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미 형제 백귀야행 AU 2

공식 백귀야행 기반 AU / 나나미 형제 논CP와 CP 사이

- 모브 캐릭터가 나오나 전개를 위한 설정일 뿐 원작 캐릭터와는 관계 없습니다.

- 원작에서 차용한 설정에 관해 개인적인 해석과 날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완만한 산길 하나를 넘었을 때 바람이 바뀐 것을 먼저 알아차린 것은 동생 쪽이었다. 희미한 습기와 소금 내를 포함한 공기가 머리카락을 만지고 떠나기 무섭게 그는 언덕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뒤따라오던 형제가 느닷없는 상황에 당황해 “류스이!” 이름을 부르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속보로 달려 나가 고대하던 풍경을 눈에 넣었다.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발 디딘 지상과는 또 다른 푸름으로 세계를 넓히는, 영광스러우면서 아름다운 전망이 코앞에 있었다. 류스이는 신령이 아닌 단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생물 중 하나로서 가슴이 벅찬 것을 느꼈다. 최근 몇 년은 내륙만 누벼, 실로 오래간만에 본 점도 크게 작용했을 터였다. 파도를 따라온 바람이 한 번씩 불어닥칠 때마다 얼굴에 미소는 진해졌다.

“봐라, 사이!”

그는 마침내 따라붙은 형제에게도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바다가 있어. 바다가…. 나를 부르고 있어!”

곧 다소 떨어진 곳에 무역항으로 보이는 시가가 있는 걸 발견하지 못 했다면 류스이는 냅다 바다로 뛰어들었을지도 몰랐다. 항구는 아주 크지는 않으나 절대적으로 작지도 않아서 부두에 커다란 배가 여러 척 정박해 있었고, 저잣거리는 길이 복잡한 게 멀리에서 느끼기에도 제법 번화해 보였다. 적어도 이 땅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마을이었다.

“항만은 오랜만이네. 그렇지….”

열린 동공과 벌어진 입. 무심결에 돌아본 얼굴에 드러나 있던 것은 낯익은 희열이었다. 어떠한 예감이라고 할 만한 것이 사이를 치고 지나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저, 류스─”

예감이 현실이 되는 건 그보다 빠른 찰나였고 말이다.

“핫하! 저건 대단히 흥미로워 보이는데, 안 그래!”

형이 말을 다 내쉴 틈도 주지 않은 채 동생은 언덕 밑으로 성큼성큼 뛰어 내려갔다. 목적지는 당연히 항구 마을로, 바다에 뛰어드는 것보다 나은지 아닌지 사이는 당장 판단할 수 없었다. 허리 뒤로 드러난 귤색 꼬리가 뜀박질에 맞추어 흔들릴 때마다 곤란한 기분은 점점 깊어져 한참 동안 넋을 빼앗았다.

 

안에서 본 마을은 멀찍이서 느낀 것보다 훨씬 넓고 복잡했다. 오가게 닦아놓은 길가에는 시전과 좌판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고, 사람으로 이루어진 파도가 쉼 없이 밀어닥쳐 몹시도 요란했다. 바다 건너에서나 볼 법한 물건이 끝없이 즐비해 있는가 하면 맛본 적 없는 음식, 맡아본 적 없는 냄새가 코를 자극하기도 했다. 가장 큰 장관은 부두에 정박해 있는 선박으로 특히 류스이는 연신 감탄하길 멈추지 못 했다.

“인간은 참 빠르게도 나아가는군. 이러다가는 언젠가 하늘도 가르겠어.”

또한 다른 곳 같았다면 자연히 시선을 샀을 형제도 여기에서는 그저 조금 독특한 차림새인 무리 정도로 여겨지는지, 그들에게 특별히 눈길을 주는 사람도 없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 것은 그나마 한적한 골목으로 접어들면서였다. 비록 또─지난번과 같은 이유로─딴 길로 새버리기는 했지만,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떠올린 사이가 제안했다.

“온 김에 선물이라도 사는 건 어때? 안 그래도 얻어먹으러 가는데 빈손으로 가는 것도 실례잖아.”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이시가미가 무얼 필요로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잔뜩 있을 술을 사 가는 건 조금 그럴 테고….”

류스이는 생각에 잠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묘하게 비장한 투로 입을 열었다.

“사이, 나 볼일이 생겼어.”

사이는 의아스러운 눈치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 볼일이라는 게 무엇일지 가닥이 잡힌 것은 저를 보는 얼굴에 웃음기가 감돌기 시작하면서였다. 사이는 저 표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기대감을 느낄 때 곧장 지어 보이는 미소. 이렇게 사람과 재물이 넘치는, 유흥거리가 없을 리 없는 거리에서 혈육이 기대할 만한 일이라면 그것뿐이었다.

“류스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노름은 안 돼. 우리 그럴 시간 없─”

“핫하! 다 따버릴 테니 기다려라!”

이번에도 여지없이 제멋대로 튀어 나가는 뒷모습을 사이는 허탈하게 바라보았다. 붙잡으려 내뻗은 손은 허공을 휘젓다 떨어질 뿐으로, 혼자 남겨졌다는 사실이 와 닿았을 때 형제는 이미 인파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말 그대로 내팽개쳐진 입장에서 한숨을 못 참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었다.

“하아….”

그렇다고 형제에게 화가 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예상을 빗나가는 일이 없구나 하는 자조 섞인 탄식일 뿐이었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기도 했다. 어울려 놀기 좋아하는 성격에 몇십 년을 고립해 지내온 만큼 물 만난 물고기처럼 구는 것도 당연한 일일 터였다. 더는 여태까지처럼 살 까닭이 없었다. 인간에게 배반당해 상처 입은 후처럼, 그보다 더 아득한 옛날 우리가 이 땅에 발붙이기 전처럼…….

되새기는 것만으로 숨을 멈추는 기억을 가진 건 틀림없이 불행한 일이고, 그것이 어떤 징조도 없이 떠오르는 건 더더욱 괴로운 일이었다. 끔찍한 사실은 지금이 마지막이 아닐 것 같다는 점이었다.

‘류스이는 모르겠지.’

‘……모르는 편이 나을 테고.’

