계가 갖고 싶지 않아졌지? 답은 이미 제 안에 있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썩어갈 따름임을 형제가 목숨을 버리는 행위로 가르쳐주었기 때문이고, 직후 이 세계는 스스로 변화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최후에 딱 하나 소박하게 갖고 싶어 했던 안식조차 빼앗긴 형제를 보며 부패한 세계에 동조하는 것은 똑같이 곯아가는 것뿐임을 깨달았기 때문이고, 그렇게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매 순간 새기며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없는 세계는

분명 어제와 다르지 않겠죠

그런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아주세요

안녕, 형제여

 

어제와 다르다고 말할 수 없었고, 행복하게 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지금 여기에 있잖아.

 

두 번 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고, 그 곁에서 함께 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류스이는 언젠가 읽었던 오래된 소설을 떠올렸다. 살아있는 동물이 멸종 단계에 이르러 귀중해진 세상에 기계로 만들어진 전기 양을 키우는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이었다. 그는 가짜 양으로는 만족하지 못 하여 살아있는 진짜 양을 갖고 싶어 했고, 진짜 양을 구매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위험천만한 사건에 자진해 뛰어들었다. 종국에 원하던 대로 살아있는 동물을 구했는지, 아니면 실패했는지는 생각나질 않았다.

청년은 이제 스스로 처지를 돌아보았다. 소설 속 주인공과는 반대로 진짜 양을 잃고서 가짜 양을 얻게 된 제 모습을. 그것은 생김새, 버릇, 태도, 무엇 하나 빠짐없이 살아있는 양과 똑같았으나 결코 진짜 양이 될 수는 없었다. 주인공 남자가 처음에 키우고 있던 전기 양을 진짜로 여기지 못 한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무의식은 생각보다 강력해서 때때로 전기 양을 진짜 양처럼 인식할 때도 있었지만, 어떻게 애를 써도 진실은 바꿀 수 없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잃어버린 진짜 양에 대한 감정만 커져 괴리만 깊어질 뿐이었다.

 

네 아버지가 신경 쓰여 할 만한 일을 저지르지 마라.

 

더구나 이제는 전기 양마저 잃을지 모르는 상황에 부닥치고 말았다. 한때 내가 손에 쥐기를 원했던 이 세계라는 것에게.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소설이 어떻게 끝을 맺었는지 류스이는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주인공은 끝끝내 살아있는 동물을 구하는 데 성공하나 모종의 이유로 금방 잃게 되고, 대신 우연히 줍게 된 전기 두꺼비를 돌보기로 하며 소설은 끝이 난다. 살아있는 것을 살아있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글에 담긴 주제에 관해 마지막으로 환기하면서.

‘SAI….’

주인공은 답을 찾았지만, 나는 여전히 알지 못 해. 너를 볼 때마다 그렇게 느껴버려. 그간 마주해온 수없이 많은 일과 마찬가지로 너에 대한 것도 빠르게 결단할 수 있었다면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텐데. 너를 너로서 받아들이지 못 하지도, 이 세상이 어그러지듯 느껴지지도, 그리고…….

“…….”

류스이는 두 손을 펼치고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열 개 전부 스스로 의도하는 대로 움직였지만, 바라보면 볼수록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낯선 생물처럼 느껴졌다. 이어 도시가 전달한 빛과 끝없이 흐르는 빗물에 뒤덮인 유리창을 들여다보면, 너무나도 익숙하게 아는 얼굴이라는 감상과는 반대로 한없이 생경하게 느껴지는 얼굴이 비쳤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 뒤틀린 세계에서 인간성을 유지하려 애써봤자 도리어 망가질 뿐이라는 진실은 진즉에 깨닫고 있었으니.

고려할 문제는 간결했다.

내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되는가.

얼마만큼 시간이 주어질 것인가?

‘그래도 나는….’

‘나는 절대….’

