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스포츠물 샘플
SAMPLE
지난 새벽부터 쏟아진 장대비 덕에 경기장은 상대적으로 한산했다. 2차전까지만 해도 관중석에 빠듯하게 들어찼던 응원단들의 열성도 악천후를 뚫지는 못했다. 그 즈음 십대들의 열정이란 본디 쉽게 끓고 쉽게 식는 법이었다.
경기장 곳곳에서 번뜩이던 카메라의 플래시도 이전 같지 않았다. 직전 경기까지만 해도 함성 소리 사이로 타자 두드리는 소리가 분주했던 것 같은데, 그 기자들 모두가 이전 경기에 출전한 청소년 국가대표를 취재하러 온 사람들이었던 모양이다. 양복을 차려입고 앉아있던 스탠드의 남자들도 자리를 떴다. 남은 것은 선수단의 부모로 보이는 학부형들, 장마에도 굴하지 않는 열정의 배구 마니아들, 타성어린 표정의 협회 관계자들, 그리고 무료입장을 사양하지 않는 지역 주민 몇 뿐이었다. 관중석의 빈자리가 군데군데 동그마했다. 빗소리가 녹아든 공기가 미지근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클라이맥스는 끝났다. 예선의 승자는 압도적인 에이스를 앞세운 운대부고였다. 사람들은 운대부고의 전국대회 성적을 예측하는 데 열을 올렸다. 몇 경기가 남아 있었지만 모두 와일드카드 한 자리를 두고 다투는 생활 스포츠클럽들의 악다구니였다. 그런 것은 화제 거리가 되지 못했다.
그래도 여전히 체육관의 라이트는 태양처럼 빛났고, 휘슬은 어김없이 울었다.
백제배 전국 고교 배구대회 서울 지역 예선 3차전, 한휘고 대 송찬고. 스코어는 22:23.
성하와는 눈썹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가늠했다. 3세트의 끝자락. 지난 세트는 모두 점수 차가 크지 않은 난전이었다. 양 팀의 기량이 엇비슷하니 애써 우열을 헤아리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이미 앞서고 뒤지길 반복하며 한 세트씩을 주고받았다. 경기가 길어지면 지구력의 승부가 될 것이다. 벤치가 빈한한 한휘고에게는 고된 싸움일 것이 분명하다. 또한 무척이나 지루할 것이고.
“자, 힘내서 쫓아가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성하와는 들려오는 목소리에 맞춰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틀면 낯익은 옆모습이 있다. 평소답지 않게 입술을 앙다문, 어쩐지 고집스러워 보이는 옆얼굴.
성하와는 언젠가 그 표정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한때 그것은 아주 멀고 희미했다.
그러나 때로 어떤 것들은 순식간에 날아들어 생을 뒤흔든다.
쏜살처럼, 벼락처럼, 누군가의 경쾌한 스파이크처럼.
성하와는 정한철의 부탁으로 배구부에 가입했다.
기실 그것은 부탁이라고 할 만한 것도 되지 못하였고, 숫제 애원이나 간청에 가까웠지만.
중간고사가 끝나 어수선한 교실. 불쑥 나타나 성하와를 찾던 낯선 얼굴을 하와는 기억한다. 미닫이문의 낮은 턱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던 소년이었다. 전교의 천둥벌거숭이들이 그 턱을 제 집 안방 넘듯 넘어 다닌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오래 멈추는 그 예의를 성하와는 외면하지 못했다.
소년은 불쑥 말했다.
‘저기, 혹시 배구부 들어와 줄 수 있어?’
CA 명단에 배구부가 있었던가. 흐릿한 기억을 더듬고 있노라면 소년은 대본을 읊듯 부연했다. 한휘고의 배구부는 총 일곱 명. 정규 시합의 선발 인원을 간신히 채울 수 있는 작은 동아리였다. 교체 인원조차 쓸 수 없는 빈한한 엔트리지만 전국 대회 출전을 위해 다시없이 분투하고 있었는데, 그만 유일한 3학년이자 주장 직을 맡고 있던 세터가 다리 골절로 결장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와는 그 이야기를 하는 한철이 조금 민망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주장이 급식을 먼저 먹겠다고 뛰어 내려가던 중에 계단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는 소식은 후에야 알았지만.
한철은 하와의 이야기를 배구부 담당 교사인 체육 선생에게 들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작년 체육 수업 중에 배구를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너 엄청 잘한다면서. 그러니까…. 한철이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운을 뗐다.
‘싫어.’
물론 하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나 정한철이 끈질겼다. 그는 기어이 하와를 체육관으로 끌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인원이 부족해 연습 게임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연습 게임이라도 한 번만 도와주면 더는 귀찮게 하지 않겠다는 애원이 하와의 발목을 잡아끌었다.
