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대신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라면 어떨까 (2)

라는 발상에서 시작한 단편 AU

날조와 동인 설정투성이인 오지장 위주 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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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인원 전부가 한 번에 모이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에 여섯이나 되는 사람이 앉을 자리를 꽉 채우고 앉아있는 상황은, 현재 이곳에 있는 누구에게나 생경한 장면이었다. 어색한 기류가 일으킨 공기가 사무실 내부를 꽉 채우고 있지 않았다면 사람이 많은 것도 가끔은 괜찮은 것 같다고 생각할 수 있었으리라. 딱 한 명, 이 상황에 아무런 감흥도 없어 보이는 존재가 주기적으로 우물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더라면 침묵까지 무겁게 내리깔렸을 터였다.

의자와 소파 자리가 부족한 탓에 책상 위에 앉아 있던 센쿠는 오후에 책상 정리를 하기 잘했다는 생각을 무르고 앞을 쭉 훑어보았다. 몇 번을 생각해도 누구 하나 먼저 입을 떼지 않는 이상 대화가 시작될 것 같지 않았고, 센쿠는 그것이 제 몫임을 빠르게 인정했다.

“류스이, 네 집사는 어디 갔어?”

시선이 간 곳은 본인이 데려온 손님과 같은 소파에 앉아 피자를 집어 먹던 금발 악마였다. 검은색 일색으로 만들어진 말쑥한 정장을 빼입은 그는 피자 한 조각을 접어 통째로 입에 넣고 혀로 입가를 쓱 핥은 뒤에 대답했다.

“SAI가 쓸 방을 정리하러 먼저 돌아갔어.”

“…….”

당사자인 SAI는 사무실에 막 들어섰을 때 보여주었던 기세가 거짓말인 것처럼 책 뒤로 얼굴을 반쯤 감추고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따금 구르는 눈동자만이 그가 이 상황을 무척 어려운 것으로 인지하고 있음을 보여주었고, 맞은편 자리에 있는 천사를 볼 때만 다른 기색을 띠는 것이 그 심정을 대충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조금 전 모습도 그렇고, 같이 지낼 정도면 두 사람 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은데 흡혈귀 친구라도 돼? 류스이짱하고 SAI짱.”

이윽고 질문한 것은 겐이었다. 낯선 인간에게 돌연히 이름을, 그것도 이렇게 친근하게 불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는지 SAI가 흠칫했다.

“말했잖아, SAI는 나와 같은 트루 뱀파이어라고. 지금 지옥에서 제대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흡혈귀 혈족은 우리 나나미 일족밖에 없어.”

그사이 류스이는 피자 한 조각을 더 집어 먹고 말했다.

“나와 SAI는 형제지간이다. 아버지만 같을 뿐이라 혈통으로는 반절뿐지만, 나머지 절반에서도 같은 의식을 공유하고 있기는 하지.”

“이쪽도 지옥에서 올라온 견공이시라는 건가.”

가장 먼저 이해한 것은 센쿠였다. 류스이와 만나기 전까지 헬하운드를 실제로 본 적은 없었으나 그들이 가진 특성에 관해서는 대강이나마 알고 있었다. 한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기 때문에 종이 달라도 비슷한 습성을 가지며, 개인주의가 기본인 악마치고는 특이하게 동족 의식이 강하다는 것. 같은 부모에게서 나지 않았더라도 헬하운드라면 가족으로 인정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고 했다.

이때 원체 찰나에 벌어진 일이라 당사자들 이외에는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 했지만, SAI는 굉장히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형제를 힐끔거렸고 류스이도 그에 응해 시선을 주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말이지.”

류스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하고는 버릇처럼 손가락을 튕겼다.

“중요한 건 여기 있는 나나미 SAI가 지옥에서, 어쩌면 이 차원에서 처음으로 우리가 쫓고 있는 이현상을 관측한 존재라는 거다. 100년하고도 몇십 년도 더 전에 말이지.”

조금 전과 같이 네 쌍이나 되는 눈이 한꺼번에, 그것도 단숨에 날아와 꽂히자 SAI는 이제 얼굴을 완전히 감추었다. 너무나도 미세해 바로 옆에 있는 형제와 귀가 유난히 밝은 천사 이외에는 들을 수 없었지만, 불안하게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분위기를 읽지도 못 할 만큼 감격한 크롬이 “대박이다!” 소리치려던 것을 우쿄가 빠르게 제지하지 않았다면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었다.

“네가 처음 온 날 듣기는 했지만, 한 번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렇지, 그때는 대충 짚고 넘어간 것도 있으니….”

센쿠의 말에 류스이가 답했다. 그는 턱을 매만지며 잠시간 고민하던 기색을 내비치더니 옆에 앉아있는 친족을 돌아보았다. 어떠한 계기가 없었더라면 친족인 저 역시 오랫동안 얼굴을 볼 수 없었을, 지나칠 정도로 낯가림이 심한 사람. 이윽고 류스이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책을 빼앗자 SAI는 마땅히 놀란 표정으로 손을 내뻗다 말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유는 당연히 맞은편에서 쏟아지는 눈길들 탓으로, 둘뿐이었다면 거칠게 굴었을 상황에 SAI는 대신 애원하는 표정을 지으며 동생을 올려다보았다.

“침소에서는 그런 표정 안 지어주더니.”

내용에 비해 지나치게 진중한 목소리에 말을 꺼낸 당사자 외에는 모두가 경악했다. 심지어 겐은, 입에 대고 있던 콜라를 거의 다 마신 상태가 아니었다면 십중팔구 도로 내뱉었을 것이었다.

“너희 형제라고 하지 않았어?”

물은 것은 크롬으로 역시 진담인지 농담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그가 피를 취하는 악마인 동시에 정기를 취하는 악마라는 것을 알아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처럼.

“처음에 말하지 않았나? SAI는 내 연인이라고. 게다가 헬하운드는 그러한 사소한 사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 인간계에 실존하는 갯과도 그렇지, 아닌가?”

류스이는 변함없이 담담히 말했다.

“안 쓰는 게 아니라 네가 이상한 거겠지!”

그러한 태도는 끝내 형에게 큰소리를 내게 했다.

“제발 네가 이상하다는 걸 자각해! 또 연인이니 뭐니, 오해받을 만한 표현도 그만 써….”

스스로 감정을 못 견뎠는지 SAI는 끝내 얼굴을 감싸 쥐었다. 누구도 알지 못 할 테지만, 그 행동에는 어처구니없고 수줍은 감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류스이가 말하는 연인이 무슨 뜻인지 안다면 누구라도…….

“기세 좋군.”

어떻든 동생은 책을 빼앗은 보람이 있어 기쁘다는 낌새를 보였다.

“잘 들어, SAI. 너한테도 중요한 일이니. 너희도 마찬가지고. 지난번에는 말하지 않은 부분부터 시작할 테니 집중해.”

이 말을 끝으로 류스이는 슬슬 웃음기를 거두었다. 같은 공간 안에 있는 시선 전부 제게 닿는 것을 느꼈을 때 그는 비로소 본론에 들어갔다.

“100년하고 조금 더 전쯤, 나와 여기 있는 SAI는 지옥에 있는 옛 칠죄종 영토에서 회색지대로 이어지는 통로를 발견했다. 추정하건대 상당히 오래전부터 열려있던 것 같지만, 과거 내전 이후로는 출입이 금지된 데다 애초부터 보통 악마는 드나들 수 없는 땅이라 발견한 자가 없는 것 같았어.”