일순 장면 하나가 번갯불처럼 빠르게 번쩍이다가 사라졌다. 빛이라고는 모니터에서 새어 나오는 침침한 불뿐인 좁은 방, 의자 위에 웅크리듯 앉아있는 남자가 생生을 잃고 떠난 모습은 이제 남겨진 존재에게 교훈을 주었다.

현실에서 달아나려 드는 것은 마음을 망가뜨리고 끝내는 존엄마저 부수는 세계에 대한 굴복이라는 사실을 류스이는 잊지 않을 것이었다. 어디까지 내몰린다고 하더라도 형제와 같은 선택을 하는 일은 결단코 없으리라고 심중에 단단히 새겨 넣었다. 게다가 제게는 아직 할─하지 않으면 안 될─일이 있었다. 비록 전기로 움직이는 가짜 양이라고 류스이는 그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었다. 죽은 형제에 대한 죄책감이 지금 그를 지키지 않을 이유는 되지 못 했고, 이 세상에 그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딱 하나, 오로지 나뿐이라는 진실 역시 바꿀 수 없을 테니까.

류스이는 재차 유리창을 들여다보았다. 어느새 제 모습이 바로 보이기 시작했다. 거침없는 빗물에 뒤덮여 여전히 흐릿하게 비치기는 했으나 더는 다른 존재처럼 다가오지는 않는다는 뜻이었다. 언뜻 한기에 휩싸여 가라앉은 듯이 보였던 적금색 눈동자는 이내 불씨를 되찾아 태우기 시작했다. 더는 사그라지지 않을 것처럼 점점 격렬하게.

 


열흘 전 벌어진 기밀문서 폭로 사건과 그것이 촉발한 시위─매스컴은 그리 표현하였으나 실제로는 폭동과 다름없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탓에 온 도시가 난잡했지만, 관료 기업이 밀집한 중앙구역과 사실상 중앙구역의 일부로 여겨지는 두 지구에는 통제가 시행되지 않아 두 사람은 밤거리로 나올 수 있었다. 번화한 시가는 도시 한편에서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을 소란 따위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라는 듯이 움직였으며 실제로도 그러할 터였다.

‘우리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말이지….’

류스이는 노면 전차에 올라타 앉기 무섭게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더니 제 어깨, 가슴에 이어 허벅지를 빌려 잠든 SAI를 내려다보았다. 이따금 귀에 익은 숨소리와 더불어 입술을 우물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떤 꿈을 꾸는지는 몰라도 일하는 꿈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는 엿새 전부터 오늘 오전까지 N사, 즉 집안에서 경영하는 회사 본사에 불려 가 며칠 내내 노동에 시달리다 돌아온 참이었다. 이유는 물론 열흘 전 폭로 사건 때문으로, 동격인 기업 두 개가 순식간에 ‘털려버린’ 판국에 관망만 하고 있을 회사는 없었다. 설령 보안 수준이 도시 내 어떤 기업과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심지어는 정보통신 사업을 주업으로 삼는 곳보다 월등히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 상황에 N사를 그토록 견고한 요새로 만들어준 당사자가 소집되어 경계 상태로 근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였고, 류스이도 이번만큼은 SAI를 순순히 보낼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며칠 만에 퇴근을 허가받은 SAI는 외곽에 자리해 본사에서 먼 집 대신 비교적 가까운 곳에 사는 동생을 찾아갔다. 안으로 들어올 기력조차 없어 현관에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는 말 그대로 식겁했으나, 이윽고 걱정을 버릴 시간이 찾아온 것에 류스이는 감사했다. 이후에는 SAI가 자진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저녁 무렵이 되어 지금에 이른 것이었다.

“커리가 먹고 싶어….”

고생한 시간에 대한 보상을 구하듯 중얼거린 말소리를 실현해 주고자. A지구 내 인도 음식 전문점은 몇 군데고 있었지만, SAI는 언제나─생전부터─한 가게를 고집했다. 7-E1 블록에 있는 가게는 커리를 주문하면 차이를 한 잔씩 서비스로 주곤 했는데, SAI는 그것이 어지간히 마음에 든 듯싶었다.

