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도

桜雨

벚꽃비가 내리려면 벚꽃이 져야 하는 법이다.

론도 by 시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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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기랑 미나미가 나오는 글입니다. CP적 무언가가 잇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제목에서 보면 알다싶히 사쿠라 하루키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4부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4부 이후, 그러니 사쿠라 하루키가 죽고 난 후 온 첫 봄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것 같습니다.

-사실 저도 이게 뭔지 모르겠습니다.

-추천곡은 역시 사쿠라메시지 드리겠습니다.


올해의 벚꽃은 여느 해보다 조금 이르게 폈다. 조금만 더 늦게 폈다면 좋았을 텐데. 우츠기씨에게 무리해서라도 모레의 일정을 빼달라고 한 것이 무색해질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속에서도 비는 추적추적 쏟아졌다. 어젯밤 벚꽃이 만개 함과 동시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으니 아마 지금쯤이면 전부 떨어졌을 것이 분명했다. 봄비치고는 긴 폭우였다. 나무에서 피는 꽃 주제에 요절이라니 그런 것까지 닮을 필요는 없었을 텐데. 분명 작별 인사는 잘하고 돌아왔음에도 그의 이름과 같은 꽃이, 그처럼 지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 한구석이 서글펐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우산을 들고 지내고 있는 자취방 밖으로 나간 것은 오늘 밤이 올해 벚꽃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보게 될 풍경이 연분홍 벚꽃과 대비될 맑고 푸른 하늘 대신 어두워 잘 보이지도 않을 흐린 밤하늘뿐일지라도 보는 편이 모레 보게 될 한낮의 짓밟힌 벚꽃잎을 보는 것보다는 상쾌할 것 같았다.

유명하다는 벚꽃길로는 갈 수 없었다. 시간도 늦었을 뿐더러 팬들이나 사람들에게 들켜 다른 멤버들이나 우츠기씨가 알게 된다면 걱정할 것이었고 멤버들은 보기보다 여린 이들이니 계속 마음에 두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 이 시간 이 몸으로 갈 수 있는 곳은 걸어서 몇분이면 갈만한 가까운 곳으로 제한 되었다. 다행이라면 멀지 않은 공원에 큰 벚나무가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꽤 유명한 나무지만 이런 날씨에 공원에서 밤 벚꽃을 보려는 이는 많지 않을 테니 누군갈 마주칠 걱정은 덜어도 될 것이었다. 공원을 향해 걷는 우산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며 둔탁한 톡톡 소릴 낸다. 겨울이 끝났음을 알리는 봄비가 이리 불만스럽게 들렸던 적이 있었던가. 벚꽃만 아니었다면 별생각 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벚꽃만 아니었다면.

쓸데없는 상념 따윈 머리 한구석으로 치우고 공원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치안 정책의 일환이었는지 공원의 가로등은 생각했던 것보다 밝았다. 아, 이 정도면 벚꽃도 능히 보일 것이었다. 다행이다. 조금씩 빨라지는 발걸음에 달리듯 벚나무 아래로 걸어갔다.

공원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거대한 벚나무는 기대했던 것보다는 희었다. 비에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벚꽃은 끈질기게 나무에 붙어있었다. 역시 오지 않았다면 분명 후회했을 것이다. 벚나무 아래 선 순간 비와 함께 꽃잎이 떨어져 쓰고 있던 투명한 우산에 붙었다. 아, 벚꽃 비였다. 무의식적으로 우산 밖으로 손을 뻗었다. 아직은 차가움을 간직한 빗물이 손에 고여 손 틈 사이로 흘러내렸다. 이런 식으로 벚꽃잎을 잡는 건 역시 무리인가 싶어 손을 기울여 고인 빗물을 바닥에 흘려보냈다. 애초에 벚꽃이 원하는 대로 잡혀준 적이 있었던가. 아직도 기대하고 있는 자신이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

그 순간 손 위에 누군가가 떨어뜨린 벚꽃잎이 내려앉았다. 손 위를 떠나지 않은 낯익은 길고 고운 손가락을 따라 시선이 올라갔다. 짧은 금발 머리 푸른 벽안. 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을 굳이 꼽는다면 한 손에 간신히 들어갈, 그럼에도 이 나무 아래까지 걸어오면서 필연적으로 한 번 정도는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로쿠야씨였다.

“나츠메상 이루고 싶은 Wish는 생각해 뒀나요?”

