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루/대협태웅] 스크랩

Newspaper 02. 루카와 카에데가 사랑을 대하는 방식

루카와 카에데에게는 의외롭지만, 약간의 수집벽이 있었다.

“헤이, 루키. 어제 빌려 갔던 거 돌려줄게.”

반쯤 열려있던 문을 똑똑하고 두드린 남자가 루카와와 눈이 마주치자 방 안으로 들어왔다. 루키는 루카와의 별명이었다. 1학년도 거의 다 끝나가는데도 이렇게 불리는 이유는 이름 때문이다. 가족도 아닌 다른 사람에게 카에데라고 불리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루카와라는 패밀리네임만 던져주었더니 멋대로들 애칭을 만들어서 루카와를 부르는 이름들 중에 하나가 그것이었다. 나가레카와건 루키건 뭐라고 불리더라도 별로 기분 나쁘지는 않았으니까 딱히 상관은 없었다.

되돌려주는 손에 들려있는 것은 가위 하나와 엽서였다. 가위는 빌려준 것이었지만 엽서를 준 기억은 없었기 때문에 루카와가 묻는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건 보답, 하고 어깨를 으쓱이면서 상대가 덧붙였다.

“관광 엽서 수집한다면서? 이건 지난달에 산 거야. 뉴욕.”

그런 이유로 모으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볍게 인사를 하면서 루카와는 물건을 받았다. 당장은 필요가 없더라도 나중에 뉴욕에 있는 대학교로 원정 경기를 가게 된다면 이것도 쓸모가 있겠지. 잠깐 방문한 손님이 돌아간 뒤 하던 청소를 마무리 한 루카와는 기숙사의 방문을 닫았다.

오늘은 오후 훈련이 없어서 저녁시간이 여유로웠다. 내일 연습시합만 치르고 나면 2주 동안의 짧은 휴가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위를 돌려받은 김에 루카와가 진짜로 하는 수집활동을 할 짬이 생겼다. 책상에 앉아 지난 일주일 동안 모은 신문을 가볍게 훑어보면서 루카와는 스크랩 할 만한 기사가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루카와가 모아둔 것은 교민 신문이었다. 일본의 뉴스를 몇 개 그대로 가지고 와서 적당히 편집한 일간지로 분야도 정치, 연예, 스포츠가 다였다. 미국에서 생활하는 일본인들이 본국에 대한 향수를 달랠 수 있는 흥미본위의 신문이었지만 루카와에게도 딱 적당했다. 물론 얄팍한 내용들뿐이라서 어떨 때는 딱히 건질만한 게 하나도 안 나올 때도 있다. 그래도 이번 주는 수확이 하나 있었다.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가위가 얇은 종이를 반듯하게 잘랐다. 교민 신문은 전문 언론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 펼쳐도 A3 사이즈의 작은 크기에 종이 질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초반의 몇 번은 실수로 종이를 찢어먹은 적도 있었다. 그래도 이제는 꽤 익숙해져서 제법 그럴듯하게 기사를 오려낼 수 있었다.

그렇게 섬세하고 꼼꼼한 솜씨로 모으는 건 아니지만 그래서 오래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루카와 카에데의 ‘수집’은 진짜 수집가들이 보았다면 한숨을 내쉴 만큼 실전 위주였으니까. 잘라낸 신문기사를 공책에 붙이고 그날의 날짜를 적으면 스크랩은 그것으로 끝이다. 소학생의 방학 숙제 같은 솜씨지만 딱히 누군가에게 보일 생각은 없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음?”

풀이 마르는 동안 적당히 넘겼던 신문을 슬렁슬렁 보고 있던 루카와의 미간에 슬쩍 주름이 잡혔다. 스포츠란만 주로 봐서 신경을 안 쓰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연예란에 루카와의 눈길을 끄는 사진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가위를 든 루카와가 잠시 침묵했다.

 

 

 

딱히 강박증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루카와의 삶에서 루틴은 중요한 것이었다. 규칙적인 일상, 기초 체력 단련, 늘 똑같은 슛 연습. 누군가는 지겹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것에서 루카와는 안정감을 느낀다.

