放浪 by 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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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측은지심, 감정을 축약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인가. 본디 존재함의 시초인가.



 사랑을 어찌 사랑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단어를 쪼개면 불순물처럼 침천했던 변화들. 인간임에 태생부터 쥐고 있었던 감정과, 사유와 그리고 마음. 그것 전부 획일화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진작에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니 인간이란 존재는 항상 극단에만 몰려있지 않다는걸, 스스로의 세계를 무한히 옮김으로 천성이나 본성이란 언어를 가릴 수 있었던 유일하고 필연적인 이론은 익숙한 이해였다.





1.


 모순은 13살을 기점으로 미래에도 유일할 동반자였다. 입에 머금은 겨울의 한기가 조소로 하여금 위장의 온도를 담았다. 피 하나 섞이지 않아 남이라 취급할 수 있는 냉정함은 사실을 기반으로 했고 설원의 어린 손을 잡아 검이든 활이든 쥐여준 이들의 피를 그 남이라 치부할 수 있는 손에 묻힐 수 있었다는 건 사실도 외면할 수 있었던 가능성을 제 맨발로 무참하게 밟을 수 있는 엇물린 성장이었다. 웃옷을 뒤집어 깠을 때 패인 자국 없이 드러난 매끄러운 배는 피조물의 출처를 지워냈다. 궁핍한 양부모의 죽음이 가엾을 레퍼토리의 첫머리로 장식되기엔 자초함의 방향이 어긋난 시작점이었을 것이다. 그 행동이 의미 없는 이름, 서단평 석 자로부터 비롯된 감정의 도태라 하기엔 사실 그는 여느 인간들 못지않게 제 세계가 확고했다. 쥐어 든 활로 사슴의 심장을 쏘았을 때 느꼈던 것을 동정이라 칭했고 죽어가는 숨을 제 품에 안았을 때 조곤히 읊조릴 수 있었던 단어는 자비라 명했다. 다짐이라면 그 느낌으로 다신 심장을 노리지 않겠다는 것, 주무르고 짓누르고 유희처럼 손에 쥐어내지 않겠다는 것. 그리 서단평은 활을 내려놓았다. 변화의 초석처럼 희멀건 살갗을 뚫고 피를 머금은 채 손안까지 들어온 지네가 단단히 잡힌 제 소유의 검이 되었을 때, 서단평은 단호함을 독기 어린 자비로 짊어졌다. 고통을 오래 붙잡고 늘어지지 않는 것이 아마 그가 명명할 수 있는 첫 번째 사랑이었을 것이다.





2.


 생의 절정으로 치닫는다. 땅을 서식지로 삼았던 미소는 높은 곳의 그들에게 채워진 족쇄와 다른 족쇄를 달고 고독을 원동력으로 삼았다. 이야기의 중심부로 들어가 푸른빛 섞인 흰 천 자락을 두르고 차지한 자리에서 여상히 드러난 맨발엔 흉이 늘어있었다. 언젠가 멱살을 잡아 오며 제 행동의 원천을 묻는 이에게 서단평은 인간의 원초적임을 사랑한다는 말로 비소를 지으며 제 멱을 쥐는 손을 으스러지게 잡아냈다. 다만 문장을 뜯어내면 그것이 어떠한 형태의 사랑인지 서단평은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숨쉬기 버겁게도 격렬히 요동치는 심장이 가슴께를 눌렀을 때 느껴지고 있었는지, 타오르는 불꽃이 생각의 회로 어딘가를 태우고 있었는지, 겨울을 품에 안은 건조한 몸뚱어리는 불사를 수 있는 장작이 되기 좋았지만 그는 항상 폐부 어딘가에 다 녹은 물을 달고 다녔다. 소멸이 아닌 변화로 지상에 아직까지 남아있음을 표하기라도 하듯 그 언어로 의연한 눈을 하는 서단평의 시선 끝에 위치한 얼굴들은 묘하게 구겨져 있었다. 다만 그것을 밀어두는 건 꺾이지 않는 본인이며 오차 없는 계산의 산물이었다. 판단에 궁극이 있다면 한쪽 눈을 가린 것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이분법을 지워내고 손에 든 저울을 평행으로 유지하며 하는 말이 그런 것이었다. 지식은 이성의 한 부분과 유사하다 싶었지만 행동력은 결국 감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걸, 서단평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연스레 합리화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꼬리를 물고 억누르지 못한 충동들은 후퇴할 수 없는 개척의 근본이었다.


