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루/대협태웅] 이슈메이커

Newspaper 03. 센도 아키라와 루카와 카에데

[1보] 프로 농구선수 센도 아키라, 일반인 여성A씨와 불륜 의혹

 

 

처음 스캔들이 떴을 때는, 센도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 점잖은 축에 속하는 구단 동료들은 아예 그 뉴스를 없는 것 취급해주었고, 어리고 철없는 몇몇은 센도 대신 화를 내주었다. 신문팔이도 어지간해야지. 뭐 연예인이나 모델도 아니고, 일반인 유부녀라니 이건 진짜 고소감 아니예요?

연예인이나 모델이라고 괜찮은 것은 전혀 아니었지만, 일단 센도도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무슨 마음으로 해 주는 말인지는 알고 있었으니까.

고교 졸업 후 매스컴을 몇 번 탄 이후부터 지금까지, 센도를 거쳐간 소소한 스캔들은 많았다. 물론 타이밍을 잘 잡은 착시 사진으로 사기를 치는 것이 절반, 공적인 일로 마주했을 뿐인 사람과 곤혹스럽게 얽힌 것이 나머지 절반 정도로 어느 것이든 간에 센도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뿐이었다. 개중 몇 건인가는 아예 외모가 비슷한 타인이었던 적도 있었으니, 센도를 아는 사람들은 이번에도 으레 그런 일이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그 뉴스를 넘겼다.

노이즈 마케팅이라도 필요한 신인 아이돌이나 배우도 아니고, 하다못해 여대생이나 OL도 아닌 유부녀의 상대로 지목되었다는 이야기에서 은은하게 느껴지는 신문사의 악의를 잡아챈 사람도 있기는 했다. 혹시 법적 자문이 필요하다면 괜찮은 변호사를 소개시켜주겠다는 후지마의 연락에 감사를-그리고 정중한 사양을- 표하면서 센도는 쓰게 웃었다.

시즌도 이제 막바지라 며칠만 지나면 어느 쪽이건 실컷 우려먹을 기삿거리를 제공해줄 수 있을 텐데, 스포츠 뉴스보다는 가십장사에 더 특화된 신문사로서는 그때까지 참기 힘들었나보지. 지난 번 기자회견 이후로 미묘하게 날이 선 기자들의 태도변화를 피부로 감지하고 있었던 센도는 이번에도 무대응으로 대응하기로 결정했다. 먹이를 주지 않으면 자연히 사그라질 관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센도의 선택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다음날 아침, 사태는 심상치 않게 변했다.

“…어, 이거…. 진짜 센도씨 아니예요…?”

“야, 그걸 또 왜 들고 와서….”

안 좋은 의미로 익숙한 신문 이름을 알아본 팀원 하나가 굳이 그걸 구단 연습에 들고 온 후배에게 쓴소리를 하려고 다가가다가 입을 다물었다. 큼직하게 찍힌 파파라치 사진에는 모자이크도 되지 않은 센도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설마, 하는 얼굴을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제저녁 석간으로 예고를 때린 만큼, 제 1면은 아니었지만 컬러페이지 절반을 전부 차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적당히 포멀하지만 너무 딱딱하지는 않은, 친한 후배들이 사적인 자리에서 한 번 본 적 있는 깔끔한 정장차림의 센도가 묘령의 여성과 식사를 하는 사진이 가장 컸다. 장소는 도쿄의 모 유명 호텔 레스토랑. 명백하게 두 명을 위한 테이블 세팅과 두 개 뿐인 의자의 개수가 다른 일행은 존재하지 않는, 둘만의 만남인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게다가 사진은 한 장도 아니었다. 그보다 조금 더 작은 사진은 두 사람이 오모테산도의 명품 숍에 들어가는 뒷모습을 담고 있었다. 어깨에 팔을 감거나 손을 잡지는 않았지만 나란히 문에 들어서는 거리감은 확실히 친밀한 관계로밖에는 보이지 않은 모습이다. 숍의 직원은 인터뷰에 응하지 않은 모양이지만, 당시 가게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손님의 익명제보에 따르면 센도와 해당 여성은 함께 반지를 고르고 사이즈 조정과 각인을 요청했다고 한다. 게다가 센도는 그 자리에서 목걸이 하나를 동행한 여성에게 깜짝 선물까지 했다.

누군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악의적인 허위라고 하기에는 레스토랑에서 찍힌 여성의 목에는 없던 목걸이가 가게를 나오는 사진에는 분명히 보이고 있었다. 찬찬히 기사를 읽어보던 모두의 얼굴이 점점 심각해졌다.

이것이 아이돌이건, 모델이건, 여대생이건, OL이건, 아니면 어딘가 대기업 임원의 따님이건 간에 사실 구단의 동료들이 참견할 일은 아니었다. 스물아홉은 세간에서 말하는 결혼적령기를 약간 넘긴 나이였고 그 나이가 될 때 까지 센도는 수많은 스캔들의 먹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짜로 연애를 하는 모습을 구단 동료들에게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센도가 드디어 결혼 계획을 잡았다면 동료들은 오히려 축하의 말을 건넸을 것이다.

상대가 유부녀만 아니었다면.

“불, 불륜…, 인거죠?”

“…아니, 그냥 지인일 수도 있잖아?”

“호텔에서 식사하고 반지 맞추러 가는 사람이…?”

“…….”

무거운 침묵이 라커룸 안에 내려앉았다. 유부녀 아닐 수도 있지. 그냥 일반인이면 어쩔래? 마지막 희망처럼 누군가가 중얼거렸지만 힘이 없었다. 일반인임을 고려해서 얼굴에 꼼꼼하게 모자이크 처리가 된 문제의 A씨는, 신문사가 독자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센도보다 5세 연상의 유부녀로 자녀도 둘 있는 가정주부라는 말이 함께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저렇게까지 상세하게 나온다면 최소한 관계는 어쨌건 인적정보는 사실이라는 소리였다. 센도와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도 아니고 구단 업무로 엮일 일도 없는 가정주부. 정말 사적인 친분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입장의 사람이다.

