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CP] 꿈꾸는 전기양과 전기양의 꿈 01

나나미 형제 (류스이) 중심 사이버펑크 세계관 날조글

자살 및 자살 방조 / 중독 치사 / 정신질환 / 인간 소모품화 / 신체 훼손과 개조 / 행동 강요와 학대 

상기 요소를 포함한 비윤리/비도덕적 소재가 사용되었으므로 열람에 주의해주세요.

논CP를 의도한 글로, 작중 묘사되는 사랑은 형제애/가족애일 뿐 성애가 아닙니다. 


요란한 빗소리, 미쳐 날뛰는 것 같은 뇌성에 눈을 떴을 때는 오전 3시가 막 지난 시간이었다. 다사한 계절이 코앞이라고는 하나 새벽은 여전히 싸늘한 데다 폭우가 가져온 한기와 압력까지 더해져 류스이는 견딜 재간 없이 몸을 움츠렸다. 두툼한 침구 속에는 다행히도 몸을 데우고도 남을 만한 열기가 모여 있었고, 등 곳곳에 새겨진 흉터가 퍼뜨리던 통증도 차츰 가라앉았다. 불규칙적으로 창밖에 울리는 소리에만 익숙해진다면 금세 다시 잠들 수 있을 터였다.

“뺙……. 뺘학…….”

꺼질 듯 말 듯 희미한 숨소리가 귓구멍을 간질이지도 않는다면 말이다.

겨우 속옷 한 장뿐인 형제와 다르게 그래도 티셔츠 정도는 걸치고 있는 남자는, 새우처럼 몸을 만 채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한 기색으로 잠에 빠져있었다. 날 때부터 헝클어져 있었을 머리카락과 대조적으로 가지런히 뻗은 속눈썹은, 그 아래 숨어있을 적금색 눈동자를 쉽게 보여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가 이 세상에 숨 쉬고 있다는 걸 보다 직관적으로 느끼고자 한다면, 일부러 잠을 깨우거나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터였다.

‘SAI….’

그렇지만 생기가 깃든 두 눈을 마주한다고 해서 그를 진정 살아있는 존재로 여길 수 있는가? 류스이는 고뇌했다. 벌써 몇십, 몇백 번째 반복하는 사색인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늘 그러듯 멈출 수 없었고 앞으로도 멈추지 못 할 것이었다. 내가 그 곁에 있고 그가 내 곁에 있는 한은 영원히.

 


 

직접적인 사인은 전자 드러그 중독이었다. 처음 발견되었을 당시 정신 간섭 기능이 있는 장비를 착용한 채 컴퓨터 앞에 앉아있었으니, 현장을 목도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판단할 것이었다. 부차적인 사인은 정신질환이었다. 우울장애 완화제, 항정신병제제, 그 외에도 지금 같은 시대에조차 면담과 처방전 없이는 구할 수 없는 치료제가 책상 위에 보란 듯이 널브러져 있는 광경은 그가 어느 정도로 내몰렸는지를 단박에 보여주었다. 조사가 끝나고 사건이 정리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마음이 아프던 나나미가 영식이 심각한 병세로 사리 분별을 하지 못 하고, 손을 대서는 안 될 것에 손을 대어 결국에는 죽고 말았다고.

평소 도시를 지탱하는 대기업 중 하나이자 부친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IT 관련 업무를 도맡아 했던 만큼 전자기술을 활용한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접근하기 어렵지 않았을 테고, 남는 게 돈인 만큼 구매와 입수도 손쉽게 해냈을 터였다.

결정적으로 SAI로 하여 그러한 행동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그가 업무 외에는 무엇을 하는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는 사실일 것이었지만 말이다. 유일하게 진짜 혈육으로 여겨졌던 류스이조차 형제가 어느 정도로 내몰렸는지까지는 알지 못 했고, 그 대가는 세상이 무너진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를 사무치게 겪는 것으로 치르게 되었다.

이것은 겨우 첫 번째 비극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알 도리가 없었다.

