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랜드
최연준은 그랬다. 암만 최수빈 좆 빨아주고 뒤 박혀도 언젠가 공기업 다니는 마누라 얻어서 슬하에 딸 하나 아들 하나 낳고 살 줄 알았다. 젊을 때의 일탈, 즉 시꺼먼 사내새끼인 최수빈과 사귀었던 과거는 전부 잊고서. 그 애 자는 모습이 암만 귀엽건, 살과 살을 맞대면서 사랑을 속삭이는 목소리에 심장이 쿵쾅거리건, 한때라는 미명 하에 먼지 쌓일 거라 생각했는데.
첫미팅 겸 대본리딩 때 마주한 얼굴을 보고 얼어붙었다. 제작진 쪽에 앉아 있는 키 큰 남자가 바로 그 최수빈. 연영과 동기 cc였으나 동성 커플이라는 이유로 모두에게 비밀에 부쳐졌던 제 옛 연인. 오디션 때 없어서 안심했는데 이런 불상사가 발생했다. 수빈은 이번에 연준이 출연하게 된 로맨스 소설 원작의 웹드라마 「원더랜드」의 FD였다. 최수빈 이쪽 분야 자기랑 안 맞는다며 때려치우는 줄 알았는데, 알음알음 예능국 작가나 신입 PD로 일한다는 얘길 듣긴 했다. 수빈은 연준을 보고 고개를 까딱했다. 미리 사전에 고지 받고 준비하고 있던 사람의 담백한 제스처였다.
미팅이 끝나고 담배를 태우러 나온 연준을 수빈이 쫓아온다. 따로 인사라도 할 모양이다. 알아서 추스를 마음 괜한 얼굴 마주 보며 헛기침하게 생겼다. “연준아.”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야속하게도 그대로였고.
“염색 해왔네. 피디님이 좀 빡세지.”
“뭐어…. 하라는데 해야지.”
연준이 제 머리를 만지작거린다. 더티 블론드는 원작 소설의 일러스트와 비슷하게 한다고 나름 애썼다. “너 요즘 드라마 하는구나.” 연준은 눈만 있으면 아는 당연한 소리를 한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는 뻔한 얘기도 묻고 싶은데 왠지 없어 보여서 참는다. 최수빈이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하면 안될 것 같았다. 그럴만한 군번이다.
“우리 졸업하고 나서 처음 보네…. 그동안 잘 지냈어?”
수빈이 먼저 묻는다. 형식적인 질문. 적어도 연준은 그렇게 느꼈다. 그래서 “그냥….” 하고 말끝을 흐리는 걸로 마쳤다. 연준은 무명을 전전하다가 한 드라마의 조연으로 주목받아 라이징이 된 지 얼마 안 되었다. 원더랜드가 중요했다. 학교 다닐 때 지지고 볶던 전 애인과 일터에서 만난 건 중요치 않다. 최수빈은 이미 이걸 다 알고 있을 거다. 최연준이 최수빈의 행적을 알고 있는 것처럼. 모르고 싶어도 알 수 밖에 없는 업계 바닥이었다. 연준은 수빈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표면적인 대화는 그만하고 싶었다. 연기 전공하는 내내 다른 사람 흉내는 잘만 냈으면서 자기감정 숨기는 건 여전히 어려웠다.
“너 아직도 팔리아멘트 피냐.” 연준은 말하며 제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한 개비 집는다. 요즘은 전담으로 갈아탄 애들도 많으니까. 수빈은 잔잔하게 웃을 뿐 대꾸하지 않는다. 연준이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며 말한다. “담배 끊었냐?” 부정확한 발음이다. 수빈이 연준에게 대답한다.
“애인이 안 좋아해.”
“아.”
개새끼. 연준이 속으로 욕을 곱씹는다. 굳이 애인이라는 단어를 쓰는 의미를 안다. 수빈은 담배에 불을 붙이는 연준을 가만히 바라보다 묻는다.