“…분위기 왜 이래?”

그때 라커룸 문이 벌컥 열리면서 센도와 팀 코치가 함께 들어왔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신문을 중심으로 모여 있던 선수들이 화들짝 놀라면서 흩어졌다. 운 나쁘게 그 타이밍에 신문을 들고 있었다는 이유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방금 전 까지 태풍의 핵이던 자리에 남겨진 후배 한 명만 울상을 지었다. 아니, 주장. 그게 아니라요.

센도의 얼굴이 굳었다. 크게 펼쳐진 페이지의 사진을 알아본 것이다. 물론 구단의 동료들에게 화를 낼 일은 아니었다. 하,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면서 센도가 손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본인에게 도저히 상세한 사정을 캐물을 수가 없었던 동료들은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어설픈 위로를 건네다가 괜히 제 호기심을 주체 못하고 입방정을 떨 바에는 침묵하기를 택한 것이다.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훈련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구단주와 스폰서의 입장은 다르다. 오전 훈련이 어떻게든 진행되면서 분위기가 잡혀가는 중에 센도에게 다시 호출이 떨어졌다. 점심때 까지만이라도 좀 기다려 줄 것이지. 똑같은 생각을 했지만 팀 코치가 먼저 입 밖에 꺼냈다. 보통 때의 센도라면 기꺼이 브레이크 역을 맡아서 구단주에 대한 변명을 한 마디 쯤 해주었겠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게요.”

하…. 하면서 고개를 비스듬하게 들어서 엘리베이터 천장을 쳐다보는 센도의 얼굴을 코치가 흘끗 돌아보았다. 어차피 오늘 내일 동안은 센도에게 온 구단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을 테니 구단의 임원진에게 불려나가는 것을 숨길 수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점심 식사 시간에 슬그머니 빠져나오는 것이 모양새는 더 나았을 것이다. 이렇게 연습 중에 주장을 벼락호출 하는 것 보다는.

센도 개인의 체면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팀 분위기에 대한 문제였기 때문에 센도는 드물게 불쾌함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190cm가 훌쩍 넘은 남자가 뻣뻣하게 서서 열중쉬어를 한 채로 천장을 노려보고 있는 광경은 썩 친절하지 못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구단주 앞에서도 그럴 거냐?”

“사람 봐 가면서 이러길 바라세요?”

“…….”

죄송합니다, 하고 자세를 바로 하는 것과 여전히 저러고 있는 것 중에 어느 쪽이 기분이 더 나빴을 지를 마음 속 저울로 달아본 코치는 피식 웃으면서 센도를 용서했다. 팀의 기둥이니 캡틴이니 하지만 결국 스물아홉이면 아직 새파란 애송이이다. 저 정도 빈틈은 있어야 차라리 애교가 있다.

“봐 가면서 해. 이 위에는 네 편 많이 없다.”

일개 코치와는 다른 임원진의 지위에 굴복하라는 것이 아니라 나는 너랑 더 친하니까 네 투정도 받아주겠다는 태도로 판을 깔아주는 코치의 말에 센도의 어깨에서도 힘이 좀 빠졌다. 어느 정도는 진심인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구단운영을 해서 이윤을 만들어내야 하는 입장과 코트에서 직접 함께 뛴 사람들의 입장이 같을 수는 없다. 센도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번 시즌이 끝날 때 까지, 어쩌면 그 이후에도 센도는 몇몇 팀원들에게 여전히 캡틴일 수 있지만 구단주를 포함한 임원진에게는 센도는 그냥 재계약을 걷어찬 선수 한 명일뿐이다.

센도도 그 사실에 새삼스럽게 서운함을 느끼거나 사회의 쓴맛에 충격을 받은 나이는 아니었다. 다만 합리적으로 가자는 이야기지. 센도의 입장에서는 고작 두어 시간을 더 못 기다리고 훈련의 흐름을 중간에 끊어버리는 짓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다음 시즌에도 여기서 캡틴으로 계속 박혀 있을 거라고 해도 이렇게 불려나갔을까?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임원진에게도 일단 할 말은 있었다.

“…아. 스폰서요.”

일본의 프로농구 리그는 모기업이 뒷받침을 튼튼하게 해주던 실업팀과는 달리 팀 자체의 스폰서를 필요로 한다. 구단운영의 자율화에 도움이 되지만 동시에 족쇄가 되기도 하는 방식이었다. 기업은 광고효과를 노리고 구단에 투자한다. 그러니 구단으로서도 선수와 관련된 트러블이나 이슈에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번 것은 지난 번 같은 센도의 은퇴 뉴스와는 질이 다른 스캔들이었으니 당연히 구단을 후원하고 있는 기업에서도 대응을 촉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센도 개인이 계약한 광고도 구단의 매니지먼트를 받고 있었으니 그 연락도 이쪽으로 온 것 같았다. 청량하고 시원한 분위기의 푸른색이 트레이드마크인 이온음료 광고에 불륜남이 등장하는 것은 과연 기업 입장에서는 곤란할 것이다.

지금까지와 같은 적당한-센도 입장에서는 한 번도 적당한 적은 없었지만- 스캔들이었다면 사실무근으로 일축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센도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연애감정이 존재하는가는 차치하고 일단 사적인 만남을 가진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혼자. 결국 그게 문제였다.

