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귀야행 AU

공식 백귀야행 기반 AU / 나나미 형제 논CP와 CP 사이 

- 이전 글과 같은 세계관 과거 시점 (1) (2)

- 개인적인 해석과 날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랜 세월 줄곧 격의 없는 사이로 지내온 만큼 류스이는 손위 형제가 무거운 분위기를 일으키면 짐짓 긴장하고는 했다. 이러한 상태는 그가 왜 돌연 심각해하는 것인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느끼는 와중에 “디디, 잠깐만….” 하며 불러 앉히자 더더욱 심화했다. 흘러내린 검은 머리 사이로 진홍색 눈동자가 빤히 바라보는 것을 응시하고 있자면 류스이는, 이 역시 이유를 찾을 수 없었지만, 무릎을 꿇고 앉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할 말이 있어.”

사이가 첫 마디를 떼자 류스이는 흠칫하는 것과 동시에 대충 늘어져 있던 꼬리를 단정히 말았다.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형을 바라보는 얼굴은 무감각했으나 머릿속에서는 온갖 상념이 마구 휘저어지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자세를 고쳐 앉는 게 나지 않으려나, 그보다는 무슨 일인지 묻는 게 역시 우선이려나, 혹시, 혹시나,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데 그 사실을 깨닫지 못 해 화가 난 건가…….

“급작스럽다는 건 알지만….”

동생이 고뇌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사이는 할 말을 이었다.

“새 술서를 쓰느라 지난 두 달간 제대로 잔 날이 없고….”

“올해는 불러들일 비구름도 많았고….”

“날이 뜨거워 움직이기도 어려우니….”

“조금만….”

“조금만 하면 할게.”

하면.

한 마디씩 거듭될 때마다 무거워지던 긴장감은 마지막 단어가 귀에 꽂힌 순간 단숨에 씻겨 내려갔다.

“사이, 내가 제대로 이해한 건지 모르겠다만….”

류스이는 말았던 꼬리를 풀고─이 역시 의식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얼떨떨한 기분이 목구멍 안쪽에서 맴도는 걸 느끼다가 가까스로 내쉬었다.

“장기간 잠을 자겠다는 건가?”

“응.”

“언제까지?”

“음….”

사이는 태연히 대답했다.

“가을걷이 무렵에는 일어날게.”

“한가을까지 자겠다고?”

“응.”

“지금부터 당장?”

“응.”

형은 평소에도 기운 넘치는 편은 아니었지만, 나직하게 대답하는 얼굴은 유달리 노곤해 보였다. 한봄부터 오늘까지 그는 낮은 존재를 굽어살피는 신으로서, 탐구심이라는 욕망과 함께 사는 학자로서, 술식과 비급을 다루는 데 흥미가 깊은 주술사로서 바쁘게 지내왔고 잠시간 쉬고 싶어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형제보다 털이 배는 많은 데다 열을 잘 먹는 검은색이기까지 해서, 해가 쨍한 계절을 힘들어하는 것 또한 감안할 부분이었다.

“그동안 나는?”

류스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단 하나, 형제가 잠들고 난 다음 일이었다.

“계절이 바뀔 때까지 혼자 지내라고?”

류스이가 거듭 물었다.

“혼자는 아니지.”

사이가 답했다.

“내가 여기 있잖아.”

사이는 평온하게 대답하며 “삐햐아악….” 하는 기묘한 하품 소리를 덧붙였다. 정말 별일이 아니라는 듯 무심한 태도를 고수하는 형과 대조적으로 동생은 명백히 당혹스럽다는 기색이 되어 더듬더듬 말을 잇댔다.

“내가 말하는 혼자는 그런 뜻이 아니다만….”

“나도 알아.”

“안다고?”

“그럼.”

지루한 시간을 견딜 자신이 없고, 불러도 대답 없을 상황이 낯설고, 분명 옆에 있음에도 쓸쓸한 감정이 들 게 우려스러운 거겠지.

