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눈동자

조사를 마치고 나오니 창밖은 이미 깜깜한 새벽이었다. 동림은 이미 죽었으니 요식행위(要式行爲)에 가까운 조사였지만 정신이 피곤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깔깔하니 바싹 마른 입 안에 담배 한 모금이 너무나 간절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주머니 속엔 아무것도 없었다.

 

402호. 지친 몸을 끌고 사무실로 올라왔다. 어두운 사무실 안, 나는 담배를 한 개비 빼어 물고 오늘의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동림은 사살됐군요.”

대체 그게 무슨 말일까. 그렇게 내가 동림임을 확신하며 내 목을 조여 오던 김정도가 왜 마지막 순간에 날 놔준 걸까. <여기 바로 동림이 있소> 하고 내게 목줄을 걸어 개처럼 끌고 가려고 국내 3팀을 다 동원해서 들이닥친 김정도였다. 불타는 서류 더미에서 자신의 두 눈으로 내 정체까지 확인한 그가 대체 왜….

 

“동림은 사살됐군요.”

죽은 철성을 바라보며 선언하듯 내뱉은 김정도의 눈에는 어떤 확신마저 비치는 듯했다. 철성은 김정도의 수족이었다. 아무리 남에게 정을 주지 않는 자라도…제 심복에게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하긴, 내가 남을 그렇게 판단할 일이 아니지.

문득 내 손으로 죽인 주경의 얼굴이 떠올랐다. 함께 한 시간만 5년이었다. 여자라는 이유로 종종 과소평가 당했지만, 어떤 남자보다도 현명하고, 용감하고, 충직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숨이 꺼져가는 느낌을, 아직도 이 두 손은 기억하고 있다.

손.

나는 습관처럼 내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기묘하게 굽어서 펴지지 않는 두 번째 손가락은 다시 내 상념을 김정도에게로 이끌었다.

 

김정도는 진지한 사람이었다. 1979년의 그날, 나는 내 조사관이었던 그를 처음 만났다. 그건 매우 기묘한 경험이었다. 기묘한 경험이란 고문을 말하는 게 아니다. 기묘한 건 김정도의 표정이었다.

보통 고문을 하는 자들은 상황을 직시하지 않으려 한다. 누명, 무고함, 고통, 비명, 피, 눈물과 콧물, 살 타는 냄새…. 그런 것 앞에서 그들은 무관한 척해야 한다. 그래야 이 일을 언제까지고 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면서도 그들은 종종 웃는다. 동료들과 가벼운 농담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김정도는 웃지 않았다.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그저 날 똑바로 바라보며 내가 당하는 고통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 눈빛은 무심하지도 않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저런 눈으로 상대를 고문해 대다가는 본인이 먼저 부러질 텐데. 나는 내 목숨줄을 붙잡고 죄어대는 이 남자에게 왠지 모를 걱정 같은 걸 느껴버린 것 같다.

 

*

 

“박 차장, 좀 전에 나왔답니다.”

“집으로 갔나?”

“아뇨. 사무실로 올라갔습니다.”

“그래. 고마워. 이제 퇴근해.”

이런 날에도 마음 붙이러 갈 곳이 없나…. 나는 쯧 하고 혀를 찼다. 하긴, 그는 남파 공작원 동림이지. 지독하게 살아남아 안기부의 가장 깊은 곳에 똬리를 튼, 독하고 외로운 인간. 하지만 왜인지 내 혀 끝에는 깔깔하니 모래라도 씹은 듯한 기분이 남았다.

나는 왜 정체가 탄로 난 그를 살려 주었나.

나는 집무실 의자에 몸을 깊이 묻고 눈을 감았다. 상념이 나를 다시 1979년의 보안사 지하실로 데려갔다.

 

박평호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온갖 감정들이 다 떠올랐다. 세상 어느 정보기관 요원이 감정을 눈에 드러낼까. 그런데 박평호는 달랐다. 그래서였다. 처음 그를 만났던 그 지하실에서, 나는 완전히 박평호에게 말렸다. 그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눈동자를 하고는 이를 악물고 나를 노려보았다. 고통과 분노, 가끔 비애가 차례차례 스치는 그 눈을 보고 있자면-이런 얘길 박평호에게 했다간 그는 내 관자놀이에 총구멍을 내겠지만-마치 우리가 폭력적인 정사(情事)를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흥분을 조절하지 못하고 그의 신경을 끊어놓았던 거였다.

“박 차장님이랑 일하는 거 어렵지 않죠? 그분 감정이 눈에 다 드러나잖아요.”

내가 구내식당에서 우연히 마주친 방 주임에게 그렇게 물어봤을 때 방주임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되물었었다.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몇 년을 뵈어도 목석같으셔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 수가 없는데요. 우리 회사 2대 포커페이스가 김 차장님이랑 박 차장님이잖아요.”

 

*

 

나는 커튼을 젖히고 앞 동 건물을 바라보았다. 412호에 불이 켜져 있다. 김정도 차장, 그가 아직 여기 있다. 예쁜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들을 집에 두고서. 내가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도 그의 눈은 다른 것만 바라보고 있다.

“그러게 인질이 되지 말았어야죠!”

김정도의 목표는 줄곧 그거였을 것이다. 1호를 제거하는 것. 그래서 고문받는 상대의 고통도 회피하지 못하는 맑은 눈의 사내는 부러질 듯하면서도 부러지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딱한 사내가 아닌가. 그래서 김정도는 나를 살려둔 것이다.

자기가 고용한 저격수를 자기 손으로 쏴 죽이고, 평생 자기 뜻을 함께해 왔을 목성사 최 대표를 자기 손으로 죽이고, 자기의 수족 같던 철성의 죽음을 동림으로 위장하는 자가 마침내 나를 잡았다.

 

동이 트고 있었다.

그래. 김정도 차장, 내게 말해 다오. 당신의 꿈을. 당신이 걸으려는 그 길, 내가 같이 가 줄 테니….

우리가 가려는 길, 1호를 제거하더라도 우리가 죽게 될 그 길.

우리가 살더라도, 온갖 오욕(汚辱)을 다 뒤집어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할 그 길.

같이 가자. 김정도.

나는 창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중정(中庭) 너머, 창을 등지고 앉은 김정도의 커다란 등이 보였다. 잡히지 않을 것을 아는데, 내 손은 자꾸 허공을 헤집고 있었다.

fin.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