사람들은 자극적인 이야기를 좋아한다. 점잖지 못한 화제에 불쾌한 듯이 인상을 찡그리는 사람들도, 이상하게도 평범하고 그럴듯한 이야기보다 비도덕적이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훨씬 더 쉽게 믿어버린다. 평소 센도의 이미지-잘생기고, 농구 잘 하고, 어딘가 헐렁하면서도 사생활이 재미없이 성실한-를 좋아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언제까지고 환상을 깨지 않고 완벽하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어딘가에서는 그것이 부정되는 것을 확인해야 안심을 한다. 어쩌면 기대가 너무 커서 돌아오는 부작용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믿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매스컴에서 꾸준하게 스캔들을 터트리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장사가 되니까. 사실이 아니면 말고, 얻어걸리면 좋은 것이다. 그런 중에 이번에는 소재도 자극적인데다 실제로 만남 자체는 오해가 아니기도 했다. 적극적으로 오해를 하고 물어뜯을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일부일 뿐인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늘 과대표 되어 어떤 흐름을 만들어버린다.

센도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사적인 사정을 하나하나 대중 앞에 까발리고 싶지도 않았지만, 대체 무슨 연유로 기혼여성과 그런 식사자리를 가졌는지를 센도가 해명한다고 한들 이미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불륜은 정말로 아니-.”

“조만간 이혼 할 테니까 사실상 미혼이나 다름없다, 이런 것도 곤란해.”

“그런 거 아닙니다.”

드물게 표정관리를 하지 못한 센도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스캔들을 부정하는 공식입장을 내는 것만으로 수습이 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했다. 애초에 식사자리를 가진지는 일주일도 훨씬 전이다. 그것을 이제 와서 터트렸다는 것은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시즌 결승전을 앞둔 바로 이 시기를.

기업과 미디어의 생리에는 센도보다도 훨씬 더 빠삭할 구단주의 얼굴이 같이 흐려졌다. 지난번에 이루어진 기자회견의 영향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었다. 여러 매체에서 앞다퉈서 은퇴설을 떠들어놓았는데, 센도는 그때 그들의 면전에 잽을 날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느 정도는 의도된 기사화일 것이고, 그렇다면 단순 해프닝으로 끝나버리지 않을 만큼의 뭔가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 상대와 정확하게 어떤 관계인지도 포함해서…,”

“개인이 너무 특정되기 때문에 곤란한데요.”

아마도 신문사에서도 확보한 정보일 것이나, 센도를 더 맛있게 도마 위에 올릴 수 있을 텐데도 굳이 떠들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이제 곧 일본을 떠날 농구선수야 상관없지만 아무래도 유명 법조회사의 변호사 가족을 상대로 모험을 하기는 쉽지 않다. 신문사의 그런 뉘앙스를 읽어냈으니 굳이 그쪽에서 긁어부스럼을 만들지 않을 거라는 계산을 포함해서.

센도 역시 이미 이런 기사가 나와 버린 것만으로도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라 그쪽에서 뭔가 대응 해주기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센도 입장에서는 이게 차라리 수습하기 쉽기도 했다. 그래도 사과 전화는 한 번 드리는 게 좋을까. 이런 일로 화를 낼 사람은 아니었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그럼 어쩌자는 거야.”

“뭐, 스캔들은 공식적으로 부정하고…. 이 이상 루머가 확산되면 강경 대응 하겠다 정도로 입장을 내면 어떨까요.”

“강경 대응을 뭐 어떻게 할 건데. 신문사 상대로 고소라도 해?”

구단 매니저와 홍보팀, 그 외 높으신 분들이 언성을 높이는 것을 할 걸음 떨어진 곳에서 보는 기분을 느끼면서 센도는 입을 다물었다. 고소는 해봤자 소용없을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거리를 재면서 약을 올리는 것은 그 쪽이 전문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소소한 스캔들에 쓸데없이 힘 빼지 않으려고 무대응으로 일관해왔던 터였다.

“-일단 리그 우승을 하고.”

“뭐?”

“언론에 노출되지 않도록 몸 사리겠습니다. 출국도…, 조용히 하고. 그럼 깔끔하겠죠.”

어차피 사람들의 관심에는 한계가 있다. 길어야 한두 달 속이 시끄러울 수는 있겠지만 오래 파 봤자 뭐가 나올 만한 스캔들은 아니었다. 타격감이 없으면 매스컴도 센도를 오래 괴롭히지는 않을 것이다. 센도는 그렇게 생각했다.

센도가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팀을 떠난다고는 해도 올드팬들의 충성도는 여전했다. 서운해하거나 걱정하거나. 다양한 반응이 있긴 했지만 응원하던 선수가 농구인생의 제2막을 여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지켜보는 이들도 있었다. 구단 입장에서도 써먹기 나름인 화제였기 때문에 가능하면 국내 리그를 우승으로 마무리하고 센도가 모두의 축하를 받으면서 당당하게 미국 진출을 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랬는데 이런 이슈의 한가운데에 떨어졌으니 저 계획은 이제 폐기되게 생겼다. 하지만 그걸로 조용히 수습이 된다면, 센도 아키라의 아쉬움으로 남을 수는 있겠지만 구단 입장에서는 출혈이 가장 적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우승을 목표로 하는 게 젊다고 해야 할지, 책임감이 크다고 해야 할지. 냉소적인 눈으로 자신을 훑어보는 시선들 한 가운데에서도 센도는 당당하게 서 있었다. 어차피 이런 순간에 움츠러들어봤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대응이 빠르기도 하지.

결승 시합. 센도가 자유투 준비를 하는 골대 바로 근처의 관중석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꺼내든 대형 현수막을 보고 센도는 씁쓸하게 웃었다. 기사가 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인쇄업체를 닦달했는지, 신문에 나왔던 스캔들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센도의 눈앞에서 펄럭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신문사에서는 차마 쓰지 못했을 워딩까지 덤이다.

[ 국민 불륜남]

 

센도가 자유투 기회를 얻을 타이밍까지 저걸 펼치지 않고 아껴뒀다고 생각하면 차라리 그 인내심에 감탄이 나온다. 이 순간에도 성능 좋은 카메라가 제 얼굴을 찍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센도는 그냥 곤란하다는 듯이 한 번 웃는 것으로 반응을 끝내기로 했다. 골이 들어가면 그것도 결백한 자의 배포로 포장 될 것이고, 실패하면 어차피 어떤 얼굴을 하건 비웃음거리다. 후, 하고 짧게 숨을 몰아쉰 센도가 공을 잡은 두 팔을 들어올렸다.

