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커플링] Daydream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 타임리프 앤솔로지 <Hodie mihi, cras tibi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당신에게> 참여글
‘드미레아 지그프리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다만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 본편 내에서 드미레아에게 어느 정도까지 사실을 알려주었는지, 어느 정도까지 눈치를 챘는지 등이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서술이나 행보를 바탕으로 추측한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열람에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연하지만 최신화까지의 스포일러가 꽤 많습니다. 열람에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후회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드미레아 지그프리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내린 결정을 후회하기도 했다. 더 나은 결정이 있었다고, 뒤늦게 깨달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후회는 되돌릴 수 없는 일이기에 가치 있음을 드미레아는 이해했다. 진심으로 되돌리기를 바랄 만큼, 미련한 소망을 가진 적도 없었다.
“…지금이, 그러니까.”
“522년 2월 17일입니다.”
“틀림없이 522년이라는 말이지.”
“소가주님, 혹시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혹시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침을 먹으러 가던 중 갑자기 날짜가 확실한지 묻는 드미레아를 집사가 유심히 살핀다. 다만 혼란스러운 탓에, 따라붙는 시선을 알아채지도 못하고 드미레아는 고민을 이어갔다. 522년이라고, 522년의 2월이라고… 이게 무슨 멍멍이 오라버니 같은 일인가? 성장기였다고는 하지만 조금 짧아진 신체, 상처가 비교적 적은 손, 이전의 자신보다 묘하게 힘이 없는 것 같은 몸. 드미레아는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음을 인정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나는 이런 걸…
“소공작님?”
대답도 없이, 생각에 잠긴 드미레아의 모습에 집사가 되물었다. 아, 하고는 작게 내뱉은 뒤 드미레아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다. 그냥… 긴 꿈을 꿔서.”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래도 불편한 곳이 있으면 꼭 말해주십시오. 그런 말이 이어졌지만, 여전히 머리가 어지러운 탓에, 제대로 듣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아침 식사를 하러 향했다.
아무래도 세렌티가 잠든 신은 맞나 보다.
옆 나라 왕제였다는 3왕자님 일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나까지 과거로 돌아오다니, 여전히 신이 깊은 잠을 자는 게 아니라면 말이 안 되는 상황인 것 같다고. 드미레아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시간이 돌아왔다는 것은 아마도 시간의 축이 원인일 확률이 높았다. 그야 이런 일이 아무 이유도 없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돌아온 것은, 아마도 저택 안에 있는 사람 중에서는 자신 혼자뿐인 것 같았다. 여러 사람이 돌아왔다면, 지금쯤 자신 말고도 날짜를 물으며, 혼란스러워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니까.
3왕자님은 시간이 돌아왔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축을 사용했다는 말은 한 적이 없었다. 옆 나라의 왕제였다가 지금은 3왕자로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돌렸다고 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 지금의 상황이 자신으로 인해 일어난 상황이 아닐 수는 있다.
그래도 그렇지, 세렌티께서 생각이 있으시다면 지금 또 시간이 돌아가게 두었겠는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맞다. 그러니 지금 자신이 다시 과거로 돌아온 것은, 신이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닌 이상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세렌티가 깨어날 때가 되었다는, 시스파니안의 말을 들은 것은 드미레아가 아니었던지라 드미레아는 그런 생각을 했다. 다만 사실, 지금의 문제는 세렌티가 잠들어 있냐 아니냐, 그건 사실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왜 돌아왔는지, 왜 과거로 돌아왔는지가 전혀 기억이 없는데.”
옆 나라 왕제였다가 카이리스의 3왕자가 되어 복잡한 가계도를 가지고 대마법사를 양아버지로 둔 칼리안 왕자님은, 시간이 되돌아오기까지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전의 반응으로 봐서는 아마도, 시간이 되돌아오기 전에 죽음을 겪은 것 같았다. 그런 것들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죽은 기억이고 뭐고 하나도 없지 않나.
지금 이렇게 과거로 돌아올 만한 이유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마지막 기억이라고는… 자신은 기사 베른 경과 왕세자 저하와 함께 파비안으로 떠났다고 되어 있고, 진짜 자신은 휘트린에서 3왕자님이 주신 꽃을 받고, 휘트린이 데블란의 새였다는 사실을 듣고, 시아를 찾아 보호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비밀을 들켰다는 사실도 듣고, 대련하고. 딱 거기까지 기억이 났다.
대련했다고는 하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름대로 3왕자님께 상처도 냈다. 그것을 죄로 죽을 리도 없고, 죽었다고 해도 그런 기억이 없다. 애초에, 시간을 돌렸다는 그 물건도 온전하지 않은 걸로 아는데. 왜 자신이 시간을 되돌아 와 있냐는 말이다.
“…지금 당장 생각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 들어, 드미레아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바깥이 소란스러운 탓에 더 머리가 아픈 것도 같고.
잠깐, 지금 왜 바깥이 소란스럽지.
자신이 있는 곳은 카이리시스의 공작저가 아니라, 공작령에 있는 저택이었다. 카이리시스에 있는 저택이라면, 거리의 소란까지 들려올 수는 있으니 시끄러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공작령에서 이렇게 바깥이 시끄러울 이유가 없었다. 시끄러울 이유라도 있나, 의문이 들어 드미레아는 바깥으로 향했다.
조금은 다른 것도 같고, 여전히 같은 것도 같고. 과거로 돌아온 것이니 ‘여전히’라는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드미레아는 저택 안을 걸었다. 누구한테 물어보는 게 좋을까 고민했다. 다만 그런 고민이 무색하도록, 사람을 골라서 물을 만큼 지나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이 시간에 사람이 꼭 있을 만한 곳이 어디가 있지. 드미레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익숙한 걸음으로 훈련장으로 향했다. 이때에도 수석 기사단장은 로난시테였고, 익숙한 기사들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공작님, 하며 따라오는 인사에 가볍게 화답하며, 드미레아는 로난시테를 찾았다.
“로난시테.”
“소공작님.”
훈련하러 오셨나 보다. 그런 생각이 훤히 드러나는 얼굴로 로난시테가 인사했다. 화답하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드미레아는 굳이 사람을 찾아 연무장까지 온 이유를 물었다.
“저택이 좀 소란스러운 것 같은데, 무슨 일 있나. 집사도 잘 보이지 않아서.”
“짐을 꾸리고 있을 겁니다. 국왕 전하의 탄신 연회까지 몇 달 남지 않았으니까요.”
같이 가려고 하셨다가 거절당하지 않았습니까?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물어오는 로난시테의 모습에, 드미레아는 당황하며 물었다.
“3달은 넘게 남은 것 같은데, 준비가 이르지 않나.”
“카이리시스로 가려면 2달은 넘게 잡아야 하지 않습니까?”
“…아.”
새삼스러운 사실을 묻는 것이 이상한 듯, 로난시테 역시 드미레아를 살폈다.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드미레아는 생각을 되짚었다. 이동 마법진은… 아. 칼리안 왕자님이, 제안하셨다고 했지. 로젤리타를 왔을 때. 그러니 이때에는 당연히 이동 마법진이 없을 것이다. 카이리시스로 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게 당연하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그런 사실을 머릿속으로 확인하고, 드미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알겠네. 오늘은 훈련장에 다시 못 올지도 모르겠군.”
“알겠습니다.”
왜 그러는지 짐작이라도 한 듯, 로난시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미레아는 고개를 돌려 훈련장 안의 기사들을 살폈다. 몇 년 후까지도 믿고 맡겼으니까, 괜찮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생각을 정리하고, 카이리시스에 가야 했다.
“상황을, 정리해 보자면.”
드미레아의 펜 끝이 책상을 규칙적으로 두들긴다. 고뇌하듯, 빈 종이를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글씨를 써 내려간다.
“결론은… 마나실 경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는 건데.”
지금 어떤 이유로 시간이 돌아왔는지,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시간의 축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3왕자님은 ‘칼리안’의 삶을 받아들이고 되돌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셨던 것으로 보아, 원래대로 되돌아갈 방법이 없을 수도 있음을 기억하고 정보를 모을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누구한테 도움을 받아야 할까? 세이렌 경이나 헤르츠 경 또한 실력이 좋은 마법사라는 사실은 알지만, 시간의 축에 대해 이 시점에서 알고 있을 확률은 낮았다. 언제 어떻게 발견되었는지 알 수 없는 물건이지만, 일반적으로 그런 물건이 나타났다면 대마법사쯤은 되어야 도움을 청하지 않겠나. 다른 대마법사들의 경우 알려진 사실도 거의 없고, 이런 도움을 청한다고 해서 도움을 받을 가능성도 높지 않은 만큼 지금 가장 가능성이 높은 선택지는 마나실 경을 포섭하는 것이었다.
다만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 그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본래는 분명, 탄신 축제의 셋째 날. 왕궁으로 찾아가 3왕자님의 스승을 자처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스승이 되기를 결정했을 리는 없으니, 이전에 3왕자님께서 그를 만나 스승이 되어 달라 청했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
3왕자님이 이번에도 도움을 청한다면 다행이지만, 보장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옆 나라 왕제였다던 그 사람이 그대로 들어왔다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원래의 3왕자님이 그대로라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
여기까지 생각한 드미레아는 깨달았다. 세크리티아의 왕제였던 그 사람은, 본래의 ‘칼리안’이 어떻게 되는지를 알았다. 그렇다면, 지금의 3왕자님이, 오라버니가 시종이 되기로 한 이유였던 그 분 그대로라면. 오라버니는 다시, 예전처럼…
자신은 그런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원래의 ‘현재’로 돌아가는 것 외에도 신경 써야 할 일이 늘어났네. 그런 생각이 들어서 드미레아는 작게 한숨을 뱉었다. 일단 이것 또한 확인해 봐야 할 일이었다. 지금의 3왕자님이 어떤 상태인지, 기억이 있는지, 정말 자신만 돌아온 것인지. 그런 것을 제대로 알아야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일단 공통적인 사실은, 지금의 ‘칼리안’이 어떤 칼리안이어도, 드미레아는 앨런 마나실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본래 ‘칼리안’은 어떻게 그의 도움을 구했을까? 어디서, 어떻게 만났을까? 어떤 말로 도움을 요청했을까.
“……독.”
천하의 앨런 마나실이 그냥, 마법에 재능이 있다는 이유로 스승을 자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들로 삼을 만큼 애정을 주고, 보살피는 모습을 보이셨던 만큼 아무 계기도 없이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독을 이유로 협력을 얻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자신은 같은 방법으로 도움을 구할 수 없었다. 지그프리드의 소가주가 독에 당해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법사에게 도움을 청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능한지 아닌지를 제쳐두고서도, 아무런 문제 없는 자신이, 일부러 그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도록 일부러 독을 먹어 도움을 요청하는 그것은 못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도움을 청한 계기는 그렇다고 하고, 그럼 어디서 만났을까? 축제 셋째 날, 그 이전에 둘은 분명 어디선가 만났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 앨런 마나실이 궁에 들어와 왕자를 만났다면, 소문이 나지 않았을 리가 없다. 큰 소란이 일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소문은 없었다. 처음 궁에 들어섰을 때부터 스승을 자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밖에서 만났어야 한다. 왕궁 안이 아니라, 밖이라면 해답은 생긴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나갔을까?
오랜 시간 고민하는 탓에, 드미레아의 펜촉이 종이를 규칙적으로 두드린다. 종이 위에 잉크가 몇 방울 떨어지고, 그런 잉크가 마르고 나서야 드미레아는 기억해 냈다.
축제 이튿날, 3왕자님이 밖에 나갔었다.
오라버니가 그걸 가지고 우는 소리를 했어서, 뒤늦게지만 기억이 났다. 몸도 좋지 않으신 분이, 갑자기 잠시 나가야 하니 따라오지 못하게 해 달라고 해서, 머리를 풀고 ‘시로이안’ 행세를 했다고. 그 얘기를 들은 아버지의 반응까지 해서 투덜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면 그때 그를 만났을 것이다.
그러면 축제 기간에 자신도 카이리시스에 있어야 한다. 아버지와 친분이 있다고는 알고 있지만, 갑자기 요청한다고 올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아버지한테 그를 만나고 싶다고 갑자기 떼를 쓸 수도 없고, 그런다고 들어줄 만한 사람도 아니지 않나.