사이는 피로한 눈으로도 빙그레 웃었다. 아우가 이 정도로 적나라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고, 그 반응이 몹시도 귀엽다는 것처럼. 반면 류스이는 갈수록 곤란한 낯빛이 되어서는 불안한 기분을 담아 꼬리를 흔들기도 했다. 형이 속내를 들여다본 것은 확실한데, 평소와 달리 원하는 답을 주지는 않으니 초조한 기분이 잇따랐다. 무엇이든 핑곗거리가 필요했다. 류스이는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여의주가 덜 여문 이무기를 내버려두는 건 불안하다며.”

“겨우 몇십 일인데 그 정도는 괜찮아. 그리고 언제는 어른 취급해 달라더니.”

“일관성 없이 취급해 주길 바란 건 아니었어.”

“그럼 어른 취급하는 건 아니고, 여전히 어린 채로 혼자 지낸다고 생각해.”

“사이.”

“진즉 나보다 커졌고, 어떤 부분에서는 비견할 자 없이 강한 데다, 이미 훌륭한 존재로 우러러지고 있으니까….”

사이는 가늘고 긴 손을 뻗어 추수철 곡식 같은 머리칼과 보름달처럼 흰 살결을 훑었다. 옅게 지었던 눈웃음은 손길을 거듭할수록 또렷해졌고 이에 비례해 기특하다는 감정도 커졌다. 손끝이 떨어져 내려갔을 때 류스이 앞에 앉아있던 것은 밤하늘색 비늘과 난운 같은 갈기로 뒤덮인 신성한 생물이었다. 사이는 한껏 목을 숙여 가능한 한 눈높이를 동등이 맞추고, 온후한 눈 속에 손아래 형제를 담으며 조곤조곤 속삭였다.

“거꾸로 생각해 봐, 류스이. 내게 통제당하는 게 늘 불만이었잖아. 지금 너는 너답게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보내도 괜찮은 시간을 얻은 거라고. 그 시간 속에 겪어본 적 없던 새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하늘이 알겠어?”

그러고는 “잘 자.” 끝인사를 전하는 대신 동생의 얼굴을 핥았다. 혀끝으로 섬세하게 쓸었다고는 해도 타액이 머리까지 젖게 하는 건 피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축축해진 앞머리와 얼굴을 쓸어내리면서도 류스이는 불만스러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저 또한 형에게 애정을 표하고 싶을 때 곧잘 하는 행동이었으므로. 아쉬운 감정과 별개로, 잠들어있는 시간에조차 그는 나를 사랑하리라는 걸 류스이는 굳게 확신했다.

“사이.”

“…….”

“사이.”

“…….”

탐스러운 꼬리가 다소곳한 다리와 몸을 감싸 똬리를 만들고 나자 사이는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호흡하는 소리도 꼼질대는 소리도 무엇도 없었다. 몇백 년 동안 보아온 모습이 한순간에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인지 도저히 모르겠기에 류스이는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비로소 현실이 현실로써 와 닿기 시작한 것은 알을 깨고 나온 순간부터 머나먼 이국에 발붙인 지금까지, 그가 제게서 눈을 뗀 순간이 한시도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난 다음이었다. 형제는 그것을 통제라 표현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걸 구태여 되짚을 필요는 없었다.

‘혼자….’

‘나 혼자.’

푸짐한 꼬리 속에 파묻히듯 기대며 류스이는 사이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곱씹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그가 옳았을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줄곧 마음대로 살아왔다고는 하나 온전히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누리면 좋을지조차 모르는 나는 어린 존재라고.

우선은 그 곁에서 한숨 잠을 청한 뒤 차차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

 

자유와 혼자라는 현실에 맞서 류스이가 내디딘 첫걸음은, 형제가 함께하지 않는다는 점만 제외하면 평소와 같았다. 은신처가 있는 굴 주변을 산책하고, 시원한 그늘에 누워 바람을 쐬고, 이따금 산새나 들짐승을 마주칠 때면 그 자리에 앉아 한담을 나누기도 했다. 류스이는 스스로 용이라 여겼고 그렇게 취급받기를 바랐지만, 만물의 화신이라는 나머지 정체성도 부정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다른 생명과 어울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느꼈다. 그러나 이는 필연적으로 그에게 있어 유일한 이해자이자 세계 자체인 존재에 대한 그리움을 불렀고, 결국에는 나아갈 수 없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사이.”