“우리는 고민했다. 집으로 돌아가 이 사실을 가주와 원로들에게 알릴지, 아니면 우리끼리 우선 들어가 볼지. 상의 끝에 우리는 후자를 택해 회색지대로 들어갔고, 거기에서─”

여기까지 말했을 때 두 사람이 손을 들었다. 크롬, 우쿄. 눈치를 살피다 먼저 손을 내린 사람은 우쿄였다. 발언권은 자연스럽게 크롬에게 돌아갔다. 천사가 할 질문이라면 훨씬 중대한 일일 거라는 의식 탓인지, 크롬은 다소 멋쩍으면서도 미안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시작하자마자 질문해서 미안한데, 출입이 금지되었다는 땅에는 왜 들어갔어?”

류스이는 아주 짧게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건, 평소처럼 놀다가 우연히 들어가게 됐어. 인간들이 술래잡기라고 부르는 놀이를 하던 중이었지. 어릴 때부터 즐겨 했거든. 그렇지, SAI?”

SAI는 대답하지 않았다. 네가 일방적으로 쫓아온 거고 그때 나는 진심으로 공포를 느꼈다고 말하려거든 말할 수 있었지만, 100년 전에도 귀담아듣지 않았던 걸 반복할 까닭은 없었다.

“출입이 금지된 이유도 별거 없어. 현재 지옥을 다스리는 고위 악마들은 과거의 지배자이자 패배자인 존재들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 해. 예전부터 들어가기에 어려웠던 이유는 급이 낮은 악마라면 즉시 타죽을 정도로 땅에 마력이 넘치기 때문인데, 우리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지.”

설명을 덧붙이고 류스이는 이제 우쿄를 돌아보았다.

“네가 하려는 질문이 무엇인지 알아.”

눈빛처럼 목소리에도 뼈가 있었다.

“악마인 우리가 어떻게 회색지대에 들어갔나 하는 거겠지. 아닌가?”

“……맞아. 어떤 천사도 악마도 중립지역에는 들어갈 수 없어.”

우쿄는 빠르게 긍정하고는 말을 이었다.

“특별한 수가 있었던 거지? 진리에 가까운 규율을 깰 수 있는 어떤 방법이─”

“그건 말해줄 수 없어.”

뜻밖에도 대답한 것은 SAI였다.

“그건 가르쳐줄 수 없어, 천사.”

반복하는 표정에는 쑥스러워하는 낌새 따위 조금도 없었다. 밤색 눈동자는 결연한 어조만큼 단호했고, 주적인 이종족에 대한 경계심도 사그라들 줄 몰랐다.

“그렇지만 안심해도 돼. 우리가 모르는 누군가가 더 있는 게 아니라면 그 땅에 드나들 수 있는 악마는 나와 내 동생뿐이니까.”

여기까지 말하고 SAI는 류스이를 바라보았다. 류스이는 곧장 말을 받았다.

“규율은 아직도 유효하고 네가 아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누구든 직접 가서 본다면, 그곳이 이 차원에서 가장 번영했던 땅이었다고는 생각하지 못 할 거다.”

설명에도 불구하고 우쿄는 석연치 않은 낌새였으나 구체적인 답을 들을 수 없다는 걸 일찍 받아들였기 때문인지 더 묻지 않았다.

“그 회색지대인지 중립지역인지 하는 곳 말인데, 정확히 어떤 곳인지 설명해 줄 수 있어?”

대신 센쿠가 질문을 이었다.

“대충은 알아. 천국과 지옥 경계에 있고, 천사도 악마도 아닌 생물이 여럿 살았고, 너희들이 벌인 전쟁으로 망했다는 것 정도는.”

“지난번에도 류스이짱하고 우쿄짱, 적당하게 말해주고 넘어갔으니까. 지식이 없는 우리로서는 제대로 이해하기에 완전 리무라고.”

겐까지 거들자 이름이 언급된 두 사람은 그랬나, 그랬던가 싶은 눈치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대충 안다고 한 것치고는 정확해. 명확한 이름은 없지만, 천국에는 중립지역, 지옥에서는 회색지대, 보통 그렇게 불러.”

답변한 것은 우쿄였다.

“오래전에는 천국에서든 지옥에서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해. 하지만 천사와 악마가 만나면 필연적으로 싸움이 벌어졌고, 그 땅에 숨겨진 재보에 두 종족 다 눈독을 들이면서 원주민들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어. 결국 신성력도 마력도 아닌 고유한 힘─천사와 악마는 해독할 수 없는─으로 바깥과 이어지는 모든 길을 닫고 외부에서는 침범할 수 없는 저주를 걸었다고 해. 그런데….”

“시간이 한참 흘러 천국과 지옥 사이, 영원한 전쟁이라고 부르게 되었을 만큼 긴 전쟁이 벌어졌고….”

“…….”

우쿄는 말을 잇지 않았다. 하지 못 했다고 하는 편이 옳을 터였다. 투쟁에 직접적으로 뛰어든 세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어두워진 얼굴을 한 차례 쓸어내렸다.

“그 땅 자체도, 그곳에 살던 생물들도 전부 피해를 당했어.”

결국 설명을 잇는 것은 류스이 몫이 되었다.

“아무리 신묘하고 강력한 힘이 넘친다고 해도, 방대한 마력과 신성력이 오랜 기간에 걸쳐 끝없이 짓눌러 오는 걸 견딜 재간은 없었어. 파멸은 시간문제였고, 끝내는 아무것도 안 남게 되었지.”

선한 존재가 제 몫이 아닌 죄책감까지 느끼며 괴로워하던 것과 대조적으로, 완전한 남 일인 듯 가벼운 어투로 말을 잇던 무신경한 태도는 “중간에 끼어있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지, 안 그래? 나는 겪어본 적 없어서 모르지만.”이라고 덧붙이며 웃는 언행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 말은, 거기 살던 존재들은 다 죽었다는 거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크롬이 물었다.

“대부분 그렇게 되었지. 천국이나 지옥으로 넘어가길 시도한 놈들도 적잖이 있었다고 하는데, 뜻대로 되지는 않았을 거다. 알려졌다시피 천국은 끔찍할 정도로 배타적에 융통성이 없고….”

류스이는 우쿄를 슬그머니 바라보았다. 우쿄는 다소 불쾌한 낯빛이었으나 반박하지는 않았다.

“지옥은 나고 자란 악마들에게도 살아남기에 가혹한 환경인 만큼, 성질이 다른 생물이 적응하는 건 불가능과 다름없어. 마력에 질식해 죽거나 악마들에게 잡아먹히거나, 그런 결말뿐이었겠지. 불행하게도.”

어조는 여전히 가벼웠으나 금발 아래 가려진 밤색 눈동자는 더 웃지 않았다.

“잡설이 길어졌군.”

류스이는 꼬고 있던 다리를 풀어 자세를 고치는 것과 함께 본론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회색지대로 들어간 나와 SAI는, 호수나 바다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메마른 땅에서 기이한 것을 발견했다.”

“기이한 것?”

크롬이 물었다. 류스이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바닥과 건너편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큰 공동이 있었어. 우리는 그것이 그 땅이 멸망하고 난 뒤에 생긴 구멍임을 확신했지.”

“어떻게 알았는데?”

“아래로 내려가 봤지.”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하는 목소리는 건조했다. 무모하기에 그지없는 판단을 했다는 사실에 다들 뜻밖이라는 듯 놀라는 낌새를 보이는 와중에 딱 한 사람, 옆에 앉은 형제만이 다른 감정을 내비쳤다.

“아래로 내려가게 됐지….”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지나간 기억에서 비롯된 지친 기운이 가득했다.

“공동은 밖에서 느낀 대로 무척 깊었지만, 다시 못 올라갈 정도는 아니었어. 사방이 깜깜한 것도 우리에게는 장애조차 되지 않았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없던 것은 아니었어.”

