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미 형제 백귀야행 AU 1

10/31 귀신의 날 기념으로 작성했던 공식 백귀야행 기반 류스이가 주인공인 NCP

- 모브 캐릭터가 나오나 전개를 위한 설정일 뿐 원작 캐릭터와는 관계 없습니다.

- 원작에서 차용한 설정에 관해 개인적인 해석과 날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먼 옛날 서녘부터 창해를 건너 신성한 짐승 두 마리가 찾아왔다. 용과 같은 머리에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갈기를 가진 형제는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생겼는데, 하나는 윤이 나는 금빛 털에 머리에는 길쭉한 뿔이 한 쌍 있었고 덩치가 태산 같았다. 다른 하나는 형제보다 작은 몸집을 지녔지만, 탐스러운 검은 털이 온몸을 휘감아 위엄을 잃지 않았다.

둘은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은 채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이따금 그들을 우러러보는 인간을 마주칠 때면 공경에 대해 답례했다. 기근이 퍼진 땅에는 비를 내리고 홍수가 온 지대에는 해를 쬐어주며, 비늘에 감싸인 발굽으로 흙을 일구어 풍년을 이끌었다. 그들이 베푸는 선심에 감복한 인간들은 사당을 만들어 매해 추수 때마다 공물을 올렸고, 형제도 정성에 화답해 짧지 않은 세월 동안 그들을 보살폈다.

어느 날 형제는 오랫동안 흉작을 겪어 가난한 마을에 당도했는데, 그곳에 살던 젊은 청년 하나가 간곡히 청했다.

이대로면 저희는 모두 죽습니다. 부디 도와주십시오. 구해주신다면 은혜를 절대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형제는 곧장 비를 내리고, 죽어가는 대지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또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인간들에게 살아갈 방도를 가르쳐주었다. 금색 털을 가진 동생은 재물을 구하고 보존하는 방법을, 검은 털을 가진 형은 그것을 활용할 수 있게 하는 언어와 수를 가르쳤다. 인간들이 진정으로 감사하자 흡족해진 형제는 긴 세월을 그 땅에 머무르며 마을이 번영하는 모습을 관망했다. 평온이 지속되니 모든 것이 잘되어 가는 줄로만 알았다.

그들은 인간을 잘 안다고 생각했으나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다. 인간은 생각보다 망각에 빠지기 쉽고, 또 빠르게 빠져드는 생물이었다.

어느 날 인간들은 잊어버렸다. 현재 누리고 있는 안녕이 어떤 존재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자비를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은 물론, 그것이 자비라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첫 번째 인간이 공물이 아깝다고 주장하자 두 번째 인간이 동의했다. 세 번째 인간이 동조하자 이어서 네 번째 인간이 찬동했고, 마침내 다섯 번째 인간이 일어섰다. 여섯 번째 인간은 창을 들었다. 부정이 마을 전체를 뒤덮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공물이 올라가지 않는 사당은 방치되기 마련이었고, 끝내는 그것을 세운 인간 손에 무너져 내렸다. 끝끝내 인간들은 법도에서 완전히 벗어나 버렸다.

너희는 더 이상 이 땅에 필요하지 않다, 그러니 사라져라!

인간들은 상대적으로 작고 온후한 검은 짐승을 공격했다. 형제가 다치는 것을 본 금색 짐승은 전에 없이 격노했다.

은혜를 배반하지 않겠다고 한 건 네놈들이었거늘!

아무리 분노해도 태생이 고귀한 그들은 생명을 직접 거둘 수는 없었기 때문에, 대신 인간에게 베풀었던 모든 것을 몰수했다. 난폭하게 퍼부어지는 빗속에서 찰나에 떠내려갔다. 집, 땅, 재산, 이것들이 가져다준 행복, 안정, 높은 존재가 낮은 존재에게 베풀었던 사랑……. 그 밖에도 많은 것들이.

 

상처 입은 형과 노여운 동생이 홍수 너머로 사라지자 다시는 그 땅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스스로 한 말을 잊은 이들에게 남은 것은 떠난 줄 알았던 가뭄과 끝나지 않는 흉년뿐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그치지 않을 것 같은 새벽닭 울음에 잠에서 깬 청년은, 여느 아침처럼 물을 길으러 나갈 준비를 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기이하다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하루를 보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런 가난하고 작고 불행한─오랜 시간 비가 내리지 않아 메말라 버린─마을에서 특별한 일 같은 건 기대할 수 없었으니. 기근을 못 견딘 이웃이 마을을 뜨거나, 아예 저세상으로 떠버리는 것조차 일상이 된 마당에 오늘은 다를 거라는 꿈을 품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청년이 첫 번째 기이와 맞닥뜨린 것은 물을 긷고 돌아오는 길에 밭에서 구한, 그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귀중한 물건을 창고에 가져다 두러 가던 때였다. 본채와 창고 사이에는 커다란 수레가 하나 있었는데, 평소에는 헛간 대용으로 안 쓰는 물건을 올려두곤 했다. 바로 지난주에 벼를 수확했기 때문에 지금은 볏짚만이 잔뜩 쌓아 올려져있었고 그렇게 보일 게 정상이었다.

웬 사람 발이 보일 게 아니라.

일순간 안 좋은 가정 두 가지가 청년을 치고 지나갔다. 하나는 이게 시체면 어떡하지 하는 것, 다른 하나는 수상한 강도면 어떡하지 하는 것. 둘 다 무의미한 발상이라는 것을 청년은 이내 깨달았다. 시체라면 그저 안타까운 일이고 강도라면 줄 게 없어 미안할 따름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둘 다 아니었지만. 그 대신이라고 할지, 조심스레 수레로 다가가 볏짚 더미에 파묻힌 존재를 확인했을 때 그는 감탄과 놀라움, 의문이 동시에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살면서 가장 크게 얼이 빠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이다.

젊은 남자가 한 사람 잠들어 있었다. 정확한 나이는 가늠할 수 없었지만, 대강 청년과 비슷하거나 그보다는 몇 살 연상으로 보였다. 청년을 놀라게 한 부분은 세 가지 정도였는데 하나는 덩치가 상당히 크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맨발에 입고 있는 옷이 특이하다는 점이었으며, 마지막 하나는 머리가 샛노랗다는 점이었다. 덧붙여 언뜻 보기에도 가치 있어 보이는 장신구로 곳곳을 치장하고 있었는데, 허리쯤에 붙은 풍성한 털 장식이 가장 신기했다. 무엇 하나 빠짐없이 이 주변에서는 볼 수 없고 본 적도 없는 특징이었다.

남자는 꽤 깊이 잠들었는지 노골적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눈 뜰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자유분방한 자세로 누운 채 입을 크게 벌리고, 가슴을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탈이 난 건 아닌 듯싶었지만 말이다. 청년은 그를 깨우는 게 좋을지 아니면 내버려 두는 게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 했다. 언제부터인가 행상인 외 외지인이 마을에 들어오는 것은 대단히 드문 일이 되었기 때문에 아예 모른 체하기에는 그랬다.

