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ember
아이돌리쉬 세븐 유키 드림
오늘은 일주일의 시작, 월요일이다. 일본의 톱 아이돌 Re:vale, 그중에서도 모모의 현장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타나모리 치히로에게는 『NEXT Re:vale』의 방송일로 더욱 익숙했다. 연예계에 종사하다 보면 주말 구분 없이 일하기에 고정 방송이 시간 흐름의 기준이 되어주었다. 학생이나 직장인들에게는 달콤한 휴식을 앗아가는 월요일이 고역이겠으나 Re:vale의 팬들은 이날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힘겹게 시작하는 일주일에 활기를 불어넣어주는것도 Re:vale다워 치히로는 『NEXT Re:vale』 촬영을 특히나 좋아했다.
TV 방송국의 스튜디오에는 벌써 익숙한 세트장이 세워지고 있었다. 시청자들이 안방에서 TV 앞에 앉아있는 시간은 고작 한 시간에서 두 시간 남짓. 그러나 짧다면 짧은 그 시간을 즐겁게 만들기 위해 방송에 관련된 사람들은 몇 시간도 전부터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좌우로 허리를 숙여 인사한 치히로는 미리 적어온 리스트를 체크하며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방송을 시작하고 3년차에 접어든 만큼 스태프들도 숙달되어 있었지만 치히로는 직접 살펴보는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뒤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무슨 일이신가요.」
무언가 변경 사항이라도 있나 싶어 치히로는 영업용 웃음을 입에 건 채 돌아섰다. 하지만 던져진 화제는 예상과는 한참 빗나가 있어 금세 평소의 멍한 표정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저기… 가수 센 씨 맞으시죠?」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사고가 멈췄다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옛 지인들, 특히 연인에게는 여전히 센(セン)이라고 불리고 있으니 오랜만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지만 적어도 앞에 붙는 수식어는 그랬다. 동시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터져나와 사고가 쳇바퀴처럼 헛도는 탓에 치히로는 호흡을 가다듬고 앞에 선 남자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얼마 전에 들어온 신입이다. 나이는 이십 대 초반… 스물셋 정도일까. 가수로 활동했던 것도 벌써 4년 전으로 알아보는 사람들과는 진작에 얘기를 나눴기에 이제와서 물어보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아마 들어온지 얼마 안 되어서 이제야 치히로를 보고 망설이다 물어본 것이리라. 굳이 숨길 생각은 없었기에 치히로는 순순히 답했다.
「네. 지금은 보시다시피 모모 군의 매니저로 일하고 있지만요.」
손에 든 수첩을 슬쩍 흔들어 보이자 남자는 감격과 약간의 아쉬움을 담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 팬이었어요. 센 씨의… 센 씨의 노래를 정말 좋아했어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치히로는 자신이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꼈다. 손에 쥔 수첩이 마이크가 되고 지금 이 공간이 자신의 세트장이 된 것만 같았다. 여전히 가수로 활동했던 기억을 잊지 못했구나. 어쩐지 자조 섞인 웃음이 터져나올 것 같아 치히로는 살짝 입술을 짓이겼다. 그동안에도 남자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앨범도 전부 갖고 있어요. 데뷔곡부터 특장판까지요. 사인회도 갔었는데 딱 두 번뿐이라 기억 못 하시겠죠…」
남자가 얘기한 그대로다. 팬들에게 애정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사람 얼굴을 외우는 건 특기가 아니었다. 게다가 전성기의 센은 행사라면 뭐든지 불려나갔기에 고작 두 번 스쳐지나간 팬까지 기억하는 건 하늘의 별따기, 아니, 「하늘의 별을 전부 기억하기」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부터 치히로는 그를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낯빛에서 곤란한 기색이라도 읽었는지 남자는 손사래를 쳤다.