최근 오랫동안 쌓아두고 있던 마음속 짐을 덜어 홀가분해 보이는 것을 형으로서 해치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이 기억은 제게 있어 큰 고통인 동시에 혈육에게도 상당한 아픔이었기 때문에, 각자 가진 역린을 자극할 생각이 아니라면 말할 수 없었다. 우리에게 과거란 그런 것이었다.

사이는 안개처럼 낀 근심을 떨치고자 고개를 빠르게 젓고는 혼자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다른 데 집중하면 자연스럽게 잊어버리고 이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 수 있을 터였다. 생각대로 될지 어떨지 확신은 서지 않았다.

 

수많은 물건만큼 수많은 가게가 늘어선 거리에서 사이가 걸음을 멈춘 곳은 어느 골목 모퉁이에 있는 도예공방 앞이었다. 류스이 말마따나 목적지에는 이미 마실 거리가 넘쳐날 터였으므로, 술 자체를 사 가는 것은 좋지 않은 생각 같았다. 그렇다면 술을 마시는 데 필요한 물건은 어떨까? 그거라면 최소한 거절은 당하지 않을 것 같았다.

사이가 선반에 놓인 정종 잔을 살피며 기웃거리자 언뜻 느끼기에도 이 일에 잔뼈가 굵어 보이는 주인이 나와 “천천히 살펴보십시오.” 말을 붙였다. 술잔 몇 개를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을 때 사이는 중요한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는데, 제대로 된 물건을 구하기 위해서는 놀러 나간 동생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원하는 걸 갖지 못 하면 직성이 안 풀리는 성격 때문인지, 영물치고는 다소 과한 수집벽 때문인지 류스이는 좋은 물건과 나쁜 물건을 구별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여기에서 좋고 나쁘다는 건 겉으로 보이는 품질도 있으나 진정 손에 쥘 만한 가치가 있는지, 혹은 가치를 가질 가능성이 내재하여 있는지 여부로 류스이는 이를 보는 눈이 매우 좋았다. 아무 근거도 없이 인간에게 재화를 모으고 사용하는 법을 가르친 게 아닌 셈이었다. 그에 비해 저는 예쁘다 안 예쁘다 정도 밖에 말하지 못 하는 막눈이라 사이는 고민에 빠졌다.

‘이게 괜찮아 보이기는 하는데….’

사이가 고른 것은 매끈한 흰 바탕에 쪽빛으로 흐르는 별무리와 보름달을 표현한 무늬가 새겨진 술잔이었다. 겉보기에도 멋있지만 질감이 부드러운 게 술을 따를 때 제법 기분이 날 같았다. 사이는 손에 든 잔을 한참 만지작거리다 제자리에 올려놓고는 주인에게 물었다.

“나중에 일행과 다시 와도 괜찮을까요?”

“네, 물론입니다. 다만 지금 보신 건 그거 하나 남은 거라, 구매할 마음이 있으시다면 서두르는 게 좋을 겁니다.”

사이는 짧게 고개를 숙이고는 가게를 빠져나왔다. 밑 빠진 독을 채우는 유희를 말리든, 물건을 사서 친구가 기다리고 있는 목적지로 가든, 한시라도 빠르게 형제를 찾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곳 같았다면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고 “머리가 노랗고 몸집이 큰 젊은 남자를 못 보셨나요?” 물어도 찾을 수 있었을 테지만, 이 거리는 규모가 규모인지라 평소처럼 찾아서는 아무리 해도 힘들 것 같았다. 가장 쉬운 방법은 큰소리로 형제를 부르는 것이었으나 (특히 진명을 외친다면 효과가 좋을 것이었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혼란이 생길 게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동생 없이 혼자 권능을 발휘했던 게 언제였는지 떠올려 냈을 때 사이는 결국 다른 의미에서 동생을 불러 찾기 시작했다.

“류스이! 어디 있어?”

좁은 골목을 벗어나 대로로 나왔을 때 사이는 동생을 찾아 주위를 살피는 것 외에도, 신경 쓸 부분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풍성한 꼬리는 어디에 눕고 기댈 때, 또는 몸을 따뜻하게 할 때 큰 도움이 되었으나 이 순간에는 거추장스러운 짐과 다를 바 없었다. 뿔이나 비늘과 달리 적당히 위장할 수 있다고 내놓고 다닌 것이, 지금처럼 예기치 않게 불편해질 거라고 예상이나 했겠는가? 그것도 형제들보다 커다랗고 빽빽해 무거워서는─

일순 집중하던 신경이 과거로 옮겨갔다. 다행히 몰입하기 전에 탈출했지만, 찰나의 순간 앞을 보지 못 한 대가는 빠르게 돌아왔다.

“악!”

“웃….”

가슴에 통증이 퍼지고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가벼운 물체가 흙바닥 위를 나뒹구는 소리가 들렸다. 발생지를 찾아 눈을 돌리자 조그만 주머니가 여러 개 땅에 떨어진 채, 발에 밟히는 걸 겨우 피하고 있었다. 하나를 집어 든 순간 코끝을 간질인 자연 내에 사이는 그것이 찻잎을 엮어놓은 꾸러미라는 걸 알았는데, 어떤 용도로 쓰이는 물건인지 깨닫자 급히 주워 담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보기보다 짜임새 있게 만들어져 찻잎이 든 안쪽까지 흙이 스미지는 않은 것 같았다.

꾸러미를 하나하나 소매에 걸칠 때마다 어떻게 된 정황인지 알 것 같다고 사이는 생각했다. 무의식에 정신을 빼앗긴 바람에 앞을 못 봐 마주 오던 사람과 부딪쳤고, 그 탓에 상대가 메고 있던 봇짐이 흔들려 안에 있던 물건이 쏟아진 거라고. 바로 앞에 저처럼 쭈그려 앉아 허둥지둥하고 있는 존재를 발견하니 확신이 들었다. 다만 정신을 팔고 있던 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사이가 일어서자 똑같이 따라 일어서서는 어떻게 듣기에도 경황없는 목소리를 냈다.

“저, 저, 정말 죄송합니다, 잠시 딴 데를 보는 바람에…. 아.”

