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혼혈 영애의 49번째 회귀

4화. 발데마인, 혹은 로나르힘 (1)

리엔세라 : 4-1화

“오늘은 발데마인으로 가서 기도를 드릴래.”

“...네. 알겠습니다, 성녀님.”

기분 좋은 주일이었다. 하늘에 구름이 희게 깔려 사방이 밝았다. 흐렸지만 사람들의 표정이 더 잘 보이는 것 같아 기분은 좋았다.

세라엘은 자기 말에 수녀의 귀찮아하는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표정을 숨기면 뭐 해, 태도에서 드러나는데. 속으로 그런 그녀를 비웃으며 제 침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시중드는 또 다른 수녀가 황급히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일등 수행원인 소냐였다.

언제나 앞을 터주고 뒷머리를 가려주던 흰 베일이 앞으로 내려왔다. 시야가 희고 투명한 천으로 차단됐으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세라엘은 귀찮은 걸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묵묵히 옷시중을 받았다. 대충 지은 것 같은 성녀의 원피스가 나름 번듯하고 잘 다려진 의복으로 바뀌어 입혀졌다.

밖에서까지 천대받는 사생아에 환영받지 못하는 성녀인 것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세라엘은 은색 비단에 금색 자수로 화려한 문양이 수놓아져 있는 제 옷을 거울 속으로 구경했다. 그 모습이 참 성녀다웠다. 만족스러웠다.

순회기도 중에는 성녀의 얼굴을 함부로 보아선 안 된다. 신의 자녀로서 군중 앞에 나서는 것이기 때문에 얼굴을 마주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신도들이 저도 모르게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해 성녀는 순백의 베일을 뒤집어썼다. 준비를 마친 성녀가 거울 앞에서 나왔다.

“...성녀님. 학교에 가시는 이유는... 혹시, 곧 입학하실 학교이니 구경하러 가시는 건가요?”

“응. 나는 역대 성녀들과는 다르게 수녀회가 아닌 학교에서 공부를 할 몸이니, 내가 적을 두게 될 곳 정도는 봐두고 싶어서.”

“네, 알겠어요. 그리 알리도록 할게요.”

사실은 학교 구경 따위 핑계였다. 세라엘은 발데마인에 가서 확인할 것이 있었다.

황립 발데마인 마법학교 고등부에 소문의 인물 두 명이 입학했다.

한 명은 라흐벤시아의 황손녀 코니엘.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이종족의 외모를 가진 공작가의 영애, 리엔시에였다.

물론 세라엘의 목적은 리엔시에 단 한 명이었다. 그녀가 발데마인에 가는 이유는 바로 그녀를 보기 위해서였다. 어린 시절, 허름한 오두막에서의 첫만남이 눈 앞에 그려졌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세라엘은 단장한 차림으로 창가에 다가갔다. 바깥세상은 짙게 희었다. 정확히는 흐린 날씨였지만 구름이 하얘서 밝았다.

“입학식 때 학생들의 안위를 기원하는 기도나 드릴까.”

“......”

“왜?”

“아니요. ...평소의 성녀님과는 다른 의젓하신 말씀을 하셔서… 소냐는 조금 감동했어요.”

소냐가 그리 말하며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세라엘은 피식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창가에서 떨어져 다시 문으로 향했다.

“나가자. 다들 기다리겠다.”

“네, 성녀님.”

*

바람이 좋은 정오였다. 세라엘은 발데마인 마법 학교 내부를 돌아보았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로 가득했다. 오늘은 마침 한 해에 두 번 있는 정기 예배가 있는 날이었다.

가끔씩 호기심에 찬 시선으로 제 쪽을 돌아보다 옆에 있는 친구에게 한 대 맞고는 화급히 시선을 돌리는 아이들이 보였다. 성녀는 베일 아래로 슬쩍 미소 지었다. 그녀는 경탄과 호기심에 찬 시선을 뒤로 하고 투르지엔 홀 안으로 들어갔다.

교회당 안에는 벌써 학생들이 도열해 있었다. 저 멀리 가운데에 위치한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 앞, 단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세라엘은 소냐의 도움을 받아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수많은 시선이 느껴졌다. 그 중에는 너도 있을 것이다. 이윽고 단상에 이른 소녀는 제 뒤를 보인 채 올라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자 이어서 학생들이 의자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성탑(聖塔)의 꼭대기에 매달린 종이 일곱 번 울렸다. 식전 예배가 시작되었다. 신관이 성경을 나직하게 읊는 소리와 성녀의 기도 소리가 교회당 내부를 맴돌다 문밖으로 새어 나갔다.

모두 숨을 죽이고 성녀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상황. 세라엘은 어디선가 부드러운 라일락 향기가 풍겨오는 것을 느꼈다. 뒤를 돌고 싶었지만 아직 뒤를 돌아선 안되었다.

제일 앞자리 어딘가에, 네가 있었다.

“───내가 주신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성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성경 말씀을 읊은 후, 성녀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교회 내부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성녀의 기도가 끝나고 이제는 학생 개개인에게 축복을 내려줄 시간이다. 세라엘은 뒤를 돌아 학생들이 차례로 다가오는 것을 베일 너머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베일 너머로 제가 찾는 손님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한 명, 두 명. 학생들이 축복을 받고 지나쳐간다. 세라엘은 기다렸다. 몇 명의 학생들이 저를 지나쳤을까. 네가 나에게 다가왔다.

알 수 있었다. 너에게선 그날도 잘 말린 라일락의 짙은 향기가 났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너인 걸 알았다.

네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갑자기 숨이 멎었다. 멎을 것 같았다. 투명한 흰 베일 너머로 네 분홍빛 눈동자가 선명하게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나는 축복을 내리기 위해 네 머리에 손을 얹어야 하는 것도 잊을 뻔하였다. 귀선유전의 눈동자는 사람을 홀린다지. 어디선가 신관이 흉을 보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얼마 전, 신전에 몰래 들어왔던 리엔시에를 경멸하며 하는 소리였다. 그날 세라엘은 그 신관의 신복에 불을 질렀다. 그는 복장 간수를 제대로 하지 못한 벌로 다음날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다. 멍청한 것들. 귀선유전이 다 뭐라고.

세라엘은 처음에 제가 했던 생각도 기억하지 못하고 실컷 신관을 욕했다. 이 순간은. 이 순간만큼은 리엔시에만이 자신의 신도였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리엔시에만의 성녀였다. 그 엷은 분홍빛 눈동자에 하염없이 빠져들어 말없이 가만히 있자 리엔시에가 고개를 바로 하며 갸웃했다.

“...아.”

“?”

“...신의 축복이 당신을 빛내길.”

“감사합니다.”

무릎을 꿇은 리엔시에가 저를 올려다보며 눈을 곱게 휘어 웃었다. 세라엘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는 시선을 내렸다. ...베일을 쓰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면사포 아래로 표정을 숨긴 세라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리엔시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움직이자 말린 라일락의 향기가 짙게 풍겼다. 세라엘은 저도 모르게 일어난 리엔시에의 향방을 눈으로 좇았다.

...저, 성녀님...? 다음 축복을 받을 학생이 자신에게 말을 걸 때까지 세라엘은 멍하니, 리엔시에가 나간 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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