체육관에는 체육복 차림의 학생 몇이 스탠드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개중 몇이 한철의 기척을 알아보고 일어나 인사를 했다. 구식 책걸상에는 까까머리 하나가 목발을 기대 두고 앉아 있었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다리를 다쳤다는 그 세터인 것 같았다.
사람이 모자라다는 말은 사실인지 연습 게임은 3:3의 약식 경기로 진행되었다. 까까머리가 책상 위에 스코어보드를 펼쳐두고 심판을 봤다. 하와의 코트에는 한철과 수더분한 인상의 1학년 여자아이가 함께 있었다. 하와보다 두 뼘은 클 그 아이는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피했다. 겁을 먹은 것 같았다.
까까머리의 구령과 함께 네트 앞에 서자 맞은편 코트에서 고개를 숙여왔다. 경례를 챙기는 모양새가 꽤나 그럴듯한 것이 대회를 위해 노력해왔다는 한철의 말이 틀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와도 따라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연습 게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랠리를 거듭할수록, 성하와는 이 모든 것이 별 볼일 없다고 생각했다. 기껏해야 지난해의 수행평가보다 조금 더 움직여야 하는 정도, 그 와중에도 정한철은 무언가를 지시하고 북돋았지만 나머지 인원들은 공을 쫓아다니는 데에 급급했다. 누군가 보았다면 비웃을 것이다. 성하와는 말없이 평했다. 악의랄 것도 없었다.
코트를 넘어간 공이 돌아오는 데에는 한참이 걸렸다. 어수선한 틈새가 길어지면 사념이 새기도 좋았다. 무연한 눈길 끝에 정한철이 있었다. 그는 공을 가지러 돌아간 상대 코트의 2학년을 응원하고 있었다. 성하와는 그가 자신을 어떤 표정으로 붙들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고작 이런 것이 간절했을까.
낯선 소년이 하와의 이름을 부를 때, 성하와는 그것이 낯설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와는 그런 무리를 잘 알고 있었다. 골목길에서 돌연 이름을 불러오는 뜨내기들. 개중에서도 종종 있는 허우대가 멀쩡한 부류. 하와는 대개 그들의 이름을 알지 못했으나 그들은 하와의 이름을 거리낌 없이 불러댔다. 그 불균형을 소년들은 위계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들은 진귀하고 끔찍한 이국의 생물을 부르듯 하와의 이름을 발음했다. 그런 작자들을 상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무시할 수 없다면 적당히 끌려가주면 그만이다. 철없는 흥미는 금세 식을 것이다. 성하와는 그들의 습성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한철은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하와는 날아드는 공을 받아내며 생각했다. 모은 팔에 적중한 공이 시원스레 튀어 올랐다. 나이스 리시브!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외쳤다. 아마도 정한철일 것이다.
한철은 간절해 보였다. 돌이켜보자면 붙잡는 손길이 더없이 조심스러웠던 것 같다. 거부를 상상할 줄도 모르는 머저리들과 달리 그는 하와의 거절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성하와가 그를 밀어내면 그는 배구를 할 수 없게 될 테니까. 처음 보는 아이의 팔에 매달려서라도, 무심한 낯에 간청해서라도, 그는 이 우스운 공놀이를 계속 하길 원했다. 그 조바심을 성하와는 읽었다.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무언가에 열렬하거나 절실한 것. 그 들끓는 열의, 섣부른 사랑.
성하와는 그런 것을 알지 못한다. 몇 번인가 상상해보려 애썼던 적도 있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모르는 것은 꿈꿀 수 없다. 얕은 잠 너머의 백일몽조차 온통 그가 알고 있는 것들뿐이었다.
그러므로 1학년의 비껴 맞은 리시브에 몸을 날린 것은 성하와의 열정 탓이 아니다. 거짓말처럼 심장이 뛰고 눈앞이 개는 일은 없었다. 다만 어떤 흥분도 없이 빠른 발이 먼저 움직였다.
어설프게 살아난 공에 성하와는 손을 뻗었다. 엄지뼈에 공이 부딪혔고, 동시에 하와는 나동그라졌다. 몸이 떨어지며 시야가 기울었다. 하와는 무심코 눈을 감았다.
─탕!
감긴 눈 너머에서 청량한 소리가 들렸다. 솟아오른 공을 누군가 때리는 소리였다. 감은 눈 너머에서도 그 정도는 분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즈음 성하와는 그것이 어쩐지 물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공이 바닥에 꽂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까까머리가 휘슬을 불었다. 스코어보드가 넘어갔다. 하와는 그제야 시야를 갈무리하고 고개를 들었다. 상체를 일으키니 한철과 눈이 마주쳤다. 땀에 젖은 곱슬머리 몇 가닥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방금 어떻게 한 거야? 너 진짜 최고다! 배구 천재 아니야?’