“음….”

이윽고, 드디어 청년이 품은 고민을 덜어주려는 듯 남자가 몸을 움직였다. 그는 눈을 감고 누운 채로 기지개를 쭉 켜더니, 힘겨워하는 기색 없이 상체를 벌떡 일으켜 앉았다. 남자가 청년에게 시선을 준 것은 뾰족한 송곳니가 다 보이도록 크게 하품을 하고, 두어 차례 입맛을 다신 뒤 침이 흐른 입가를 거칠게 훔치고 난 뒤였다.

“흐음….”

그는 눈을 깜빡일 줄 모르는 사람처럼 청년을 바라보았다. 아플 정도로 뜨거운 눈길이었지만, 청년은 아무 반응도 보일 수 없었다. 몸은 얼어붙었고 머리는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른 사고에 마구 휘저어졌다. 청년은 그나마 분별할 수 있는 생각 몇 가지만 되풀이했다. 눈꺼풀을 들어 올린 남자는 특이한 겉모습만큼이나 미인이라는 것, 눈동자가 목격한 지 오래된 비옥한 토지와 같은 색이라는 것, 앉은 모습으로 보아도 어깨가 넓고 덩치가 크다는 것, 왜 이렇게 지그시 바라보는 건지 모르겠다는 것, 나는 이래서 못 한다지만 그는 왜 아무 말도 없는 건지 모르겠다는 것…….

남자는 주위를 한 번 휙 둘러보더니 곧, 청년 입장에서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핫하! 벌써 아침이군!”

그렇다기보다는 크게 소리쳤다.

“너, 사람 하나 못 봤어? 이 근처에 있을 텐데.”

그를 둘러싼 밝은 색과 상반되는 낮게 긁는 목소리에는 기운이 넘쳤다.

“예?”

청년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자연스럽게 높임말을 썼다는 건 소리가 튀어 나간 뒤에 깨달았다. 그렇지만 역시 마구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 기묘한 존재를 느끼고 있자면 누구라도 그리 될 터였다. 남자는 청년이 당황하는 것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설명했다.

“나보다 조금 작은 남자인데, 검은 털이 복슬복슬하고, 거기에서 아주 좋은 냄새가 나.”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의아스러운 것을, 다음 마디까지 들었을 때는 말 그대로 혼란이었다.

“뿔은 하나에 비늘은 앞발에만 있고.”

“뿔이요?”

청년은 다시 또 넋이 나갈 것 같은 걸 가까스로 붙들었다. 틀림없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말하는데 이해가 가질 않았다. 농담하는 기색으로는 보이지 않아서 더욱이. 남자는 분명 진지했다.

“전혀 모르겠는데요….”

깊은 고민 끝에 청년은 솔직히 대답했다. 그렇다기보다는, 역시 다른 답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 흐음….”

원하는 답을 구하지 못 한 것치고 남자에게 낙담하는 기색은 없었다. 단지 어디에 있을까, 헤아릴 따름이었다. 그는 생각에 빠진 눈으로 턱을 매만지다 옆에 선 청년을 슬그머니 훑어보았다. 은근한 눈빛이었으나 받는 입장에서는 적나라하게 와 닿았다. 이는 그가 가진 남다른 분위기와 어우러져 청년에게 예기치 않은 긴장감을 심어주었다. 가슴을 두들기는 방망이질은 호박색 눈동자가 휘둥그레진 순간 절정에 달했다.

“오.”

돌연 거리가 가까워지며 은은한 냄새가 훅하고 끼쳤다. 그것이 남자가 가진 체취라는 걸 깨닫는 데는 짧은 시간만 필요했지만, 어떤 기운인지 묘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단어 몇 가지를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을 터였다. 만일 그가 지닌 찬연한 금색에 코로 맡을 수 있는 기운이 있다면 이렇지 않을까, 당장은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번쩍 몸을 일으킨 남자가 시선을 꽂은 것은 청년이 어깨에 메고 있던 망태였다. 청년은 어느새 커다래진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걸 보았다. 그 옷이나 머리색보다 훨씬 밝게, 꼭 한낮에 타오르는 해처럼 말이다.

“사과잖아.”

말한 대로, 망태 안에는 알맞은 붉은색으로 익어 단내를 풍기는 과실이 두 개 들어 있었다.

“네, 그런데….”

의식 없이 반응하던 얼굴에 불길함이 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청년이 자각하기도 전에 남자는 소리쳤다.

“그 사과, 진심으로 원해! 두 개 전부!”

쩌렁쩌렁 울리는 만큼 목소리에는 들뜬 기운이 명확했다. 청년으로서는 알 턱이 없었지만, 남자는 땅에서 자란 소담한 것들을 사랑했으며, 욕구에 무척 충실한 성격이었다. 더구나 저렇게 잘 익은 과일을 마지막으로 맛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던 참이었다. 이 모든 사실이 맞물려 남자는 점점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그거 나한테 줘.”

그가 재차 요청했다.

“안 돼요!”

청년은 저도 모르게 외쳤다. 의도한 것보다 훨씬 큰소리가 나갔으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곤란하다는 낌새로 급히 덧붙였다.

“이건 안 돼요, 중요한 거예요.”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겨우 사과 두 개가 뭐 어때서, 하찮게 여길지도 모르는 문제였다. 그렇지만 청년에게는 정말, 본인이 표현한 것 이상으로 중요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흉작이었고 사과나무밭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복스럽게 자라나 마땅할 열매들은 뿌리내린 땅처럼 대부분 말라버렸고, 먹을 수 있는 것은 소수에 불과했다. 청년이 구한 두 알은 그 소수 중에서도 품질이 괜찮은 대단히 귀한 물건이었다. 중요한 부분은 청년이 사과를 구한 목적이었는데, 남자가 이어서 보인 반응으로 미루었을 때 사연을 듣는다고 해서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럼 물물 교환은 어때?”

남자는 널찍한 소매를 뒤적거리더니 무엇인가 꺼내 내밀어 보였다. 청년이 잘못 보고 착각한 게 아니라면 손바닥 위에 올려진 물건은 금가락지였다. 쉬이 가치를 잃지 않을 보배 그 자체인 물건. 심지어 꽤 두꺼웠다.

남자가 조금만 더 평범한 행색이었어도 청년은 그가 어떻게 이런 걸 가지고 있을 수 있는지 의구심부터 품었을 터였다. 청년이 입을 벌린 채 멍청하게 서 있자 그가 덧붙였다.

“부족하다면 더 줄 수도 있다만.”

그러고는 직전과 마찬가지로, 소매에서 재보를 더 꺼내 내밀었다. 팔찌와 귀고리, 남자 목에 걸려있는 것과 비슷해 보이는 목걸이. 전부 금제였다. 요컨대 눈앞에 번들거리는 보화를 보고 갈등하지 않을 인간은 없을 것이었다. 청년도 마음 한편에서 갈등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저 중 하나만 팔아도 한동안은 배부르게 지낼 수 있을 것이었다. 몇 개를 더 판다면 저 하나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를, 당분간보다 더 오래 지탱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 아, 안 되는 건 안 돼요….”