떨어지는 벚꽃잎을 잡으면 원하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손 위에 올려진 벚꽃잎을 한참 멍하니 보다가 쥐었다. 내가 손을 뻗어봐도 잡히지 않던 벚꽃잎이 당신에게는 쉬이 잡히는구나. 당신이 잡은 벚꽃에 빌고 싶은 소원 따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것을 쥐어버리고 마는 것은 ‘벚꽃잎이지 않은가'로 합리화한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이 얻은 기회일지라도 빼앗고 싶은, 본디 나는 이런 사람이지 않았는가.

“당장은 생각나지 않네요”

“Oh, 그런가요.”

내 대답에도 그는 퍽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내 소원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내게는 퍽 값비싸게 느껴지는 벚꽃잎이 그에게는 과하게 주어진 것을 헐값으로 넘기는 것에 불과했을 테니.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깨를 으쓱인 그가 쥐고 있던 중지, 약지, 소지를 제 이마께에 대곤 잠시 눈을 감았다. 소원을 빌기라도 하는 것일까? 생각하며 가만히 바라 보고 있으니 오래지 않아 눈을 뜬 당신이 쥐고 있던 손을 펴고는 손안에 갇혀있던 벚꽃잎을 불어 날렸다.

“소원이라도 비셨나요?”

“Yes, 하지만 Wish는 말해줄 수 없어요. 매지컬 코코나짱에 의한다면…”

“소원을 발설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던가요?”

“나츠메상 Smart 하군요.”

그의 입김에 날려간 벚꽃잎이 바닥으로 추락하고 다른 벚꽃잎들 사이에 섞인다. 더는 구분할 수 없게 돼버린다. 다시는 찾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아마 내일이면 다른 벚꽃잎들처럼 짓밟히고 머지않아 썩어버릴 것이다. 그에게는 저 벚꽃잎이 소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간직할 정도의 가치도 없는 것인가. 아니면 벚꽃잎을 계속 간직할 만큼 간절하지 못한 것일까? 어쩌면 둘 모두일지도 몰랐다. 하기야 귀하고 사랑받는 왕자님이시니 당연한 일인가. 벚꽃잎을 한 번에 두 개씩이나 잡을 수 있는 이는 역시 다른 것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뻗치자 절로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 WISH는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부디 나츠메상도 WISH가 생기길 바랍니다.”

“이루어졌다” 빈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루어진 건지. 역시 빈 소원은 간절하지 않은 것이었나 보다. 애초에 벚꽃 따위가 소원을 이루어줄 리가 없지 않은가. 우리는 환상을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지, 환상 속에 살고 있지는 않았고. 세상에는 소원을 이루어지는 마법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원한다면 늘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었다. 이곳에서 뭘 기대하면서 진심을 알아차리기도 쉽지 않은 사람과 이야길 나누고 있는 걸까.

“밤 비에 감기라도 들까 염려되네요. 먼저 들어갈게요.”

벚꽃을 등지고 공원의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무례한 짓이었지만 거기까지 배려하기엔 피곤했다. 애초에 하루 내 꽉 차 있던 일정을 전부 소화하고 무리해서 나온 길이었다. 절반 정도는 핑계에 불과할지라도 남은 절반은 진심이었다. 나는 잡을 수 없었던 벚꽃잎이 당신의 손에는 두 개나 잡혀 당신이 선심 쓰듯 내게 쥐여준 것도. 그걸 통해 내가 아직도 당신을 질투하고 있단 사실도.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츠메상. 언젠가 당신이 벚꽃잎에 빈 WISH가 이루어 진 날이 온다면 빌었던 소원을 내게 말해주세요. 궁금합니다.”

아아, 영원히 답해줄 리 없는 물음이었다. 그 순간 속으로 헛웃음이 터졌다. 역시 당신이 내 비루한 속마음과 진심을 영원토록 몰랐으면 좋겠다. 당신이 준 벚꽃잎에 당신은 몰랐으면 한다는 소원을 빌어본다. 당장 생각나는 소원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더한 소원을 빌 생각도 없었다. 세상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 않은가. 내가 이 소원과 당신을 위해 지불할 수 있는 최대의 대가를 저 소원을 위한 것 정도였다. 이러나저러나 소원은 영원히 이루어져야 했다. 애초에 내 입 밖으로 꺼낼 리 없는 소원이니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다. 나만 입을 다문다는 대가를 치른다면 소원은 영원한 비밀이 될 것이다. 비록 한 번도 벚꽃이 내 편이었던 적은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내 편을 들어주었으면. 빠른 걸음으로 공원을 나가며 속으로 못 내 빌었다. 그렇기에 손에 쥔 벚꽃은 아마 영원히 버리지 못할 것이었다. 내 소원은 벚꽃비 마냥 한번 화려하게 내리면 될 당신의 소원과는 달리 소원은 영원히 이루어져야 하니. 나의 짐을 함께 짊어질 것이 하나 정도는 있어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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