문제라는 말에 SAI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시 일을 되짚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언가 있었어.”

그 모습 그대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무엇인가 있었지.”

류스이가 반복했다.

“어둠과 동화한 것처럼 새카맣고, 기척도 없고, 냄새도 나지 않는 무언가가 수없이….”

동생은 말끝을 흐리며 넌지시 형을 돌아보았다. SAI는 소리내어 대꾸하지 않았지만, 눈을 마주하는 것으로 같은 기억을 되짚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정도로 감각이 위험하다고 외쳤던 순간은 인생에서도 손꼽았다. 단순히 위험한 것을 넘어 절체절명 자체였던 존재와 대치했던 경험이 없었다면 틀림없이 공포감에 빠졌을 거라고, 동생에게서 눈을 떼며 SAI는 생각했다.

“낮에 나타난 것과 비슷한 건가?”

이윽고 크롬이 물었다.

“낮?”

되물은 것은 류스이였다. 크롬이 오기에 앞서 자리를 뜬 탓에 그가 겪은 일을 듣지 못 한 유일한 상주 인원.

“응, 낮에…. 서쪽 거리에 있는 서점에서 소동이 있었는데, 그걸 SAI가……. 해결했거든.”

성미대로라면 한 마디 한 마디 전부 시원스럽게 내지르고, 그 속에 들끓는 존경심까지 담아 보내고 싶었으나 크롬은 가까스로 심정을 억눌렀다. SAI가 어떤 성격인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았고 그를 난처하게 하느니 말을 더듬고 마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가 알아차려 주었으면 좋겠어.

“그걸 어떻게 알아?”

“어?”

그렇게 바랐기 때문에, 예상하지 못 한 답이 돌아오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기이하게 느낀 것은 크롬뿐만이 아니라, 사정을 모르는 류스이를 제외한 모두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현장에 같이 있었다던데.”

입을 연 것은 센쿠였다.

“무려 7번씩이나 똑같은 소리를 했다고. SAI 네가 사건을 어떻게 해결했는지에 대해─”

“센쿠!”

크롬이 곤혹스러우면서도 쑥스러운 기색으로 외치자 센쿠는 어깨를 으쓱였다.

“으음….”

설명에도 불구하고 SAI는 부러 모르는 체하는 게 아닌 진정으로 기억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크롬은 내면에 찬 당혹감이 슬픔인지 실망인지 모를 것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군중 사이에 끼어 지켜보기만 했으면 모를까, 내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 보기까지 했는데 어째서.

“이해해라, 크롬.”

감정이 만면에 퍼지기 직전에, 상황을 파악한 류스이가 소리를 냈다.

“대개 악마는 이종족을 개별적으로 구분하지 못해. 거래를 통해 영혼 일부를 소유하거나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말이지. 우리 같은 경우에는 체액을 취하는 것으로도 가능하고. 뭐, 나는 몇백 년 동안 같이 산 가족도 구분 못하지만, 핫하!”

“자랑인 것처럼 말하지 마.”

위로답지 않은 위로에 SAI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반응했다. 그러고는 면목이 없다는 표정으로 마주 앉은 이들을 쭉 훑으며 덧대었다.

“고의는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줘…. 지금 내 눈에는 천사, 한 명만 제외하고는 전부 똑같이 보여.”

만일 이 자리에 동급인 천사가 여러 명 있었다면 그 역시 구분하지 못 했을 터였다.

“완벽하게는 아니어도 구별을 도와줄 수 있는 도구가 있기는 해. 근본적인 목적대로 시력을 보호하기 위해 쓰는 거지, 이종족을 개별적으로 구분하기 위해 사용하는 건 아니지만….”

말을 제대로 끝맺는 대신 SAI는 옆에 앉은 형제를 노려보았다. 하루에 두 번이나 안경을 잃어버리게 될 거라고─특히 한 번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방식으로─생각이나 했을까?

“그래서 오늘 봤다는 건 뭐였는데?”

류스이는 태연하게 화제를 돌렸다. SAI는 동생을 한 번 째려보고서는 입을 열었다.

“■■■■이었는데….”

그러다 맞은편에서 건네지는 시선들에 “아.” 하고 짧은소리를 냈다. 이렇게 말하면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형제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탓이었다.

“지옥에 사는 생물로 평소에는 평범한 식물로 둔갑해 있어. 다른 생물에게 남긴 흔적으로 주변 소리를 흡수하며 자라는데, 특히 갑작스러우면서도 큰소리에 예민해. 충분한 먹잇감을 포착했을 때는 동료를 부르는 습성이 있고, 성체에 가깝게 자란 건 보통 악마는 감당하기 힘들 만큼 위험한 데다 인간이 받아들이기에는 난해하게 생기기도 해서─”

“…….”

SAI는 문득 말을 멈추었다. 이유는 당연히 낮에 있었던 일, 그중에서도 인간 남자를 물었던 일 때문이었다.

마력을 효율적으로 모으기 위해서는 다른 존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악마로서, 타인을 매혹하는 능력을 지닌 것은 생존에 유리한 명백한 장점이었으나 SAI는 결코 그렇게 느낄 수 없었다. 똑같이 몽마의 피가 섞인 다른 직계 혈통들과는 달리 정신 지배 능력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데다, 피를 빨려 ‘자신’을 잃은 대상에 대한 통제력도 강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자유의지를 빼앗기는 것만큼 불합리한 일이 없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혈통이라는 것 덕에 피가 아닌 다른 걸 취하는 것으로도 마력을 충당할 수 있다는 점은 다행이었으나 여기에 수반되는 행위는 필연적인 수치심을 낳았고, 피를 먹든 다른 것을 먹든 신체 접촉은 불가결하다는 사실이 그를 몹시도 괴롭게 했다. 더구나 나머지 절반의 정체성은 오로지 한 상대만을 사랑하고 헌신하도록 짜여 있었기 때문에, 늑대인 헬하운드로서도 SAI는 자신을 혐오할 수밖에 없었다. 애정이 없는 상대에게 진심이 아닐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것이 어느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인지 누구도 이해하지 못 할 터였다.

“조금은 이해가 가. 서점 안이 갑자기 어두워진 것도 그 생물 때문이었나?”

부정에 매몰될 뻔한 상황에서 구해준 것은 크롬이었다. SAI는 여전히 완전하게 분간할 수 없었지만, 그 인간 하나만은 조금 보일 것 같다고 느꼈다.

“그건 관리국에서 걸어놓은 보호조치 때문이었어. 규정된 공간 안에 이현상이 발생했을 경우 그것이 퍼지는 걸 방지하는 마술이라고 생각하면 돼. 본 적 없어?”

“응, 한 번도. 여기에도 걸려있어? 그 보호조치라는 거.”

“아니…. 이 일대에는 전혀.”

SAI는 재차 확인할 겸 사무실을 훑어보면서 덧붙였다.

“당연히 그렇겠지.”

센쿠가 답했다.

“안 그래도 가난한 동네에서 집세가 싼 방이니. 그 덕분에 관리국에 간섭을 덜 받는 건 좋지만. 게다가 천국의 어느 높으신 분이 직접 선발해 내려보냈다는 천사하고, 지옥에서 제일가는 명문가 출신이라는 최고위종 악마가 상주하는데 이러나저러나 상관없지 않겠어?”

“그건….”

SAI는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는 낌새를 내비쳤지만, 결국 말을 잇지는 않았다.

“이제 알겠군.”

스스로 망설인 것도 있지만, 동생이 끼어든 탓이 컸다.

“네 피에서 나던 낯선 맛이 무엇인지를. 역시 맛본 적 없던 것이었어….”