청년은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았다. 도리질을 멈추고 보았을 때 남자는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예상하건대 거절한 까닭을 밝히면 제대로 바보 취급을 받을 터였다. 혹여나 질문을 받을세라 청년은 급히 말을 돌렸다.

“대신 다른 걸 대접해 드릴 수는 있을 것 같아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이어진 시선에 남자는 어깨는 으쓱했다.

“필요하지 않다면 할 수 없지.”

시원스레 답하기는 했으나 미련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는 아쉬운 눈치로 보물을 소매 안에 집어넣었다. 저 널찍한 옷 아래 무엇이 감추어져 있는지 청년은 마땅히 궁금했으나 구태여 묻지는 않았다. 남자라면 진지하게 대답해 줄 것 같았지만, 제 귀에는 허무맹랑한 소리로만 들릴 거라는 확신이 강하게 자리한 탓이었다.

 

어느새 아침 해는 완전히 떠올라 어스름을 걷어내고 먼 능선까지 따스운 기운을 퍼뜨리고 있었다. 마을에 딱 하나 있는 식당은 청년이 사는 집에서 다소 거리가 있어, 둘은 제법 긴 시간을 걸었다. 남자는 뜨뜻한 햇볕 쬐는 걸 좋아하는지 응달을 피해 가며 맨발을 딛고, 눈을 감은 채 두 팔을 휘적거리기도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청년은 의식 밑에서 헤엄치던 의문들이 하나둘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 나리.”

청년이 말을 걸자 앞서 걷던 남자가 돌아섰다. 그가 눈을 비뚜름하게 뜨고 본 탓에 청년은 외려 당황했다. 그저 처음 들어보는 나리라는 호칭에 놀랐을 뿐인 것도 모르고.

“그게…. 이름을 여쭤보지 않은 것 같아서요.”

“아, 그렇군.”

생각할 때 습관인지, 남자는 처음 질문을 주고받았을 때처럼 턱을 매만지다 대답했다.

“류스이.”

이름을 밝히는 데 고민할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청년이 파헤칠 틈도 주지 않은 채, 그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말을 덧붙였다.

“지금까지 받은 이름 중에서는 그게 제일 마음에 들어.”

당연히 석연치 않았으나 청년은 지적하는 대신 다른 질문을 이었다.

“류스이 나리는 어디에서 오셨나요?”

이제 남자, 류스이는 지체 없이 답변했다.

“고정적으로 지내는 곳은 없고, 몇 주 전까지 북동쪽에서 머물다가 내려가는 길이었어. 남쪽에 사는 친구에게 초대받았거든. 그 친구가 만드는 술이 기가 막혀서, 거절할 수 없었지.”

황홀한 표정만으로는 이미 한잔 걸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둘은 멈추었던 발걸음을 옮기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한 사람은 질문만 하고 한 사람은 대답만 하는 일방통행이었지만, 별 상관없을 것이었다.

“그럼 나그네이신 건가요?”

“그렇기는 한데, 마음에 드는 장소에서는 오래 머물기도 해.”

“어떤 곳을 좋아하시는데요?”

“바람이 많이 불거나, 바다가 보이거나, 하늘이 가까운 높은 곳.”

“바다를 보신 적 있으세요?”

“당연하지, 서쪽에서 바다를 지나왔는걸.”

“와….”

바다라는 단어가 처음 언급됐을 때부터 흥미가 샘솟던 가슴은 이제 감탄으로 완전히 찼다. 이런 조그만 산골에서 나고 자란 인간에게 바다는 크나큰 동경 그 자체였으므로. 한편으로는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이 땅 밖에서 오신 거군요….”

바다 건너─아는 사람이 없거나 적은 미지─에서 온 존재라면 이렇게까지 특이해도 납득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나먼 땅 어디에서는 류스이 같은 사람이 오히려 흔할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 먼 곳에서 여기까지는 왜 오신 거예요?”

“형제를 따라왔어.”

“형제요?”

“그래, 혼자 보낼 수 없어서….”

청년은 류스이와 똑 닮은 존재에 대해 상상해 보려 애썼다. 쉽게 되지는 않았지만. 그러다 그가 제게 맨 처음 건넸던 말을 상기해 냈는데, 혹시나 하다가도 역시나 아닐 거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검은색에 복슬복슬하고 좋은 냄새가 난다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뿔이니 비늘이니 하는 건 여지없이 비현실적이었다. 예컨대 청년은 류스이가 보기 드문 신기한 동물을 기르고 있고, 수레 위에서 잠이 든 사이 돌연 사라져 찾고 있는 것이라고 추측했다. 마침 이때 류스이가 우레 같은 큰소리를 내지르지 않았다면 청년은 그가 남자 사람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기억해낼 수 있었을 터였다.

“그리고 이 세상이 나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지!”

“핫하!” 류스이는 호탕한 웃음을 덧댔다. 곧 넓은 보폭으로 앞서 나가는 모습이 정말 기분 좋아 보였기 때문에 청년은 나직이 겹친 말까지는 듣지 못 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찰나지만 씁쓸한 기운이 감돈 것도 당연히 알 방법이 없었다.

 

하나뿐이라고는 해도 마을 자체가 작은 탓에 식당은 그리 크지 않았다. 취급하는 음식 종류도 많지 않았다. 더구나 긴 흉년으로 재료 수급도 어려워 실질적으로 먹을 수 있는 종류는 한두 가지가 전부였다. 원래대로였다면 고기와 채소 전부 적절한 비율로 들어가 있었을 국은, 고기는 두어 점과 어디에서 캐왔는지 모를 풀이 떠다니는 게 전부였다. 나오는 게 이러니 저들 외에는 손님도 없었다.

분명 밥을 사는 입장임에도 끊이지는 않는 죄스러운 기분은, 류스이가 심각한 표정이 되어 팔짱까지 끼고 국그릇을 뚫어지게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가속했다. 이유가 없다는 건 알았으나 청년은 죽을죄를 지었다고 빌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마침내 마주 앉은 남자가 고개를 들고 가늘어진 눈을 보였을 때, 아주 잠깐이지만 청년은 숨을 멈추었다.

“이 고기, 일부러 도축한 건가?”

그 탓에 귀에 꽂힌 말을 인지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네, 식재료를 얻기 위해 길러서 잡은 걸 거예요.”

당연한 사실 같지만, 그에게는 당연한 사실이 아닐지 모른다고 이제는 생각할 수 있었다.

“고기 말고 다른 건?”

“산에서 채집한 거예요.”

“흐음.”

류스이는 다시 그릇으로 눈을 돌렸다. 끊임없이 고민했으나 결론은 변하지 않았다.

“이래서는 받았다고 할 수 없는데….”