“넌? 여자친구 있어?”
“…없어.”
최수빈의 눈동자가 굴러간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지 뻔하다. 자기랑 헤어지고 당장 여자 만날 것처럼 굴더니 솔로라고? 그런 식의 사람 뻘쭘하게 만들 얘기만 한가득하겠지. 수빈은 안 그렇게 생겨선 은근 잘 비꼬았다. 순한 외모와 말투 안에 참고 쌓아뒀던 게 심한 말로 나오지 못하고 비틀린 언사로 재생되는 것이다. 연준은 한껏 긴장한다. 헤어지자고 말했을 때 최수빈 울렸던 죗값을 치를 때가 왔다. 무시무시한 형벌이 단두대의 칼날처럼 떨어지길 고대한다. 고대했으나.
“그렇구나.” 수빈은 그냥 그렇게 대답했을 뿐이다. 화를 내기엔 오래 전 일이다. 그것이 어린 시절의 과오든 타인의 가치관이든 받아들이는 건 어렵지 않다. 연준은 수빈에게 그저 그런 식으로 납득 가능한 사람이 된 거다. 탓할 대상 없는 심술이 난다. “우리 서로 모르는 척 하자?” 입술을 삐죽거리며 수빈에게 위악적으로 군다. 공갈 없는 협박. 수빈은 미소 띤 채 고개를 주억인다.
“없던 일처럼.”
“그래. 없던 일처럼.”
너 번호 바꿨더라. 사실 이 말을 내내 하고 싶었는데 꾸역꾸역 집어삼킨다. 장하다, 최연준.
*
사람들은 왜 이런 이야기를 좋아할까. 한 여자를 사랑하는 두 남자. 그리고 끝내 버려지는 한 남자의 애절한 로맨스. 최연준이 맡은 은수 역은 여주인공 재희를 붙잡고 싶었으나, 아이돌이라는 특수한 직업 때문에 붙잡을 수 없었다.
FD인 수빈은 시간에 맞춰 연준의 스케줄과 컨디션을 체크하러 온다. 내일 비 오는 장면 물 맞아야 하는데 괜찮죠? 업무 상 수빈은 존댓말을 쓴다. 네, 네…. 연준도 수빈에게 존댓말로 대꾸한다.
“우리 조연출이랑 연준 씨 둘이 대학 동기라면서? 서로 죽고 못 살았다던데.”
오오~. 잠깐 쉬는 시간. 피디가 꺼낸 흥미로운 가십거리에 동료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반응한다. 백날 존댓말하고 거리감 있는 척 해봤자 역시 이 바닥에선 안 통한다. 수빈이 담백하게 대꾸한다.
“친했었죠.”
“친했었죠? 왜 과거형이야.”
수빈은 연준의 눈치를 본다. 저보단 공인으로서 노출이 많이 되는 연준의 입장이 더 중요할 거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떠넘겨봐야… 연준은 대충 웃으며 너스레 떤다.
“아이, 뭐. 졸업하니까 만날 일도 없고 연락 뜸해져서 어색해지고, 그런 거.”
“아아. 그런 거 알지.”
나도 그런 친구 있어. 다행히 공감대를 사서 넘어간다. 둘이 이번 기회에 다시 연락하고 지내면 되겠네. 맘 맞는 친구 만드는 게 쉬운 일이 아니야. 필요 이상의 조언엔 그저 하하 웃고.
없던 일처럼 굴자. 최수빈과 함께 했던 시절 전부. 그냥 친한 동기였던 거다. 가끔 입술도 부비고 장난으로 섹스 비디오도 찍었지만 베프끼리 그럴 수도 있지. 아마도 그랬을 수도 있지.