 이성과 감정에 걸쳐 쌓인 판단들은 타자의 멸망 앞에서 줄곧 기만자처럼 땅을 기었다. 시퍼런 칼날을 기울면 반사되어 마주하는 시선이 세포를 관통하듯 움직였다. 잉태된 원대한 꿈이나 시대의 흐름을 뒤흔들 이상이나 타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환상에 품은 내면을 표하라고 하면 곧게 뻗는 팔로 패배자의 뺨을 어루만질 뿐이었다. 실패에 내리는 자비는 사랑의 세례일 것이라며 칼을 내리곤 한 걸음 다가가 머리채를 잡아내 제 종언의 대상과 얇은 표피를 맞대는 것은 본능적인 포식자의 호기심이었다고. 서단평의 그런 일방적인 첫 입맞춤은 씁쓸했으며 목구멍 너머로 삼켰을 때 화끈하게 올라오는 분노는 비린 맛을 풍겼다. 틈을 비집고 울컥 치미는 혈액은 본연의 것이 아니었지만 다 일그러진 이빨을 훑었을 때 읽히는 통사는 본인이 품은 듯 입안 가득 채워졌다. 피바람이 부는 잿더미 위에서 조화될 수 없는 숨이 섞이고 나서야 질척한 소리가 그치고 떨어지는 입은 서단평의 세계에 여상히 남았고 가볍게 목구멍을 파고드는 날은 오래 남을 흔적처럼 점멸을 야기했다. 몸의 무게를 버리고 머리만 남아 두 손에 가득 잡을 수 있는 처연한 얼굴이 무슨 표정이었냐는 물음에 서단평은 슬퍼하고 있었음을 답했다. 사색으로 유지하는 침묵에 이어 다시금 열린 입으로 다는 사족은 무감하게 웃음기를 담았다.



 안타까웠어요. 눈물이라도 흘려줄걸.



 그는 혈향 짙은 입가를 닦아냈다. 분해된 문장 속에서 오랫동안 내놓지 않았던 사랑의 정의를 새롭게 내려놓곤 서단평은 그것을 두 번째 사랑이라 새겼다.





3.


 여백 없이 가득한 기억은 전부 애처로움이었다. 남의 하향선은 흥미였고 발단이었으며 거부한다 해도 목덜미를 잡고 끌고 갈만한 역사적인 위인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었다. 무신론을 따라 스스로가 재단하는 미래를 품었지만 그 이상의 반증으로 신인 듯 구는 모습이 역설적이었다. 이후는 굴곡이 없었다. 선의 최상단에 다다랐으니 평이한 모습은 맞이하는 변화 없이 고여있는 호수와 같았다. 서단평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감히 놀리는 입이 절단된다 하더라도 재생하는 도마뱀의 꼬리처럼 날선 낱말들을 담았다. 달리하는 노력이 폭압적인 온화함을 취하고 있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할 것이란 일종의 세계를 담고선 사랑이라 하는 안타까움과 단호함을 타자의 목에 겨눴다. 그렇게 변덕 없이 죽음으로 향하는 내내 숨통을 응시하며 살았어야 할 그였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제 생의 의무와 약속을 가지고 말이다.



 단평아, 어떤 종류의 정이든 뒤까지 찌를 수 있겠지만 꿰뚫리는 건 네 가슴도 마찬가지니까.



 문득 서단평은 눈을 떴다. 흐릿했던 시야가 돌아오고 눈가에 만연한 핏물을 닦아내고서야 현실에 안주하고 있구나 중얼거렸다. 선명한, 그러나 희미하게 지워야 할 유년시절의 구절을 곱씹으며 제 손을 보았다. 안에 들어찬 상처를 훑고는 주먹을 쥐었다. 조용히 비집고 들어오는 날로써 돌아올 수 없게끔 막아버리면 내 가슴은 괴멸된 세포 하나 존재치 않을테니까요, 약함을 주의하되 자만하는 어린 목소리가 낮고 부드러운 지금의 목소리와 겹쳐 들었다. 손가락을 엮어낸 인연은 덧없고 금세 시들어 땅으로 추락하는 붉은 꽃잎과도 같아서. 전장에서 시체를 밟고 살아난 이들이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의 절망들, 관계의 유한함으로 벌어진 균열을 꿰뚫어 보는 동공이 무수한 시간을 지나쳤다. 아마 그것은 누군가들의 심장과 아주 근접해 있을 것이라고, 되새기며 그들 가까이에 보이지 않는 흔적이 되었다. 인도하기 위한 측은함은 기꺼이 정이 되었고 그들의 그림자에 기척 없이 스며들었다. 지혜롭고자 했지만 깨닫고서야 정에 대한 오만함이 어리석음일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마주함을 신영하기 전까지 서단평은 어린 기억을 재차 접어냈다. 영원히 묻어두면 또 다른 자아를 대치할 일이 없으리라 그는 생각했다.





