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4 류사이

화이트데이 기념

주방으로 통하는 출입문 앞에 이르렀을 때 류스이는 출제자와 답변자가 동일한 혼자만의 수수께끼를 시작했다. 문제는 다음과 같았다. 이 문 너머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음식은 과연 무엇인가? 힌트는 세 가지였다. 버터 섞인 밀가루가 익어가는 고소한 냄새, 떠올리고자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떠오르는 익숙한 과일 단내, 그 냄새와 몹시도 잘 어울리면서 훨씬 자극적이고 알싸한 냄새. 설마 그건가, 답을 도출해 냈을 때는 어느새 침이 고여 반사적으로 입가를 훔칠 정도였다.

“핫하, 프랑수아! 참으로 구미당기는 걸 만들고 있구나!”

벽 너머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상황을 예상하고, 주방문을 있는 힘껏 밀어젖히며 외치는 것을 포함한 모든 행동이 물 흐르듯 전개된 만큼, 상상과는 다른 그림이 눈에 들어왔을 때 류스이는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삐갹!”

안에 있던 사람도 놀라기는 매한가지라 돌연히 들이닥친 박력에 SAI는 귀에 익은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움츠리나 싶더니, 손님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다.

“프랑수아는 레스토랑에 나갔어.”

담담한 기색을 회복한 목소리에는 미묘한 권태가 느껴졌다. 올 것이 왔구나. SAI는 그렇게 토로하고 싶은 듯 동생을 힐긋거리더니, 오른손에 쥔 식도와 도마 위에 다시금 집중했다. 사각, 사각, 사각. 사과가 칼날을 따라 저며지는 소리가 몇 번 귀에 박힌 뒤에나 류스이는 정신을 찾았다. 이번 주는 쭉 연구소에 출근하기로 되어있던 만큼 진즉에 나가서 없을 줄 알았던 형이 집에, 그것도 뜬금없이 주방에 있으니 류스이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놀랍고 중요한 사실은 따로 있었지만 말이다.

그 사실이란 바로 조리되고 있는 음식이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달콤한 디저트라는 점, 그것을 만드는 사람이 SAI라는 것, 그리고 오늘이 3월 14일─두 번째 스위트 데이─이라는 것이었다. 한 가지씩 상기해 나갈 때마다 류스이는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는 것을 자각하는 한편 감추기도 어려워진다고 느꼈다. 당연히 처음부터 감출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없었지만.

“애플파이라, 맛본 지도 꽤 되었는데.”

류스이는 콧속에 맛있는 냄새를 가득 채우며 중얼거렸다.

“누구를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만들고 있는 걸까, SAI? 응? 대답해 봐.”

동생이 어떻게 느끼기에도 잔뜩 들뜬, 저에게 있어서는 지독하리만치 성가셔질 듯한 낌새로 알짱거리기 시작하자 SAI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고 해서 매정하게 “너는 알 필요 없으니 나가버려라” 소리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사각, 사각, 사각, 계속 손을 움직이며, 다소 무성의한 투로 대답했다.

“오늘 파이데이잖아. 그래서 크롬하고 스이카한테 파이 구워주려고. 수학자로서 의미 있는 날에 동기 부여해주면 좋을 것 같아서.”

“파이데이?”

“응. 3.141592653589793238462643383279……, 에서 3.14. 원주율 파이.”

“…….”

류스이는 잠시, 아주 잠시, 오로지 저만이 느낄 수 있는 투명한 손이 머리를 꽉 움켜쥐는 것을 느꼈다. 한 손은 다소곳한 입술 사이에서 주문처럼 새어나온 숫자 무리였고, 다른 한 손은 궤도에 들어온 줄 알았건만 실제로는 한참을 벗어나 바깥을 맴돌고 있던 예상이었다. 류스이는 입술을 샐룩거리다가 가까스로 소리를 냈다.

“역시 네게 류스이 재벌의 회계를 맡기는 거였는데….”

“뭐?”

