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희미해진 심장으로


1

외로움의 근원은 빌어먹을 자기연민이리라. 혹자들은 외로움이 이기적 유전자에 의한 번식 욕구가 기원이라 말하지만, 메마른 이과충 사고방식을 집어치운다면 이건 분명 자기연민이 맞았다. 혼자 있는 자신의 모습이 궁상맞아 보이고 불쌍해 견딜 수 없어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이건 과학적 접근보다 사회학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연준은 생각했다.

사람들은 더불어 살아간다. 그를 위해 인류 보편적으로 짝을 만들고 결혼을 한다. 결혼을 하려면 전 단계인 연애를 하는 게 필수 불가결이다. 아름다운 한 쌍의 남녀가 되기 위해 혼자 지내는 건 미덕이 아니다. 적어도 소개해줄 친구라도 있고 그래야 한다. 서로 돕고 사는 다정다감한 세상. 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혼자 있는 사람에게 꼭 이렇게 말을 얹는다. 혼자 있으면 외로워서 어떡해?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혼자 있을 때 조금이라도 우울한 감정이 치밀면 이렇게 정의하는 거다. 아, 나 외롭나보다!

연준은 오랫동안 혼자였다. 노인과 바다의 노인처럼 엄청나게 오래 혼자였던 건 아니고, 한 몇 개월 됐다. 언제부터냐면, 21C, 지구촌 사람들이 코로나 펜데믹에 허우적댈 때부터다.

작년 초, 마침내 전 세계적으로 백신 투여가 시작됐다. 곧 마스크도 벗고 여행도 할 수 있을줄 알았다. 펜데믹 직후 각종 음모론과 공포에 시달리던 분위기도 많이 완화되었다. 혼자만 좆같았으면 억울했을 텐데 죄다 좆같아지니 다들 익숙해져서 낙관적인 태도가 되었을 때, 코로나와 상관 없는 또 다른 바이러스의 변종이 발생한다.

새로운 바이러스의 탄생 사유는 일반인인 연준으로선 모를 일이었다. 과학자들이 말하길 유전자 조작 약물 실험의 변이가 제일 유력하다 했다. 그딴 게 하등 중요한가? 멸종 직전 공룡 입장에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돌덩이가 무슨 소행성인지 혜성인지 알게 뭐냐 싶은 거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운석을 바라보는 티라노사우루스 내지는 트리케라톱스가 되어버린 인류는 바이러스가 동족을 괴물로 만드는 걸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1978년산 이탈리아 영화에서 어원을 딴 그 ‘좀비’였다.

대한민국이라는 게 멀쩡히 존재했을 시절 연준은 패션디자인과 대학생이었다. 이건 문과도 아니고 이과도 아니고. 수험생 시절을 돌이키면 문과 쪽이었지만, 그렇다고 막 본격적인 예체능이라 하기도 뭐하고…. 그래서 외로움의 근원에 대한 학문적 논의는 불가하다만, 좀비 사태 이후 의도치 않게 밥을 굶어 그토록 바라던 58킬로그램 모델 체형은 가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연준은 패션디자인보다 멋들어진 옷걸이가 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비단 연준 뿐이 아니긴 했다. 다른 학우들도 옷을 잘 입기 위해 혈안이었다. 별의별 이상한 놈 다 있는 과에서 181.5㎝에―쩜오 절대 빼면 안됨. 반올림해서 182― 늘씬한 체형을 가진다면 꽤 경쟁력이 생길 일이었다. 은연중에 패션모델에 대한 욕심도 생겼다.

그러나 불행히도 연준은 잘 먹었다. 프로아나급 깡마른 모델들을 보며 연준은 제 워너비를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옷 입는 데에 관심이 많고 우연히 고등학교 때 키가 급격히 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모델 체형을 꿈 꾸기엔 연준은 음식을 너무 좋아했다.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한테 어쩜 그리 잘 먹니? 소리를 들으며 커왔던 거다. 그러고 보면 먹는 거로 칭찬을 많이 들었지 모델 같단 소리는 못 들어봤으니 애당초 목표 설정을 잘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보통 안정직―공무원, 사짜 직업 등―과 자기가 하고 싶은 일―프로게이머, 작가 등―의 기로에 놓인 친구들과 다른 선택지에 놓였던 거다. 모델이냐, 먹방유튜버냐. 일단 둘 다 하고 싶은 일이긴 했다. 너무 깊은 고민은 타자에 의한 선택을 갈구하게 된다. 연준의 고민은 아주 고맙게도 세계 멸망이 해결해줬다. 그리하여 양자택일 중 제 3의 선택지, 좀비 세계 생존자라는 훌륭한 직업을 얻게 되었다.

물론 이걸 세계 멸망이라 칭하기엔 어폐가 있다. 연준은 가끔 도로를 거니는 칡이나―칡은 거닐 수 없다. 사실 칡이 아니라 삵이다. 연준은 이를 고쳐줄 이가 없어 삵을 항상 칡이라 불렀다. 게다가 개 중엔 삵이 아니라 고양이도 있었다.― 들개 따위를 보며 이 한반도 땅이 원래는 호랑이도 살던 곳이라는 걸 실감했다. 짐승들은 인간이 사라진 곳에서 약육강식의 법칙에 의거해 잘 먹고 잘 자고 잘 쌌다. 그러니 이건 세계의 멸망이라기보다는 인류 문명의 멸망이었다.

그런 연유로, 사람을 못 본 지 세 달 정도 되었다. 아니, 더 되었나? 어느 새부턴가 날짜를 잊으니 시간 감각도 더뎌졌다. 아는 건 지금이 봄이라는 것 정도. 얼마 전까지 겨울이었기 때문이다. 혹한기를 버티고 생존한 사람들은 날이 따뜻해지는 걸 기점으로 한반도를 떠났다. 북한을 지나 러시아로 나간다고 했다. 한국과 달리 제대로 기능하는 정부나 아직 살아있는 국제구호단체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연준도 러시아로 올라가는 한 그룹에 합류했었다. 부모를 잃은 연준을 거두어준 젊은 부부 덕분이었다. 부부는 연준과 열 살 차이 밖에 나지 않았다. 아이를 가지려 노력했으나 남편 되는 사람이 불임이라 의도치 않게 딩크족으로 살았다고. 세상이 이런 형편이 되니 아이가 없는 게 나은 거 같다며 삼키기 쓴 농담을 던지곤 했다. 네가 우리 아들 할래? 부부의 장난스러운 말에 연준은 형, 누나 하며 장난으로 맞대응했었다. 그날 밤, 좀비 떼의 습격을 받아 연준은 그룹의 사람들을 모두 잃었다. 이후 연준은 러시아로 나가는 걸 포기했다.

가봤자 뭐 다르겠나. 가족을 잃고 친구를 잃고 새로 만난 사람들도 잃고. 그런 일의 반복일 뿐이라는 비관에 사로잡혔다. 연준이 뭘 잘해서 혼자만 살아남은 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좀비가 되거나 죽음을 맞이할 때 연준 혼자 멀쩡했다. 좀비들은 연준에게 관심이 없었다. 마치 썩은 고기를 보는 것처럼 대했다. 가끔 포악한 녀석들이 있긴 했다. 녀석들은 연준을 한 번 물곤 흥미를 잃고 사라졌다. 상처는 남았다. 그래도 트로피 마냥 잇자국이 몸에 새겨졌음에도 어리둥절하게 살아남은 거다. 물려도 좀비화가 진행되지 않았다. 아마 좀비 사태가 일어난 직후 정부에서 애타게 찾던 면역인, 뭐 그런 것인 모양이었다. 목숨을 걸고 행한 모든 일이 그만큼 노력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허탈했다.

러시아로 올라가는 길을 포기하면서 연준은 다시 서울로 내려왔다. 좀비사태 초기에 언뜻 부산에 임시정부를 겸하는 큰 쉘터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연준의 새로운 목적지는 부산으로 정해졌다. 정확한 정보는 아니었으나 목적지가 없는 것보단 나았다.

퍼억. 맑은 하늘 아래 둔탁한 타격음이 울린다. 연준이 들고 있던 부지깽이로 SUV 문짝을 부수는 소리다. 도난 경보음이 시끄럽게 울리자 주변 몇 좀비들이 대번 관심을 보였다가 다시 허공을 본다. 빵빵대는 소리에 아무런 염증도 느끼지 못하는 연준은 차 안으로 들어선다. 역한 냄새가 났다. 좀비에게서 나는 냄새와 또 다른 냄새. 운전석에 여자 시체 하나가 썩고 있었다. 몸이 성하다. 이 사태가 나고 차마 밖에 나오지 못해 아사한 지 오래된 모양이었다. 연준이 헛구역질하다 입을 틀어막았다. 이제 좀비는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은데 사람 시체를 보는 게 더 힘들었다.

최대한 눈길을 주지 않으려 애쓰며 조수석에 있던 가방을 뒤졌다. 지갑에 현금 오만원짜리와 천 원짜리 지폐도 몇 장 있었다. 안타깝게도 좀비 세상에선 하등 쓸모없는 것이었으므로 연준의 마음을 뒤흔든 건 돈이 아니라 커플 사진이었다. 이름 모를 남녀가 유채꽃밭을 배경으로 웃고 있다. 연준은 굳이 그 사진을 유심히 보면서 여성의 불행에 기름을 부었다. 둘 다 평범한 외모인데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연준이 무심코 운전석의 여자를 본다. 안 보려 애쓴다 한들 생전 모습을 본 이상 이 얼굴이 어찌 변했는지 확인하고픈 건 불가항력이다. 살이 다 내려앉아 가죽 밖에 남지 않은, 홀로 남아 초라한 모습. 이런 최후 앞에 이전의 가치관은 하나도 소용없는 거다. 혼자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엔 외로웠겠지. 시체에 시선을 둔 채 사진을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자세히 보니 여자는 손에 휴대폰을 쥐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남자친구와, 사람들과 연락했을까.

연준은 이전의 가치관은 하나도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가 부러워졌다. 커플인 점, 사랑하는 사람과 죽음을 함께 했다는 점, 쉐보레 차주라는 점, 기타 등등. 

연준이 배낭을 고쳐매며 차에서 나왔다. 먹을 걸 기대했지만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미적지근한 봄바람이 연준의 얼굴을 적신다. 멀리서 물내음이 났다. 도로 표지판에 마포대교 방면이라고 쓰여 있다. 존나 오래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마포구였다. 하긴 러시아로 넘어가기 위해 북한을 향하다 다시 내려가고 있는 처사이니 이 정도 온 것도 기특하다 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제 경기도 지나서 대충 여주, 충주…. 아찔하다. 앞선 걱정에 쉬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빨리 강을 찾아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씻지 못한지 꽤 된 것이다.

마포대교를 건너 여의도한강공원 쪽으로 내려오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사람의 손길을 받지 않은 거리에 피어난 꽃은 장관이었다. 하늘에 날리는 벚꽃잎에 시선을 박고 걷던 연준은 그제야 지금이 벚꽃 축제를 하는 4월초쯤이 아닐까 생각했다.

강가에 몸을 씻어내고 나니 날이 어두워졌다. 전기가 다 끊겼기 때문에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마저 움직여야 했다. 밤을 지샐 곳을 찾기 위해 한참 공원을 기웃거렸다. 작은 매점 하나가 있었다. 컨테이너로 된 매점. 자물쇠가 걸려있는 문에 열려는 시도가 보였다. 연준은 작게 환호했다. 보통 이런 곳이 노다지였다. 서울은 다른 도시에 비해 빠르게 좀비사태가 진행되어 오히려 수습되지 못한 건물이 많았다. 연준이 부지깽이를 들어 자물쇠를 세게 내리쳤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자물쇠가 나가떨어졌다. 아무리 살이 죄 내렸어도 나름 힘 좋단 소리 듣고 살던 인물이었다. 부지깽이를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얇은 반팔이 나시가 되도록 걷어내며 안으로 들어섰다.

