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자 X 2
제르네우스 맥과이어
00.
제르네우스 맥과이어는 대체 뭐하는 박쥐 자식인가? 이걸 알기 위해서는, 우린 10년 전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16세의 그와 아처 가는 거래를 했다. 너와 네 가족의 안전을 담보해줄테니, 가문의 뜻에 반대하지 말고 우리 집안의 장손으로 살아라. 사회와 정면으로 부딪히며 나대는 게 인생의 낙이었던 그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좆같은 집구석! 내가 어른만 되어봐라, 단물만 다 빨아먹고 도망쳐주마.” 그러나 끓어오르는 투쟁심을 억누르고 순수 혈통을 가장해 살던 그에게 돌아온 것은 빈정거림도, 냉대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가족’들의 진심어린 환대와 달라진 제 위치에 따라오는 이전과 다른 시선, 다른 대우였고, 잡종 마법사는 평생 가져보지 못할 기회에 아주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을 계기는 뜻밖에도 찾아왔으니. 학교에서의 마지막 날, 모두가 끌려나가는 와중 당신들과 함께할 수 없었던 때, 가만히 앉아 지켜볼 수만 없었던 그의 안에서 수치심과 분노가 몰아친다. 졸업식조차 함께 하지 못한 당신들과 영영 다시 보지 못하게 되어버린 이들을 생각하며 제 결심을 되새긴다. “개좆같은 세상. 내가 골수까지 다 빨아먹고 버려주마.” 혈통 지상주의자의 껍질을 뒤집어쓴 첩자 제르네우스 아처는 이렇게 탄생한다. 그는 순수 혈통들과 제 가족 모두를 단단히 털어먹기로 결심한다.
00. -2
사람들과 어울린다. 정보를 캐내고, 넘기고, 시치미를 떼기. 반복.
01.
“조금 더 ‘자극적이게’ 개량할 수도 있는데. 이 정도로 충분하겠어?”
“당연하지.”
20번째 생일로부터 2주 전의 어느 날. 정제된 물약 두 병이 제르네우스의 손 안에서 빛났다. 듀크스 병의 치료제로 알려진 비약, 그것의 ‘마법을 저해하는 효과’를 재현하기 위한 노바 발렌슈타인과의 임상 시험도 햇수로 5년 차였다. 암만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지만, 실험쥐로서의 생활이 마냥 즐겁기만 한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누구든 수천 번의 코피와 수백 번의 구토, 수십 번의 기절, 두 번의 심정지를 겪고 나면 그런 말은 못하겠지. (그의 목숨을 붙여놓는 것은 언제나 실험자 노바 발렌슈타인의 몫이였다. 발렌슈타인의 두뇌여, 만세!) 다행스러운 점은, 14살부터 이어온 이 실험도 이제는 종지부를 찍을 날이 왔다는 것. 제르네우스는 벗어두었던 겉옷을 챙겨입었다.
“이따 보자.”
”그래. 행운을 빌어, 제른.“
”너도. 네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길 바라.“
오늘은 그가 제르네우스 아처로 사는 마지막 날이다.
02.
아처 가의 저택은 화려하진 않았으나 버텨낸 세월만큼의 고풍스러운 멋이 있었다. 정원을 가로질러 주방을 통하는 쪽문으로 들어가자, 저녁 식사 준비에 한창이던 집요정 하나가 꽥꽥거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붙였다. 도련님, 정문으로 오시지 않으시고요! 뭔가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실까요? 제르네우스는 짐짓 철없는 도련님의 표정을 지어보인다. 배고파서 뭐라도 집어 먹으려고 왔는데… 전에 내가 먹었던 치즈 쿠키, 그거 있을까? 그게 갑자기 너무 먹고 싶은데. 오, 지금 남은 건 없지만 그걸 파는 가게는 아직 문을 열고 있을 거에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순간이동 특유의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집요정의 모습이 사라진다. 사태가 예상 외로 잘 풀리자, 제르네우스는 쩝하고 입맛을 다셨다. 드러누워 떼를 쓸 작정까지도 했었는데.
