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푸름] 이미 선택된 좌석입니다
칠리 팬질하는 푸름과 카지푸름
- 카푸 맞음(진짜) 서로 맞관인데 사귀진 않는 상태
- 번외편 이후 시점입니다.
또 광탈했다.
티켓팅 실패 알림을 스마트로토무로 받으며 푸름은 절망했다. 이건 일반 티켓팅도 아니었다. 일반 티켓팅이 어려울 팬들을 위해 팬클럽 전용으로 풀어주는 티켓팅이었다.
이제 남은 건 일반 판매만 남았다는 사실 뿐. 눈물을 머금으며 로토무 PC방 밖으로 나왔다. 우울했다.
한편, 한쪽에서는 이것 때문에 미쳐가고 있는 소년이 있었다.
"후우…."
식당에서 만난 푸름의 얼굴은 오늘따라 우울하다. 며칠 전 만해도 너무 행복해 보여서 카지는 자신도 따라서 행복해졌었다. 계속 방글방글 웃는 얼굴로 승부를 요청하는 학생들을 가볍게 상대하고는 수없이 날려버리는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컨디션이 좋았다. 카지도 저도 모르게 같이 승부 요청을 했다가 날아가 공주님 안기 되었다는 사실은 접어두자.
그런데 며칠만에 이 모양새다. 절망하고 있는 푸름은 몇초마다 절망의 모양새가 바뀌었는데 멍하니 있기도 하고, 가끔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어쨌든 제정신은 아니었다. 연예인 팬질 때문에 미쳐가는 인간이 세상에 한 둘이 아니라는 사실은 스마트로토무도 없는 시골 소년이 알 리가 없다.
"아…!"
그러나 순간, 도착한 연락을 우울하게 읽던 푸름이 순간 눈을 반짝거리며 크게 떴다. 극적인 변화였다. 마치 죽었다고 믿었던 생명이 살아난 것처럼 단적이다. 푸름은 재빨리 식사를 입 안에 우겨넣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에 넋이 나간 것도 잠시, 카지의 마음속에는 불안이 피어오른다.
혹시 좋아하는 애가 생겼나?
과한 생각하다 에스컬레이트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지의 마음속에는 여러 근거가 있었다.
카지가 푸름이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는 아마 2박 3일간의 자연학교 때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첫눈에, 라고 까지는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오거폰을 보기 전까지는 좋아하고 있었다. 미움도 좋아하기 때문에 갖게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상대를 좋아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배신감을 느끼면서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이 이상하게 되어버린다는 것은 사람의 삶의 증표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푸름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뭐가 다를까.
카지는 땅굴파기를 시작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게는 자격이 없었다. 그렇게 못되게 군 이상, 좋은 친구 이상의 자격은… 여기까지 생각하니 눈물이 또 찔끔 나왔다.
그렇게 또 시작한 사랑의 엇갈림을 1열 직관하고 있는 제빈은 또 시작이라고 팝콘을 들었다. 로토무TV의 드라마보다 옆에 있는 사랑 얘기가 더 재밌는 법이다.
카지와 푸름의 관계를 정의하자면 애매한 관계였다. 서로 분명 좋아하지만 고백은 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서로 자각이 없는 것이다. 거기다 서로가 서로를 분명 좋아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카지는 저지른 일이 있으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푸름은 자신을 미워해서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한다. 상호 과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한, 이 생각의 톱니가 맞물릴 일은 없다.
어쨌든 이 두 사람의 연애사정은 차치하고, 사람은 24시간 동안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누구나 취미도 있고 각자의 인간관계가 있다.
푸름이 새로 발견한 취미는 그 중에서 참으로 특이한 것이었다. 취미가 특이한 것은 아니다. 단지 그렇다. 보통 아무때나 만날 수 있는 사람을 팬질하지는 않는다. 스타란 멀어서 아름다운 법이니까.
푸름은 챔피언이었고, 칠리는 사천왕이다. 칠리와는 원한다면 언제나 만날 수 있다. 굳이 배틀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사적 친분을 쌓기에는 충분하다. 문제가 있다면 첫번째. 칠리의 얼굴이 푸름의 취향이었다는 점이고, 저번에 에어리어 제로 탐사 건으로 한참 혼난다는 포상을 받은 시점에서 푸름은 설렘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 칠리는 밴드 활동을 시작했고, 그 밴드는 금새 인기를 끌었다. 메인 보컬 겸 베이스인 칠리가 있으니 라임의 콘서트만큼 인기를 모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그런 와중 푸름은 우연히 스마트로토무로에서 팬사이트를 찾았다.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사진 한장이다.
칠리가 화면 너머로 미소짓고 있었다.
때론 사람이 끝나는 것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 뒤에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루틴이 되었다. 푸름은 일단 계정 하나를 더 만들었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이 올리는 칠리의 사진을 수집했다. 그러다 보니 친구가 늘어나고, 정보가 늘어나고…. 훌륭한 팬덤의 일원이 되었다. 이틀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람이 미치는 것은 시간으로 결정되지 않았으므로.
어쨌든 푸름이 방긋방긋 웃으면서 나온 이유는 별 거 없다. 팬클럽 내부에서 푸는 추가표 공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푸름은 비장한 표정으로 로토무 PC방에 들어선다. 무를 베지 않고는 나오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리하야 이야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
"너는 뭐, 티켓 하나 못 얻은 걸로 그렇게 풀이 죽어?"