한철이 손을 내밀었다. 하와는 엉겁결에 그 손을 잡았다.
‘괜찮아? 다친 건 아니지?’
‘멀쩡해. 천재는 무슨.’
‘아니야. 방금 진짜 엄청났어!’
리시브를 올렸던 1학년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그 아이는 자신의 서툰 리시브를 연거푸 사과했다. 하와가 자신의 실수를 처리해주다 부서져버리기라도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새였다. 괜찮다는 말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성하와가 같은 대답을 다섯 번쯤 반복할 무렵, 정한철이 몸을 숙였다. 한철은 하와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상기된 뺨이 훌쩍 내려와 눈앞으로 가까워졌다.
‘우리, 배구 같이 하자. 재미있을 거야.’
‘안 해.’
‘그러지 말고. 네가 올려준 공은 뭐든 때릴게. 응? 약속할게.’
이상한 데로 가도, 아니, 발로 올려줘도 내가 다 때릴게. 네가 올려준 공은 코트 끝에서 올라와서라도 꼭 칠게. 점수도 다 벌어다 줄게. 무조건 이기게 해줄게. 응? 같이 하자. 너만 있으면 전국대회도 갈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야. 대본이 있을 리도 만무했으나 정한철의 간청에는 막힘이 없었다. 하와는 한철의 들뜬 얼굴을 보며 코트에서 들렸던 물소리에 대해 생각했다.
몇 되지도 않는 부원. 그마저도 어설픈 실력. 낡아 뜯어진 네트. 환풍기가 돌아가는 소리. 오래된 체육관의 나무 냄새.
그 와중에도 청랑한 것은 어떤 연유인가.
그날 성하와는 배구부에 가입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인원 충당을 위한 한시적 임시 부원이었다. 기한은 다음달까지. 까까머리는 그 즈음에 교육청 대회의 예선이 있다고 했다. 하와의 입부가 결정되자 한철이 요란하게 좋아했다.
그 즈음의 하와는 알지 못했지만, 한철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코트 위의 소년과 소녀들은 여름이 다가오면 같은 꿈을 꿨다. 백제배 전국 고교 배구대회. 가장 오래된, 가장 커다란, 가장 빛나는 꿈. 한철은 그 신기루에 매료되었다.
누군가는 비웃었고, 누군가는 만류했다. 고작 부원 일곱으로 전국대회를 넘보겠다니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래도 한철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3학년들을 붙잡았고, 새 부원도 모았고, 그 애들을 들볶아 리시브와 토스와 스파이크를 가르치는 데에도 성공했다. 부원들이 주고받는 랠리의 횟수가 길어지면 먼 곳의 꿈이 아주 가까이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 남았다. 백제배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가 더 필요했다. 백제배 전국 고교 배구대회 운영규정 제3장 1조 1항. ‘대회 참가 신청은 지역구, 협회 등에서 주최하는 공식 대회 본선 이상 진출 기록이 있는 팀에 한하여 가능하다.’
대단한 대회가 아니더라도 좋았다. 우승 컵 같은 것은 들어 올리지 않아도 좋았다. 어떤 대회라도 공식전이라면, 예선을 통과할 수 있다면, 본선의 문턱이라도 밟을 수 있다면 충분했다. 한철은 행운을 위해 때로 손을 모아 쥐었다. 믿는 신 같은 것은 없었지만.
가장 가까운 대회는 다음 달의 교육청 주최 청소년 스포츠클럽 대회였다. 출전 이력으로 자랑하기에는 다소 한미한 대회였으나 그 덕에 본선 진출도 어렵지 않았다. 부전승까지 얻어 걸린 덕에 치러야 할 예선전은 한 경기로 줄었다.
그 뒤의 까마득한 험로에 대해 한철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우선은 다가오는 경기에서 이겨야만 한다. 한 경기면 족했다. 한 경기면 본선에 진출할 수 있고, 백제배의 출전 요건을 충족할 수 있고, 전국 대회의 문을 두드릴 수 있다.
그리고 성하와가 있다면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다가오는 경기도, 어쩌면 그 다음도.
성하와는 다음을 기약하지 않았다. 하와는 예의 무던한 표정으로 다음 대회까지 돕겠노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래도 한철은 그 무기질 같은 낯 앞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 부단한 노력은 성하와를 배구부 정규 연습에 합류시키는 데에 이르렀다. 거절을 무릅쓰고 매달린 결과였다.
한철은 그 과정에서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첫째로 성하와는 그리 모진 인간이 아니라는 것.