부엌에서 느껴지는 다른 인기척은 없었다. 제르네우스는 화구 앞에 선다. 중간 사이즈의 냄비 안, 전채 요리로 나갈 수프가 끓고 있었다. 품 속의 비약을 꺼내 그 안에 쏟아 넣어도, 수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만히 끓고만 있었다.
03.
길다란 테이블에 조부모와 셋이서 둘러 앉은 저녁 식사 자리는 여느 때와 다름 없이 단란했다. 큰아버지 부부는 겨울 휴가 차 유럽을 돌고 있었고, 그의 부모는 미국으로 출장을 가 식탁은 유독 빈 자리가 많았으나 식사 자리의 오디오를 채우는 것은 원래도 제르네우스의 몫이었기에 새삼스럽게 다를 것도 없었다. 요새 어울리는 ‘친구'들과의 재밌는 일화를 시작으로 다가올 그의 생일에 초대할 인원을 간추리는 것을 떠들어대며 타이밍을 재고 있던 제르네우스에게, 그의 조모가 문득 되물었다.
“제른. 그러고보니 이제 생일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면서 아직도 가지고 싶은 걸 못 정했니?“
”글쎄요. 전 할머니의 사랑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얘는! 어쩜 클수록 너스레가 더 느는 것 같아.”
”작년처럼 게으름 피우다 생일 다 지나서 받지 말고 빨리 정하도록 해라. 이것마저 귀찮아하면 어떡하자는 거냐? 남들 눈에는 네가 어떻게 보이겠어?“ 그의 할아버지가 끼어들었다. 조부는 말이 거칠었지만 제 손자를 제법 아끼는 사람이었다. 제르네우스는 웃으며 대꾸한다. ”그러다 제가 비싼 옵션 줄줄이 달린 신형 빗자루 같은 걸 갖고 싶다고 하면 어떡하시려구요?“
”차라리 제발 그러도록 해라. 빗자루를 타지도 못하는 다른 집 망나니들은 색깔별로 빗자루를 마련해 전시하고 다니는데, 명색이 퀴디치 선수도 했다던 넌 아직도 옛날 빗자루를 붙잡고 있으니 내 속이 터지던 차였다. 내가 그것 하나 못 사줄까!“
”진짜요? 그거 진심이시죠?“
기회였다. “그럼 맘 바뀌시기 전에 얼른 카탈로그 가져올게요!” 익살스럽게 대꾸한 제르네우스는 빠른 걸음으로 식당 밖으로 뛰쳐나갔다. 등 뒤에서 “밥상 머리에서 뭐하는 짓이람. 저 버릇 없는 놈.” 하고 혀를 차는 조부의 핀잔과, “아이답고 좋잖아요.” 하고 웃는 조모의 대화가 들려왔다. 이것도 제가 마지막으로 들을 가족들의 목소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식당에서 충분히 거리가 멀어지자, 제른은 이를 악물고 제 방을 향해 전력질주했다. 계단을 달려올라가 제 방문을 열자 눈에 익은 배치가 들어온다. 침대 아래에 숨겨둔 배낭을 잽싸게 차고, 새로 사둔 신발로 갈아신었다. 제 방에서 밖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인 창문은 보이지 않는 ‘마법적인’ 창살로 막혀있었다. 조부는 요즘 같이 흉흉한 세상, 돌연 괴한이 습격해오는 것을 막기 위해 걸어둔 주문이라 말했지만, 과연 그럴까? 살아본 사람의 의견으로는, 이는 안에 든 것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용도였다.