“농담이다.”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버렸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보다 빠르게 류스이는 스스로 행동을 수습한 뒤, 주방을 쭉 살펴보았다. 들어올 때부터 본 오븐 안에는 노릇노릇 익어가는 파이가 하나, 냉장고에는 휴지 중인 반죽이 한 덩어리, 조리대에는 소금, 물, 버터와 같은 기본 재료와 조리도구가 놓여있었고, 핵심이라고 할 사과는 도마 위에서 썰리고 있는 것 외에는 더 없는 듯이 보였다.

SAI가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눈길을 보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류스이는 주방 한가운데 우뚝 선 채 생각에 잠겼다. 무난하게 초콜릿이나 과자 따위를 기대하기는 했으나 새콤달콤한 파이도 나쁘지는 않다고. 좋고 나쁨을 논하자면 오히려 다른 무엇에도 비할 수 없이 마음에 들어, 생각하는 것만으로 행복해졌다.

이 신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수학자인 동시에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 수학적으로 의미 있는 날이자 연인을 위한 기념일에 손수 구워 만드는 파이. 복합적인 의미가 담긴 만큼 몇 배로 더 맛있을 거라고 류스이는 강하게 확신했다. SAI가 조리에 실패할 가능성 같은 건 염두에 둘 게 아니었다. 다년간 자취 생활로 갈고 닦은 요리 실력은 일류 셰프인 집사에 비견될 수준은 아니어도, 능숙하다는 표현 하나에는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훌륭했으니까. 물론 SAI 본인은 늘 그러듯 아무것도 아니라며 격렬히 부정했지만 말이다.

“알겠다, SAI!”

류스이는 습관처럼 손가락을 딱 튕기며 외쳤다.

“오븐 안에 들어있는 것, 지금 만들고 있는 것, 둘 중 하나는 내 몫이구나! 기왕이면 지금 만들고 있는 걸 주었으면 좋겠어. 계피를 레시피보다 적게 넣었으면 하거든. 다른 것보다 사과 본연의 맛을 더 느끼고 싶으니까…….”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은 당연하게 알았다고 답해줄 줄 알았던 SAI가 사각, 사각, 사각, 연이어 잇던 소리를 멈추고, 대신에 상당히 어이가 없다는 낯빛으로 올려다보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였다. 왜? 류스이는 묻고 싶은 듯 고개를 까닥거리자 SAI가 입을 열었다.

“내가 한 말 제대로 들었어? 크롬하고 스이카한테 줄 거라고.”

목소리도 표정만큼이나 어처구니가 없다는 투였다.

“그럼 나는?”

류스이도 이내 같은 기색이 되었다.

“내 건? 없어?”

동생의 요청에 한 번 당황하고, 뻔뻔한─하다고 생각했던─물음에 두 번 당황했던 SAI는 이제 그 두 눈에 어리기 시작한 감정에 세 번째 당황했다. 언뜻 느끼기에는 그저 곤혹스러워하는 것처럼만 보였으나, 그보다 짙고 깊은 것이 홍엽색 눈동자 속에 깃들어 있었다. SAI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려다 한창 요리 중이며 장갑을 끼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대신 작게 한숨을 흘리고서 대답했다.

“말했잖아, 류스이. 둘 다 앞으로도 열심히 공부하라고 주는 거라고. 넌 나한테 수학을 배우지도 않고, 내가 만든 것보다 더 맛있는 걸 사 먹을 수도 있잖아.”

이게 뭐라고 슬퍼하기까지 해? 끝마디는 구태여 덧붙이지 않았다. 소리내어 물을 필요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상만사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걸 모를 만한 나이도 아니고, 그토록 애용하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아니고, 결정적으로 내가 만든 게 네 잘난 입맛에 맞을지 어떨지도 전혀 모르면서…….

SAI가 이렇게까지 말하고, 그러한 눈빛으로 바라봄에도 불구하고 류스이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 했다. 내가 너한테 무얼 배우고 얼마만큼 돈을 가졌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 SAI. 중요한 것은 오늘이 오늘이고 네가 너라는 사실뿐이라고.

3월 14일이 가기 전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어…….

“…….”