「부담 드리려고 했던 말은 아니었어요! 단지 이렇게 만날 수 있는 게 꿈만 같아서…」
깜빡,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뜬다. 이 순간이야말로 치히로에게는 꿈만 같았다. 여전히 가끔은 스테이지 위에 서는 꿈을 꾼다. 깨고 나서는 떠오른 멜로디를 소리내어 흥얼거려 보지만 반주가 없는 제 목소리는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남자의 한 마디가 치히로를 단숨에 꿈의 장소로 데려가주었다. 현란한 비트와 다채로운 선율이 없어도 땅으로 꺼질 듯이 사그라드는 그 목소리가 치히로의 고동처럼 세차게 귓가를 맴돌았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치히로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여전히 그 시절처럼 말주변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팬들은 그런 자신마저 사랑해주었던 것이다. 방금 전과 달리 속에서부터 우러나게 웃는 치히로를 보고 남자는 눈물을 글썽였다. 어쩔 줄을 몰라 서툴게 달래주려는 그때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 이게 그의 이름이구나. 기억해두자며 치히로가 다시 남자를 바라봤을 때, 그는 이미 눈물을 닦고 당당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씩씩하구나. 아직 젊은데도 이 일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
「이제 몸은 좀 괜찮으신 거죠?」
「네, 덕분에요.」
발걸음을 떼기 전에 그는 다급하게 물었다. 하긴, 가수 센의 마지막은 쪼그라든 풍선처럼 볼품없었다. 가장 잘 나가던 시기에 손 쓸 틈도 없이 은퇴의 길을 걸었다. 기사는 건강상의 이유로 나갔던 걸 기억한다. 자세한 내막을 밝히지 않은 채 치히로는 그를 안심시키고자 밝게 웃어보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남자는 마지막으로 하나를 더 물어보았다. 조금 주저하며, 머뭇거리며, 그럼에도 묻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것처럼.
「이제 다시 노래는 하지 않으시나요?」
그 질문에는 정해놓은 대답이 있었다. 그러나 치히로는 거절할 생각이었던 고백에 마음이 흔들리듯 고민에 빠졌다. 한편 그런 두 사람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하나는 치히로가 담당하는 Re:vale의 모모였고, 다른 하나는 치히로와 교제 중인 Re:vale의 유키였다. 팔짱을 낀 채 그들을 바라보는 유키의 곁에서 모모가 쾌활하게 웃었다.
「유키, 지금 질투하고 있지.」
「그럴리가. 센이 나를 몇 년이나 좋아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주어가 본인이 아니라 치히로인 것도 유키답다. 그런 그에게 역시 미남(イケメン)은 다르다며 애교 섞인 목소리를 낸 모모는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역시 질투하고 있잖아. 여전히 유키는 치히로의 등을 힐끔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PD가 젊은 스태프를 부르고 조금 더 대화가 이어지나 싶더니 치히로가 뒤를 돌아 이쪽을 향했다. 그런 그녀에게 손을 힘차게 흔들어주는 모모와 달리 눈이 마주칠 새라 고개를 돌리는 유키는 누가 봐도 수상했다. 하지만 둔한 치히로는 눈치채지 못하겠지.
「치히로, 방금 무슨 얘기했어?」
어쩔 수 없지. 죽어도 직접 물어보지 못할 유키를 대신해 모모는 발 벗고 나섰다. 그러나 의외의 대답에 모모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음, 그건 비밀이야.」
아차… 모모조차 치히로가 거절하는 선택지는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그린 듯이 기분이 저조해지는 유키를 보며 모모는 속으로 양손을 모았다. 미안, 유키! 진짜 미안! 반면 치히로는 방금 나눈 대화를 떠올리는 데에 여념이 없어 유키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은 부르지 않아요. 아직은요. 그리고 이 일이 정말 좋은걸요.)
목을 가다듬고 무언가 더 말하려던 치히로는 입을 꾹 다물었다. 똑같이 이 업계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제 기분을 이해할 것이다. 역시나 남자는 근사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숙여 인사하더니 PD 쪽으로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치히로는 다시 한 번 목표를 향해 달리는 제 모습을 상상했다. 아직 꿈을 포기하기에는 이르다. 그러나 입에 담기에도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제 팬이었던 사람에게도, 지금은 자신의 아이돌인 사람에게도. 소원은 입 밖으로 내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눈을 감고 셋을 세며 치히로는 기원했다.