…근데, 이때 분명 수도에도 못 갔던 것 같은데.
아까 로난시테도 분명 그랬다. 같이 가려고 했다가 거절당하지 않았느냐고. 기억하기에도 이때의 일들은 오라버니에게 들어서 경험한 것이지, 직접 겪은 것이 아니었다. 수도로 올라간 것은 한참 나중이었으니, 그때까지 기다리면 너무 늦다. 어떻게든 이번에 아버지를 따라 수도에 올라가야 한다.
“수도에 올라가는 건… 어떻게 해결한다고 치고.”
물론 지금의 자신은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나이니까, 아버지가 계속해서 반대할 수도 있었다. 이전에도 이때는 카이리시스로 가지 못했으니, 끝까지 반대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면 지금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는 것도 방법일 터였다. 아버지가 나한테는 일러주지 않았었지만, 3왕자님이 달라진 것도 알고 있었다고 하니, 충분한 증거만 있다면 납득하고 수도로의 동행을 허락할 것이다.
그렇게 수도로 가면, 축제 이튿날에 앨런 마나실을 만나야 한다. 오라버니가 그때 시로이안 행세를 하며 나가는 칼리안 왕자님을 수비대원들이 쫓아가지 못하도록 했었다고, 그런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가 연회에서 3왕자님을 만났었다고 하니 적어도 연회 시작보다는 늦게 만났을 것이다. 이르게 연회에서 나온다고는 해도 20분 정도는 자리를 지켰을 가능성이 높으니, 연회 시작 후 20분쯤 후부터 왕성 주위를 살피다 보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때 3왕자님이 또다시 그를 스승으로 삼으려 한다면, 이를 기다렸다가 도움을 청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할 가능성이 있는 이상, 그런 부분에서 앞길을 막을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이전과 크게 다른 것 없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야 했다. 그야, 그대로 실리케의 ‘감기’를 앓고 있는 게 맞다면,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오라버니는 예전처럼,
드미레아는 의식적으로 생각을 끊고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굳이 그런 가정을 계속해 봤자 딱히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집중해야 하는 건 자신이 수도로 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지금의 3왕자님이 어떤 사람이든, 이 상황을 원래대로 돌리는 게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상관 없이, 자신은 수도로 가야 했다. 수도로 가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드미레아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결연한 표정으로 방을 나갔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면 자연스럽게 아버지에게 말을 걸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수도를 갈 준비를 하느라 모두 바빴다. 본래도 그리 한가한 편은 아니었으나 평상시보다 더 어수선한 만큼 아버지를 보기도 그리 쉽지 않았다. 사실, 수도로 가겠다며 억지를 부릴까 봐 일부러 피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실제로 수도로 가야만 한다고 주장할 예정인 것도 맞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수도에 가지 못하고, 그럼 도움을 청할 방법도 사라진다. 그런 생각으로 복잡한 낯을 딱히 숨기지도 않고, 드미레아는 점심을 먹었다. 해산물이 올라와 마음이 복잡했다.
정말로 아버지가 지금 나를 피하고 있는 거라면? 그럴듯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수도로 자신도 가겠다고 이때 엄청나게 억지를 부렸던 기억이 났다. 오라버니가 괜찮은지도 보고 싶었고, 탄신 연회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니 아예 피해 다니며 억지를 부리지 못하게 하고 계실 확률도 없잖아 있었다.
그럼 피할 수 없도록 해야 했다. 어떻게든 자리를 가져서 피할 수 없도록 한 다음 제대로 이야기하고, 설득해야만 했다. 생각을 정리하며 식사를 마치고, 드미레아는 식당을 나서며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
기억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뒷모습을 보고 드미레아가 말을 걸자, 자리를 피하려던 것처럼 핑계를 대던 아버지가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을 돌아봤다. 소드마스터인 만큼 자신이 온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아니, 모를 리가 없다. 그야 지금 아버지를 발견하면 도망가고 발견하면 도망가고 발견하면 도망가고를 계속 반복하고 있었으니까!
처음에는 짜증이 났다. 두 번째부터는 오기가 생겼다. 계속 핑계를 대고 도망가는 것이 훤히 보여, 내가 그렇게까지 성가시게 했나 하는 반성을 하기도 했지. 그래도 그렇지, 딸 떼어놓고 가겠다고 계속 이렇게 피하는 게 무슨!
사실 슬레이만이 그러는 것도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었다. 갑자기 찾아와 훈련에는 오늘 못 올 것 같다며 결연한 눈빛으로 떠난 드미레아를 보고, 로난시테가 슬레이만에게 언질을 줬다. 오늘 소공작님이 제대로 날 잡고 데려가 달라고 하려는 것 같다고. 그 말을 들은 슬레이만이 오늘을 넘기면 어떻게 되려나, 하는 마음으로 피하고 있던 것이지만, 드미레아는 그 사실을 모르는 만큼 원래부터 이 정도였나, 하는 의문을 피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냐. 레아.”
어색하게 웃으며 드디어 답변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드미레아는 잠시 망설였다. 어떤 말로 설득해야 할까? 거짓을 말해서라도 수도로 데려다 달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 그렇게 봐도 못 데려간다. 너까지 공작령을 비우면 공작령은 어떻게 하겠느냐?”
그런데 지레 아버지가 먼저 안 된다고 엄포를 놨다. 그래, 분명 그랬다. 공작령에서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공작령을 둘 다 비우면 어떻게 하겠냐고 이전에도 그렇게 설득했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말이다. 결국 나중에는 다 같이 공작령을 비우고 수도에 있었으면서!
괜히 열이 받은 드미레아가 주먹을 꾹 쥐었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이어진 건 짧은 한숨이었다.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지를 계속 아버지를 쫓으며 고민했지만, 결국 결론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라버니가 걱정되어서, 수도에서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수도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탄신 연회가 궁금해서… 들 수 있는 이유는 절대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속이는 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문제이긴 하지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주세요, 아버지. 아버지께만 드려야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냥, 거짓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아버지를 잡은 곳에서 그대로 이야기하기에는 지나가는 사람도 있고 듣는 귀도 있는 탓에, 드미레아는 장소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14세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진중한 표정을 본 슬레이만은 묘한 표정을 짓더니 결국 알았다며 같이 자리를 옮겼다. 그렇게 향한 곳은 공작의 집무실이었다. 사람을 물리고 자리에 앉으며 드미레아는 할 말을 정리했다.
“그래, 그래서 어쩐 일이냐.”
투박한 손으로 차를 준비한 슬레이만이 자리에 앉아 먼저 입을 열었다. 꽤 심각한 드미레아의 표정 탓에 걱정이 비쳐 보이는 낯이었다. 드미레아는 이런 대접이 묘하게 낯익으면서 낯설었다. 이때, 아버지와 이렇게 논의를 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일지도 몰랐다. 여전히 말을 정리하는 건지, 망설이는 건지 구분이 잘 안되는 드미레아를 보고 다시 슬레이만이 입을 열었다.
“듣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된다고 다 물릴 정도면, 네가 생각하기에 꽤 심각한 일일 것 같은데. 수도에 가기 전에 꼭 해야 하는 말이 있는 것이냐?”
“…비슷합니다.”
드미레아는 입술을 달싹였다. 이런 식으로 할 말을 망설이는 걸 보지 못했던 탓에, 슬레이만의 걱정은 더 커지기만 했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채근하는 건 나쁜 자세라는 생각이 들어서, 슬레이만은 그저 드미레아의 답을 기다렸다. 아픈 곳은 없는지, 지금 안색이 확 나빠지지는 않았는지. 겉으로 보기에 몸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서, 조금은 안심해도 될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시간이, 되돌아왔습니다. 아버지.”
그런 답이 돌아와서. 슬레이만은 진지하게, 내 새끼가 수도에 가고 싶다고 맛이 갔나, 그런 고민을 했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드미레아는 긴 설명을 마치고 차를 마셨다. 이야기하느라 식은 찻물에서 여전히 향이 났다.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본래 자신보다도 아버지가 먼저 3왕자님의 변화를 알고 있었던 만큼 아예 못 믿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물어볼 게 있다, 레아.”
“네, 아버지.”
“지금 네가 나한테 해 준 말이, 보통은 어떻게 보일지 알고 있느냐?”
“모르고 있다면 그냥 밖에서 말했겠죠.”
핀잔하듯 덧붙인 드미레아가 다시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사실 이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드미레아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아시잖습니까. 꿈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허황된 이야기라는 사실을요.”
“그래, 네가 그런 공상을 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하고는 잠시 고민하던 슬레이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옆 나라의 왕제였던 사람이라면, 지금은 왕자인 …… 세크리티아 말이더냐.”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버지의 말 중간 부분이, 아마도 이름일 부분이 전혀 들리지 않아서 드미레아는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며 슬레이만을 응시했다.
“…… 세크리티아 말이다.”
다시 말하는데도 여전히 말이 들리지 않아서, 드미레아는 당황했다. 이런 이변은 처음이었다. 멀쩡히 말하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입 모양도 읽을 수 없고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딱 이름에 해당하는 부분만 묵음 처리되었다.
슬레이만 또한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슬레이만의 기억으로, 드미레아는 이미 그런 것을 배웠다. 자국의 귀족 집안도 이미 대부분을 익혔을 텐데, 이웃 나라의 왕가 일원을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이름이 들리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마치 지우는 것처럼, 그 부분만 들리지도 않고, 말하시는 모양을 읽을 수도 없습니다.”
차분하게 대꾸하지만, 여전히 당황이 서려 있는 드미레아의 모습을 본 슬레이만은 결국 인정했다. 지금 이 상황이 내 새끼가 갑자기 어디가 아프거나, 수도에 가고 싶어서 꾀를 부린 게 아니라, 정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그리고 동시에 드미레아는 깨달았다. 아마도 시간이 되돌아온 지금의 이 상황은, 실제보다는 허구에 가깝다는 사실을. 지금 이 상황이 허구가 아닌 실제라면, 자신은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살아있고 존재하는 누군가의 이름을 듣지 못하는 상황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 상황이 처음 추측했던 것처럼 원래의 현실로 돌아갈 방법이 있는 허구라면 이해할 수 있다. 본래의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니,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누군가가 가린다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세크리티아의 왕제가 될 사람이 존재한다면, 지금의 3왕자님은 오라버니가 시종이 되기로 결심한 ‘칼리안’ 그대로일 거라는 사실까지, 드미레아는 이해했다. 이해가 평정심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드미레아는 주먹을 꾹 쥐고 잠시 심호흡을 했다. 허구라고 해도, 오라버니가 같은 일을 또 겪는다면. 그걸 자신이 봐야 한다면.
지옥이나 다름없으리라는 사실을 드미레아는 잘 알았다.
“수도로, 가야만 합니다, 아버지.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 있느냐, 없느냐.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이대로라면,”
말해도 될까. 망설임이 잠시 일었다. 하지만 아버지라면 알 권리가 있다고, 드미레아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칼리안 왕자님이 위험합니다. 독을, 실리케 왕비의 독에… 당하실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오라버니는, 아버지.”
또 그런 일을 겪으면. 말을 들은 슬레이만도, 말한 드미레아도 모두 안색이 나빠졌다. 다시 그런 일을 겪은 시로이안이 어떻게 될지, 긍정적이지 못할 확률이 훨씬 높다는 걸 둘 다 알고 있어서. 정말이냐, 하고 슬레이만이 답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물었다. 드미레아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을 바탕으로, 뭐라도 해야 합니다. 신념을 망치지 않는 선에서 하겠습니다. 그러니 아버지.”
“……나도 이런 얘기를 듣고 끝까지 못 가게 할 생각은 없다.”
사실은 어른에게 맡기라 할까, 하다가, 그것이 또 드미레아의 죄책감이 될까. 결국 슬레이만은 드미레아를 수도로 데려가기로 마음을 바꿨다. 한숨을 푹 쉬고는. 애써 다시 큰 소리를 내며 슬레이만이 웃었다.
“그래도 너무 걱정은 말아라! 나도 방법은 찾아볼 테니. 그래도 내 딸이 나를 믿고 얘기해 주니 기분은 좋구나.”