류스이는 솔직히 터놓지 않았다. 터놓을 수 없었다. 엎드린 채 절을 받고 싶지는 않다는 자존심 문제는 아니었다. 당연히 있는 것으로 여겼던 두 가지가 사실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왜 내가 너한테 그런 걸 만들어주지 않으면 안 되는데?” 같은 물음이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확신과 만에 하나가 닥쳤을 때 실망하지 않을 자신이. 가장 괴로운 것은 이 같은 사실을 상기해 낸 순간, 깨닫는 것보다도 빠르게 낙담이 엄습해 왔다는 사실이었다. 누군가 뒤통수를 세게 후려쳐 넋을 빼앗고, 그사이 억지로 현실에 끌고 온 것만 같았다.

나는 SAI를 사랑하나 SAI는 나를 사랑하는지 모른다.

부정으로 끝나는 진실만큼 잔인한 게 더 있을까? 지금 류스이는 떠올릴 수 없었다. 수많은 혈육 중 유일하게 가족다운 가족으로서, 비록 행복한 기억은 적어도 유년 시절을 함께한 친구로서, 어느 누구보다도 신뢰할 수 있는 동료로서 사랑할 수는 있을 테지만, 류스이가 SAI에게 갈구하는 사랑은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동등한 위치에서 깊이와 무게를 맞추어 나누는 감정. 이 세상 전부가 연인이라고는 하지만, 그 한 사람을 유달리 특별한 존재로 여기게 하는 증거. SAI도 그런 걸 가지고 있는지 혹은 갖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고 거듭 생각하자, 류스이는 스스로 애잔해져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네가 자진해서 해주지 않으면 어떤 의미도 없는걸…….’

“…….”

‘왜 저래?’

영문을 모르는 SAI 입장에서는 혼자 신나 하다가 혼자 아쉬워하고, 또 혼자 진지해져 말을 잃은 모습이 이상하게만 (물론 제 형제는 이해하기 어려운 언행을 예삿일로 벌이는 사람이기는 했다) 보였다.

류스이는 막 주방에 들어섰을 때처럼 SAI가 식칼로 도마 치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겨우 확신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주저하는 것은 나답지 않다고 생각하기까지 사각사각 소리가 몇 번 더 들렸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순간 류스이가 아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탐욕가, 원하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손에 넣고 마는 남자 나나미 류스이가 여기에서 굴복하는 것은 말이 되질 않는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게다가 그에게 거부당하는 것은 숨 쉬듯이 겪어본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따끔거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새삼스럽게 두려워할 까닭은 없다는 뜻이었다.

그에게서는 보기 드문 에이프런 차림에 정갈하게 움직이는 가늘고 긴 손가락, 컴퓨터가 아닌 다른 일에 몰두하는 두 눈을 보고 있자면 생각이 더 짙어졌다. 조금 전까지 흐릿했던 마음속 날씨는 어느새 맑게 개, 느낄 틈도 없이 히죽히죽 미소를 자아냈다. SAI는 동생의 상태가 또 한 번 바뀐 것을 알아채고는 변덕도 심하다고 어이없어했지만, 이러나저러나 류스이는 개의치 않았다. 동생은 만면에 찬 미소를 거두기는커녕 더 환하게 키우고서, 형 옆을 서성거리며 말을 붙였다.

“파이가 아니어도 괜찮아. 네가 주는 거라면 무엇이든 기쁘게 받을 수 있으니 다른 걸 만들어줘도 돼.”

SAI는 대꾸하지 않았다.

“조금 전에 냉장고를 보니 계란이 많이 남던데, 그것만으로는 만들 수 있는 게 없나?”

류스이는 계속 말했다.

“아니면, 꼭 빵이나 과자가 아니어도 돼.”

형은 계속 손을 움직였다. 사각, 사각, 사각.

“네가 직접 만들어 줄 필요도 없고….”

동생은 점점 초조해졌다.

“그렇지, 저녁에 시간 돼? 퇴근하고 난 다음에.”

핵심에서도 멀어져갔다.