마음의 충동을 솔직하게 따랐을 때 삶은 가끔 놀라운 결과를 던져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무런 계획 없이, 운동복도 농구공조차도 갖고 있지 않은 채로 무작정 료난고교로 찾아가 센도와 함께 원온원을 했던 그런 날처럼. 루카와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사건들도 인생에는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동시에 루카와는 그런 우연이 다가온 순간 힘껏 뛰어오를 수 있도록 발밑을 단단히 받쳐주는 것도 루틴으로 견고하게 다져진 자신의 바탕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루카와의 삶은 늘 단순하고 명쾌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일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농구가 그렇고, 조던이, 나이키가 그렇고, 프린스와 MJ의 노래가 그랬다.

좋아하니까 모은다. 그렇게 루카와의 방에는 카세트테이프와 주간 바스켓볼, HOOP가 매주, 매 달마다 차곡차곡 쌓였다. 루카와의 시간은 온통 농구를 하거나 음악을 듣는 것으로 채워졌다. 에어조던을 신고, 나이키의 트레이닝복을 입고.

그래서 사고처럼 갑자기 일어난 어떤 사건이 루카와의 일상이 되고 루틴을 구성하는 한 축으로 바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농구공을 들고 무작정 찾아가는 타교의 후배를 마냥 받아준 센도에게도 책임이 절반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책상 위에 지금까지 모아놓은 테이프를 전부 꺼내놓은 고등학교 2학년의 루카와는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으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농구를 좋아하는 마음은 같았다. 함께 승부를 내는 시간도 즐거웠다. 그렇기 때문에 루카와는 가능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다른 것들도 센도가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센도가 평소에 어떤 노래를 듣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팝송을 별로 안 좋아하면 어떡하지? 테이프를 선물한다면 이 중에 뭘 주는 게 가장 좋을까. 농구 외의 일로 이렇게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기분은 처음이었다.

결국 루카와가 센도에게 선물할 테이프를 완성하는 것에는 한 달이 걸렸다. 갖고있는 모든 노래들 중에서 다시 제일 좋아하는 것들만 무작정 모아서 아예 믹스테이프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한 달 내내 고민한 것은 아니고, 며칠에 한두 곡씩 생각날 때마다 잠깐씩 녹음했다. 어쨌거나 시작한 날부터 완성된 날까지 30일 정도가 차이가 나니까 한 달 걸려서 만든 것이라고 말해도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자.”

그렇게 만든 믹스테이프를 받아 든 센도의 표정은 미묘했다. 문득, 루카와는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혹시 민폐라면 어떡하지. 억지로 다 들을 필요 없다고, 그냥 주는 거라고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잠깐의 침묵 후 열린 루카와의 입술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전국 대회는 내가 선배야.”

그대로 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꾹 다물린 입술을 바라보면서 센도가 눈을 몇 번이고 깜빡거렸다. 전해졌을까, 아니면 영문 모르겠다는 얼굴로 하하 웃으면서 곤란한 표정을 할까. 긴장으로 루카와는 눈도 깜빡거릴 수가 없었다. 루카와에게는 억겁 같았던 잠깐의 침묵 후, 센도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렇군. 잘 안내해줘.”

그 짧은 대답으로도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응, 이었는지 그래, 였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대답을 센도에게 돌려준 뒤 루카와는 도망치듯이 쇼호쿠의 일행들에게 돌아갔다. 먼저 달려나가는 자신의 등을 센도가 어떤 얼굴로 보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시선 때문에 등이 따끔따끔했다.

그 해 인터하이에서 쇼호쿠는 최종 우승, 료난은 4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루었다. 주장이었던 미야기에게는 애리조나의 대학교로 장학금을 지원받고 입학하게 될 기회가 주어졌다. 사쿠라기는 결선 내내 어떤 부상도 입지 않고 센터로서 든든하게 골 밑을 지켰다. 더 바랄 수 없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그리고 결승전이 끝난 뒤 첫 주말, 늘 만나던 야외 코트에서 센도를 마주친 루카와는 뜻밖의 말을 첫 마디로 들었다.

“덕분에 영어 공부 많이 했어.”

“왜?”

“노래 제목을 알고 싶었거든.”