클라이막스 촬영. 최연준이 맡은 은수의 클라이막스고 이로써 은수 촬영분은 끝이다. 여자 주인공 재희에게 거절 당하는 은수. 연준은 대본을 확인한다.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처음 내용을 확인했을 때 느낀 감정은 뭐라 설명할 수 없이 착잡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연준은 헤어 세팅을 하고 의상을 입었다. 내용상 무대를 마친 뒤 나오는 길이라 가죽 재킷을 하나 걸쳤다. 촬영 전 수빈이 연준의 스타일링을 확인했다. “화려하네요.” 간단 평. 어차피 대학 다닐 때 둘이 죽고 못 산 거―한때 절친 정도로 정리했다― 다 까발려졌는데 여전히 업무상으론 존댓말을 했다.
“좀 더 초라해 보여도 좋겠는데요. 차이는 씬이니까.”
“재킷을 벗을까요?”
연준이 제 옷깃을 잡고 젖히는 시늉을 했다. “연준 씨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거 같나요.” 수빈이 묻는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연준은 표정을 갈무리 하려 애쓰며 재킷을 벗었다.
S#7 ―방송국 뒤뜰 (낮)
성큼성큼 걷는 재희의 뒤를 따라붙는 은수. 참지 못하고 돌아보는 재희.
재희 그만 해. 나 너 이러는 거 원하지 않아.
은수 재희야.
재희 너 평생 이러고 살 거야?
은수 …
재희 데뷔하고 싶어 했잖아. 너도 일해야지.
은수 …
재희 너 나랑 떳떳하게 못 만나잖아. 나도 이제 일에 집중해야 하고…
방송국 앞 인파가 신경 쓰이는 재희, 말을 맺지 못한 채 돌아서고. 재희의 손목을 잡는 은수.
연준은 작게 심호흡했다. 맞은 편의 여배우는 재희 역에 집중해 연준과 눈을 마주치고 있다. 그리고 은수는… 최연준은, 씨발, 최연준은.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 내 입으로 말할 수 있을까. 벌써 아랫입술이 떨렸다.
“왜 네 미래에 내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
비참하다. 눈물이 주룩 흘렀다. 페르소나가 가득 담긴 아름다운 연기가 카메라에 찍힌다. 사실 연기가 아니었다. 최수빈 개새끼, 시발놈. 최연준은 이미 은수가 아닌 최연준으로서 울고 있었다. 아니, 최수빈으로서 우는 건가? 이제 이것도 모르겠다. 이 대사는 최수빈이 저에게 했던 말이었다. 원더랜드는 개뿔. 없던 일로 하자며. 다 잊은 것처럼 굴더니. 원더랜드가 아니라 최수빈의 복수랜드다.
원큐에 끝난 촬영. 연준은 촬영이 끝나고도 계속 울었다. 매니저가 손수건이며 휴지며 갖고 와서 달래줘도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연준 씨 되게 몰입했네. 유치한 청춘 드라마에 십분 발휘하는 직업정신. 스태프들이 연준에게 존경을 표한다.
연준이 주차장 본인 밴 근처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수빈이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단번에 우악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야. 너 진짜 한대만 때리자.”
주먹을 꽉 쥔 연준이 부들부들 떠는 시늉을 하다 손을 거둔다. 멀뚱멀뚱 서 있는 최수빈이 바보 같아서였다. 진짜 주먹이 운다.
“내가 널 어딜 때리냐, 씨발…. 민둥민둥하고 허여멀건 새끼를….”
“그건 그거대로 존심 상하네.”
수빈은 연준을 흘끗 본다. 눈 주위가 벌겋다. 머쓱하거나 부끄러울 때 얼굴 이상하게 쓰는 버릇 진작 알고 있었다.
“작가님이 안 풀린다고 해서 내 아이디어 좀 제공했지. 진짜 쓰실 줄 몰랐어.”
수빈은 사과하지 않는다. 대신 담배를 꺼냈다. 팔리아멘트 곽에서 나오는 담배 한 개비. 연준이 수빈을 흘겨본다.