“너만 괜찮다면 같이 식사했으면 하는데. 너하고 나 둘이서만…….”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은 형이 만든 디저트 대신 저명한 셰프가 요리한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제 모습을 상상했을 때였다. 심지어 이 상상은 오래가지 못 했는데, 별안간 날카로운 금속음이 탕─ 신경을 두들겼기 때문이었다.

“류스이!”

식칼이 빈 철제냄비를 거칠게 내려치는 소리라는 것을 파악하기 무섭게 귀를 찌른 목소리는 격앙된 표정, 흥분 섞인 숨소리와 더불어 한없이 낯설다는 감상을 안겨주었다.

“SAI…?”

그가 이렇게까지 노여워한 적이 있었던가? 의식 없는 중얼거림 뒤로 류스이는 당혹에 빠졌다. 평소 그는 불합리한 상황에 직면하면 화를 내기보다는 눈물짓는 편이었고, 그것도 숨죽여 훌쩍일 뿐 결코 큰소리를 내지 않았다.

“나 지금 칼 들고 있는 거 안 보여?!”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생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SAI는 성을 토했다.

“자꾸 신경 쓰이게 방해할래? 아까부터 칼질하고 있는데 제대로 보지도 않고, 정신 사납게 알짱알짱하면서 시끄럽게 굴고, 이러다가 내가 실수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한 문장씩 덧댈 때마다 감정이 격렬해지는 게 느껴졌으나 멈출 수 없었다.

“내가 널 다치게 하면 어떡하려고!”

끝마디는 비명처럼 내질러졌다. 남은 것은 끝내 그렁그렁해진 눈동자와 떨리는 입술뿐이었다.

다른 상황 같았다면 내 형제 이렇게까지 소리칠 수 있었구나, 실없으면서 느긋한 발상이나 했을지 몰랐다. 그렇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잘못한 게 맞으며 마땅하게 꾸짖어지는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류스이는 알았다. 기대했던 마음이 짓이겨지고 부수어져 끝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누구의 탓도 아닌 오롯이 내 잘못이며, 상실에 대한 아픔과 실패에 대한 책임 또한 고스란히 제 몫임을 인정하는 것 외에는 말이다.

“미안.”

불안해서 그랬어. 확실히 알고 싶어서 그랬어. 네게 사랑받고 싶어서 그랬어…….

말하려거든 말할 수 있었으나 류스이는 체념했다. 저답지 않은 행동이라는 자각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게 내 탓이라는 진실을 곱씹은 순간 살아난 기억과 그 안에 새겨져 있던 무력감이 판단력을 빼앗고, 바로 바라볼 수 없게 했을 뿐이었다. 나로 인해 일어난 감정을 삭이지 못 해 일그러져 있을 얼굴을.

그 안에 있던 게 진정 분노뿐이었는지─당장 고개 들어 마주하면 확인할 수 있었는데─도 알 수 없었다.

 

그 뒤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류스이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사무실에 앉아 업무를 본 것은 확실한데 구체적인 사실이 하나도 기억나질 않았다. 어떤 서류에 사인했는지, 어디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는지, 초콜릿이나 사탕을 전해주러 찾아온 사람들이 누구인지 (진심으로 감사하는 건 당연히 잊지 않았다) 같은 것이. 일에 몰입하다가도 날카로운 금속음이 떠오르면 그대로 넋이 나가버렸다. 이어 단정한 얼굴에 생경한 감정을 어린 채 올려다보던 시선까지 회상하면 돌이킬 수 없어졌다.

‘SAI….’

지금쯤이면 화가 가라앉았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기껍지는 않겠지. 너라고 해서 격한 감정을 보이고, 거친 목소리를 내뱉고, 울먹거리고 싶지는 않았을 텐데. 네게 하고 싶지 않은 행동을 하게 하는 내가 미울 게 분명해.

네가 처음 내 곁을 떠났을 때처럼.

