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어디에나 있고
그렇기에 끝은 아름다운 것이라
옆집에 새로 사람이 이사 온 듯했다. 이른 아침 열어본 우편함에 소심하게 들어있던 백설기와 앙증맞은 메모지. 둥글둥글한 글씨체로 간략하게 적혀있는 잘 부탁드린다는 내용. 매일 점심쯤이면 들려오는 엉망진창인 바이올린 연주 소리. 아직 마주친 적은 없지만 심심찮게 느껴지는 인기척. 가끔 나갈 때마다 집 근처에 생긴 화단이 점점 화려하게 살아나는 것까지. 솔직히 말하자면 귀찮았다. 일부러 한적한 행성을 골라 와서 황무지에 세워진 폐가에 틀어박혔더니 설마 또 다른 누군가가 올 줄이야. 여태까지의 행적을 보자면 조금 내성적이지만 성실한 성격 같고.
누가 오든 신경 끄고 내 삶을 살아내면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이리 의식하고 있는 이유는 분명 그 오묘한 연주 소리 탓이겠지. 마치 바이올린을 학대하면 나올 듯한 날카로운 긁는 음…… 이따금 줄이 끊기는 모양인지 무언가 퉁기는 소리가 나면서 연주가 평소보다 일찍 끝날 때도 있다. 연습한다고 같은 부분을 계속 틀리는 것에 속이 갑갑해지다가도 또 그리 싫은 느낌이 들진 않아 자꾸만 귀를 기울이게 되는 건 나 또한 그러한 시절을, 빛나는 열정을 가져본 적이 있었기에.
붉은색 하늘이 걸린 어느 새벽, 보관형 슬라임으로 감싸서 창고에 박아둔 더블 베이스를 찾아보았다. 한정판으로 나와서 상태를 보존하여 되팔면 비싸다는 말로 슬라임 밀봉을 해뒀지만 사실 그 이유보다는 남은 미련이 컸던 게 맞았다. 아직까지도 팔아치우지 못하고 이리 먼지 날리는 창고에서 귀중하게 보관되고 있는 걸 보면 말이지. 질 나쁜 바이올린 연주를 매일 듣고 있으려니 꺼진 줄 알았던 불씨가 내면에 남아있음이 느껴졌다. 조심조심 더블 베이스를 꺼내 들어 몸체를 쓰다듬으니 감회가 새롭기도 하고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지나가 버린 학창 시절. 힘들었지만 내 영혼이 가장 빛났던 때를 함께 보낸 단짝. 지금은 너도 나도 이리 썩어가고 있구나. 동아리실에서 친구들과 합을 맞추는 연습을 하고, 축제에 나가 유행하는 곡을 연주하며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체감했던 과거가 밀려 들어온다. 나중에 커서 할 거 없으면 다 같이 밴드나 하자며 장난스럽게 말하고, 그것이 빈말임에도 밑바탕에 진심이 섞여 있음을 모두가 알아 그러자고 답했지. 왕복 16시간 걸리는 행성에 좋아하는 인디 밴드의 콘서트가 열려 단합하여 깡으로 당일치기를 하기도 했고. 꽤 지난 날이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친구들은 크면서 뿔뿔이 흩어졌다. 사는 데 여념이 없어 연락 두절이 되기도 하고 가치관이 갈려 다른 길을 가기도 했다. 전부 자기가 잡았던 악기처럼 우직하게, 아니면 현란하게 각자의 삶을 살고 있는 게지. 으르렁대며 사이가 좋던 묘한 녀석들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번은 우리끼리만의 밴드가 해체되었다 재결성되곤 했는데 현재로선 간간이 소식을 주고받는 친구 하나가 고작이었으니 밴드 합주는 꿈꾸기 힘든 일이다. 그걸 아는데도 다시 더블 베이스를 꺼내든 건 그 시절에 대한 갈망일까, 연주 자체에 대한 열망일까? 손끝으로 현을 튕겨보았다. 세월에 다 닳아버린 듯한 탁한 소리가 창고에 희미하게 울려 나갔다. 이리 오랫동안 방치되었는데, 그럼에도 이것은 여전히 나를 반기고 있었다. 그것이 무척 죄스러웠다.
암막 커튼을 걷어내고 환한 햇살을 방으로 맞아들였다. 셋… 둘… 하나…. 속으로 숫자를 다 세고 나니 어김없이 규칙적인 옆집에서 파격적인 연주 소리가 흘러나왔다. 낯익음을 넘어 아주 잘 아는 곡이었다. 50년 전에 별똥별처럼 반짝 떴다가 떠내려간 비운의 명곡. 수백, 수천 번은 듣고 부르고 다룬 곡. 마음은 살짝 떨렸으나 몸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차분했다. 곧 내가 일방적으로 끼어든 퍽 기묘한 합주가 시작되었다. 괜히 취미생활을 망치는 것 아닌가, 옆집이 부담감에 연주를 멈추면 어쩌나 하는 고민과 달리 합주는 몇 차례고 이어졌다. 뒤죽박죽 섞여 드는 음색은 조화로운 맛이 없었으나 연주자의 즐거움이 녹아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마치 어디에 홀린 것처럼 음을 뒤쫓으며 손을 다 움직이고 나자 귀가 멍멍한 이명이 찾아들었다. 마치 세상 중심부에 홀로 동떨어져 둥둥 떠 있는 듯한 착각. 가슴에 저릿저릿하게 스미는 웅대함. 아, 이 느낌이다. 이 느낌을 사랑하지 못하는 법을 찾지 못하여 몇 번이고 어긋나는 합주를 견뎌내고 끝을 찾아 현을 튕기는 것이었다. 옆집도 온 세상이 눈에 뒤덮인 것처럼 고요해지고 나만이 있다는 그러한 존재의 충만함을 받았을까? 합주 탓인지 오늘은 바이올린 연습을 일찍 마친 모양이었다. 어색하게 더블 베이스를 정리하고 나는 작은 호기심과 두근거림을 담은 채 날을 넘겨야 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우편함에 수신인 없는 편지와 푸른 꽃 한 송이가 들어있었다. 평소였으면 사람을 끊고 사는 내게는 아주 귀찮기 짝이 없는 것이었을 테지만 이번에 먼저 영역을 침범한 건 나였다. 집에 들어와 천천히 편지를 뜯어 읽고 또 읽었다. 나를 비방하는 말도, 민폐니까 하지 말아 달라는 말도 안 적힌 순수한 다정함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 직접 가꾸는 화단처럼 어여쁜 말이 피어난 종이를 바라보느라 시간이 잘 갔기에 아침은 허겁지겁 먹어야 했다. 이토록 예쁜 글에 답장할 자신은 없었으므로 조금 후에 연주로 화답함이 좋을 터였다. 전처럼 밴드를 꾸리기에는 멀고 조촐하지만 분명한 새출발이라 봐야 하겠지. 그저 과거에 머물러있기엔 새 파도는 언제나 예고 없이 들이닥치고 이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행운의 영역이기도 하나, 지금의 나는 그 행운을 자의로 선택했다는 점이 기꺼웠다. 아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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