류스이는 긴 혀를 내밀어 입술을 훔치고는 형제를 내려다보았다. 언뜻 보기에는 가볍게 미소 짓고 있는 것만 같았지만, 휘어진 눈매 아래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감정이 분명 맴돌고 있었다. SAI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고 동생의 속내도 무의식적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

나를 두고 혼자 포식했겠다, 역시 가만둘 수 없어…….

“류스이……. 물기만 해봐.”

타작할 도구를 빼앗겼어도 상관없다는 듯 SAI는 동생이 찬 멜빵을 단숨에 당겼다가 놓았다. 탄성 있는 스트랩이 어깨를 때리자 류스이는 “웃.” 하는 신음을 내뱉으면서도 아쉬움을 못 버리고 입맛을 다셨다.

“장난 그만하고 하던 말이나 계속해.”

불평하며 본론으로 이끈 것은 센쿠였다.

“앞으로 훨씬 시끄러워질 것 같은 예감이 드네….”

지친 기색으로 중얼거린 것은 겐이었다. 류스이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화를 지연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옷매무새를 가지런히 한 뒤 설명을 이어갔다.

“어쨌든 크롬, 오늘 네가 본 건 아니었어. 그것과는 상관없는 아예 다른 생물이었다. 정확하게는 생물이라 부르기도 어렵겠지만….”

“어째서?”

결이 다르기는 하나 똑같이 영혼을 보는 존재로서 우쿄가 흥미롭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형태를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생명으로서 지녀 마땅한 것들이 없었거든.”

“그걸 어떻게 판단했는데?”

“닥치는 대로 잡아먹었지.”

답을 들었을 때는 일순간 표정이 굳었지만 말이다.

“나는 아니고 여기 있는 SAI가 했지만. 그때 나는 개인적인 어떤 이유로 지금 취하고 있는 이 형태에서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었거든.”

류스이는 의식 없이 입 주위를 쓸어 만졌다.

“떼로 몰려드는 걸 빠르고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단은 그것뿐이었고, 어차피 놈들의 정체를 판단하려면 그 수밖에는 없었어. 이것도 우리가 어둠에 적응하는 체질이라 가능한 일이었지. 만일 눈앞이 가려진 상태였다면 놈들이 끝없이 튀어나온다는 것도 모른 채 지쳐 쓰러져, 정체도 모르는 놈들에게 가리가리 찢겼을 거다.”

살벌한 내용에 어울리지 않게 류스이는 웃으며 말했다.

“구덩이 밖으로 기어 올라온 뒤, 그토록 많이 먹었음에도 SAI는 힘으로 환원된 게 아무것도 없다고 했어. 내 입으로 말하기에는 조금 그렇지만, 잡다한 피가 섞인 나와 내 형제는 영혼은 물론 피와 살과 뼈, 그 밖에도 살아있는 생물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마력으로 바꿀 수 있는데, 기이하게도 돌아온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였지.”

형제가 돌아보자 확인에 대한 확인으로 SAI는 눈을 깜빡였다.

“그 뒤로도 우리는 몇 번이고 더 공동을 찾았어. 두 번째에는 깨닫지 못 했지만 세 번째에는 의심하기 시작했고, 네 번째에는 확신했지. 구덩이가 일정한 간격으로 점차 넓어지고 그에 비례해 아래에 사는 생물의 수 또한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걸.”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확신했고, 본격적으로 조사할 필요를 느꼈어. 하지만 나는 조금 전에 말한 이유 때문에 지옥을…. 기거하는 영지에서 오래 벗어나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조사는 SAI 혼자 하게 되었지.”

류스이는 형을 힐끔 보았다. 묘하게도 SAI는 동생이 보내는 시선을 외면했는데, 만면에는 내키지 않는 기색이 엿보였다. 굳이 표현하자면 죄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왜 그가 그런 얼굴이 되었는지에 대한 까닭은 바로 다음 마디에서 드러났다.

“그렇게 SAI는 혼자 회색지대로 떠났고, 그대로 연락이 두절됐다. 떠난 날로부터 100년이 넘도록, 오늘이 오기 전까지.”

형제가 담담하게 말하면 말할수록 SAI의 낯빛은 어두워졌다.

“처음에는 큰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어.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했거나 더는 견딜 수 없어져 죽었다고. 나 없이 SAI 혼자서는 그 땅에 오래 있을 수 없거든.”

“네가 하려는 질문이 무엇인지 알아.” 류스이는 조금 전 우쿄에게 건넸던 말을 되뇌었다. “악마인 우리가 어떻게 회색지대에 들어갔나 하는 거겠지. 아닌가?” 답은 여전히 가르쳐줄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형제를 찾으러 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어.”

류스이는 더 이상 SAI를 돌아보지 않았다. 구태여 눈에 담지 않아도 그 상태를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왜 할 수 없었는데? 지금까지 계속 말했던 사정 때문에?”

크롬이 의아스러워하며 물었다. 류스이는 잠시간 스스로 턱을 쓸어 만지며, 생각하는 낌새를 내비치다 되물었다.

“그것도 있고, 그 무렵에 지옥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

“……여기와 뒤섞이기 시작한 건가.”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은 단연 센쿠였다. 류스이는 긍정하는 의미에서 옅게 미소 지은 뒤, 우쿄를 넌지시 보고서는 설명을 이었다.

“이건 천사들도 잘 모르는 일일 거다. 지옥의 유력 가문들이 빈곤과 투쟁뿐인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차원 밖으로 달아나는 악마들을 무참히 잡아들였던 것 말이지. 지옥이라고는 해도 엄연한 법이 존재하고, 지배층은 피지배층이 통제에서 벗어나는 걸 좋아하지 않아. 더구나 다른 세계와 혼재된 땅이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만에 하나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지. 동족상잔 정도는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게 지옥의 존재라지만, 그때만큼 악마가 악마를 많이 죽인 건 칠죄종 시대에 벌어졌던 내전 때 밖에는 없을 거다.”

“결과적으로 잘되지는 않았지만.” 밤색 눈동자는 습관처럼 턱 언저리를 매만지며 덧붙였다. 이렇게 말하는 근거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관리국에서 엄격한 조사를 받은 뒤에나 경계를 넘어올 수 있었기 때문에 흔하다고 할 정도는 안 되었지만, 지금도 거리로 나가면 악마와 만날 수 있었다. 즉 현재는 악마가 인간계에 존재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당시 흡혈귀 일족을 포함한 고위 악마들이 사태를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면 마도시는 지금 같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얼마 지나지 않아 SAI가 죽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거다.”

그렇게 말한 뒤 류스이는 정장 재킷 안주머니를 뒤적여 무언가 꺼내어 보였다.

“처음 왔을 때 보여준 적 있었지.”

그것은 손바닥 반절보다 작은 크기에 세로로 긴 직사각형 형태를 한 장치로, 원형으로 파인 홈 두 개에 시계 내지는 나침반처럼 침이 들어있었다. 침은 고장이라도 난 듯이 멈추어 장치가 흔들릴 때마다 한 번씩 달그락 소리를 내는 게 다였고, 전반적으로 조잡한 만듦새는 수작업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제작한 것임을 단박에 깨닫게 했다. 문제는 소재였는데, 다행스럽게도 자리에 있던 대다수는 파악하지 못 한 눈치였다. 알았다면 틀림없이 기겁했을 테니.

“무슨 계측장치라고 했지, 그거.”

어떤 방식으로 읽는 건지 겉만 봐서는 전혀 모르겠지만. 센쿠는 남은 말을 덧대는 대신 테이블 위에 놓인 물건에 시선을 주었다.

“맞아.”

류스이는 딱, 손가락을 튕기고서 말을 이었다.