짐짓 역한 냄새가 났으나 익숙했다. 좀비 냄새다. 일반 시체와 다르게 하수구 냄새에 콧잔등을 싸하게 긁어내리는 톡톡 쏘는 풍취가 났다. 4평 남짓의 컨테이너 매점 안은 선반과 물건들로 가득했다. 그 구석에 어린 좀비를 안은 채 널브러진 몸집이 큰 좀비가 하나 보였다. 커다란 좀비 하나가 몸을 일으키며 울음을 내질렀다. 연준에게 덤벼들듯 하다 곧 잠잠해진다. 쫄아서 가드부터 올렸던 연준이 눈치를 보며 손을 내렸다. 부모와 자식인가. 연준은 작게 한숨 쉬며 천천히 안으로 진입했다. 건전지나 라이터 같은 게 그나마 쓸모 있어 보였다. 밴드도 몇 개 챙겼다.

좀비가 있는 안쪽까지 들어섰다. 식료품은 저 둘이 털어먹은 건지 마땅한 게 없었다. 유통기한이 지나 곰팡이가 핀 빵을 지나자 라면 세봉지가 남은 게 보였다. 아싸! 연준이 호들갑 떨며 가방을 열었다. 순간, 좀비가 괴성을 질렀다. 어린 좀비 하나가 연준의 다리에 달라붙었다. 으악! 연준이 놀라 그 작은 것을 가방으로 퍽퍽 쳐대며 발로 마구 밟아댔다. 소란에 뒤쪽에 있던 커다란 좀비도 덤벼들기 시작했다. 기차화통이라도 삶아먹은건지 엔진이 들끓는 소리가 났다. 연준이 놀라 도망쳤다. 제대로 잠기지 않은 가방 안에 있던 잡동사니 몇 개가 굴러나왔다. 컨테이너 밖에 던져주었던 부지깽이를 다급히 잡아들었다. 몸이 기울면서 헛발질을 내디딘다. 순간 팔이 잡히고 팔뚝을 크게 물렸다. 아악! 연준이 괴성을 지르며 부지깽이를 휘둘렀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게 보였다. 좀비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연준이 반사적으로 제 오른팔을 부여잡았다. 씨발, 씨발…! 읊조리는 욕에 공포심이 담겼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튀었다. 

자식을 지키려고 했던 걸까? 모를 일이다. 연준은 이제 좀비 따위에 상소한 서사를 부여하는 게 심적으로 부담스러웠다. 나 하나만 생각해도 살기 벅찼다. 가끔 혼자인 게 지겨워 남 생각 좀 하고 살고 싶었으나 적어도 목숨이 걸린 일에선 이타적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부리나케 달린다. 해가 다 졌다. 막을 내린 공연장처럼 세상이 어두웠다. 공원 바깥으로 나와 다 낡은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녹슨 자전거 몇 개가 나뒹구는 것으로 보니 자전거 대여소로 이용하던 장소인 모양이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은 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부여잡은 팔을 조심스럽게 떼어내자 끈적한 핏물이 묻어난다. 어지러웠다. 가방을 뒤적여 붕대를 찾아 꺼냈다. 신라면을 하나 떨어트렸는지 두 개밖에 없었다. 순간 울컥했다. 라면 하나 떨궈서, 씨발, 라면 하나 떨궈서….

면역이 죽지 않는 불사를 뜻하는 건 아니다. 피가 많이 흐르면 과다출혈로 죽을 수도 있다. 아직 겪은 바는 없으나, 꽤 깊숙이 물린 모양이니 불특정 바이러스의 감염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씨발, 코로나에 걸려 죽을지 뭐로 죽을지 알게 뭐람. 좀비 월드에서 좀비 감염이 아닌 다른 일로 죽는 것도 꽤 기념비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기행에 업적을 매겨주는 스팀 게임처럼 말이다. 다만 현실은 게임이 아니라 그대로 오버 되겠지만. 그것만 아니라면 진작 운명에 목숨을 맡겼을 것이다. 죽는 건 아직 무서웠다.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지더라도 육신은 죽음을 두려워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신경전달물질을 내보냈다. 가엾은 사회적 동물에게 이기적이게도.

연준은 붕대 한쪽을 이로 물었다. 왼손을 이용해 오른 팔뚝을 칭칭 감았다. 붕대 위로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진다. 연준이 목울대를 들썩이며 눈물을 흘렸다. 더럽게 서러웠다. 너무 힘들었다. 이 모든 상황이 좆같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아빠, 두 번째로 생각해서 미안해. 아빠도 보고 싶었다. 중고딩 때 친구들, 같이 다니던 동기들, 별로 안 친한 교수님, 선배들…. 됐다. 아는 사람이 아니라도 좋다. 사실 그 누구든 보고 싶었다. 무서울 때마다 곁을 지켜줄 사람, 낙관에 찬 헛소리든 우울함에 마구 내뱉는 말이든 들어줄 사람, 붕대를 감는데 잡아줄 사람. 그런 최소한의 상냥함을 발휘하더라도 연준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있을 것이다. 피는 멎어가는데 울음이 터진 댐처럼 쏟아진다.

그때, 빛이 있으라.

폐막한 어두운 오페라 하우스에 홀로 뜬 조명처럼 연준의 얼굴에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진다. 극이 끝난 줄 알았던 배우는 난데없는 커튼콜에 어리둥절하다. 누군가 붕대 한 쪽의 끄트머리를 잡아줬다. 이윽고 연준이 잡고 있던 반대편 붕대도 부드러운 손길로 앗아가더니 자연스럽게 매듭을 묶는다. 누군가…, ‘누군가’? 연준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사람이다. 앳된 얼굴의 남자 하나가 환하게 켜진 손전등을 입에 문 채 붕대를 묶어주고 있었다. 역광으로 비친 얼굴은 긴 속눈썹에 빛무리를 남긴 채였다. 매듭을 묶는 순간엔 오로지 붕대에만 집중한 건지 내리깐 눈이 차분하다. 매듭을 두 번 묶어 확실히 고정하고 나서야 눈두덩이 천천히 뜨인다. 아, 내뱉은 짧은 감탄사가 물고 있는 손전등 덕에 뭉개졌다.

“…다 됐어요.”

남자가 손전등을 뱉어내며 말했다.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가 녹아내린 치즈퐁듀처럼 연준의 귀에 끈덕하게 달라붙었다. 사람을 만나면 눈물을 왕창 쏟아내며 감격의 포옹을 할 줄 알았던 연준은 멍하게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찢어질 것 같던 팔의 통증이 언제 그랬냐는 듯 은은하고 아련했다.

잘생겼다. 씨발, 당장 든 생각이 그거였다. 이런 상황에서 고작 이딴 생각이나 하고 앉아있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남자가 살짝 웃는다. 얇은 피부막 덕에 붉게 물들어 있는 아랫눈두덩이 보기 좋게 두툼해졌다. 어색한 웃음이었으나, 연준은 어색함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그가 연준에게 무언가를 건넨다. 언제 놓고 온 지 모를 부지깽이였다.

“조심히 다니세요.”

남자가 손전등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검은 후드집업에 편한 차림새인 남자는 키가 큰지 우뚝 솟아났다. 금방 일어나지 못한 연준이 급한 마음에 네발로 기었다. 

“자, 잠시만요!”

남자가 연준을 내려다본다. 검은 뿌리가 탈색한 머리의 반 이상을 덮은, 다리가 길쭉하고 마른 사내가 저를 애처롭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름이…” 남자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진다. 마치 대답할 가치를 못 느끼겠다는 듯. 그러나 어떤 연민이 담긴 작은 목소리를 낸다. “수빈이요. 최수빈.” 변덕과 같은 짧은 음성. 그러고 금방 다시 돌아선다.

“수빈 씨, 잠깐, 잠깐!”

연준이 가방을 열었다. 목숨을 걸고 챙긴 신라면 두 개가 딸려나왔다. 라면, 연준이 다급하게 말했다.

“라면 먹고 갈래요?”

수빈이 일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연준은 수빈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가방에서 라이터를 꺼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강 물 떠서 라면 끓여 먹으면 맛있을 걸요, 아, 물을 한강 물만큼 뜨면 안 되겠지만!” 연준이 횡설수설했다. “생수도 있긴 한데 아껴야 되니까, 물 끓이면 괜찮겠죠? 지금까지 크게 탈 난 적은 없는데.” 수빈은 요지부동이었다. 눈을 마주치자 수빈이 작게 한숨 쉬었다.

주변에서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왔다. 연준이 다친 팔을 불편해하기에 거의 다 수빈이 준비했다. 냄비와 식기구는 주변 식당에서 굴러다니던 걸 공수했다. 강물에 빡빡 씻으니 그럴듯해 보였다. 물론 씻는 것도 수빈이 했다. 대신 연준이 라면을 끓여줬다. 원래 한강에서 먹는 라면이 맛있잖아요. 어색함에 연준이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라면이 끓는 동안 수빈은 연준에 대해 꽤 많은 걸 알게 됐다. 계란은 풀지 않고 넣는 편, 파에서 우러나는 국물 맛을 좋아하는 편, 이렇게 제대로 챙겨 먹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는 것, 김치가 있었으면 더 환상이었을 텐데, 그래도 김치는 발효식품이라 종종 발견해서 다행이라는 점, 한때 먹방 유튜버가 꿈이었다는 점, 근데 옷을 잘 입고 싶어서 다이어트를… 어쩌고저쩌고.

“저… 감사합니다. 도와주셔서.”

연준이 라면을 먹기 전에 말했다. 드세요. 비록 준비는 수빈이 다 했지만 연준이 대접하듯 말한다.

연준은 오랜만에 리듬을 탔다. 라면이 너무 맛있었다. 와, 이거 진짜 맛있다. 그쵸. 수빈에게 연신 동의를 구하기도 했다. 수빈의 반응은 항상 적당했다. 네…. 하고 땅이 꺼질 것 같은 저음으로 대꾸하거나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 연준은 그가 좋아졌다. 어쨌든 제 말을 알아듣고 대답해주는 사람이었다. 사람! 연준은 사람이 좋았다. 신나서 안 먹고 아껴두던 초콜릿 한 조각도 나눠줬다.

연준은 수빈과 같이 가고 싶어서 부산에 대해 얘기했다. 수빈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라면을 끓이기 위해 피워놓은 모닥불이 생명을 다해가고 있었다. 연준은 수빈이 금방이라도 떠날까 봐 불안해졌다. 수빈이 몸을 들썩일 때마다 연준이 흠칫거렸다. 처음 만났을 때도 짧은 도움만 주고 뜨려고 했다. 애초에 일행을 만들지 않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어떻게 붙잡아둬야 하는 거지. 혼자는 위험하니까 같이 가자고 애원해야 하나….

생각이 많은 연준보다 행동을 먼저 한 건 수빈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손을 뻗는 것으로. 

“연준 씨. 아까 좀비한테 물렸었죠.”

운을 뗀 수빈은 연준의 팔을 붙잡고 상처를 살펴보았다. “네? 네, 맞는데….” 순간 수빈의 손이 연준의 웃옷을 들춘다. “자, 잠시만요.” 연준이 다급하게 말했다. 일방적인 손길이 당혹스럽다. 몸을 무르는 것도 소용 없었다. 큰 손에 휘감긴 팔뚝은 빠지지 않았다. 팔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돌연 티셔츠를 들춘다. “뭐, 뭐, 뭐 하는 거…!” 연준이 놀라서 옷자락을 끌어내리는데 수빈이 눈살을 찌푸린다. “아이, 가만 있어 봐요.” 쓰읍, 하고 이르는 소리가 무슨 강아지나 어린 아이 대하는 듯하다. 가슴팍까지 바깥 공기가 훅 끼친다.

“물렸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네요.”

물린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 현실의 좀비 바이러스는 영화와 달리 즉각적이었으므로, 사람마다 편차가 있어도 이쯤 되면 라면을 마지막 만찬으로 좀비화가 진행됐어야 했다. 수빈이 연준의 허리춤을 만지작대다간 뒤챘다. 아무리 온몸을 살펴봐도 좀비처럼 피부가 썩어난 곳이 없다. “앗, 으악…!” 속수무책으로 골반이 돌아간 연준이 당황스럽게 수빈을 돌아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빈은 연준의 티셔츠를 들춘 채 흉터를 유심히 바라볼 뿐이었다. 옆구리에 꽤 오래되어 보이는, 좀비에게 물린 잇자국이 있었다. 과거에도 물린 전적이 있음에도 멀쩡하다는 건.