그는 많이 잡아봤자 이제 막 성인이 되었을 듯한 어린 여성으로, 제대로 사과하고자 고개를 듦과 동시에 넋이 나가버렸다. 직전까지 코를 쑤시던 흙먼지 냄새가 설명하기 어려운 좋은 냄새로 바뀌어 들이친 탓도 있고, 동시에 눈에 들어온 얼굴이 난생처음 보는 낯인 까닭이 컸다. 당연히 긍정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깨끗하게 흰 피부에 가지런한 이목구비, 검은 머리카락과 대조적인 붉은 눈동자, 그것을 감싸듯이 장식된 기다란 속눈썹….

“이쪽도 미안해요.”

화살처럼 귀에 꽂힌 소리에 소녀는 퍽 정신을 차렸다. 사이는 직전까지 그녀가 어떤 상태였는지 깨닫지 못 한 채 지금껏 주운 물건을 건넸다.

“전부 회수한 거라면 좋겠어요.”

“네, 네에….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손끝과 손끝이 스치고 떨어지자 소녀는 다시 넋을 잃었다. 돌아온 물건도 당장은 그녀에게서 관심을 끌 수 없었다. 그녀가 신경 쓰는 것은 저 반듯한 입술이 언제 또 열려 목소리를 들려줄까, 오로지 그것 하나뿐이었다. 이쯤 되자 사이도 소녀가 이상하리만치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고 소심한 가슴이 조금씩 덜그럭거리는 걸 느꼈다. 하지만 곧장 물러날 수는 없었다. 모처럼 사람과 대화를 튼 지금이 정보를 구할 기회였다.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사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 네! 말씀만 하세요! 제가 아는 거라면 무엇이든 가르쳐드릴 수 있어요! 정말이에요!”

대조적으로 소녀는 격하게 대답했다. 또 목소리를 들었어! 심정까지 읽은 것은 아니나 직감하기는 했는지, 사이는 반사적으로 반걸음쯤 물러서 입을 열었다.

“이 거리에 노름이 벌어지는 장소가 따로 있나요? 특정한 건물이 아니라 노상이라도─”

“아, 그거라면 노름꾼들이 자주 모이는 골목이 있어요. 여기에서 그리 멀지 않아요. 이 길로 쭉 가다 보면 빨간색 간판을 단 식당이 하나 나오는데, 거기에서 왼쪽으로 꺾어져서 들어가다 보면…….”

칼 같이 말을 끊는 행동에서 사이는 익숙한 기분을 느꼈다. 한마디씩 거듭할 때마다 말이 차츰 빨라지는 것조차 동생과 비슷했다. 무엇이 소녀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당사자는 여전히 깨달을 수 없었다.

소녀가 “여기까지예요.” 말했을 때 사이는 비로소 안도를 얻었고, 꾸밈없는 미소와 평온한 목소리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가르쳐줘서 고마워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짤막한 한 마디는 메아리처럼 소녀에게 가 닿았다.

“처, 천만에요! 도움이 되었다면 기뻐요. 진심으로요!”

크나큰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손을 모으고 좋아하는 소녀에게 사이는 변함없는 미소로 인사를 전했다. 그리곤 돌아볼 틈 없이 곧장 가르쳐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류스이가 없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은 없었다. 노름하러 가버린 거라면 분명 그곳에 있을 터였다. 하나뿐인 동생은 그런 사람이었으니.

 

소녀가 알려준 노름판은 장(場)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한 규모 있는 곳이었다. 지금까지 거쳐 온 길에서 목도한 것과 비슷하거나 더 많은 인파가 곳곳에 무리를 이룬 채 웃고 울고 흥분하고 탄식하는 모습이 어쩐지 기이하면서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주위를 살피며 걷던 사이는 머잖아 우뚝 멈추어 섰다. 첫 번째 이유는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받았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머리가 노랗고 몸집이 큰 젊은 남자는 상상 이상으로 눈에 잘 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상기했기 때문이었다.

류스이가 앉아있는 자리에서는 화투를 이용한 도박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패를 뒤집어 가며 진행하는 속도가 매우 빨라 단편적으로 보아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사이 본인에게 이해할 의지가 없던 점도 있었다.

“흐음….”

얼마나 따고 잃었는지는 몰라도 류스이는 흥미로운 표정을 유지하며 놀이에 몰입하고 있었다. 반대편에 자리한 사이는 동생이 과연 언제쯤 제 존재를 알아차릴지, 알아차리지 못 한다면 얼마나 지나 자리에서 일어날지가 궁금해 일부러 조용히 기다렸다. 애석하게도 오래 기다리지는 못 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골몰히 생각하는 버릇을 보일 때까지는 그러려니 싶었으나 소매 밑에서 재물을 여럿 꺼내 그것을 판 위에 턱 올려두었을 때, 그 모습을 본 주변 인간들이 환호를 내지를 때, 거기에 도취해 웃는 낯짝을 보았을 때는 도저히 가만둘 수 없게 되었다.

“류스이!”

붉은 눈동자가 드물게 깜짝 놀라 이쪽을 돌아보았다.

“사이?”

형은 소리 내어 반응하는 대신 눈짓으로 전했다. 가자, 얼른.

“잠깐만.”

류스이는 반사적으로 대답했으나 이내 스스로 발언을 철회했다. 형제가 본인을 발견했을 때 두 가지를 떠올린 것처럼 그 역시 두 가지 사실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나는 현재 형제는 심기가 불편한 상태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형제를 화나게 하는 것은 그리 좋은 선택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기억이 살아나기 전에 류스이는 놓았던 재물을 챙겨 몸을 일으켰다. 호구 내지는 봉처럼 잡고 있던 존재가 떠날 낌새를 보이자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인간들이 “형님? 어디 가십니까?” “아직 안 끝났습니다, 형님!” 애원했으나, 류스이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자리에서 벗어났다.

“어쩌다 형님 소리까지 듣게 됐어?”

아쉬워하는 시선이 등 뒤에 꽂히는 걸 느끼며 사이가 물었다. 살아온 세월을 고려하면 부적절한 표현은 아니었지만, 인간들이 진실을 알 리는 없었다.

“금반지 몇 개를 계속 꺼내 올렸더니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들 부르던데. 듣기 좋아서 가만히 있었어.”

류스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잃기만 한 건 아니지? 따기도 한 거지?”

좋지 않은 예감에 사이가 넌지시 물었다.