“어느 날 내 앞으로 배송되었어. 먹는 게 아니니 입에 넣지 마라, 그런 편지 하고 같이. 지금은 내 체취에 가려져서 느끼기 어렵지만, 받았을 당시에는 이 세상에서 내가 유일하게 분명히 구별해낼 수 있는 냄새가 잔뜩 묻어났고, 나는 이걸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어.”

어느새 류스이는 옆자리에 있는 형제를 빤히 바라다보고 있었다.

“입에 넣지 말라고 한 데는 이유가 있었던 거지…….”

벌어진 입술 틈으로 송곳니가 번뜩이고도 시선이 떨어지지 않자 SAI는 거북한 표정을 지었다. 잇새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고, 동생이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불안해졌다.

“류스이….”

“…….”

그 직후 별안간 류스이가 “읏….” 하는 신음과 함께 인상을 구겼다. 형제에게 발이 밟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게 판명된 것은 조금 뒤였다.

“장난 그만하라고 책상에 앉아있는 인간─”

“센쿠.”

“그래, 인간이 말했잖아.”

맥락을 모르면 만담처럼 느껴질 것 같은 대화에 크롬이 낙담한 기색을 보였을 때, 겐은 “SAI짱은 우리 이름을 기억할 생각이 없나 봐.” 농담을 덧댄 것을 금방 후회했다.

“핫, 하, 그래도 굽이 없어서 아프지는 않군. 스니커즈도 제법 잘 어울리는구나, SAI….”

말에 담긴 내용과 전혀 다른 괴로운 얼굴로 류스이는 중얼거렸다.

“그걸 네게 보낸 사람이 SAI라는 건 알겠어.”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우쿄가 말했다.

“그래서 정확히 어떤 기능을 하는데?”

본론으로 이끄는 질문에 류스이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앞서 밝힌 대로 계측기다. 회색지대 내 공동이 넓어지는 속도와 규모를 계산해서 보여주는 거지. 굳이 직접 가보지 않아도 확인할 수 있도록. 인간계에는 공기 중 마력이 충분하지 않아서 작동을 멈춘 상태인데…. 지금은 지옥에 가져가도 정상적으로 움직이진 않을 거다.”

류스이는 장치를 재차 흔들어 보이고는 말했다.

“나는 지옥을 자유롭게 벗어날 수 없고, SAI는 혼자 회색지대에 오래 머무를 수 없지만, 그곳을 주시할 필요는 있었어. 이건 이러한 사정이 만들어낸 물건인 셈이지. 문제는 SAI가 살아있고 지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건가 하는 거였는데….”

이때 SAI는 또 한 번 류스이를 외면했다. 그 입에서 나올 말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음에도 자극당할 감정을 견디기 어려워서.

“막 받았을 때 여기에는 SAI의 체취 외에도 맡아본 적 없는 냄새가 더 묻어있었어. 다행스럽게도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냄새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게 되었지. 유력 가문들이 제압을 포기하면서 악마들은 내키는 대로 차원을 넘나들기 시작했는데, 그 무렵 사귄 애인 중 하나가 그것과 같은 냄새를 가지고 있었거든.”

“그 말은, SAI짱은 그 전에 이미….”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겐이었다.

“인간계로 넘어와 있었다는 거지.”

류스이는 천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이어 예견된 일처럼 시선이 여럿 날아와 꽂혔음에도 SAI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기는 했으나 그 얼굴에 엿보이는 감정은 마땅한 부끄러움이 아닌, 기묘한 죄책감이었다.

“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누군가 물었을 때는 어깨를 살짝 들썩거렸다.

“관계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해.”

류스이는 그 모습을 못 본 체하고 목소리를 잇댔다.

“지옥과 인간계가 연결된 일, 회색지대에 생긴 정체불명의 공동과 그 아래 사는 생물. 이것들이 한데 연관 있다고 판단했던 걸 거다. 당시에는 관리국도 없었으니, 인간계로 넘어가기도 쉬웠겠지. 아니면 오히려 관리국이 만들어지는 데 기여했을지도 모르고.”

마지막 마디를 이해하지 못 해 의문스러워하는 낌새들이 생겨나자 류스이는 훗 하는 웃음소리를 덧붙이고는 설명을 이었다.

“조금 전에 말했던 보호조치 마술 초안은 나 때문에 구상된 거거든.”

청중 중 가장 먼저 이해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가장 크게 감탄한 사람은 분명히 보였다. 그리고 그가 기어코 참지 못 하고 “역시 쩐다!” 소리를 내질렀을 때, SAI 역시 참지 못 하고 쑥스러운 낯빛이 되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동생이 일부러 반응을 유도했다는 걸 알아차릴 정신은 없었다.

요컨대 SAI는 인간들이 곤경에 처한 걸 내버려둘 수 없었다기보다는─성정이 유하다고 해서 사고방식까지 인간과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악마들이 마구잡이로 날뛰는 상황을 방치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고위 마족으로서 책임감 때문이든, 멸망한 세계를 직접 목격한 유이한 젊은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든. 언제나처럼 별거 아닌 듯 문제를 해결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을 터였다. 나는 그저 지나가던 무언가일 뿐이라고.

“전부터 궁금했는데 류스이, 너도 관리국에서 조사를 받았어?”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센쿠가 물었다.

“뭐……. 일단은.”

예상치 못 한 질문이기라도 했는지, 류스이는 답지 않게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나도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관리국은 천사가 도시에 상주 중이라는 걸 알고 있나?”

그러고는 반대편에 앉아있는 다른 이세계인에게 질문을 넘겼다. 이 행동이 관심을 돌리기 위한 수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SAI뿐이었다.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중립지역이 무너진 뒤 천국은 다른 세계에 개입하길 피하게 되었으니까. 종말이라도 닥치지 않는 한 아마도…….”

우쿄는 말을 흐리는 동시에 한 달 전, 류스이와 처음 맞닥뜨렸던 날을 떠올렸다. 축복받은 천사라도 쉽게 상대할 수 없을 최상위종 악마가 태연하게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에 한 번, 그가 인간에게 협력하고 싶다고 밝힌 것에 두 번, 또 저가 천사임을 진즉에 깨닫고 있었음에도 적대심을 드러내기는커녕 흥미롭다는 듯 웃기만 했던 것에 세 번이나 놀랐던 상황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특이한 첫인상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뒤로도 우쿄는 류스이에게서 가끔 기이한 낌새를 느끼곤 했는데, 오늘 혈연이라는 악마가 나타난 덕에 그 역시 여느 악마와 같다고 확신할 수 있게 된 게 좋은 일인지 몰랐다.

류스이는 이해했다는 기색을 내비치고는 본론을 이어갔다.

“그때도 나는 한시라도 빨리 SAI를 찾으러 가고 싶었지만, 여전히 지옥을 나가기는 어려웠어. 하위 악마를 탄압하던 고위 악마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인간계를 드나드는 건 어불성설이었고, 집안싸움이 벌어지면서 다른 일에 눈 돌릴 여유가 없어졌거든.”

“집안싸움?”

겐이 묻자 류스이는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특정 인물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구조 안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지. 아버지의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차기 가주 자리를 놓고 다투었는데, 집안사람들도 두 패로 나뉘어 사태가 커졌어.”

당시 일을 되새기기라도 하는지 류스이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슬며시 올라가기 시작한 입매와 가늘어진 눈은 곧 그 얼굴에서 익숙한 표정을 자아냈고, 이어지는 목소리도 동일한 기색이었다.

“너도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SAI. 꽤 재미있었거든.”