“나 무척 심심하다만.”

“일어나주면 안 될까?”

“이 시간이 너무 지루해.”

“혼자 있는 매 순간이 생경해….”

“그러니 일어나.”

“…….”

“일어나, 형제여….”

“…….”

어떤 식으로 애원해도 사이는 일어날 낌새를 보이기는커녕 몸을 뒤척이는 일조차 없었다. 부동이라는 표현이 저절로 떠오르는 모습에 류스이는 형제가 이대로 명을 다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더불어 이무기조차 못 된 도롱뇽 내지는 도마뱀 같았던 유년 시절 이래, 형에게 이토록 끈덕지게 달라붙었던 적이 있었는지를 상기했다. 턱 밑에 주둥이를 마구 비벼대도, 꼬리로 감싼 몸을 제 몸으로 한 번 더 감싸 열기를 전달해도, 털을 유난스럽게 핥으며 침을 발라도 꿈쩍이지를 않으니 끝내는 제풀에 지쳐 그만두었다.

대신 어느 날부터는 그 몸이 언덕이라도 되는 듯 타고 올라가, 부드러운 갈기를 이불 삼은 채 온몸을 파묻고 잠들기 시작했다. 비록 유의미한 교감은 안 되나 그러고 있자면 혼자라는 기분이 덜어지기는 했다. 익숙한 체취와 온기에 감싸이는 것만으로 가슴이 한구석이 조금은 잔잔해졌다.

 

사이가 모아놓은 책이 눈에 들어온 것은 나가서 노는 것도 재미가 없어, 나 역시 차라리 그처럼 잠이나 자는 게 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이었다. 손아래 형제가 태어나기 한참 전부터 그는 책을 읽고 쓰는 데 열중했고, 고토를 떠난 지금도 연구자로 살아가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류스이는 그러한 형을 나이에 비해 고리타분하고 싱거운 사람으로 여긴 적 있었는데, 사이가 왜 그렇게 살고 있고 살 수밖에 없는지를 깨달았던 순간을 결코 잊지 못 할 것이었다. 가문과 혈통이라는 감옥 안에서 외톨이가 세상을 내다볼 수 있는 창은 오로지 그것뿐이었고, 그가 먼저 창을 열고 깨끗이 닦아두었기 때문에 저 또한 모르는 세계를 동경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 한은 말이다.

‘대부분 술서고, 저쪽에 있는 건 인간이 쓴 책인가.’

형만큼은 아니었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지만, 독서에 그럭저럭 흥미를 갖게 된 게 언제부터인지 류스이는 기억해 낼 수 없었다. 사이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일 중 하나─나머지는 필사와 그가 ‘혼자 있고 싶은 기분’을 누그러뜨릴 때까지 기다리기 등이 있었다─여서 자연스레 좋아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다행히 책 읽기는 이 권태로운 시간을 앞으로 감는 데 큰 도움을 주었고, 쓸쓸한 기분을 지우는 데도 좋은 역할을 했다.

“핫하! 사이, 제법 재미있는 책을 구했구나. 여기 나와 있는 이 술식 말인데….”

“…….”

“사이?”

“…….”

“……아.”

그만큼 현실을 상기한 순간 되돌아온 감정도 무거웠지만 말이다.

그래도 독서가 다른 방법보다 특히 나은 점이 있었다면, 일종의 연장선으로 새로운 방법을 찾게 해주었다는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우연을 통해 찾게 된 길이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리되었다.