4.


 필요하다 하면 잡아줄 거고? 



  아마도, 그리 생각을 했었다. 익숙한 추위와 함께 검은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렸다. 다시금 눈을 감았다 뜨면 현실이었고 땅 위에 있는 몸은 온전한 형상을 가졌다. 누군가의 망상이 되기엔 썩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남녀의 조합으로 주고받는 담소가 건조한가 싶었으나 서단평은 대화 내내 동요하듯 미미하게 미간을 움직였다. 확연한 농조지만 어울린다면 어울려주겠죠, 대응하듯 무던히 던져진 어조는 기색을 담지 않았지만 이래서 서단평은 농담을 좋아했고 또한 싫어했다. 진심을 굳이 보일 수 있지 않음에 호의를 보였고 서로 가까워지는 심리적 거리감에 적의를 두었다. 누구나 베풀 수 있는 가벼운 친절이 농담을 던지는 이의 어깨에 내려앉았지만 맞닿을 수 있다 라는 말이 상기되지 않을 공백을 두었다. 다만 무색하게도 주었다 돌려받은 외투를 다시 입었을 때 베여있는 남자의 독한 향은 접하는 듯 본래의 향과 섞여 태초의 혼란처럼 어지러이 흩어졌다. 제 유별남과 유사한 향기일까, 새삼스레 고찰해보는 것은 미약하게 느껴지는 몽롱함에 대한 증명이었다. 면식이 있는 얼굴을 가까이 보았을 때 쌓아두었던 선이 애매한 흔적만을 남긴다. 매 아침마다 나와서 잠 깨려는 거 생각하면 자주 들러서 겉옷이라도 걸쳐드려야겠어요, 뱉어내는 가벼운 약속은 호흡의 틈으로 부유했다.



 이러다 발길이라도 끊기면 처량한 신세가 되겠어.



 남자의 웃음 사이로 새어 나오는 것은 분투하는 현실에서 유영하는 듯 매끄럽게 끝맺음 된 문장이었다. 멀쩡한 귀로 환청 아닌 현재의 말을 제 고막에 담아내고선 서단평은 들리지 않을 찰나의 탄식을 뱉었다. 더 이상 추위를 마시지 않으려는 듯 숨을 참았다가 깊게 내쉬었다. 이전의 생각을 번복했었나? 묻어두었던 것이 떠오를 때 비로소 뱉어낸 가벼움이 착오임을 깨달았다. 대화가 끝나고 멀어지는 발걸음에 서단평은 괜히 제 팔에 붉은 자국을 내었다. 영원한 농담으로 이어질 관계겠지, 그리 가까워지더라도 결국 마주 접할 수 없을 것이라 단정 지으며 그는 다시 생각을 묻었다. 무심하게 들먹이는 어깨가 작게 휘청이는 듯했다.





5.


 필연 같은 우연들은 반복된다. 운명의 존재를 부정했음에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은 외면하는 무의식의 본능이었는지, 서단평은 미간을 작게 눌렀다. 동충하초를 몇 번 씹었던 덕분인지 중독성은 얼추 빠진 것 같았지만 처음의 기억과 유사한 배경, 유사한 시나리오로 짜인 대본처럼 자연스레 또 다시 남자의 옆에 자리 잡았다. 읽어냄이라면 진작 파악하고 있던 공허한 유년, 누군가들과 유사한 하향선으로부터 달아나 붉은 천을 품에 안은 남자의 비늘 같은 이면을 보았음에 행동은 온전히 서단평 본인의 선택이었으나. 오늘도 봤네, 정말 매일 들러주는 건가? 와 유사한 문장들에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함으로 은은하게 깔리는 곤란함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처럼 발가락 끝에 맴돌았다. 구별이 있었다. 진전될수록 흘러가는 물처럼 나른하게 제 뺨을 적시고 지나가는 말들이 너무 덤덤해서, 서단평은 제 세계를 뒤졌으나 그것을 없는 것이라 칭했다. 베풀었던 제 기묘한 정으로 인해 가시를 세웠던 이들과는 달랐음에 서단평은 기어이 비소가 아닌 지적 감정에 파묻힌 낯을 했다.