혈연끼리 죽이려 싸우는 비극조차 즐거워하는 게 악마고 그 존재를 끔찍하다고 여기기에는, 옆에 있는 다른 악마는 집안싸움이라는 단어가 언급된 순간부터 울적한 낯빛이 되었고 형제가 말을 붙였을 때는 더더욱 심화했다. 류스이는 형의 심정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기름을 붓듯 쿡쿡거리는 웃음을 덧댔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개입해서 싸움이 잦아들었을 때쯤에는 지옥에서 나갈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러고 나자 또 다른 사건이 생겼어. 첫 번째는 지옥 저변에 사는 악마들이 알게 모르게 사라지고 있다는 거였는데, 평소 같았다면 신경도 쓰지 않을 문제였겠지만 두 번째 문제와 엮이며 좌시하기 어려워졌지. 그 두 번째 문제란, 계측기가 처음으로 이상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여기까지 말한 뒤 류스이는 테이블에 올려둔 계측기를 반지 낀 손으로 툭툭 두들겼다. 지금은 비록 고물이 되어 멈추어버렸지만, 가느다란 뼛조각으로 만들어진 바늘이 별안간 요란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광경은 쉽게 잊을 수 없을 터였다.

“나는 곧장 회색지대로 가서 공동을 확인했어. 구덩이 크기는 예상한 범위 내였지만, 문제는 그 아래 사는 생물이었다. 아무 맛도 나지 않았던 그것들에게서 익숙한 맛이 느껴졌을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

류스이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테이블 위에 놓인 장치를 바라보았다.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이상 반응이 나타나며 과부하라도 걸린 건지 계측기는 망가져 버렸고….”

“…….”

그는 돌연 말을 멈추었다. 그 모습을 의아스럽게 여긴 청중들이 시선을 보내도 응해주기는커녕 혼자만의 상념에 더 깊이 파고들었다. 류스이가 설명을 재개하기 시작한 것은 주체할 수 없이 고이기 시작한 침을 꿀꺽 삼켜 넘기고, 그러고도 끊임없이 고이기 시작하는 것을 어떻게든 참아낸 뒤였다.

“공동 바닥에 살던 것들은 또다시 맛이 바뀌어, 복합적인 맛이 나기 시작했어….”

정확히는 참고자 애쓰는 척을 했다. 먹는 것에 대해, 맛에 대해 상기하는데 이 내가 참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식욕이라 이름 붙은 본능이 언뜻언뜻 반짝대며 비치는 눈동자는 가까운 곳부터 훑어나가며 소리를 잇댔다.

“하나는 앞서 말했던 가장 잘 아는 맛이었고….”

처음으로는 옆에 앉은 형제를 보았고,

“다른 하나는 냄새로만 알고 있다가, 이곳에 오고서 확실히 알게 된 맛이며….”

다음으로는 책상과 맞은편 소파에 앉아있는 인간들을 보았으며,

“나머지 하나는 냄새도 맛도 완전히 낯선 것이었는데, 지금 판단하자면 그건 틀림없이…….”

마지막으로는 가장 바깥쪽에 앉아있는 천사를 바라보았다.

담담하게 이어진 목소리와 매끄럽게 흘러간 시선이 무엇을 설명하고자 한 것인지 파악하지 못 한 이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 같이 경악뿐인 얼굴로 다른 반응은 보이지 못 한 것이리라.

현실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사람은 화자와 같은 악마였다. SAI는 도리어 예상한 바라는 것처럼 이해했다는 기색을 띠는 것은 물론, 바로 다음 상황을 헤아리기 시작했는지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반면 가장 곤혹스러워하며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이 된 것은 이 자리에 유일한 천사였다. 이 세계에서 가장 깨끗하고 순결한 종족. 우쿄는 무슨 말이라도 내던져 반박하고 싶어 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끝내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짚이는 구석이 있음을 이미 한 번 토로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텅 빈 존재 속에 무엇이 깃든 건지 정확히 알 수 없었더라도, 결이 다른 영혼들이 섞였다는 것만으로 예삿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자세히 조사할 필요성을 느꼈어.”

충격 섞인 공기가 어느 정도 가셨을 때 류스이는 덧붙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학자나 연구가가 아니라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형제를, SAI짱을 찾으러 온 거구나.”

“네 말대로다, 겐.”

류스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토록 오래 걸릴 줄은 몰랐지만. 마도시도 꽤 오래된 걸 감안하지 못 했어. 지옥과 인간계 냄새가 이 정도로 뒤섞여 체취를 더듬는 게 어려울 줄 알았다면 다른 방도를 생각해 왔을 텐데……. 게다가 이토록 능숙하게 인간인 척을 하고 있었을 줄은.”

한 마디를 덧붙이며 류스이는 형에게서 빼앗았던 책을 돌려주었다. 그립고도 아늑한 체취와 희미한 피비린내, 갯과 생물이 가진 특유의 고소한 냄새가 섞여 나는 물건은 종이 대신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면 당장에라도 입에 집어넣었을 터였다. 물론 종이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서 씹어 삼키지 못 할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 헬하운드를 찾아 다섯 마도시를 순회하던 나는 우연히 이 사무소에서 배포한 전단을 보았고, 그 뒤로는 너희도 아는 대로다. 인간 무리와 천사를 만나 지금에 이르렀다는 것.”

일차적인 할 말은 전부 마쳤다는 것처럼 류스이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댔다. 흡족한 기색이 감도는 두 눈은 이곳에 막 당도했을 당시 상황을 되짚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는 맛이 셋, 모르는 맛이 하나. 어떤 것이든 허기를 자극하는 것. 하지만 피를 빨아서는 안 된다. 그들은 내 연인이 아니니까…….

“전단이라니 뭔데?”

때마침 SAI가 소리 내지 않았다면, 여느 때처럼 욕구에 쫓기는 상황에 직면했을지도 몰랐다.

“그런 게 있어. 여기, 소파에 앉은 인간 중에 목소리 작은 쪽이 만든 거.”

답해준 것은 센쿠였다. 그는 턱짓으로 겐을 가리킨 뒤 책상 한구석에 쌓여있는 전단 한 장을 집어 SAI에게 보여주었다.

괴이 현상에 관심 있으신 분

직접 경험해본 적 있으신 분

현재 연구하고 계신 분

그리고 괴이 그 자체

전부 환영합니다.

이시가미 괴이 연구 사무소

겐은 농담으로 제안한 문구였겠지만, 그 농담에 쉽게 만날 수 없는 이종족이 둘, 추가로 하나 더 찾아왔으니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라 할 수 있을 터였다. 특히 류스이가 과장해 말한 게 아니라면 한 사람은 현시점에서 사건을 해명할 실마리에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

“SAI, 너 실력 있는 마도학자라고 했지?”

센쿠는 짐짓 낯빛을 바꾸어 물었다. 그 물음이 얼마나 갑작스레 다가간 건지 SAI는 동그래진 눈을 끔뻑거리다 이내 더듬더듬 답했다.

“그렇게 실력이 있지는 않아. 독학을 조금 했을 뿐이고, 헬하운드는 원래 체력을 요구하는 일을 많이 하니까 머리 쓰는 건 잘 못해….”

“나는 몸 쓰는 일도 못하지만….” 웅얼웅얼 말을 마쳤을 때는 자리에 막 앉았을 당시처럼 책을 세워 얼굴을 감춘 뒤였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완전히 다 가리지는 않아 안색을 읽을 수는 있었다는 점과 짐승이 우는 것 같은 부끄러운 소리는 잇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걱정 마라, 센쿠. SAI는 틀림없는 천재 마도학자니까.”

그 광경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던 류스이가 한마디를 거들었다. SAI는 마땅히 당황한 눈으로 동생을 보았지만, 류스이는 시선을 마주해 주지조차 않았다. 불만이 있으면 말로 표현해라, 그리 전하고 싶은 것처럼. 게다가 아직 밝힐 게 더 있었다.