 

퇴근 시간이 되고 류스이는 혼자 바닷가로 나와 날이 저무는 풍경을 바라다보았다. 아직 겨울에 가까운 계절이라고는 하나 이 시기쯤 되니 저녁이라 할 시간이 되어도 주위가 완연히 어둡지는 않았다. 쪽빛 바탕에 연분홍빛 색조가 섞인 하늘은 그윽했고, 제방 아래로 펼쳐진 바다는 고요하면서 아늑한 것이 여느 때처럼 찬연했다. 이렇듯 평온하게 보이다가도 일순 기세를 바꾸어 놀라게도 하니, 꼭 누구와 닮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일으키는 파도는 대개 타의에 의한 것이었으니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류스이는 SAI가 일으킨 첫 파도를 맞았던 순간을 곱씹었다. 다른 무수한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지나간 추억 중 하나로 치부해 묻어둘 수 있었던 기억은, 되살리기 무섭게 뼈아픈 감정으로 돌아와 가슴을 짓눌렀다.

태어나 처음으로 겪어본 상실과 실패. 그렇게 잃은 것이 이 세계에 하나뿐인 진정한 혈육이자 첫사랑이라면 무엇으로 상처를 메울 수 있을까? 어린 시절에나 느꼈던 의문이 당사자가 곁에 있는 지금도 똑같이 떠올랐다면, 그 책임이 전적으로 나에게 있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하지만….’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포기하고 싶지 않다면, 그 존재에 눈을 뜬 0세 무렵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러했던 것처럼 갖고 싶다는 욕망을 사그라뜨릴 수 없다면 나─세계 제일의 탐욕가이자 그를 연모하는─는 어떻게 살아가면 되는 걸까?

사색은 답 없이 끝났다. 돌연 바람이 불어왔다. 소금기를 머금은 공기가 머리카락과 그 아래 덮여있던 목덜미를 훑고 지나간 뒤에나 류스이는 고개 들 수 있었다.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사이 밤은 더 무르익어, 하늘도 바다도 칠흑이 되었다. 수평선 위로 가루처럼 뿌려진 별무리나 해수면에 은은한 색을 입혀 윤슬을 만드는 달을 보고 있으면 하루가 다 갔음이 확연히 실감 났다.

‘다음 기념일에는….’

‘내년에는….’

‘다를까?’

SAI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의문문으로 끝내지 않았을 터였다, 분명히.

“후….”

짤막한 한숨을 토한 뒤 류스이는 난간에 기댔던 몸을 바로 세웠다. 만일 지금 상태로는 예상도 할 수 없었던 상황과 조우하지 않았다면, 쓸쓸함이라 이름 붙은 마음속 구멍을 측정하며 터덜터덜 돌아갔을 터였다.

“삐갸악!”

동생이 갑자기 돌아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는지 SAI는 큰소리를 내질렀다.

“SAI?”

놀란 것은 류스이도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마땅히 당혹스러웠으나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제 어깨높이에 맞추어 엉거주춤하게 뻗은 손과 휘둥그레 뜨인 두 눈을 본다면. 대체 무슨 타이밍인 건지, 이렇게 가까이 다가왔다면 진작 알아차리고도 남았을 텐데 왜 조금도 느끼지 못 한 건지, 여러 의문이 떠올랐으나 가장 큰 궁금증은 단연코 이것이었다.

“왜 여기 있어?”

알고 있는 대로라면 오늘 SAI의 일정은 제자 둘을 가르치고─이 대목에서 류스이는 허상 같은 단내를 맡았고 속이 아프다고 느꼈다─연구실에 출근해 일을 본 다음 퇴근하는 것뿐일 터였다. 기거하는 저택은 반대편이었고, 굳이 여기 류스이 재벌 본관까지는 올 이유가 없다는 의미였다. SAI는 류스이가 질문할 때까지도 얼빠진 상태에서 돌아오질 못 하다가, 한참 만에 겨우 손을 내리고서는 소리를 냈다.

“아, 그, 그게….”

제대로 된 답변을 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SAI는 머뭇대는 기색으로 내쉴 듯 말 듯 입술을 달싹이더니, 결국에는 꾹 다물어버렸다. 혹여나 시선이 맞을까 내리깔린 눈동자나 꼼질꼼질 움직이는 가녀린 손가락을 보고 있자면 그가 어떤 기분인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이쯤에 이르면 의문은 이제 다른 내용으로 바뀌었다.