근데 몇 개는 열심히 받아적었는데도 가사만으로는 못 찾겠더라. 이어진 말에 그제서야 루카와는 센도가 저에게서 받은 테이프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제목도, 가수 이름도 알려주지 않고 무작정 건네준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서 센도는 카나가와 시내의 레코드샵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고 했다. 비슷한 문장이 제목으로 보이면 샘플 음원을 들어보고 하나씩 확인한 모양이었다. 아차, 하는 얼굴로 루카와가 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미안. 제목도 알려줬어야 하는데.”

“아니야, 재미있었어. 내가 그러고 싶었고.”

농구공을 끌어안은 채로 벤치에 털썩 앉은 센도가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나란히 앉은 루카와는 센도를 흘끔 바라보았다. 제목 못 찾은 노래는 뭐야? 순서를 대충은 다 기억하고 있으니 센도가 몇 번째 노래인지 알려주면 제목을 알 것도 같았다. 그런데 센도는 그 노래가 몇 번째 것인지 말하는 대신 직접 불렀다. 가장 많이 반복되는 구절이 센도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I want to love you, pretty young thing.

You need some loving, tender love and care.

And I'll take you there….

 

익숙한 노래가 센도의 어설픈 발음으로 들리는데도 어쩐지 계속 듣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노래의 제목은 첫 소절에서 바로 나왔지만 루카와는 센도를 말리지 않고 센도가 노래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들었다. 기억을 떠올리려는 듯이 눈을 살짝 감고 노래를 부르던 센도가 시선을 느꼈는지 멈칫하고 눈을 떴다.

“…….”

시선이 마주친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가 움직였다. 긴장한 입술과 입술이 맞닿아서 가볍게 꾹 눌렸다. 그대로 몇 초, 정말로 닿았을 뿐인 어설픈 입맞춤이 끝나고 얼굴이 황급히 멀어졌다. 둘 다 입술이 너무 화끈거려서 불이라도 붙은 것 같았다. 늘 여유롭고 태연하던 센도의 목덜미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것을 알아차린 루카와의 귀도 화끈거렸다.

“제, 제목이, 그거야.”

“…응?”

“방금 부른 부분….”

노래들이 발매된 시기가 제각각이었기 때문에, 개중 오래된 것은 레코드샵에서 찾지 못한 것 같았다. 게다가 제목도 약자로 적혀 있으니까 바로 상상하기 어려웠을지도. 더듬더듬거리면서 제목을 읽어주는 루카와의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던 센도가 자신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아차리고 급히 시선을 돌렸다. 한동안 말을 잃은 채 둘 다 여름의 바람에 얼굴을 식혔다. 머리가 차가워지기는커녕 열이 더 오르는 것 같았다.

매미 소리를 들으면서 한 명은 농구공을 안은 채로, 다른 한 명은 매달릴 것도 없이 손만 꼼지락거리는 채로 한참을 앉아있었다. 결국 침묵을 견디지 못한 센도가 먼저 다시 입을 열었다.

“큼…, 한참 찾았는데, 쉬운 제목이었네.”

“…영어 잘하냐?”

“영어를 잘 못해도, 쉬운 제목 아닌가…?”

“…….”

이번에는 조금 성격이 다른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제서야 긴장이 풀린 센도가 와하하 웃으면서 루카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손끝이 여전히 살짝 떨리고 있다는 것을 들켰을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하는 모양이었다. 루카와는 한 번만 못 본 척 해주기로 했다. 그걸 지적했다가는 자신의 어깨도 바짝 긴장해있다는 사실을 들킬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센도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루카와에게 말했다.

“미국 갈 거라며. 영어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

“너는 안 가?”

“음….”

물어보는 루카와의 머리꼭대기 위에 제 머리를 툭 올려놓으면서 센도가 목 안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그 당시의 루카와에게는 농구를 계속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내에만 머무를 수는 없다는 것이 당연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센도도 농구를 계속 할 거라면 당연히 미국행을 고민해봤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센도는 곧바로 긍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답 대신 질문이 돌아왔다.

“루카와, 넌 앞으로 계속 농구를 하고 싶으니까 미국에 가고 싶은 거지?”

“당연하지.”

“평생 농구를 하며 살기 위해 필요한 게 뭐라고 생각해?”

“마음.”