 실없음으로 꾸리는 대화가 퍽 영양가가 없어 보였어도 말려 들어가는 것은 제 의지와 상관이 없는 일이라 했으나 익숙한 얼굴을 떠나보낸 후 서단평은 거듭 그 생각을 상기했다. 축축한 피부를 어루만지는 듯한 감각이 제 특이와 유사한, 그러나 다른 곳에 있는 해양의 환상종을 일컫는 것만 같았다. 책이 덮이곤 배제된 오만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잊힌다. 아마 되돌아오더라도 그것에 대해 재차 헤아려야 할 것이었다. 앎의 근본이 될 힘은 기묘할 욕의와 무너지지 않을 예정된 증명과 함께 샛길을 내었다. 불확실함에 이끌리는 듯 서단평은 제 주먹을 펴내곤 흉터를 보았다. 묻어두었고 묻어두려고 했던 것을 파헤쳐놓고 서단평은 정점에서 새로이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또 다른 변화의 과정을 거친다. 이성으로 잡아 세울 기회는 틈마다 있었어도 추구하는 바에 따라 서단평은 멈추지 않았다. 정점에서 또 다른 정점으로 옮겨가든, 끝없이 내려가든 건재하게 나는 남아있을 테니까. 혹시나 마주하더라도 …. 서늘한 공기가 제 속눈썹을 스치고 나서야 서단평은 눈을 감았다.



 그런게 싫었다면 미안하고. 잡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귓전에 맴도는 목소리의 기억으로 호흡을 삼켰다. 의지하기 싫다면서도 잡힐 나중을 기약했었던가, 회고하는 대화가 낯설게 느껴졌다.





6.


 그렇다고 달라진 부분이라고 하면 딱히 두드러지는 게 없는 것 같았다. 사이의 변화보단 서단평 본인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곤 사색에 잠겨있는 밤이 좀 더 많아졌다. 여유라면 얼굴을 좀 더 비출 정도로, 성급함이라면 밤 산책을 빼놓을 정도로 홀로 있는 시간을 할애해 동반으로 하여금 발을 맞추었다. 어쩌다 성치 않은 몸일지라도 꾸준함은 여상하게 세계를 새로 채워 넣었다. 태생이 무색하리만큼 익숙하지 않은 공백이 생기면 그저 춥다는 독백으로 서단평은 핏기 돌지 않는 제 맨발을 감쌌다. 똑같은 테라스에서 똑같은 수통을 손에 들고 똑같은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것도 새삼 볼 수 없다면 아쉽겠다는 헤아림은 답지 않게 쓸쓸한 공기를 머금었다.



 우리가 다시 볼 수 있을까?



 답을 했어야만 했다면 나는 뭐라고 답했을까. 아직도 남은 손등의 작은 화상이 물음에 대한 대답보다 다른 질문의 반복이었음에 안 좋은 결과처럼 아른거렸다. 기약으로 미룸은 쉬웠지만 미룬 뒤에 끝을 보이는 것이 애매했다. 입이 씁쓸했다. 내심 입장이해랍시고 유독하고 유해한 것에 손을 뻗어낸 결과로 간헐적인 쓴맛은 생각할 때마다 목구멍을 타고 흘러넘쳤다. 죽을 만큼 독했다고 하기엔 문드러진 폐도, 다 타서 바스러지는 목도 없이 멀쩡한 몸으로 사유하고 있었지만, 그 사유함의 틈으로 침묵하고 있는 점은 무언가의 죽음이라 서단평은 떠올렸다. 확립할 수 없는 말이 제 세계에 있던 기존의 무언가가 무너졌음을 밝히는 것 같았다. 서단평은 제 자리를 더듬었다. 움직이기 이전보다 더 내려왔는가 아니면 더 올라섰는가, 가늠할 수 없었다. 단지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이 본인이었다. 추상적인 상징물이 아닌 실재하는 자신을 보며 유년시절 제게 충고로 남겨진 말이 정론이었는가에 대해 고찰했다. 나는 침체되었는가? 서단평은 눈을 감았다 떴다. 부정하는 기색을 가지는 듯했다가 발화점에 대한 스스로의 물음엔 더 이상 감지 못하는 시선이 흐릿한 초점으로 파랗게 일렁였다.