드미레아는 수도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었으면 굳이 말할 생각 없었다는 소리를, 아버지가 기분이 좋다니 그냥 차와 함께 삼키기로 했다.
며칠이 흘렀다.
이야기를 마친 당일, 슬레이만은 카이리시스로 갈 때 드미레아가 동행할 것이라 알렸다. 공작 일가가 모두 공작령을 비우게 되는 만큼, 멍멍이 얀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공작령을 당분간 어떻게 해야 할지 논의할 것이 늘었다. 슬레이만은 그만큼 예정보다 훨씬 바빠졌다.
드미레아도 일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이전과 같이 기사들의 훈련을 봐주며 자신의 훈련도 해야 했고, 틈이 날 때마다 카이리시스로 갈 준비를 해야 했다. 이런 준비를 처음 하는 건 아닌 만큼 준비 자체를 어렵게 느끼거나 힘들어하지는 않았다. 소공작이 된 후로 카이리시스로 가는 건, 그러기 위해 준비를 하는 건 처음일 텐데도 이상할 정도로 능숙하게 준비를 내해 가솔들의 기대를 키우기도 했다. 물론 슬레이만은 이미 드미레아의 상황을 아는 만큼, 그런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웃었다.
며칠 후, 슬레이만과 드미레아는 카이리시스로 출발했다.
본래 드미레아는 소공작이 되고, 강박적으로 학문을 익히고 검을 익혔다. 그런 모습이 원래도 차차 나아지고 있었지만, 시간이 돌아오기 전의 드미레아는 훨씬 안정되었던 만큼, 드미레아의 변화가 갑자기 찾아온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걱정과 안심을 모두 가졌지만, 슬레이만이 괜찮다고 공언한 만큼 이를 앞에서 대놓고 드러내는 이는 없었다.
그래도 불안정해 보였던 드미레아가 수도에 간다는 것도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라, 오라버니를 만나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도 되어서, 모두가 다양한 생각을 하는 가운데 두 사람이 수도로 떠났다.
처음 예정과 달리 드미레아까지 함께 움직이는 만큼, 맨 처음에 계획했던 것보다 많은 인원이 움직였다. 슬레이만 혼자라면 소드마스터인 만큼 호위를 위한 인력이 필요하지 않았겠지만, 이때의 드미레아는 아직 부족한 면도 존재했다. 일정이 엄청나게 급한 것도 아니었던 만큼 기사까지 몇 명을 차출해 함께 움직이는 일정이었다.
본래는 마차를 이용해 움직일 예정이었고, 초반에는 실제로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오랜 여정인 만큼 무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다만 마차에서 보내는 시간이 긴 만큼 단련에 쏟을 시간도 부족했고, 마차에서 보내는 시간이 지루한 것도 맞았다. 그래서 결국 드미레아는 자신은 마차에 타지 않고 말로 이동하겠다고 말했고, 슬레이만은 “내 딸도 마차에 안 탄다는데 내가 타서 되겠느냐?”라며 자신도 말을 타겠다 했으며, 결과적으로 공작가의 마차가 빈 상태로 여정이 계속되었다.
여정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물론 회귀 전의 드미레아의 몸보다는 체력도, 체능도 떨어진다는 게 느껴졌지만, 여정을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소공작으로의 의무를 스스로 짊어지고 노력해 왔던 만큼 단련된 신체는 강행군도 아닌 평범한 여정에 지치지 않았다.
날이 저물면 적당한 곳에서 야영하거나, 근처에 마을이 있다면 여관에서 묵기도 했다. 야영할 때는 대부분 영지에서 준비해 온 보존식을 먹었지만, 조금 이르게 야영 준비를 했을 때는 사냥해 온 동물로 끼니를 준비하기도 했다.
여정 중이라고 해서 단련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지그프리드령은 수도로부터 꽤 멀리 떨어져 있던 만큼, 카이리시스로 이동하는 길에서도 마을은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금 있는 마을을 지나가면 애매한 곳에서 야영해야 할 때는 마을에서 머무를 때가 많았다. 그런 이유로 여관에서 머무를 때는 비교적 저녁 시간이 많이 비는 만큼, 비는 저녁 시간을 드미레아는 온전히 수련 시간으로 쏟았다. 꼭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드미레아는 야영 준비가 끝나고 나면 늘 일정 이상의 시간을 수련에 쏟았다. 지금 있는 상황-편의상 가(假)세계라고 하자-에서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만큼 무력을 올리는 것도 필요한 선택이라고 여겼다.
그러니까 지금 드미레아가 굳이 야영지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건,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고민의 결과였다는 뜻이다.
여정 중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는 드미레아의 모습을 다들 걱정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따라온 이들 중에도 걱정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대체로 이를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련은 잘 되어 가더냐?”
“따로 막히는 부분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먼저 남몰래 걱정해야 하는 슬레이만이 정말 한 톨도 걱정하지 않고 이런 상황을 방관했기 때문이다.
호위 명목으로 따라온 기사들은 다들 지그프리드에서 오랜 기간을 보냈다. 종자 시절부터 기사가 되어 지금의 상태가 되기까지, 계속해서 지그프리드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니 첫째 공자님을 잃고, 둘째 공자님을 왕궁으로 보내고, 이후 악몽에 시달리던 지금의 소공작님까지 얼마나 걱정했는지를 알았다. 지나친 걱정도 악영향을 미칠까, 앞에서는 단지 건강을 염려하는 것이라 말하면서도 뒤에서는 꾸준히 걱정하고 소공작님의 상태를 살폈었다. 충분한 사랑을 주고자 노력했고 그러면서도 어긋나지 않기를 바라며, 몸이 상하지 않기를 바라며 관심을 부었다. 그런 공작님의 모습을 오래 봐온 만큼 당연히 공작님 또한 지금의 소공작님의 상태를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다. 앞에서는 태연해도 뒤에서 분명 걱정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태평하게 웃으며 하하 검술이 많이 늘었구나 장하다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은 혼란에 빠졌다. 지금 저런 소공작님의 모습이 우리만 불안한가? 우리만 그 전의 모습과 겹쳐서 불안해 보이는 건가? 아니, 그렇다고는 해도 불과 얼마 전까지 여전히 조금은 강박적인 모습을 보이셨는데, 저렇게 안심할 수 있는 이유가 뭔지. 다들 혼란스러울 만도 했다.
“기사들이 걱정이 많은 것 같습니다만.”
“그건…… 뭐, 네가 소공작이 되고 처음 가는 거니까 걱정하는 것 아니겠느냐?”
정작 슬레이만은 걱정은 무슨, 변명거리 찾느라 바빴다.
지금의 드미레아는 그때의 자신이 어떻게 보였을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3왕자님이 자신에게 소드마스터만 목표로 하면서 스스로를 마모하지 말라고 했던 것도 이제는 이해가 갔다. 그러니 지금의 기사들의 걱정이, 어떤 의미에서 나온 걱정인지도 어느 정도 이해했다. 그러니 드미레아의 말은, 지금 자신이 걱정해야 할 정도의 상태는 아니라고, 아버지가 기사들에게 말하는 게 어떠냐는 뜻이었다.
다만 슬레이만은 드미레아가 눈치채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아무리 미래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딸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비가 되어서 어떻게 ‘이때의 너는 남들이 걱정할 정도로 지나치게 몰아붙이지 않았느냐’라고 하겠냐는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어떻게 생각해서 그렇게 강박적으로 굴었을지 슬레이만이라고 모르는 것도 아닌데. 그런 노력이 남들에게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더 컸다고, 그런 말을 하면 드미레아가 상처받을까 슬레이만은 변명거리를 찾아내느라 머리를 쥐어짰다.
어색하게 웃으며 답하는 모습이 누가 봐도 변명하는 것 같아서, 아버지가 제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는 걸 안 드미레아가 검을 땅에 꽂고 몸을 기댔다.
“그나저나, 빈말이 아니고 정말 많이 늘었구나. 다만 여전히 좀 어색해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
“긴 시간이 돌아온 건 아니고, 3년 정도이긴 하지만, 성장기니까요. 그동안 수련했던 것도 있고, 검도 더 무거운 것을 썼었습니다. 굳은살도 더 늘었었고요.”
말을 돌리려고 하는 게 보였지만, 드미레아는 작은 목소리로 아버지의 물음에 답했다. 답하지 않는다고 해서 해결될 만한 문제는 아니었고, 기사들과의 거리도 그렇게 좁지 않으니 안 들리겠거니 했다. 다른 것보다도 뭐,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가 소드마스터인데. 잘 들릴 정도로 가까이 있는 기사가 있다면 이런 말을 꺼내지 않았겠지, 그런 생각도 있었다. 빼먹는 것도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건 나름 잘 챙기시니까.
“하지만 그걸 고려해도… 검의 길에 오르기까지 많이 멀지는 않았던 것 같구나.”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본래 얻은 깨달음도 똑같이 가지고 있고요.”
“검의 길에 오르는 나이를 내 딸이 확 당기는 건 아니냐?”
그래도 칼리안 왕자님의 기록을 당기기는 어려울 텐데, 그런 생각이 들어서.
“당기게 되려면, 1년 정도 안에… 아.”
“1년?”
“……아닙니다.”
말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지금의 3왕자님은, 아직 소드마스터가 아닐 것이고, 옆 나라에는 왕자가 둘이라 했으니, 3왕자님이 소드마스터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며.
정말로 자신이 이 가세계에서는, 가장 빨리 검의 길에 오른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버렸다.
당일, 이야기를 마친 드미레아는 수련을 멈추고 휴식을 취했다.
슬레이만은 딸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다음 날, 여관에서 날을 보내기 위해 준비를 했다.
드미레아는 수련을 위해 나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 야영을 위해 자리를 잡았다.
드미레아는 사냥을 나가겠다고 말했다.
큰 사슴을 잡아 왔다. 모두 배부르게 끼니를 해결했다.
드미레아는 감각을 잃지 않을 정도의 수련만 했다.
다음 날, 날씨가 궂지만, 마을이 멀어 일찍이 자리를 잡았다.
체력 단련이나 감각을 안 잃을 정도의 수련만 했다.
이야기를 마친 지 일주일 후.
드미레아는 여전히 감각을 잃지 않을 정도로만 수련했다.
표정이 밝지 않았다.
검의 길에 오르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슬레이만은 정말 알 수 없어졌다.
그래도 그다음 날,
드미레아는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다만 그게 단련보다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여서…
슬레이만은 딸을 어떻게 해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내가…
내가 정말, 정신이 나갔나 보다.
드미레아 지그프리드가 이야기를 마치고 든 생각이었다.
이 가세계로 떨어지고 걱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특히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3왕자님의 미래나, 그로 인한 오라버니의 미래, 지금 리리에는 어떤 상황일지,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그런 것들을 아예 잊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버지의 말에 잠시 기뻤던 것이 사실이다.
힐 경의 말로도, 제 생각으로도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머지않은 미래에 아마 오러를 발현할 것이고, 오러를 다루는 법을 깨우치게 되면 검의 길에 오를 것이다. 칼리안 왕자님이 ‘칼리안’이 되기 전, 검의 길에 오늘 나이였던 21세. 이를 당길 수 있겠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가장 빠르게 검의 길에 오른 나이는 칼리안 왕자님의 경우로 남을 것이었다. 그분과 자신, 그리고 그 주위 인물. 딱 그 정도만 아는 명예로 남을 것이다. 물론 드미레아는 명성에 연연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칼잡이인지라 조금은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그게 드미레아는 죄스러웠다.
이런 정신상태로 검을 쥐는 건 옳지 못한 것 같아서, 드미레아는 잠시 수련을 쉬었다. 마음을 다잡고 목표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래도 완전히 놓을 수도 없고, 이러다간 목표를 이루는 데에도 무리가 갈까, 드미레아는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공작령으로부터 떠나온 지 꽤 시간이 지났다.
카이리스력 522년 5월 14일, 슬레이만과 드미레아는 카이리시스에 들어왔다.
맨 처음의 계획보다 빨라지지도, 늦어지지도 않았다. 딱 드미레아가 예상한 정도의 도착 일자였다. 수도의 저택에서 어머니를 뵙고, 오라버니와도 약속을 잡았다.