옛날 옛적, 그들이 제르네우스에게 협상으로 내 건 카드는 ‘안전’이었다. 그들은 피를 이은 장손을 필요로 했고, 제르네우스는 안전하게 몸을 의탁할 곳을 필요로 했기에 성립될 수 있는 거래였다. 가족 중 마법을 쓸 수 없는 미성년 마법사가 있다는 것은 안전에 있어서 큰 위험 요소였기에, 이는 당시의 제 아버지나, 제르네우스 그 자신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지금도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한 지금의 제르네우스는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이에 그들은 저를 이 자리에 들어앉히기 위해 천금과 명예, 애정까지 전부 손에 쥐어주려 들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만큼 그들은 불안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버리고 뛰쳐나간 제 부친, 테오 아처라는 전적이 있었으니.
그들은 제 체면을 깎으며 혈통마저 갈아끼운 장손을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과거의 사건을 말미암은 그들은 보다 ‘고도화된’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제르네우스가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력화해야할 마법은 약 열 가지였다. 방 창문을 가로막은 창살 마법과 제게 붙어있는 위치 추적 마법 1, 2, 3, 4 … 인식하지 못한 기타 마법들. 노숙한 마법사인 제 조부가 작정하고 건 주문들을 갓 학교를 졸업한 신출내기 마법사가 파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전부 해제하려면 십 년은 족히 공부만 하고 살아야겠지. 정정당당한 방법으로는 이길 수 없는 상대다. 그러나 제르네우스는 생각해냈다. 만약, ‘우연히’ 마법의 술자에게 변고가 생겨버린다면, 그가 걸어둔 마법의 행방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술자가 죽은 후에도 유지되는 종류의 마법은 드물었다. 이는 죽음과 동시에 그의 영혼에 새겨져 있던 마법이 힘을 잃었기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한 마법사에게서 마법이 모조리 사라져버린다면, 그가 걸었던 모든 주문들은 힘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마법을 없애는 비약’의 지속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으므로, 한시가 급했다. 제르네우스는 방을 크게 둘러본다. 벽에 장식용으로 걸어둔 빗자루는 5학년 때까지도 현역으로 사용했던, 그의 오랜 파트너였다. 제르네우스는 빗자루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고 주문을 외웠다. “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걷는 것보다도 나는 것이 익숙한 그가 이런 기초적인 실수를 할 리 없었다. ‘약효’는 정확하게 먹혀들었다. 지금의 그는 마법을 쓸 수 없었다. 같은 요리로 식사를 한 조부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배낭을 고쳐매고, 제 방문의 창문을 열었다. 어두운 겨울의 밤, 차디찬 바람이 그의 얼굴을 쓸었다. 제르네우스는 망설임 없이 창 밖을 향해 뛰어내렸다. 가로막는 창살은 없었고, 난생 처음, 그는 떠오르지 않을 추락을 알면서도 몸을 던졌다.
03.
정원을 가로질러 달리는 제르네우스의 등 뒤로 훅, 열기와 함께 폭음이 솟구친다. 아처 가의 오랜 저택이 불에 휩싸이고 있었다. 놀랍지 않았다. ‘설계자’가 제 새로운 시작을 돕고 있었다. 저 불은 결코 그를 해치지 않을 것이었으므로, 제르네우스 맥과이어는 제가 내딛는 발걸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04.
아처 가의 경계를 빠져나가자, 미리 입을 맞췄던 대로 스텅 오브라이언이 차를 대기시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사우샘프턴 항구까지 가는 내내 그의 만담에 어울리는 동안, 몸에 바짝 들어가있던 긴장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 “정말 어떤 마법도 못 쓰는 거야? 머글이 따로 없네.”, “머글의 주먹맛 좀 볼래?” - 꼭 호그와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아 웃음이 나왔다. 도착한 항구에는 3시간 뒤에 출발하는 뉴욕행 배가 한 척 서있었고, 제르네우스는 여객선의 3등석 티켓을 두 장 샀다. 모터로 돌아가는 배는 아주 거대했고, 승객들 사이에 섞인 그는 평범한 한 명의 청년으로 보였다.