하하, 웃으면서 센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센도의 뺨 아래에서 머리카락이 버석거리면서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가 헝클어지는 것은 뻔하게 알고 있는데도 센도를 떼어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예 센도의 어깨를 제 머리로 꾹 누르면서 루카와는 센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응, 그것도 좋네. 일단 센도가 긍정을 하자 루카와의 어깨가 으쓱했다. 뭘 당연한 말씀을. 그렇지만 바라던 답은 아니었는지, 센도가 다시 말꼬리를 조금 끌면서 재차 질문을 던졌다. 네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 말고. 바깥에 있는 것 중에서는 뭐가 필요할까.

“농…,”

“농구공 말고.”

“몰라.”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가로막혀버린 루카와가 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농구공이랑 하고자 하는 마음 말고는, 또 뭐가 필요하다는 거지. 농구 골대나 코트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할 말 있으면 뜸들이지 말고 빨리 하라는 루카와의 말 없는 독촉에 센도가 작게 웃었다.

“프로 리그야. 실업팀으로는 불안하지. 농구가 직업이 될 수 있어야 해.”

“…NBA처럼?”

“그래. …나도 농구 오래 하고 싶어, 루카와.”

거창한 꿈이었다. 물론 센도 혼자서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루카와는 비웃을 수가 없었다. 미국으로 가 NBA에서 프로로 데뷔하겠다는 꿈과 아직 리그가 없는 일본에서 프로로 데뷔하겠다는 꿈 중에 어느 쪽이 더 거창한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요 몇 년 간 경기력이 좋은 대학 리그와 몇몇 실력 있는 실업팀 덕분에 최근 인기가 높아졌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센도의 구상도 그렇게까지 먼 미래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센도는 도쿄의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 팀에서도 PG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 루카와는 미국으로 가서 우선은 디비젼 1부터 노려보기로 했다. 둘 다 일이 잘 된다면, 먼 미래에는 국내의 프로팀에서 함께 우승컵을 두고 겨루게 되거나 NBA에서 맞붙을 기회가 생길 것이다.

만약 잘 안 된다면, 그래도 손에 서로와 농구공은 남아있을 것이다. 루카와는 그렇게 생각했다.

루카와의 미국 기숙사 방에는 주간 바스켓볼과 일본 출판사의 HOOP 대신 영어로 된 본토의 HOOP가 차곡차곡 쌓였다. 신문 스크랩을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아직 야구만큼의 인기는 아니었지만 대학 농구팀의 소식도 간간히 신문 스포츠란에 모습을 보였다. 그 안에서 센도의 이름을 찾는 것이 즐거웠다.

처음 건네준 테이프를 만들었을 때 처럼, 루카와는 보통 한 달 걸려서 테이프 하나를 완성시켰다. 가끔은 지난 달에 들었던 노래가 중복되기도 하고, 어떨 때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허겁지겁 녹음하느라 방송용으로 편집되어 허리가 뚝 잘린 노래가 들어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센도는 그것을 즐겁게 들으면서 루카와는 잘 쓰지 못하는 긴 편지로 답장을 보내왔다. 또 가끔씩은 통화를 했다.

“참, 나 이번에 티비에 나와.”

“뭐?”

그래서 느닷없이 이상한 소식을 전화로 들을 때도 있었다. 태연하게 들려오는 센도의 목소리에 루카와는 어이가 없었다. 센도는 영문을 몰라하는 루카와에게 조곤조곤 설명했다. 촬영은 이틀 전에 했는데, 방송은 아마 보름 정도 후에 나올 것 같다고 했다. 프로그램 이름은 루카와에게도 익숙한 주말 아침의 토크쇼였다. 그렇지만 근본적인 의문이 남았다.

“티비쇼에 농구선수가 왜 나가?”

“요즘에 분위기가 좋거든. 대학팀들 인기도 많아졌고…. 나 말고도 몇 명 더 있어. 마키씨랑, 후지마씨랑, 그리고 너랑 같은 학년이었지? 쇼호쿠의 쿠와타 군.”

프로 리그가 만들어지려면 대중적인 관심도 필요하니까, 팀에서도 적극 환영해서 끌려나간 모양이었다. 센도가 말해주는 이름들이 지나치게 낯이 익었던 탓에 루카와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저게 무슨 기준이지. 같은 팀도 아닐텐데. 그렇지만 공통점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카나가와?”