철썩, 하고 림도 스치지 않고 들어간 첫 골에 상대방 관중석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좋은 신호였다. 센도에게 기합으로 한 발 밀렸다는 이야기니까. 관객의 반응은 결국 작용과 반작용이라, 저쪽이 시끄러워지면 이쪽도 질세라 목소리를 높인다. 상대팀에 대한 분노와 대항심이 초반에 다소 어수선했던 관객석의 공기를 압도했다. 등 뒤에서 들리기 시작한 응원소리를 등에 업고, 센도가 두 번째 자유투를 던졌다.

성공.

시합의 흐름이 완전히 센도의 편으로 돌아섰다.

리그 결승인만큼 만만한 시합은 아니었지만, 분위기를 탄 덕분에 게임 운영이 더 매끄러워졌다. 게다가 원래가 센도는 트래시토크가 잘 통하지 않는 선수다. 초반에 한두 마디 도발을 하려고 하던 상대팀도 테크니컬 파울 이상의 수위가 아니라면 센도가 흔들릴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금방 그것을 그만두었다.

구단 은퇴시합이니만큼 배려를 해 준 것인지, 아니면 순수하게 감독이 판단하기에 가장 쓸만 한 카드여서인지는 몰라도 이 날 센도는 거의 풀코트를 뛰었다. 드라마틱한 버저비터는 아니었지만 경기기록지에 마지막 골은 센도의 이름이 기록되었다. 74 대 67. 준수한 마무리였다.

그러니까, 우승팀 캡틴 인터뷰만 무사히 지나갔다면 그렇게 되었을 거라는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오래 신세를 진 분이고, 그 가족과도 오래 인연을 맺어온 사이입니다. 불미스러운 루머로 한 가정의 행복을 망가뜨리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그럼, 센도 선수. 해당 의혹에 대해서는 완전히-”

“이와 관련한 사실무근의 소문들이 재생산 될 경우 법적으로도 강경대응하겠습니다.”

경기 관련 질문이 아닌 개인 스캔들을 들고 온 기자를 적당히 컷 시키는 것으로 수습하려고 했던 팀매니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애초에 조용히 넘어가자고 의견을 낸 것은 센도였으니,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예상했던 최악의 상황에 비하면 오히려 얌전하기까지 한 질문이었는데 센도가 이렇게 반응 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제 때 센도의 말을 막을 수가 없었다.

센도로서도 구단 관계자들에게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딱딱하게 대응해봤자 장작만 더 넣어 줄 뿐이라는 것을 센도 역시 모르지 않았다. 차라리 저 자신을 조롱하는 뉘앙스가 담겨있거나 떠 보는 질문이었다면 센도도 당초 계획대로 점잖게 무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해당 상대방도 사실은 농구 관계자라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라니. 질문의 형태였지만 사실상 협박이었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강경한 수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경기 승리 후 다소 부드러워져 있던 인터뷰장 분위기가 순식간에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예민하고 날이 서 있는 센도라는 보기 드문 현상을 눈앞에 둔 사람들이 기민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지금 찌르면 뭔가 나온다. 본능처럼 눈빛을 주고받은 후 누군가가 발언권을 얻지도 않고 소리 높여 질문했다.

“그럼 반지를 맞춘 건 뭡니까? 또 목걸이 선물은요?”

“경기 외의 질문은-”

“그런 사적인 일도 구구절절 다 해명해야 합니까?”

텅.

기어이 마이크를 집어던지다시피 놓아버린 센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빌어먹을. 광고 위약금이 어떻게 됐더라. 어차피 기한이 얼마 남지는 않았으니 상관없나. 싸늘하게 가라앉은 센도의 무표정을 향해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당혹스러운 듯 앞을 막아서는 구단 관계자들을 밀어내면서 센도는 인터뷰 장소를 떠났다.

당연히 와이드쇼는 난리가 났다.

“남편과도 친분이 있는데, 어느새 몰래 불륜?!”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문구와 함께 그 동안 센도가 여성팬들에게 싸인을 해주거나 미소를 보여주는 모습들이 방송에 등장했다. 지금까지 여자관계가 깨끗했던 것이 사실 숨겨놓은 상대 때문이었냐느니, 여성A씨의 자녀들이 사실은 센도의 아이인 것은 아니냐느니 하는 소문까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센도는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프로 선수는 경기가 끝난 다음에도 승부가 이어지곤 한다. 연장전이라고 생각하고 마지막 몇 분, 질문 두어 개만 침착하게 넘길 수 있었다면 일이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생에서 이 이상 최악은 없을 정도로 구단과 상대방에게 폐를 끼쳤다.

며칠 동안 면도도 하지 않아 까슬해진 얼굴로 센도는 침대에 처박혀서 들려오는 벨소리를 무시했다. 여덟 번 벨이 울린 다음에 자동응답기로 넘어갈 때 마다 들리는 것은 대체로 구단쪽의 연락이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센도가 곧바로 전화를 받지 않을 것을 이해하지만 최대한 빨리 연락을 달라는 내용을 거멓게 죽은 눈으로 들으면서 센도는 마른세수를 했다.

그 외에는 위로도 시기를 놓치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다정하고 다소 눈치가 없는 리그의 선후배들 연락이 몰려왔다. 자동응답기로 넘어갈 것을 대게 예상했는지 회신은 바라지 않는 내용이 대부분이라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센도를 오래 알아온 고교시절의 지인들은 오히려 이런 순간에는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센도 혼자 삭힐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센도가 가장 기다리면서도 가장 두려워하는 어떤 목소리 역시, 아직 들려오지 않았다.

