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cátrix

放浪 by 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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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조는 타인의 눈과 겹쳐진다. 시점을 바꾸어 비추어지는 색이 동공에 물들고 나면 그것은 줄곧 흑백이었음에 문장의 시제를 바꾼다. 현재에 안주하는 과거는 여상히 흔적으로 남아있었다. 그것은 세상 만물이 가진 공통점일 것이라고, 서단평은 증명 같은 영원의 단서를 떠올릴 때마다 목격했던 타자의 인간적인 유약들을 곱씹었다.


  족지에 낭자한 흉은 칭했던 누군가들의 흔적과 비슷했을지라도 숨기지 않음은 아킬레우스 서사시를 표방한 위장이었다. 보이는 나약함을 미끼 삼아 피식자를 흉내 내는 포식자의 말로 비밀스러움은 낭비하기 좋은 올가미였다. 잡은 목을 더욱 옥죄고 추궁하는 것이 그의 일생이었으므로 그리 멀지 않은 미래, 지금의 현재에 선 맨발은 일관적인 방향을 가졌으나, 다만 예외처럼 고민하는 것은 신조 같았던 직설의 망설임이었다. 관계의 추를 들었을 때 단평은 생각했다. 관용을 제 입으로 뱉어내는 게 나을지, 본질과 떨어진 현묵을 자세로 가질지, 세월을 고스란히 받아먹은 발바닥이 가벼운 소음을 냈다. 입매에 머물던 웃음은 사색에 흩어졌다. 아마 어긋난 시야를 깨달을 즈음부터 오래 궁리하던 점이었을 것이다.



 " 무슨 생각해? "



 그의 적막을 깨는 건 오롯이 머리칼을 쓸어주는 손가락이었다. 서단평보다 조금 더 큰 손에 걸치듯 들어간 검은 머리카락들이 부드럽게 떨어졌다. 공중에서 번복되는 추락에 움찔거리며 서단평은 시선을 조금 들어 보였다. 빛 들지 않는 푸른 동공에 여상히 웃는 낯이 들어찼다. 단평은 그런 익숙한 모습에도 낯선 페이지를 찾았다. 스쳐 지나간 시각적 자극은 가벼운 번뇌의 착화점이었고 남은 건 진전함의 작은 판단이었다. 출처를 가진 이들의 당연한 일생을 헤아리듯 궤도를 그렸지만 정작 당사자를 곁에 두고 누르는 기색이 썩 괜찮은 구석은 아니었다. 건네는 질문에 응할 답은 한참 밀어두고 떨어지지 않는 입술의 표피는 서로 접착되어 말라갔다. 굼뜨게 감았다 뜨는 눈꺼풀의 움직임을 따라 오르는 손이 무의식을 투영하며 검은 옷 위에 내려앉았다. 겉가죽을 가리는 천의 이유에 대해 굳이 목구멍을 열어 전달하는 것보다도 나아가는 행동은 남은 기억을 얽듯이 길을 따라 연결했다. 대비되는 색의 교차는 처지를 대변하는 듯 어깨부터 등을 가로질러 허리까지 도달했다. 두서없이 신체에 닿는 손가락 끝에서 가늠되는 골격은 습한 벽지의 곰팡이 같은 감도였다. 얼룩진 것은 그의 웃는 모습이었을까, 아니면 이미 지나쳤기에 미치지 못할 끝의 심해였나. 그런 다른 세계의 방백으로 지키는 서단평의 암묵이 이상해 보였는지 살짝 멀어지는 그림자가 시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아, 하고 마른 입을 열었을 때 미약하게 느껴지는 얼얼함은 그늘진 동공의 틈에서 애매한 광채를 띠었다. 느린 반응속도를 알리듯 천천히 내려가는 손가락이 제 자리를 찾았다. 거리를 벌린 그림자에 시선을 두며 단평은 상념 어린 낯으로 쓴 조소를 지었다. 폐에 가득한 숨이 차가운 주검의 극점을 가졌다. 손에 쥔 추를 내리곤 기울어지는 쪽을 재보았지만 제 온도와 다르게 평형을 유지하는 저울의 감각이 결국 다른 어투를 찾고 있었다. 고심 끝에 내린 결론으로 하여금 중앙을 관통하는 문장엔 왜곡이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내 최선이라 명명하는 꼴이 미완성의 증거가 되는 듯했다.



 " … 지금은 좀 행복하신가 싶어서요. "



 반듯한 활자는 어르듯 물수제비가 된다. 본인이 무섭다는 말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나, 파편이 긁어낸 평판에 대해 서단평은 제 팔을 살짝 눌렀다. 움직임으로 늘어지는 천 자락에 주름이 졌다. 질문에 축약된 의미를 해석하든 겉만 핥고 짧은 문장을 뱉어내든 인내를 요한다면 더 먼 미래까지도 기다릴 수 있지 않을까. 위장을 눌러 토해내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혀를 당기는 자신의 팔이 아니더라도 진솔함의 연장선이 자기주도적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런 생각이 문고리만 당기면 바로 열릴텐데도 타자의 외출을 기다리는 것처럼 닫힌 문 앞을 서성였다. 이내 가하는 무게가 떨어지자 단평은 유연해진 근육으로 하여금 이미 알고 있는 담뱃갑을 품에서 꺼내 담배 한 개비를 손가락으로 들어 보였다. 건조한 제 입이 아닌 공허한 주인의 입에 물려놓곤 이어 투박한 라이터로 끝을 붙이는 것이 누군가를 모방하듯 익숙한 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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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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