“없진 않은데 도로 다 잃었지. 그래도 방금 판은 느낌이 좋았는데…. 이번에는 확실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고. 알잖아, 사이. 내 감이 얼마나 좋은지.”

사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 말이 허무맹랑해서라기보다는 어느새 대로로 나와 다시금 걷는 걸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되게 된 탓이 컸다. 조심스러운 형과 대조적으로 동생은 꼬리가 치이건 말건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이 외에도 사이가 반응하지 못 한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는데, 대답하기 위해 기억을 구체화하는 순간 불행해질 게 분명해 차마 반응할 수 없었다. 지금도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모호하게 걸쳐 있는 것을 밀어 넣으면 밀어 넣었지, 끄집어 올릴 까닭은 전혀 없었다. 적어도 자의로는 그러고 싶었다.

사이는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존재가 있다는 건 그 기억이 타인에 의해 끌려 나올 수 있다는 뜻이고, 타의로 인해 생기는 일은 자의로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 그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어렸을 때가 생각나는군. 그때도 너는 인간들 노름에 낀 나를 곧잘 데리러 왔지. 내 직감은 도박에 한해서는 맞아떨어지는 일이 없다면서, 불경한 짓은 그만두라고….”

추억 탐방이라도 떠난 듯이 가늘어진 눈을 보며 사이는 느꼈다. 이 거리는 머나먼 기억을 자꾸만 부르고 기억은 필연적으로 감정을 동반한다고. 이 땅에 발붙이기 전 과거는 대부분 먹색으로 얼룩져 있는 만큼 좋은 감정을 느끼는 건 불가능했다. 류스이는 어떻게 괜찮은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동생과 저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사이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동생이 한 말로 끝끝내 떠올라버린 기억과 억지로 직면하면서 사이는 입을 열었다. 동생에게 진실을 전하고 고뇌를 나눌 마음은 여전히 없었지만, 적어도 재촉은 할 수 있을 터였다.

“류스이, 내가 생각해 둔 물건이 있는데 같이 가서 봐줄 수 있어? 네가 보고 괜찮다고 하면 그걸 사서 얼른….”

“…….”

사이는 말을 다 마칠 수 없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조금 전에….”

정말 난데없이, 돌연, 갑작스럽게 동생이 핏기 없는 얼굴이 되더니 혼이 빠진 그대로 중얼거리기 시작한 탓에.

“조금 전에 부딪히면서….”

“꼬리에 넣어둔 여의주를 가져갔어.”

“여의주를 잃어버렸다고.”

그 말을 이해하는 데는 실제로는 찰나였으나 체감하기로는 억겁과 같은 시간이 걸렸다.

“왜….”

동생과 형이 똑같은 표정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왜 그걸 거기에 넣어뒀는데?”

얼빠진 목소리와 함께 나온 지적은 당연하게도 이 상황에 있어 원인이라고 할 만한 부분이었다. 제 물건을 잃은 것이 아님에도 사이는 하늘이 무너지는 걸 목도하기라도 한 듯 눈꺼풀을 바르르 떨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비록 온전한 용은 아니어도, 피를 이어받은 만큼 형제 둘 다 여의주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것은 용으로서 신통력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물건일 뿐 아니라, 영혼과 역린에 이어 세 번째 심장이라 해도 좋을 만큼 존재를 유지하는 데도 중요한 물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용도 그것을 남에게, 설령 혈연이나 가까운 친구라도 쉽게 빌려주고 넘겨주지 않으며, 직접 들고 사용할 때 외에는 체내에 보관해 꺼내는 일이 드물었다. 용이 여의주를 직접 들고 사용할 때라고 해봤자 광범위하게 능력을 발휘하려 할 때나 목숨을 건 접전을 벌일 때 이외에는 없었으므로 사이는 류스이가 왜 그리 답지 않은, 한 마디로 멍청한 판단을 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본인이 얼마나 안일했는지가 비로소 와 닿았는지 류스이도 곤란한 기색이 퍼진 얼굴을 훔치며 말했다.

“요전에 비 내렸던 거, 기억해?”

사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기를 깨고 신성한 존재로 존재하기를 포기했던 형제가 몇십 년 만에 스스로 의지로 권능을 떨쳤던 걸 어떻게 잊을까? 요컨대 오랜 시간 힘을 쓰지 않은 탓에 섬세한 조절이 어려워 여의주를 꺼내 썼다는 말이 하고 싶은 것이리라. 사이가 빤히 보자 류스이는 “내 입으로 이런 부끄러운 변명을 하게 될 줄 몰랐는데….”라는 말 대신 시선을 피하며 털어놓았다.

“꺼내는 것도 힘들었는데 도로 집어넣기는 더 힘들어서, 급한 대로 꼬리에 보관해 둔 거였어. 몸에 붙어만 있으면 아무 지장 없으니까….”

류스이는 한숨을 억누르고 덧붙였다.

“설마 인간에게 소매치기를 당할 줄은 몰랐지만.”

스스로 어처구니가 없어 견딜 수 없다는 투로. 사이도 같은 기분을 느꼈지만, 이해가 안 가지는 않았다. 저나 형제나 영혼 절반은 용이지만, 육신은 각자 모친에게 물려받아 일족과는 조금 달랐다. 구조적으로 다른 몸은 손가락만 한 구슬 하나를 편리하게 취급하기 어렵게 했고, 특히나 류스이는 어린 시절부터 뱉고 삼키는 걸 굉장히 힘들어했다. 꼭 그가 능력을 함부로 못 쓰도록 막는 안전장치처럼 말이다. 직접 보지 않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번에도 고생깨나 했을 터였다.

사이는 동생이 구역질 또는 그에 준하는 행위를 하는 모습이 상상되기 전에, 주위를 살펴 발을 딛고 올라갈 만한 것을 찾았다. 평소 같았다면 자진해 나대는 것에 자괴감을 느꼈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사이는 미리 봐둔 발판을 딛고 폴짝폴짝 뛰어 가까이 있는 높은 지붕으로 올라갔다. 한 박자 늦게나마 정신이 깬 류스이도 그 뒤를 따라─형보다 발판을 덜 쓰면서도 훨씬 빠르게─올라왔다. 붉은 눈동자는 그 속에 밴 당혹스러움만큼이나 다급히 구르다 이내 말했다.