“맞아. 카이난은 대대로 강세였고, 최근 몇 년 간 카나가와 소속 학교의 인터하이 성적도 화려했으니까.”

마키는 3년 연속 전국 진출에 3학년을 인터하이 준우승으로 마무리했다. 센도는 조금 늦었지만 3학년 때 전국 4강에 들었고 루카와의 동료였던 쿠와타 역시 우승컵을 거머쥐었던 2학년 인터하이에서 주전으로 참여했었다. 후지마도 1, 2학년 연속으로 전국 진출이 가능했고 무엇보다 감독직을 겸임한 고교생 캡틴이라는 것은 토크쇼에서 다룰 수 있는 화제거리가 많다는 이야기였다. 방송국 입장에서도 괜찮은 인선으로 보였다.

“메인 테마가 뭔지 알겠어?”

“카나가와의 가드들.”

루카와는 곧바로 즉답을 내놓았지만, 수화기 너머의 센도가 고개를 저었다. 약간 달라. 웃음을 참는 것 같기도 하고, 부끄러워하는 것도 같은 목소리였다.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은 센도가 조심스럽게 소곤거렸다.

“카나가와의 미남들.”

“하!”

“네가 있었다면 섭외 1순위였다고들 하던데. 아쉽네.”

코웃음을 치는 연인의 반응에 쑥쓰러운 듯이 웃으면서 센도가 말했다. 그래도 미남은 무슨 미남이냐는 말이 돌아오지는 않았으니까, 다행이었다. 루카와 역시 명확한 사실을 부정하면서 타박을 줄 생각은 없었다. 그보다 다른 것이 더 의문이기도 했다.

“농구선수가 농구만 잘하면 되지, 미남인 게 중요해?”

“나도 그렇게 생각해. 방송으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오래 붙잡아두려면 결국 농구로 이야기해야지.”

그래도 센도의 목소리가 밝은 것을 보니 영 나쁜 경험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일단 농구가 화제를 유발하는 것 자체는 루카와도 찬성이었다. 센도에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마 자신도 국내에 남아있었다면 섭외를 수락했을 것 같았다.

“방송 나오면 녹화해서 보내줄까?”

“…응.”

방송이 나올 때 까지 2주, 그리고 소포가 도착할 때 까지 다시 2주를 기다려서 한 달 만에 받은 비디오테이프에 담긴 센도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얄미울 정도로 잘생겨서 루카와는 어이가 없어졌다. 그 후로 루카와는 신문에서 스포츠 뿐만 아니라 연예란도 괜히 뒤적거리게 되었다. 혹시라도 센도의 이름이 나올까봐.

 

 

 

연습 경기는 루카와네 팀의 승리로 끝났다. 루카와의 출전 시간은 전반 8분, 후반 11분. 급하게 잡힌 시합이라 이미 휴가를 떠난 동료들도 있었던 덕분에 오히려 루카와에게는 출전 기회가 늘어났다. 어시스트와 득점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감독도 눈여겨 본 듯 시합을 마친 뒤 루카와를 한 번 더 격려하면서 어깨를 두드렸다.

루카와도 사실은 오늘부터 손님을 맞아 휴가를 함께 보낼 계획이었다. 하지만 연습시합 이야기를 들은 상대는 당연한 듯이 출전 응원부터 해왔다. 그럼 공항에 데리러 갈 수가 없는데. 미안한 듯이 말하는 루카와에게 상대가 다정하게 대답했다. 나 어린애 아니야, 카에데. 영어도 잘하고.

결국 루카와가 한창 시합을 치르고 있을 동안 밤샘 비행기로 미국에 도착한 센도는 루카와가 데리러 오기도 전에 루카와의 학교에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가능하면 경기도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센도가 체육관을 찾아갔을 때는 이미 시합이 끝나서 선수들이 바깥으로 나오고 있었다.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루카와를 발견한 센도가 크게 손을 흔들었다. 센도를 발견한 루카와가 마주 손을 들어올렸다. 루카와의 팀동료가 센도를 가리키면서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영어 많이 늘었네…?”