받았다고 인정하는 것은 그 해 추수철에 수확한 농작물, 혹은 그것으로 만든 음식에 한하기로 했으니. 더구나 살생으로 떠난 생명이 포함되어 있다면 더더욱 받은 셈 칠 수 없었다. 물론 더 이상 베풀지 않기로 결정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맹세를 유지한 시간도 짧지 않았던 만큼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뭘까, 도대체.’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 청년으로서는 보잘것없는 밥 한 끼에 고뇌하는 모습이 의아스럽게 비칠 뿐이었다. 이 같은 기분은 류스이가 갑자기 두 눈을 감고 합장했을 때 훨씬 깊어졌다. 머잖아 주홍색 눈동자가 눈꺼풀 밑에서 모습을 보였으나 청년은 감히 의미를 물을 수 없었다. 차분한 기품 같은 것이 그 안에 넘치듯 어려 있던 탓이었다. 부득이하게 떠나간 생명을 위한 애도인 만큼 엄숙한 것이 당연했다.

수저가 같이 나왔으나 류스이는 그릇을 한 손에 든 채 꼭 술이라도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켰다. 청년이 우려한 것과 달리 그는 나름 흡족한 기색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입에 맞는지, 부족하지는 않은지 묻고 싶어진 것은 아니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대화가 재개된 것은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사이가 있었다면 곤란했겠는걸.”

“사이?”

“좀 전에 말했던 내 형제.”

류스이는 깔끔하게 빈 그릇을 내려놓고 입가를 훔치며 말했다.

“고기를 안 먹거든. 뭐, 나도 고기보다는 잘 익은 과일을 더 좋아하지만.”

그렇게 덧붙이는 눈동자가 굴러간 곳은 사과가 든 망태였다. 청년은 다급히 소리를 냈다.

“말씀드렸지만, 이건….”

“알아, 안다고.”

기대했던 반응이라는 듯이 류스이는 쿡쿡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러다가도 빠르게 진지한 낯빛으로 바꾸고서는.

“그래도…. 줄 생각 없어?”

“예, 없어요.”

청했으나 청년은 단칼에 거절했다. 남자는 “그래, 알았다.” 이번에도 시원하게 답했으나 실망을 삭이지 못 했는지 입을 샐쭉거렸다. 청년은 미안한 기분을 지우고 그를 달래기 위해서라도 화제를 바꿀 필요를 느꼈다.

“형제분은 어떤 사람인가요? 나리하고 닮았나요?”

청년은 남자와 닮은 사람을 상상해 보고자 한 번 더 애쓰며 물었다. 다행히 류스이는 의도대로 따라와 주었다.

“닮았을 수도 있고 안 닮았을 수도 있지.”

그는 습관대로 턱을 쓸며 말했다.

“공통점만큼이나 차이점도 많거든. 너는 형제가 없나?”

“예, 외아들이에요.”

“그렇다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군. 됨됨이를 묻는 거라면, 신뢰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이지. 다정한 성격이지만 엄할 때는 엄하기도 하고. 어릴 때 나를 자주 보살펴 줬어.”

“형님, 이신가요?”

“그래, 나보다 앞서 태어났어. 지금은 내가 더 크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틀림없이 그러리라고 청년은 생각했다. 류스이 정도로 풍채 좋은 사람은 흔치 않을 테니 말이다. 청년은 다시 물었다.

“조금 전에 여쭈었을 때 형제분을 따라오셨다고 했죠. 혼자 보낼 수 없었다고….”

류스이는 대답했다.

“그는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거든.”

잇대어진 한마디에는 씁쓰름한 기운이 섞여 있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 그렇게 됐지.”

하지만 이번에도 청년은 알아차리지 못 했다. 그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도 괜찮을지 모르겠다고 느끼는 게 다였다.

“형님께서는 여행이라도 하고 싶으셨던 건가요?”

대체로 지연 없이 답변하던 류스이는, 이 질문에서는 조금 생각하는 낌새를 보였다. 고민한다기보다는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눈치였다. 잠시 뒤 그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말에 담긴 내용에 비해 몹시 담담했다.

“고토를 왜 떠났는지 묻는 거라면, 가족 문제 때문이었어. 우리가 태어나면서 집안 분위기가 안 좋아졌거든. 먼저 태어난 형제는 나보다 고난을 길게 겪었고, 그만큼 견디기 힘들어했지. 외로워할 걸 생각하니 도저히 혼자 보낼 수 없었어.”

“아….”

청년은 어쩔 줄 모르겠다는 감정이 심장을 쥐락펴락하는 걸 느꼈다.

“죄송해요.”

“뭐가?”

청년이 자책한 게 무색하게 류스이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영문 모를 상황에 도리어 멋쩍어졌는지 그는 긴 머리를 들추고 목덜미를 쓸어내리다 말했다.

“왜 사과하는지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면 나한테 사과를 줘.”

말장난 같지만 장난이 아니라는 걸 화자도 청자도 알았다.

“아뇨, 그건….”

나올 답이 거절뿐이라는 것도 전부 알았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두 사람은 대로변 반대편에 있는 밭으로 갔다. 아침에 청년이 사과를 구해온 곳으로,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갔다기보다는 되는 대로 걷는 듯한 류스이를 따르다 보니 당도했을 뿐이었다. 오는 동안 한 번도 길을 묻지 않기는 했지만, 그라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근거가 없다는 걸 자각하면서도─이 청년을 두드렸다.

사과나무밭은 언덕 밑으로 보이는 논에 비하면 손바닥 너비밖에 되지 않았지만, 다닥다닥 붙은 나무가 근사한 행렬을 이루어 제법 그럴듯한 풍경으로 보였다. 오랜 가뭄으로 나무가 마르지만 않았다면 장관이라 불러도 괜찮을 것이었다.

사유지라 허가 없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걸 표현하고자 세워놓은 울타리를 류스이는 아무렇지 않게 뛰어넘어 들어갔다. 밭 주인과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면 청년은 그를 제지하느라 진땀을 뺐을 것이었다. 똑같이 따라 들어가는 게 아니라.

수확은 진즉 끝났기 때문에 나무에 달린 건 떨어지다 만 이파리뿐이었다. 이따금 과일이 굴러다니는 게 눈에 띄었으나 상품 가치가 있기는커녕 사람이 먹지도 못 할 만큼 상한 것뿐이라 의미가 없었다. 그도 모르는 것 같지는 않은데, 청년은 류스이가 무슨 목적으로 나무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따금 몸을 낮추고 앉아 흙을 헤집는 이유도, 맨발로 땅을 박차는 이유도, 눈부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유도 전부 몰랐다.

그는 한참 만에 청년 곁으로 돌아와 말했다.

“이런 땅에서는 그 두 개가 전부였겠군.”

말에 빠진 부분이 많았으나 청년은 곧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와 나눈 대화를 생각한다면 파악하지 못 하는 게 이상했다. 청년은 메고 있는 망태를 곁눈질했다. 잘 익은 사과는 옅은 햇살 속에서도 반질반질 빛났다.

“네, 올해 수확한 것 중 뛰어나다고 할 만한 건 이게 전부예요. 겨우 두 개.”