 

SAI의 사인이 사고사가 아니라는 것을 류스이가 깨닫게 된 것은, 형의 죽음으로부터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사흘 전에 들렀을 때만 해도 포장조차 벗겨져 있지 않았던,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것치고 몇 개월이 넘도록 손대지 않았던─댈 수 없었을─게임 패키지가 개봉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류스이는 빗나가는 법이 없는 직감이 ‘확인하라’ 외치는 동시에 ‘안 된다’ 가로막는 것을 느꼈다. 좋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은 이 시점에서 기정사실화한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류스이는 그 이상으로 큰 충격을 느꼈고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표정도 자세도 정신도 모조리 전부.

 

내가 없는 세계는

분명 어제와 다르지 않겠죠

그런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아주세요

안녕, 형제여

 

패키지에 동봉된 설명서 뒤쪽 여백에, 익숙하면서도 단아한 필체로 적혀있던 말은 그게 다였다. 회한과 슬픔, 두려움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고 그저 담담히 써 내려갔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지금껏 그에게 전해 들은 어떤 말보다 고통스러워 류스이는 주저앉았다. 가장 괴로운 것은 해일처럼 밀려든 이 아픔조차 마음을 굳히기 전까지 형이 안고 있었을 고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점이었다.

호흡 한 번에 몸이 녹슬고 눈 깜빡임 한 번에 정신이 망가져 가는 것을 쉴 틈 없이 느끼는 기분은 과연 어떤 것일까, 도와 달라 외치지 못 하고 죽어가는 공포를 누가 가늠할 수 있을까, 류스이는 답을 구할 수 없었다.

“미안해, SAI.”

“미안….”

“미안해.”

전할 대상 없는 사과만 연이어 되뇔 따름이었다.

 

SAI는 사적으로 동생을 제외한 가족들과는 교류하지 않았고, 가족들 대다수도 그를 사람으로 보지 않은 탓인지 류스이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SAI가 더는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슬퍼하지 않았다. SAI가 죽은 것이 소란이라고 부를 만한 일도 못 된다는 듯 금세 잊어버리고, 이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장례도 치르지 않았다. 개인적인 감정과 별개로 류스이는 가족─이렇게 칭하는 것조차 한스러웠지만─들, 특히 아버지의 선택을 합리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수는 있었다. 이 거대한 기업국가의 한 축을 담당하는 N사의 총재 아들이 어려서부터 일하는 기계 취급만 받아 병이 생겼고, 아픔이 쌓이고 쌓인 결과 끝내는 죽음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세상에 공표되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을 터였으니 말이다. 자식 관리도 못 하면서 세상 관리는 어떻게 한다고, 일반 시민은 물론이고 같은 기업들로부터 비난받을 가능성도 높았다.

이때를 기점으로 류스이는 태어난 순간부터 현재까지 유지해 온 사고가 조금씩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나 역시 세상에 산재한 톱니바퀴 중 하나일 뿐이고 기계보다 차가운 이 친족 무리에서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은 하고 있었지만, 현실은 인지하고 있는 것보다 비정하며 잔혹하다는 것을 비로소 직시했다.

또한 날 때부터 쥐고 있던 것뿐이라는 까닭으로 기득권에 기대어 살아온 행동이 이 세계를 변하지 않는 것으로 굳히는 데 기여했다는 것을 인정했고, 그것이 소중한 사람을 옥죄어 떠나게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그 대가로 살아서는 절대 덜 수 없을 상실감을 짊어지게 되었다는 것도 받아들였다.

‘이런 진실이나 세계는 원하지 않았는데.’

‘전혀 갖고 싶지 않은데….’

이러한 행동은 저답지 않고 비관해도 나아지는 일은 없다는 것 역시 알았지만, 류스이는 사고를 멈출 수 없었다. 그 정도로 고단하고 힘에 부쳤다. 내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버지로부터 본가에 오라는 연락을 받은 것은 다시 몇 주가 지난 뒤였다. 능력이나 수완과는 별개로 당주의 막내아들이 내놓은 자식 취급받는 것은 나나미 이름을 공유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고, 류스이 본인도 아버지가 사적으로 보자고 하는 경우도, 저와 만날 이유도 없다는 걸 알아 뜻밖이라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 시술 이후로는 말이지….’

