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동
'아멘타'의
언어로 정제하지 않으면 흩어져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잊지 않으려 되씹을수록 본래의 형태로부터 멀어지는 것들. 제 자신의 감정과 생각과 기억이 그 모든 것들을 주물러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화시킨다. 그는 이것을 기억이 오염되었다고 표현했다. 오염된 기억은 원형과 달라졌으므로 더 이상 원형이 될 수 없고 따라서 본래의 것을 잊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여겼다. 그러니 원형의 손상을 최소화하려면 여기저기 흔적을 남겨두는 것이 옳다, 기록을 하든 타인에게 떠들어대든지 간에. 루드비히는 그것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실행할 줄 몰랐다.
활자로 남긴다면, 기록 외의 것은 풍화될 것이다. 어느 날 다시 펼쳐보았을 때 기록된 것으로 기억을 재구성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타인에게 떠들고 싶진 않았다. 아멘타가 고작 제가 뱉어내는 문장으로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누군가의 기억에 남는 과정에서 왜곡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짐작은 그저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손이 떨릴 만큼 화가 났다. 내가 대체 뭘 해야 할까. 뭘 할 수 있을까. 기억의 오염이 너무나 두려움에도 혹여 원형을 해칠까 겁먹으며 발만 동동 굴렀다. 이제 그 아이의 존재를 기억하는 것은 저뿐이지 않은가. 그런 제가 만약 그 아이의 파편이라도 잊어버린다면―오염시킨다면― 그것은 그대로 사라져버릴 텐데. 기나긴 혼란 끝에 루드비히가 택한 것은 무엇도 남기지 않고 흘리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그 손에는 반지 하나와 보관함 하나만이 남았다.
루드비히는 제 안의 아멘타가 손상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그 아이에게 감히 사견을 붙이지 않으려 신중했고 어느 기억 하나 잊지 않기 위해 긴 시간을 쏟았다. 십수 년에 달하는 시간을 머릿속으로 훑고 있노라면 몇 시간쯤은 거짓말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그는 기억을 곱씹다 잠들었고 그 기억들로 하루를 시작했다. 혹여나 꿈에 아멘타가 나오는 날이면 기억과 혼동하지 않기 위해 따로 분리해내는 작업을 했다. 2년이 지난 끝에 그의 머릿속은 하나의 거대한 앨범이 되었다. 기억이라는 것은 곱씹을수록 정교해져 그날의 공기와 아멘타가 뱉어내던 호흡까지 되살렸다. 루디, 하고 부르던 말랑한 입술과 반달 모양을 그리던 눈웃음, 치맛자락을 쥐던 작은 손, 흩날리던 금발머리, 보드랍던 살결과 제 품에 안기던 향기.
루드비히는 어느 것에서든 아멘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소담스럽게 핀 꽃과 길거리와 공기는 물론, 스스로에게서도 아멘타를 찾아냈다. 그는 어느 순간에도 아멘타와 함께 했다. 그 애의 기억과 그 애를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에 둘러싸여 있으니 저는 언제고 그 애와 함께로구나. 그리 생각하며 사랑에 젖던 때가 있었다.
눈물을 쏟아낸 날이었다. 몰아치는 감정 속에서 겨우 깨달았다. 내가 되새긴 건 아멘타와의 사실뿐이구나. 그 애가 뱉어내던 숨결은 마치 어제의 것마냥 떠올려낼 수 있는 주제에 그 숨결과 함께 속삭이던 감정은 흐렸다. 너는 내게 사랑한다 말했고, 내게 안겨왔고, 내 품에 고개를 묻었다. 그뿐이었다. 고작 그뿐인 현상의 나열들이 그 모든 찰나에 살아있던 감정을 묻었다. 죽음이 내리던 땅에서 홀로 나아가길 선택한 이래로 채워질 줄 모르던 가슴의 공허, 그 구멍으로 눈바람이 드나들었다. 심장이 시렸다. 너무 추워, 아멘타. 그러나 위로하는 아멘타의 목소리를 떠올릴지언정 그 생생하던 걱정은 되살려낼 수는 없었다. 아멘타의 감정조차 흐린데 제 감정은 어떠하겠는가.
루드비히는 아멘타의 죽음 이후 단 한 번도 그 애를 되새김에 있어 제 감정을 덧붙이지 않았다. 감정을 뭉개고 바스라뜨리고 지워냈다. 그것만이 아멘타를 온전히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이라 여겼다. 그런데 지금 내 가슴은 어떻지? 나의 공허가 원래 이다지도 컸던가.
감정이 박동했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힘차게. 낯선 감각에 허둥거렸던가. 둑 터지듯 넘치는 눈물을 어찌할 줄 모르고 쏟아내면서 감정의 범람을 고스란히 느꼈다. 아멘타를 향한 사랑, 슬픔, 애틋함, 괴로움, 죄악감과 그리움까지 모조리 뒤집어썼다. 루디, 하고 부르던 목소리에 담긴 애정과 눈웃음 속의 연심과 저를 이끌던 작은 손의 수줍음와 싹둑 잘린 머리카락의 경애와 맞닿은 피부 너머 설렘과 품에 안기던 향기에 숨겨진 떨림. 생동하는 아멘타가 루드비히의 머릿속에서 속삭였다. "루디, 사랑해."
현실의 루드비히가 답했다. 오래된 고백에 새로운 답을 띄워 보냈다.
"사랑해, 아멘타……."
마을의 입구까지 가 속삭인 답장이 눈보라에 실려 정혼자에게 도달할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루드비히는 언제가 되었든 아멘타를 떠올릴 수 있었고, 또한 감정을 실어 답장할 수 있을 것이다.
설령 마을이 무너져 떠나게 되더라도 감정은 길을 잃는 법이 없으니.
*
깜박. 눈을 떴다. 루드비히는 어깨를 두른 담요를 꽉 끌어안고 동굴 벽에 기댄 몸을 일으켰다. 다른 이들은 자는 듯했다. 숨소리가 고르고 가슴의 움직임이 일정했다. 모두의 생존을 시각으로 지각한 그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지만 이 공간을 온기로 꽉 채우기엔 부족했다. 얼굴을 덮는 방독면을 점검하고 무거운 부츠를 옮겼다. 동굴 입구에 다가갈수록 냉기가 선명했다. 스으, 숨을 작게 나눠 마시며 양손을 꽉 맞잡았다. 동굴 밖으론 새하얗게 트인 설원이 넓게 펼쳐졌다. 마치 세상의 끝에 도달한 듯한 풍경에 루드비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온통 하얗고 어두운 광경을 오랫동안 눈에 담았다. 설원 너머의 한쪽으로 시선을 던졌으나 눈보라에 막혀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본다고 해도 그 애에게 닿을 리는 없겠지만.
"아멘타…."
조그맣게 속삭이며 반지를 방독면에 댔다. 직접 입 맞출 순 없지만 감정은 어느 곳이든 향하여 도달하지 않던가. 겨울의 냉기로 반지의 찬 온도를 그리며 루드비히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언젠가 키스를 대신에 맞닿았던 이마의 온기가 떠올랐다. 눈가를 훑던 아멘타의 다정한 손길과 작은 새가 지저귀는 듯한 웃음소리가 연쇄적으로 루드비히의 곁을 지켰다. 가슴의 공허는 메워질 길 없으나 그 안으로 드나들던 눈보라는 잦아들었다. 정혼자의 모든 것을 생생히 떠올리며 루드비히가 고백했다. 사랑해,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이제 무섭지 않아.
나의 끝까지 함께해줘, 아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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