“왜 그래?”

SAI가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하지 못 하고 망설이는 상황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대범한 성격과는 여기 류스이 재벌 부지부터 지구 반대편 정도까지의 거리가 있는 게 내 형제였으니까. 의아스러운 점은 지금은 굳이 저럴 까닭이 없다는 것이었다. 오전에 있던 일 때문이라면 계면쩍어할 쪽은 전적으로 나라고 류스이는 믿고 있었고, 이윽고 한 번 더 확실히 하는 게 좋으리라 판단했다.

“있잖아, SAI─”

미안하다.

“미안해, 류스이.”

하고자 했던 말은 눈과 눈이 마주친 순간 혀끝에 걸렸고, 나직한 목소리가 귀에 박히는 것과 함께 완전히 사그라졌다. 또 한 번 타이밍이 맞물린 것에 SAI는 이번에도 놀란 듯이 보였지만 (이는 류스이도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꺾지는 않았다. 의지할 빛이라고는 어슴푸레한 가로등 불뿐이라 실제보다 탁하게 보이는 밤색 눈동자에는 변함없이 머뭇거리는 낌새가 남아있기는 했으나 결코 직전만큼은 아니었다.

“아무리 네가 걱정됐더라도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됐는데, 미안해….”

칼로 냄비를 내리친 순간 전해진 진동이 여전히 손바닥 안에 머물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SAI는 오른손을 떨었다.

“그렇지만 네가 나 때문에 다치는 걸 상상하니 정말로 무서웠어….”

갈수록 희미해지는 데 비례해 점점 더 일렁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류스이는, SAI가 밝힌 것 이상으로 두려워했고 지금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든 떨림을 멈추고 싶은지 왼손을 오른손 위에 겹쳐 꼭 붙들기도 했으나 끝내는 두 손 전부 불안하게 꿈질거렸다.

SAI라고 해서 부상을 쉽게 고칠 수단이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설령 석화장치를 남용해서는 안 된다며 허가가 나지 않더라도, 작은 자상 정도면 일상생활과 업무에 큰 지장을 주지는 않을 것이며 낫기까지도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 흉터 정도는 옅게나마 남을지 몰랐으나 동생이 그런 걸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라는 사실은 다른 누구보다도 SAI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SAI가 두려워한 것은 동생에게 상처 입히는 일 자체였다. 마음도 모자라 몸까지 아프게 하는 상황에 직면할까 겁이 났고, 그렇게 해버린 자신을 용서할 자신도 없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같은 상황을 피하고자 한 행동이 결국 동생을 괴롭게 했다는 사실이었다. 언제나─지난날─처럼 고의는 아니었으나 또다시. 그렇기 때문에 SAI는 스스로 더 악질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더는 그를 피할 까닭도, 오해할 이유도 없는데.

이 순간에도 그칠 줄 모르는 죄책감에 젖어 한껏 애달파진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자면 류스이는 “그래서 애플파이는 잘 구워졌나?” 맥락 없이 묻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당연히 무안을 주거나 돌려서 비난할 작정은 아니었다. 단지 괜찮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었다. 네가 네 일을 잘 마쳤다면 난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갓난아이 시절부터 지켜보아 알고 있는 그 성격으로 미루면, 저가 자리를 뜨자마자 잘못을 깨닫고는 줄곧 전전긍긍했을 것이었다. 종일 얼이 빠져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 하게 된 나와 마찬가지로.

“SAI.”

나직하게 호명하자 이끌리듯 따라온 두 눈이 시선을 섞어주었을 때, 류스이는 큰 손을 폭신한 정수리 위에 얹어 쓰다듬기 시작했다. 더불어 평온히 웃어 주자고도 생각했으나, 미소는 결심보다 빠르게 드러난 지 오래였다. 류스이는 자연스레 올라간 입꼬리 끝자락과 혀 뒤에서부터 흡족한 기분이 들끓는 것을 느꼈다. 입술을 조금이라도 벌린다면 그 즉시 훅하고 쏟아져 흐를 것처럼 크고 강렬한 감정이 기도를 꽉 채운 채 맴돌았다.