 

여느 아침처럼 부드러운 갈기 속에서 눈을 뜬 류스이는 어렴풋한 정신으로 꼬리를 끌어안은 채 뭉그적거리다가, 빠르다면 빠르고 느리다면 느리게 알아차린 사실에 소스라쳐 몸을 일으켰다. 책을 읽다 깜빡 잠이 드는 건 종종 겪는 일인 만큼 새삼스레 놀랄 까닭이 없었지만, 문제는 보고 있던 책이 사이가 하면에 들기 전에 완성한 바로 그 술서라는 점이었다. 요컨대 현재 가장 중하게 여기고 있을 물건. 그가 일어날 가을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고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원형에 가깝게 돌아가지 않을까 류스이는 생각했지만, 잠결에 새긴 잇자국과 침으로 더러워진 책을 보고 있자면 벼락이라도 내리칠 듯 으르렁거리는 숨소리가 귓속에 울리는 듯하였다.

게다가 미련하게 저지른 사고는 이뿐이 아니었다. 얼굴에 걸려 있어 마땅할 애체가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는 것까지 알았을 때 류스이는 잠시간 사고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집을 떠나기 전 짐스러워질 걸 감안하고도 일부러 챙겨왔을 정도로 형이 그 독특한 거울을 애지중지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책이든 애체든 하나뿐인 동생에는 절대 비할 수 없는 데다, 그를 홀로 둔다는 선택에 대한 결과인 만큼 사이는 괜찮다며 넘어갈 터였지만─한 차례 “삐갸악!” 하고 소리 지를 가능성은 있었다─지금 류스이로서는 그것까지 생각해 낼 수 없었다. 다행히 털 뭉치 사이에 파묻혀 있던 것을 금방 찾기는 했으나 안도하기에는 일렀다.

“이게, 왜….”

귀에 걸어 고정하는 끈 하나가 끊어져 있었다. 추측하건대 뒤척이면서 벗겨진 것이 뿔에 걸려 잘못된 것 같았다. 사이가 수선해 쓰는 모습을 본 기억이 있으니 소재만 있다면 고칠 수 있을지도 몰랐으나 이런 산굴에 그런 게 굴러다닐 리는 만무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이의 꼬리를 뒤지고 숲에 사는 친구들에게 물어보기도 했지만, 당연하게도 구할 도리가 있을 리 없었다. 인간이 만들어낸 물건 같은 건.

‘인간….’

‘인간.’

‘인간!’

번뜩인 것은 찰나였다. 왜 진작 생각하지 못 한 걸까 하는 자책은 없었다. 깨달았을 때는 만면에 환희가 번진 뒤였다.

굽어보는 것이 너무나도 익숙해진 나머지 되레 잊고 있던 존재들을 떠올렸을 때 류스이는 과거 한때를 추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이가 그 많은 종이를 어떻게 조달해 오는지, 필기구는 누구에게서 빌린 건지, 낯선 냄새가 밴 책은 어디서 구해오는 건지 처음으로 의문을 품었던 날을 말이다. 몰래 인간 마을에 가는 뒤를 밟았던 것과 거의 도착했을 때쯤 들켜 형을 난처하게 했던 순간이 겨우 어제 일처럼 느껴졌다.

‘망가진 것도 고치고 시간도 때울 수 있겠어.’

어물쩍거릴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류스이는 곧장 나갈 채비를 했다. 화폐 대신 쓸 재보를 챙긴 뒤 가까운 샘에 들러 뿔이 잘 감추어졌는지 확인했다. 둔갑에 익숙해진 뒤로는 단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기는 했지만, 지금은 미숙했던 어린 시절처럼 머리 위에 뒤집어쓸 외투가 있는 게 아니었고, 이상이 생긴 걸 지적하고 감싸줄 사람도 없는 만큼 신경 써서 나쁠 것은 없을 터였다.

 

가까운 마을은 때마침 장날이라 류스이는 말 그대로 즐거운 한때를 보낼 수 있었다. 눈에 담는 것만으로 구미가 당기는 제철 과일을 잔뜩 사서 입에 넣고, 애체를 고칠 소재와 마음에 드는 장신구를 구한 다음에는 술청에 가서 술을 마셨다. 안 그래도 특이한 행색으로 시선을 끄는 것이 술을 끊임없이 마시며 취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으니, 신기하게 여긴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구경꾼이 되기도 했다. 정신은 말짱했으나 폭음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들떠 류스이는 개의치 않았다. 혹여나 돈을 내지 않고 도망갈까 염려라도 되었는지 술청 주인이 중간 계산을 청하러 왔을 때, 딱 그때만 기분이 가라앉았다.

