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변화무쌍함
누리님 1천자
바이올리니스트?
고개를 든다. 환부에 붕대를 갈아주던 여자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는다. 손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바이올린을 하는 사람들 손이 대개 그렇거든요. 봐봐, 활을 잡는 쪽에 굳은 살이 있고…… 여자가 지크의 얼굴을 감싸 올린다. 목이 드러날 때 지크는 취약한 급소 부분이 노출된 것에 대한 본능적인 껄끄러움을 느낀다. 여자가 속삭인다. 여기도. 그가 흔히 바이올린을 괼 때 쓰는 턱 부분을 내려다보며 파안대소한다. 지크는 입을 다문다. 그는 바흐를 떠올린다. 바흐의 대위법과 아름다움, 조화를 위시한 그의 독보적인 작풍. 눈앞의 여자는 전쟁 같은 것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흰 두건을 머리에 쓰고 피에 얼룩진 앞치마를 맸어도 마찬가지다. M1 카빈의 잔혹함과 전차의 요란한 바퀴 소리, F1 수류탄의 파괴성과 동떨어진 세계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부자연스럽지 않고 지극히 매끄럽게 환경에 융화된다. 피로 흥건한 그의 두 손이 나의 잘려나가다 만 발목을 움켜잡고 모르핀을 투여한다. 지사제를 흩뿌릴 때 나는 일순 격통을 느끼지만 고통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것의 방증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나는 어쩌면 생사를 넘나드는 이런 아찔함을 선망했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삶에 양감을 더해주는 고통, 이루 말할 수 없는 경험의 부피와 삶의 흉터가 내게 안겨주는 절실함, 고독함……
여자는 자신을 스칼렛이라고 소개한다. 사회에서의 직업은 뮤지컬 배우다. 아늑하고 안전한 공연장을 저버리고 어쩌다가 간호사 일을 하게 되었냐는 나의 질문에 스칼렛은 쾌활하게 웃는다. 나는 아차 싶다. 나나 그의 처지가 별다를 것 없음을 한 템포 늦게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나는 얼굴이 조금 익은 채로 그에게 해명한다. 바이올린이 슬슬 질렸기 때문이라고 토로한다. 스칼렛은 자신은 무대가 한 번도 질렸던 적이 없다고 답한다. 그러나 삶을 모르는 채로 그것을 흉내내기만 하는 것은 다소 부당하게 느껴졌다고…… 나는 그를 이해한다.
전장으로 다시 떠나기 전, 나는 스칼렛을 붙들고 그의 연락처를 묻는다. 또 그가 알아두어야 할 것이, 나는 당장 내일이라도 모가지가 잘려 연락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몸이라고 말한다. 스칼렛은 목숨이 간당간당한 와중에 사랑이 하고 싶냐고 묻는다. 나는 그렇다고 말한다. 사랑을 위해 죽겠다고 말하는 뭇 프랑스 병사들 같은 비장함은 없어도, 죽기 전에 당신 연락처는 알아둬야 천국에 잘 찾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스칼렛은 극적으로 웃고, 내게 번호와 주소를 넘겨준다. 이틀 후, 병동은 폭격을 맞아 스칼렛은 다시는 무대에 설 수 없게 된다. 물론 목숨은 건졌다. 뭐, 그런 거지.*
*커트 보니것, 제5도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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