“여기 와서 나는 두 가지 놀랄 만한 사실을 알게 됐어. 하나는 천국에서도 일부만 아는 극비 사실이지만, 지옥에서 벌어지는 것과 비슷하게 천사들이 실종되고 있다는 것. 다행히 천국에도 멍청이들만 있는 건 아니었는지,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사자를 내려보냈지. 여기 있는 사이온지 우쿄가 이 도시를 담당하는 천사다.”

류스이가 시선을 던지자 우쿄는 긍정하는 의미에서 모자를 살짝 눌러썼다. 멍청이라는 단어가 귀에 박혔을 때는 마땅히 불편해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천국에서도 단 몇 사람만이 아는 사실을 인간은 물론 악마에게까지 밝힌 것이 옳은 판단이었는지는 지금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믿고 싶었다. 제 선택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 반드시 도움이 될 거라고. 이 같은 생각은 류스이가 말을 잇대어갈수록 깊어졌다.

“다른 하나는 문제의 근원으로 추정되는 땅에 접근조차 한 적 없으면서, 너와 비슷하게 이현상을 읽어낸 인간이 있다는 거다.”

“…….”

SAI는 반응하지 않았다. 반응할 수 없었다. 어느새 무릎 위로 내려간 책과 휘둥그레 뜨인 눈, 벌어진 입술만이 그가 느낀 것─반응하지 못 한 이유─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만일 조금이라도 정신이 남아있었다면 무슨 말이라도 중얼거렸을지 몰랐다. 그건 불가능하다는 단호한 확신이나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되묻는 말이라도.

“그게 누군데?”

가까스로 내쉰 한마디는 기초적이면서도 가장 중대한 물음이었다.

“우리 아버지.”

센쿠가 대답했다.

“지금 어디 있어? 만나볼 수 있을까?”

SAI는 부리나케 목소리를 이었다. 이 자리에서는 처음 보이는 상기된 낯빛으로.

“……실종됐어, 한참 전에. 조사할 게 있다는 말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망설이다 대답하는 안색은 명백히 좋지 않았다. 벌써 몇 개월이 흘렀으나 센쿠는 지금도 선명히 떠올릴 수 있었다.

며칠 나갔다 올 테니 집 잘 보고 있어라, 센쿠.

여느 때처럼 미소 띤 얼굴로 인사를 전하던 아버지 모습을.

“내가 이 도시에 온 것도 아버지의 행방을 밝힐 단서를 찾기 위해서였어. 이 사무실은 원래 아버지 거거든. 창고와 서재에 연구자료 같은 게 잔뜩 있는데, 혼자 해석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도와줄 존재가 필요했고….”

깔끔하게 말을 끝맺는 대신 센쿠는 가까운 순서대로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지금 이 장면을 볼 수 있게 도와주었으며 심적으로도 외적으로도 큰 의지가 되는 인간, 제게는 부족한 열정과 기력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북돋아 주는 인간, 존재 그 자체로 안도와 평온을 주고 정正이 무엇인지 상기하게 해주는 천사, 속내를 읽을 수도 종잡을 수도 없으나 해결사 노릇만큼은 확실히 해주는 악마. 어떤 의미에서는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나라는 인간 하나에 이렇게나 가치 있는 존재가 모여들었다는 것이.

“인간을 개별적으로 구분하지는 못 해도 인간이 쓴 책은 읽을 수 있잖아. 안 그래, SAI 선생?”

웃음기 위로 보이는 눈빛은 진지했고 진심은 깊었다.

“도움이 필요해. 이세계에 대해 잘 알면서 마도학에도 해박한 사람의 도움이.”

센쿠가 이토록 간절한 태도로 나올 줄은 몰랐는지 SAI는 상당히 놀란 것 같았지만, 부끄러워하며 숨거나 난감해하는 등 부정적인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기록을 볼 수 있을까?”

그가 입을 연 것은 옆에 있는 동생을 돌아보고 난 다음이었다. 형제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같은 메시지가 포함된 가벼운 미소를 지어준 뒤에나 말할 수 있었다.

“당장은 힘들어.”

대화가 이렇게 빨리 진행될 줄은 몰랐는지 센쿠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창고하고 서재에 쌓여있다시피 해서 정리하는 데만도 100억 시간은 걸릴 것 같거든. 그래도 뭐, 내일 오전까지는 어떻게든 해볼게.”

동시에 시선이 옮겨간 곳은 코앞에 앉아있는 두 직원의 얼굴이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곧 다가올 미래를 깨달았는지 겐이 볼멘소리를 중얼거렸다.

“오늘도 퇴근은 못 하겠구나….”

반면 크롬은 사태 파악이 되지 않았는지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눈만 끔뻑거렸다. SAI가 부탁한 일 때문이라고 하면 지금 당장 하자며 일어날 걸 알아, 누구도 구태여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럼 내일 다시 모이는 거로 알고, 나는 이만 퇴장하지.”

류스이가 자리에서 일어난 탓에 신경이 쏠린 것도 있었다.

“이대로 가려고?”

우쿄가 물었다.

“할 말은 얼추 다 전한 것 같고, 슬슬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거든.”

류스이는 훗, 웃음과 더불어 말했다. 다른 이들은 누구도 웃지 않았다.

“너 말하는 동안 피자 두 판 혼자 다 먹은 건 알지?”

어처구니없다는 기색으로 지적한 것은 센쿠였다.

“당연히 알고 있지.”

류스이는 시원스레 답했다.

“꼭 허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지금 가지 않으면 안 돼. 얼마 안 있으면 안경원이 폐점할 시간이니까, 조금이라도 늦으면 수리하지 못 한다고.”

그렇게 말하는 손에는 안경이 쥐어져 있었다. 렌즈는 깨지고 테는 찌그러져 본래 형상을 상실한 물건이. 그것의 주인이 누구고 왜 그렇게 망가졌는지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같이 돌아가겠어? 달리기 좋은 밤인데.”

류스이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안경과 저를 보는 형제에게 물었다.

“나누고 싶은 말도 많고….”

장장 100년 만에 보여주는 그윽한 눈빛으로. 그 안에 담긴 간절한 기분을 형도 분명 깨닫고 있으리라.

강대한 마력을 타고나 생生을 연명할 수단을 강구할 필요가 없는 악마에게 100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닐지 몰랐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사귄 연인─첫사랑─과 떨어져 있던 시간으로 100년은 짧다고 할 수 없었다. 류스이는 SAI가 잠적한 이유를 알고 있었고 그가 제게 송구해하는 것 또한 깨닫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자 보낸 시간에 쌓인 고독감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류스이는 모쪼록 형제가 이 심정을 이해해 주기를 바랐고, 다행히 SAI는 기대하던 답을 들려주었다.

“먼저 나가 있어. 금방 따라갈게.”

비록 마지못하다는 얼굴로 내뱉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 태도 역시 솔직한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류스이는 알아차려 빙그레 웃었다. 그는 가볍게 손을 들어 동료들에게도 인사를 전하고는 앞서 자리를 떠났다. 높은 구두굽이 철제 계단 지려 밟는 소리가 갈수록 작아지고 완전히 사그라진 뒤에나 SAI는 몸을 일으켰다.

“아….”

그가 커다란 책을 허리춤에 끼우고 가방을 바로 메는 모습까지 보았을 때 크롬은 퍽 정신을 차렸다. 꼭 오늘 이 순간이 아니어도 상관은 없을 것이었다. 앞으로도 만날 기회는 더 있을 터며, 여차하면 류스이에게 부탁할 수도 있었으니. 하지만 가능한 한 빠르게 전하고 싶었다. 결심했다면 행동으로 옮기는 게 나답고, 그 같은 사람을 앞에 두고 어물쩍거리는 게 오히려 어불성설이었으니까.