 

 

 

막 프로 리그가 만들어지던 시기를 전후로 해서 센도는 늘 바빴다. 리그와 재단은 대중의 관심을 필요로 했고 미디어는 젊고 잘생긴 선수들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소비했다. 훈련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센도는 사람들이 저를 마음대로 즐길 수 있도록 내버려두었다. 홍보를 겸해 토크형 버라이어티에 나간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때의 메인은 센도가 아닌 미츠이였다. 중학 MVP의 화려한 전적과 더불어 고교 시절의 방황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학리그에 이어 프로로 데뷔 한 후에도 꾸준히 그를 응원하는 불꽃남자단과의 인연도 화제에 올랐다. 방송에 나와도 문제가 되지 않을 선에서 적당히 마사지 된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해도, 센도는 루카와의 고교시절에 경기 외에도 제법 기억할 만한 사건이 많았겠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조금 더 상세한 내막을 알게 된 것은 방송이 끝난 후 뒷풀이 자리에서였다. 방송 관계자들 없이 출연했던 선수들 몇 명만 모인 조용한 자리였다. 미츠이와 센도는 개인적인 접점은 달리 없었지만, 미츠이는 센도와 루카와의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래서 어지간히 막역한 사이가 아니면 나오지 않았을, 말하자면 ‘쇼호쿠 농구부 최후의 날’ 이야기를 센도 역시 들을 수 있었다.

그날 농구부가 아예 폐부 될 수도 있었는데, 사쿠라기의 친구 그룹과 예의 불꽃남자단이 뒤집어쓰고 대신 정학을 당하는 것으로 수습이 되었다는 것은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료난의 학풍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고등학교에서 폭력 사건 자체는 드문 일도 아니었다. 응원도 열심히 오더니, 사쿠라기가 인복이 있네. 그런 태평한 생각을 하면서 센도도 잔을 비웠다. 그런데 미츠이의 말이 이어졌다.

“루카와도 그때 머리가 찢어졌었잖아. 그 후로 걔가 경기 중에 머리 다칠 때 마다 3학년들이 걱정을 얼마나….”

“-네?”

“어…. 걔가 이야기 안했냐? 하긴 뭐, 그때는 둘이 잘 알던 사이가 아니었지…?”

순식간에 술이 다 깬 얼굴로 눈만 깜빡깜빡하는 센도의 얼굴을 알아차린 미츠이가 실수했다는 듯이 혀를 찼다. 자신의 과오를 밝히는 것은 부끄럽지 않았지만 괜히 루카와의 인간관계에 파란을 일으키는 것은 그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미묘하게 가라앉는 자리의 분위기를 알아차린 센도가 표정을 얼른 수습했다.

“다이나믹하네요, 쇼호쿠는.”

하긴 1학년, 그것도 인터하이 예선도 치르기 전의 일이었으니 그때 있었던 일을 센도에게 하나하나 들고 와서 이야기 하는 것도 루카와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때부터도 이미 루카와는 타도 센도 아키라에 불타고 있었지만, 어쨌건 둘은 연습 시합 한번 한 라이벌 사이였을 뿐이니까. 아예 루카와 본인 기억 속에는 남아있지도 않을 사건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래도 어쩐지 센도의 마음속에 가시처럼 그 일이 남았다. 지금껏 연애를 하는 중에도 사고 치기 직전에 몇 번이나 들었던가. 그놈의 ‘조용히 수습하면 돼.’ 라는 말을. 센도가 모르는 사이에 루카와가 그렇게 ‘조용히 수습한’ 일이 대체 몇 개나 있었을까. 남에게 약한 척 하지도 않고 우는 소리를 좀처럼 하지도 않는 루카와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의심이었다.

결국 먼저 초조해진 센도가 어련히 잘 할거라고 생각해서 묻어둔 것을 루카와에게 슬쩍 확인해본 것은 시즌이 끝난 후였다. 경기를 할 때 마다 꼬박꼬박 보내주는 출전시간이 적혀있는 엽서를 통해서 이미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기도 했다. 갈등을 먼저 일으키는 것에 능숙하지 않은 센도가 탐색하듯이 던진 말에 루카와는 어이없을 정도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마 그래서 센도에게 더 타격이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부상 사실을 왜 바로 이야기 안 했어?”

“굳이…?”

스포츠 업계에 종사하는 이상 크고 작은 부상의 위험은 늘 뒤따르고 있고, 양쪽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팀을 위해서 나서야 하는 상황이 있다는 것도, 고교시절, 아니 그 이전 중학 농구를 하던 때부터도 몇 번이나 겪어 왔다. 그러니까 루카와에게는 정말로 굳이 센도에게 말 할 것조차도 아닌 일이었을 것이다. 센도 역시 머리로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툭 튀어나오는 말 한 마디를 막을 수가 없었다.

“몸 좀 사려. 너 고등학교 때도 엄청 다치고 다녔잖아. …싸움도 하고.”

“아.”

싸움도, 라고 하는 말에 루카와의 눈빛이 변했다. 단순히 경기장 안에서 러프 플레이를 겪는 것만을 이야기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린 것이다. 세상 대부분의 일에 무던하고 둔한 주제에, 루카와는 가끔 이상한 부분에서 눈치가 비상했다. 쳇…, 하고 어깨를 으쓱하면서 루카와가 투덜거렸다.

“미츠이 선배랑 한 번 봤다더니. 그럼 농구나 하지 쓸데없는 이야기나 듣고 왔네.”

“…쓸데없는?”

하필이면 센도의 은퇴설이 다시 떠돌던 시기였다. 얼굴이 팔린 만큼 오가는 말이 많아졌다는 것을 센도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이게 스포츠 선수인지 연예인인지. 그래도 그런 빈정거림을 적당히 웃어넘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루카와의 입에서 나온 말이 이상하게 아팠다.

“너까지 어떻게 나한테 그렇게 말해.”

“어?”

루카와의 말뜻이 그런 의도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다. 센도 역시 평소에 타인의 말꼬리를 붙잡아서 시비를 거는 타입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센도 안에서 간신히 균형을 잡고 있던 무언가가 툭, 하고 무너지는 것 같았다.