대개 모진 이들은 곤두서 있었다. 얕은 물에 바람이 불면 파랑이 일 듯 심사가 들끓었다. 사납고 드세다면 그런 식이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성하와는 풍랑과는 거리가 멀었다. 쉽게 들끓기는커녕 매사에 가라앉아 흥분하는 일도 드물었다. 나이스 토스니 신이 내린 세터니 치켜세워도 올라갈 줄 모르는 입꼬리를 보며 한철은 생각했다. 전교에 떠도는 성하와에 대한 소문은 수정될 필요가 있었다.
그 잠잠한 부동不動에도 불구하고 성하와는 정말로, 그야말로, 천재 같았다. 그것이 정한철이 성하와에 대해 알게 된 두 번째 사실이다.
한철은 하와를 기억하고 있던 체육교사의 안목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성하와는 어떤 공도 놓치는 법이 없었다. 연습 게임에서 보여줬던 리시브도 단순한 행운은 아닌 것 같았다. 성하와가 올린 토스는 늘 정확하게 팀원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어수선한 랠리 속에서도 그 궤적에 흔들림이 없는 것을 보면 고저 없는 성미가 경기에 도움이 되는지도 몰랐다.
어느 모로 보아도 한 경기 후에 이별하기에는 넘치도록 좋은 선수였다. 교육청 대회가 가까워졌을 즈음 한철은 하와가 함께하는 경기를 자주 상상했고, 번번이 아쉬웠다.
속내가 샌 것은 대회를 한 주 앞둔 오후였다. 하와는 체육관에 굴러다니는 배구공을 모으고 있었다. 한철은 하와가 모은 공을 랙카트에 옮겨 담으며 말했다.
‘다음 대회까지 같이 하면 좋을 텐데.’
‘안 해.’
조심스러웠던 서두가 무색하게 하와는 대꾸했다. 표정에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한철은 기어이 소리 내어 탄식했다.
‘왜? 재미있지 않아?’
‘별로.’
‘그렇게 잘 하는데도?’
‘잘 한다고 재미있으라는 법은 없지.’
‘음. 그건 그렇지만.’
하와가 고개를 들었다. 풀죽은 목소리를 연민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순순한 수긍이 의외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비스듬히 올라가는 시선 끝에 한철이 있었다.
‘못한다고 재미없지도 않으니까. 우리 원래 되게 못해도 되게 재미있었거든.’
‘…그래 보이긴 하더라.’
하와는 품에 남은 공을 직접 랙카트 안으로 쏟아 넣었다. 배구공이 철제 카트에 부딪힐 때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한철이 그 사이로 웃었다. 하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에두른 혹평에도 웃어 보이는 천진함을 부러 해칠 마음은 없었다.
한철의 이야기는 조금 더 이어졌다.
‘학기 초에는 서브도 못하는 애들이 많았어. 규칙도 헷갈려서 제대로 된 연습 게임도 못했고. 그래도 다들 재미있게 해줬지.’
그러다 소년의 목소리가 문득 멈췄다. 그가 미간을 모은 채로 한참 가만한 것을 하와는 보지 못했다. 하와는 카트의 덮개를 닫고 자물쇠를 걸었다.
‘그런데, 너랑 있으니까 좀 더 잘하고 싶어.’
손끝에서 녹슨 열쇠가 돌아갔다. 잠금쇠 걸리는 소리와 함께 늦은 방과후의 소란도 함께 잦아들었다.
만춘의 해는 느리게 기울었다. 오래도록 데워진 공기에서는 봄볕의 냄새가 났다. 한철은 숨을 들이쉬었다. 폐부가 간질거리는 것은 바라는 바가 많은 탓일지도 몰랐다.
성하와는 그의 어깨가 오르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언젠가 들었던 물소리가 어렴풋이 귓전을 맴돌았다.
교육청 대회를 앞둔 한철은 전에 없이 단호하게 승리를 장담했다. 무릎을 모아 끌어안고 이야기를 듣던 1학년들은 그 보장을 만용으로 여기는 듯 했다. 한철은 그들을 설득하는 대신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한철의 자신은 헛되지 않았다. 마침내 찾아온 교육청 대회에서 한휘고등학교 배구부는 훌륭한 성적으로 예선을 통과했다. 첫 번째 세트를 아쉽게 내어주기야 하였으나 두 번째 세트부터는 비교가 무색한 수준의 낙승이었다.
성하와는 승리의 주역이었다. 처음 마주치는 공식전에 겁을 먹은 팀원들도 익숙한 토스의 궤적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하와의 공은 언제나 그랬듯 흔들리지 않았다. 무엇에도 기뻐하지 않으므로 무엇도 겁내지 않는 서늘한 평온. 휘청이는 팀을 소리없이 다잡으며 성하와는 제 몫의 이상을 다했다.