자신이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어머니께 알리는 게 좋을지에 대한 고민도 했다. 다만 스스로도 어떻게, 왜 돌아왔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으므로 드미레아는 그런 생각을 접었다. 슬레이만도 처음엔 넌지시 물어보았으나 드미레아의 결정을 존중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드미레아의 손에 놓아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던 탓에.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냐?”
“그것까지 들으셔야겠습니까?”
“그럼 내가 네 아비인데, 너만 고생하게 둘 수는 없지 않으냐?”
“아버지 입장에서 달갑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저도 최대한 노력하겠지만, 아버지가 느끼시기에는 오랜 기간 지켜온 신념을 깨는 일처럼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그럼 더더욱 내가 듣고 말릴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
“……”
그래서 이런 상황이 되었다.
드미레아는 굳이 자신의 계획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자신은 이 상황을 거짓으로 여긴다고, 가세계라고 속으로 이름까지 붙여 나눠 생각하고 있었다. 앨런 마나실의 협력을 얻으려는 것도 결국 자신의 ‘현실’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털어놓는 것이 달가울 리 없었다. 그런 탓에, 꽤 불만이 있지만 이를 꾹 참는 것 같은 표정이 드러났다.
“아니면, 나한테 말하기 어려운 이유라도 있느냐.”
“……”
그런 표정을 본 슬레이만이 무언가를 눈치채는 건 당연했다. 그는 소 같은 르메인이나 뱀 같은 데블란과는 달리 진심으로 아이들을 살폈고 아꼈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제각각의 이유로-사실 전부 다 연관은 있었지만, 세부적인 내용은 다르니 제각각이라고 그는 생각했다-힘들어하던 시기가 있었던 만큼, 이럴 때 강요하는 것이 능사가 아님 또한 잘 알았다.
“알았다. 그럼 이야기하고 싶어졌을 때나, 그래도 내 도움이 꼭 필요할 때는 말해다오. 내가 그래도 레아 네가 원하는 것 도와줄 정도의 힘은 있다!”
그래서 그냥 호탕하게 웃으며 모르는 척을 했다. 우리 세리에가 나보다 상담하기 좋다고 나만 빼고 상담하면 안 된다, 그런 농도 덧붙였다. 그게 배려라는 걸 너무 잘 알아서, 드미레아는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수도에서의 시간이 흘러가고, 어느덧 탄신 연회일이 되었다.
그동안 다양한 일이 있었지만, 실마리가 될 만한 일은 딱히 없었다. 그저 그래도 아직 오라버니가 멀쩡해서, 다른 이들도 괜찮은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좀 들었다.
앨런 마나실의 도움을 얻지 못할 수도 있는 만큼, 마법사 협회에 가봐야 할지도 고민이 되었다. 일단 지금 당장은 지그프리드가 마법사 협회에 간다고 해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그렇게 급하지도 않은 만큼 보류하기로 했다.
탄신 축제의 첫날은 별일 없이 지나가야 했다. 드미레아는 아버지를 따라 소공작 자격으로 행사에 참여했다. 소공작이 된 이후 수도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여하는 건 처음이었던 만큼, 걱정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슬레이만이나 세리에는 걱정하지 않았다. 슬레이만은 과거로 돌아온 걸 알았고, 세리에는 슬레이만이 걱정하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다고 여겼다. 실제로도 드미레아는 탈 없이 잘 해냈다.
드디어 기다렸던 이튿날, 드미레아는 왕궁으로 이동하며 아버지에게 미리 말했다.
“연회가 시작하고 먼저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위험한 일은 아니고?”
“……위험하진 않을 겁니다.”
무력으로 따지면 위험할 수 있겠지만, 알려진 것으로도, 시간이 돌아오기 전에 느낀 바로도 그는 온화한 성정이었다. 게다가 아버지와 친분도 있는 만큼 무턱대고 해하지는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래도,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만큼… 말씀드리는 게 좋으려나.
“아버지께서도 아시는 분입니다.”
“누군지 알려줄 생각은 없고?”
“거절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괜히 기대하지 마세요.”
슬레이만은 조금이라도 드미레아가 설명해 주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드미레아는 말할 수 있는 선에서 미리 아버지에게 말씀드린 만큼,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다.
“그나저나, 연회가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자리를 비워야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다만 자신이 추측한 대로라면 정말 얼굴만 비추고 나가봐야 하므로, 그게 혹시 불편하실까, 혹은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만큼 문제가 될까봐 물었다.
“문제 될 것이 있겠느냐? 지그프리드의 소공작이 일이 있어서 아비를 남기고 먼저 나가 보겠다는데, 나도 뭐라 하지 않는데 뭐라 하는 이들이 있을 리 없다. 설령 그런 생각하고 있더라도 앞에서 뭐라 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드미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없는 이야기를 하시는 분은 아니니까. 별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드미레아는 다른 귀족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신경을 끄고, 어떻게 마나실 경을 설득할지부터 고민하기로 했다.
연회가 시작하고 20분쯤 후, 드미레아는 조용히 연회장을 나왔다.
드미레아는 드레스보다는 훨씬 편할 정장 차림으로 연회에 참여했다.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나은 만큼 지나칠 정도로 화려한 옷은 아니었다. 다만 지그프리드의 후계자가 지나치게 수수한 것도 다른 의미로 이목을 끄는 만큼, 과한 장식은 없되 적당히 화려한 디자인이었다. 이번 탄신 연회에 처음 수도에 나타난 소공작에게 관심이 꽤 쏠렸지만, 크게 불편한 일은 아니었다. 그야 회귀 전에는 정치에도 깊이 몸담은 드미레아였으니까.
다만 이상하다고 해야 할까, 기억과 한참 달라진 것이 조금 있었다. 먼저 연회에 참석한 왕자님들의 사이가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았다. 특히 3왕자님과 2왕자님의 사이가 나쁘지 않아 보였는데, 실리케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티를 냈다.
또 다른 점은 3왕자님의 상태였다. 물론 회귀 전에는 자신이 직접 온 것이 아니었던 만큼, 정확히 아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중에 아버지와 오라버니에게 전해 듣기로는 상태가 꽤 나쁜 편이었다고 들었다. 독에 중독되었다고 특정하기는 어려워도, 건강한 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들었는데, 지금의 칼리안 왕자님은 조금 몸이 약해 보일 정도이지 건강이 위험해 보일 정도는 아닌 것으로 보였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연회에 계속 남아있다가는 앨런 마나실이 떠나갈 수 있으니, 아버지에게 나가보겠다며 말하고는 산책하겠다는 핑계로 밖에 나왔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었다.
드미레아는 산책을 한다는 핑계로 나온 뒤 어느 쪽 입구로 가야 할지 고민했다. 기억을 되짚어 보지만, 오라버니가 어느 쪽이었다고 명확하게 말해준 적은 없었다. 다만 궁 내의 사용인이나 비밀스럽게 드나들고자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은 정문을 통하는 만큼, 길게 고민하지 않고 드미레아는 정문 쪽으로 향했다.
정문을 먼저 나서서 기다리는 것도 이상하고, 기다릴 만한 곳도 없는 만큼 드미레아는 고민하다가 정문에서 멀지 않은 정원 한쪽에 앉아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복색은 일부러 숨기지 않았다. 왜 정원 한쪽에 어린 소녀가 앉아있지, 하고 다가오던 수비대원들은 대부분 뒤늦게 고위 귀족이겠거니 하고 돌아갔다.
다만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나 기척은 없었다. 무언가의 영향으로 미래가 바뀌었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드미레아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 있겠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닌 만큼, 이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정문 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앨런 마나실일 가능성이 없는 것이 아닌 만큼 드미레아는 마지막으로 한 번 기다려 보기로 했다. 지금 갑자기 정문으로 가는 건 이상하게 보일 수 있는 만큼, 자리에서 일어난 채로 주위 풍경을 감상하는 척을 하며 정문 쪽 소리에 집중했다.
정문으로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는 수비대원들이 멈췄다. 정문까지의 거리는 어느 정도 남아있어서, 드미레아는 정문 쪽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잠시 말에서 내려주시겠습니까.”
기사의 목소리 이후 말에서 사람이 내린 듯, 탁하고 바닥을 딛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카이리스 국왕 전하의 탄신일 축제라 하여 왔네만. 나는 앨런 마나실이라 하네. 마법사일세.”
맞구나.
드미레아는 걸음을 늦추지 않고 여전한 속도로 정문으로 걸어갔다. 왕실에 들어오도록 도울 생각은 아니었다. 말을 걸 기회만 있으면 충분했다.
“초대장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한동안 소리가 없었다. 충분히 가까워져서 수비대원들과 마법사의 모습이 보일 즈음.
“이를 어쩌나. 초대장을 잃어버린 것 같네.”
“죄송합니다. 초대장이 없으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내 이름도 말하였고, 한번 다른 곳에 확인이라도 해 주면 안 되겠나? 아주 멀리서 왔다네.”
수비대원이 앨런의 차림새를 잠시 훑었다.
드미레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설령 앨런 마나실이 아니었다고 해도, 저런 행동을 진심으로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드미레아였으니까.
“초대장을 가지고,”
“앨런 마나실이라 하셨습니까.”
그래서 드미레아는 개입하고 말았다.
왕성 밖에서 붙잡아 말을 붙일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드미레아를 발견한 수비대원들의 낯에 불편한 기색이 어렸다. 어린 영애가 갑자기 수비대원의 일에 참견한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모르실 수도 있겠지만, 지그프리드 소공작입니다. 아버지와 친분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앨런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앨런 마나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해야 하는 것도 맞았다. 하지만 그보다는, 수비대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알리는 면이 더 컸다. 수비대원들은 당황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까처럼 불편한 기색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 내 자네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지.”
“이렇게 뵌 것도 인연인데, 공작저로 오시지 않겠습니까. 아버지는 아직 연회장에 계시지만, 소식을 들으면 기뻐하실 겁니다.”
“축제에도 참석하지 못했는데, 내가 공작저에 가도 되겠는가?”
“소드마스터보다도 귀하신 분인 걸 제가 모르겠습니까. 설령 그런 분이 아니더라도, 지그프리드는 그런 것으로 들일 사람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소드마스터보다도 귀하신 분이라는 말에 수비대원들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드미레아는 이를 구태여 다시 언급하지는 않고, 앨런 마나실을 향해 다시 말했다.
“저 개인적으로도 여쭤보고 싶은 것들이 많습니다. 괜찮으시다면 공작저로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앨런 마나실의 입장에서는 참 의문스러운 일이었다.
그래, 슬레이만과 친분이 있는 것은 맞다. 공작저에 오라고 하면 한 번쯤 들릴 생각도 없잖아 있었다. 카이리스로 오지 않을 핑계를 찾은 후, 슬레이만에게 연락이나 한번 하고 다른 곳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새끼 코끼리가 자신을 초대한단 말인가?
지그프리드 소공작이 마법에 관심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다. 자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무엇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흥미가 생겼다.
…뭐, 새끼 코끼리 질문 하나 받아준다고 카이리스에 눌러앉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며칠 머무르다 다시 팔랑팔랑 다른 곳에 가면 되겠지.
“……그러지요.”
그래서 한 번 따라가 보기로 했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
“밖에서 말씀드리기는 길기도 하고, 묘한 이야기입니다.”
“새끼 코끼리가 무슨 일로 마법사를 찾나 싶어서 하는 말일세.”
“마나실 경의 마법이 필요한 일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저 도움을 청하고 싶을 뿐입니다.”
“자네가 내 뭘 알고?”
“마나실 경도 모르실 만한 것을 압니다.”
“그런데 왜 내 도움을 구하는가.”
“지금의 마나실 경이 저보다 더 알고 계실 확률도 높고, 더 알아보기도 편하실 것 같습니다.”
“내가 도와줄 거라는 보장이라도 있나?”
“그런 건 없습니다. 다만… 마나실 경이 어려우시다면 다른 분께 청해 보아야겠죠. 개인적으로는 마나실 경이 도와주시기를 바라긴 합니다.”
“……그래서 왜 그걸 대장 코끼리 말고 나한테 도움을 청하나.”
“아버지께서도 모르시는 일은 아닙니다만, 아버지보다는 마나실 경이 더 도움이 됩니다.”
“내 이 말 자네 대장 코끼리한테 일러도 되나?”