“류스이….”

마침내 SAI가, 애달픈 기색이 희끄무레 남아있는 것만으로 모자라 그답게 수줍어하기도 했지만, 명백히 본인과 같은 마음으로 미소 짓기 시작했을 때 류스이는 생각할 수 있었다. 애플파이든 무엇이든 그런 건 더는 중요하지 않다고. 사랑하는 사람이 진심으로 빚어낸 표정과 마주한 지금이 한없이 소중해 충분히 만족스럽다고─욕심쟁이가 할 만한 발상이 아니라 해도─이제는 부드러운 살결을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여기 있어.’

‘내 곁에 바로….’

유구한 버릇으로 딱딱해진 손끝이 턱선을 훑어 내려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떨어지고, 대신 이만 돌아가자며 종용하는 눈빛이 다가왔을 때 SAI가 문득 입을 열었다.

“너한테 줄 게 있어.”

그윽한 밤색 눈 안에 의아함이 깃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SAI는 어깨에 걸친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이내 무언가 꺼내 내밀어 보였다.

새까만 손바닥보다 살짝 큰 하늘색 상자에는 곱게 자른 오렌지색 리본이 붙어있었다. 동생이 받을 낌새 없이 상자와 제 얼굴만 번갈아 보자 SAI는 재촉하듯 손을 흔들었다. 어서 받아, 하면서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감히 낼 수 없었다. 상자를 류스이에게 건네는 것과 동시에 거의 다 가라앉았다고 확신했던 기분이 다시금 솟구치기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 입을 열면 긴장 섞인 부끄러움에 가슴이 요동치는 걸 분명 들키고 말겠지…….

“…….”

입을 뗄 수 없는 것은 류스이도 마찬가지였다. 육감이 발달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좋은 점이었지만, 이럴 때만큼은 느슨하게 발휘되어도 괜찮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면 모를수록 크게 놀라게 될 것이고, 놀라면 놀랄수록 잇따르는 감정도 거대해질 것이었으므로. 요컨대 이 순간 제 안에 뛰는 감각은 뱃사람의 감보다는 사랑을 겪는 사람의 감에 가까울 터였다.

SAI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지 않았어. 단지 내게 전하지 않았을 뿐.

류스이는 건네받은 상자를 지체 없이 열었다. 내용물이 보이자 사고가 멈추었다. 계란 흰자로 만든 머랭에 아몬드 가루, 식용 색소, 그리고 크림을 넣어 만드는 작고 달콤한 디저트를 어떻게 부르는지가 떠오르지 않아서. 정확히는 오전 내내 바라고 또 바랐던 선물임은 진즉에 알았으나 이렇게 본격적인 게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 해서, 상자가 열릴수록 초조감에 물들던 SAI가 끝내는 압도당해 얼어붙어 버린 것을 목도한 게 그 이유였다.

류스이는 형을 정신 차리게 해주고 싶었으나 여전히 소리 낼 수 없었다. 그가 떠안고 있을 감정에 비할 바는 못 되더라도, 저 역시 적잖이 놀랐다는 걸 자각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거….”

결국 먼저 대화를 재개한 쪽은 SAI였다. 아주 조금 녹았을 뿐 온전히 해동된 것은 아니라 더듬더듬 말을 깁고, 행여나 더 부끄러워질까 싶어 시선을 피한다고 하는 부적절한 행동은 다 했지만 말이다.

“파이데이라고 주는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마카롱도 파이처럼 원형이니까, 혹시나 해서….”

원형이라는 말에 류스이는 형제의 목소리로 읊어졌던 기나긴 숫자의 나열을 떠올렸다. 3.14, 그 뒤로는 10자리 남짓밖에 기억해 낼 수 없었지만. SAI라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욀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오늘 3월 14일이잖아. 2월에는 바빠서 못 챙겨줬으니까 이번 달에는 꼭 주고 싶었는데, 알고 있어, 류스이…? 오늘이 무슨 날인지.”