그리고 정한철은 약속을 지켰다. 그는 정말로 그 곳에 있었다. 사인이 없어도, 목청껏 부르지 않아도.
한철의 스파이크가 네트를 넘어갈 때면 하와는 중간고사가 끝난 날의 체육관을 떠올렸다. 그 날은 공을 받아낸 뒤 넘어지는 바람에 한철이 뛰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가 어떤 식으로 뛰어오르는지 볼 수 있었던 것은 정규 연습에 합류하고도 꽤 시간이 지난 뒤였다. 네트에서 삼 미터, 코트를 가로지르는 어택 라인. 흰 색 테이프 선 너머에서 정한철은 코트 위의 누구보다 더 높이 뛰어올랐다. 날개도 없는 몸으로, 중력 같은 것은 알지도 못한다는 듯이.
승리를 확정짓는 마지막 점수는 하와가 직접 만들었다. 그래봐야 하와의 서브를 받아내던 리베로가 넘어져 엉겁결에 얻은 범실이었지만, 스코어보드가 넘어가자 모든 팀원들이 동시에 하와를 향해 달려왔다. 땀에 젖은 얼굴들이 미끈거리며 부대끼는 중에 정한철의 머리는 다른 정수리들의 한 뼘 위에 있었다. 하와는 그 환히 웃는 낯과 눈이 마주쳤다.
우스운 경기였다. 전국의 배구부가 모두 출전하는 전국 대회의 수준에는 비할 바도 되지 못했다. 상대 팀은 우왕좌왕했고 같은 팀이 범한 터무니없는 실수도 많았다. 그런데도 너는 고작 한 점을 위해 새처럼 뛰어오르고 한 번의 승리에도 여름날 부서지는 물방울처럼 웃는다. 무엇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나. 성하와는 알지 못한다. 그는 알 수 없는 것과 마주 보고 있었다.
어쩌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끌렸는지도 모른다. 모든 미지에는 인력이 있었다.
개중에서 각별히 눈부신 어떤 것.
익숙하게 단조로운 세계에 물빛으로 금이 갔다. 깨진 자리 너머에서 정한철이 손을 펼쳐보였다.
하와는 그 손금을 바라보다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피 도는 살은 맞닿을 때 짧게 따뜻했다.
교육청 대회의 본선에 진출한 뒤로는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이 번갈아 들려왔다. 나쁜 소식은 부상으로 이탈한 세터가 전국대회 예선까지도 복귀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깁스는 다음 달이면 풀 수 있으나 배구 정도의 운동을 하기까지는 그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쁜 소식이 체육교사의 입을 통해 암담한 선고처럼 내려온 것과 달리 좋은 소식은 소리없이 찾아왔다. 그것은 계절을 바꾸는 바람처럼 연약하고 조심스러웠다.
성하와가 떠나지 않았다. 성하와는 예선을 마친 다음날에도 체육관에서 1학년의 리시브 연습을 도와주고 있었다. 한철이 전임 세터의 소식을 전할 때에도 성하와는 2학년 무리의 뒤편에서 어깨를 늘어뜨린 채로 서 있었다.
‘안됐네.’
소식을 들은 성하와는 짧게 말했다. 연민이라기에는 건조한 투였다. 그보다는 이야기 내내 자신을 흘긋거리던 시선들을 눈치 챈 편에 가까웠다. 이어지는 짧은 적막에 리시브를 연습하던 1학년이 공을 끌어안은 채로 숨을 죽였다.
‘그래서 말인데….’
‘응.’
정적은 한철이 나선 뒤에야 끝이 났다.
‘다음 대회까지 같이 나가줄 수 있어? 정식으로 입부해서.’
네가 올려준 공은 뭐든 때릴게. 어디로 가도, 어떻게 올려줘도 전부 때려줄게. 점수를 가져다줄게. 이기게 해줄게.
약속은 어렵지 않았다. 한철은 하와를 붙잡아두기 위해서라면 백 마디 약속을 할 수도 있었다. 그 약속을 모두 지킬 수도 있었다. 승리의 잔열에 겨워 꾸는 헛꿈이라도 좋았다.
그러나 한철이 그 모든 약속을 다시 늘어놓는 일은 없었다. 하와는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러지, 뭐.’
한철은 잠시 대답을 잊었다. 그가 멈춰있는 사이 비명 같은 환호가 귓전을 먼저 때렸다. 부원 두 명이 호들갑스레 하와의 손을 붙잡았다. 그 아이들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개중에는 첫 연습게임을 함께 했던 여학생도 있었다. 하와는 그들과 함께 울거나 웃지 않았다. 늘 그러했듯 몹시도 고요한 얼굴이었다.