“저기, 저 꼬맹이들.”

형이나 동생이나 체감한 것보다 넋을 놓고 있던 시간이 길었는지, 범인들은 이미 골목을 빠져나가 아예 거리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형제는 신호를 주고받을 것조차 없이 곧장 뒤쫓기 시작했다. 행여나 일이 잘못되어 동생이 인간에 대한 정을 다시 버리는 일만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사이는 바랐다.

 

소매치기는 1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녀였다. 둘은 항만을 낀 거리를 빠져나가 그 뒤에 있는 비탈길로 내달렸다. 이어지는 언덕 위에는 텃밭에 둘러싸인 작은 집이 한 채 있었는데, 형제는 그들이 집으로 들어간 뒤에나 따라잡을 수 있었다. 대문 앞에 도착했을 때 사이는 마지막으로 이 모습을 한 채로 달린 게 언제였는지 모르겠다며 기억을 더듬었다. 확실한 것 한 가지는, 동생보다 작아 보이는 게 싫다고 발뒤꿈치에 굽을 붙인 건 좋지 않은 선택이라는 것이었다.

맥이 풀린 게 눈에 보이는 형과 대조적으로 동생은 차분해 보였다. 차분해 보이는 듯했다. 대문 앞에 선 류스이가 손을 들어 올렸을 때만 해도 사이는 그가 평범하게 문을 두드리는 그림을 상상했다. 지친 기운에 휩쓸려 혈육이 어떤 존재인지 잠시 잊은 대가는 문을 때려 부술 듯한 주먹질과 그러지 않아도 큰 목청이 격앙된 채 내지르는 소리가 빚어낸, 귀가 터지는 듯한 아픔이었다.

“안에 있는 거 다 안다! 문 열어!”

“류스이….”

만류에도 불구하고 문을 치는 손길은 갈수록 거칠어졌다.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내고 있기는 하나 흥분을 가라앉히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건 사이도 인지하고 있었다. 상처 회복이 덜 된 지금 류스이 신변에 이상이 생긴다는 건 제 신변에 이상이 생긴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고, 그것을 잘못 다루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헤아릴 수 없었으니 말이다. 수습 가능한 천재지변 정도면 그나마 다행일 터였다.

“손버릇 나쁜 꼬맹이들, 재미있군.”

류스이는 이제 웃기 시작했다. 당연히 순수한 웃음은 아니었다. 몇 걸음 뒤로 물러서나 싶더니 몸을 낮추고 자세를 잡는 모습에서 사이는 동생이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았다. 발이나 주먹을 쓰는 것보다 꼬리를 한 번 휘두르는 게 효율적이기는 하겠지만, 그래서는 문고리만 망가지는 데서 그치지 않을 것이었다.

“잠깐만, 류스이….”

황급히 손을 내뻗었으나 잡히는 건 없었다. 류스이가 한 발 내딛는 것과 동시에 덜컥, 문이 열리지 않았다면 문이 통째로 박살 나는 건 물론 외벽 일부가 무너져 내리는 광경을 보게 되었을지도 몰랐다.

“누구, 세요?”

문 틈새로 건네진 목소리는 마땅히 겁에 질려 있었다. 사이는 그것이 익숙하다고 할 것까지는 못 되나 완전히 생소하다고 느끼지도 않았는데, 이 모호함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바로 떠올릴 수는 없었다. 그가 겨우 알았다고 느낀 것은 문 뒤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상대가, 노출이 있는 덩치 큰 남자 뒤로 본 적 있는 얼굴을 발견하고는 주인을 본 개처럼 반가운 얼굴로 튀어나왔을 때였다.

“아, 아까 장에서 도와주셨던 분!”

“어?”

소녀는 문 뒤에 숨어 소극적으로 말하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들뜬 기색을 비쳤다.

“여기는 저희 집인데, 무슨 일로….”

두 눈에는 설렘과 반가움이 한 짝씩 어려 있었다. 사이는 여전히 그녀가 어떤 마음인지 몰랐기에 그저 부담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잘된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아는 사람이라면 대화를 더욱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을 것이므로.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네, 네! 무엇이든지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이 집으로 어린아이 두 명이 들어가는 걸 보고 따라왔는데, 혹시 안에 있을까? 그 애들이….”

사이는 류스이를 슬그머니 보았다. 하나뿐인 동생은, 이 또한 왜인지 모르게 필요 이상으로 심기가 불편한 기색이었다. 소녀를 노려보는 얼굴은 금방이라도 송곳니를 드러낼 것만 같았다. 감정적이 된 이유를 묻고 싶었으나 지금은 물건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내 형제 물건을 훔쳐서 달아났거든. 동생한테 있어서 아주 중요한 거라 꼭 찾지 않으면 안 돼.”

“네?”

훔쳤다는 말에 휘둥그레졌던 눈은 동생이라는 말에 더 크게 뜨였다. 소녀는 누가 보기에도 넋이 나간 표정으로 두 남자를 번갈아 보다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이쪽 분이 동생, 이쪽 분이 형님이시라는 거죠?”

“그래.”

대답한 것은 류스이였다. 류스이는 변함없이 마뜩잖다는 낌새로 엄지를 젖혀 옆에 선 손위 형제를 가리켰다.

“이렇게 보여도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영감님이시니까, 오래 세워 두지는 말라고.”

어이없을 만큼 부당한 표현에 사이는 인상을 구기는 대신 둘만 알도록 꼬리로 동생을 툭 쳤다. 절대적인 나이를 생각하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사이는 노름하던 인간들이 류스이를 형님이라 치켜세우던 걸 떠올렸다) 그래서 더 가당찮다고 느낀 건지 몰랐다. 소녀가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저를 보기 시작했을 때는 더 그리되었는데, 생각만큼 오래가지는 못 했다.

“그리고 난 내 인내심이 얼마나 깊은지 몰라.”

일순간 공기가 식었다.

“지금 터지기 직전인 건지 아니면 더 기다릴 수 있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는 거다. 그리고….”

갑자기 시선이 마주하자 사이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동생이 왜 가만히 있던 저를 노려보는지, 이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알 턱이 없었다.

“어, 음, 잠시만요.”