진탕 퍼마신 뒤에는 마을 변두리에 있는 고목 위에 올라가 거대한 그늘 속에서 낮잠을 취했다. 이따금 바람결이 나뭇잎을 훑는 소리와 근처 시내에서 졸졸 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 있자면, 산굴의 서늘함과는 다른 시원함이 꼬리털 한 가닥 한 가닥에 스미는 것 같았다.

해가 저물고 공기가 식을 무렵이 되었을 때 류스이는 마을로 돌아왔다. 한밤의 시장은 낮과는 또 달랐는데, 그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확고했다. 부정한 일에 활용하든 어쩌든 경험은 굉장히 귀중한 자산임이 틀림없어, 은근한 구석에서 노름판을 찾는 것은 류스이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비이성적인 흥분과 그에 맞먹는 절망이 너울 치는 공간은 요괴 소굴과 다를 게 없었다. 인간, 요괴, 어느 것에도 비할 수 없는 존재로서 류스이도 그 열기에 끼어들었다. 처음에는 그가 가진 재물, 배짱과 오기에 감탄하던 사람들도 걸고 잃고 걸고 잃기만 하는 상황이 반복되자 ‘대체 언제까지 걸 수 있는 걸까’와 ‘대체 어디까지 운이 없는 걸까’ 같은 생각을 동시에 하게 되었다.

서른한 번째 놀이의 마지막 패가 뒤집히고 여지없이 패배가 결정된 순간, 류스이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져온 재물이 다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잘 풀릴 것 같은데 하는 감이 사그라진 것도 아니었다.

“디디, 또 불경한 짓 저지르고 있었지? 너 다른 건 몰라도 이런 건 손해만 보는 것 같으니까, 다시는 하지 마….”

이만하면 전해져 마땅할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고, 들려올 수 없다는 것을 상기해 냈을 때 돌연 허무해진 탓이었다.

 

좋든 싫든 이튿날부터 류스이는 은신처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새벽 어스름이 걷히기 무섭게 거센 빗줄기가 대지를 적시기 시작한 탓이었다. 날씨를 다루는 존재로서 직감하길 사흘은 쏟아질 것 같았다. 권능을 이용해 순식간에 맑은 날을 만들 수도 있었으나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한 편리대로 날씨를 바꾸는 건 부적절한 행동임을 류스이는 깨닫고 있었고, ‘비늘이 벗겨질 만큼 지루해서’ 같은 건 특별한 이유에 포함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결국 할 만 한 일이라고는 여느 때처럼 형제에게 기대어 이 무료한 시간도 빗물을 타고 가버리길 기대하는 것뿐이었다.

정작 비는 예기치 못 한 다른 것을 가져다주었지만 말이다.

‘그때도….’

‘그날에도….’

‘이런 날씨였던가.’

‘아마도.’

굴 밖에 쏟아지는 비는 장대였으나 심중에 내리는 비는 가랑비였다. 기억은 깨닫지 못 하는 새에 가슴을 적시고 물안개처럼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백 살이 되었을 무렵 토해낸 여의주는 승천하기 전까지는 영글지 못 한 상태로 남아있을 터였지만, 온전히 제 것인 비보가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류스이는 행복했다. 여의주를 가졌다는 것은 저 역시 다른 일족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용의 혼을 품고 겨레의 피를 잇는 자라는 증거였고, 이로 말미암아 절반은 다른 존재라는 사실에서 기인한 불안을 해소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스스로 용이라 여기고 어엿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까지 인정해 주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사슴이 보물을 가지고 있잖아. 어디에서 훔쳤어?”

“훔치지 않았다면 가짜로 꾸며낸 거네.”

“반쪽짜리 주제에 어딜 우리와 같아지려고.”

“거짓말쟁이.”

“사기꾼.”

면전에서 흉보는 말은 언제나 그렇듯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있었다.