일학년들이 하와를 붙잡고 수선을 떠는 동안 하와는 한철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한철은 잔뜩 놀란 표정이었다. 얼빠진 얼굴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성하와가 이날의 일을 다시 말하지 않았으므로 정한철은 영영 알 수 없는 일이다.
교육청 대회의 끝에서 한휘고등학교 배구부는 준우승 상패를 들어올렸다. 본선 진출조차 간신히 욕심냈던 팀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성과였다. 그 다음 주 학교의 방송조회에서는 임시 주장직을 맡은 정한철이 대표로 나가 상장을 받아왔다. 교문에는 시상식에서 찍은 사진이 박힌 현수막이 걸렸다. 체육복 차림의 한철과 하와가 그 안에서 상패를 함께 받쳐 들고 있었다.
그 사진 속에서도 성하와는 웃고 있지 않았다. 한철은 교문 앞의 언덕길을 오를 때면 사진 속 성하와의 얼굴 위로 드리운 현수막 주름의 그늘을 유심히 바라보곤 했다. 얕고 완만하고 희미한 호선. 성하와가 웃는다면 비슷한 모양일까.
한철은 하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한 계절의 시간이 모자랐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한철은 하와를 수도 없이 치켜세웠다. 나이스 서브니 나이스 리시브니 쏟아부은 칭찬이 넘친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무엇이든 성하와는 가질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도 한 번도 웃지 않았다. 그 차분한 입매를 돌에 쪼아놓기라도 한 듯이.
‘성하와가 너 같은 타입은 아니지. 스포츠맨도 아니고.’
언젠가 배구부의 또 다른 2학년이 말했다. 리시브가 나쁘지 않아 하와에게도 공을 자주 올리는 선수였다.
‘운동도 딱히 안 좋아하는 것 같던데.’
말 사이에 엮인 희미한 위로를 한철은 읽을 수 있었다. 성하와는 스포츠맨이 아니다. 성하와는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코트 위에서 그 아이가 기뻐하지 않는 것 또한 정한철의 잘못이 아니라고.
한철은 그 말이 이상하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성하와는 언제나 배구 코트 위에 있었고, 함께 경기를 했다. 어느 날은 스포츠용 안대를 새로 끼고 왔다. 연유를 물어보는 질문에는 ‘다칠까봐’라며 네 글자로 일축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상처 같은 것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처럼 코트 위를 누볐다. 한철은 그런 하와를 볼 때면 기뻤다. 경기나 승부의 희열과는 다른 종류의 환희가 혈관을 타고 온 몸을 내달렸다. 한철은 그 모든 찰나를 기억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널 수 없는 금 같은 것이 성하와를 에워싸고 있다면, 이상한 일이었다.
한철은 하와와 같은 곳에 있고 싶었다. 성하와가 함께 있으면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언제든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제나 기뻤다.
때로 정한철은 배구공의 딤플을 더듬으며 기도하듯 다짐했다.
그러니 그도 누군가를 기쁘게 만들도록 해달라고.
“네트 터치!”
휘슬 소리가 비명처럼 찢어졌다. 힘을 잃은 공이 체육관의 마룻바닥을 맥없이 치고 가는 소리가 들렸다. 네트의 그물눈 너머로 송찬고의 선수 서넛이 하이파이브를 주고받고 있었다.
한철은 꿈에서 깨어나듯 고개를 들었다. 더운 뺨에 에어컨의 바람이 불현듯 선득했다.
백제배 전국 고교 배구대회 서울 지역 예선 3차전, 한휘고 대 송찬고. 스코어는 22:23.
심판이 네트를 향해 팔을 뻗었다. 한철의 범실이었다. 상대의 스파이크를 블로킹하는 과정에서 어깨가 네트에 닿았다.
스코어보드가 넘어갔다. 22:24.
전국 대회 본선을 향한 마지막 경기. 이 자리에 오기까지 한 경기를 이기고 한 경기를 졌다. 그야말로 간신히 도달한 3차전이었다. 2차전의 패인도 하루에 두 경기를 치르면서 드러난 체력 부족이었으니 3차전이 이튿날에 배치되지 않았다면 싸워보지도 못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정규 출전 인원을 가까스로 채운 팀으로 전국 대회에 출사표를 던진 것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어쩌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무용담이 될 것이다. 오래도록 곱씹기에도 모자라지 않았다.
그래도 이기고 싶었다. 먼별을 향해 함부로 손을 뻗는 철부지의 욕심이더라도.