(우선은 내가 맡은 일에 집중하자. 이 또한 나의 꿈이니까.)
치히로는 단전에 힘을 주고 재차 인사했다. 과거 최고의 가수였던 그녀의 성량은 여전히 건재하다.
「오늘 촬영도 잘 부탁드립니다!」
기운찬 목소리에 여기저기서 화답하는 소리가 돌아왔다. 바로 곁에서는 소리를 높여 호응해주는 모모와 느긋한 유키의 목소리가 들렸다. 스태프들의 기합이 퍼져나가듯 치히로의 뺨에 웃음이 번졌다. 이곳에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잔뜩 있다. 역시 이 세계에 들어와서 다행이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치히로는 눈이 부신 듯 눈썹을 찡그렸다. 조명의 뒷편에서도 빛나는 이들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십 년 전―.
기말고사가 끝난 학교는 산만하고 어수선했다. 누군가 복도를 내달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지만 누구도 막아서거나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남학생을 따라 문을 열고 복도로 뛰쳐나왔다.
「옆반에 여자애가 전학왔대!」
「진짜? 보러가자!」
그 말에 남녀 할 것 없이 소문의 근원지로 향했다. 교실의 뒷문으로 엿보니 확실히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여자애가 여름의 햇살을 받으며 창가에 앉아있다. 그런 그녀의 주변에는 이미 같은 반 학생들이 잔뜩 모여있었는데, 전학생이 심심찮게 보이는 학기 초와 달리 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라 한층 더 흥미를 끈 모양이었다. 어쩌면 다들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창가에 바람이 들 때마다 여자아이의 긴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흔들린다. 허리에 닿다 못해 의자 밑까지 늘어지는 머리카락은 솜사탕처럼 결이 좋아 만져보고 싶었으나, 구불구불한 탓에 어쩐지 아무렇게나 풀어놓은 인상을 주었다. 얼굴은 그다지 잘 보이지 않아 괜히 발돋움하던 차에 자리를 둘러싼 학생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니 종이 칠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다. 그냥, 대화 주제가 떨어진 것이다. 다시 원래 무리로 돌아가는 그들의 얼굴에서 아쉬움과 떨떠름함이 전해졌다.
아, 드디어 제대로 드러난 그녀의 모습에 그는 탄식했다. 아깝다. 첫 감상은 그랬다. 분명 인형 같이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인데 어색한 표정이 불량품을 연상시킨다. 조금 더 웃으면 보기 좋을 텐데. 방금 전까지 파들거리며 입술을 끌어올리던 여자아이는 곧 표정을 거둔 채 무료한 얼굴로 창밖을 응시한다. 시선 끝에는 뭉게구름 하나 없었다. 단지 푸르진 않지만 태양보다 눈부신, 새하얀 하늘. 지루한 풍경이다. 그걸 바라보는 그녀 또한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 그는 실내화를 끌며 본인의 반으로 돌아갔다.
여자아이, 타나모리 치히로는 본의 아니게 전학을 온 직후라 기분이 저조했다. 사이 좋았던 친구들과 물리적으로 멀어졌다던가의 이유는 아니었다. 어차피 그쪽에서도 친구가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따돌림이나 괴롭힘을 당한 건 아니었고,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녀는 히키코모리에 가까웠다. 사람과 제대로 대화를 하지 않은지도 벌써 1년이 훌쩍 넘었다. 벽만 보고 틀어박힌 그녀를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던 부모님은 바다가 보이는 동네에 치히로를 홀로 이사보냈다.
(바다라, 그런 걸 봐도 말이야…)
아슬아슬하게 종이 울리기 전인데 학생들은 그 누구도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지금 교실에서 홀로 자리에 앉아있는 건 치히로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야말로 이 자리를 금방 뜰 사람이다. 열어둔 창문에서 휙 바람이 불었다. 그 산들바람을 타고 들뜬 남학생의 목소리가 휙 퍼져나갔다.