“네 형제도 똑같아.”

“협잡하는 것도 형이 가르친 거지?”

“비천한 사슴 주제에….”

하지만 그 추잡한 입들에 형이 올라오는 건 어떻게 해도 참을 수 없었고, 이 또한 언제나 그렇듯 류스이는 먼저 이빨을 드러내 보였다. 류스이는 그들에게 있어서 할아버지인 가주의 아들, 즉 삼촌이자 정당한 후계자 중 하나였고, 위계질서와 서열을 중시하는 가풍상 꾸지람을 듣는 것은 늘 조카들이었다. 그렇다고 심신에 상처가 남는 것까지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으며, 심지어 그날은 유달리 심하게 다투어 아버지는 물론 조카들의 아버지인 셋째 손위 형제에게도 듣기 싫은 말을 들은 탓에 기분이 더 좋지 않았다.

“디디?”

가장 참담한 때는 추한 꼴을 보여주기 싫어,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사람과 기어코 맞닥뜨렸을 때였지만 말이다. 복도를 지나가던 중 동생을 발견하곤 반가운 마음에 다가온 사이는, 마주 서기 무섭게 눈을 크게 뜨더니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얼굴이 왜 이래? 옷하고 꼬리는 또 왜 이렇고?”

류스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얼마가 더 지났을 때 사이도 눈매를 바로 하고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곧잘 말하듯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만 좀 싸워라” “그래도 촌수로는 네가 어른인데 용서하고 넘어가라” 하는 무의미한 말도 덧대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눈높이가 조금 더 낮았던 동생과 시선을 올곧이 한 채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낡고 오래된 서고 외에는 어떠한 존재 가치도 없는 별채에 드나드는 사람은 별종으로 취급받고 실제로도 그러한 형제 둘뿐이었다. 대화가 재개된 것은 이 누구도 오지 않을 장소로 자리를 옮긴 뒤, 퍼부어지는 억수가 침묵을 흐리는 걸 잠시간 느끼고 난 다음이었다.

“이리 올래?”

처마는 빗소리를 요란히 키우고, 마루는 습기를 머금어 눅진했다. 사이가 무릎을 꿇고 앉자 류스이는 주저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더는 유년 시절처럼 온몸을 파묻는 건 불가능하고 기껏 해봤자 머리와 고개밖에 감쌀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새까만 꼬리 위로 몸을 뉘었다. 춥지는 않았으나 온기가 절실했다. 오로지 이 상태로만 느낄 있는 수 온기가. 그러고 있자면 촘촘한 비늘로 뒤덮여 매끈한 손이 머리를 쓰다듬고, 조금 뒤에는 푸석해진 꼬리를 다듬어주었다. 다정하고 섬세한 손길은 안정을 주는 동시에 아직 다 가시지 않은 설움을 되새기게 했다.

“사이, 여의주를 가졌으면, 용이 될 수 있는 거지?”

류스이는 일부러 고개를 박은 채 웅얼웅얼 물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저답지 않고 비참한 질문 같아 차마 바로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형을 보고 싶지 않았다. 비교적 몸이 짧고 다리가 길어 조금 특이하게 생긴 용 정도로 보일 저조차 멸시당하는 현실에, 나머지 절반의 정체성과 더 닮은 형제는 어떤 심경으로 살고 있을지 헤아릴 자신이 없었다. 이 집안의 누구보다 똑똑하고 강하면서 부당한 상황에 맞서지 못 하는 것은 어떤 기분인지 물을 용기도 없었다.

“샤오슈이.”

잠시 여유를 두고 사이가 말했다.

“이 비를 내려주는 게 누군지 알아?”

명확한 답이 아닌 것도 당황스럽건만, 뜬금없는 내용에 류스이는 마땅히 의아스러워했다. 그렇지만 형제는 헛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처럼 단둘이 있을 때는 특히.

“누군데?”

류스이는 슬며시 고개를 들고 물었다.

“태고에 가장 먼저 승천한 용, 우리 선조.”

홍옥 같은 두 눈은 재색으로 뒤덮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보다 높은 곳,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있을 존재를 더듬어 찾듯이.