한참 울상인 푸름에게 시유가 피크닉을 하자며 데리고 나왔다. 옆에서는 복숭동자와 오거폰이 시유가 준비한 포켓 파를레를 잔뜩 먹고서는 배가 동그래진 상태로 누워 있었다.
"하지만…."
"리그부 애들이 다들 걱정하고 있었다고. 무슨 일 있는거 아닌가 하고."
하긴 푸름이 생각하기에도 자신은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차라리 최근에 팔데아에 돌아가지 않았어서 다행이다. 네모나 모두를 불안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미안해, 시유. 불안하게 했지."
"알면 잘해."
시유가 샌드위치를 드러누운 푸름의 입에 쑤셔넣었다. 입안 가득한 퍽퍽한 샌드위치에 울상지으면서 푸름이 우물우물 씹었다. 마요네즈와 칠리소스를 섞은 샌드위치의 맛이 입안으로 강렬하게 꽂혔다.
이렇게 되면 칠리 본인에게 티켓을 달라고 하는게 나으려나. 아니다, 치프라면 한 두장은 갖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왕이면 직접 티케팅 하고 싶은데….
한 두번이라면 모른다. 앞으로 몇번이나 티켓을 구하게 될지 푸름은 자신이 없었다. 지금의 푸름은 인생이 묶여 있었다. 밥 먹다가도 남이 배틀하자고 하면 벌떡 일어나는 네모처럼 말이다. 밥먹다가 콘서트 가자고 해도 갈 수 있다. 죽어도 가야 한다.
푸름은 샌드위치를 물고 대굴레오 처럼 들판에서 굴렀다. 그리고 생각에 빠졌다.
신중하게 미래의 뉴 플랜을 정해야 한다. 이젠 일반 티켓팅밖에 없다. 같이 티켓팅 해줄 사람을 구해야 겠다. 적당한 사람 없나. 당장 오늘인데 사람 구하기도 마땅치 않았다. 시유만 해도 오후에는 브라이어 선생님의 호출이 있어 가야 한다. 사람을 천천히 고른다. 시간 많고, 계속 나랑 같이 있어도 괜찮은….
"푸름!"
데굴데굴 구르던 푸름의 몸이 카지의 목소리에 그 아래에서 딱 멈췄다.
"응?"
"나, 나랑 사귀어 줘!"
넌 그런 말을 티켓팅 걱정하던 사람에게 하니….
수없이 반복하던 고민이 푸름의 얼굴이 붉게 물드는 동시에 펑 하고 폭발하듯 날아갔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건 알아."
"…응?"
"하지만 나에게도 기회를…"
“응??? 나도 카지 좋아하는데???”
“어? 어???”
'지금 고백을 샌드위치 먹으면서 구르다가 하는 거야!?' 시유의 비명에 가까운 지적이 있었지만 이미 포옹한 두 사람은 서로의 세계에 푹 빠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영광을 푸름이 아마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걸지도 모른다고 열심히 카지를 놀린 제빈에게 돌린다.
예상 가능한 범위이지만, 몇 시간 후 카지는 로토무 PC방에 잡혀갔다. 처음 데이트가 PC방이라니, 이런 커플도 세상에 드물 것이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두 사람 다 힘을 냈지만 아무래도 광탈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태어나서 처음 만져보는 로토무 PC에 카지는 호기심이 들끓었다. 눈을 반짝이는 카지를 보는 푸름의 기분도 자연히 들떴다.
새로 나온 아케이드 게임에 한눈이 팔려 시간을 잊었다. 트레이너라면 당연히 가진 호승심에 둘 다 누가 이기고 지는 것에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였다. 무승부라는 아쉬운 결과를 확인했을 때는 이미 티켓 오픈 시간이 지난 후였다.
푸름은 자신에게 실망했고, 카지는 미안해 어쩔줄 몰라 분위기가 쳐져 공기가 무거워 졌지만, 곧이어 스마트로토무로 걸려온 모란에게 사정을 말하자,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작 말하라며 모란이 적당히 사이트를 해킹해 관계자석 티켓을 끊어주자 푸름은 감격에 젖어 눈물을 흘리는 시늉을 했다.
음? 이럴 거면 칠리 본인에게 달라고 하는게 낫지 않았나?
뒤늦게 그런 깨달음이 들었지만 그런 감상은 미뤄두기로 했다. 테사에게 경고메일이 왔다며 모란이 작은 비명을 내질렀지만 그것도 미뤄두기로 했다.
스테이지에는 비명에 가까운 함성소리가 들린다. 세계는 어둠으로 물들고 선명한 라이트가 꽃처럼 피어나며 주목을 끈다. 절로 눈이 머는 매혹적인 모습에 푸름은 눈을 때지 못했다.
그곳에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 앞서 보지 못했던 미지의 세계가.
푸름의 눈이 반짝이는 모습을 보며, 언제고 그 모습을 보고 싶다고 카지는 생각했다. 그리고 스스로도 모르게 손을 잡아 깍지꼈다.
"카, 카지!?"
푸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 아!? 나도 모르게!"
"아냐아냐! 싫지 않았어! 오히려 좋았어!"
서로 뺨을 붉히며 손을 가로 젓는다. 스스로 뭘 한건지, 뭘 말한건지 혼란스러워 하는 두 사람은, 얼굴을 물들이며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곤 우물쭈물 고개를 내렸다. 그 사이에 잡은 손은 놓치 않았다.
당혹과, 난처함, 두근거림이 그 사이로 느껴졌다. 마음이 설레 참을 수 없다.
콘서트 시작을 알리는 강렬한 기타 소리와 함께 여름 불꽃이 하늘로 피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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