 … 오래 두고 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잖아요.



 혼자 읊조리는 것으로 깨닫는 태생의 고독이 목을 단단히 쥐었다. 아마 남자에게 준 공평한 사랑도 어느 연측함이나 긍휼에 목자를 두고 있었겠지만…. 길어지는 숨의 간극에 서단평은 마른 손으로 제 심장께를 눌렀다. 저릿한 통증보단 바람이 통하는 듯 감각의 공간엔 공허함만 남은 듯했다. 서단평은 답을 찾는다. 마른 입에 묻은 타액이 붉게 번들거리며 몇 번을 열렸다 다물리기를 반복하다 이내 허탈하게 웃어낸다. 되새긴 말의 긴긴 침묵을 지키다 이내 묵음으로 움직이는 입은 짧은 문장을 뱉었다. 다만 서단평은 그것을 재차 소리내어 읽지 않았다. 갈곳 잃었던 눈을 감아냈다. 단단해지는 형태가 새로운 단어를 담길 바라고 있는 것만 같았다고, 서단평은 흉터어린 손을 펴 제 가슴을 가려냈다.





7.


 … 정은 살아남는 거에 있어서 불필요한 요소지. 사람은 한낱 정 같은 거에 마음이 가버리면 선택을 못 하거든.



 목전을 앞두고 들었던 그 말은 아마 제 어린 기억과 굉장히 유사한 뜻을 내포하고 있었음이 맞았을 것이다. 추측하는 해석의 기점은 첫 정점의 서단평이었고 뒤집힌 개념의 위치는 현재의 서단평이었다. 양날의 검이며, 한없이 약하게 만들고, 한없이 무르게 만드는. 그런 수식어로부터 다른 동향을 이끌어내는 것은 불가능을 가능케 할 것이란 포부의 유지였으나 거리를 두던 것의 수용은 세계를 바꿀 변혁적인 무언가였다. 살아남아야 했고 앞으로도 살아감에 있어서 눈물을 삼키던 전장의 이들을 떠올렸다. 심장 가까이에서 고통을 느끼며 한계점에 도달하면 터져 힘없이 늘어질 살점의 조각들은 익숙한 향기를 담았다. 그리하여 목에 팔을 두르고 어긋난 감정의 방향을 추구함에 있어서 무너지지 않음을 확고히 담았으나 편협한 시선을 옮기고 나서야 궁리하여 알게 되는 점들이 많았다. 겨울바람이 싸늘했다. 작게 흩날리는 검은 머리칼이 달빛을 받아 미미하게 반짝였다. 시작점이 결국 상기하는 남자의 말과 유사했으나 사색 끝에 다르게 걸어버린 이 방향에서 서단평은 제 발끝에 불씨가 오른다고 느꼈다. 이미 부정당한 이론들이 무수했다. 지식의 탑에서 새로이 채워진 빳빳한 종이들을 보며 낡아버린 책들을 전부 찢고 나서야 서단평은 펜대를 다시 들었다.





8.


 … … 평소보다 좀 늦으셨어요. 한 3분 정도?



  익숙한 인기척보단 익숙한 향기가 우선이었던 것처럼 살짝 구겨지는 미간은 생리적인 저항감이었으나 이내 풀리는 표정은 뒤돌아서 보이는 존재에 대해 반가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철회되는 기억들은 원점으로 돌아가 지금의 기억으로 회귀된다. 과거의 비릿함은 깨끗하게 씻겨져 나간 듯 단맛만을 남겼다. 맨발로 밟는 대리석마다 녹아내린 물처럼 사색이 만연했다. 전부 흘리고 나서야 물기가 다 빠져 건조한 다리는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풍경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서단평은 조금 더 옆으로 옮겨가 자리를 꿰차곤 흩날리는 머리카락들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상기하는 남자의 모습처럼 따라 기대는 것이 영 어색했으나 서단평은 굳이 의식하기보단 그것조차 제 방식으로 흡수하듯 자세를 잡고 제 시야에 들어오는 남자에게 눈길을 고정했다. 약속시간보다 더 일찍 나온 사람의 자격마냥 맨살과 맞닿는 바닥의 소음이 찰박거렸다. 밤공기에 흩어지는 입김은 취할 듯 유독한 향을 품지 않았지만 온전함의 유지를 표하듯 이전에 짓씹던 소형 버섯류의 냄새를 풍겼다.