질문과 동시에 SAI는 류스이를 바로 바라보았다. 가까스로 보게 된 얼굴에는 불안과 기대가 동시에 엿보였다. 길고 고른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보았을 때 류스이는 직전에 한 생각을 고칠 필요성을 느꼈다. SAI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게 아니고 단지 내게 전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사실에 더해, 내가 모를 수도 있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고. 또한 내가 모른다고 한다면 어떻게 대응할지 몰라─“좋아해” 직설적으로 말할 용기는 아직 갖지 못 해서─전전긍긍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SAI는 정말 내가 간식을 요구하러 온 줄로만 알았던 거군.’

‘내가 너를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 하고.’

‘확신은 전혀 없이….’

‘나처럼.’

다른 상황 같았다면 류스이는 평소처럼 “핫하! 내가 그런 걸 모를 리가 없잖나! 나를 너무 우습게 보는구나, SAI!”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것이 진짜 현실인지 받아들이는 것도, 넘쳐흐르기 시작한 감정을 단적으로 정의하는 것도.

진심으로 기뻐 웃음이 나올 것 같은 한편 무엇을 그리도 걱정했던 것인지 스스로 한심하기도 하고, 놀라운 만큼이나 어처구니가 없기도 한 마음을 류스이는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알지 못 했다. 단언할 수 있는 사실은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벅찬 마음은 행복, 다음으로 큰 것은 흐뭇함이라는 것이었다.

“맛은 기대하지 마. 프랑수아가 도와주기는 했지만, 처음 만들어본 거라 네 입에는 별로라고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 아마 그럴 테니까…. 게다가 어제 미리 만들어놓은 거고…….”

본인이 일으킨 너울에 동생이 휩쓸려 내려간 줄도 모르고,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SAI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좋아하는 프로그래밍을 제외하고는 하나 같이 자신 없어 하는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는 기만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언제쯤 자각할까, 예상하건대 한평생이 걸려도 불가능할 터였다. 그는 날 때부터 이런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하나만큼은 반드시 인정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류스이는 원했다. 너는 사랑스럽다고 느끼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어쩌면 이 세상에서─적어도 내 안에서는─최고로.

“키스해도 돼?”

드디어 돌아온 답에 자기 불신뿐이었던 얼굴이 멍하게 바뀌는 것은 찰나였고, 놀라움이 얼이 빠진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일순이었다.

“에, 에…?”

의식 없는 소리가 쏟아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무렵에는 수줍은 열기가 만면에 가득 비쳤다. 일당백만을 한다는 두뇌로도 처리할 수 없는 요구에 귀까지 빨개진 채 뻐끔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류스이는, 비록 다른 의도는 조금도 없는 순수한 진심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여느 때처럼 짓궂게 구는 그림이 된 것에 만족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는 이게 제일 잘 어울려. 서로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해도.

“손잡아도 될까?”

류스이가 재차 물었다. 그때까지도 SAI에게는 스스러운 기색이 지워지지 않을 것처럼 어려 있었지만, 결국에는 극복해 냈다.

올려다보는 두 눈이 잘 여문 사과처럼 윤이 나기 시작했을 때 류스이는 손을 내밀었다. SAI는 두껍고 긴 손가락 안에 제 손가락을 얽었고 깍지를 끼우듯이 맞잡았다. 괘념할 문제 따위 더 이상 없다는 걸 동생도 형도 느꼈다. 잔잔하게 울리는 파도소리를 새기며 두 사람은 밤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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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 출근하는 가젤

    선생님!!! 이번 글은 그림처럼 어느 순간 떠오르는 저 둘의 모습과 인간 감정에 대한 통찰력이 매우 돋보였네요.. 트위터 게시글이 저만 안보이는지는 모르겠지만 답글을 쓰고 싶어도 선생님이 팔로하는 계정만 답글을 쓸 수가 있어서 저는 그렇게 선생님이 힘들어하시는 걸 보고도 아무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하고싶은 말은 선생님은 진짜 독보적으로 맛있는 글을 쓰세요. 매번 한 글 볼 때마다 개큰감동 받아서 아껴서 보았더니, 제가 좀 늦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정말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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