“선조께서는 이무기였을 때 느꼈던 서러움을 버리고자 첫 비를 내렸고, 승천하는 기쁨을 전하기 위해 두 번째 비를 내렸으며, 지금은 지상에 남은 자손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비를 내리고 계신다고 해. 그래서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에 태어난 이무기는 큰 용이 될 자질을 가졌다는 말이 있어.”

바로 너처럼.

마지막 마디는 귀에 닿지 않았으나 류스이는 분명히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집안사람들 누구도 나─우리─를 용으로 여겨주지 않아. 어쩌면 아버지조차도.”

담담하게 내쏟아지는 목소리는 변함없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지만, 류스이는 말하기를 멈출 수 없었다. 숨이 조금씩 가빠지는 동시에 뜨거워지고, 주먹을 쥔 손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으나 이것까지 깨닫지는 못 했다.

“괄시당하기 위해 주어진 삶 같아.”

류스이는 한 마디를 토해내곤 몸을 웅크렸다. 따스하다고 느꼈던 게 착각이었던 듯 다시 몸이 시렸다. 이렇게나 포근하고 보드라운 털 속에 감겨있는데 어째서 추운 걸까, 이유를 모르겠다고 느낀 순간 안온은 찾아왔다.

“슬퍼해도 괜찮아.”

가느다란 손은 더 이상 동생을 쓰다듬지 않았다. 어루만지는 대신 끌어안고 체온을 나누어주었다. 진심에서 배어 나온 애정은 맞닿은 살과 숨을 통해 어린 이무기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렇지만 기분에 떠밀려 한계를 정해버려서는 안 돼. 네 심장은 지금 막 네 손에 쥐어졌을 뿐이고, 그것을 뛰게 하는 것은 온전히 네 할 일임을 잊지 마. 너는 아직 탈피하지 않은 가능성인 동시에 세계와 만물이 깃든 존재니, 누구보다도 크게 될 수 있어.”

사이는 동생의 머리를 마지막으로 쓰다듬어주고는 시선이 맞도록 바로 앉혔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내려다보는 눈빛만큼이나 애틋하고 비할 데 없이 절절했다.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삶이 얼마나 고달픈지는 배울 필요 없어. 갇힌 채로 사는 게 어느 정도로 괴로운지도 상기할 필요 없고. 신에게는 걸맞지 않다고 해도, 너는 너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게 어울려. 줄곧 해 온 것처럼 제멋대로.”

“무엇보다도 너답게…….”

이번에는 환청이 아닌 진짜 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류스이는 다시 그 품에 안겨있었다. 위로보다는 격려에 가까운 손길이 다독이는 것을 받아들이며 희망이 쏟아지는 소리를 귀에 새겼다.

 

류스이는 몸을 일으켜 사이를 마주했다. 습기로 인해 한층 더 복슬복슬해진 꼬리와 가지런히 접힌 다리 사이에 끼워지듯 감추어진 머리를 찾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굳게 닫힌 눈이 돌연히 열려 저를 바라보아주고, 다물어진 입 사이로 나온 혀가 마지막 인사 때처럼 핥아주는 상상을 하기도 했지만, 상상은 어디까지나 상상으로 그쳤다. 평온한 것 이상으로 묵묵한 모습은 애절한 심정을 가열했다.

가슴이 아픈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터였다. 갓 태어난 동생을 키우다시피 하며 보살폈을 당시 형은 지금의 저보다 어렸고, 그 또한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나이였음에도 한없이 어른 같았다는 걸 안 것이 첫 번째였다. 그는 제게 세상 가장 따스한 안식처가 되어주었으나 정작 형에게는 누구도 없었다는 걸 기억해 낸 것도 있었고, 이 같은 현실을 동생 앞에서는 단 한 번도 내색한 적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있었다.