「오오가미, 이번에 밴드 한다면서! 나도 끼워주라!」
고개를 돌리자 말을 꺼낸 남학생과 남들보다 머리 하나가 큰 남학생이 보인다. 아, 난처해 한다. 오오가미라고 불린, 모델처럼 스타일이 좋은 남학생의 얼굴에 얼핏 곤란함이 스쳤다. 상냥하고 상쾌한 웃음이 잘 어울리는 그가 최대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을 고른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흥미 반으로 참여하는 건 원치 않는 모양이었다. 분명 진지하게 음악을 하고 싶은 거겠지. 치히로는 순수하게 그가 부러워졌다.
눈을 내리깔자 시선이 느껴졌다. 너무 빤히 봤나. 눈을 동그랗게 뜬 오오가미의 고개가 이쪽을 향하자 치히로는 서둘러 바깥을 쳐다보는 척했다. 괜히 손끝으로 책상 위를 쓸다 검지 끝으로 톡톡 소리를 내며 딴청을 부린다. 아직은 서툴고 미숙한, 창문 너머의 여름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같은 반의 오오가미 반리와의 재회는 생각보다 이르게 찾아왔다. 클래스메이트면 매일 보는 게 당연했으나 등교 첫날을 제외하면 치히로는 거의 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오가미의 이름이 반리라고 하는 건 전학간 당일 알 수 있었다. 그는 대놓고 자신을 드러내는 성격은 아니었으나 포용력이 넓어 반의 중심에 있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바로 아랫집에 살고 있었으니 외면하려 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점심 시간대를 지난 토요일, 초인종이 울리자 어쩐지 오오가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 이 동네에서 그녀를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기껏 해야 아랫집이겠지. 요새 저녁까지도 피아노를 치긴 했다. 해가 길어진 만큼 늦은 시간에도 괜찮을 거라 생각하고 손에서 놓지 않았다. 밴드를 한다는 건 정말인지 아래층에서 기타 소리가 들려올 때는 연주를 멈췄으나 아무래도 방해가 된 모양이었다. 이곳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아 집에 없는 척을 할까, 잠시 갈등했으나 치히로는 슬리퍼를 끌며 현관에 나갔다.
좀처럼 짜증을 내지 않던 그가 화를 내면 어떨지 상상하며 문을 열었을 때는 오오가미의 곁에 못 보던 남자아이가 서있었다. 어쩐지 화가 나보이는 건 무척이나 섬세하게 생긴 그 남자애의 쪽이었다. 여름의 햇살을 그대로 반사하듯 그는 미미한 짜증을 감추지 않고 발산하고 있었다. 분명 기타 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그도 밴드 멤버겠거니 생각하고 있으니 오오가미가 그를 뒤로 밀어내며 눈을 마주쳐왔다. 아, 그는 「윗집」이 아닌 「나」를 찾아온 것이다. 본능적으로 그런 예감이 들자 치히로는 바로 모르는 척을 했다.
「아… 피아노가 많이 시끄러웠나요?」
그러자 반리는 조금 당황했는지 머뭇거렸다. 그 사이에 입을 연 건 서늘한 얼굴의 소년이었다.
「알면 조금은 조용히…」
초면에 불만을 표하는 그의 입을 막은 반리가 어설프게 웃어보였다. 그 모습이 익숙해보여 치히로는 금세 두 사람의 관계를 알아챘다. 이쪽이 말썽을 부리면 오오가미 군이 수습하는 역할이다. 역시나 반리는 필사적으로 대화를 이어나가려 했다.
「피아노 때문은 맞는데 오히려 그 반대랄지… 혹시 같이 공연해볼 생각 없어? 피아노가 아니라― 키보드지만.」
그것이 기념할 만한 세 사람의 첫만남이자 시작이었다.