센도가 작게 웃으면서 그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을 때였다. 루카와가 뭐라고 말했는지, 깜짝 놀란 듯이 센도를 한 번 쳐다본 팀원이 웃으면서 센도에게 엄지를 들어보였다. 문화권마다 다르겠지만, 최소한 지금 분위기가 인종차별적인 욕설을 날리는 것은 아닌 듯 해 보여서 센도도 마주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루카와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인사를 나눈 사람들이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뚝 떨어져 나온 루카와만 센도 쪽으로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두 팔을 벌린 센도의 품 안으로 자석이 이끌려오듯이 루카와가 안겨들었다. 짧은 포옹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벌써 충실해지는 기분에 두 사람 모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무슨 이야기 했어?”

“너 누구냐고 묻길래.”

“…뭐라고 대답했는데?”

루카와의 기숙사를 향해 걸어가면서 센도가 물어본 질문에 루카와가 대답했다. 센도의 얼굴에 미묘한 긴장감이 피어올랐다. 루카와가 고등학교 2학년일 때부터 사귀어왔으니까 벌써 3년째이긴 했다. 그렇지만 미국의 동료들에게 일본에 있는 연인에 대해서 어느 정도로 이야기를 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새삼스럽게 단어로 정의되어 루카와의 입에서 나올 말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센도의 그런 긴장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루카와가 당연한 듯이 대답했다.

“□□대학교의 센도 아키라 선수라고 했는데.”

우뚝 멈춰 선 센도의 기척을 알아차린 루카와도 함께 걸음을 멈추었다. 이상한 얼굴을 한 센도가 루카와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눈으로 질문을 던지자 그제서야 하하…하고 웃음을 터트린 센도가 마른 세수를 했다. 어쩐지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너는 정말… 너구나, 카에데.”

“무슨 의미야.”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루카와가 툴툴거리기도 전에, 센도가 조금 더 빨리 움직였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던 손이 주저 없이 뻗어 나와서 루카와의 손을 잡았다. 아니야, 빨리 가자. 긴장으로 손끝이 약간 차가워진 센도의 손끝이 약간 떨리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루카와는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꾸우욱, 아플 정도로 손이 붙잡히는 것을 알아차린 센도가 눈을 접으면서 웃었다. 그 얼굴을 계속 보고 있다가는 당장 달려들어서 키스를 퍼붓고 싶어질 것 같아서 고개를 휙 돌려버린 루카와가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센도가 소리 내어 웃으면서 루카와의 뒤를 따라왔다.

“여기가 내 방.”

“깔끔하네. 정리 고생했겠다.”

아니나 다를까 자취를 오래 한 센도의 눈에는 이게 평소부터 짐이 별로 없는 방인지, 아니면 손님이 오기 전에 서둘러 치운 방인지 금방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미국 대학교의 기숙사는 센도에게도 처음이었다. 신기하다는 듯이 일본과는 구조부터가 조금 다른 방 안을 구경하던 센도의 시선이 루카와의 책상에 닿았다.

“이건 뭐야? 일기장?”

“아….”

손길이 많이 간 공책을 발견한 센도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허락을 받기 전에는 펼치지 않고 루카와에게 묻는 시선을 던졌다. 차라리 곧장 펼쳐보았다면 덤벼들어 빼앗아버렸을 것 같은데, 오히려 고분고분하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루카와의 마음이 약해졌다.

대답이 궁해져서 말은 입 안에서 우물거리던 루카와가 침대에 턱 걸터앉았다. 그냥 봐. 까딱하고 턱만 움직여서 고갯짓을 하자 센도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루카와의 공책 표지를 열어보았다.

“어…, 신문 기사…?”

“…네 농구 소식.”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센도가 알아차리기 전에 루카와는 그냥 자기 입으로 스스로 고해바쳤다. 아니나 다를까, 말하기 전에 알아차렸다면 자기를 놀려먹었을지도 모르는 센도의 얼굴이 한 방 먹은 표정으로 서서히 붉어졌다. 자기 귀도 따끈따끈하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면서 루카와가 말했다.

“교민 신문에 실린 것들 뿐이니까, 양이 많지는 않은데.”