“흠….”

당장 익년에는 겨우라는 말조차 할 수 없게 될 거라고, 미래를 예언하는 대신 류스이는 물었다.

“다른 과실은 어디 있지? 다 버렸나?”

“밭 주인 어르신네 창고에 있을 거예요. 그나마 빛깔이라도 괜찮은 건 이웃 마을 시장에 내다 팔고, 남은 건 마을 사람들끼리 나눠 먹어요.”

있는 사실을 그대로 읊었을 뿐인 한 마디가 많은 것을 바꾸게 되리라는 것을, 지금 청년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사당에 공물을 바치고 난 다음에.”

가늘었던 눈동자가 한순간 커졌다.

“사당이 있어?”

“네, 저기, 논에서 이어지는 산기슭 안쪽에요.”

류스이는 곧장 청년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다보았다. 산 안에 있는 만큼 여기에서는 보일 턱이 없었지만, 어떻게든 찾아보고자 애쓰기라도 하듯 그는 시선을 거두지 못 했다. 청년은 남자가 느끼고 있을 복잡한 기분까지 간파하지는 못 했고 설령 안다고 해도 왜 그런 기분인지 이해하지 못 하겠지만, 하나만큼은 분명히 파악했다.

“가보실래요?”

지금 그에게는 분명히 원하는 게 있다는 점. 류스이가 시선을 마주해 주었을 때 추측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주민들이 채집과 수렵을 위해 이용하는 산길은 따로 있었고 구태여 자주 찾을 까닭이 없는 장소인 만큼, 사당으로 이어지는 길은 초입부터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조만간 흙 위로 추락할 나뭇잎과 제멋대로 자라난 가지들은 해를 완전히 가렸고, 적막함에 비례해 낙엽 밟히는 소리가 아주 크게 울렸다. 어설프게나마 길을 닦아놓은 게 뜻밖이라는 감상이 들 정도였다.

“비가 멈춘 지는 얼마나 되었지?”

이 외에는 풀벌레 울음만 간간이 들려오는 산행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류스이 쪽이었다.

“여우비 말고 비 같은 비가 내린 지는 몇 년 되었어요. 그것도 겨우 흙을 적실 정도였지만….”

청년이 앞서가고 있던 탓에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류스이는 그가 낙담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목소리에 담긴 부정적인 기색은 한 마디씩 거듭할 때마다 짙어졌다.

“30년 전쯤 북서 지역에 대홍수가 일어난 뒤로 이 일대가 전부 가물어졌다고 들었어요. 처음 몇 년간은 괜찮았는데, 갈수록 비가 덜 오기 시작해 오늘 같이 된 거죠. 흉작이 이어지니 가축을 기르는 것도 힘들어지고, 산과 들에 사는 동물들도 굶어 죽어 수렵도 안 되고, 채집할 거리도 줄어들고….”

깊은 한숨이 명치부터 끓어올랐으나 청년은 어떻게든 참고자 노력했다. 근심이 마음대로 튀어 나가기 전에 말로써 덮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다들 노력하고 있어요. 마을, 아니, 이 지역을 벗어나 다른 땅으로 떠나든, 제가 그러듯 버텨보든….”

“…….”

류스이는 반응하지 않았다.

‘30년이라, 그렇게 됐군.’

그저 되짚을 뿐이었다.

 

인간에게는 인생 절반에 해당하는 긴 세월이지만, 신적인 존재에게는 찰나보다 조금 길 뿐인 시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바로 어제 겪은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날 류스이가 내린 비는 절망이었다. 은혜를 배반한 입장에서도 절망이었고, 배신당한 입장에서도 절망이었다. 상처 입은 형제를 데리고 떠나온 뒤에도 사그라지지 못 한 분노는 낙뢰가 되어 지면을 태우고, 폭풍과 난운을 불러 모든 걸 휩쓸었다. 역린을 눌린 것처럼 날뛰는 감정은 정신이 든 형제가 똑같이 노여워하는 대신 비탄을 토로했을 때 더욱더 증폭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눈물과 혼란과 두려움이 섞인 목소리는 확연히 떨리고 있었다.

“우리가 무얼 잘못한 걸까?”

태어나길 자비심으로 가득 찬 존재는 낮은 존재를 탓할 수 없었다. 그것은 곧 스스로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오, 오랫동안 지켜져 온 이치를 부수는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고통밖에 남지 않을 터였다. 배신당한 호의가 만들고 원인 없는 결과가 엮은 자책이라는 굴레에 얽매인 채로. 이미 그러기 시작한 형제를 류스이는 안쓰러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더는 형이 괴롭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우리 몫이 아닌 것을 짊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설령 이게 자애로운 생물로서 금기를 깨는 행동일지라도 류스이는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린 잘못한 거 없어.”

끝내는 존엄한 존재로 고스란히 존재하기를 포기했다.

“그들은 대가를 치렀을 뿐이다.”

그리된 순간에도 가슴 속 업화는 계속해서 타올랐다. 언젠가 이 불이 꺼지고 나면 후회와 상실, 두 가지로 이루어진 슬픔밖에는 남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으나 류스이는 멈출 수 없었다. 당장은 스스로 책망할 수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되었다. 이제 다른 누군가가 아닌 저를 위해 울기 시작한 형제와 고결을 상실한 어떤 짐승을 위해서라도.

신이라도 인과는 피할 수 없어서 형제는 과거와 같은 상태로 돌아갈 수 없었다. 거룩함을 버리며 맹세를 깬 동생과 달리 형은 여전히 자애를 간직하였으나 의지와 무관하게 힘을 쓸 수 없었다. 부러진 뿔이 다시 자라는 데는 틀림없이 긴 시간이 걸릴 터며, 다 자란다 해도 처음처럼 단단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연민을 느낄 새면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배신감은 본심을 의심케 해 자괴감을 낳을 것이었고 말이다. 육신과 정신 전부에 상처 입은 그는 형제와는 다른 의미에서 온전한 존재로 존재할 수 없게 되었고, 혈육에게 기대지 않으면 권능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었으며, 이는 동생이 화라는 불씨를 오랫동안 잠재우지 못 한 가장 큰 까닭이 되었다.

할 수 없는 형과 하지 않는 동생은 끝내 땅에 내린 자비를 거두었다. 대지가 메말라 가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고 고초를 겪게 된 다른 생명에게는 죄스러웠지만, 그들로서는 도리가 없었다. 분노 속에 흩뿌렸던 비구름 몇 조각이 남아 한동안은 비가 내릴지도 몰랐으나 오래 가지 못 할 건 자명했다. 그리고 그쯤에는 형제도 서서히 잊혀 갈 터였다. 언젠가는 그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지워져 누구도 알아보지 못 하게 된 채, 영영 사라져 버릴 것이었다.