“연준 씨 혹시… 면역인가요.”

아차 싶다. 연준은 그제야 제 앞의 지성체에게 배타감정을 느낀다. 그러고 보면 수빈은 연준이 물린 걸 알고 있다. 좀비에게 물린 사람과 함께 다니는 미친놈이 어디 있겠는가. 연준은 감염되지 않는 몸뚱아리를 가지고 혼자 너무 오래 지낸 탓에 그 사실을 잊고 있었던 거다.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면서 인류는 동족을 먼저 배신했다. 좀비도 무서웠지만 좀비만큼 무서운 게 사람이다. 수빈이 혼자 나타나긴 했지만 어딘가에 일행이 있을지 모를 일이고, 면역인 자신을 팔아넘긴다면? 어딘가에 이용할 속셈이라면? 연준은 혼자가 되기 전 목격한 일들과 귀동냥한 사례 몇 가지 떠올렸다. 이전에 봤던 영화 따위의 내용이 저도 모르게 섞여 혼재했지만, 세상이 멀쩡할 때도 모르는 사람 함부로 따라가지 말랬는데. 

문제에 제일 큰 원인이라면 단연 저 얼굴 때문이다. 제 몸의 흔적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얼굴이 고혹적이어서 연준은 난데없이 부끄러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부끄럽다는 감정은 사치임에도. 어렸을 때부터 배우던 ‘사탕 주면서 유혹하는 못된 아저씨’는 악독하게 생긴 배불뚝이 아저씨였지 저런 곱상한 눈매에 둥근 코를 가진 미남이 아니었단 말이다. ―사실 유혹한 쪽으로 따지면 라면 들고 설친 연준이었으나― 이리 따지면 인류 최상의 전성기 때의 교육도 그다지 효용성이 없지 않나 싶다. 

연준이 자신을 불신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수빈이 돌연 걸치고 있던 후드집업을 벗어냈다. 얇은 긴 팔의 소매를 걷어 올린다. 지방 하나 없어 근육이 드러난 마른 팔에 정체 모를 멍 자국이나 잇자국이 선명했다. 좀비에게 물린 잇자국은 연준도 알아볼 수 있었다. 제게도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저건… 주삿바늘 자국인가?

좀비에게 물린 자국이 확인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수빈이 황급히 소매를 끌어내린다.

“저도 면역이에요. …저 말고 처음 보네요. 면역인 사람.”

수빈이 낮은 목소리를 천천히 이어갔다.

“파주에 쉘터가 하나 있어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제가 거기서 나왔으니까.”

수빈이 연준을 돌아본다. 얼굴에 맺힌 불빛이 아롱거렸다.

“같이 갈래요?”

연준이 쉽사리 대답을 못하고 수빈을 바라봤다. 수빈의 머리 위로 벚꽃잎 몇 개가 스쳐 지나갔다. 연준은 자신이 거부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저 꽃잎들도 외따로 떨어져 홀로인 마당에 자신은 혼자가 아닌 둘이 되었으니까.


부산이나 파주나 똑같지 않을까. 어차피 부산으로 목적지를 잡은 것도 불투명한 소문을 잡고 가는 거였다. 파주는 실체가 있다. 수빈의 말을 믿는다면.

수빈은 연준보다 한살이 어린 스무살이었다. 쓸만한 물건을 보급하기 위해 면역인 자신이 밖으로 나왔다고. 그런 것치곤 편한 차림새였다. 가방도 연준 것보다 작았다. 다른 사람들은요? 연준이 물었다. 수빈이 잔잔하게 웃었다.

“면역인 사람은 저밖에 없는 걸요.”

수빈은 연준에게 말을 놓으라고 했다. 사회생활을 해보지 않아 연장자에게 듣는 존댓말이 영 불편한 모양이었다. 형이라 불러도 되냐기에 그러라고 했더니 보조개를 움푹 패며 기뻐한다. 연준이 수빈을 수빈 씨라고 불러서 따라 하긴 했는데 뭐뭐 씨, 하고 부르는 것도 너무 오글거린다고 했다.

수빈은 세상이 망하기 전 백수였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자퇴한 뒤 아르바이트 몇 번 해보고는 집에서 게임만 했다. 사태가 터지고 가족을 잃었다. 어떻게든 살아남고나서야 면역인 걸 알았다. 우연히 파주에 있는 쉘터에 합류해 함께 지내는 중이라고.

쉘터엔 오십여명 남짓의 사람들이 있고 식량을 자급자족하며 생활 중이라고 했다. 연준은 한국에 사람이 남아있는 공동체가 있다는 사실에 환호했다. 와, 진짜 빨리 가고 싶다. 파주는 멀지 않았지만 연준의 소망대로 빨리 가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세상이 망했다는 게 절절히 실감 나는 건 익숙한 장소에 아무도 없을 때다. 특히나 그것이 인구밀집도가 높기로 유명한 서울이라면 더더욱. 홍대입구역 근처가 조용할 때 연준은 기겁했다. 아이돌 생일 광고가 번쩍이던 9번 출구에 이름 모를 덩굴이 자라있었다. 이런 광경을 좋아할 사람은 절대 없으리라 생각했다.

“사람 없으니까 너무 좋네요.”

연준은 수빈을 돌아보았다. 그리 생각했던 사람이 지금 제 옆에 있는 거다. 정작 말을 한 수빈은 태연해 보였다. 

“여기 되게 오랜만에 오는데, 사람 엄청 많았잖아요.”

“그랬지.”

“사람들 틈에 껴다니던 거 좀 질려서…. 가끔 이런 스산함이 마음에 들 때도 있어요.”

“그래? 야 쫌…, 외롭지 않아?”

“그런 건 외로움이랑 별개지 않아요?”

그런가. 연준이 제 목덜미를 쓸었다. 수빈의 시선이 연준에게 닿는다.

“형은 모델이 하고 싶다고 했죠.”

“아, 아니…. 진짜 하고 싶다는 건 아니고.”

솔직하게 모델이 하고 싶었다 말하기엔 행색이 조금 쪽팔렸다. 정작 수빈은 별 신경도 안 썼지만.

“모델이 아니라 먹방유튜버였나…. 뭐 하여튼. 저는 하고 싶은 게 딱히 없었어요. 학교 다니기 싫어서 자퇴하긴 했는데 특별한 계획도 없었고. 알바도 하다 말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게 있는 사람이 좀 부럽기도 했고.”

수빈의 시선이 먼 곳을 향한다. 빌딩 숲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지평선 너머였다.

“오히려 이게 나을 수도 있어요.”

“이거?”

“지금 상황이요. 좀비 돌아다니고.”

“이게 뭐가 나아.”

“그냥…. 다들 잘사는데, 그중에서 나만 못 사는 거 너무 비참하잖아요.”

“…아, 그러니까 너만 혼자 못 사는 건 좀 그러니까 그냥 이렇게 다 같이 망해버린 게 낫다?”

화가 나서 비아냥대는 투가 나갔다. 아무리 지금 상황이라 할 수 있는 얘기라지만 이 망한 세상이 더 낫다는 건 용납 못하겠다. 이 세상에 원망을 가진 사람으로서 더더욱. “너 진짜 이기적이다.” 답지 않게 솔직한 말이 툭 내뱉어진다. 평소라면 안 했을 말이지만, 여러모로 예민했다. 이미 말해놓고 심한 말을 했나 걱정하는데 수빈이 무표정하게 입꼬리를 늘어트린다.

“사람은 원래 다 이기적이에요. 예전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도 형만의 이기적인 생각이고. 아닌가요.”

“그래도 이렇게 된 게 더 나을 건 없잖아. 이해를 못하겠네. 나랑 생각이 너무 다른 거 같아.”

수빈과 친해질 수 있을지 걱정됐다. 기껏 만난 사람과 성격차이가 생기면 어떡하지. 영원을 약속한 사람들도 성격차이로 헤어지는데, 하물며 생판 남인 사람과는. 수빈은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을 내리깐다. 

“그런가요. 전 형이랑 제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수선한 홍대입구역을 지나친다. 타로가게나 옷가게가 있는 거리에 도달한다.

“같은 면역자고, 모두에게 버림 받았잖아요.”

“버림 받다니…”

“다 형만 버리고 갔다면서요.”

“버리고 간 게 아니라, 그 사람들도 살고 싶었는데 죽은 거야.”

“그게 버림 받은 거에요. 의도가 어찌 되었든.”

수빈이 연준을 비웃듯 피식거린다. 수빈의 뒤로 타로가게에 홍보멘트가 보인다. 운명, 사주, 궁합. 사람들은 부조리한 일을 겪으면 누군가를 탓하고 하고 싶어 한다. 연준은 수빈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 이해로 말미암아 남 탓을 했던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본다. 엄마 아빠는 나를 두고 가지 말았어야 했어. 그것이 원치 않은 죽음이더라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아픈 감정을 곱씹고 되새기고 원망해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걸. 그러나 원인이 없다는 걸 인정하면 내 인생이 비극이라는 사실을 판결받아야만 한다. 화난다기보단 두려운 일이다. 슬픈 결말의 영화를 봐도 사흘 밤낮 앓아가며 눈물을 흘리는데 내 인생이 받을 선고는 그 얼마나 나락인가.

연준이 수빈과 맞는 점이라면, 이왕이면 최대한 편하게 가자는 주의라는 것이었다. 연준이 배가 고프다고 찡찡대 간단한 간식거리를 구하기 위해 소비하는 시간이나 수빈이 잠자리가 불편한 곳에선 잠을 못 자겠다며 주택가의 침대를 고집하는 것도 서로 잘 참아주고 들어줬다. 지도상 마포구에서 파주는 그리 멀지 않다. 하지만 지도도 없는 길치 둘이 두 다리만 이용해 걷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며칠 걸으면 도착한다는 것도 말이 쉽지 밥도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며 이룰 일은 아니었다. 자전거 같은 건 굴릴 여력도 없었다.

연준은 이따금 식은땀을 흘리며 쉬어가자고 부탁했다. 따뜻해지는 날씨에 붕대를 한 차례 갈아주었는데 상처가 아무는 게 느렸다. 든든히 먹지 못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먹는 양에 비해 식량 수급이 느렸다. 방향을 바르게 가는 것보다 식량을 우선시하기로 했다.

주택가를 벗어나 지하철역이 있는 대로변으로 나왔다. 지하철과 이어진 백화점 하나가 보였다.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새 건물이었다. 들어가 보죠. 수빈이 제안했다. 1층 입구는 막혀있었다. 지하철과 통로가 이어져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역으로 내려가는 건 위험했다. 사태 초반 지상의 좀비와 격리되기 위해 지하로 내려간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높은 확률로 좀비 떼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면역인으로서 공격받지 않는다고 해도 한강공원 매점의 좀비처럼 예외 상황도 염두에 둬야 했다. 주변을 돌다가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뚫려있는 걸 발견했다.

길을 따라 내려가니 혼돈하게 주차된 차와 좀비 몇 마리가 있었다. 비상구나 입구가 잠겨있다. 연준은 유니폼을 입고 있는 좀비를 발견했다. 저게 열쇠를 가지고 있을지도. 연준이 자기가 주머니를 뒤져보겠다고 했다. 내가 갔다 올게. 넌 가만히 있어 봐. 수빈은 어물쩍 대꾸했으나 굳이 말리지 않았다.

오른팔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사람이 참 패기있게 좀비에게 다가선다. 인기척이 나자 좀비가 연준에게 덤벼들었다. 주머니에 손이 닿기도 전이었다. 어어, 연준이 몸을 무르며 뒷걸음질 쳤다.

탕! 순간 파열음이 울렸다. 귀청이 터질뻔했다. 연준이 놀라 수빈을 돌아보았다. 수빈이 들고 있는 권총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다. 총? 대한민국은 총기소지가 불법인 나라가 아니었던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머리에 총알을 박고 고꾸라진 좀비가 금세 일어날 듯 발작하고 있었으니.

연준이 발로 좀비 머리를 밟아댔다. 신발 굽이 부패한 얼굴 가죽을 뚫는다. 썩은 뇌수가 터져 나왔다. 우욱. 소매로 코를 막고 축구공 차듯 머리통을 갈기자 썩은 목뼈가 떨어지면서 머리만 저만치 날아갔다. 수빈이 연준과 좀비에게 다가왔다. 아직도 총성이 귓가에 머물러있는 것 같아 연준은 눈살을 죄 찌푸린 채였다.