“뜻대로 하십시오. 아버지도 이해하실 거로 생각합니다.”
드미레아는 마차를 불러 공작저로 향했다.
당연하지만 앨런 마나실도 함께 탑승한 채였다. 그러니까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겠나.
앨런 마나실이라고 의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이렇게 꼬치꼬치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답하는 드미레아의 태도도 그렇고, 슬레이만도 아는 일이라면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은 아니겠다 싶었다. 사실 뭐, 슬레이만이 세기는 하지만 고작 칼잡이 아니겠는가. 위험하지는 않겠다, 그런 확신이 있기도 했다.
“아, 근데 경이 오신다는 건 모르십니다. 초대한다고 오신다는 보장도 없다 보니 미리 말씀드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대장 코끼리를 통해 초대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어디 계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초대합니까.”
“자네, 아까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았나.”
“왕성에 오실 건 알았습니다. 하지만 어디 머무시는지, 어디로 보내야 응하실지는 몰랐습니다.”
“왕성에 올 건 어떻게 알았고. 예지라도 하나?”
“저는 마법사가 아닙니다.”
“대마법사도 그건 못하네.”
“……대마법사도 못 하는 걸 제가 어떻게 합니까.”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새, 마차가 에이난샤로 접어들었다. 대마법사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 고지식한 새끼 코끼리가 정말 저택 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말을 안 해 주겠구나, 그걸 완전히 깨달은 탓이다. 그래서 얌전히 입을 다물고 저택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드미레아 또한 억지로 말을 붙이려 하지 않아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도착했습니다, 마나실 경.”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인지 들어보겠네.”
앨런 마나실이 툴툴거리며 마차에서 내렸다. 먼저 내린 드미레아가 응접실로 안내했다. 차를 준비해 주거나 다과를 준비해 주는 사람은 따로 없었다. 이미 테이블에 간단한 다과가 올려져 있었고, 차를 끓일 만한 도구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특별히 좋아하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커피면 충분하네.”
고개를 끄덕인 드미레아가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자신은 이 시간에 커피를 마실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한 사람 분의 커피를 능숙하게 준비했다. 커피를 준비하는 드미레아를 보며 혀를 쯧쯧 찬 앨런은 손가락을 튕기며 사일런트 막을 만들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 마법까지 펼쳤으니 이제 말해보게.”
“제가 시간을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미래를 알고 있습니다.”
그 이후 태평하게 나온 말에는 제 귀를 의심했다.
“장난은 재미없네, 새끼 코끼리.”
“장난 아닙니다. 애초에 제가 어떻게 마나실 경이 오실 거라는 점을 알았겠습니까.”
“내가 그럼 그걸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미래에 정말 어떻게 되는지 말씀드리면 더 안 믿으실 것 같아서, 어떻게 해야 믿으실지를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되길래 그러는가. 말해보게.”
“진짜 안 믿으실 겁니다.”
“믿고 말고는 내가 결정하네.”
“……”
진짜 안 믿으실 텐데.
“빨리 말해보게, 나도 시간 없네.”
“…몇 년 안에 8서클의 벽을 넘으십니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아부 아닌가.”
“진짜 안 믿으실 텐데요.”
“본인이 미래에서 돌아왔다고 주장하는 새끼 코끼리가 눈앞에 있는데 뭘 못 믿겠나. 말해보게.”
“……지금은 제가 시간이 돌아왔습니다만. 그때에는 다른 분이 과거로 돌아오셨습니다. 근데 그분은 과거로 돌아오면서 다른 분의 몸을 얻으셨습니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는 소드마스터셨는데, 얻게 된 몸이 마법사여서. 마법사이면서 소드마스터인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분이 경을 스승으로 삼았다가 나중에는 아버지 아들 하는 사이가 되셨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아……
“……그러니까 안 믿으실 거라고 했잖습니까.”
“그래도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믿는 척이라도 해 주지 않겠나.”
“이걸 제가 증명할 방법이 없기는 합니다만, 진실입니다.”
노골적으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앨런이 드미레아를 바라봤다. 드미레아는 정말 억울했다.
앨런은 어이가 없어 미칠 지경이었다. 아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들어 주든가 말든가 하지 않겠나. 자기 말고 시간이 돌아온 사람이 그때에는 따로 있었다는 것도 그렇고, 소드마스터이면서 마법사인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그렇고, 그 사람을 제가 아들 삼았다는 것도 그렇고. 앨런은 계속 나오려는 헛웃음을 삼키느라 애썼다.
그래도…… 슬레이만의 딸이니까. 어린 것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진심으로 믿는 것이 안쓰럽기도 해서. 셋째까지 저러면 슬레이만도 손대기 힘들겠구나, 싶기도 해서 말이나 더 들어주려고 하다가.
“그럼 그렇다고 쳐 주겠네. 그래, 그러면 왜 과거로 돌아왔는가.”
“그 부분이 핵심입니다. 제가 추측하는 그 이유에 대해, 함께 알아봐 주실 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 그러니까 뭐 때문이라고 생각하냐는 말이네.”
“시간의 축.”
말이 안 되는 소리를 들어서.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아나?”
“시간이 돌아올 만한 원인이 되는 게, 그것뿐이었습니다. 마나실 후작님의 둘째 아드님도 그것 때문에 시간이 돌아왔었습니다. 다만, 제가 시간이 돌아올 때, 저는 그것을 사용한 기억이 없습니다. 애초에 마나실 후작님이나, 둘째 아드님 쪽이 가지고 있던 건 ‘조각’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고 생각해서, 저의 ‘현재’로 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 마나실 경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간단하게 말고, 처음부터 천천히 다시 설명해 보게…”
새끼 코끼리가 알 리가 없는 세렌티의 신물, 그것을 원인으로 짚어서. 망상이나 공상으로 취급할 수가 없어져 버렸다.
“그러니까, 원래는 옆 나라 2왕자가 칼리안 왕자님의 몸에 들어가 내 제자가 되는데.”
“예.”
“지금은 옆 나라에 2왕자까지 다 있는 걸 보니 칼리안 왕자님은 그대로일 것이고.”
“예.”
“그런데 자네는 옆 나라 2왕자 이름이 절대 들리지 않고.”
“…예.”
“그런 걸 보니 지금 상황은 불가역적인 변화가 아니라 되돌릴 수 있는 상황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네는 원래의 현실로 돌아가고 싶다.”
“맞습니다.”
“이게 진짜 현실이라면 자네에게만 그렇게 누군가의 이름이 억지로 지워지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아마도, 본래에도 제가 알지 못했던 이름이기 때문에 지워진 것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네가 원하는 건,”
“시간의 축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해야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그 실마리도 전부 거기에 있을 겁니다.”
왜 이렇게 일이 꼬였을까. 앨런 마나실은 이마를 꾹꾹 눌렀다.
“그게 말이네.”
작게 이어진 한숨.
“작년에, 세크리티아에 비밀리에 다녀온 적이 있네. 그때 나도 시간의 축에 대해 알았지. 처음 발견된 것이고, 알려진 것이 없어서, 그래도 대마법사 중에 말 좀 잘 들어주는 게 나 정도 아니겠는가? 그래서 가서 시간의 축을 살피고 했었네.”
“여전히 세크리티아에 있습니까?”
“그게 문제이네.”
이게 대체 무슨 조화인지.
“……얼마 전, 연락을 받았네. 시간의 축이 없어졌다고. 그게 2월 20일이 조금 넘어서였네.”
“…그러면 지금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말씀입니까.”
앨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쯧쯧, 하고 작게 혀 차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뭐, 시간의 축에 대해 찾아보는 건 꽤 흥미로워 보이니. 도와주겠네.”
“……감사합니다.”
“늙은이가 재미있어 보여서 도와줄 뿐인데 고마울 게 뭐가 있나. 그럼, 시간의 축에 대해 알아보면 되겠나?”
“예. 다만 이전에는… 왕궁 안에서 비밀스럽게 무언가가 발견되었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나타난 것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니…”
“왕궁에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지위였으면 좋겠다는 말인가.”
“거북하시다면 꼭 그러지는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거북할 정도는 아니네. 그럼 알겠네. 나를 찾을 때는 마법사 협회로 오면 되네.”
대화가 조금 더 이어졌다. 드미레아는 다시 감사를 표했다. 앨런 마나실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음 날, 카이리스의 왕궁은 예상치 못한 사람의 방문으로 인해 어지러웠다.
점심이 조금 지난 시간, 테이난샤 거리에서 화려한 마차가 나왔다. 자개로 장식된 검은 마차, 그 위에 붉은 꽃 일곱 송이와 은색 지팡이가 새겨진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마차는 다른 곳을 거치지 않고 곧장 왕실로 향했다.
국왕은 앨런 마나실을 맞았다. 바로 시간을 내어 대화했다더라.
그리고, 과정은 모르겠지만, 앨런 마나실이 왕자들의 선생이 되었다더라.
“……어떤 지위를 얻을지, 미리 생각해 두신 것이 없으시다면. 부탁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자네가 다시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라면 편히 말해보게. 도와준다고 하지 않았나.”
“아뇨, 그보다는 사적이고… 거북하실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위한 부탁인데 그러나.”
“제가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이곳이 어떻게 될지는 모릅니다. 이 나이대의 제가 다시 이 몸에 돌아오고, 시간이 계속 흐를 가능성도 없잖아 있습니다. 그 미래를 위한 부탁입니다.”
“들어는 보겠네.”
“……제 오라버니는 3왕자님의 시종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첫째 오라버니가 죽고, 마음을 닫았던 오라버니가, 다시 웃을 수 있게 해 주신 분입니다.”
“그래서.”
“제가 온 시간에서는, 그분이 독을 드셨습니다. 다만 소드마스터이시고, 대담하게도 경의 도움을 받아내셨으니 살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도.”
“……”
“3왕자님은 힘이 없습니다. 제가 힘을 싣는 건, 섣불리 진행된다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게 어떤 독인지, 어떻게 해독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정치적으로 큰 조력을 하기도, 브리센과 겨룰 정도의 힘을 실어 주기도 어렵습니다.”
“자네의 말은,”
“……정해두신 것이 없다면, 왕자님들의 선생이 되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혹은 그런 말로 왕자님들을 뵌 뒤, 마음에 드신다면 그리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왕자님들의 스승이라는 명목으로 들어가, 그분이 이르게 죽지만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왜,”
“저는, 오라버니가 다시… 그렇게 되는 걸 볼 수 없습니다. 이건 아버지는 도와주시기 어렵습니다. 저와 같은 이유입니다.”
“……내가 보고 결정하겠네.”
며칠이 지났다.
드미레아는 나름대로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리리에의 생각이 자주 났다.
브리센 후작저에 숨겨져서 길러지던 아이. 초코 우유를 먹어본 적이 없다고, 사탕이 신기하다고, 과자를 먹으면 해맑게 웃던 아이. 할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했으면서도 할아버지가 죗값을 치러야 했다며 의연하게 굴었던 아이. 환경 때문에 아이답지 못해야 했던 아이.
지금도 같은 환경에 있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며칠이 지났다.
정보를 모으면서도 검술 연습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검의 무게를 늘리느라, 손에 상처가 났다. 이런 상처가 나면 늘 가만히 두었지만, 언젠가 치료해 줄지 물어왔던 치유사. 히나 베른 경의 생각이 났다.
베른 백작과 베른 경 모두 칼리안 왕자님이 어디선가 데려온 아이였다고 했다. 나중에 베른 경이 불법 도박장을 싹 몰살한 일도 있었다. 후련해 보이는 베른 경의 모습, 그런 걸 보면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당연히 알 수 있었다.
지금도 베른 경과 베른 백작은 아직 그곳에 있을 것이다.
며칠이 지났다.
그 사이 아버지는 일단 다시 공작령으로 내려갔다. 그래서 귀족 회의에는 소공작인 드미레아가 참석했다.
왕자님들의 사이는 연회 때 본 것보다 조금 더 멀어 보였다.
플란츠 왕자님은 망나니라고 알려져 있었다. 여전히 그랬다. 망나니라고 알려진 왕자에게도, 공평하게 꽃차가 나왔다. 향기를 맡았을 때의 미미한 찡그림을 드미레아를 제외한 누구도 확인하지 못했다.