너에 대한 이야기가 왜 쓸데없는 것인지. 농구 경기를 뛰는 것 외에 지금 센도가 하고 있는 일들을 루카와도 다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 센도라고 좋아서 미디어에 마음대로 저를 먹잇감으로 내주고 있는 게 아니라던가. 이제 사람들 만나는 것도 지긋지긋하다던가.

여과되지 않은 날것의 감정을 루카와에게 다 퍼부어버리기 직전에 겨우 센도는 스스로에게 제동을 걸 수 있었다. 어쨌든 센도 아키라는 먼저 갈등을 일으키는 것에 능숙한 남자는 아니었다.

센도의 삶에서 갈등이란, 대체로 심화되기 자연적으로 소강상태에 접어드는 무언가였다. 상대방이 먼저 숙이고 들어오는 것이 절반 정도, 센도 자신이 모든 기대치를 내려놓으면서 냉소하는 것이 절반 정도라고 하면 좋을까. 흘려보내서 무마될 수 있다면, 그쪽이 편하다. 마른세수를 한 번 하면서 센도는 루카와의 눈을 피했다.

“미안. 그런 이야기가 아닌 거 아는데…. 나 오늘은 그만 잘게.”

생각해보면 서로 뭐라고 할 처지도 아니었다. 센도 역시 루카와에게 많은 부분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루카와는 굳이 말 할 필요가 없는 부분을 금방 잊어버린다면, 자신은 일부러 감추는 것들이 있으니 질이 더 나쁠지도 몰랐다. 하지만 솔직한 거랑 바닥을 보이는 건 다르지 않나? 센도는 스스로를 그렇게 변명했다.

“아키라. 화났지.”

센도의 그런 성향을, 루카와 역시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구태여 센도의 껍질을 때려 부수고 바닥을 드러내보이게 만드는 짓을, 루카와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센도는 루카와가 자신을 꽤 오래 참아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야, 미안해. 너한테 화난 거 아니야. 내가…,”

“그게 아니라. 화나는 일 있었지.”

“…….”

“너야말로 그런 거 왜 나한테 말 안 해. 자꾸 혼자 참고 넘겨?”

틀린 말은 아니었다. 루카와는 묵묵하게 센도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망할 슈퍼루키는 공략 타이밍을 재고 있기도 했다. 센로가 한숨처럼 웃었다. 이 자식. 어쩐지 지금까지 순순히 넘어가준다 싶었다. 최대한 말을 고르면서, 센도가 손바닥 안에서 중얼거렸다.

“알잖아, 상대할 가치도 없는 일에 난 기운 빼기 싫어.”

“아니잖아, 그거.”

재차 추격해 오는 목소리에 센도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센도는 정말로, 자신의 바닥을 타인에게 보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루카와를 신뢰하고 또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오히려 그렇게 때문에 더더욱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들이 있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아키라.”

소파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센도 바로 앞으로 다가온 루카와가 바닥에 무릎을 붙였다. 농구선수의 큰 손이 센도의 손목을 붙잡고 조용히 떼어낸다.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기 때문에 건조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센도의 표정이 루카와의 눈앞에 드러났다. 푸른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같은 눈썹뼈를 만지작거리면서 루카와가 센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순간에, 자신이 루카와를 올려다보게 만들지 않는 점이 치사하다고 생각하면서 센도는 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좀 지쳤는데.”

“응.”

“너한테는 좀 멋있어 보이고 싶었나봐.”

“계속 멋있어, 넌.”

“오늘도 너한테 졌는데?”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잖아, 멍청아.”

이게 기회를 기다리다가 속공으로 들어온 사람이 할 말인가. 센도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루카와를 내려다보았다. 유치해지고 싶지 않은데, 루카와 카에데를 상대하는 순간순간마다 센도는 브레이크가 잘 듣지 않았다. 스무살이 훌쩍 넘을 때까지 부모님들에게도 어리광을 부린 일이 거의 없었던 센도 가의 외아들은 눈썹을 잔뜩 찡그리고 루카와 집안의 막내를 노려보았다.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이 자식아.

소리 내서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저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가 튀어나와 버렸다. 루카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피식 웃었다. 얼굴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센도의 목덜미로 슬슬 옮겨갔다.

“너 진짜 번거롭고 귀엽다.”

“…왜, 그럼 이제 귀여워 해 주려고?”

키가 180cm를 넘은 시점부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을 연하 애인의 입에서 들을 줄은 몰랐다. 센도는 입꼬리만 말아 올리면서 눈웃음을 지었다. 노골적으로 끈적해지는 분위기에 루카와가 입술을 한 번 삐죽거렸다.

하지만 연약한 부분을 내보이는 것에 면역이 없는 센도에게 이 이상은 정말로 한계였다. 센도는 필사적으로 스탑 사인을 들어올렸다. 그것을 받아주기로 했는지, 루카와는 그 이상 센도를 몰아붙이지는 않았다. 그럴까. 그대로 센도의 목을 붙잡고 입술을 가볍게 붙이면서 루카와가 소곤거렸다.

그 날은 그렇게 침대로 가서 끝인 줄 알았는데. 루카와의 ‘귀여워하기’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센도는 그 다음다음 날 알게 되었다. 세 달 전부터 미리 예약해놓은 휴가 계획을 모조리 엎어버린 루카와가 센도에게 단호하게 말했던 것이다.

“짐 싸.”

“…우리 예약은 내일부터….”

“거기 말고. 카나가와에 갈 거야.”

카나가와의 호텔을 예약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루카와의 본가에서 머물겠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었다. 센도가 영문도 모르고 끌려간 곳은 카이난대학 부속고교의 기숙사였다. 모교방문도 아니고 아무 연고도 없었음에도, 센도는 문제없이 방을 배정받을 수 있었다.