“총이 있어?”

“네.”

“뭐야…. 왜 지금까지 말 안 했어?”

“안 물어봤잖아요?”

당황하기는 커녕 뻔뻔하다. 아니, 뻔뻔하다기보다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는 듯 냉한 반응이었다. 아마 쉘터에서 보급된 게 아닐까 싶다. 연준이 생각하는 사이 수빈이 말을 이어갔다.

“위험한 짓 좀 안 하면 안 돼요? 그러다 또 다치면 어쩌려고요.”

“너도 그냥 하라며. 하기 전에 말리던가, 왜 화를 내고 그래….”

“화난 거 아닌데요.”

엄밀히 따지면 화라기보단 짜증이었다. 연준뿐 아니라 당사자인 수빈도 자신이 왜 짜증을 내는지 몰랐기 때문에 달리 해명할 수 없었다. 연준이 입술을 삐죽이며 혀를 차고 좀비로 시선을 돌렸다. 주머니에서 카드키가 나왔다. 이거 봐. 내 말대로 안 했으면 어쩔 뻔했냐. 연준이 뒤늦게 체면을 차렸다.

백화점엔 아무도 없었다. 좀비도 층에 한 둘 있을까 말까였다. 난잡하고 어수선한 분위기가 없지 않은 걸로 봐선 많지 않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폐쇄된 듯했다. 식품을 판매하는 지하층도 비교적 성한 모습이었다. 냉동식품이 썩어가고 있었고 팩에 들어간 육류나 조개 따위가 부패한 냄새가 났다. 통조림이나 인스턴트 식품이 몇 개가 남아있었다. 둘은 그 자리에서 수프와 파인애플 통조림을 바로 까먹었다. 참치나 미트류 같은 든든한 식품은 따로 쟁여놓기로 했다. 여기 괜찮은데? 나중에 파주 사람들 데리고 오자. 연준의 말에 수빈이 어설프게 웃었다.

배를 채우고 나머지도 둘러볼까 싶은데 연준이 어디선가 카트를 끌고 왔다. 또 무슨 이상한 장난을 치려는 건가 싶다. 연준은 자주 그랬다. 돌연 이상한 물건을 주워와서 수빈을 쳐대거나 귀찮게 하는 게 특기였다. 수빈이 얼떨떨하게 바라보는데 연준이 카트 안에 앉았다. 몸이 다 들어가지 않아 다리가 반절 이상 튀어나왔다.

“야. 밀어 봐.”

네? 수빈이 이해되지 않아 되묻는다. 밀어줘.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연준이 저 끝 정육코너를 가리켰다. 빨리! 밀어보거라! 연준이 카트 손잡이를 퍽퍽 쳐대며 땡깡부렸다.

“으아아!”

수빈이 새된 괴성을 지르며 카트를 잡고 달렸다. 와하하! 연준이 웃었다. 목청도 좋아 식품코너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덜컹거리는 카트에 앉아 웃음을 와르르 터트리던 연준은 속도가 붙자 무서워 했다. “아, 무서워, 무서워!” 연신 중얼거릴 때 즈음 수빈이 지쳐 쓰러졌다. 수빈의 긴 팔에 걸려 떨어진 돼지고기 가격표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 존나 무거워.” 들리는 말에 카트에서 나가려 몸을 버둥거리던 연준이 수빈을 돌아보았다. 

“야, 무겁긴 뭐가 무거워. 지금 내 인생에서 제일 낮은 몸무게란 말이야.”

“그래도 쌀 한 가마니 무게는 나갈 거 아니에요.”

“쌀 한가마니가 몇 킬로그램인데.”

“몰라요, 저도.”

스마트폰 인터넷 아무리 끊어야 한다고 성토를 해도 막상 진짜 없으니 바보 되는 거 한순간이다. 그래도 쌀 한가마니가 대략 80킬로 그램 정도인 사실 따위 모르는 게 수빈에게도 연준에게도 이로웠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유치해졌다. 물자를 보급한단 명목으로 층 하나하나를 둘러보며 호화스럽게 놀았다. 그 또래 남자애들보단 일곱난 유치원생들처럼. 배터리가 남은 게임기가 없는지 하나하나 켜보기도 하고 버려진 장난감 칼이나 아기 인형을 들춰보기도 했다.

“토이 스토리였으면, 얘네끼리 놀고 있었을 텐데 괜히 우리가 들어와서…” 연준이 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연준이 말하면서 얼굴을 수빈의 어깨에 기대왔다. 수빈이 연준을 돌아본다. 지쳐서 어딘지 나른한 눈길이 조용하다 못해 공허한 매장을 향하고 있다. 수빈은 살아움직이는 것이 저와 그 밖에 없다는 걸 실감한다. “그럼, 사람이 없으니까 악역도 없겠네요. 사람의 마음에 들려고 다투지 않아도 되니까….” 결국엔 연준의 말을 다 받아주며 대답해주기까지. 그런 대화를 나눌 때면 기분이 오묘했다. 연준의 작은 머리통의 무게가 여실히 느껴져서 그런건지도 몰랐다. 

방향제를 파는 가게에 자리를 깔고 앉아 하나하나 향을 맡아보기도 했다. 향수를 챙기고 싶다는 연준을 수빈은 말리지 못했다. 별로 쓸모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너무나 범상한 일인 것이다. 평범하던 일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누렸던 것들. 정작 수빈의 인생엔 그것이 비범한 일이었으므로 낯을 가리면서 연준과 어울려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부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수빈은 즐겁다는 감정을 꽤 오랜만에 느꼈다.

의류를 파는 층에 들어서자 연준이 눈길을 떼지 못했다. 결국엔 옷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걸 뒤따라설 수 밖에 없었다. 연준은 수빈에게 의견을 구했다. 이건 어때, 저건 어때. 수빈의 눈엔 비슷비슷해 보였다. 맘에 드는데 애매한 것들―킵이라고 했다―이 수빈의 팔에 가득 쌓였다. 짐꾼 노릇을 하는데 어느 순간 연준이 가져온 옷을 수빈의 몸에 대보기 시작했다. 거울 앞에 서보라고 시키더니 모자나 가방 같은 소품을 씌워대기도 했다.

모델에도 종류가 여러 가지다. 비단 패션모델뿐 아니라, 인물이 세워지는 그 어떠한 것에든 모델이 될 수 있다. 그래도 그중에서 제일가는 건 패션모델이다. 패션으로 말할 것 같으면, 디자이너들이 하는 창조는 센스의 영역이 아닌 크리에이티브의 영역이다. 옷걸이가 되는 모델이 패션에 깊게 관여하면 월권이 될 수 있다.

수빈은 제 손에 들린 가죽재킷을 내려다보았다. 장황한 소리를 늘어놓는 이유인 즉, 연준의 모델이 된 수빈에겐 거부권이 없다는 소리였다. “하…. 우리 과에도 너만 한 애들이 많았어.” 연준이 레자 바지를 건네며 수빈의 키에 대한 질투심을 내비쳤다. 수빈은 그가 말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저와 만나주지 않았을 사람이란 생각도. 수빈의 키가 아무리 커봤자 고등학교 자퇴생이었고 수빈이 게임을 하는 동안 연준은 소위 인싸들이 다니는 핫플레이스를 거닐며 친구들과 함께 한 셀카를 인스타그램에 올렸을 것이다. 수빈은 연준의 삶에 끼어들었던 모든 조연에게 일말의 질투심을 가진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지금 연준에겐 수빈 밖에 없는데, 그의 인생 마저 독차지 하고픈 욕심이 생긴다.

수빈은 답을 내기 위해 얌전히 그가 골라준 옷을 입기로 했다. 어차피 남자끼리고 둘 밖에 없는데 연준이 피팅룸에 들어가서 입으라고 성화였다. 수빈은 좁은 피팅룸에 들어가 어둑한 흰벽을 보며 옷을 벗었다. 몸을 크게 움직일 때마다 팔이 부딪혀서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피팅룸은 대한민국 남자 평균 키 174㎝라는 통계자료와 매장 면적 등을 고려해 185㎝가 넘는 수빈에겐 너무 작게 설계되어 있었다. 조심히 움직이면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만 들린다. 소름 끼치는 고요가 수빈을 잡아먹는다. 핏된 레자 바지에 다리를 밀어 넣던 수빈은 문득 불안에 사로잡혔다. 밖에 나갔을 때 연준이 없으면 어떡하지? 마치 이 모든 일이 달콤한 꿈이었던 것처럼, 거짓말 같이 사라졌다면?

마구잡이로 재킷에 몸을 꿰어넣고 문을 열었다. 거센 손길로 열어 튕겨 나간 문이 반동으로 쿵, 하고 부딪혔다. 헉헉…. 수빈은 자신이 가쁜 숨소리를 내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야이씨, 뭘 그렇게 급하게….” 그사이 옷가지 몇 개를 더 고른 연준이 놀란 눈으로 수빈을 쳐다봤다. 제 패션센스를 걸친 모델을 훑어보다가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된다.

“…야…. 너 남대문 열렸어.”

돌연 울고픈 마음을 삼키며 안심하던 수빈이 연준의 말에 황급히 지퍼를 올렸다. 연준의 웃음소리가 높은 천장까지 울렸다. “야, 멋지다잉? 역시 어울릴 줄 알았어.” 연준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웠다. “어차피 볼 사람도 없는데.” 수빈이 당연한 소리를 할 때 연준이 성을 냈다.

“볼 사람이 없긴 왜 없어. 내가 보잖아.”

그 말을 듣자 수빈은 연준의 시선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연준은 수빈의 몸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키가 크고 몸이 좋아서…, 그리고 원래 이런 거 잘 안 입을 거 같은 애들이 입으면 또 은근 어울리더라? 그런가요…. 수빈은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어설프게 웃기만 했다. 어차피 볼 사람도 없긴 개뿔, 두 눈알로 여러군데도 보는 고양이 눈알 속에 갇힌 것 같았다. 물론 연준은 분명 수빈만 보고 있진 않았다. 과장이자 소망이기도 했다.

커다란 침대 매장에 매트리스 체험존. 어두운 조도에 운치있게 구성되었을 모던한 회색 침구를 지나친 연준이 창가 근처의 침대로 달려들었다. 뛰는 게 싫어 걸어 다니느라 뒤따라오던 수빈의 몸을 잡아 끌더니 침대로 패대기 치려 한다. 호락호락하게 넘어가고 싶지 않아 다리로 버티다 연준의 팔을 부여잡는다. “아, 아아…!” 연준이 아픈 소리를 내며 힘을 풀었다. 상처 부위를 건든 모양이었다. “아, 죄송해요, 죄송…” 수빈이 당황해 사과하는 사이 연준이 또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수빈을 밀쳤다. 그러다간 균형이 또 기울고.

연준이 먼저 침대에 엎어졌다. 수빈이 그 위로 쏟아져 내릴 뻔 하다가 팔을 받쳤다. 하하… 연준이 뭐가 그리 신난 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웃다 눈을 떠 수빈을 본다. 연준을 내려다보는 수빈의 눈이 알 수 없는 우수에 차 있었다. 왜? 수빈은 순수한 의문을 띤다. 미소를 띤 채 제 아래에 갇힌 그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수빈의 시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토록.

웃음소리가 금세 사라졌다. 구름이 옅게 낀 날, 누군가 하늘이 가장 예쁘다고 하던 오후 여섯 시 근처의 은은한 햇살이 연준의 볼에 드리웠다가 사라졌다. 눈이 부실 게 하나 없는데 수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연준의 눈빛이 가지런하다. 쌍꺼풀 없는 깊은 눈동자와 마주할 때, 수빈은 이 눈부심이 연준에게 나는 것일지도 모른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다. 살갗이 닿은 팔 언저리가 간지러웠다. 연준이 짐짓 수빈의 시선을 피하며 제 숨소리의 리듬을 신경 쓴다. 어쩌면 이상하게 색색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당연히 여겼던 호흡마저 의식하며,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해체된다. 서로의 존재에 대한 기묘함을 의식한 순간 현실을 떠나 또 다른 우주에 빠진 것 같다.