 

그렇게 믿어온 시간만큼 류스이는 적잖게 놀랐다. 비탈진 산길 한구석 평평한 지대에 세워진 사당은 몇십 년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만큼 근사하지는 않아도, 형태적으로는 흠잡을 데 없이 만들어져 있었다. 관리도 충실히 하는지 주변이 깨끗이 유지된 점도 눈에 띄었고 말이다. 주위를 에워싼 나무가 죽기 직전으로 앙상하고 곳곳에 심긴 꽃도 피지 못 한 채 쓰러져 있지 않았다면 훨씬 보기 좋았을 터였다. 제단 뒤에는 돌을 깎아 만든 조그만 조각상이 두 개 놓여있었는데, 실제와 다소 차이가 있어도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류스이는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생겼던가.’

보면 볼수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확하게는 헛웃음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을지도 몰랐다. 이는 비단 조각상에 가미된 상상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감성적인 형제가 이 자리에 함께 있었다면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겠다고 류스이는 생각했다.

우리는 아직 잊히지 않았다고.

“이건 잘 못 만든 것 같은데. 북슬북슬한 느낌이 하나도 없잖아. 몸집도 옆에 있는 것과 똑같고.”

“예?”

영문 모를 소리를 하면서 의미 모를 미소를 거두지 않는 남자를 청년은 난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류스이는 기쁨을 감추지 않았지만 말이다. 더는 인간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로 했거늘,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정은 역시 억누를 수 없었다. 그는 사당 주위를 한 바퀴 돈 뒤 제자리로 돌아와 물었다.

“이건 언제 세워진 건가?”

청년이 답했다.

“저희 아버지 대에요.”

시선은 제단 뒤 조각상으로 움직였다.

“조부께서 살아계실 무렵이었어요. 그분께서는 여기 있는 천신들을 직접 보신 적 있는데, 그분이 해주신 설명을 듣고 어른들이 세우셨죠. 비록 흉년이 이어지고 있지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이분들이 내린 은혜 덕이라고요.”

직접 보고도 만든 게 저런 거라니 어이가 없다는 감상은 뒤이어 나온 은혜라는 말에 말끔히 사그라졌다. 옆에 있는 남자가 굳은 것도 모른 채 청년은 계속해서 말했다.

“저도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잃고서 떠나고 가뭄이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신이 주신 은혜를 배반해서는 안 된다고요.”

어깨에 걸치고 있던 망태, 그 안에 든 물건을 들어 보이는 얼굴은 면목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목소리에는 또렷한 소신이 배어있었다.

“이 사과도 조만간 다른 수확물과 함께 제단에 올릴 거예요. 그래서 드릴 수가 없었어요. 나리와 재보를 바꾼 다음 그걸 팔면 더 좋은 물건을 구할 수 있겠지만, 이 땅에서 난 게 아니면 의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요.”

누군가에게는 땀과 보람, 누군가에게는 화폐,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먹을거리일 과실은 본인에게 있어 굉장히 귀중한 물건임을 상기하며, 청년은 마주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지금이라면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느꼈던 것과 달리 류스이는 비웃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솟구쳤다.

“누군가는 내 배 채울 것도 없는 마당에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하지만, 저는 확신해요. 모습을 감추신 데는 부득이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요. 또 언젠가 돌아와 전처럼 자비를 베풀어 주시리라는 걸요.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때가 되면 조금 더 제대로 은혜를 갚을 수 있게 되겠죠.”

말을 마치고 청년은 웃었다. 굳건한 신념 없이는 지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는 어디에서 지켜보고 있을 신께 기도를 올린 뒤 제자리로 돌아왔다. 혼자 너무 많은 말을 했고, 무례를 범한 건지도 모르겠다는 자각이 든 것은 그때였다.

“그…. 죄송해요, 나리.”

송구한 기색에 류스이는 물었다.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어떤 점이?”

청년은 답했다.

“여러 가지로요.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을 말을 저 혼자 떠벌린 점이나, 결국 나리가 원하시는 것은 드리지 못 하는 점이나…. 아버지께서는 귀인을 만나면 잘 대접해 드리라 가르쳐주기도 하셨는데, 그러지 못 하게 된 게 아쉬워요.”

겸연쩍은 표정을 감추고자 애쓰며 청년은 류스이를 바라보았다. 종일 동행하며 이제는 새삼스럽게 느껴질 것도 없겠다고 생각했건만, 그는 변함없이 기이한 존재로 눈 안에 비쳤다. 그래도 처음과 비교해 다른 점이 있다면 그가 여기 있다는 사실 자체가 따뜻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만일 저가 믿는 신이 가까운 자리에서 굽어살펴 보아준다면 이런 분위기이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훌륭한 아버지를 두었군.”

하산하는 길에 류스이가 말했다.

“네, 그렇죠.”

청년은 긍정했다. 본인이 칭찬받아도 이 정도로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 뿌듯한 심정을 읽었는지 류스이는 웃었다.

“우리 아버지가 그 정도만 되었어도 내가 여기 있지는 않았을 텐데.”

덧대는 목소리에는 쌉쌀한 기색이 조금 섞여 있었지만 말이다. 청년은 기억을 곱씹고서 물었다.

“가족 문제 때문에 여기 오셨다고 하셨죠?”

“그래.”

류스이가 답했다.

“아버지가 그 중심에 있었지. 일족 사이에서는 왕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니까, 거스르는 행동에도 한계가 있었어.”

평범한─또 효를 아는─사람이라면 입에 올릴 수도, 올릴 일도 없는 표현이 줄줄이 나오자 청년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남자가 태어난 땅은 대체 어떤 곳일까 하는 근원적인 의문도 잇따랐다.

“어떤 분이셨는지 여쭤보아도 될까요?”

류스이는 유구한 습관을 내보이다 대답했다.

“흠…. 유황불에 일곱 번 태워도 모자랄 남자?”

“예?”

“농담이다.”

과연 정말 농담일까? 여기까지만 들어도 의심스러운 것을, 다음 말까지 들었을 때 청년은 정말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어차피 타지도 않겠지만.”

 

하산하는 데 이용한 길은 주거지 근처 공터로 이어졌다. 해가 확연히 짧아진 시기라 마을로 완전히 내려왔을 때는 조금 어둑해진 뒤였다. 아직 완연하지는 않으나 점차 색을 갖추어 가는 노을과 그 빛을 머금어 붉어지는 풍경을 등지고 두 사람은 걸었다. 청년은 이 기묘한 동행에 끝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직감했는데, 당사자에게 바로 물어볼 수는 없었다. 앞서가던 류스이가 불현듯 걸음을 멈추더니 우렁찬 소리를 내지른 탓이었다.

“사이!”

그가 시선이 닿은 곳에는 낯선 남자가 한 명 있었다. 거리를 둔 채 앞서 걷던 그는 부르는 소리에 곧장 돌아보았다. 청년은 그 이름을 멀지 않은 과거에 들었음을 이내 기억해 냈다.

마침내 두 번째 기이와 마주한 것이었다.