당연한 일이었으나 겨우 몇 시간 눈을 붙인 것 정도로는 며칠간 쌓인 피로가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을 터였기 때문에, 이 순간에도 류스이는 그가 잠기운에 이끌려 가버린 것을 이해했다. 이윽고 가지런한 입술 사이에서 “팔락 파니르……. 치즈 난……. 밥도 조금만…….” 웅얼웅얼 말소리가 새어 나왔을 때는 옅게나마 안도 섞인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내일 하루 정도는 쉬게 해도 괜찮겠지….’

마침 내일은 나도 일이 없으니, 그간 하고 싶다고 했던 일들을 하나씩 함께 해나가면 좋을 것이었다.

이러한 바람이 단숨에 수그러진 것은 전차 내부 창틀과 천장 사이 벽면에 붙은 모니터를 무심결에 바라보았을 때, 구체적으로는 그 안에서 방송 중인 뉴스를 보았을 때였다.

 

[두 기업은 이번 기밀문서 유출 건과 관련하여 공개된 내용 대부분이 사실과는 다르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며…….]

[시위대가 해산 권고를 거부함에 따라 기동부대 투입이 결정…….]

[여전히 용의자는 특정하지 못 한 것으로 전해져…….]

 

내용 자체는 지난 열흘간 숱하게 듣고 때때로 체감하기도 한 것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공개적인 뉴스보다 사내 정보망이 몇 배는 빨라 새로이 알게 된 사실도 없었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류스이는 왜 갑자기 사건을 분석하고 싶어진 건지 모르겠다고 스스로 의문을 품었다. 무인 열차에 단둘뿐인 승객 중 한 사람은 잠에 빠졌고, 목적지인 역까지는 몇 정거장이나 남아 지루한 기분에 그리되었는지도 몰랐다. 주어진 정보만으로 어디까지 파고들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으나 추론은 이미 시작되었다.

‘사건 규모를 감안했을 때 작업자는 소수다. 단독범은 아닐 가능성이 높아. 기업이나 언론에서 추측하고 있는 방식으로 접근했다면 필연적으로 기록이 남게 될 테니까. 정보 탈취와 동시에 흔적 지우기를 했을 거고, 그렇다면 최소한 두 명은 된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도시 내 정보 환경에 대해 잘 알고 있거나 분석할 능력이 있는 인력이 있어. 그 많은 기업 중에 기술 관리 사업체를 표적으로 삼은 것도 본인들이 이해하기 용이했기 때문이겠지. 사업이 사업인 만큼 어떤 방식으로 보안 관리를 하는지 어느 정도 알려진 데다가, 폭로할 가치가 있는 정보를 가졌는지 해석하고 판단하기도 쉬웠을 테고, 다른 이유가 더 있다면 아마도….’

류스이는 사색에서 나와 다시 모니터를 올려다보았다. 뉴스에서는 사건이 벌어진 구역 중 하나인 C지구에서 시위대와 인터뷰를 나눈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C지구는 넓은 강 하나를 경계로 두고 이곳 A지구와 인접해 있었으나 많은 것이 달랐다. 구역 전체가 고급화된 A지구와 달리 C지구는 구역이 반으로 나누어져 절반은 여기와 비슷했고, 나머지 절반은 완전히 다른 땅이었다. 지난해에 회사 물건을 가지고 달아난 운반책을 찾으러 빈민촌에 갔던 기억을 류스이는 돌연히 떠올렸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부터 이미 이상하다고 느꼈는지도 몰랐다. 내가 그간 보고 느낀 세계는 이런 게 아닌데, 하고.