날이 궂은 것도 아닌데 낙인처럼 등에 남은 흉터가 욱신거렸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여느 때처럼 아버지 손에 붙잡혀 스스로 의사와 상관없이 수술대에 올랐던 날, 갑자기 쇼크가 와서 죽다 살아나지 않았다면 지금도 원치 않는 강화 시술을 계속해서 받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당주인 아버지에게 있어 자식들을 ‘나아지게’ 하는 것은, 집안을 위해 일할 기계를 더 좋게 개조하는 작업일 뿐일 테니.

장장 엿새 만에 눈을 뜨고 온몸을 깨부수는 듯한 통증과 저가 일어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형제를 마주하고서 류스이는, SAI는 저처럼 바깥일을 주로 하지 않아서, 또 이 집안에서 누구보다 가치 있는 존재로 여겨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역시 청소년기에 기초적인 시술은 받았으나 다른 형제들처럼 지속해서 당하지는 않았다. SAI가 하는 일은 컴퓨터 앞에 앉아 타고난 머리를 쓰는 것뿐이었고, 무리한 시술로 신변에 이상이 생겼을 때 손해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만큼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다행이다, 류스이, 죽지 않아서 다행이다…….

여기에 있어서…….

다시 볼 수 있어서…….

…….

보고 싶었어, 류스이…….

 

당시에도 류스이는 SAI가 울면서 건넸던 말을 잊지 못 하리라 느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잊지 못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제게는 그렇게 말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걸 상기하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류스이가 도착하자 아버지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아들을 별채로 데려갔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건물에 고용인들도 접근하지 못 하도록 조치를 취해놓은 것을 보았을 때 낌새를 알아차렸다면 좋았을 테지만, 근래 일로 몹시도 지쳐있었던 탓에 류스이는 무엇도 사고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뒤이어 마주하게 될 광경은, 직감 정도로 예측하는 것은 물론이고 말로 표현하려 드는 것조차 가당치 않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현실이었지만 말이다.

“…….”

“대체….”

그가 누워 있었다. 작은 방 한편에 놓인 침대 위에 한껏 웅크린 모습으로, 날 때부터 흐트러져 있었을 새까만 머리카락 아래로 가지런한 속눈썹이 돋보이는 눈꺼풀을 곱게 닫은 채, 일부러 깨우지 않는 한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죽어있을 게 맞았다.

“어떻게….”

그는 죽었다.

“SAI…….”

플래시백은 찰나에 일어났다.

 

한밤이 진즉에 찾아와 온 세상을 집어삼켰는데도 혼자 사는 형제는 대항할 생각 없이 집 안을 어둠 속에 방치해두고 있었다. 일에 몰두하다 보니 신경 쓰지 못 하게 되어서, 아니면 까무룩 잠들어버려서, 낮에 먹은 안정제가 너무나도 잘 들은 나머지 못 일어나게 되어버려서, 이 같은 사유로 흔하게 벌어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류스이는 특별히 기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사방을 기어다니는 적막이 그날따라 유달리 기묘하게 와 닿는다는 감상 정도는 했지만, 이 또한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지나갔다.

SAI, 자고 있나?

부른다고 답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때까지도 깨닫지 못 했다.

돌연히 걸음을 멈춘 것은 작업실에서 흘러나오는 파란색 불빛을 목도함과 동시에 직감이 머리를 찌르고 사라진 것을 느꼈을 때였다. 그것이 모니터에서 비롯된 빛이라는 사실은 즉각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지만, 갑자기 불안한 기분이 드는 까닭은 좀체 알 수 없었다. SAI는 언제나처럼 컴퓨터 앞에 앉아있을 뿐일 텐데. 몇 걸음 더 내디뎠을 때 류스이는 빗나가는 때가 없다고 자부하는 직감이 이 순간만큼은 빗맞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고, 깨달았을 때는 가슴이 방망이질치는 것에 쫓겨 이미 다급히 움직이고 있었다.

SAI!

거세게 열어젖힌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던 광경은, 초조히 달렸던 게 무색해질 만큼 익숙하게 담아온 장면이었다. 커다란 의자에 몸을 파묻듯이 기댄 채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내 손위 형제. 누가 형이고 동생인지를 때때로 착각하게 할 만한 잔소리─시력 나빠지니 불 좀 켜라, 잘 거면 침실로 가서 자라, 식사는 제대로 했나 같은─를 쏟아내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 할 이 상황이 이토록 다행스럽게 느껴진 때가 없었다.