류스이는 아무런 징조도 없이 잽싸게 달려 나갔고 청년은 얼떨결에 그를 따라 뛰었다. 자세한 모습을 판별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 청년은 류스이가 “닮았을 수도 있고 안 닮았을 수도 있지.”라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기준을 어디에 두고 말한 건지는 몰라도, 제삼자가 보기에 두 사람은 닮은 점보다 닮지 않은 점이 훨씬 뚜렷했다. 형제라는 사실을 앞서 듣지 못 했다면 혈육이라고는 상상하지 못 했을 것이었다.

사이는 류스이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젊은 남자로, 형제와 마찬가지로 장신이었으나 어깨가 넓지 않아 상대적으로 작게 느껴졌다. 머리카락은 잘 익은 벼 색에 윤기 나게 자란 동생과 대조적으로 짙은 풀빛이 감도는 검은색이 고붓하게 뻗어 있었는데, 청년은 거기에서 무엇인가 생각날 듯 말 듯 한 기분을 느꼈다. 외견상 공통점은 눈이 전부로 그것만큼은 형제가 똑같은 한가을 단풍색을 띠고 있었다.

옷차림은 머리에 맞춘 듯한 검은색 기조로, 전반적으로 형제가 걸친 것과 비슷한 형태였다. 색상 외에 차이점이 있다면 동생과 달리 형은 맨발이 아니라는 점이었는데, 흔히 볼 수 있는 나막신이나 짚신이 아닌 뒤꿈치에만 굽이 붙어 복사뼈를 다 감싸는 독특한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런데도 동생보다는 작았다. 형제와 달리 요란한 장신구는 착용하지 않아 상대적으로 수수하다고 할 만했으나 특이한 부분이 하나 있었다. 두 팔 전부 강한 불에 그을린 것처럼 새까맸는데, 꼭 태어나길 저렇게 태어난 것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신발과 마찬가지로 바다 건너에만 나는 신기한 재질로 만든 의류인가, 청년으로서는 그 정도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더불어 조금 전 생각날 듯 말 듯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해 냈는데, 형제가 대화를 시작했을 무렵에 알아차렸다.

“여태 어디 있었어?”

질문한 것은 사이 쪽이었다. 류스이는 대답했다.

“너를 찾아다녔지. 아침에 일어났더니 사라져 있었잖아.”

역시 그가 찾던 건 형제였구나, 류스이가 했던 설명을 되새긴 순간 청년은 혼란을 느꼈다. 그보다 조금 더 작은 남자라는 점 하나만 빼면 제대로 된 부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검은색이긴 하지만 털이 복슬복슬한 건 아니고 (류스이가 매단 것보다 더 탐스러운 털 장식을 하고 있기는 했다) 좋은 냄새가 나는지는 더 가까이 가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나 (류스이가 가진 체취와 비슷하다면 그 역시 좋은 냄새가 날 것 같기는 했다) 지금으로써는 확인할 수 없었다. 뿔도 비늘도 없었다. 있을 리가 없었다. 청년은 해석을 요구하듯 동생을 보았으나 그는 형과 대화하는 데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없어진 건 너잖아. 물 마시러 간다고 해놓고 아무리 기다려도 오질 않아서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류스이는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튕기고는 당당하게 답했다.

“산비탈 밑에 잠자기 적당해 보이는 푹신푹신한 짚 더미가 보이는데,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지나치는 건 이상하잖아.”

“그런 건 지나쳐도 돼….”

사이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선 동생을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류스이가 기색을 바꾼 것은 형이 씁쓸한 눈으로 “나 한나절이나 혼자 있었어.”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을 때였다.

“미안.”

비로소 깨달았다는 낌새 다음으로는 자책이 두 눈에 비쳤다. 형이라고 해서 동생에게 의존하며 살고 싶지는 않았으나, 혼자서도 존재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권능을 회복하려면 어느 정도 세월이 더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사정을 모르는 인간이 보기에는 실랑이를 벌여대도 우애가 깊구나, 그리 느낄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또 무슨 사고를 치고 있었어?”

조금 뒤 재개된 대화에서 이번에도 먼저 물은 건 사이였다. 사고라는 말에 류스이는 못마땅하다는 투로 반응했다.

“사고라니, 여기 이 친구하고 어울려 놀았을 뿐인데.”

말이 꽂히기 무섭게 시선이 청년에게 다가왔다. 사이가 동생과 저를 노골적으로 번갈아 보자 청년은 목석처럼 굳어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단지 형제가 인간과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에 놀랐을 뿐인 것도 모르고, 등을 타고 흐르는 긴장감에 젖어만 갔다. 똑같은 상황을 오늘 아침에 겪었다는 자각이 든 것은 조금 뒤였다.

“동생이 폐를 끼쳤다면 미안해.”

이내 건네진 말에 깔끔하게 날아가 버렸지만 말이다. 사람이 너무 놀라도 얼이 빠진다는 것을 청년은 새삼스럽게 배웠다.

“폐 같은 거 안 끼쳤다만. 국 한 그릇 얻어먹고 돌아다닌 게 다라고.”

청년을 깨운 것은 역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진 류스이였다. 아직 얼떨떨한 기분에서 헤어나지 못 한 채로 청년은 거들었다.

“마, 맞아요. 류스이 나리 덕에 저도 오늘 즐거웠는걸요.”

“류스이?”

동생이 어깨를 으쓱했을 때 그는 “아.” 깨달았다는 눈치가 되었다. 그 이름이구나.

형제가 찰나에 무엇을 주고받았는지도 모르고 청년은 계속해서 말했다. 한 마디씩 내쉴 때마다 얼굴에는 흐뭇한 기색이 번졌다. 아닌 게 아니라 이게 바로 그가 떠안고 있는 솔직한 마음, 진심이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즐거웠어요. 이렇게 작은 마을에 외지인이, 그것도 바다 건너에서 왔다는 분과 만날 수 있어서….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이제는 둘이나 만난 게 되었네요.” 청년은 미소와 함께 덧붙였다. 절대적으로 긴 시간은 아니었으나 평생 잊지 못 할 추억이 될 건 명백했다. 해가 지면 반드시 밤이 오고 달이 지면 반드시 아침이 된다. 그렇게 고정된 진리처럼,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땅에도 기이한 일은 벌어질 수 있었다. 잠깐 사이 인상적으로 저물어 가는 하늘을 보고 있자니 더 크게 와 닿았다. 감사와 아쉬움을 삼키고 청년은 조금 전 하려다 못 한 말을 건넸다.

“이제 떠나시는 거죠?”

류스이가 말했다.

“그래, 친구가 기다리고 있으니. 더 늦었다가는 이시가미한테 한 소리 듣겠지. 저번처럼.”

“그때는 그럴 만했어. 지각해 놓고서는 술이 모자란다고 날뛰었잖아, 네가.”

형제끼리만 공유하는 기억,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들어도 이제는 괜찮았다. 그들은 그런 존재라고─그렇기 때문에 이 인연이 의미 있는 것임을─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덕인지는 몰랐지만, 마음을 먹는 것부터 결정하기까지 아주 짧은 시간만이 걸렸다.

“나리, 이거 드릴게요.”