항상 2왕자님의 곁에서 향기가 나는 것들을 치우던 분이 생각났다. 향기가 있는 것을 버티지 못한다는 걸, 옆에서 보기만 해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왜 그러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실리케는 르니에리 향이 지독했다.
여전히 플란츠 왕자님은 르니에리 향을 맡았다.
“왜 그리 표정이 좋지 않으십니까.”
“말씀, 편히 해 주십시오.”
“친구네 딸이 아니라 조력자와 대화하는 것인데, 함부로 말을 내리기는 좀 그래서 그렇습니다.”
드미레아는 납득한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앨런 마나실이 내어 준 차를 마셨다.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별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무슨 일입니까.”
“찾았습니다.”
무엇을, 그런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 말만 듣고도 드미레아는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다. 그야 마나실 경과 자신의 사이에서 찾을 법한 게 시간의 축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그런 생각에 딱 맞게, 앨런 마나실이 어떤 상자를 꺼내왔다. 찰칵,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열리자, 금색의 광채가 보였다.
“조각이 아니라 완전한 모양으로 나왔지요.”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그게 참, 이상한 일입니다.”
드미레아는 가만히 앨런을 바라보며 답변을 기다렸다. 상자 안에 있는 금색의 모래시계를 가만 내려본 앨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제, 갑자기 제 방에 있더군요. 처음 보는 상자가 있어서 열어 보니 이랬습니다.”
“갑자기, 방 안에 말입니까.”
“참 이상한 일이지요. 제 집은 여러 마법이 있습니다. 시스파니안께 비할 바는 아니지만, 경보 마법이나 침입 방지 마법은 당연히 준비되어 있지요. 제가 7서클 마스터의 경지에 있으니, 다른 대마법사들이라 해도 쉽게 해체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렇다면……”
“또한,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시간의 축은 시스파니안께서 만드신 물건입니다.”
드미레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말씀은.”
“대마법사의 집에 소란 없이 드나들 수 있고. 소공작의 말로는 ‘미래’에 조각의 형태로 발견되었다 하지 않았습니까. 한데 이 물건은 조각이 아닌 완전한 형태를 취하고 있지요.”
“시스파니안께서…… 가져다 두었을 것이다, 그런 말씀이십니까.”
“그리 추측하고 있습니다.”
드미레아는 복잡한 마음을 뒤로하고 다시 시간의 축을 잠시 살폈다가, 다시 앨런 마나실을 바라보았다.
“혹시 작동합니까.”
“혹시나 해서 손을 대어 보았습니다. 마나를 넣은 것은 아니지만, 아무 반응이 없더군요. 만지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겁니다.”
꺼내셔도 좋습니다. 그런 덧붙임이 이어지고, 드미레아는 손을 뻗었다. 자신을 이 상황으로 이끌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물건, 그것을 손에 쥐었다.
손이 닿자, 두통이 일었다. 시야가 암전되었다.
제온이, 휘트린에 침입했다. 치유사 베른 경도, 왕자님도, 다른 사람들도, 한참을 싸웠다. 파비안에도 사람을 보냈고 다른 사람도 갔다. 제온, 라시드 브리센. 시간의 축. 그런 것들 때문에, 긴 싸움이 있었다.
싸우던 중 시간의 축을 사용했었다고. 플란츠 왕세자 저하가 그런 걸 알려줬다.
오라버니에게는 말할 수 없어서, 그럼 더 걱정할 테니까. 그래도 소공작, 너는 알고 있으라고. 그것 때문에 지금 일어나지 못하는 거라고.
시간의 축을 사용했는데, 라시드 브리센이 움직여서. 시간이 멈췄는데도 움직이는 걸 보니 제온도 움직일 수 있겠다 싶어서. 급하게 시간을 풀고, 다시 싸우고. 그러다가 더 엉망이 된 거라고.
그러니 소공작 네 탓이 아니라고.
파비안으로 기사도 보내고, 휘트린도 잘 맡고 있고, 휘트린에 침입한 제온의 병사들도 잘 막고, 소공작 너는 할 만큼 했다고.
그러니까 지금 내 아우님이 못 일어나서, 아우님 시종이 죽을 상 하고 있는 건 절대 네 탓이 아니라고.
그런 말을 들었다.
“괜찮습니까.”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까?”
앨런이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손을 대자마자 잠시 머리를 짚길래 물어보았는데, 뭐라도 본 모양입니다. 오래 지났냐고 물어보는 걸 보면.”
“말씀……드렸다시피. 왜 시간이 돌아왔는지, 직전까지 뭘 했는지. 그런 기억이 없었습니다.”
“그걸 봤습니까.”
“네, 시간의 축은… 제가 사용한 게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가 시간을 돌린 것도 아닙니다. 거기까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럼 뭘 보았습니까.”
“3왕자님이 시간의 축의 조각으로, 시간을 잠시 멈췄다고 했습니다.”
“시스파니안이시여……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앨런은 한숨을 푹 쉬었다.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때에도 시간의 축은 온전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왜 지금은 온전하게 나타났는지, 왜 시간이 돌아갔는지는 다시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도… 저는 본래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런 소망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었다면, 그런 가정을 해봤을 수 있겠습니다.”
“소공작이 직접 돌렸을 수도 있겠다는 말입니까.”
“예, 다만… 저는 아시다시피, 마법사가 아닙니다. 검의 길에 오르게 된다면, 그런 소망을 담아 마나를 다루는 수련 자체는 해왔고, 다루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만. 기사의 미약한 마나로 작동할 정도의 물건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건 더 알아볼 필요가 있겠군요. 알아보고 다시 연통을 넣겠습니다.”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드미레아를 따라 앨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두서없는 말을 꺼냈다.
“스승을 하기로 했습니다. 다만 왕자님들의 성취를 공표할 계획은 없습니다. 실리케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리하고 있습니다. 국왕 전하께서도 그리 결정했습니다.”
“전하께서 말입니까?”
“얼마 전, 왕자들이 독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입수했다 하더군요. 그래서 몰래 한 분씩 뵈었습니다. 왕자님들과 상급 시종 한 명씩만 그리했습니다. 왕자님들 개개인의 성취는 알리지 않고, 수업 시간을 갖습니다. 마법을 배우기 어려우신 분은, 혹은 배우지 않겠다 하시는 분은 다른 것을 가르칩니다. 리베른에서 보낸 세월이 있는 만큼, 마법이 아니어도 가르칠 건 있지 않겠습니까. 스승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졌지만, 마법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그리 말하기로 이미 정했습니다.”
“칼리안 왕자님은,”
“마법을, 배우십니다. 이미 3서클을 이루셨더군요. 시종 노릇 하는 새끼 코끼리는 이번에 처음 안 것 같았습니다. 다행이라며 펑펑 울었으니 말입니다.”
“오라버니는 그런 사람이니까요. 다행…입니다.”
“3왕자님이 워낙 잘 배우셔서, 늙은이가 가르치는 재미가 있습니다.”
앨런이 옅게 웃었다. 드미레아도 안심한 듯 살짝 웃었다. 다행입니다. 고개를 숙이고 이어진 대답이 안쓰러워서, 친구의 딸을 도닥였다.
몇 주가 지났다.
앨런은 마법사 협회의 마법사들을 달달 볶아 가며 시간의 축에 관해 연구했다. 문헌을 찾고, 전승을 모으고, 탐구하는 데 시간을 썼다.
드미레아는 오라버니와 주기적으로 만났다. 3왕자님의 상황도 가끔 전해 들었다. 많은 것들이 그대로인 만큼, 또 모두가 많이 아플까봐, 걱정을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그리고 이변이 일어났다.
“……브리센의 살인, 의. 증인이 나왔다고.”
“그렇습니다, 소공작님.”
“이름이 그러니까,”
“탈리아 브리센이라고, 브리센의 방계입니다.”
“그래서 지금 에이난샤가 뒤집어졌다는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애초에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먼 방계라면, 어떻게 그런 증거를 모았다는 말이지.”
“브리센 상단에서 일했다고 합니다. 방계 친척이라서 일하게 된 건 아니고, 원래부터 셈이 빨랐다고 하더군요. 이번에 공표한 자료는 나중에 쓸모가 있을까 모아두다가, 더는 안 되겠다 싶어서 알렸다고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브리센의 악행을 공표할 때, 과거의 살인에 대한 증거나, 증인은 모두 죽어 있었다. 모든 것이 정황 증거만 남아있었다. 확실하게 이것은 실리케와 브리센 가문의 업보라고 말할 증거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바로 브리센을 뿌리 뽑지 못했던 것 아닌가.
애초에 그런 증거가 있었다면, 이미 죽었어야 마땅했다.
“알겠네. 사람들의 반응은.”
“유가족들이나 지인들이 브리센 후작저 앞에서 해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마 국왕 전하께서도 조만간 귀족들을 소집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미리 준비해 두심이 좋겠습니다.”
드미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아야 했다.
며칠이 더 지났다.
드미레아는 관련된 정보를 이상할 정도로 찾을 수 없었다.
관련해서 알 법한 사람을 찾을 때마다,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국왕은 브리센에 대한 엄정한 대응을 약속했다.
증거가 명확해서 제아무리 브리센이라 해도 피하기 어려웠다.
일주일 사이,
실리케 왕비가 주도한 악행이 밝혀졌다.
일주일 사이.
대부분의 악행에 에반 브리센 후작과 레넌 브리센이 깊이 얽혀 있음이 밝혀졌다.
그레이 브리센이 연관된 다양한 악행도 낱낱이 밝혀졌다.
며칠 뒤,
브리센 가문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되었다.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가세계에서는 왕실에 브리센이 선물한 파벨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라온과 카에라는 있었지만, 개중에 브리센의 물이 든 자도 있었지만,
명확하게 브리센에 망조가 든 지금은 온전히 국왕의 기사였다.
하루.
브리센 가문에 대한 수사가 시작된 뒤, 리리에가 발견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후계자로 길러지던 리리에 브리센은 라온에 의해 구조되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국왕에게 드미레아는 ‘지그프리드에서 보호하겠다. 아이는 죄가 없다.’라고 제안했다.
국왕은 받아들였다.
‘본래’ 리리에가 후작저 밖으로 나왔던 시기가 확 앞당겨졌다.
드미레아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사흘.
브리센 후작가에서 가지고 있던 불법적인 자금줄이 여러 가지 밝혀졌다.
‘시스파니안의 깊은 술 냄새’라는 주점에 있던 불법 도박장,
그곳을 라온이 검거했다.
도박장에서 억지로 싸우던 사람들에게 국왕은 다양한 기회를 제공했다.
‘키리에’는 기사가 되기를 선택했다.
남매인 ‘히나’는 치유력이 있다 밝혀져 왕실의 보호를 받았다.
성이 없는 남매에게, 국왕은 출신 지역이라는 ‘브리지트’를 성으로 내렸다.
실리케 브리센은 왕비의 자리를 잃었다.
에반 브리센, 레넌 브리센, 그레이 브리센, 그리고 그들의 가족은 작위를 잃고 평민이 되었다.
평생 왕실의 감시 아래에 평민으로 살아야 했다. 그들은 국왕의 죄인이었다.
브리센의 방계에도 철저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악행에 가담한 이들은 전부 처벌받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그대로 살아갔다.
실리케 브리센은 1왕자와 3왕자를 암살하려 한 죄로, 여전히 조사 중이었다.
사흘.
실리케 브리센의 처분이 결정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국왕은 사형을 내리지 않았다.
2왕자의 간청이 있었다는 사실을, 드미레아는 알게 되었다.
감옥에서 남은 생을 보내도록, 그런 처분이 내려졌다.
스스로 죽지도 못하도록 엄중한 감시가 이루어졌다.
어찌 되었든, 2왕자는 어머니를 잃지 않았다.
“본래 브리센은, 칼리안 왕자님이 죽을 위기에 처하면서 축출했습니다.”
“소공작도 모르는 일이라는 건 알겠습니다.”
드미레아는 기뻐해야 할지, 이렇게 모든 일이 쉬울 수 있었다는 점에 슬퍼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으로 일상을 수행했다. 그래도 앨런의 연락은 받자마자 마법사 협회로 향했다.