우선은 손님이니 집 안으로 들였으나 뒤늦게 정리를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원체 가구가 적어 지저분해질 구석이 없는 덕에 보이기 부끄럽지는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컵이 두 개뿐이라는 것이었다. 새하얀 민무늬의 원통형 컵과 화사한 꽃무늬의 찻잔이라는 웃긴 조합이다. 잠시 고민하던 치히로는 컵을 반리 앞에, 찻잔을 유키의 앞에 놓았다. 거실에서 들리던 말소리에서 소년의 이름을 추측할 수 있었다.
치히로까지 마주 앉았음에도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비좁은 방에 침묵이 꽉 끼자 숨 쉬기도 부담스러웠다. 치히로의 집 구조는 반리와 같았는데, 기타만 두면 되는 그와 달리 업라이트 피아노가 공간을 채우고 있어 절반 크기로 보였다. 여름이고, 낮이니까 불을 꺼두어 어두컴컴했던 방은 어째서인지 불을 켜도 삭막한 그대로였다. 그러나 어색한 공기의 이유 중 절반은 말없이 내온 홍차를 마시다 얼굴을 찌푸린 유키 탓이었다. 반리는 치히로의 손에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는 걸 발견하고 화제를 찾은 것처럼 말을 걸었다.
「저기, 목 마르지 않아?」
「...컵이 두 개 밖에 없어서.」
그냥 목이 마르지 않다고 하면 될 것을… 임기응변에 약한 치히로는 말하고 나서 후회했다. 고개를 숙이자 호로록, 아무렇지 않게 차를 홀짝이는 소리가 들렸다. 정적 속에서 유난히 크게 울린 소리에 반리는 유키를 흘겨보았으나 치히로는 딱히 상관없다고 여겼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사람에 조금 흥미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렇게 둘이 밴드를 하고 있는데, 혹시 키보드에 관심 있으면 들어와주지 않을래?」
여태껏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얌전히 귀를 기울이던 치히로는 설명이 다 끝나고도 한 가지만을 물어보았다.
「피아노 소리가 들렸으면 노래 소리도 들리지 않았나요?」
그 말에는 반리도 유키도 지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보컬은 손에 꼽을만큼 좋았다. 그 매혹적인 노래와 똑같은 목소리로 치히로가 말했다.
「그런데도 키보드를 원해요?」
대답은 여태까지 한 마디도 없던 유키에게서 돌아왔다. 몸을 들썩이며 반리와 치히로의 사이에 끼어든 그는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처럼 쏘아붙였다.
「노래하는 건 나와 반, 둘 뿐. 그게 싫다면 이 얘기는 없던 걸로 해.」
「어이, 유키!」
공격적인 말투에 반리가 다급히 중재하려는데, 의외로 치히로에게서는 산뜻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뇨, 키보드가 좋아요. 키보드로 부탁드려요!」
어라, 왠지 분위기가 밝아진 듯한… 고개를 갸웃거린 반리는 아이처럼 눈을 빛내는 치히로에 부드럽게 웃었다. 등교해도 멍하니 시간만 보내던 소녀에게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이미 학교에서는 아는 사이지만 통성명은 해야겠지. 그러나 유키에게는 순서라는 게 없었다.
「이름은?」
자신의 이름도 밝히지 않은데다 말이 짧은 건 반리 때와 같았다. 게다가 당연하게도 반리와 동갑인 치히로가 유키보다 연상이다. 한소리 하려는 반리와 달리 치히로는 조금도 불쾌한 기색이 없이 답했다.
「센(セン). 센이면 돼. 」
치히로가 힐끗 반리를 바라본다. 밴드 활동을 하더라도 이름이 밝혀지는 건 사절이었다. 시선을 받은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그쪽은 반이랑 유키 맞지? 잘 부탁해.」
그렇게 본명을 얘기할 틈도 없이 화제를 넘기는 치히로에 반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수 없네. 그렇게 Re:vale의 키보드 자리에는 센이 들어오게 되었다. 벽 하나를 두고 연주를 공유하던 그들은 마침내 하나의 연주에 영혼을 공유하며 Re:vale를 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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