조금 뒤 소녀는 얼어붙은 그대로 집으로 들어갔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꽤 소란스럽다고 느낄 때쯤 문이 다시 열렸다. 떠밀리듯 나온 것은 형제가 쫓던 어린 이인조였다. 이미 한소리 거하게 들은 탓인지 덜미를 잡힌 것에 대한 애석함 탓인지, 둘 다 낯빛이 상당히 어두웠다. 변명이든 사과든 무어라 말하기는커녕 땅만 보고 서 있자 소녀가 다그쳤다.

“뭐해? 얼른 훔친 거 돌려드려!”

채근하는 게 못마땅했는지 둘은 발끈한 채 한 마디씩 던졌다.

“훔치기는 뭘 훔쳐? 아무것도 안 훔쳤어!”

“맞아, 길에 떨어진 걸 주운 것뿐이라고!”

아이들은 더 큰소리를 냈다.

“언니는 왜 매번 그런 식으로 우리를 의심해?”

“내 말이, 누나도 의심받으면 화낼 거잖아!”

“땅에 떨어진 건 임자 없는 물건이라고!”

“맞아, 맞아!”

사이는 류스이를 보았다. 가늘게 뜬 눈이 정확히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긍정적인 기분은 아닐 터였다.

“그만 좀 해!”

결국 참지 못 한 소녀가 소리쳤다.

“너희가 이런 일 저지른 게 한두 번이 아니니 그렇지!”

그녀는 완전히 지쳤다는 투로 외쳤다.

“지금처럼 집에 사람 찾아오는 것도, 관청에 가서 조사받는 것도, 이제 그만 겪을 때 됐잖아! 자꾸 시치미 떼면 오빠한테 말할 수밖에 없어!”

오빠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어린 두 사람이 움찔하는 것을 자리에 있던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어린 남매는 이제 큰소리로 대드는 대신 치사해, 너무해 같은 불만을 꿍얼꿍얼 내뱉다가 여형제를 두고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질렸다는 표정을 짓고 서 있던 소녀는, 극진히 대접해도 모자랄 손님에게 뒤늦게나마 “들어오세요.” 말했다. 기운 없는 뒷모습은 여태까지 활기차던 모습을 한낱 착각인 것처럼 느끼게 했다.

소녀를 따라가기 전 사이는 류스이를 한 차례 더 힐끔 보았다. 동생은 여전히 무표정했고 여전히 진의를 읽을 수 없었으나, 무엇인가 느끼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형제를 부엌으로 안내한 뒤 소녀는 따뜻한 차를 내왔다. 올라올 때 본 텃밭을 생각하면 직접 기른 찻잎으로 우린 듯했는데, 이때 사이는 그녀가 떨어뜨렸던 꾸러미가 어디에서 비롯된 건지 알 수 있었다. 또한 소녀가 제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도 느꼈는데, 그것이 잘 보이고 싶은 상대에게 크나큰 결례를 저질러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낙담에 가까운 마음인지는 알지 못 하고 단지 조금 전 소란 탓이라고만 생각했다.

차 홀짝이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오는 와중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소녀였다.

“두 분은 타지에서 오신 거죠?”

“응, 바다를 건너왔어.”

답한 것은 당연히 사이였다. 이렇게 말하면 놀라는 반응이 돌아오는 게 보통이었지만, 매일 온갖 인물과 만물상을 보고 사는 소녀는 당연하게도 무덤덤했다. 역시 그렇구나, 하는 눈빛만 지어 보일 따름이었다.

“여기에는 어떻게 오신 거예요? 노름하러 오신 건 아닐 테고.”

그러고 보면 그런 걸 묻기도 했지, 사이는 떠올렸다. 동생이 다른 길로 새지 않게 붙잡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이제 와서는 무의미한 가정이었다.

“남쪽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지나가던 길에 들렀어. 선물할 걸 사서 떠나려 했는데, 예상치 못 한 일이 생긴 바람에….”

“아.”

소녀는 사이가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말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그렇기 때문에 더 죄스러워졌다.

“죄송합니다….”

본인이 저지른 일도 아닌데 진심으로 면목 없어 하는 모습을 보자 사이도 되레 미안해졌다.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서라도 화제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아까 그 아이들은 네 동생인 거지?”

사이는 그들이 나누던 대화를 곱씹으며 물었다.

“나이 많은 형제가 한 사람 더 있고.”

“네, 맞아요.”

소녀가 말했다.

“나이 차이 나는 오빠가 한 명 있어요. 이 앞 텃밭에서 가꾼 작물, 특히 찻잎을 팔러 타지로 나갔다가 이레에 한 번 정도 들어와요. 여기 장은 넓지만 그만큼 판매 경쟁도 치열하니까…. 바다 밖에서 들어온 희귀한 물건도 많고요.”

과연, 사이는 이해했다는 낌새를 보였다. 소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한 마디씩 거듭할 때마다 말이 빨라지는 동시에 두 눈에는 시름이 감돌기 시작했다.

“동생들이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오빠가 실질적인 부모 노릇을 했어요. 그래서 동생들도 오빠 말이라면 잘 듣는 편이에요. 오빠가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고, 지금도 어떻게 노력하고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과묵히 찻잔만 들여다보던 류스이도 어느 틈엔가 소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옆에 앉은 사이도 마주 앉은 소녀도 집중한 탓에 알아차리지 못 했지만 말이다.

“소매치기도 처음에는 빠르게 돈을 구해, 저나 오빠한테 보탬이 되고 싶어서 한 행동이었을 거예요. 제대로 가르치고 말릴 사람이 없어서 버릇이 잘못 들어버렸지만요. 잊을 만하면 이런 일을 한 번씩 겪어요. 물건을 도둑맞은 사람이나 관인이 찾아오고, 오빠를 들먹이면서 동생들을 설득하고 사죄하고….”

이제 소녀는 완전히 씁쓸한 얼굴이 되었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그게 정말 웃고 싶어 웃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소녀 본인조차도 말이다. 구멍이 숭숭 난 가슴에는 바람조차 지나지 않을 터였다. 그녀는 침울함이 번진 얼굴을 한 차례 훔치고는 마주 앉은 형제를 바로 보며 말했다.