그러니 말하자, 얼른.

이대로 SAI가 가버리기 전에.

지금이라도.

어서─

“너희.”

그 순간, SAI가 돌연 입을 열었다.

“류스이하고 가까이 지내지 마.”

덧붙이는 목소리는 한없이 차분했고, 무표정한 얼굴 속 낙엽색 눈동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그런 말을 해도….”

“의미를 모르겠는데.”

듣는 입장에서는 느닷없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겐과 센쿠가 한 마디씩 붙이자 SAI가 말을 이었다. 만면에 가득했던 무감각한 기색은 누그러졌지만, 대신 다른 심경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류스이가 말한 적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내게는 모든 것이 다르지 않고 똑같아서 어느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다고. 그렇게 수없이 많은 연인을 가졌고 지금도 가지고 있으며, 그 연인들과 무엇을 했고 앞으로 할 거라고…….”

내키지 않는다고 할 만한 염려스러운 감정이.

그러한 감정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알지 못 하는 입장에서는 그저 신기하다고만 느낄 따름이었지만 말이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냈다더니 가족은 가족이구나, SAI는 동생을 잘 아는 형이구나, 제 말을 긍정함이 명확한 눈빛들이 돌아오자 SAI는 더 심중해졌다.

“그 연인이라는 존재들, 한 번이라도 본 적 있어?”

이번에는 질문을 던졌다.

“아니,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대답한 것은 우쿄였다.

“오늘 전까지는, 말이지.”

이어 말한 것은 겐이었다. SAI는 그 말을 빠르게 이해하지 못 했는지 두 눈을 느리게 깜빡거리다가, 뒤늦게 깨닫고는 더듬더듬 대답했다.

“아니, 그건 류스이가 멋대로 주장하는 거라니까….”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은 그 가슴에 번지기 시작한 부끄러운 감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책을 바로 들고 있었다면 버릇대로 틀림없이 얼굴을 감추었을 것이었다. 이러나저러나 그 탓에, 본론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잠시 시간이 걸렸다. 진지한 기색을 되찾은 SAI는 아무도 모를 진실을 나직이 전했다.

“늑대는 오로지 한 상대만을 섬겨.”

“죽어서조차 반려자 하나만을 그리워하고 사랑하지.”

“무슨 뜻인지 알겠어?”

온전하게 설명했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이 이상 직설적으로 전할 수는 없었다. 악마란 본래 간접적으로밖에 말할 수 없도록 설계된 존재였으니. 게다가 형으로서 동생이 가진 흠에 관해 밝히는 것은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었다. 그것이 세상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재앙의 씨앗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니 부디 알아차려 주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이들이 이현상을 해결할 실마리를 쥐고 있고, 더 나아가 해결에 이를 수 있다면 결코 헛되이 죽어서는 안 되었기에.

SAI는 “내일 봐.” 한 마디만 남긴 채 사무소를 빠져나왔다.

 

짙은 밤이 이끈 어둠은 한없이 익숙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마력을 보존하기 불편한 환경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비교적 고요하고 간섭 없는 인간계가 지옥보다 낫다고 SAI는 곧잘 생각하고는 했다. 정통한 혈족의 직계 자손인 동시에 지옥에서 가장 흔하고 낮은 종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태어난 순간부터 언제나 굴레처럼 작용했다. 그래서 기회가 온 것을 깨달았을 때 뒤도 안 보고 달아난 것이리라. 지옥보다 지옥 같은 지옥 속에, 유일하게 무리로 인정한 혈육을 남겨두고.

늑대는 절대로 무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유전자에 새겨진 법도까지 잊고서 말이다.

“왔군.”

어슴푸레한 가로등 아래에 서 있는 맵시롭고 길쭉한 형상을 보았을 때 SAI는 형제와 100년 만에 재회했다는 현실을 비로소 현실로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종족에게 동생의 정체를 경고하고 나온 상황이 아니었다면 반갑고도 온화한 미소를 있는 그대로 가슴 안에 새길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한 차례 버려졌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를 무리로 인정해 주는 형제에 대한 죄의식에 울먹댈 게 아니라. 이윽고 다가온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을 때도 SAI는 좀처럼─갈수록─고개 들지 못 했다.

“SAI!”

점차 깊어지던 부정은 뜻밖에 개입한 존재에 의해 사그라졌다.

올곧이 한 존재만을 비추던 밤색 눈동자가 뒤편으로 움직이자, SAI도 자연스럽게 시선을 따라갔다. 돌아본 곳에는 인간 하나가 계단을 한 번에 몇 개씩 밟아 내리며 급하게 뛰어오고 있었다.

“크롬?”

류스이가 알아보고 말했으나 SAI는 아리송한 눈치였다. 대강이나마 알아차리게 된 것은 반응을 본 동생이 “목소리 큰 인간.”이라고 귓가에 속삭여주었을 때였다. 그가 제게 무슨 볼일이 있는지는 변함없이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아직, 안 가서, 다행…. 이다….”

단숨에 다가온 크롬은 벅찬 숨을 고르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SAI…. 너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크롬은 의식 없이 되뇌었다. 결심했다면 행동으로 옮기는 게 나답고, 그 같은 사람을 앞에 두고 어물쩍거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이렇게 대박 쩐다는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올 만큼 위험하고 대단한 존재를 앞에 두고 어떻게 참을 수 있겠어?

“나한테 마도학을 가르쳐줘!”

이내 스스로 생각을 실천에 옮기듯 큰 소리로 외쳤다.

“나 너처럼 대박 유능한 학자가 되고 싶어! 어떤 어렵고 위험한 길이라도 감내할 수 있고, 또 열심히 배울 자신도 있으니까….”

나를 제자로 받아줘!”

마무리는 딱, 소리가 나도록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히는 움직임이었다. 이 또한 생각과 외침처럼 의식을 따라 나온 것은 아니었다. 단지 간절함의 표현일 뿐이었다. 그와 맞닥뜨린 순간부터 끝없이 샘솟기 시작한 감정.

“제자?”

너무 놀라 얼이 빠지면 부끄러운 기분조차 들지 않는다는 것을 SAI는 실감했다.

“핫, 하하하하!”

별안간 동생이 폭소하지 않았다면 언제까지 넋이 나간 채 서 있었을지 알 턱이 없었다.

SAI는 제 두 눈이 비할 데 없이 커다래지고, 그 위로 가지런한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며, 벌어진 입술이 할 말을 찾지 못 해 뻐끔거리는 것까지 자각했으나 좀처럼 평정을 찾을 수 없었다. 가까스로 돌아본 형제는 웃음소리는 멈추었으나 여지없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상황을 관망했고, 고개 숙인 인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간청하고 있었다.

이쯤에 이르자 해주고 싶은 말이 몇 가지 떠오르기는 했다. 나는 선생 노릇할 그릇이 못 된다, 인간 중에도 뛰어난 학자는 많다, 내가 하는 건 대부분 혼자 익힌 거라 체계적으로 전달할 자신이 없다, 비록 대가가 따르기는 할 테지만 마법 같은 건 악마와 거래하면 편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등등…….

“…….”

그렇지만 무엇 하나 SAI는 내쉴 수 없었다. 그가 선택한 답은 판단력과 함께 돌아온 뒤늦은 감정에 여느 때처럼 벽 뒤로 물러서 모습을 감추는 것뿐이었다.

제 등 뒤에 숨어 수줍게 그르렁거리기 시작한 SAI를 류스이는 도리가 없다는 듯 웃으며, 크롬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것처럼 의아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나 무슨 잘못 했어? 친구가 이처럼 묻고 싶어 하는 시선을 보냈을 때도 류스이는 그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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