05.
배신자 제르네우스 맥과이어는 감히 애정을 논한다. 기꺼이 그를 믿어주기로 선택한 이들을, 제가 불살라버린 기회들을,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모든 일들을 생각한다. 만일 다른 누구들과 같은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면, 조금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는 멍청한 것이 장점인 제르네우스 맥과이어였으므로, 끝내 스스로를 속여가며 살 수 없었다. 그는 자기 자신조차 속일 수 없는 멍청이였다.
…
…
…
999.
”제우스(ZEUS)! 어딜 그렇게 가, 전역 기념 한 잔 해야지?“
”꺼져, 필립! 나보고 내라고 할 생각이잖아. 너 같은 승냥이들이 한둘이었는 줄 알아?“
”당연하지. 싫으면 바(bar)말고 펍(pub) 가서 물(wadder)말고 생수(wo-ter) 달라고 해.“
”젠장.“
필립은 껄껄 웃어제끼더니, 죽상을 한 제르네우스의 어깨를 붙잡아 이끌었다. 금주법이 시행되던 1920년대의 미국 한가운데, 사람들의 입과 입 사이를 통해 그 출입구가 전해지는 스피크이지 바에는 “차보다 약간 더 자극적인” 음료를 마시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바텐더는 전역 소식을 들었다며 제르네우스에게 독한 샷을 권유했다. “전역 기념 서비스, 그런 건 없어요?” “서비스는 네가 나한테 해줘야지. 마지막일텐데 거하게 돈 쓰고 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전우들은 그를 붙잡고 자리에 앉혔다. 평소와 같이 시시껄렁한 분위기 속, 농담 따먹기만 일삼을 뿐이라 제르네우스는 이 다음 날부터 그들을 볼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게 실감되지 않았다. 하기야, 호그와트를 졸업할 때도 같았으니. 세상에 체감되는 이별이란 없는 법이다.
전우 중 하나가 수염을 만지작대며 물었다. “요즘처럼 조종사 몸값 잘 쳐주는 시대가 없는데 전역이라니, 배가 불렀구만. 결혼한댔나?”
“영국으로 간다는 거 아니었어?”
“진심이야? 조국을 버리다니. 네가 피시앤칩스나 씹으면서 얼마나 잘 나갈지 두고보자.“
”오오, 맥과이어! 성조기로 엉덩이를 닦는 매국노여.”
“어디서부터 소문이 잘못 퍼진거야? 분명 내가 항공사에 취직했다고 말하지 않았나?”
“알지. 근데 그냥 놀리고 싶은 거야.“
필립의 능숙한 너스레에 제르네우스를 포함한 자리의 모두가 일제히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매캐한 시가와 대마 연기, 혀끝에 감도는 위스키의 맛에 벌써부터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머니의 나라는 골 때리게 야만적이었으나, 그만큼의 자유가 보장되는 곳이었다. 지금의 미국은 하늘길이 열리며 여러 민간 항공사들이 태동하고 있었고, 각 회사들은 비행에 능한 군의 조종사들을 스카우트하며 인재 영입에 힘썼다. 제르네우스 맥과이어는 그 중 하나였다.
“아무튼, 가서도 잘 살아라. 그렇다고 너무 잘 살진 말고. 배 아프니까.”
“꼬우면 너도 이직해. 군에 너 같은 놈 없어져도 아무도 눈치 못 챌 걸?“
”뭐래, 창놈 자식이.”
“너희 둘 다 아가리 똥내 그만 자랑하고 술이나 마셔.”
“건배부터 하자. 건배사는 뭘로 할까?”
”그냥 ‘건배’로 해! 계집애들처럼 뭘 또 정하고 있어.“
“그래. 제르네우스를 위하여 건배!”
”위하여!“
“망해라!”
“건배!”
…
…
…
1000.
시대가 그를 불렀다.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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