앨런 마나실이 내어 준 홍차를 마시며, 드미레아는 가라앉은 눈으로 책상 위에 놓인 시간의 축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
“뭐,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여기 놓인 시간의 축입니다. 이건 길어지니 일단 이따 얘기하고, 다른 하나는…”
앨런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
“본래는 3왕자님이 데블란을 끌어내리는 데 일조했다고 했지요.”
“예, 직접 세크리티아까지 가셨었습니다.”
“그 시점이 당연히 지금은 아닐 것 같은데.”
“……혹시 데블란도, 죽었습니까.”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미레아는 심경이 복잡해졌다.
브리센의 일은, 자신도 잘 아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을 걱정했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세크리티아의 일은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린 영애와 친분은 있었지만, 지금 당장 린 영애가 데블란 때문에 엄청난 위기에 처한 것도 아니었고, 세크리티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 이쪽은 왜 변화가 일어났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데블란은 성정이 뱀 같기로 유명합니다. 세크리티아에 나타난 시간의 축을 보러 갔을 때도, 체이스 왕세자나 …… 왕자를 보며 어떻게 데블란 밑에서 저런 아들들이 나왔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요. 그러던 데블란이 일주일쯤 전 갑작스러운 발작으로 죽었다고 하더군요. 때문에 체이스 왕세자가 즉위식을 준비하고 있다고, 내게 연통을 넣었습니다. 두 분의 어머니가 즉위식을 도와준다고,”
“……디에나 왕비님이 살아있으시다는 말씀이십니까.”
“소공작의 반응을 보니, 원래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군요.”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앨런이 그러자 덧붙였다.
“‘본래’는 돌아가셨었다면 잘 모를 수 있을 것 같아 덧붙이자면, 왕비와 후궁의 사이도, 왕세자와 왕자의 사이도 매우 좋습니다. 데블란도 사실 좋은 남편으로 유명하지요. 직접 가서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만. 아마 데블란의 죽음으로 지금은 바쁘더라도, 네 가족은 조금 더 숨이 트였을 게 뻔히 보입니다.”
그 말을 들은 드미레아는 조금, 이곳의 원리를 깨달을 것 같았다.
이곳은 필시,
제 주변 인물들의 불행이 줄어든 세계라는 걸.
잠시 혼란스러워하는 드미레아가 진정될 때까지 앨런은 기다렸다. 5분 정도가 지났을까, 평정을 찾은 드미레아에게 다시 앨런은 데운 차를 권했다.
“드시지요. 평정을 찾고 듣는 게 좋겠습니다.”
“…… 고맙습니다, 마나실 경.”
드미레아가 차를 몇 모금 마시고, 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앨런을 바라보자,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시간의 축을 소공작이 직접 작동시킬 만한 방법은 있습니다. 오러입니다.”
“오러, 말입니까.”
“오러와 마나는 근본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소공작도 말했던 것처럼, 기사들은 언젠가 검의 길에 오르기를 바라며 마나를 다루는 수련도 진행하지요. 다만 기사들은 본래 마나를 마법사만큼 다루지 못합니다. 다루는 마나의 양이나 농도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 미약한 마나로 작동할 만한 물건은 아니니, 제가 작동한 건 아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오러는 다릅니다. 소공작의 말로는, 소드마스터이자 마법사인 제 제자님이 ‘오러’로 서클을 만들었다 했지요. 물론 서클을 만드는 건 깨달음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다루는 마나가 미약하다면 제대로 된 서클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오러로 서클이 만들어질 정도라면, 마법사가 다루는 마나에 비해 그렇게 밀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앨런은 짧게 차를 마시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상황이 소공작이 직접 축을 작동시켜 발생한 상황이라면, 아마 소공작은 오러를 발현했을 겁니다. 오러 또한 깨달음에 따라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슬레이만에게 물어보니 소공작의 검술도 상당히 정교하다더군요.”
“그렇다면, 원래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소공작이 다시 오러를 발현해서 축을 다시 작동시키는 쪽이 가능성이 있겠다. 그런 결론을 냈습니다.”
더 이상 연구한다고 해서 해답이 나올 문제도 아니고. 추가로 알아낼 수 있는 정보도 많지 않으니, 시간의 축은 소공작이 가져가는 게 좋겠습니다. 그런 말을 했던가. 드미레아는 반쯤 정신이 나가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시간의 축을 만졌을 때, 잊었던 기억을 찾았으니, 저택에 돌아가서 축을 다시 살펴보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예, 함께 고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친구에게 진 빚을 이렇게 갚는 것뿐이니 신경 쓸 것 없습니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기를 기원하지요.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편히 연락하고.”
드미레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할 것이 많았다.
불행의 총량이 적은 이 가세계를 버리고,
원래의 현실로 돌아가는 게 옳을까?
드미레아는 지그프리드 저택으로 걸어가기를 선택했다.
마법사 협회에서 저택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오히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므로, 걸어가는 쪽이 훨씬 나아 보였다.
드미레아는 본래 ‘직감’이라는 걸 그다지 신봉하지 않는 편이었으나, 지금은 정말 ‘직감’, 그것 말고 설명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의 축에 다시 손을 댄다면, 어떻게 이 상황이 발생했는지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 지금은 아마 온전한 기억을 얻게 될 것이다. 정말 내가 축을 작동한 게 맞았다면, 검의 길에 오르게 된 깨달음까지도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어떻게 이 상황에 도달했는지, 그건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내가 축을 작동한 게 맞았다면, 그래서 오러를 이용해 축을 작동시켜 다시 원래의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면, 스스로 선택해야 했다.
모든 것이 되돌아오며, 이상할 정도로 쉽게 문제들이 해결되어 버린 가세계.
혹은 다치고, 상처받고, 괴로워하고, 실패하고, 잘못되면서도 결국은 원하는 것들을 주위 사람들이 직접 쟁취해 낸 현실 사이에서.
지금 상황을 직접 겪은 게 아니라, 말로 전해 들었다면, 아마 망설임 없이 후자를 선택했을 것이다. 모두의 선택은 가치 있었다. 최선이 아닐지라도, 어려운 길이었을지라도 직접 쟁취한 미래였기 때문에 그쪽이야말로 ‘진실’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직접 보고 경험하니, 그게 얼마나 얕은 생각인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리리에는 본래보다 일찍 후작저에서 빠져나왔다.
자신의 보호 아래에서 더 단단하게 자랄 수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보지도 않았다. 왕가의 허락만 있다면, 리리에는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3왕자님은 오라버니가 보살피기로 했던 ‘칼리안’ 그대로이다.
오라버니는 기만당하지 않고 마음의 위안을 계속해서 얻을 수 있다.
기사 베른 경과 치유사 베른 경은 더 쉬운 길을 걷게 되었다.
호위 시종으로 있다가 뒤늦게 기사가 되는 것보다 처음부터 국왕의 기사가 되는 것이 당연히 더 마음고생도 적을 것이다.
치유사 베른 경도, 더 쉬운 방법으로 빠르게 능력을 인정받았다.
왕자님들의 관계도 이전보다 좋아 보였다.
서로에 대한 죄책감이나 원망을 바로 해결할 수는 없을지라도, 앞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상처를 보듬을 시간이 충분히 있다. 왕권을 되찾은 국왕 역시, 이전보다 괜찮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이웃 나라의 왕제가 될 사람은 아마 이번엔 네 가족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갑자기 이웃 나라의 죽을 운명인 셋째로 깨어나서 살기 위해 아득바득 애쓰는 일은 없을 것이다.
데블란이 서거했으니, 아마 그의 새였다는 에일라 경도 지금은 좀 더 나은 상황일지 모른다.
그리고 자신은.
정말 최연소 소드마스터가 될 수 있다.
어쩌면 허구라고 할지라도 이곳을 선택하는 편이, 모두에게 나을지도 모른다. 제온에 대해서도 자신이 알고 있다. 미리 대비하고 피해를 줄일 수 있다. 어쩌면 모든 게 나아져 있는 만큼, 제온이 존재하지 않거나 약화되어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본래의 현실을 외면하고 선택한 백일몽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드미레아는 그걸 알 수 없었다.
“드미레아!”
“리리에, 왜 나왔어.”
공작저로 도착하자 외출을 이미 알고 있던 리리에가 나와서 드미레아를 맞았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옅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드미레아는 다가온 리리에를 껴안았다.
“나갔다 올 동안 잘 있었어?”
“응, 드미레아가 사준 사탕 먹으면서 기다렸어.”
알록달록하고 달콤해서 좋아, 하면서 웃는 리리에의 머리를 드미레아는 쓰다듬었다. 이번에도 여전히 먹어보지 못한 달콤한 것들이 많았던 아이. 할아버지의 손에서 자랐던 아이. 그렇지만 아직 4살밖에 되지 않아서, 이전보다는 덜 상처받았을지도 모르는 아이.
리리에가 지그프리드 공작저에서 지낸 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리리에는 금방 드미레아에게 익숙해졌다.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 너무 눈치를 보지 않아도 괜찮다. 그러면서 계속 꼼꼼하게 보살피는 드미레아에게 보답하듯 리리에는 마음을 열었다.
이전보다 훨씬 더 조그마하고 가벼운 리리에를 드미레아는 가볍게 들어 올렸다. 거뜬히 안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며, 드미레아는 리리에가 무엇을 했는지, 조곤조곤 물어보았다.
할아버지랑 있을 때보다 공부하는 시간이 적어서. 오늘 할 공부를 다 하고, 저택 안을 탐험하면서 여러 가지를 보고, 새로운 것들을 많이 느끼고, 그러다가 레아 올 시간이 되어서 나와서 기다렸다고. 뭘 하다 왔냐고. 그렇게 묻는 아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단지 어린아이일 뿐인데, 이 아이의 나쁜 기억들이 줄었다는 그것만으로도 가세계가 더 가치 있는 건 아닐까……
“드미레아, 고민 있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리리에가 물었다.
“조금. 왜, 걱정돼?”
“으응, 리리에가 도와주면 안 돼?”
“리리에가 도와주면 좋지. 엄청 든든하다.”
대견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으며 드미레아는 뭐라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사실 제대로 말한다고 해서 리리에가 이해할 수 있을지도 애매했지만, 그렇게 말하면 아이가 상처받을 테니까. 꽤 오래 생각하던 드미레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리리에, 만약에 세렌티께서… 처음부터 리리에가 나랑 지내게 해 준대. 완전 똑같은 다른 세계로 보내서, 처음부터 리리에가 내 동생이 되게 해 주신대. 그럼, 리리에는 어떡할래?”
“움……”
곰곰 생각하며 리리에가 고개를 숙였다.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역시 어렵나 싶기도 하고, 상처가 될까 싶기도 해서 말을 덧붙이려던 순간.
“싫어, 드미레아. 나는 그냥 여기 있을래.”
리리에가 그런 대답을 했다.
“할아버지가 좋아서는 아냐. 할아버지는 사탕도 안 줬구, 맨날 수업만 듣고…… 울어도 안 봐줬어. 하지만 그건 가짜잖아. 내가 할아버지랑 있었던 게 없어지는 건 아냐.”
“……”
“그리구 결국 드미레아를 만났잖아. 기사님들이 리리에 찾아줘서, 레아 만날 수 있었어. 드미레아랑 같이 있어서 지금도 충분히 좋아. 굳이 그렇게 해 주시지 않아도 돼.”
……그렇구나.
“알았어, 리리에. 세렌티께 내가 말해줄게.”
“응, 드미레아. 이제 내려줘도 돼.”
고통스러울 수 있다. 더 불행했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내가 감히 선택해도 되는 게 아니다. 선택할 권리는 당사자에게 있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한 사람들이니까. 이런 허무한 미래보다 원래의 현실을 선택할 수 있다.
내가 잊으려고 한다고 해도, 완전히 없어지는 일도 아니다. 이미 일어난 일들이다. 지금, 이렇게 허무하더라도 모든 게 나아진 이 가세계에서 외면한다고 해서, 이전의 선택을 없는 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또한 이런 방식으로 이뤄낸 행복에 의미가 있는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의 개임으로 이뤄진 행복이 진정 행복일까? 과연 이런 미래를 그들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칼리안 왕자님은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선택을 해 왔다.
타국에서 깨어난 형제를 살리기 위해서일까, 세크리티아의 왕세자 저하도 다양한 도움을 건넸다.