연준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을 처음 만져보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수빈의 손을 잡았다. 커다란 손을 다 감싸지 못하고 더듬댈 때 수빈이 고개를 숙인다. 연준의 입술에 수빈의 입술이 겹친다. 연준이 눈을 감으며 수빈의 목에 팔을 둘렀다. 해체된 퍼즐을 다시 맞추는 것처럼 두 입술의 아귀가 맞는다. 별수 없었다. 둘은 더럽게 할 일이 없었고, 지독하게 외로웠다. 움직이고 말이 통하는 상대라면 그게 누구든 좋아할 수 밖에 없으리라고, 진부하게도.

실은 그렇지 않다. 그게 누구든 좋아할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은 각별한 상대에게만 움직이고, 그건 기적과 같은 일이다. 그걸 몰랐다. 세상이 멸망하기 전, 사랑이라 불렸던 것인데도.

2

둘은 하루 온종일 섹스했다. 옛날 옛적 사람들이 애만 순풍순풍 낳은 이유를 알겠다. 달리 할 짓이 없으니 당장 할 수 있는 쾌락을 좇는 거다. 컴퓨터나 스마트폰, SNS가 발명되기 전처럼 말이다. 어쩌다 보니 일방적인 포지션으로 하고 있으니,―편견 없는 연준의 가벼운 배려였다. 편견 있는 수빈은 연준의 쓸데없는 다정함을 거부하지 않았다. 하기야 어른들이 농담처럼 건넨 호의를 언제나 뻔뻔하게 받아먹던 성격이었다― 연준이 여자였다면 야구단을 창단할 수 있었을지도, 좀 더 범우주적인 관점에서, 어쩌면 좀비 면역인자를 가진 신인류의 탄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둘 다 남자였으니 그 시초의 영광은 지구촌 남녀 누군가가 쟁취하였다.

그렇다고 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부끄러워하던 연준은 제 가족이나 친우들에게 하는 것처럼 수빈에게 얼굴을 비비며 애교를 떨었고, 어색해하던 수빈은 속으로만 생각하던, 그러니까 귀엽다거나 예쁘다는 말을 솔직히 내뱉을 수 있게 되었다. 둘은 그 과정을 즐기면서도 머쓱해했다. 이게 정확히 무슨 관계인지 정의하지 못했다.

해가 진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태양이 지평선 너머의 바다로 잠수할 때 들이키는 찰나의 숨처럼, 작게 앓는 소리. 수빈이 잠에서 깨어났다. 연준이 끙끙대고 있었다. 겹쳐진 몸의 체온이 따뜻하다 못해 뜨겁다. 연준이 온몸에 식은 땀을 흘린 채였다. 바로 이마에 손을 댔다. 잘 모르더라도 열이 나고 있는 건 분명했다. 수빈은 연준의 뒤집어진 옷가지를 추슬러준다. 며칠 동안 맨살을 드러내고 잤으니 감기에 걸린 걸 수도 있다. 형, 형 일어나봐요…. 수빈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높은 천장에 닿아 울린다. 연준이 비몽사몽 깨어났다. 어어, 응…. 정신이 없는 와중에 대답만큼은 착실했다. 열나는 거 같아요. 주어가 명확지 않았다. 수빈이 안달 난 표정을 짓고 있어 연준은 손을 뻗을 곳이 제 이마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아챘다. 수빈이 연준의 이마를 짚는다. 연준은 깨어나고 나서도 제대로 맥을 추지 못했다. 단순한 감기가 아니었다.

지하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연준이 숨을 헉헉 내쉬었다.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면서 무안해하는 연준의 목소리에 불안감이 가득했다.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수빈은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말로 중얼거렸다. 지하 1층에 있는 약국에 자리 잡는다. 어둠 사이로 손전등 불빛만이 왔다갔다거린다. 수빈이 손전등을 입에 문 채 시야를 밝힌다. 며칠동안 신경쓰지 않아 더러워진 붕대가 보인다. 수빈이 조심스럽게 연준의 붕대를 풀었다. 상처가 많이 곪아있었다. 노랗게 터진 고름을 떼어내고 상처를 소독한 뒤 약을 발랐다. 수빈이 손을 벌벌 떨었다. 연준이 따가워 흠칫거릴때 수빈도 손을 무르는 통에 연고를 바르는데만 한참이 걸렸다.

수빈이 제 상처를 치료해주는 걸 가만 내려다보던 연준이 입을 연다.

“야. 나 너 없으면 죽었겠지.”

“……”

“수빈아.”

부름에 수빈이 고개를 든다. 버석한 머리칼에 까만 눈이 반틈은 가려져 있었다. 순한 눈망울이었으나 강파르게 떨어지는 턱선이 아직 인간에게 길들지 않은 어린 짐승 같기도 했다.

“나 너 좋아하는 거 같아.”

수빈이 입에 물고있던 손전등을 뱉어내 잡는다. 오른팔의 상처와 연준의 얼굴 근처를 애매하게 조준한다. 어둠에 가려진 수빈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같아, 는 뭐예요.”

“왜에, 싫어?”

수빈은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늘어트린다. 부끄럼을 타는구나. 연준은 그런 수빈을 귀여워했다. 동시에 제가 조금 오버했나 싶어 멋쩍어지기도 했다. 쟤는 그 정도는 아닐 수도 있는데. 말마따나, ‘같아’는 뭐냐….

연준은 대답을 바라지 않기로 했다. 어렴풋이 본인조차 일시적인 감정이라 치부하고 있었다. 영원한 건 없다지만 해프닝에 미래를 걸고 약속하는 이 또한 없다. 상처가 될 것이다. 나 말고 다른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에 순응하지 못해 울분터지는 마음은 의외로 내 것이 아닌 정을 준 타인의 것에 더 크게 작용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미 털린 곳간에 남은 쌀알을 주워 먹던 생쥐 두 마리는 더 이상 남은 쌀알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썩은 음식들은 배가 고파도 차마 먹을 수가 없었다. 약국의 의료품도 마땅치 않았다. 일정을 더 지체하는 것도 무리가 있었다. 둘은 소일의 파라다이스를 떠나기로 했다.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그새 날이 더 따뜻해진 모양이었다. 아니면 자꾸 땀을 흘리며 주저앉는 사람이 있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약을 새로 발라도 연고의 캐치프레이즈처럼 새살이 돋는 건 더뎠고, 연준의 상태도 좋아지지 않았다. 연준이 그늘을 찾아가 앉을 때마다 수빈은 난처해했다. 연준은 가끔 고민했다. 나를 버리고 가도 된다고 말해야 할까…. 수빈에게 짐이 되고 있었다.

길치들을 위한 지도를 찾기 위해 들른 서점. 마치 책을 고르려 골몰한 사람처럼 주저 앉은 연준에게 하늘로부터 책이 하나 내려온다. 『곰돌이 푸,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 

“뭐냐?” 연준이 어이가 없어 웃었다. “독서 좀 하라고요. 평소에 책 안 읽었죠?” 부러 장난치는 말을 남기고 희멀건한 손을 거둔다. 수빈이 다시 지도를 찾기 위해 자리를 뜬다.

연준은 책을 들춰본다. 빨간 반팔을 입은 곰돌이 푸가 미소 짓고 있었다. 곰돌이 푸가 좋았다. 너른 품을 보면 안기고픈 기분이 들었다. 지쳐있다는 증거였다. 몇 페이지 넘기며 몇 문장 읽었다. 머릿속이 아득해 자세히 들어오진 않았다. 종이에 지문기름이 진득하니 묻어날 정도로 한 페이지에 머무른다. 감명을 받은 페이지여서가 아니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곰돌이 푸를 주는 애에게 나를 버리고 가라고 할 수 없겠구나, 라고. 나를 버리는 게 아니라 쟤가 버려지는 거라면….

몸이 좋지 않았다. 식은땀에 등이 젖어 있었다. 연준이 숨을 가쁘게 내쉬다 눈을 감았다. 마약을 한 사람처럼 눈을 감아도 시야가 어지럽더니 정신이 혼미해서, 그대로…….

…헉! 연준이 눈을 떴다. 새하얀 천장, 낯선… 아니, 낯설지 않다. 연준은 초점을 맞추기 위해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 익숙한 천장과 조명등이 보인다. 아직도 벌렁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려 숨을 내쉬었다. 마치 악몽을 꾼 직후처럼 몸이 불안하다. 좋지 않은 꿈이라도 꾼 것일까? 몸을 일으킬 때 팔에 파삭거리는 알레르기방지용 시트가 감긴다. 연준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화한 갈색의 서랍장과 책상, 과제 할 때만 꾸역꾸역 쓰던 노트북, 필기하다 만 공책 따위가 보인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카디건이 의자에 널브러져 있었다. 창문으로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진다. 연준은 눈이 부셔 눈살을 찌푸렸다가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았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다. 마치 현대미술의 한 장면처럼 연출된 상황 속에 떨어진 것 같았지만, 여긴 분명 제 방이었다.

뭐해뭐해. 직접 설정한 카톡알림음이 귀여운 목소리로 두 번 울었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연준은 휴대폰을 확인했다. 조별과제 단톡방의 알림이다.

뭐지? 아득한 꿈을 꾼 것만 같다. 연준은 꿈의 정체가 뭔지 알고 있었으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알면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니. 앞뒤가 맞지 않았으나 확신이었다. 찝찝함을 붙들고 있자니 사람이 흐리멍덩하다.

1교시 수업을 역시 괜히 넣었다는 동기의 우는 소리를 들으며 학식을 먹는다. 된장국에 꼬마 돈가스. 야, 너 설마 안 먹는 거 아니지? 친구가 꼬마 돈가스를 탐낸다. 감히 최연준의 꼬마 돈가스를. 미쳤냐? 친구의 젓가락을 쳐내고 한 개 먹는다.

혀에 감기는 튀김의 감칠맛! 음!

연준은 정신 차리기로 한다. 야, 나 오늘 왜 이렇게 정신이 없냐.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나서 힘들었나 봐. 아니, 그 선배가 꼭두새벽부터 단톡방에… 너 알림 안 꺼놨냐? 웅. ……

배를 채우고 식당을 나왔다. 교정의 벚꽃이 눈에 띈다. 꽃이 언제 폈지? 연준의 물음에 친구가 웃는다. 며칠 되지 않았냐? 그래? 몰랐는데…. 지난밤 봄비를 맞은 벚나무가 꽃잎을 흘린다. 연준이 잠시 멈춰서서 꽃잎이 떨어지는 걸 바라본다. 

커플이 아니라서 그래. 걔네는 무슨 축제하는 거 간다고 며칠 전부터 꽃지도 보고 그러잖아. 여의도 벚꽃 축제 그런 거….

그랬구나. 커플이 아니라서 몰랐나 보다. 사소한 아름다움에 동조해줄 사람이 없어서. 현실은 삭막하니까. 시험 기간이고 과제도 밀려있고. 꽃잎이 떨어지는 하늘을 바라본다.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무너지지 않을 듯 높고 청명했다.

하루가 짧다. 학교 도서실에서 관련 자료를 찾고 부자재를 사러 간다는 친구를 따라 동대문종합시장에 들른다. 적합한 부자재를 찾는데에 열중하다 뒤늦게 저녁을 먹었다. 짐이 많아진 친구를 먼저 보내고 청계천 밤거리를 산책했다. 각종 조명으로 꾸며놓은 청계천은 사람이 많았다. 멀리서 야시장의 소음이 들렸다. 다들 봄나들이 한다고 나왔나보다. 물기를 머금은 강바람을 맞는다. 눈에 자꾸 커플이 걸린다. 조금 외로운 거 같기도 하고….

외로움은 왜 느끼는 거지? 남이랑 비교했을 때 내가 초라해 보여서? 그렇다면 역시 빌어먹을 자기연민이 맞았다. …‘역시’…. 연준은 기시감에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찰나, 누군가 연준의 어깨를 잡아 돌린다. ‘누군가’? 연준은 자신을 낚아챈 상대를 본다. 레테의 강에 쓸려가던 자신을.

수빈이 애처롭게 숨을 헐떡였다. 교복 차림새였다. 넥타이 선이 얇은 춘추복. "수빈아." 연준이 놀라 중얼거렸다. 수빈은 고등학교를 자퇴했다고 했었다. 그럼 이건 뭐란, 아니, 그쪽이 허상인가?

