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도시

불면도시 (3)


잠깐의 쪽잠에도 피로가 가시질 않는지 편승주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연신 하품했다. 졸음을 떨쳐내지 못하는 몸을 안아 토닥여주고 싶은 걸 겨우 참아 내고 고개를 들어 층수를 확인했다. 빌딩 숲에 자리한 건물은 쓸데없이 높아 아직도 17층에서 멈춰 내려올 생각을 안 했다.

“오늘 퇴근하시고 저녁은 외식으로 준비해도 괜찮을까요.”

“응? 응. 좋아요. 뭐 먹어요?”

“저번에 괜찮다고 하셨던 한정식으로 준비할까 하는데….”

“응. 난 좋아요. 거기 반찬이 되, 되게 많은 곳 거기죠?”

“네. 예약해 두겠습니다.”

예전엔 존댓말을 쓰는 것이 당연했으나 이제는 이 깍듯함이 어색했다. 보는 눈이 많았다. 발 없는 말은 생각보다 꽤 멀리 갈 수 있으니 공적인 장소에선 더더욱 말을 조심하게 됐다. 피로에 지쳐 있으니, 몸보신이나 시켜줄까 싶어 기억을 더듬어 입이 짧은 편승주가 잘 챙겨 먹었던 가게를 떠올렸다. 짧게 대화가 오가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내리는 사람은 한 무더기였는데 타는 사람은 편승주와 저 둘뿐이었다. 미팅 장소가 있는 33층을 누르고 단 둘이 있다는 생각에 조금 더 편히 곁에 붙어 섰다. 좁은 수도 땅에 마천루가 이렇게 셀 수 없이 많은 것이 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저 둘이 붙어 있을 시간이 단 일 초라도 늘어 괜찮은 기분이었다.

“승주야. 저번에 했던 얘기 있잖아.”

편승주는 멍하니 앞을 보던 고개를 제 쪽으로 돌린다. 무슨 얘길 하려는 건지 묻는 것처럼 시선이 꽂힌다.

3층.

“왜, 며칠 전에 설탕 토스트 먹은 날.”

“음… 아. 기억났어요.”

“더 하고 싶은 얘기는 없어?”

11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편승주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지금 말하기 힘들면 이따 저녁 먹으면서 해도 괜찮아. 늘 곁에 있는 게 난데, 나한테 뭔가 비밀 만들 필요 없잖아. 혹시 몰라 털어놓으면 도움이 될지……”

14층.

엘리베이터가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멈춘다. 하던 말을 끊고 층수를 쳐다봤다. 수 초가 지나도 움직이질 않았다. 곁에 있는 편승주의 어깨를 감싸안고 엘리베이터 호출 버튼을 눌렀다. 몇 번 수신음이 들리더니 관리실이라는 음성이 들린다.

***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일은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최악을 생각할 정도의 나쁜 상황도 아니었다. 금방 연결된 관리실에서는 업체를 불렀으니 30분 정도 기다려달라는 대답을 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전기가 여전히 잘 들어와있다는 것이고, 불행은 이 건물이 지어진 지 꽤 오래된 건물이었단 것이었다. 구건물에는 승강기 비상 탈출 장치가 없다. 업체가 올 때까지 꼼짝없이 이곳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여러 가지 걱정이 머리를 뒤덮자, 어깨를 감싸안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편승주는 그동안 아무 말 없이 품에 안겨 있었다.

“전화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미팅이요.”

편승주는 평온한 얼굴로 그런 얘길 했다. 엘리베이터가 멈췄는데도 꽤 태연한 모습에 되레 걱정이 들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엘리베이터라 신호가 불안정한지 전화는 신호음이 가다가 끊기길 반복하길래, 몇 번의 시도 끝에 비서에게 메시지를 겨우 보낼 수 있었다. 할 일을 끝내고 숨을 좀 돌리니 품에 있는 동그란 머리통이 눈에 띈다. 아까부터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처럼 조금 고쳐 안아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어, 어떤 거요?”

“안 놀랐어?”

“조금? 이런 일도 있네요.”

편승주는 셈을 멈춘 엘리베이터 층수를 빤히 쳐다보다가 품에서 떨어져나와 엘리베이터 구석에 쪼그려 앉았다.

“어차피 30분이나 걸리니까… 눈이라도 조금 더 붙일래요.”

고개를 무릎에 묻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새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분명 퇴근하고 함께 외식이라도 하면서 물을 예정이었는데, 불안한 상황과 며칠 내내 시달린 심란한 마음이 속을 헤집는다. 벌써 잠이 든 건가 싶어 그 앞에 주저앉아 무릎에 다소곳이 올려둔 손끝을 쥐었다. 평소였다면 고개를 슬며시 들어 올려 웃어줬을 얼굴이 요지부동이었다. 피로가 얼마나 심했으면 벌써 잠에 빠졌을까 싶었다. 편승주가 이렇게까지 지친 이유는 아마도, 바쁜 일도 일이지만 필요 이상으로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되어 쓰는 에너지가 막심했다. 책상에 콕 박혀서 서류 업무 보는 일이 무척 재밌다며 나름 뿌듯하게 웃었던 사회 초년생의 편승주는 이제는 알 사람은 다 아는 기업의 유일무이한 경영 후계인이 되었으니 얼굴 도장을 찍고 다녀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승주야.”