 오자마자 이런 소리 해서 미안한데 결국 살아남았으니 이전의 언사는 조금 틀린 걸로 할까요? 당신은 모르겠지만, 난 정에 꽤 후했던 것 같아서 말이에요.



 흘리는 웃음이 평소보다 차분한 기색을 보였다. 가라앉은 듯 바닥에 낭자한 불순물처럼 제 체구보다 품이 큰 옷을 움직이며 서단평은 손등 위로 턱을 살짝 괴보였다. 원체 아끼지 않던 글자들을 넣어두곤 잔잔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른한 낯으로 자연스레 제 가슴 위로 올려진 손을 살짝 까딱였다. 발끝부터 머리까지 말라가는 피부에서 불씨 하나 닿으면 좋은 장작이 될 것처럼 버석거리는 소음이 났다. 후했다고 말했지만 연결됨의 유일함은 입에 담지 않은 채 서단평은 불가항력적인 새 변화로부터 마주하게 된 이를 눈에 담았다. 단평은 사고한다. 단호해지기엔 위인이란 명목으로 저보다 위로 올리기 싫었고 측은하게 보기엔 거친 입맞춤이나 따뜻한 포옹보단 그저 이전의 말을 떠올리며 손을 잡고 싶었다고, 날카로운 눈은 짐짓 느릿하게 움직임을 가지다 이내 선명한 시야를 가진다. 서단평은 남자에게 한 걸음 다가가 제 외투를 둘렀다. 처음의 기억처럼 미묘하게 섞여 들어가는 내음에 작은 미소를 짓다 이내 남자의 손을 잡아냈다. 줄곧 어긋난 거리감을 맞추려 왼쪽 눈꺼풀을 내리곤 가벼운 입맞춤을 그의 손등에 남겼다.



 늦은 고마움, 일 거예요. 탈피는 무지함에서 벗어난 새로운 지식의 과정이라고 표현해도 될까 모르겠어요.



 떨어진 감각 다음으로 서단평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가리고 있던 제 손을 내리고 도려내진 듯 빈 가슴의 모습이 세계의 단면을 보여냈지만 공허함에도 불구하고 손을 뻗으면 잡히는 것을 남겼다. 모순되는 형태는 단단했어도 텅 빈 것처럼 내포된 의미는 없었다. 어떤 단어를 말해도 이전의 수식어 없이 감정의 극단으로 치우쳐 순수하고 찬란하게 빛날 것만 내놓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것을 서단평은 종국엔 정의하지 않았다. 세 번째로 들어차는 단어를 버려내곤 완성된 제 세계에서 기꺼이 추상적인 이론들을 태워냈다. 아마 그게 당신 덕분에 내가 새로 확립할 수 있었던 사고관일 거라고. 동시에 내는 웃음소리가 온화한 기믹을 품었다. 부드러운 낯으로 남자를 마주하는 서단평의 눈이 파랗게 일렁였다. 기껍게 받아들이는 마주함에 경계는 없었다. 이미 다 지워진 선을 넘어가 어깨를 두들겨 보이곤 그것을 원동력으로 서단평은 은은하게 눈을 접어 보일 뿐이었다.



 석대 씨 같은 사람을 만나서 다행이에요. 굳이 뭐라 칭하진 않겠지만, 난 지금을 특별히 여기고 있다는 게 확실한 것 같아서.



 언젠가 재차 소리내지 않았던 문장의 암묵에서 미미한 진동이 흘렀다. 귀를 거쳐가 청아하게 퍼지는 음색이 남자와 유사한 흐름을 가졌다. 그러니 항상 다시 볼 수 있다는 걸 나나 다른 이들에게 기약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런 덤덤한 문장으로 하여금 깊숙한 곳부터 창궐하는 꽃잎들은 전부 서단평 본인의 가슴에서 흘러 떨어졌다. 진정성 있는 추락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쉼표, 그리고 글자. 서단평은 한 걸음 더 다가가 짧은 호흡을 머금곤 남자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을 정말로 … 좋아하고, 사랑했어요.



 이어 떨어진 두발자국의 거리엔 끝겨울 경계에 선 미약한 봄의 향기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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