일본 대학리그의 소식이 실리면 얼마나 실리겠는가. 양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도 제일 앞의 것부터 차례차례 넘겨보는 센도의 표정이 진지했다. 거의 대부분은 학교 이름과 함께 MVP나 최다득점자로 센도의 이름이 언급된 것들이고 가끔은 이름도 없이 경기 편성표만 덜렁 실려있는 페이지도 있었다. 그런데도 센도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신중하게 읽었다.

가끔 나오는 사진은 화질이 그리 좋지 않은 흑백 단체샷 뿐이었지만 그것도 재미있다는 듯이 들여다본다. 자신이 나온 기사의 스크랩을 구경하는 센도의 얼굴을 구경하면서, 루카와의 표정도 슬쩍 풀렸다. 그래도 어젯밤에는 컬러로 된 사진을 하나 건질 수 있었다. 스포츠란 기사와 달리 사진 크기도 꽤 크고 얼굴이 잘 나온 것이었다.

“아…!”

어젯밤에 결국 스크랩해둔 기사 사진이 무엇이었는지 뒤늦게 생각난 루카와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서둘러 센도의 손에서 공책을 빼앗기 전에, 이미 마지막 페이지가 펼쳐진 후였다.

 

아이돌 A양, 미남 농구 선수와 사업가 사이의 핑크빛 기류…. 삼각관계의 진상은?

 

센도의 스캔들 기사였다. 경기 중인지 유니폼 상의를 입고 있는 상반신이 꽤 큼직한 크기로 찍혀 있었다. 아마 그 옆으로 나란히 아이돌 A양과 수수께끼의 사업가의 사진도 들어가 있었을 테지만, 루카와가 그것은 잘라버린 상태였다.

일반인인데도 티비에 몇 번 나왔다고 이미 공인 취급인건지, 센도의 얼굴에는 모자이크 처리도 되어있지 않았다. 당황한 얼굴로 자신의 스캔들 기사와 루카와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센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카에데…. 혹시, 이거… 신경 쓰였어? 너무 헛소문이라서 따로 말을 안했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그,”

딱히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루카와도 그만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이 되었다. 당연히 센도를 의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기사를 일부러 스크랩 해뒀다가 미국까지 자기를 찾으러 온 애인에게 보이면서 은근하게 빈정거리는 짓을 하는 것도 루카와가 선택할 방식이 아니었다. 다만, 루카와는,

“사진이…, …잘생겨서. 보관하고 싶었어.”

툭, 하고 센도의 손에서 공책이 떨어졌다.

“아 세상에, 카에데….”

195cm의 남자가 그대로 바닥에 쭈그리고 앉으면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드러난 목덜미와 귀까지 새빨개진 센도가 목 안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농구 선수가 얼굴 잘생겨서 어디 쓰냐더니.”

“…네 얼굴 좋아하면 안 돼?”

“아니… 되지…. 너무 좋지, 나는….”

바보 같은 목소리로 센도가 중얼거렸다. 다음번부터는 편지 쓸 때 사진도 몇 장 같이 보낼까? 말하는 목소리가, 필요 없다고 해도 억지로 쥐여줄 것만 같았다. 물론 당연히 필요했기 때문에 루카와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후 센도가 보내오는 편지에는 사진이 항상 동봉되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필름 한 통을 자기 사진으로 채울 수는 없었는지, 이런저런 일상을 찍은 사진도 함께 섞여 있었다. 낚시터에서 만난 고양이, 화단에 핀 예쁜 꽃, 어느 날은 경기의 스코어판…. 싸구려 종이에 인쇄된 사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센도의 총천연색 일상을 루카와는 만족스럽게 보관했다.

그래도 스크랩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연예란에 가끔 올라오는 바보 같은 소식도 루카와의 공책에 빠짐없이 스크랩되었다. 어떤 소식이라도 사랑스러웠다. 공책에 이 기사까지 모여있는 걸 보면 센도는 또 곤혹스럽다는 듯이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웃을까. 센도의 얼굴을 생각하면서 루카와는 부지런히 가위를 움직였다.

*  *  *

뉴스페이퍼 연작 루카와 편입니다.

시기상으로는 1편보다 이쪽이 더 앞이네요.

하나에 꽂히면 거기에 전력을 다 하는 루카와의 연애 스타일은 어떨까 상상하면서 즐거웠습니다.

알콩달콩 귀엽게 롱디 해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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