국민체육대회 카나가와 대표팀 합숙 훈련의 보조코치 자격으로.

“…엉?”

말하자면, 초호화 OB이다. NBA에 막 입성한 스타플레이어와 한창 유명한 프로농구선수의 방문에 들뜬 학생들에게 루카와가 싸인을 해 주기 시작했을 때 까지도, 센도는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올해도 각 학교에서 대표자를 뽑아 연합팀을 만들었는지 아예 본교 유니폼을 꺼내서 싸인을 받는 학생들도 있었다.

우리 데이트는? 리조트는?

차마 목소리로 내지 못하고 의문만 가득 담은 눈으로 루카와의 등을 노려보는 센도 뒤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센도. 세월이 조금 지났지만, 지나치게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센도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감독님.”

고교시절의 은사를 본 제 표정이 어땠는지 센도는 알지 못한다. 잔정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학생들에게 스킨십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저를 와락 끌어안는 타오카 감독의 손이 제 등을 펑펑 두드리고 있는 것만이 느껴졌다.

“잘 왔다.”

“…네.”

그 순간, 센도는 자신에게 필요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루카와 카에데는 치사했다, 진짜로. 센도는 루카와가 이렇게 계략가인 줄은 알지 못했다.

감동적인 재회 직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호랑이로 돌변한 타오카 감독과 원래 엄했던 타카토 감독에게 들들 볶이면서 센도는 고등학생 선수들과 함께 하루 종일 코트 위에서 굴려졌다. 두 감독은 기왕 굴러들어온 스타플레이어들을 최대한 쥐어짜서 탈탈 털어갈 속셈인 것 같았다. 딴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완전 녹초가 되어서 드러누운 기숙사 침대 위에서 센도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넌… 진짜 치사해.”

“그러냐.”

반대편 침대에 널부러진 루카와가 대답했다. 왜냐고는 묻지 않는 점까지 포함해서, 센도는 루카와를 한 대 치고 싶었다. 그리고 동시에 달려들어서 입맞춤을 퍼붓고 싶기도 했다.

센도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루카와의 존재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사랑과는 별개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센도는 자신의 문제들을 다 드러낼 수가 없었다. 센도는 루카와가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싫었다. 실망하거나, 화를 내거나, 어쩌면 상처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카와는 태연하게 그 사실을 받아 삼켰다. 저 자신이 해결책이 되어줄 수 없다고 해도 루카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센도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내서 아무렇지도 않게 센도의 품에 떠안긴 것이다. 그것도 이렇게 기습적으로.

센도는 루카와 카에데라는 국지적 태풍에 휩쓸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예상경로를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어서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 순간 태풍의 눈 안에 들어가 있는 자신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렇게 한 번 휩쓸리고 나면 센도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릴 것 만 같았다. 두껍게 쌓아올린, 센도를 보호하는 껍데기까지 모조리.

그리고 그동안 켜켜이 쌓여있던 묵은 우울감이나 감정의 찌꺼기들도 싹 걷히고, 카나가와의 맑은 하늘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센도는 루카와가 두렵고, 그렇기 때문에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의 소식도 미국에 비교적 빨리 알려진다. 게다가 루카와는 교민신문도 꾸준히 보고 있었다. 그러니 센도를 둘러싼 스캔들도 루카와의 귀에 분명히 들어갔을 텐데, 아직까지 루카와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하루하루 날짜가 지나갈수록 센도의 마음속에 초조함이 피어올랐다. 루카와가 이 일을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반응할지 센도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미국도 이제 시즌 막바지니까 결승까지의 경기에 집중하느라 국내 소식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을지도. 그렇게 다소 나이브한 가정도 해보았다. 한창 바쁜 시기에 통화 한 통 못하는 일도 둘 사이에는 드물지 않았다. 그래서 센도는 루카와에게 먼저 연락한다는 선택지를 고를 수도 없었다. 제 입으로 먼저 우는 소리를 늘어놓고 약점을 드러내는 것은 이제 무섭지 않다. 그렇지만 역시 중요한 시기에 공연히 루카와를 흔들어 놓기를 바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도 날짜는 계속 흘러갔다. 결승 인터뷰 이후로 일주일, 센도가 집 안에만 틀어박혀있던 기간이었다. 가능하면 출국일까지 영영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지만, 도저히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이것마저도 미루면 형태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게 영영 지는 느낌이 들어 센도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서늘해진 표정을 도저히 밝게 바꿀 수는 없었지만 면도도 하고 멀끔해진 모습으로 센도는 집을 나섰다. 주차장까지 이동하는데 당장에 따라붙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굳이 표정관리를 하거나 켕기는 것이 있는 양 몰래 움직이는 게 더 좋은 먹잇감이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센도 아키라 님. …네, 본인 확인하였습니다.”

파파라치들도 매장 안까지 따라 들어올 수는 없었기 때문에 조용한 매장 안에서 직원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농구선수의 큰 손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자그마한 쇼핑백을 받아든 센도가 힘없이 웃으면서 감사인사를 건넸다. 어차피 뭘 받으러 왔는지는 전국민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굳이 쇼핑백을 가리거나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센도는 터덜터덜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사진을 찍으려면 마음껏 찍으라지. 어차피 이제 일주일 후면 센도는 미국으로 간다. 그때까지만 적당히들 즐기세요. 여기저기서 숨길 생각도 없이 들리는 플래시 소리를 무시하면서 센도는 주차타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런 행복한 물건을 받아서 나오는데 분노가 우선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였다.

“…여어.”

등 뒤에서 착각할 리가 없는, 그렇지만 믿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센도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지금 돌아보면 절대로 얌전히 끝나지는 않는다. 센도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그런 예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돌아보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센도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센도가 입을 열기도 전에, 루카와가 손가락으로 센도가 들고 있는 쇼핑백을 가리켰다.

“반지.”

“…….”

“받으려고 왔어.”