“애인이 안 좋아한다며.”
“안 좋아하는 건 맞는데, 끊은 것도 아냐.”
“……”
“나도 너 엿 한번 먹여보고 싶었다. 왜.”
맨날 나만 엿 먹었잖아. 수빈이 말에 연준은 미간을 좁힌다. 나쁜 놈. 내가 너를 엿 먹였다고?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데이트 코스도 내가 짜고 생일 때마다 좋은 거 사주고. 네가 나 박고 싶다고, 그게 예쁘다고 해서 맨날 박혀줬는데. 씨발, 수십 번을 그래 놓고. 헤어지자고 한번 했다고, 그거 한번 했다고 나 죄인 만들고.
물론 그때, 권태기가 온 걸 대놓고 티 냈었다. 상심하게 했다. 연준은 수빈을 거듭 실망시켰다. 헤어지자고, 그만하자고, 연준이 입 밖으로 이별을 구체화 했을 땐 수빈의 두 눈에 물기가 가득 차 있었다. 너도 결혼해야지. 우리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잖아. 연준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수빈은 섧게 울었다. 지구상에서 다시 볼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의 청초한 얼굴로.
연준아. 왜 네 미래에 내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 다시 생각해보면 안 돼? 나 아직 너 많이 좋아해.
최연준의 미래에 최수빈은 있었다. 원더랜드 FD로, 그리고 그 이전에도 쭉. 친구에게 여자를 소개 받을 때, 수빈이 좋아하던 음식을 먹을 때, 저보다 키가 큰 동료 배우를 볼 때마다, 연준은 수빈 생각을 했다. 몸이 고플 때 충동적으로 게이 만남 앱을 깔았다. 다섯살쯤 많다고 한 남자는 실제로 만나자 열 살은 많아 보였다. 남자에게 안기자 연준은 소름이 돋았고 원하던 건 XY염색체가 아닌 최수빈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뜩 든다. 사서 당한 추행에 욕을 연신 곱씹는다. 전화번호부에서 수빈의 번호를 띄워놓은 채 망설인다. 덜덜 떨던 엄지가 기어코 통화 버튼을 누른다. 헤어진 지 7개월 만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면서도 막상 목소리 듣는다고 생각하니 당한 일은 잊고 설렘이 차올랐다. 그 애가 부르는 제 이름이 그리웠다. 나를 반가워해 줄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저자세로 매달려볼 자신이 있었다. 수빈은 마지막까지도 저와 헤어지기 싫어했으니까 어렵지 않게 받아주리라고. 얼굴 보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잖아. 원래 매일 보던 얼굴, 잊기 전에 한 번쯤 더 봐도.
초가을의 찬바람이 반소매 틈새로 기어들어 올 때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였다.
*
뒷풀이는 조촐하게 이루어졌다. 오픈 후 반응이 나와야 다음 시즌이 이어질지 아닐지 결정될 터였다. 조명감독이 자주 간다는 삼겹살집은 단체 테이블도 없고 비좁았지만 삼삼오오 나눠 앉아 북적거리는 맛이 있었다. 이마저도 대학 술자리가 생각나는 건 그냥 최수빈이란 대학 동기가 있어서다. 수빈은 여전히 얌전하게 술자리를 지킨다. 간간이 사회 생활하며 웃고 술은 적당히 마신다. 연준은 여전히 떠들썩하게 굴고 테이블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술자리를 좋아하지 않는 피디 덕에 자리가 2차로 이어지진 않았다. 각자 그룹을 추리는 와중에 연준은 수빈에게 다가선다. 수빈은 휴대폰을 붙잡고 있었다. 화면을 훔쳐보려고 애쓰지만 공연히 실패한다. 얼핏 메시지창 같은 걸 봤는데 애인일까. 수빈이 돌아보자 연준은 시치미를 떼고 목을 가다듬는다. 큼큼. 야. 최수빈. 너 우리 집 올래?