“형….”

“……”

“어떻게 나한테서 도망칠 수가 있어요….”

수빈이 말한다. 청계천 밤거리를 비추는 가로등 불빛이 수빈의 눈망울에 머물러 반짝인다. 연준은 꿈의 정체가 뭔지 알고 있었다. 어느 쪽이 꿈인지 정하는 건 연준의 몫이었다. 아니, 수빈의 몫이기도 했다. 불행히 연준은 이미 그에게 제 삶의 많은 몫을 내주었다. 일생일대의 선택을 좌지우지 할 만큼. 그땐 그게 불행을 벗어나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것. 이 불행에 이름을 붙인다면 미련이었다. 평화로운 세상의 안락을 뒤로할 만큼 달콤한 미련.

수빈이 연준의 어깨를 바스러질 듯 세게 붙잡고 있었다.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데도 몸이 경직됐다. 

“전 형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떻게 나한테서 도망칠 수가, 제발, 형….”

수빈이 연준을 끌어안았다. 정신이 홰까닥 돌아간다.

눈을 떴는데 암흑이다. 심장이 터질 듯 쾅쾅거려서 시야보다 몸의 박동에 집중이 된다. 허억, 헉…. 눈을 끔벅이던 연준의 시야가 곧 어둠에 익숙해진다. 현실이 자각되자 오른팔뚝의 상처가 쓰라렸다. 아야, 하고 흠칫 떠는데 누군가 제 몸을 꽉 끌어안는 압력이 느껴진다.

수빈이 연준을 품에 안고 있었다. 깜깜한 밤인데 아침 햇살만큼 따스한 체온이 연준을 감싼다. 수빈을 올려다보던 연준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너 약간 마시멜로 닮았다.”

“…뭐래. 먹고 싶어요?”

수빈은 인상을 가뜩 찡그린 채 울고 있었다. 눈물이 연준의 볼을 적시며 떨어진다. 냉해 보이던 인상이 물기를 잔뜩 품고 있어 연준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애교살이, 마카롱 같기도 하고….

“전 형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디서 들었던 것만 같던 고백. 꿈속에서 뇌까리던 목소리. 연준이 손을 뻗어 수빈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아니야, 네가 왜 아무것도 아니야….”

“제 말 좀 믿어요. 그렇지 않아요? 세상에 둘 뿐인데 내가 형 없이 어떻게 무언가가 될 수 있어요?”

“그렇게 따지면 나도 너 없이 아무것도 아니야.”

“그건 거짓말.”

“봐. 너도 안 믿잖아.”

“그게 아니라 형은 저 없어도 가치 있어요.”

연준이 수빈을 바라보았다. 수빈은 코를 훌쩍대다 아닌 척 눈가를 닦아냈다. 둥근 코가 들썩거리는 게 토끼 같은 모양새였다.

“형은 빛나요.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제일.”

“야. 나한테 그런 말해 주는 사람도 너밖에 없잖아….”

“아니요, 형을 만나면 누구라도, 누구라도…”

경황없이 중얼대던 수빈이 말을 멈춘다. 무언가 알아챘는지 제 목울대를 타고 넘어온 감정을 혀끝에서 굴려보고 맛본다. 콱 씹어내면 입 안에 상처가 날까 망설이다, 토해낸다.

“저 형을 사랑하나 봐요.”

소년의 첫사랑은 어리숙하나 더할 나위 없이 단단하고 빛나서 방금 공장에서 만들어진 아름다운 장난감 같았다. 연준은 수빈이 제게 그랬던 것처럼 가볍게 대응할 수 없었다. 좋아한다는 말보다 사랑한다는 말이 훨씬 무거웠다. 그러나 그 무게와 상관없이, 수빈의 감정은 즉흥적이었다. 지난 시간 기절한 저를 두고 홀로 남은 그와 함께하지 않은 연준의 속단이었다. 저보다 1년 덜 살았으면서 자기가 만난 사람들 중에 제일 빛난다는 건 뭐고…, 연애도 안 해본 게, 뭣도 모르면서. 그렇다고 기분이 나쁘진 않았지만, 오히려 너무 좋아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수빈은 연준의 대답을 종용하지 않는다. 연준은 그게 못내 아쉬웠다. 안달을 내면 모른 척 사랑놀음에 어울리고 싶었다. 그러나 채근받지 않고서 답을 줄 용기는 없었다. 

“…약속 하나 해요.”

수빈이 연준의 손을 잡는다. 애틋하게 주물럭거리다 작은 목소리를 낸다.

“우린 서로를 절대 버리지 않기로.”

사실, 이게 그 어떤 고백보다 결연했다. 수빈은 죽어서 떠나는 사람도 나를 버리는 것이라 했다. 죽음조차 포함된 말이다. 그걸 지키려고 한다고 지킬 수 있는 건 아닐 텐데. 연준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죽을 때까지 약속인 거야?”

“…네. 죽을 때까지 약속.”

…다만 결심만으로 의미 있는 거라면. 연준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말로만 언급하려 했던 수빈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곧 눈이 휘어지도록 활짝 웃는다. 수빈이 연준의 새끼손가락에 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수빈의 웃는 얼굴을 본 것만으로 가치 있었다.


팍. 매직펜 뚜껑을 벗겨내는 소리가 요란했다. 수빈이 매직펜 뚜껑을 입에 문 채 지도를 펼쳤다. 전국여행지도. 수빈이 기아차 보닛 위의 지도를 내려다본다. 펜이 향한 곳은 부산이었다. 고딕체로 적힌 부산이 가지런한 동그라미 옷을 입는다. 우리 목적지는 거기가 아닐 텐데. 의아한 연준이 말을 얹는다.

“파주는 어쩌고.”

“거긴… 됐어요.”

코 앞에 다 와놓고 대체 무슨, 연준이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수빈이 지도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수빈이 연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요.” 연준이 조심스럽게 수빈의 손을 잡았다. 전국여행지도를 손에 쥐고, 아마도 여행을 나서는 사람들처럼.

연준과의 첫 만남을 회상한다. 수빈은 그가 금방 죽을 줄 알았다. 배낭을 메고 있길래 남은 물자나 챙겨오려던 거였다. 가까이서 보니 제 또래의 남자였다. 검은 뿌리가 짙게 내린 탈색모에 마른 남자. 혼자 붕대를 감으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다. 안된 마음이 들었다. 사람에게 그렇게나 당해놓고. 가벼운 선의가 무겁게 작용하는 세상이었다. 모두 부자면 불우이웃돕기에도 선심 쓰는데 모두 거지면 콩알 한쪽에도 치고받고 싸우는 것과 같은 논리다. 수빈의 선의는 묵직하게 돌아왔다. 연준이 저와 같은 면역인이었다.

쉘터에 도움이 되기 위해 나온 게 아니다. 쉘터를 떠나기 위해 탈주한 것이다. 수빈은 유일한 면역인이었다. 사람들은 수빈에게 대의를 위해 희생될 것을 요구했다. 매일매일 피를 뽑히고 약물을 투여 받았다. 백신 개발엔 진척이 없었다. 학자들은 수빈을 해부하길 원했다. 실험에 사용되는 건 참을 수 있었으나 죽고 싶진 않았다. 쉘터 사람들은 상냥했다. 수빈에게 미안해했다. 그러나 부드러운 강압이다. 선택지는 없었다. 혼자 죽고 싶지 않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매일 공동체를 챙기기 위해 힘쓰고 일 하는 어른들, 가끔 어울리던 또래 친구들, 이런 세상을 겪기엔 너무 어린 아이들도 있었다. 그들이 평생 좀비 세상에 사느니 수빈이 마땅히 희생되는 게 맞아 보였다. 하지만 수빈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지 못했다. 총 한 자루를 훔쳐 쉘터에서 도망 나왔다.

수빈이 연준과 함께 쉘터로 돌아가려 했던 이유는 단 하나. 연준을 저를 대신할 면역인 연구의 제물로 넘기기 위해서다. 훌륭한 노획을 한 사냥꾼처럼 금의환향을 한 뒤 공동체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그랬었다. 그를 사랑하기 전까지는.

3

연준의 상태가 괜찮아졌다. 매일 생기던 노란 고름을 없애주고 일정도 무리하지 않았다. 새살이 돋기 시작하자 연준의 컨디션도 부쩍 좋아졌다.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격한 운동을 많이 해서 덧난 것이었을 수도 있겠다. 격한 운동? 수빈이 눈치 없이 되묻는 말에 연준이 부끄러워했다. 아, 아아~…. 수빈이 뒤늦게 어설픈 감탄사를 붙였다. 수빈은 아픈 연준을 데리고 철없이 행동하지 않았지만 이따금 입술을 맞춰오거나 머릿결을 세심하게 쓰다듬어주곤 했다. 수빈에게 받는 보살핌이 멋쩍었다. 아무래도 그런 돌봄으로 본인이 안정을 얻는 것 같았다. 연준을 제 것으로 점지한 수컷늑대, 내지는 아기 인형을 선물 받은 어린 아이 같기도 했고. 연준은 그가 상반된 이미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점이 연준의 마음을 한결같이 자극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일방적인 소유가 된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수빈이 저를 돌봄으로써 얻는 안정처럼 연준도 삶이라는 배의 조종키를 수빈과 나누어 잡은 것에 안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파주로 가지 않고 부산으로 방향을 돌린 이유에 대해 크게 캐묻지 않았다.

서울 교외 근처를 지나치자 인적이 드물어 폭격이 이루어진 마을이 나온다. 철근을 드러낸 건물과 폭삭 가라앉은 벽돌 따위가 당시 폭격의 여파를 여실히 보여줬다. 연준은 조금 의기소침해졌다. 이런 장소들을 몇 번 보긴 했지만 볼 때마다 우울한 건 매한가지였다. 차라리 호랑이가 뛰놀던 고조선을 상상하는 게 낫다. 사람이 파괴한 건물의 메마른 뼈대는 수빈이 맘에 든다던 삭막함 따위는 비교도 안되는 것이다.

“만약에,” 부지런히 걸으며 목이 마르도록 종일 서로에 대해 얘기하다 수빈이 범상한 이야기를 하듯 운을 뗀다. 목소리가 퍽 건조했다. “만약에… 부산에 아무것도 없다면 어떡할래요?” 묻는 말에 사심은 없었다. 연준은 수빈에게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숙였다. 이런 풍경이 변치 않는다면. “어쩌면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할지도 몰라요.” 수빈이 덧붙였다. 이 삶이 계속된다. 개선의 여지도 희망도 없이.

“우울하게 하려는 건 아니고… 그렇잖아요. 현실적으로….”

“……”

“그런데요. 좀 이상한 말인 거 같긴 한데…”

수빈의 시선이 연준을 똑바로 향한다. 분명 종일 걸어 지쳐있을 몸의 눈빛이 거세고 단단하나, 또 결단코 제멋대로 굴지 않겠다는 듯 세심했다.

“저는 형만 있으면 괜찮을 거 같거든요.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도.”

미래를 기약한다는 것. 너의 매일 아침에 된장국을 끓여주고 싶다거나 검은 머리가 파 뿌리가 될 때까지 곁에 있고 싶다거나. 이런 좀비재난시대엔 상당히 사소하고 담백한 대사로, 그러나 세상을 건 웅장함과 함께 이루어졌다. 연준은 고민한다. 수빈의 말에 그저 꿈결같던 상황이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1년으로 모자라, 10년을 20년을, 죽을 때까지 수십 년을? 연준은 아직 내 인생이 비극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였다. 이대로일 리 없다고. 꿈이 많았는데, 이렇게 젊은데. 세상은 언젠가 원래대로 돌아가리라고. 그래서 끝내 답을 주지 못했다.