“어르신과 동생분께는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전부 제 불찰이에요. 오빠가 없을 때는 제가 맏이인데, 역할을 제대로 못 한 거니….”

숙연함이 공기를 무겁게 바꿀 때쯤 소녀 뒤편에 있는 문에서 어린 남매가 나왔다. 두 사람은 손님, 특히 류스이의 눈치를 보면서도 반항적인 표정을 지울 줄 몰랐다. 둘은 식탁 위에 탁, 물건을 소리 나게 올려놓으면서도 “이거 팔면 돈 많이 받을 것 같은데….” 같은 말을 중얼거리다 “조용히 해.” 한 소리 듣기도 했다.

쪽빛과 금빛이 한데 섞여 옥보다 더 윤택하게 반질거리는 작은 구슬은 틀림없이 형제가 찾고 있던 물건이었다. 류스이는 잃어버렸던 심장을 손끝에 끼운 채 잠시간 가만히 바라보다가, 어떤 낌새도 없이 남매에게로 휙 시선을 돌렸다. 계속 눈치를 보았어도 이 상황은 예상하지 못 했는지, 눈이 마주하기 무섭게 아이들은 두려운 기색을 띠었다. 가라앉은 홍색 눈 저변에 무엇이 움트고 있는지 도통 파악할 수 없었기에 사이는 조마조마한 심정이 되었다. 다른 때처럼 “핫하! 이 꼬맹이들, 감히 나를 애먹였겠다!” 웃고 넘어갈지, 아니면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만큼은 쉬이 못 넘기는 성격에 또 한 번 큰소리를 내고 말지.

답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너희….”

여의주를 소매에 챙겨 넣은 뒤 류스이는 식탁에서 일어나 몸을 낮추고 앉았다. 그렇다고 커다란 덩치가 줄어드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다가온 위압감에 아이들은 또 한 번 몸을 움츠렸다. 류스이는 개의치 않고 마침내 본론을 전했다.

“진정 도움이 되고 싶다면 손위 형제 속 썩이는 짓은 그만둬라.”

얼굴은 여전히 흐린 하늘 같았고 말투 역시 무뚝뚝했으나 바라보는 눈빛은 더 이상 가라앉아 있지 않았다. 그 안에 잠들어 있던 것은 명백한 온기로 드디어 싹이 터 달구어지고 있었다.

“나중에 가서 이래서는 안 됐는데, 조금 더 잘할 걸 그랬는데, 후회해도 의미 없어.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고 아무 일도 없던 때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해. 설령 신이라도 그런 건 할 수 없어.”

여기까지 말하고 류스이는 옅은 흉터가 새겨진 제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짧은 회상을 마치고 돌아온 얼굴에는 희미하게나마 볕이 들어 있었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고 주어진 사랑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그게 삶을 연명하는 데 있어 얼마나 큰 원동력이 되는지 한시라도 빠르게 깨닫기를 바란다. 그리고….”

끝으로 류스이는 소매에서 금팔찌를 두 개 꺼내 남매 손에 하나씩 걸어준 뒤, 몸을 일으키면서 덧붙였다.

“이건 내가 너희 미래를 믿고 주는 물건이니 소중히 쓰도록 해.”

마침표를 찍고 돌아서는 얼굴에는 만족감이, 나아가는 걸음에는 홀가분함이 넘쳐흘렀다.

발화자를 제외하고는 전부 넋이 나가 있던 상황에 가장 먼저 깬 것은 아이들이었다. 남매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의미심장하게 생긴 구슬보다 훨씬 값져 보이는 물건이 생겨 한없이 신나 보였다. 그리고 소녀가 했던 보탬이 되고 싶어 한다는 말을 증명하듯 바로 여형제에게 다가와 “언니, 이거 비싼 거지, 그렇지?” “이거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어, 누나?” “이거 팔면 오빠 일 안 해도 되는 거지?” 재잘재잘 말을 걸었다. 그때까지도 어안이 벙벙한 채 서 있던 소녀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이미 밖으로 나간 류스이 대신 그 형제를 바라보았다.

사이라고 해서 류스이가 한 행동에 놀라지 않은 건 아니었다. 경탄이 가시고 흐뭇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던 건 혈육이 자애로운 존재로 정체성을 회복했음을 재차 확인받고, 받으면 반드시 돌려준다는─사이는 류스이가 찻잎까지 다 먹어 삼켰음을 이때 알았다─맹세를 지킨 점도 있으나, 형으로서 동생이 기특하게 느껴지는 마음이 무엇보다 크기 때문일 터였다.

언젠가 소녀도 이 기분을 아는 날이 올까, 미래는 알 수 없었으나 사이는 믿고 싶었고 이는 류스이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사이가 짧은 묵례 뒤로 미소를 덧대었을 때 소녀의 두 눈은 그렁그렁해졌고, 심경을 그대로 반영한 축축하면서도 벅차오른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정말 감사합니다.

끝내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 것을 막을 수 있었다면 분명 거듭해 말했으리라.

 

어느새 해 질 무렵이 되어 창천은 상반된 빛으로 저물고, 처음 맞닥뜨렸을 당시 푸름 자체였던 바다도 같은 색을 머금어 수평선 중심부터 붉어지고 있었다. 소금기를 품은 바람에도 서서히 찬 기운이 섞여 시간이 흘러감을 분명히 깨닫게 했다.

언덕길을 내려가던 형제는 비슷한 순간에 걸음을 멈추었다. 형은 바다를 끼고 형성된 거리에 인간이 만든 불빛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는 걸 보고 멈추었고, 동생은 넓게 퍼진 모래사장 위로 마지막 햇빛을 품은 파도가 잔잔히 치고 떠나는 걸 보고서 멈추었다. 사이는 이 시간 하늘과 바다, 또 제 것과 같은 색 눈동자가 어떤 상념을 더듬고 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직전처럼 걱정스럽지는 않았다. 그는 몇 걸음 앞질러 나가 동생을 마주 바라보고서 말했다.

“오늘따라 생각이 많아 보여.”

희끄무레하게 떠오른 미소 그대로 걱정스러워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자꾸 옛날 일이 떠올라서.”

류스이는 바다에 시선을 둔 채로 대답했다.