‘기업에 대한 징벌이 목적이든, 더 나아가 도시 체제에 도전하려 하는 것이든 적어도 그들은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다치는 걸 원하지는 않아. 요컨대 상황이 이 정도로 심각하게 치닫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거다. 추가적인 폭로가 없는 것은 다음을 위한 준비가 되지 않았거나 기업과 경찰의 추적에 몸을 사리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정황을 고려하면 폭동 사태 때문일 가능성이 높겠지. 하루 만에 그 정도 정보를 폭로할 수 있는 능력과 담대함을 가진 존재라면 조용한 것이 오히려 이상해. F지구도 C지구와 비슷한 환경임을 고려하면 시민들을 적당히 자극하고 말 생각이었던 것 같다만….’

기동부대 투입이 결정된 시점에서 이번 시위가 어떻게 마무리될지는 정해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시위대가 지금이라도 해산한다면 덜 비통하게 마무리될지 모르니 그러기를 바랄 뿐이었다. 또한 범인이 자수하지 않는 한 피해를 본 두 기업은 범인을 검거하지 못 하리라고 류스이는 생각했다.

“가서 무슨 일 하다 왔어?”

류스이는 외출에 나서기 전 한나절 가까이 숙면하고 일어난 SAI와 회포라고 하기에는 사무적이지만, 묻지 않고서는 넘어갈 수 없는 화제로 대화를 나누었던 것을 되짚었다.

“보안 점검하고 시스템 보수, 통신망 감시. 특별한 문제는 없었는데 교대로 일하다 보니 자고 싶을 때 자고 깨고 싶을 깰 수 없어서 너무 피곤했어. 잠자리가 바뀌고 긴장해서 그런지 깊게 잠들 수도 없었고. 제일 힘들었던 건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 찾아와 이것저것 물어보고 간섭하는 거였지만….”

“이번 기회에 사람하고 친하게 지내는 법을 배워보겠다는 생각은 안 들었나?”

“전혀…. 어차피 평소에는 집에서만 일하잖아. 아, 아는 사람도 보기는 했어. 사적으로 아는 건 아니고 TV하고 인터넷으로 알게 된 거지만….”

“누구?”

“그…. 이번에 피해 본 회사 사장.”

“흐응.”

“접속 기록 탐지와 추적에 도움을 받고 싶다고 우리 회사를 찾아왔었어. 아버지와 숙부님이 거절하고 돌려보낸 것 같지만. 대화가 안 풀린 분위기였어….”

“당연히 안 풀릴 수밖에 없었을 거다. 다른 기업에 도움을 주는 건 N사가 가진 고유한 기술을 공개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어떤 기업이든 같이 도시를 지탱하는 기둥이기 이전에 견제할 상대이니 말이지.”

“으음, 확실히….”

“그래도 수평적인 관계를 수직으로 바꿀 드문 기회니, 아버지가 거래를 제안하기는 했을 거다. 터무니없는 조건이라 그쪽에서 받아들이지 않은 거겠지. 받아들였다고 치면 너도 많이 귀찮아졌을걸.”

“어째서?”

“보통은 단 한 명의 천재가 그 많은 것을 설계하고 실천했다고는 생각하지 못 할 테니까. 누구도 뚫지 못 할 방패를 만드는 것까지 포함해서. 아닌가?”

“…그 정도는 아닌데.”

“내 말이 맞으니 자신감을 가져, SAI.”

그 정도가 아니었다면 네가 만들어졌을 일도 없었으리라는 진실을 류스이는 그대로 묻었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류스이는 생각을 이어갔다. 사장이 직접 찾아와 부탁할 정도라면 해당 기업이 가진 능력만으로는 해결할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고백한 것과 마찬가지였고, 기업도 하지 못 하는 일을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인 공권력이 해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개인 업체나 사설 정보 탐정도 마찬가지였다. SAI 정도 되는 실력자가 이 도시에 둘 이상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으니.