경박하리만큼 밝았을 2층짜리 베이커리 카페는 재난 시대의 도래에 잿먼지에 싸여 퀴퀴한 모습이었다. 쓸만한 무기라도 있을까 싶어 주방 문을 연 수빈은 문을 도로 닫았다. 왜? 연준이 물으며 손전등을 주방 문에 달린 유리창에 비췄다. 좀비 열댓 명 떼를 지어있었다. 생존자였던 사람들이 해놓은 조치일까. 그 비하인드 스토리는 알 수 없지만, 아무리 면역이라도 저렇게 좁은 공간에 있는 좀비 떼 안으로 진입하는 건 자살행위라는 건 알고 있다. 안에 있을 포도가 부디 신 포도이길 바라며 두 사람은 몸을 돌렸다. 다른 곳에 쓸만한 것이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물론 경쾌한 방울 소리가 울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벌컥, 베이커리 카페의 현관문이 열렸다. 클로즈 표시의 알림판이 거칠게 흔들렸다. 연준이 경직되어있는 사이 수빈이 품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여섯 명의 사람들, 그리고 로트와일러 한 마리. 무장을 하고 있다. 

“아이고.”

가운데에 서 있던 남자가 감탄사를 뱉으며 손을 든다. 두 손바닥이 다 보이도록. 항복의 의미였다.

“수빈아. 싸우러 온 거 아니다.”

구면? 연준이 수빈을 흘끗 쳐다봤다. 수빈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몇 차례의 차분한 들숨, 날숨. 언젠가 많은 모임과 만남의 장소였을 베이커리 카페의 간판이 제 역할을 하려는 듯 달빛을 받아 반짝인다. 수빈의 총구가 천천히 바닥을 향했다.


그룹 중 나이가 젤 많아 보이는 수염이 난 남자는 자신을 김건주라고 소개했다. 건주는 상냥한 목소리로 연준의 안부를 묻고 부모를 잃은 사연을 들으며 저만치 괴로워했다.

그들이 지내는 쉘터는 파주 미군 부대 인근 민간인 지역에 설치되었다. 한국 전쟁 이후 국가재난 상태를 대비해 지어진 쉘터는 핵무기 대피에 용이하도록 만들어졌지만, 좀비를 피해 숨을 곳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훌륭한 안식처가 되었다. 쉘터엔 연준과 같이 부모나 친구를 잃은 또래들이 많다고 한다. 떠돌이나 고아도 적극적으로 받아주고 있다고. 아직 많은 인원은 아니지만, 쉘터는 최대한 사람들을 많이 수용하려고 하고 있다면서. 편의상 그 시초인 ‘쉘터’라고 부르고 있으나, 사람들은 쉘터 바깥으로도 나와 요새를 구축해 농사를 짓고 자가발전 기기를 돌리면서 마을과 같은 꼴을 형성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건주는 이를 자랑스러워하고 또 쑥스러워하며 자신이 그래도 마을 발전에 힘쓰는, 뭐 그런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겸손한 동네 이장 같은 발언에 연준은 그가 쉘터의 간부급 인물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건주가 팔의 상처에 대해 묻자 연준은 영웅담을 전하듯 백화점에서 고생한 이야기를 술술 불었다. 물론 좀비에게 물렸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학습능력이 없는 바보는 아니었다. 이야기를 들은 건주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쉘터에 가면 제대로 치료하자고 했다. 버릇인지 빳빳하게 난 짧은 턱수염을 연신 문지르는 건주를 보며 연준은 아빠 생각을 했다. 

연준은 빵을 입에 물며 눈치를 봤다. 몇 달 만에 먹어보는 탄수화물의 단맛은 눈물이 날 정도로 환상적이었지만, 상황파악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냥 식도락을 즐기기도 무리가 있었다. 파주에서 온 사람들은 두 사람과 함께 베이커리 카페에서 밤을 지새기로 했다. 시간이 늦기도 했고 인근의 건물이 전부 내려앉기도 한 탓이다. 주방의 좀비도 한 차례 확인한 뒤였다. 잠금장치가 튼튼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수빈이 건주와 얘기하고 있다. 1층 창가 테이블에 앉은 연준은 2층 난간에 있는 그들을 훔쳐보며 대화 내용에 귀를 기울여본다. 애석하게도 뭐라고 하는지 전혀 들리지 않는다. “입에 맞아요?” 그사이 연준의 옆에 누군가 자리 잡고 앉았다. 연준의 시선이 수평을 향한다. 상대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두꺼운 두건을 벗어내자 세월의 흔적이 묻은 중년 여성이 보였다. 쉘터 사람들이 켜놓은 촛불 빛 의지하고 있던 터라 여자의 얼굴에 짙은 음영이 졌다. 

“그거 내가 만든 건데.”

“아, 네. 네. 맛있어요! 저 빵 진짜 오랜만에 먹어봐요! 감사합니다. 이런 걸 다 나눠주시고….”

연준이 예의상 호들갑을 떨었다. 여자가 웃는다. 살이 내려 퍼석한 피부였음에도 동그란 광대가 올라오는 게 보여 연준은 그 미소를 푸근하다 느꼈다.

“우리 동네에 가면 굶지는 않을 거예요. 아직 엄청 넉넉하지는 않지만.”

여자는 한동안 파주의 쉘터에 대해 이야기했다. 건주에게 이미 들었던 것도 있어 연준은 대충 추임새를 넣었다. 내내 바라던 희망이 있을 곳일지도 모르는데 연준은 이상하게 기쁘지 않았다. 건주와 대화하는 수빈이 너무 신경 쓰여서다.

“그래도 그동안 큰일 없이 잘 다녀서 다행이네요.”

여자가 말한다. “네에….” 대꾸하며 연준은 회상에 잠긴다. 꼭 큰일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수빈이가 절 구해줬어요.”

연준이 눈을 내리깔고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수빈은 한동안 회유와 설교를 들었다. 수빈을 강제로 끌고 갈 수도 있었을 어른들의 다정한 처신을 당연한 호의로 받아들이진 않았다. 그것이 감사했으나 동시에 위선적으로 느껴졌다.

좋게좋게 말했지만 결론은 포기하고 돌아오라는 거다. 최대한 생명에 지장이 가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하도록 연구진을 설득해보겠다고도 했다. 평생 이렇게 살 수는 없지 않냐는 말이다. 그러나 그건 이미 수빈의 마음속에서 합의된 내용이었다. 물론 상대와는 아직 합의되지 않았지만…. 수빈은 입을 다문 채 난간 너머 1층 창가 테이블을 흘끗였다. 연준이 빵을 먹고 있었다. 위에서 보니 까맣게 물든 정수리가 더 잘 보였다.

“총은…” 건주가 수빈의 품을 흘긴다. 날렵하게 마른 수빈의 품 안에 있을 총의 흔적은 달리 보이지 않았다.

“네가 그걸로 안전하다 느낀다면 돌려받지 않으마.”

“……”

건주는 수빈이 총을 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수빈은 행동력이 없진 않았으나 비교적 겁이 많고 사려 깊었다. 좀비를 상대로는 몰라도 사람에게 쏘는 건 상상 이상의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건주는 그를 온화하게 얕봤다.

“대신 다시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라. 우리도 네게 강압적으로 굴고 싶지 않아.”

본인에게 필요한 처사다. 수빈을 강제로 끌고 갔을 때 불편한 마음에 대한. 수빈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예전엔 몰랐다. 이게 다 저를 위한 배려인 줄 알았는데. 그 배신감과 불신이 얼마나 켜켜이 쌓였는지 건주는 모를 것이다. 생각을 거듭하던 수빈이 눈살을 찌푸렸다. “연준이 형이랑 따로 얘기하게 해줘요.” 이어 강경한 목소리가 나온다.

“제가 면역인 걸 몰라요. 잠깐이라도 상황을 설명할 수 있게 해주세요.”

“……”

“갑자기 돌아갔는데 제가…, 저를 연구해야 한다는 걸 알면 놀랄 거 아니에요. 그동안 저는, 저 형이랑…”

수빈이 잠시 말하길 망설였다. 연준과 관계를 뭐라고 칭해야 할까. 연준은 수빈에게 확답을 주지 않았다. 눈을 한차례 내리깔았다가, 한숨 같은 목소리를 내뱉는다. “…친구가 됐다고요.” 라고.

형. 잠깐 저랑 대화 좀. 수빈이 말하며 연준의 손을 잡았다. 평소보다 조급함이 실려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건주와 일행이 두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신경 쓰인다. 연준은 순순히 수빈을 따라나섰다. 배의 조종키는 수빈이 쥐고 있다. 수빈의 뜻이라기보단 연준이 내어준 몫이었다. 저를 이끄는 수빈의 뒷모습을 보며 연준은 생각한다. 구해준걸까? 물론 그렇게 믿었다. 한강에서 좀비의 습격을 받았을 때도, 백화점 지하주차장에선 연준을 위해 총까지 썼다. 아픈 저를 돌봐주느라 잠을 자지 못한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베이커리 카페 밖으로 나와 도로변 쪽으로 이동한다. 빛을 잃은 도시 대신 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수놓여 있었다. 남자 두 명이 따라 나왔다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멈춰 섰다. 눈에 보이나 목소리가 명확히 들리진 않을 거리였다. “도망가야 돼요.” 수빈이 바로 말했다.

“형 혹시 면역이라는 거 얘기 안 했죠.”

“어어, 안 했긴한데… 왜 도망가?”

수빈이 연준의 손을 잡은 채 눈을 꾹 감았다. 머리가 아팠다. 지금껏 솔직히 얘기하지 않은 수빈의 업보이기도 했다.

“쉘터에선 면역인을 실험해요. 백신을 만들려고….”

“…뭐? 그럼 좋은 거 아냐?”

연준이 알아듣기엔 너무 갑작스러운 설명이긴 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선 달리 납득시킬 시간도 없었다. 수빈은 짧게 설명했다. 자신이 왜 쉘터에서 도망쳤는지,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을 대했는지에 대해. 아니, 야…. 좀 안 믿기는데. 연준이 말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연준은 그곳을 직접 겪어보지 못했다. 수빈이나 쉘터 사람들에게 들은 일방적인 정보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거기 사람들도 많고 그렇다며. 백신 만들면 좀비도 없앨 수도 있는데….”

“…나를 죽이려고 했어요. 산 채로 찢어서 해부한대. 형도 면역인 걸 알면 죽이려 할 거라고요!”

감정에 벅찬 수빈이 토해내듯 말했다가 한차례 숨을 내쉬었다. 연준을 보는 눈길이 곧았다. 

“아직도 모르겠어요? 예전처럼 살 수 있을 거란 희망 같은 거 버려요. 백신 만들면 뭐해? 우린 이미 죽은 뒤인데. 다른 곳이라고 다를 줄 알아? 어디를 가든 다 똑같아요…!”

수빈이 소리를 크게 내지 않으려 애쓰느라 거의 으르렁거렸다. 처음 보는 수빈의 모습에 연준이 당황했다.

“야. 좀 진정해 봐. 도망간다고 해도 어떻게….”

“방법이 있어요. 주방에 좀비들 있죠. 문을 열어서 좀비들이 저 새끼들을 공격하게 하면 돼요.”

연준이 놀라 수빈을 쳐다본다. 너무 잔인한 처사다. 게다가 저 사람들은 ‘새끼들’이란 멸칭을 들을 정도로 난폭하지 않았다.

“너 미쳤냐? 안 돼.”

“다른 방법이 있어요? 우리가 그냥 떠난다고 하면 절대 안 들어줘요.”

“야. 넌 그럼 매번 이런 일 생기면 다 죽이고 갈 거야? 저 사람들 죽이고 또 오면? 또 다 죽이고? 평생 그따위로 살 거야?”

이 삶은 계속될 것이다. 두 사람이 택한 방향으로. 언제나 그렇듯 개선의 여지도 희망도 없이, 빌어먹게도.

역겹다. 의도한 건 아니었으나 연준은 항상 그런 식으로 살아남았다. 감당되지 않는 좀비 떼가 일행들을 잡아먹을 때, 혼자만 비겁하게. 죄책감에 시달렸다. 트라우마였다.

“난 빼줘. 난 그렇게 살기 싫어.”

“형. 정말 왜 그래요? 지금 그런 게 중요해? 빼달라는 게 무슨 뜻이야. 여기서 헤어지자는 거에요?”

헤어지자는 말이 정확히 뭘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물리적인 헤어짐인지 관계에 대한 헤어짐인지. 어느 쪽이든 기분이 좆같을 건 확실했다.

“내가 마음이 약해서 이러는 거 같아? 야. 저 사람들 다 죽이면 뭐가 나아져? 아니잖아. 근데 네 말대로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면, 이런 일 있을 때마다 사람들 다 조질 거냐고. 나아질 것도 없는데. 이따위 죄책감 느끼면서…!”