“꼭 갈바람 같아. 아까 노름판에서 겪은 상황도, 방금 만난 형제자매도, 어두워지는 바다도. 내 의사와 상관없이 지나간 시간을 여기에 실어 나르는 거지.”

그리 말하며 류스이는 오른손 검지와 중지로 본인의 가슴 한중간, 명치 근처를 짚어 보였다. 그 안에 담겨있는 게 무엇인지 사이는 대번에 느낄 수 있었다. 저 또한 같은 걸 가지고 있었으니. 그리고 또─

“너도 그렇잖아, 사이.”

손끝은 곧 손위 형제의 가슴에 가 닿았다.

“알고 있었어?”

내가 너와 같은 바람에 휩쓸리고 있었다는 걸.

“당연한 것을. 너는 기분이 얼굴에 드러나는 걸 못 감추잖아.”

사이가 토끼 눈을 뜨자 류스이는 드디어 낯익은 미소를 보였다.

“옛날부터 그랬지.”

류스이는 여전히 웃었지만, 눈에는 조금 씁쓰레한 기색이 어렸다.

“알면서도 혼자 내버려 둔 건 미안해.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었는지 깨닫자 참을 수 없었어. 그리고 이제는 괜찮지 않을까, 네 상태를 넘겨짚었던 것도…. 내가 잘못했어.”

류스이는 형제의 가슴을 짚었던 손을 떼고 대신 제 목덜미를 쓸어 만지며 말했다. 계면쩍은 기분을 억누를 수 없는지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는 게 눈에 띄기도 했다.

“그래서는 안 되었는데….”

중얼거리며 덧붙은 후회에 담긴 진심이 무엇인지는 그 스스로 내뱉은 말 속에 있었다.

 

나중에 가서 이래서는 안 됐는데, 조금 더 잘할 걸 그랬는데, 후회해도 의미 없어.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고 아무 일도 없던 때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해. 설령 신이라도 그런 건 할 수 없어.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고 주어진 사랑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그게 삶을 연명하는 데 있어 얼마나 큰 원동력이 되는지 한시라도 빠르게 깨닫기를 바란다.

 

무엇이 혈육에게 이런 말을 하게 했는가.

“삐갹!”

생각하고 있는데 커다란 손이 다시금 와 닿았다. 뒤통수부터 목덜미까지 거침없이 훑어 내리는 손길에 사이가 화들짝 놀라 바라보자 류스이는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예전에는 목뒤까지 완전히 새까맸지.”

여느 때 같은, 안정감이 느껴지는 뻔뻔한 태도로.

“매끈하고 촘촘한 비늘로 뒤덮여서….”

손은 이제 뒷머리를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하지만 깨물어도 이가 들어가지 않아서,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크고 두꺼운 손은 마지막으로 정수리를 서너 차례 쓰다듬은 뒤 떨어졌다. 종종 겪는 일이기 때문에 기분이 나쁘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래서는 누가 형이고 동생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필연적으로 따라붙었다.

“내려가서 잠깐 걸을까?”

불만을 토로하는 대신 사이는 제안했다. 직전까지 동생이 하염없이 눈에 넣던 파도를 제 속에 담으며.

“괜찮겠어?”

류스이가 뜻밖이라는 낌새로 되물었다. 갈 길을 재촉하던 언행을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사이는 입을 여는 대신 조금 전까지 제 머리를 쓰다듬던 오른손을 붙잡아 쥐었다. 손끝부터 시작해 팔뚝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평범한 자국이 되어 부드러운 살결로 만져지기까지 얼마만큼 긴 시간과 무거운 감정이 지나갔는지 구태여 되짚을 필요는 없을 터였다. 진실을 안 지금 더 이상 초조해할 까닭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머잖아 두 사람은 본인들 외에는 아무도 없는 백사장에 도달했다. 형은 신발 굽이 푹푹 빠져서, 동생은 발가락 사이에 자잘한 알갱이가 스며들어 걷기 불편해했으나 힘겨워하지는 않았다. 모래 한 알 한 알이 저들이 건너온 시간이라 생각하자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참을 걷던 형제는 수평선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를 찾아 멈추었다. 어스름은 그사이 깊어져 찬연한 풍경 대부분을 밤으로 이끌고, 그것을 바라보는 형제에게도 차분함을 안겼다. 하늘이 등불을 밝히기 시작하면 기분은 더 짙어질 터였다.

“여기 온 지 얼마나 됐지?”

파도치는 소리만 울리는 와중에 먼저 입을 연 건 사이였다.

“글쎄, 250년쯤 됐지 싶은데.”

류스이는 턱을 훔치며 대답했다.

“처음 인간에게 부탁받은 게 220년, 이시가미하고 만난 게 140년 전이었으니 그 정도 된 것 같아.”

사이는 짐짓 알았다는 낌새를 보이고는 질문을 이었다.

“네가 지금 몇 살쯤 됐더라?”

“750쯤 됐을걸. 정확히는 기억 안 나. 그리고 너는 천─”

“그만 말해.”

그가 영감님 운운해 어르신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던 게 떠오르지 않았다면 답지 않게 말을 끊지는 않았을 터였다. 일족을 위해 살았다면 진즉에 혼인해 후사를 보았어도 (물론 짝을 찾을 수 있을지 어떨지는 별개 문제였다)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으나 이 정도면, 어디까지나 용치고는, 아직 어린 편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괜히 욱했는지 모른다. 사이가 불만이라는 듯이 꼬리를 흔들자 류스이는 웃음을 참지 못 하고 “하하.” 소리를 냈다. 형제가 노려보지 않았다면 기대 이상으로 반응해주어 고맙다는 의미에서 또 한 번 머리를 헝클였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이러고 있으니 처음 바다를 건넜을 때가 생각나는군.”

곧 화제를 바꾸려는 건지 아니면 느낀 그대로 기분을 전한 건지, 류스이는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러게.”

사이도 혈육의 눈을 따라가며 말했다.

“그때는 새벽 어스름이었지….”

과거는 여전히 버거운 것이었지만, 여기까지 이르러 피하고자 발버둥 칠 이유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 때문에─무엇보다 형제가 있다면 괜찮다는 확신이 들어─사이는 차근차근 되새기기 시작했다.

 

첫 기억은 730년 전, 손아래 형제가 부화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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