SAI….

류스이는 가슴 저변에서부터 올라온 안도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만면으로 서서히 번져가는 것을 느끼며 형에게 다가갔다. 이제는 괜찮아. 무엇이 그렇게 우려스러웠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괜찮아. 스스로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추락하는 정신을 인지할 수 없었다.

툭.

실제로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나 류스이의 귓속에는 분명히 닿았다. 가늘고 투명한 실 끊어지는 소리가 희미하지만 명백하게.

상황을 직시할 수 있게 되었을 때, SAI의 몸은 의자에서 떨어져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팔다리는 아무렇게나 늘어졌고 벌어진 입은 닫힐 줄 몰랐다. 배터리가 떨어져 깜빡거리는 장비를 벗겨내자 초점을 상실한 채 흩어진 적금색 눈동자가 보였다. 그가 불과 몇 분 전까지 살아있었다는 증거로 남은 눈물자국─고통과 후회와 결심이 한데 뭉쳐 남겼을─을 발견했을 때 류스이는 저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를 한 번 더 들었다.

내면에 쌓여있던 무언가가 거칠게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다시는 들리지 않았으면 했던 소리가 이 순간 또 울렸다.

 

아버지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고 류스이는 침대로 달려갔다. 손을 뻗는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으나 내면은 그렇지 못 했다. 주체할 수 없는 상념이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휘젓고 가슴을 거칠게 두들겼다.

SAI는 죽었다. 틀림없이 죽었다. 차가운 시체가 되어버린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고 손으로 직접 만져보기까지 했다.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역으로 현실을 냉정하게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지난 몇 주간 끊임없이 깨닫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여기 있는 것은 누구인가? 어떻게 내 형제와 같은 얼굴, 같은 몸을 가지고서 내 앞에,

“뺙……. 뺘학…….”

똑같은 숨소리를 들려주며 잠들어 있는 건가?

류스이는 결국 그를 만지지 못 한 채 멈추었다. 의식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제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올라 있을지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당분간 네가 관리해라.”

아버지가 말했다. 온정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혼자 두어도 상관은 없지만 주기적으로 살펴보고, 이상이 보일 경우 즉시 보고할 수 있도록 해라.”

류스이는 마땅히 답했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제 것 같지 않은 바람 빠진 목소리가 나갔으나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아버지도 당연히 개의치 않았다. 이 상황에 막내아들이 어떤 기분으로 어느 정도 혼란을 겪고 있을지 따위는. 여느 일과 마찬가지로 설명해 줄 의무조차 느끼지 못 한 것이리라.

“그나마 네가 네 바로 위 형제와 가까이 지냈으니,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저것을 돌보기만 하면 된다. 단지 그뿐이다.”

“내일 데리러 와라.” 남은 말도 그뿐이었다.

 

진실은 그날 저녁에 찾아왔다.

“큰 주인님께서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귀가한 이래 줄곧 심란한 기색을 지우지 못 하고 앉아있던 류스이에게 프랑수아가 말했다. 좀처럼 흐트러질 줄을 모르는 얼굴에 어린 주인과 마찬가지로 내키지 않는─그나마 감추고 감추어 그 정도였을─기색을 품고,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프로페셔널 자체인 집사가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아버지를 언급했을 때 각오를 단단히 했다면 자극이 조금은 줄어들었을지도 몰랐다.

“주인님, 오늘 만나 뵌 형제분은….”

현실을 알았을 때는 무의미한 대책이었으리라는 사실만 확인받았다. 더불어 충격이 엄습하고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감정뿐이었다. 비탄과 원망과 분노. 모든 것이 한데 섞여 가슴에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나나미가 당주이자 대표로서 가족을 가세를 유지하기 위한 부품으로밖에 취급하지 않는 아버지였지만, SAI를 유달리 값진 것으로 여긴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혼자 100만 명분을 사고할 수 있는 동시대에 둘도 없을 천재. 언어와 구상 능력 또한 뛰어나, 모든 것이 컴퓨터 기술로 움직이는 시대에서 귀중한 것 이상으로 가치 있는 재목. 수없이 많은 부품 중에서도 특히나 특별한 부품을 아버지가 가만히 내버려둘 리 없었다. 더구나 혼외자라 정치적 기반이 없고, 처지가 같은 동생과는 달리 반항할 낌새조차 보이지 못 하는 순종적인 성격이라 휘둘러 이용하기에도 더 편했을 것이었다.