“나아질 거 없어요, 맞아요. 근데 우리 죽으면 다 끝나잖아. 죽지 않으려고 이러는 거잖아요!”

수빈이 소리쳤다. 연준이 저도 모르게 멀리 선 남자들의 눈치를 봤다. 연준의 손을 잡고 있는 수빈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살아서 함께 있기로 했잖아요!”

“……”

“형한테 별 의미 없는 소리였나봐요. 나한텐 그게 꿈이고 희망이었는데.”

수빈의 잔잔한 목소리가 연준을 적신다. 꽉 잡은 손의 힘도 풀어진 채였다.

수빈은 연준과 타협했다. 사람을 죽이지 않고 빠져나가는 것이다. 대신 도망가야 한다는 의견은 굽히지 않았다. 밤사이에 몰래 도망나가야 했다. 수빈이 먼저 움직이는 계획을 세웠다. 연준의 오른팔이 성치 않기도 했고 아직 연준이 면역인이라는 걸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신변이 보장되지 않아서다. 수빈에게 공격당한다 해도 상대는 하나뿐인 면역인을 쉽게 해치진 못할 것이다.

밤이 늦자 사람들은 수빈과 연준을 분리했다. 수빈은 휴게실이었고 연준은 다용도실이었다. 건주와 일행은 만약을 위한 대비라며 연준을 안심시켰다. 처음 만난 사람을 쉽게 신뢰할 수 없는 것도 이해해달라는 솔직한 말을 전하며. 숨기는 것보다 오히려 그게 납득이 가긴 했다. 역시 저 사람들은 수빈이 말한 것처럼 극악무도한 짓을 할 것 같지가 않다.

너는 정말 나를 구해주려는 걸까?

구해줬다고 생각했었다. 지금껏. 그러면 면역인을 산 채로 찢어서 해부하려 했다는 쉘터에 저를 데려가려 한 이유는? 그리고 이젠 함께 도망가자는 그 말 또한.

면역인의 희생이란, 트롤리의 딜레마다. 사람들에게 브레이크가 고장 난 트롤리 기차의 상황을 제시하고 다수를 구하기 위해 소수를 희생할 수 있는지를 판단하게 하는 문제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세계인이 좀비 바이러스에 고통을 겪고 있다. 면역인 한 명이 희생되면 백신이 개발될 수도 있다. 당신은 그 한 명을 희생시킬 것인가?

그 한 명이 나라면?

연준은 그 선택지가 부담스럽게 느껴지진 않았다. 자신의 몸을 바쳐 세상 사람 모두가 나아질 수 있다면 값싼 희생처럼 보였다. 착한아이 콤플렉스이며 영웅과 구원의 서사다. 사람들은 소년의 희생을 기릴 것이다. 그건 정말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지라도.

게다가 한 편으론 의심하고 있는 거다. 죽어야 한다는 건 수빈의 설명일 뿐이다. 쉘터에서 온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런 세상에 드물게 친절하고 매너있었다. 

수빈이 제게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최수빈을 어떻게 믿지? 그가 저 온화한 사람들에게서 도망 나온 배신자일 뿐이라면?

상대방을 믿는다는 건 어렵다. 현대 사회에선 타인을 믿기 위해 여러 가지 법과 제도를 걸어 놓았었다. 주민등록제도, 결혼제도, 사기죄, 예전엔 간음죄까지. 지금 수빈과 연준에겐 마땅히 서로를 구속할 게 없었다. 연락할 휴대폰도 서로를 아는 지인도 없다. 마음 먹고 사라지면 다시 만나지 못할 거다. 연준을 불안하게 하는 사실이었다. 수빈과 헤어지지 않으려면 그 어떤 단서도 상관없이 그를 믿는 수 밖에 없었다. 그게 거짓이라도 말이다.

밤이 늦자 보초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자러갔다. 연준은 몸을 일으켜 동태를 살피기 위해 문 근처로 다가섰다. 사위가 고요하다. 연준은 이 끔찍한 고요를 싫어하던 언젠가의 자신을 돌이킨다. 사람들 사는 소리가 그리웠다. 파주에 가면 해소될 일일지도…. 연준은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심호흡했다. 이미 선택을 했다. 공허감만큼 수빈에게 밤새 떠들라고 하는 수 밖에. 연준이 있는 다용도실 문 앞에 한 명의 보초가 서 있다. 키는 연준보다 작았지만, 쉘터에서 영위한 건장한 성인 남성을 무력으로 이길 수 있을진 걱정되었다. 

잠시 자리에 앉아 저도 모르게 잠에 들었던 연준은 소란스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쿠당탕, 하고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 사람들의 비명이 문 너머로 들렸다. 무슨…. 연준이 미간을 좁히며 문을 열었다. 보초가 없었다.

수빈은 거짓말쟁이가 될 자질이 충분했다. 일단 다른 사람과 부딪히는 걸 싫어했다. 연준에겐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목소리가 큰 무리에게 받은 오해를 풀지 못해 썩 즐겁지 않은 학창 시절을 보냈다. 더러운 거 내가 피한다 하고 자퇴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했다.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이었다. 수빈은 쿨한 척 애썼을 뿐 상처를 받았다. 그런 식으로 논쟁을 피했을 뿐이다. 결국 제가 결심한 일은 하고야 마는 이상한 고집이 있었다. 그래서, 연준에게도.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목을 들끓는 오물의 소리. 좀비였다. 좀비 떼는 연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이미 누군가를 붙잡고 살가죽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피부가죽이 다 뜯겨 팔의 근육이 다 드러난 남자가 낮게 신음했다. 연준이 차오르는 구역감에 입을 틀어막았다. 주방 문이 열려있었다. 기어코! 연준이 입술을 짓이기며 욕을 내뱉었다. 최수빈, 이 더러운, 개씨발새끼! 분노에 차올라 중얼거리면서도 근육이 찢어먹히고 있는 사람보다 수빈의 안부가 걱정돼서 미칠 지경이었다. 이런 자신이 또라이 같아 불쾌감만 차오를 뿐이었다. 카운터를 지나 휴게실 방향을 향한다. 발에 뭐가 채였다. 좀비화가 진행된 여자가 연준의 발목을 붙잡았다. 아까 연준과 함께 대화를 나눴던 여자였다. 연준이 기겁하고 여자의 손목을 밟아댔다. 부패가 진행 중인 뼈가 부러지면서 튀어나왔다. 저 멀리서 뒷다리 하나가 날아가 처참한 몰골의 로트와일러가 낑낑대며 연준에게 달려들었다. 주인을 지키기 위해 달려온 로트와일러는 헛입질을 하다 좀비의 공격을 받았다. 눈앞에서 불쌍한 미물 하나가 찢어발겨진다. 끔찍했다. 제가 악역이 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눈시울이 붉어져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억지로 틀어막고 걸음을 재촉했다.

휴게실 문은 열려있었다. 뛰어온 연준이 거친 숨을 들썩였다. 건주가 칼을 쥔 채 서 있다. 그 아래로 수빈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칼은 핏물에 젖어 있었다. 수빈의 배가 검붉게 젖은 것과 같이. 건주는 이미 동료를 잃은 분노 때문에 수빈을 공격한 뒤였다. 건주가 연준을 돌아본다. 시선이 연준의 얼굴을 향하지 않는다. 연준이 건주의 시선을 따라간다. 수빈의 총이 떨어져 있었다. 연준이 재빠르게 총을 들었다. 팔이 벌벌 떨렸다. 하지만 방아쇠를 당기는 것에 망설임은 없었다.

총성이 울렸다. 귀가 멎을 듯한 이명이 섬광의 흔적처럼 자리 잡는다. 반동에 팔이 나가떨어질 뻔했다. 스러지는 소리가 난 건 반대편이었다. 수빈이 신경질적으로 제 몸 위로 쓰러진 건주의 몸뚱이를 치워냈다. 연준이 총을 내던지고 다급하게 수빈의 앞에 무릎 꿇었다. 수빈의 배가 핏물로 물들어있다. 연준이 숨을 들이키며 수빈을 제 무릎 위에 눕혔다. 신음하던 수빈이 실소를 흘렸다.

“사람 죽이면서 살기 싫다더니….”

“너 때문이잖아…!”

“맞아요. 저 때문에….”

수빈이 낮은 목소리로 큭큭 웃었다.

“형. 헤드샷이었어요. 소질 있을지도 몰라요….”

“좀 닥쳐봐, 제발….”

이 와중에 뭐가 그리 하고픈 말이 많은지. 밤새 수빈을 떠들게 시키겠다던 결심이 무색하게 연준은 수빈이 떠들때마다 눈물을 줄줄 흘렸다. 연준이 다급하게 겉옷을 벗는다. 옷을 밧줄처럼 펴내어 피가 흐르는 배에 틀어막듯 지혈했다. 수빈이 신음했다. “미안해요.” 곧이어 중얼거린다. “뭐가 미안해.” 연준은 정말 울고 싶지 않았다. 수빈이 정신 차렸을 때 마시멜로 같은 얼굴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다….” 수빈이 가물가물한 목소리로 말하며 눈을 감았다. 이제 상관없을 거 같았다. 이 모든 게. 수빈이 눈을 떴을 때 마시멜로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더라도 말이다. 그저 수빈이 저를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수빈아, 안 돼, 가지 마, 제발….”

수빈의 상처를 막은 연준의 옷이 젖어 들고 있었다. 정신없는 와중에 피가 젖지 않은 쪽으로 접어 다시 지혈했다.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지 아닌지도 몰랐다. 연준의 넘실거리는 목소리가 거센 바람에 흔들리는 유채 꽃밭 같다. 그 시련이 거셌으나 단단하게 뿌리내린 풀 끝의 꽃잎이 순수한 갈망과 청초를 품고 있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날 버리지 않는다고 했잖아. 죽을 때까지 약속이잖아….”

최연준은 진작 뒤졌어야 했다. 최수빈 같은 건 만나지 못한 채로. 좀비에게 물려 사경을 헤매다, 죽는 순간까지 혼자라 자조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어야 했다. 마땅히 그래야 할 운명을 수빈이 바꿔놓았다. 꿈속에까지 찾아와 억지로 생환시켰다. 수빈은 연준을 책임져야 했다. 이렇게 연준을 버리고 가면 안됐다. 연준이 몸을 들썩이며 울었다.

“날 버리면 안 돼. 날 버리면…”

연준의 눈물이 메마른 수빈의 피부를 적신다. 수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수빈은 눈물을 흘릴 기력 조차 없었으나, 제 눈두덩 위에 떨어진 연준의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흘러 마치 저 또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형, 수빈이 입술을 달싹였다.

“저랑 사귈래요…?”

“…뭐?”

“생각해보니까 제가 제대로, 말 안 한 거 같아서… 죽기 전 소원 같은 거…라고 해야 하나….”

“알았어, 사귈게, 사귈 테니까…, 죽기는 누가…! 말 좀 그만해. 너 피가 너무,”

많이 나, 끝 말을 맺지 못하고 울음이 새어나갔다. 

연준은 더 이상 자기연민 하지 않았다. 그가 말이 통하고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어서도, 막 탄생한 젊은 커플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회적 시선 때문도 아니었다. 그는 최수빈이다. 단순히 ‘사람’이나 ‘남자친구’라는 단어 따위에 가둘 수 없는,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존재. 어린왕자의 장미처럼, 그 어떤 제도와 제약 없이도 저의 반려가 되길 자처한. 연준이 수빈을 끌어안은 채 눈물을 흘렸다. 연준은 더는 외롭지 않았다.

“…키스… 해주세요.”

수빈이 어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연준은 망설임 없이 수빈에게 입을 맞췄다. 꺽꺽 올라오는 울음을 삼키며 수빈의 입술에 제 입술을 아로새긴다. 주변에 좀비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이 좆 같은 세상에서, 인류 존속이나 생존 같은 대의적인 모든 희망을 버리고 고작 수빈의 왕자나 공주 따위가 되어주겠다는 맹세를 남기기 위해. 마치 디즈니 동화의 키스신처럼, 최연준의 붉은 입술이 최수빈의 희미해진 심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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