만일 N사가 지금 같은 공격을 받았다면 범인들은 원하는 바를 행하기는커녕 역으로 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관리번호가 등록된 도시민이라면 어디에 숨어 이런 무모한 짓을 벌였는지 밝히는 것 이상으로 정체를 들출 수도 있었고 말이다. 이름, 나이, 성별, 거주지, 학력, 직업, 가족관계, 그리고 과거 거취부터 최근 행적까지도 전부.

‘법 위에 세워진 대기업이라도 정부와 협의 없이 주민 정보를 추적하는 건 옹호 받기 어렵겠지만 말이지….’

SAI라면 어렵지 않게 해낼 테지만, 아버지도 생각이 있다면 그런 짓까지 하지는 않을 터였다.

“…….”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돌연 덜컹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전차가 굽은 길을 달리며 흔들리는 소리도 있었으나 그것보다 훨씬 가까이에서, 더 크게 가슴이 뛰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었음을 류스이는 이내 알아차렸다.

 

혹시나 그들 역시 이 세계가 비틀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거라면.

바로 나처럼.

 

어느샌가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병세 탓은 아니었다. 갈수록 커지던 고동이 전율로 변해 번지고 있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들뜨기 시작했다. 깨달았을 때는 고조된 숨이 쏟아지고 입술이 자연스레 당겼다.

“뺘하아아….”

때마침 SAI도 길면 길고 짧다면 짧았을 단잠에서 깨어나 하품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깜빡 잠이 들었다는 자각은 있는지, 졸린 눈을 비비고 입을 우물거리면서도 상황 파악이 안 된다는 눈빛으로 넋을 놓지는 않았다. 형형색색 네온사인이 어지럽게 뒤섞인 창밖 풍경을 슬그머니 내다보고는 아직 도착하라면 멀었구나, 소리 내어 말하는 대신 권태로운 기색으로 동생의 어깨를 빌려 기댔다.

지극히 일상적인 동시에 평온 자체인 광경이었으나 류스이에게는 오래전부터 내재해 있었다. 언제 또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과 또 한 번 더 잃는다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아마도 형이 떠난 그날부터 줄곧. 소집 명령에 SAI를 보냈을 때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나 다르게 말하면 이것은 제게 실질적인 힘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를 이 세계로부터 지키고 무너지지 않게 버틸 힘이 말이다.

‘의지는 있어.’

‘나는 누구보다도 간절히 원해.’

‘이 세계를 바꾸고 싶어.’

‘이런 비틀린 세계가 아닌 진정으로 살아있는 세계를 갖고 싶어.’

‘…….’

류스이는 한 번 더 덜컥이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더는 떨리지 않았다. 눈빛은 차분했고 심중은 정적이었으며, 이어지는 목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SAI.”

나직이 소리 내자 밤색 눈동자가 고개를 기웃거리며 올려다보았다. 죽음에 쫓기지 않고 살아있던 무렵 SAI도 이렇게 나를 보았던가, 이제는 아른거려 금방 떠올려낼 수 없었다.

“…부탁이 하나 있어.”

말을 잇대면서 류스이는 내심 사과했다. 내일 하루는 꼭 편히 쉬게 해주겠다고 다짐했는데 그렇게 해주기는커녕 성가신 일에 휘말리게 할 것 같아 미안하다고. 어쩌면 더 나아가 그와 나 둘 다 감당할 수 없을 감정─우리가 이 이름을 가지고 존재하는 한은 벗어날 수 없을─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죄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사람 찾는 걸 도와주었으면 해.”

“사람?”

“그래.”

하지만 그가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었다.

“자세한 건 들어가서 설명해 줄게. 그래도 이것 하나만큼은 당장 말해줄 수 있어.”

무엇이든 벨 수 있는 검을 만들 수 있는 건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는 방패를 만들 수 있는 사람뿐일 테니까.

“너만이 나를 도와줄 수 있어.”

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누구도 아닌 너만이.”

내일에 절망해 떠난 이에게 어제와 같지 않다고 말해주기 위해서라도.

“SAI.”

류스이는 결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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