게다가 그는 그 이후 권능이 각성해 경천동지를 일으킨 혈육을 감싸느라 많은 것을 잃기도 했다. 조용하고 정적인 삶과 나고 자란 땅, 아버지와 다른 형제들의 신뢰, 모친과의 추억…….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믿고 사랑하는데, 기대를 배반한 채 외로움에만 휘둘리고 있었다는 게 무엇보다 부끄러워 류스이는 고개를 숙였다.

‘내가 여전히 여기 있다는 걸 알면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류스이는 쓰다듬던 손길을 멈추었다. 문득 사이가 했던 말이 이해되었다. 시선을 나누며 대화를 나눌 수 없어도 혼자는 아니라는 말이. 그렇게 단언할 수 있게 되기까지 형제는 어느 정도 시간을 필요로 하여 얼마만큼 무거운 고독에 견뎌왔을지 류스이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단지 그의 버팀목으로서 실망을 안겨주고 싶지 않다는 바람뿐이었다.

 

예상이 맞아떨어져 비는 정확히 사흘간 내리고 나흘로 넘어가는 날 밤에 그쳤다. 류스이는 새벽 일찍 일어나 굴 밖으로 나가서는 동터오는 하늘을 바라다보았다. 비구름이 새기고 간 발자국처럼 곳곳에 남은 물웅덩이 속에 연푸른 색조가 섞이기 시작했을 때는 새삼스럽게도 감격에 휩쓸렸다. 기억해 낼 수는 없었지만, 난생처음 해가 뜨는 광경을 보았을 때도 지금과 같은 기분이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장엄한 풍경을 눈에 새긴다면 언제라도.

은신처로 돌아간 뒤에는 바로 떠날 준비를 했다. 만일을 대비해 재보를 조금 더 챙기고, 여의주를 뱉어 꼬리 속에 감추었다. 사이가 안다면 틀림없이 혼을 낼 터였으나 빠르게 꺼내 쓰려면 이게 최선이었다. 끝으로는 그에게 남길 편지를 썼다. 내용은 간결했다.

 

존경하는 형제에게

당신의 조언을 받아들여 길을 떠나려 합니다.

올해의 가장 밝은 달이 뜨기 전 돌아올 테니

혹여나 이르게 눈을 뜨더라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지금까지는 할 수 없었던 말들을 가지고

당신에게 들려줄 시간을 따라서

무탈하게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이 이곳에 있음에

당신이 제 형제임에

생을 얻은 날부터 언제나 감복합니다.

당신의 하나뿐인 아우로부터

 

산마루에서 굽어보는 세상은 머릿속에 그린 것 이상으로 가슴을 벅차 오게 했다. 어느 쪽으로 가볼지는 정하지 않았고 수없이 많은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알 수 없었으나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슬슬 가볼까….”

어린 용은 한 차례 기지개를 켠 뒤 능선을 따라 풀쩍풀쩍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무엇이 있을지 고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갔다.

 


  

규칙적으로 이어지던 발소리 하나가 사그라졌을 때 앞서가던 이들도 전부 멈추어 섰다. 대열 마지막 자리에서 걸어가던 화묘化猫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은 그대로 얼어붙어 가만히 서 있었다.

“왜 그래, 우쿄 선생?”

그가 녹아 움직인 것은 가장 앞에 걸어가던 오니가 말을 붙였을 때였다. 그는 변함없이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는, 일행을 보며 되물었다.

“천둥소리 안 들려?”

“천둥?”

그 물음에 일행도 사방을 살폈다. 전부 같은 얼굴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의아하면서도 당혹스러운 공기가 그들 사이에 맴돌았다.

“날이 이렇게 맑은데.”

“하지만 우쿄짱이 소리를 잘못 듣는 일은….”

“있을 수 없지….”

족제비와 여우가 한 마디씩 주고받는 것을 들으며 오니는 생각에 잠겼다. 그들 말이 옳았다. 다른 일이면 모를까, 이 연륜 있는 화묘가 소리를 착각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었다. 그가 천둥이라고 하면 천둥이고 비라고 하면 비였다. 설령 구름 한 점 없이 공활한 하늘이라 하더라도.

“가보자, 어디인지.”

이윽고 오니가 말했다. 상황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만큼 다소 결연한 기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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