청년은 망태에서 사과를 꺼내 내밀었다. 당연한 반응일 테지만, 류스이는 만면에 한가득 어리둥절한 기색을 보였다. 달라고 부탁할 때는 무안해질 정도로 격하게 거부하더니 이제 와서 뜬금없이 주려고 한다는, 어이없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지금은 이것이 그에게 얼마나 가치 있고 귀중한 물건인지 알기 때문에 당황한 데 가까웠다. 청년도 그 심정을 읽었고 그래서 더 주고 싶다는 바람을 느꼈다.

“말씀드렸잖아요, 아버지가 귀인을 만나면 대접하라 가르쳐주셨다고요. 사과는 내년에 또 열릴 테지만, 나리는 지금 헤어지면 다시는 못 뵐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나리와 나리의 형님 정도 되는 귀인이라면 신께서도 이해하고 기다려 주시지 않을까요?”

“그렇게 믿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고요.” 청년은 스스로 한 말에 스스로 웃고서는 류스이에게 사과를 쥐여 주었다. 이어서는 사이에게도 남은 사과를 건넸다.

“고맙다.”

“고마워….”

그렇게까지 들었음에도, 형제는 변함없이 얼떨떨한 낯으로 손에 들린 보물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몸조심하시고요.”

청년은 마지막까지 미소를 잃지 않고 돌아갔다. 비록 망태는 비어버렸지만, 희망을 포함한 많은 것을 가슴에 담은 채 내일로 나아갔다.

 

한밤중 산만큼 어두운 장소가 이 땅 위에는 달리 없었으나 류스이는 온전히 앞을 분간할 수 있었다. 비단 산뿐만이 아니었다. 하늘도, 바다도, 심지어는 불길 속까지도 알 수 있었다. 이 세상에 그가 구별하지 못 하는 것은 제 심경 하나뿐이었다. 다만 어째서인지, 그조차 지금은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능선에 이르렀을 때 뒤따라오던 사이가 말했다.

“아직도 화가 나 있는 줄 알았어.”

류스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형도 동생을 따라 발을 멈추었다. 뒤돌아 산 밑을 보자 지상에 뜬 별처럼 깜빡이는 빛무리가 눈에 비쳤다. 류스이는 그것들이 단순한 등불에 불과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하나는 높은 존재로서 가진 순결함이며, 다른 하나는 존엄이고, 그 옆에 또 다른 하나는 자애였다. 계속해서 의무, 호의, 선심, 마지막으로 빛난 것은 사랑이었다. 어느 날 전부 버렸다고 여겼던 것들이 거기 모여 있었다.

나뭇가지와 낙엽을 휩쓸던 밤바람이 꼬리를 훑고 지나갔을 때 류스이는 비로소 시선을 옮길 수 있었다. 형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류스이는 버릇처럼 내뱉곤 했던 말을 기억했다.

“네가 원한다면 내가 대신 비를 내려줄 수 있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형제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때마다 형은 짙게 남은 흉터에 괴로워하면서도 거절했다. 저들을 구원하고 싶은 게 아닌지 물으면 이렇게 대답했다.

“당연히 그러고 싶지만, 내가 가장 먼저 구원하고 싶은 건 다른 데 있어.”

너도 언젠가 깨닫게 되겠지.

“네가 나보다 한참은 더 살았다는 걸 느낄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류스이는 멋쩍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너를 누가 키웠는데.”

기막혀하는 답변과 대조적으로 사이는 평온했다. 혈육을 바라보는 눈에는 분명한 이해가 깃들어 있었다. 이윽고 새까만 비늘로 뒤덮인 손이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을 때─어린 시절 곧잘 그랬던 것처럼─류스이는 혼자가 아니라 다행인 사람은 그 하나뿐이 아님을 알았다.

류스이는 곧 꼬리에 파묻어 두었던 사과를 꺼내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잘 익은 과일은 먹음직스러운 빛깔만큼이나 달콤했고, 식감 역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끈덕지게 종용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과즙이 묻은 입가를 훔치고 난 뒤 류스이는 먼 옛날 새겼던 맹세를 기억했다. 그 해 수확한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 땅에서 직접 길러낸 게 아니면 안 된다, 주된 과정에서 다른 영혼을 해치면 안 된다 등 몇 가지 조건이 있기는 했으나 요지는 간단했다.

받는다면 반드시 돌려준다.

이렇게 좋은 걸 받고서도 모른 척하는 것은, 비록 고결함을 잃은 지 오래되었더라도, 섬김받는 존재로서 도리가 아닐 터였다.

“내가 아직 화가 나 있는지 물었지, 형제여.”

류스이가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잘 모르겠어. 그렇지만….”

“……지금만큼은 괜찮아.”

걸음은 이미 올라온 길을 거꾸로 내려가고 있었다. 완전히 뛰어 내려가기 전 그는 형제를 돌아보았다. 형은 기분을 감추지 않고 미소 지었다.

“기다릴게.”

기특한 심정을 담아 동생을 배웅했다.

“다녀와.”

 

맨 처음 소리가 들렸을 때 청년은 그것이 정말 귓속을 파고든 소리인지 환청인지 판단하지 못 했다. 그도 그럴 게 막 잠에서 깨어난 상황이었고, 땅울림이라 여기기에는 지축이 흔들리는 느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들려왔을 때는 환각이 아닌 실재한 현상임을 확신했지만, 원천을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그것은 짐승이 포효하는 소리 같기도 하고 천둥소리 같기도 했는데 어느 쪽이든 이상했다. 저렇게 크게 울 수 있는 생물은 이 땅에 살지 않고, 천둥이 친다는 것은 곧 비가 내린다는 뜻인데 그리될 전조는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모르고 있었을 뿐이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하지 않아졌다.

툭, 툭….

간헐적으로 시작된 소음은 머잖아 규칙적이고 커다란 굉음으로 발전했다. 청년은 그 소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떠올려 내기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 정도로 생경하고 그 정도로 오래간만이었다. 마침내 깨달은 그가 대문을 열어젖혔을 때는 마을 사람 모두가 나와 비를 맞고 있었다. 거센 물세례에 옷이 젖고 서늘한 새벽공기가 추위를 자아내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침내 고난이 지나갔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저 하늘을 바라보는 데 여념이 없던 청년이 다시금 넋을 잃은 것은, 들꽃 한 송이가 짚단이 쌓인 수레 아래에 피어나 있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였다. 당장 오늘 저녁 귀가할 때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던 생명은, 그가 만난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는 색으로 비를 맞고 있었다. 기이하면서도 따뜻한 기운을 내는 샛노란 빛. 진실을 깨달은 순간, 청년은 눈물로 탄복하며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몇 번이고 되뇌었다.

“감사합니다….”

진정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비록 제멋대로여도 인정 있는 동생과 힘은 없을지언정 온화함은 잃지 않은 형이 자취를 감추어도 그 땅에는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 은혜를 잊지 않고 스스로 구하려 한 이들에게 찾아온 것은, 높은 존재가 굽어살피는 사랑과 돌아온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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