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OCN 드라마틱 시네마 '타인은 지옥이다' / 기혁정화
다시 만날 거라고 생각도 않던 인연을 만나면, 반가움과 함께 텅 빈 시간이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으로 자리잡는다. 특히나 이런 상황이라면 더욱. 정화는 손발은 깨끗하지만, 피냄새과 흙냄새로 뒤덮힌채 담배를 물어든 기혁을 보았다. 몇년만의 만남인 걸까.
기혁은 정화의 옆집에 살았다. 어릴때부터 알고 지내며 둘은 계속해서 가까이 지냈다. 공대를 졸업했음에도 대부분의 현장직은 여자를 고용하길 꺼려했고, 대학을 구경조차 못 한 기혁은 자연스럽게 일용직을 뛰며 안정적인 직업을 꿈꿨다. 반쯤 마신 맥주캔을 부딪히며 "우리 경찰이나 할까?" "경찰은 뭐 쉽나?" "못 할 것도 없지." 그리 이야기 했던 날이 시작이었다. 웬 바람이 분 건지 기혁은 늘 책을 들고 정화를 찾아왔다. 마지못하는 척 정화도 책을 사들고 기혁을 따라 도서관으로 향했고 둘은 늘 가장 먼저 가서 가장 늦게 나오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합격 소식을 들고 온 날, 기혁은 그가 늘 뱉던 한숨처럼 사라져 있었다. 그의 행방에 대해 물으니, 한숨을 쉬며 "보증을 서줬던 친구 사업이 망했다더라. 너도 어디가서 보증 서고 그러지마."라 말했던 아빠를 정화는 기억했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진 걸까? 그렇다면 그는 어디로 간 걸까. 합격자 명단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사라진 기혁을 정화는 항상 마음 한 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습기를 먹은 담뱃대가 바닥에 떨어지며 불이 꺼졌다. 흰 연기는 어느새 다 흩어졌고 그제야 아차 하는 표정으로 기혁이 발걸음을 옮겼다.
"오빠. 오빠! 기혁이 오빠!!"
아무리 그를 부르며 쫓아도 이제 막 은혜 지구대에 발령된 자신이 그를 따라잡기는 부족했다. 그 피냄새는 무엇인지, 흙냄새는, 손은 왜 깨끗했는지. 그런 것들이 정화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머리 자르러 갈 시간도 없다며 머리를 길렀던 그 날처럼, 여전히 뒷머리가 긴 채 그리 질색하던 담배를 물어든 그를 쫓을 뿐이었다. 헥헥거리며 발걸음을 멈추었지만 그래도 그가 살아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이 은혜동을 돌다보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리고 그 다음 만남에서야 정화는 더이상 자신이 알던 기혁은 없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여전한 검은 옷에서는 그날은 미처 신경쓰지 못한 피냄새가 났다. 생기가 넘쳤던 눈동자는 어디를 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고, 서슬퍼런 눈빛은 정화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실종자 때문에 에덴 고시원의 뒤를 캔지 얼마 되지 않은 날의 일이었다.
"더이상 신경쓰지마요."
오랜만이다. 잘 지냈냐. 그런 인사는 죄다 생략하고 기혁은 제 할 말을 던졌다. 정화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화를 잘 냈으나 어디까지나 평범한 사람이었던 그가, 풋내나는 자신이 보기에도 위험해 보일 정도로 변한 이유가 무엇인지, 저 에덴이 이 사람을 어디까지 바꾸었는지 정화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사람이 몇명이 죽었는지, 몇명이 더 죽을지, 그리고 지금도 누군가 죽고 있을지 모르는데,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데 나도 신경쓰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더 신경써야죠. 그게 경찰이 해야 할 일이니까."
그런 정화를 보며 기혁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순간, 기혁의 눈동자에 무언가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난 경고했어요. 더 캐내다가 다쳐도 난 몰라요, 정화야."
-
"더 캐내면 다친다며. 내가 다쳐도 모른다며. 근데, 근데 이게 뭐야."
연고조차 없어서 공동 묘지에 처량하게 묻힌 기혁을 보며 정화는 눈물을 쏟았다. 그 흔한 신분증 한장 그에게는 없었다. 주거지 불분명으로 신원이 말소된지 이미 한참이 되었고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품이라 할만한 것도 검은 옷가지 몇 벌이 전부였다. 대량의 마취제가 검출된 것을 보니 마지막은 편안했을까. 하지만 반쯤 뜬 눈이 그리 편안해 보이진 않았다. 토막난 그의 모습을 처음 마주했을 땐 정신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리고 혈육이 아니라 자신이 그의 죽음에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서러워 눈물이 흘렀다.
[순경님은, 정의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정화는 그 질문에 선뜻 답할 수 없었다. 무엇이 정의인 걸까. 이후로 몇번이나 자신에게 일부러 꼬리가 잡히면서도 다가오지 말라 하는 그를 보며 정화는 그가 마냥 그곳을 낙원으로 생각치 않는다는 걸 알았다.
"내가, 내가 좀 더 빨랐다면, 좀 더 능력이 있었다면 오빠를 구할 수 있었을까요?"
"오빠... 나는 이제 정의가 뭔지 모르겠어요. 오빠 한 명도 제대로 구하지 못한 내가 정의를 지킬 자격이 있는 걸까요? 오빠한테 에덴은... 낙원이었어요 지옥이었어요?"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 사이에서 정화는 꽃 하나 놓이지 못한 묘비를 붙잡고 눈물을 쏟아냈다. 늘 입던 밝은 톤의 옷은 서랍 안으로 들어간지 오래였다. 그를 기릴 것은 검은 옷 뿐이어서 어느날 부터인가 검은 옷만 입고 있었지만 그것을 신경쓸 여유같은 건 없었다. 살아남았으나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남은 자의 삶은 그런 것이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