당연한 것을 요구하는 듯한 태연한 목소리였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갑자기 짐 싸서 카나가와로 가자고 할 때도 저런 목소리였던 것 같다. 하…, 하고 어지럽다는 듯이 한숨을 쉬면서 센도의 손이 머리로 올라갔다. 간만에 공들여 세팅한 머리가 다 헝클어졌다.

이제 진짜 카메라가 찍건 말건, 와이드쇼에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나오건 말건 상관이 없었다. 야경이 멋진 레스토랑도, 자기 집도, 처음 계획했던 미국의 공항에서 재회하는 순간도 아니고, 그냥 오모테산도 가로수길의 보도블럭 위에서 센도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쇼핑백에서 방금 받아온 반지케이스를 열고, 센도가 루카와를 올려다보았다.

“너 진짜 너무한다.”

“그래서, 싫어졌어?”

“아니. …그래서 사랑해.”

루카와가 얌전히 왼손을 센도에게 내밀었다. 길쭉하고 마디가 도드라진 약지 손가락에, 센도가 고심해서 고른 반지가 끼워졌다. 결혼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보석으로 만들면 이렇게 될까 싶을 디자인이었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고전적이기까지 한 다이아반지가 방송을 타게 된다면, 또 며칠동안 놀림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센도는 이것 외의 다른 것을 생각 할 수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보석의 커팅도, 금속의 색깔도, 그리고 마디를 통과하는 링의 크기도 루카와의 손 모양과 피부 색깔에 너무할 정도로 꼭 맞았다.

잠깐 반지를 쳐다본 루카와가 센도의 손을 붙잡아 당겼다. 케이스 안에 얌전히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다른 한 쪽이 센도의 왼손 약지에 자리를 잡았다. 그대로 센도를 확 잡아당겨서 몸을 일으켜 세운 루카와가 두 손으로 센도의 머리를 엉망으로 헝클어트렸다. 카메라의 셔터음이 미친 듯이 울리는 한가운데서 센도가 루카와를 꽉 끌어안았다.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하….”

“나도 사랑해.”

“응.”

“…이제 뛰자.”

전력으로 달리는 농구선수 둘을 따라잡을 수 있는 기자는 많지 않았다. 루카와가 잡아끄는 대로 달린 센도는 그대로 루카와가 운전하는 차에 납치당하다시피 올라탔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뉴스 봤어.”

“봤구나.”

“그래서 누나한테 전화했더니, 반지 찾는 날을 알려 주길래.”

이자식…. 그건 반칙이지. 센도가 미간을 찡그린 채 웃었다. 루카와의 누나는 동생에게는 비밀로 하고 동생의 손에 꼭 맞는 반지 고르는 것을 도와주기로 했었다. 하지만 가족이라면 알아볼 수 밖에 없는 사진이 잡지에 실린 이상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자세한 정보가 풀리지는 않았다고 해도, 일반인 입장에서는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을테니 센도로서는 어떤 불평도 할 수 없었다. 폐를 끼친 정도가 목걸이 하나로는 도저히 상쇄되지 않을 지경이다. 결승경기가 끝나자마자 가장 빠른 비행기로 일본으로 돌아온 동생이 오모테산도까지 가는 길을 물어보는 꼴을 본 장본인은 박장대소하면서 넘어가 준 모양이었지만.

나 진짜 힘들었어, 카에데. 센도가 겨우 긴장이 풀려서 늘어놓는 우는 소리를 들어주면서 루카와가 묵묵히 차를 몰았다. 운전자는 초보를 겨우 벗어났지만 어찌어찌 고속도로를 잘 탄 자동차가 도쿄를 벗어나 카나가와로 향했다.

료난고교 근처의 적당한 곳에 차를 대고, 둘은 걸음을 옮겼다. 당연한 듯이 학교 앞 건널목을 지나서 바다가 보이는 야외 코트로 걸어가는 내내 둘 다 아무런 말이 없었다. 십 년이 훌쩍 넘게 지났는데도 약간만 낡았지 여전한 농구 골대를 석양이 주황색으로 물들였다. 센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원래는 미국 도착하자마자 청혼하려고 했는데.”

“나도 너 그럴 거 같기는 했는데.”

“응.”

“그때까지 못 참을 것 같아서 그냥 바로 왔어.”

오래 준비한 깜짝 청혼 계획도 불쾌한 루머와 함께 미디어를 타 버리고, 연인의 가족에게는 어이없는 스캔들이나 만들어버리고, 개인적으로도 일본에서의 활동에 아쉬운 마무리를 할 뻔 했던 그 모든 일들이, 센도는 그 순간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이런 태풍을 맞이할 것이라고, 또 마음 속 어딘가에서는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톡 도드라진 마디를 통과하느라 손가락 뿌리부근에서는 약간 여유가 생긴 반지를 만지작거리면서 루카와가 중얼거렸다.

“알아? NBA 우승 반지는 경기 종료하고 수령까지 2주 정도 걸려.”

“그래? 우리도 비슷해.”

“그래서 네가 끼워준 반지가 내 첫 반지야.”

그 이상 대화를 더 이어나갈 수는 없었다. 센도가 루카와의 입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키스를 했을 때 보다 약간 까슬해진 센도의 입술에 눈을 가늘게 한 루카와가 센도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겹쳐진 몸에서 심장 소리가 무섭게 쿵쿵거렸다.

 

 

* * *

 

 

트위터에서 푼 적 있는 썰인데, 청혼이라면 이것 말고는 없다고 생각해서 결국 이 이야기를 글로도 써보게 되었네요.

여러 가지로 힘들거나 괴로운 일이 생기더라도 센루 두 사람이 함께 방법을 찾으면서 앞으로 걸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족같아서 본문에는 쓰지 못했지만, 저 후로 다시 상쾌흥냐흥냐 여유로워진 캡틴 센도 아키라가 송별식도 잘 치르고 은퇴 인터뷰도 즐겁게 하지 않았을까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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