이기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냉혹한 회의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은 엉터리 팀과 함께 수없이 패배하며 저버린 지 오래였다. 이기지 않아도 괜찮던 시절이 있었다. 공이 튀어오르는 천장을 향해 눈을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도 즐겁던 시간이었다. 그 때는 이기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늦봄의 어느 오후를 기점으로 달라졌다. 정한철은 간절히, 열렬히, 이기고 싶었다. 지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곁에 있었다. 눈부시게 우수하면서도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고 무엇에도 기뻐하지 않는 사람. 그런 주제에 가장 먼저 체육관에 도착해서 가장 마지막으로 체육관의 문을 닫던 사람.
네가 더 큰 상을 받았으면 좋겠다.
네게 더 많은 것들을 보여주고 싶다. 너를 더 높은 곳으로 데려가고 싶다. 오래도록 꿈꿔온 그 고지가 눈부시다는 것을 너에게도 알려주고 싶다. 네가 그것을 좋아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너를 기쁘게 했으면, 네가 그것에 가슴이 뛰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너도 한번쯤 웃어줄지도 모른다.
“정한철!”
망연한 의식 사이로 누군가 한철의 이름을 불렀다. 눈가에 미끄러지는 땀을 닦아내고 나니 눈앞에 성하와가 있었다.
“미안해. 내 실수야. 내려오면서 네트를 못 봤어.”
“괜찮아.”
“거의 다 따라왔다고 생각했는데. 미안해….”
사그라진 어미 뒤로 한철은 말을 잇지 않았다. 박수소리도 기합도 없었다. 숙인 고개를 따라 쏟아진 곱슬머리 끝에 구슬땀이 맺힌 것을 성하와는 보았다. 그 땀방울이 바닥에 떨어져서 희미한 자국이 남을 때까지 한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한철.”
하와는 불렀다. 한철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목소리가 작았나. 아니면 응원 소리가 요란한가. 하와는 잠시 가늠했다. 그러나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두 손을 들었다.
─짝! 두 손이 있는 힘껏 양 뺨에 가닿을 때는 사뭇 경쾌한 소리가 났다. 한철은 훗날 제가 기어이 따귀를 맞은 줄 알았다고 회상했지만. 적절한 통증은 갈피 잃은 정신을 제자리에 돌려놓기 좋았다. 한철은 그제야 눈을 깜빡였다. 내려다본 자리에 여전히 성하와가 있었다. 얼얼한 뺨에 닿은 손이 조금 따뜻했다. 지역 대회를 마치고 부딪쳤던 손바닥도 오늘처럼 따뜻했던 것 같았다.
“정신 차려. 괜찮다고 했잖아.”
“…정말?”
“정말.”
기대 울기에 그 손은 너무 작았다. 손가락도 손목도 희고 가늘었다. 기실 성하와의 모든 뼈마디가 그랬다. 성하와가 얼마나 민첩하고 얼마나 매서운지 알면서도 한철은 때로 두려웠다. 석고 인형 같은 여자애가 어느 날 영영 부서져 버릴까봐.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 그 손은 무척이나 용감하고, 또 종종 놀랄 만큼 다정해서, 무심코 뺨을 기대어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나 이기고 싶어. 내가 약속도 했잖아. 이기게 해주겠다고….”
하와의 엄지가 한철의 눈밑에 닿았다. 하와는 그 얇은 살갗을 조금 쓸어보았다. 맺힌 땀에 손끝이 미끄러졌으나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하와는 그보다 자신의 손길이 참을 수 없이 어색하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를 바랐다.
서툰 위로는 성하와의 잘못이 아니다. 다만 정한철의 낙담이 성하와에게 낯선 탓이다. 한철은 언제나 하와에게 난제였다. 하와는 그 문제를 풀기 위해 이곳에 있었다. 적용할 만한 공식도 단서가 될 만한 단어도 성하와는 알지 못했으나, 잠긴 문 너머에서는 늘 물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맞닿은 살갗 너머에서 맥박이 뛰었다. 정한철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박자 너머에 다른 박자가 불투명하게 겹쳐 있었다. 하와가 그 맥동의 주인을 찾기까지는 잠시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성하와는 깨닫는다. 손이 따스한 것은 피가 흐르기 때문이라는 것. 그 너머에서 심장이 뛰어 피를 실어 나르기 때문이라는 것. 갈비뼈 아래에서 생이 요동치고 있다는 것.
설사 잊어버리더라도, 알거나 믿지 못하더라도, 목숨의 자취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돌연 목구멍 아래에서 무언가가 치받았다. 뛰는 심장에서 무언가가 솟구쳐 목구멍에 걸린 것만 같았다. 낯선 충동이 혀뿌리 뒤에서 맴돌았다.
하와는 그것을 뱉어냈다.
“나도 이기고 싶어.”