옛 연인이 같이 술 마시자고 자취방에 초대하는 저의가 뭘까. 그런 건 굳이 답을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수빈은 뻔한 수작을 승낙한다. 이건 연민일까.
적어도 연준은 수빈을 연민했다. 제게 차이는 과거의 그 애를 연민하고, 제 부탁을 들어주는 지금의 그 애를 연민했다. 미워할 수 없는 마음은 막연한 동정을 만들고 자비를 베풀게 한다. 최수빈이 내어주는 허용치도 그런 종류일까. 하지만 마음에 없는 자비는 희망 고문이다. 감정을 파헤치고 해체한 끝에 남는 터럭이 네가 아직 놓지 못한 알량한 복수라면, 그때 포기할 수 있겠지. 구질구질한 전남친이 되어 퇴장하는 거다.
층고가 높은 복층 오피스텔.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은색 모빌이 달랑거린다. “이거…” 수빈이 무심코 언급한다. 제가 준 선물이었다.
“안 버렸네….”
“예쁘잖아.”
소파 앞 바닥에 앉아 편의점에서 사 온 과자며 맥주를 늘어놓는다. 아무 영화 채널이나 틀어놓고 떠드는 건 사귈 때 맨날 하던 짓이다. 수빈은 술을 마시는 것보다 수다 떠는 걸 좋아했다. 사람 많은 술자리에선 조용히 있다가 단 둘이 있을 때만 조잘대는 게 귀여웠다.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면 가끔 글로 써왔다. 연준은 진지하게 품평해줬다. 나중에 IP작만 주야장천 촬영할 줄도 모르고. 몇 년 만에 단 둘이 술 마시면서 수빈이 하하 웃으며 말한다.
“난 네가 준 물건 다 버렸어.”
“지갑도?”
“그건 중고로 팔았어.”
“잘했어.”
“팔아서 치킨 시켜 먹었어.”
“응. 겁나 잘했어.”
연준이 손을 뻗어 수빈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린다. 습관이었다. 몇 년이 지난 습관도 습관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건 모르겠지만.
“너 우리 떡치는 영상도 다 지웠지?”
“그거 너 보는 앞에서 지웠잖아.”
“백업해 놓거나 그랬을까 봐.”
“백업해 놓을 걸.”
“또라이 새끼.”
연준도 웃는다. 오랜만에 보는 웃음이 낯설다. 탈색하고 피어싱 주렁주렁 달고 웃는 최연준. 그에게 볼 새로운 모습이 남았다는 사실을 마주하며. 앞머리가 부스스한 수빈이 연준을 응시한다. “있잖아.” 수빈이 운을 뗀다. 잠긴 목소리.
“드라마를 많이 보기도 하고 만들어보기도 했는데, 현실이 제일 이상한 거 같아.”
“어엉.”
“원더랜드보다 우리한테 벌어진 일이 더 이상해. 네가 이렇게 머리 탈색하고 피어싱 끼고 다닐 줄도 몰랐고.”
인상 뚱해서 사나워 보인다고 은근히 FM대로 하고 다니던 그를 기억하기에. 수빈이 손을 뻗어 연준의 귓바퀴를 매만진다. 귀를 뚫은 지 얼마 안 된 귓불이 발갛게 부어있었다. 연준은 수빈의 손가락이 스칠 때 아리는 통증도 참고 가만히 있는다.
“연준아, 연준아.”
“응.”
“너 원래 아이돌이었던 사람인 거 같아.”
“그래?”
“응. 잘 어울려.”
“고마워어~.”
하하. 수빈이 웃었다. 난데없다.
“너 누가 칭찬하면 바보 같아지더라. 예전이랑 똑같네.”