손끝이나 겨우 쥐고 있던 것을 놓고 손깍지를 껴도 묵묵부답이었다. 정말 벌써 잠이 든 건가 싶어서 마음이 심란했다. 단순히 피로 때문이라면 이번 주만 버티면 곧 숨 돌릴 수 있을 테니 차라리 그때 푹 쉬게 해주면 되지만, 그 외의 고민거리나 일이 있다면 제일 먼저 나서서 해결을 돕는 게 저인데 제게 말하지 않으니 알 수가 없었다. 편승주의 현 상태를, 기분을, 생각을…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어서 마음이 먹먹했다. 애매한 거리감. 고용주와 피고용인이라 칭하기엔 지나치게 가깝고, 그렇다고 단 한 번도 서로를 ‘연인’이나 ‘가족’으로 정의한 적은 없었다. 그냥 옆에 있는 것이 당연한 존재. 그게 제 역할이었으니 그냥 편히 기대고 이용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니 느껴지는 이 막막함은 배신감보다는 쓸모를 다한 것 같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연민에 가까웠다. 자신이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제 고용주의 편의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인력이라고 생각하니 목이 타는 것 같았다.

“난 널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그래서 늘 속으로만 생각하던 것을, 타는 목이 아파 혼잣말처럼 내뱉게 되었을 때. 잠든 줄 알았던 편승주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눈만 감고 있었던 건지 조금 힘이 빠져있지만, 졸음기는 하나도 없는 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물었다.

“왜요?”

“제가 고용주라서요?”

대답할 틈도 안 주고 연달아 묻는 밀에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단순히 ‘고용주’라서 그렇다고 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선을 넘어버렸다.

“그런… 이유 아닌 거 알잖아.”

“그럼요?”

명확한 답을 바라는 것처럼. 관계를 정의할 수 있는 선택권을 제게 쥐여준 편승주는 그 무게감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 얼굴을 그저 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대답 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먼저 돌린 건 편승주였다. 무릎 위로 다시 얼굴을 묻고 작게 중얼거렸다.

“대답하지 마요. 대답하면 안 볼 거예요.”

보지 않는다는 건 일종의 시위에 가까웠다. 어릴 때부터 겪던 경미한 청각 장애를,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살기 위해 편승주는 보는 것만으로도 들을 수 있었고, 그런 편승주에게 보지 않는 건 듣지도 않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니 일방적으로 소통을 차단하겠단 얘기였다. 사춘기 때나 종종 했던 그 말을 몇 년이 지난 지금 와서 또 들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떻게 달래야 할지, 애초에 달랠 수 있는 상황은 맞는 건지.

급격하게 겪는 관계의 변화에 적응도 못 하고 있던 찰나에 엘리베이터의 불이 깜빡인다. 불안정하고 불규칙하게 깜빡이던 등이 이내 꺼지더니 비상 전력이 켜졌는지 작은 불빛 하나만이 내부를 밝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상황이 악화되니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긴장감을 느꼈다.

“승주야. 위험하니까, 지금은 이리 와.”

“안 위험해요. 그냥 저, 전기가 나간 거잖아요.”

“그러니까. 전기가 끊겼는데 무슨 일이 날 줄 알고.”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안 나요.”

편승주는 어릴 때부터 그랬다. 고집이 셌다. 그렇다고 억지를 부렸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었다. 지금 하는 말도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냥 제 마음이 불안했다. 곁에서 온기라도 느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지금 여기서 하는 말싸움은 시간 낭비란 생각이 들어 주저앉아 있던 몸을 옮겨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편승주는 가만히 앉아 있더니 작게 한숨을 쉬고 품에 기대 안겨 왔다. 고개를 품에 묻고, 늘 그래왔던 것처럼 품에 묻은 고개를 부비적거리는 것에, 불안했던 마음이 점차 가라앉음을 느낀다. 편승주는 몇 번 그 행동을 반복한 뒤에 작게 입을 열었다.

“바보 같아요.”

“어떤 게?”

“그냥. 다요. 지금 이 상황도 너무 바, 바보 같아요….”

“그러게. 이렇게 엘리베이터에 갇히는 일이 다 있네.”

“그것도 그거지만… 나는. 혀, 현이랑 싸우고 싶어서…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왜?”

편승주는 또 대답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침묵을 깨는 건 엘리베이터 문 쪽에서 나는 소음이었다. 잠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문틈 사이로 업체에서 파견 나왔다는 말소리가 들렸다. 엘리베이터를 고정하고 문을 열 테니 공간이 확보되면 탈출하면 된다는 이야기에 짧게 대답을 하자, 틈이 서서히 열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층계에 반쯤 애매하게 걸친 엘리베이터 때문에 문을 걸어 나가서 탈출은커녕 꽤 되는 높이를 뛰어올라야 탈출 할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편승주를, 제 어깨 위로 올려 먼저 보내려고 몸을 안아 들어 올리자, 편승주가 입을 열었다.

“먼저 올라가서 저 잡아주세요. 사람들 봐요.”

엘리베이터가 멈췄던 14층과 15층 사이 역시 사무실이 있었다. 꽤 소란스럽게 주변에 모여있는 것을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여 대답한 후에, 그 짧은 찰나에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걱정되어 최대한 빠르게 엘리베이터를 올랐고, 그 뒤에 편승주에게 손을 뻗었다.

편승주는 내밀어진 손을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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