이기고 싶다.
너와 같은 편에 서고 싶다. 너를 더 오래 보고 싶다.
“정말.”
네가 뛰어오르는 모습이 좋으니까.
하와는 한철의 눈이 커다랗게 뜨이는 것을 보았다. 그 눈동자에 익숙한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검은 머리가 땀에 젖어 헝클어진, 안대를 낀 여자아이.
“…정말?”
“그러니까 똑바로 해.”
다시 한 번 휘슬이 울렸다. 경기 재개 신호였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뺨 위에서 손이 떠났다. 성하와도 등을 돌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 아이가 유니폼을 입은 모습이 더는 낯설지 않다. 우습게도.
송찬고와의 예선 3차전은 2:3의 세트 스코어로 마무리되었다.
한휘고는 분전했다. 3세트의 말엽, 네트 범실 이후 필사적으로 거듭된 듀스는 예선전을 통틀어 보아도 손꼽을 만한 명장면이었다. 그 뒤로도 기록할 만한 찰나가 많았다. 카메라의 셔터 소리도 드물지 않게 쏟아졌다. 다섯 번째 세트를 기어이 내준 뒤에도 한휘고는 박수를 받을 만한 패자였다.
물론 규칙은 고결함의 여부는 척도로 두지 않았다. 본선의 대진표 끄트머리에 송찬고의 교표가 걸렸다. 그들은 대진표의 가장 높은 곳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휘고등학교 배구부는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예선에서 탈락한 팀에게는 어떤 상패나 트로피도 돌아가지 않았다. 서울 곳곳에서 온 아이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기 면구했는지 기념 자수가 박힌 스포츠 타월 한 장과 물병, 여행용 세면도구 세트가 주어졌다. 하나같이 어딘가 궁색한 구석이 있었다. 체육관에 모였던 누구도 기념품 따위를 바라지 않았던 탓이다.
체육관의 후문은 한산했다. 선수들을 기다리던 학부형들도 대개 정문의 주차장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한적한 아스팔트 공터에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떠돌고 있었다. 하와는 물웅덩이에 동그란 자국이 퍼져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일렁이는 수면 위로 가느다란 햇살이 떠다니고 있었다.
한철은 성하와의 가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을 골라내기는 여간 어렵지 않았다.
“…미안해.”
“네가 왜.”
애써 내뱉은 말을 단숨에 일축하는 것은 성하와의 특기였다. 한철은 소리 내 앓았다.
“이기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잖아.”
하와는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에 유독 숫기가 모자라다고 여겨지는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한철은 웃어 보이려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철의 입매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제와 더 애를 쓰기에도 체력이 모자랐다. 하와는 그 풀죽은 낯에서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
“안 괜찮은데….”
한철은 말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성하와는 마땅히 공들여 감사받아야 했다. 그리고 한철에게는 그 감사를 전할 책임이 있었다. 기왕이면 판촉용 세면도구 세트보다 더 아름다운 방식으로. 한철은 그에 어울리는 문장을 찾아내기 위해 다시 골몰했다. 열량을 모두 소진한 탓에 머리마저 그의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 중에도 한철은 노력했다.
그러나 성하와는 이번에도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
“다음에 이기자.”
“뭐?”
한철은 잠시 자신이 기억하는 단어의 의미를 되짚었다. 일순간 알고 있는 모든 단어를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성하와의 얼굴을 바라보았으나 그 낯은 한결같았다. 왼쪽 눈가에 언뜻 남아있는 안대 자국만 빼면.
하와는 선 채로 잠시 묵묵했다. 그 또한 자신이 말한 단어에 대해 생각중이라는 사실을 한철은 알지 못했다.
다음에.
이 다음번에.
그 말을 몇 차례 입에서 굴려본 뒤에, 하와는 다시 말했다.
“다음에는 진짜.”
“진짜?”
“어.”
“진짜!”
한철의 말은 외침인지, 혹은 물음인지 분명치 않았으므로 하와는 대답하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포털의 지도에 따르면 돌아가는 버스가 정류장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서두르는 걸음 뒤를 한철이 큰 보폭으로 뒤따랐다. 하와는 올려다보지 않았으나 한철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낙담보다는 그 편이 한철에게 더 잘 어울렸다. 그 웃는 낯을 상상하는 것은 쉬웠다. 성하와는 그 표정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 앞으로도 숱하게 볼 것이다. 정한철은 쉽게 웃으니까.
다음에도, 또 그 다음에도.
곱씹는 말은 아주 강한 탄산처럼 따끔거렸고, 낯선 냄새가 났다.
오지 않은 계절의 이름 모를 향이었다.
- 카테고리
- #기타
해당 포스트는 댓글이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