연준은 자신이 바보 같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뭐가 예전이랑 똑같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최수빈이 웃을 때 경단 같이 말려 올라가는 눈두덩이나 희멀건 볼살이야 말로 예전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헤어지기 직전보다 살이 오르고 건강해 보였으니, FD라는 극한직업보다 제가 한 이별 선고가 그에게 더 상처였으리라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연준은 수빈을 아득하게 바라본다. 그리고 조심스레 다가가 입 맞췄다. 수빈이 연준을 밀어냈다. 연준이 다시 수빈에게 달라붙었다. 술 먹고 한 실수가 아니었다. 연준은 취하지 않았다. 수빈도 제정신이었다. 제정신으로 연준의 양팔을 잡아 세운다.
“연준아. 나 만나는 사람 있어.”
“알아. 나도 알아.”
“나 이제 너 안 좋아해. 알지.”
“응.”
그러나 최수빈은 최연준에게 입 맞췄다. 볼을 감싼 커다란 손이 달달 떨렸다. 도톰한 입술은 부르트고 까끌까끌해서 학부생 시절 밤새워 촬영했을 때 나눈 키스가 떠올랐다. 영상 연기 수업에서 같은 조가 됐었다. 수빈은 감독 겸 시나리오를 맡았고 연준은 남자 주인공이었다. 최수빈이 매일 듣는 발라드 뮤비처럼 구질구질한 로맨스. 연준은 오해를 단단히 한 여자친구에게 뺨을 맞는 씬을 촬영했다. 처음엔 여자 배우가 때리길 주저해서 다시, 임팩트가 적어서 다시, 각도가 별로라고 다시, 날파리가 끼어들어서 다시……
촬영이 끝났다. 연준은 뺨을 열 대를 맞았다. 수빈이 사용한 건 첫 번째 테이크였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냐고 묻는 연준에 수빈은 안절부절못하며 웃어 넘겼다. 늦은 새벽 시간 조명팀을 철수 시키고 뒷골목에 쭈그려 앉아 맞담을 피우던 연준이 묻는다. 너 사실 나 싫어하는 거 아냐? 그 말에 수빈이 폭소한다. 목젖이 보일 정도로 고개를 젖히고 웃다간 가느다란 목소리로 해명한다. 그럴 리가. 야, 최연준. 그럴 리가. 미소를 띤 채 담배를 끈 수빈이 연준을 본다. 커다란 손이 연준의 볼을 향한다.
어디 봐. 많이 아파?
어어. 아파.
연준이 손길을 피하지 않자 수빈은 입술을 말아쥔다. 몇초간 눈이 마주친다. 영원 같은 찰나, 아득한 눈빛에 영혼을 던지며.
수빈은 연준의 발갛게 터진 뺨을 쓰다듬으며 입술을 겹쳤다. 제 볼에 닿은 손가락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고 있었다. 연준은 그때야 알게 된다. 최수빈이 여자친구가 없는 이유, 매일 밤 대본 봐달라면서 전화한 이유를. 아, 그래서였구나. 그래서 네가 이 시나리오에 키스씬을 안 넣었구나. 나를 때리고 싶을지언정 차마 남에게 넘기고 싶지는 않았구나. 나를 함부로 대하고 싶어 하는 주제에 나와 닿을 때마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걸 만지듯 어쩔 줄 몰라 하는구나. 너 나를 사랑하는구나. 시간이 흘러 끝끝내 이별을 고해도 네 마음은 미련할 정도로 변치 않았구나. 그때 우리는 그런 감정에 매달렸구나.
연준이 침을 꼴딱거리며 삼키다 수빈을 밀어냈다. 축축한 입술을 달싹이며 울음을 터트린다. 연준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수빈의 멱살을 잡고 고개를 떨구었다. “내 청춘 너한테 다 바쳤어, 개자식아. 이건 없던 일로 할 수가 없어. 알아?” 연준의 울분에 수빈이 쓰게 웃는다. “응.” 하나 마나 한 대답이었다. 그건 수빈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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