이렇다 보니 SAI에게는 오직 채찍질밖에 주어지지 않았고, SAI도 맞아가며 구르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 부서지는 정신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SAI는 구르고, 구르고, 또 굴러 끝내는 죽음이라는 벼랑 아래로 추락해버렸다.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은 SAI라는 인간이 사라진 사실은 안타까워하지 않았지만, 다시 만들어낼 수도 구할 수도 없는 도구를 잃어버린 것은 아쉬워했다. 그게 아니고서는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쓸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활용하고 망가진 부분은 보수해라.

온전히 100만은 안 되더라도, 그 절반만 할 수 있더라도 충분하다.

기억을 새로 덧씌울 필요는 없다.

일하는 데 불필요한 부분만 잘라내면 된다.

나머지는 최대한 생전과 비슷하게,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게 해라.

가문 밖에 있는 누구도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서는 안 된다.

정신 안정 장치가 위화감을 조성한다면 없어도 상관없다.

망가지면 다시 고치면 그만이니.

 

가져온 부분이 신체 일부든 기억이든, 인간과 유사한 외견을 가지고 동등한 수행 능력을 갖춘 모조 생명체를 만들 때 진짜 인간을 활용하는 것은 명백한 불법이었다. 법률을 논하기 전에 개별적인 인격을 지닌 존재를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부터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인권이라는 개념이 희박해진 지 오래된 세상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부터가 이 사안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제조 허가가 엄격하게 떨어지는 마당에, 아버지와 가족들이 무슨 짓을 벌인 건지 모르겠다고 류스이는 충격 속에서 되뇌었다. 젊은 나이에 고통만 안고 떠나간 아들이 불쌍해서, 같은 핏줄을 타고난 혈육이 그리워서, 이러한 인간적인 이유조차 아닌 오로지 유용한 말 하나를 잃은 게 아깝다는 이유로 선을 넘고 도리를 저버렸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른 것보다 류스이에게 큰 고통을 안긴 것은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수로 휴식을 얻고 싶어 했던 SAI가 말 그대로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순수한 자의든 자의로 위장한 타의에 의한 것이든 떠난 이상 그 죽음은 존중받아 마땅했으나, 이 세상에 그러한 의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내 형제를 빌려 태어난 존재의 앞에도 형이 걸었던 것과 같은 길만이 놓여있고, 그 또한 채찍질 당하며 죽어갈 운명에 처했다는 걸 알았을 때 류스이는 눈을 떴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이런 사실을 전해드릴 수밖에 없어서요.”

류스이는 집사를 바라보았다. 프랑수아는 여전히 그 얼굴에 보기 드문 기색을 어리고 있었다. 눈가가 따끔따끔하다는 것을 느낀 때는, 무심결에 얼굴을 훔친 손바닥이 젖어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였다.

“미안하다, 프랑수아.”

진실이라고 칭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현실을 네 입으로 전하게 해서. 류스이는 버겁게 덧대는 대신 재차 얼굴을 훔쳤다. 이번에 묻어난 눈물은 단순히 감정이 빚어낸 흔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독이자 불씨였다. 번뇌를 일으키는 현실과 번뇌 그 자체에 대한 반동이 조금씩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할 수도, 어떻게 보면 뜻밖이라고 할 수도 있었으나 류스이는 SAI와 SAI를 동일시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것이 생전 형제와 어느 정도로 닮았는지─닮았다는 표현으로 다 담을 수도 없다는 걸─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까지 했으나, 같은 존재로 여기는 것은 죽은 형에 대한 배반이라는 생각이 가시질 않았다. 그것은 그저 명을 다한 형제가 비정한 혈육들에 의해 들쑤셔지고 파헤쳐졌다는 증거일 뿐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이 세계에도 내 눈앞에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류스이는 그렇게 믿었다.

믿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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