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아연아!" 어느 고등학교 정문. 모처럼 딸을 마중나온 아빠와 반갑게 아빠에게 다가가는 딸. 흔한 광경은 아니었지만 아예 보기 드문 광경도 아니었다. 교복을 입은 딸의 가슴에는 유아연이라는 노란 명찰이 여름 오후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정문에 있어서 깜짝 놀랐어. 어쩐 일이야, 아빠?" "간만에 오프 나서 마중나왔지." "안녕하세요." "안
"뭐야, 뭘 봐?" 정은창이 담배를 물고 꼬라봤다.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뭔가 기분 나쁜데…." 영 시원치 않지만 웃는 낯에 말을 더 덧붙이지 못한 정은창은 애꿎은 담배 필터만 잘근 씹었다. 다른 녀석들 같았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져 시비를 걸었을 텐데 참 상냥한 녀석이었다. 유상일은 그를 한 번, 그리고 그
태어난 것은 축복이요, 살아가는 것은 생명이니. 유상일은 박근태가 태어난 날의 숫자를 보며 반가움을 숨길 줄 몰랐다. 존경하고, 또 존경하는 사람과 자신이 태어난 날이 같다니. 해는 다르더라도 한날한시의 느낌이 들지 않는가. 유상일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지 못했다. 모두가 자신을 향해 비난적인 잣대를 치켜들었을 때, 유일하게 내민 도움의 손을 잊지 못한
햇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복도. 오래된 등에서 나오는 잔잔한 불빛만이 긴 복도를 비춰주고 있었다. 재호는 잠시 숨을 고르다 이내 그 길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한 발자국씩, 천천히, 보이지 않는 끝을 향해 걸어갔다. 뚜벅이는 구두소리가 조용한 복도에 외롭게 울려퍼졌다. 한 줌의 무게 W.T. HA_RUT_ 언제였을까. 우리가 술잔을 부딪히며
"생일 축하드려요~!" "생일 축하드립니다, 경위님, 국장님!" 케이크 위의 촛불을 불어 끈 오늘의 당사자 유상일과 박근태는 환호하며 축하해주는 동료들에게 인사하며 웃어보였다. 유상일에게는 이번 생일이 남달랐는데, 경찰로 복귀한 뒤 처음으로 맞는 생일이기 때문이었다. 주변에 널린 조폭들에게 생일 축하를 받아도 받은 것 같지 않았던 잠입요원 시절의 설움과
-결정했어. 나, 잠입요원 일에 지원할 거야. 박근태는 그 말을 처음 들었던 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돈의 흐름을 따라 하나 둘씩 서울로 상경한 조폭무리는 적지 않았다. 개중에서 가장 큰 세력을 지닌 것이 바로 선진화파였다. 호랑이를 잡고 나면 호가호위하는 무리들은 금세 뿌리 뽑을 수 있을 터. 경찰의 옷으로 보기 좋게, 드러나지 않게 가렸을 뿐, 박근태는
최재석은 최근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아졌다. 일전의 사건 이후 줄어버린 관원들을 재모집하고, 주위 태권도장 관장들과 어울리며 근황을 주고받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유상일과 양시백이 함께하는 시간도 길었다. 양시백은 비록 유상일을 용납할 수 없었지만 최재석이 용인하는 이상 일방적으로 적의를 표할 수도 없었다. 최재석이 있을 때는 적당히
-출소를 앞두고 발송되었어야 할 무명의 편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유상일이 출소했다. 10년 전 비리로 몰락한 경찰 영웅이었던 그의 출소 소식은 생각보다 크게 다뤄지지 않았다. 자리를 떠나기 전 줄곧 기다리던 옛 친구를 만나 밥을 먹고, 이야기를 조금 나눈 게 전부였다. 밥을 먹고 나니 무어라도 할 것이 없었다. 적당히 자리를 파하려는 유상일을 붙잡은 친구
"야, 먹어먹어! 식을라! 어여 먹어!" "..넌..내가 교도소에서 쫄쫄이 굶었을 거라고 생각하냐?" "나 참, 뭐래? 너 그렇게 먹다간 근육 다 빠져서 허우대만 크고 비실비실거리게 될까봐 그렇지! 직업인의 말을 믿어." 직업인이라는 말에 걸맞게, 최재석은 태권도장의 관장직을 맡고 있었다. 경찰을 그만두고 새로운 길을 찾아내 작은 성공을 이룬 유상일의 친
-..오미정, 형사. 오미정이 형사라는 직업의 딱지를 뗀 지도 10년 째가 되던 어느 날이었다. 자신을 미정 형사라고 불러준 이는 몇 없었다. 그렇게 불러줄 이도 이제 거의 없었다. 한 사람을 제외하면. 오미정은 수화기 너머의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지만 잊혀진 울림을 떠올리듯 상대의 이름을 조심스레 입에 올렸다. "..상일 경위님?" 수화기 너머
아빠. 아버지. 박수정에게 아버지는 인자한 -그러나 경호원과 사용인들이 어려워 하는 기색이 어김없이 느껴졌다- 할아버지보다 더 어려운 존재였다. 단순히 무뚝뚝하다거나 감정 표현이 서투른 게 아니다. 박수정이 그걸 깨달은 것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였다. 입학식에 참석하지 못 했다던가, 하는 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같은 반 친구
관자놀이를 꿰뚫렸던 두 사람이었고, 그 상처는 둘 다 살아남은 것이 한없이 기적에 가까울 만큼 치명적이었다. 그나마 조속히 구급요원들이 경찰과 함께 들이닥쳤다는 것, 마침 남은 것이 불량 탄환이었다는 것이 두 사람의 목숨을 겨우 이승에 붙들어 놓았다. 총구를 당긴 건 유상일이었지만, 유상일이 박근태와 총구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박근태의 손상은 유상일보다는
쿵쿵쿵- "관장님이세요?" 관장실 안쪽에서 한창 컴퓨터를 만지작 거리던 -게임 용도로- 양시백은 그렇게 말했다. 쾅! 그리고 대답은 두드린 건지, 걷어찬 건지 모를 큰 소리로 돌아왔다. 아이들 장난인가 싶어 양시백은 그제서야 관장실을 나와 도장 마루를 가로질러 걸어 문을 열었다. "누구..." "비켜비켜비켜비켜!" "우왁!" "어우, 양시, 왜 이
"다녀왔다!" "엇." "엉?" 박력있게 문을 박차고 들어온 최재석은 도장 바닥에 신문지가 깔려있는 것과 뭔가 작고 덩어리 진 것이 툭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얼빠진 소리를 낸 양시백은 갑작스럽게 들린 소리에 방금까지 먹고 있던 찐 고구마를 놓친 채 출입구를 볼 뿐이었다. "아, 관장님! 깜짝 놀랐잖아요! 간 떨어질 뻔했네!!" "네 반응에 내가 애 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