앨런 마나실 후작은 칼리안 왕자님을 도운 것에서 끝나지 않고, 아들을 잃은 빈자리까지 극복해 내는 게 보였었다.
플란츠 왕세자 저하는 향기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다.
국왕 전하 또한 더는 왕자님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리리에에게 좋은 보호자가 있구나, 그런 것까지 신경 쓰는 사람이 되었다.
두 명의 베른 경은 어머니의 일까지 결국 극복했다.
리리에는, 모든 일을 겪고도 윤리와 도덕을 잃지 않았다. 유일하게 가까운 혈육이었던 할아버지의 죽음에도, 윤리적으로 판단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외면하고 이곳에서 안주할 수 없다.
리리에를 다른 이에게 맡기고, 드미레아는 시간의 축을 담은 상자를 가지고 침실로 들어왔다. 아무도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누군가 휘말리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있었다.
상자를 여는 손길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차분한 눈길로 드미레아는 상자 뚜껑을 열었다.
완전히 상자가 열리자, 시간의 축은 의지를 가진 것처럼 둥실 떠올랐다. 여전히 차분한 눈으로 그걸 바라보고 있자, 금세 드미레아의 손 위로 둥실 떠올랐다.
망설임 없이, 드미레아는 떠오른 시간의 축에 손을 댔다.
시야가 암전됐다.
소공작 네 탓이 아니라고.
그 말을 들었다고 마음이 갑자기 가벼워지는 일은 없었다.
지그프리드가 가장 잘하는 건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지켜야 하는 이를 누구도 지키지 못했다. 정혼자도 지키지 못했고 그래서 오라버니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깊은 잠에 빠져, 치유사 베른 경의 치료에도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는 왕자님의 곁을 지켰다.
내가 조금 더 강했다면.
내가 더……
그런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승리하긴 했지만, 지그프리드 기사단의 손실도 없지 않았고, 무엇보다 3왕자님이 다쳤다. 내가 어떻게 해야 더 잘 지킬 수 있었을까. 그걸 끊임없이 고민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떻게 했을지도.
그러다가 깨달음을 얻어서 오러를 발현했다.
그리고 문제는, 그때 옆에 시간의 축이 있었다.
다른 마법사는 곁에 없었다. 혹시나 누가 시간의 축을 사용할까봐, 앨런이 염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의 축으로 인해 칼리안 왕자님의 상태가 더 나빠진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완전히 떼놓는 것이 옳은 선택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곁에 둘 필요는 있었다.
다만 마나실 후작은 당연하지만, 훨씬 바빴고, 국왕의 부름도 잦았다. 그러니 어찌하겠는가. 죄책감이 가장 큰 원인이지만, 소문을 가라앉히는 것도 겸해 자리를 지키던 소공작에게 맡겼다. 가문의 일은 공작님이 처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러를 발현해서.
처음 발현한 오러를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해서.
품에 있던 시간의 축, 그게 강한 오러에 반응해서.
근데 완전한 축이 아닌 조각에 불과해서, 제대로 시간이 돌아가지는 못하고.
그래서 이 세계에 떨어졌다.
다시 시야가 돌아오고 확인하자, 그렇게 시간은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전에 시간의 축을 만졌을 때와 비슷했다.
기억은 돌아왔다. 깨달음도 얻었다.
오러도, 자유자재로 다루지는 못해도, 시간의 축에 불어넣는 정도는 제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의 축을 양손으로 쥐었다. 정신을 집중했다. 단전에 있는 오러, 그것을 느끼기 위해. 기억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발현했던 오러, 그 감각을 다시 기억해 냈다. 꿈틀거리는 것 같은 미약한 오러를 움직여서, 시간의 축에 불어넣었다.
히나 베른은 언제나 바빴지만, 특히 최근은 더 바빴다.
자상한 왕자님이 의식을 잃은 채 보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소공작님이 곁을 지켰다. 이상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져서 급하게 앨런이 자상한 왕자님을 다시 찾자, 자상한 왕자님은 일어난 대신 소공작님이 의식을 잃었다. 다른 사람 중에도 다친 사람이 꽤 많았는데, 이렇게 한 명이 회복하고 한 명이 다시 추가된 상황을 어떻게 여겨야 할지, 히나도 고민이 많았다.
그렇게 아무 전조도 없이 소공작님이 의식을 잃은 지 이제 거의 일주일째. 그래도 히나는 여전히 드미레아가 금방 정신을 차리리라고 믿었다. 강인한 소공작님이니까, 꼭 멀쩡하게 다시 깨어날 것이라고. 그래서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보살피러 오기도 했다.
소공작님을 걱정하는 건 자신뿐만이 아닌지라, 여러 사람이 소공작님을 보러 왔다. 하필 자신이 일어난 날 정혼자가 의식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은 칼리안도, 얀도. 특히나 리리에는 드미레아가 왜 안 오냐며, 보러 가면 안 되겠냐고 했다가 걱정을 사기도 했다. 그래도 어리다고 못 오게 하는 것을 드미레아가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것이 뻔해서, 리리에가 병문안을 오기도 했다. 또 와도 되냐고, 드미레아가 걱정된다고 해서 오늘이 또 오기로 한 날이었다.
“백작님, 저 왔어요.”
- 어서 와요.
씩씩하게 인사하는 리리에에게 웃으며 히나가 수첩에 글을 써서 보여줬다. 항상 보호자로 함께하던 드미레아 대신 리리에를 데려온 세리에가, 가볍게 히나에게 인사했다. 세리에의 손을 놓고 씩씩하게 걸어온 리리에에게 히나는 말을 전달하기 위한 구슬을 쥐여줬다.
- 리리에, 마시고 싶은 거 있어?
“으응, 드미레아가 좋아하는 홍차 마실래요.”
- 그럼, 여기 앉아서 기다려 줘.
고개를 끄덕이며 히나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미레아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리리에가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본 다음, 차를 우리기 위해 준비된 다탁으로 향했다.
“드미레아가 홍차 향 맡고 일어나면 좋겠어요.”
- 리리에가 계속 걱정해 주니까, 소공작님도 빨리 일어나실 거야.
끄덕끄덕, 조그마한 머리가 흔들렸다. 세리에는 복잡한 마음으로 셋째와 그 동생을 바라봤다.
조그마한 손으로 구를 쥐려면 양손을 다 써야 했다. 그래도 잠들어 있는 드미레아의 손을 잡아주고 싶어서, 리리에는 한 손으로 쥐려고 이리저리 제 손안에서 굴렸다. 마침내 어떻게든 왼손 손바닥 위에 구슬을 쥔 후, 이불 위로 나와 있는 드미레아의 손에 조그마한 손을 얹자.
움찔, 하고 드미레아가 움직여서.
“드미레아?”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며 구슬을 떨어뜨릴 뻔했다가, 잠시 드미레아의 손을 놓고 구슬을 쥐어 옆의 협탁에 올렸다.
- 리리에?
구슬로 말을 전달하려고 했으나 이상하게 답이 없어서, 찻주전자에 따뜻한 물을 붓고 히나도 뒤를 돌아보았다. 세리에 또한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꾹 쥐고 드미레아를 살폈다.
다시 움찔, 하고 손이 움직였다.
꾹, 기도하는 것처럼 리리에가 양손으로 드미레아의 손을 꼭 쥐었다. 히나도 드미레아의 상태를 보러 다시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드미레아의 눈꺼풀이 떨렸다.
히나는 회복을 직감했다. 리리에가 내려놓은 구슬을 잡아, 리리에가 잡지 않은 쪽 손에 쥐어주었다.
- 소공작님, 들려요? 눈 뜨시지 말고, 들리면 고개 끄덕여 주세요. 들리세요?
조심조심, 잘 들리도록 느리게 말을 전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 드미레아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 구슬, 쥐고 있어요. 커튼 좀 치고 올게요.
“드미레아, 괜찮아?”
다시 끄덕,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히나가 급하게 창문 곁으로 다가가 커튼을 쳤다. 오랜만에 일어나는 드미레아가 눈이 상하지 않도록 방 안을 어둡게 바꿨다.
- 말, 하실 수 있겠어요? 이제 눈 떠도 돼요.
깜빡, 청회색 눈이 느리게 열렸다. 리리에도, 세리에도, 히나도. 드미레아의 회복을 반겼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지, 왜 이제야 일어났는지, 정말 괜찮은지. 두서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돌아왔습니다. 덕분입니다.”
홍차 향이 공간에 퍼졌다. 과하게 우려질 정도로, 시간이 지나면서 방 안에 향긋한 홍차 향이 가득했다. 가장 좋아하는 향을 맡으며, 드미레아는 현실로 돌아왔다.
자신이 선택한 유일한 현실이었다.
후기
여러분들이 이 글을 읽고 계시다는 건 제가 마감을 제대로 끝냈다는 뜻입니다.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에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 2차창작을 작성했습니다.
사실 본래 앤솔에도 후기를 넣을 수 있었는데요. 문제는… 제가 글을 쓰면서 폭주한 관계로(…)분량이 너무 많았습니다. 70페이지가 넘어가는 분량이었기 때문에 후기까지 넣기에는 양심이 찔리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웹발행을 하면서 후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해당 글의 스토리는 “이제는 더이상 미룰 수 없다. 진짜 마감을 치자.” 한 날 바로 구상을 한 내용인데요. 바로 왕사 동지인 익명의 토마토께 스토리가 괜찮을지 여쭤봤습니다. 그러자 토마토가 말했습니다. “님 이거 앤솔 수록으로 쓰기에는 너무 길어지지 않을까요?” 저는 그때 그 말을 들어야 했다고 아직도 후회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넉넉하게 만 오천자면 끝날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길어져도 2만자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정신차리고 보니 4.3만자가 나왔더군요. 정말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빠르게 떠올렸지만 수정 없이 그대로 작성을 시작했는데요. “타임리프”라는 주제를 어떻게 살려야 할지 고민하다가, ‘가장 타임리프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은 캐릭터’를 생각하면서 구상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드미레아의 회귀(짭)는 드미레아가 회귀한 세계 쪽을 선택하도록 여러 미끼를 흔드는데요. 사사로운 욕심(가장 어린 소드마스터(추정)이 될 수 있다)이나 주위 인물들의 행복, 특히나 소중한 오빠가 ‘기만당하지 않은 채’ 왕궁에서 생활할 수 있다는 등 회귀한 세계를 선택하도록 여러 회유를 시도합니다. 하지만 드미레아는 그런 식으로 본래의 ‘현실’을 외면하고 만든 거짓된 행복에 안주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다른 기만이 될 뿐이니까요.
다만 작중에서 비중있게 다뤄지기는 했지만 시점이 자세히 나온 적은 그리 많지 않은 만큼, 또한 주인공이 드미레아인 특성상 작중에서 자주 다뤄지지 않은 사람들이 주로 다뤄질 수밖에 없는 만큼 왕사를 여러번 다시 읽게 됐네요. 근데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최종적으로 나온 앤솔 책도 정말 예쁘게 나왔는데요. 참여자 공동구매로만 진행했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로 실물 책을 제작한 글이기 때문에 감회가 새롭기도 합니다. 특히 이전에 실물 책이 나왔던 건 역시 참여자 공동구매로 진행되는 앤솔이었는데, 그때 당시 제가 고등학생이었거든요. 지금 읽으려고 하니까 좀… 불태우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래도 읽을만 하다 싶은 제 글이 책으로 만들어진다는 부분에서 오는 묘한 감동이 있네요. 책 디자인도 너무 예쁘게 뽑혀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앤솔을 주최해주셔서 정말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앤솔에 참여해주신 다른 분들의 작품도 많이 기대가 됩니다. 책을 받고 본가에 내려와서 제대로 읽어보지는 못하고 파본 체크만 했는데, 자췻방으로 가면 열심히 읽어볼 생각입니다.
요즘 날씨가 참 오락가락한데요. 다들 따뜻하게 옷 입고 다니시고, 평안한 일상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결제박스 아래는 내용 관련 소소한 tmi와 글에 관련된 제 동인설정입니다. 사주시면 뭐 작품을 읽는데 더 도움이 되거나 하지는 않고(아마도)요. 그냥 제가 간식 사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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