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혼혈 영애의 49번째 회귀

막간. 죄를 지은 성녀

리엔세라 : 단편

최초로 기억하는 순간은 그 모습이다.

리엔시에는 항상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레이토 공저의 안에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들어차지 않고 그저 탁한 분홍빛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제가 이름을 부르면 반응이 있긴 했었다.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저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얼굴에 아무 표정도 띄워져 있지 않았다. 레니발렌은 그것이 무척 속상했다. 누나는 항상 무언가가 텅 빈 사람처럼 굴었다.

영혼이 없다는 악담이 아니다. 정말로 그녀 내면의 뭔가를 분실한 느낌이었다. 저를 보고 있었지만 시선만 향해있었을 뿐, 머릿속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느낌.

“리엔시에. 오늘은 이 책을 읽어줘.”

“...그래.”

“...”

책을 읽어 달라고 다가가면 거부하는 기색 없이 읽어주며 누나다운 모습을 보여주긴 했다. 하지만 그뿐으로 애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레니발렌은 그것이 못내 서운했다.

누나는 제가 보기에 완벽한 존재였다. 유레이토 공작 가문의 장녀이자 후계자. 마법 실력도 출중해 장래가 기대된다는 말까지 들은 인재였다.

물론 그녀는 귀선유전으로 태어났다. 저처럼 흑발과 붉은 눈을 물려받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엄청난 수재였다. 부모님도 이종족의 외모를 가지고 태어난 리엔시에를 냉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능한 그녀를 아낌없이 지원해주셨다. 그런데도 뭐가 부족해서 제 누나는 저리 텅 빈 표정을 짓는 걸까?

“...최초의 성녀는 한 나라를 구원한 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위대한 권능─마법을 행사하여 많은 이들을 성전에서 구해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이후, 몇몇 신성 제국인들이 성녀이면서 살육의 죄업을 저지른 그녀를 두고 마녀로 몰아갔고, 끝내 성녀는 처형당한다. 뭇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희생한 최초의 성녀의 이름은 ......이었다.”

“옛 제국인들은 왜 자신들을 구한 성녀를 마녀로 몰아갔을까?”

“글쎄... 전쟁이 끝난 후에 성녀가 취할 이득과 명성을 시기했던 게 아닐까.”

“어째서? 최초의 성녀는 성전에서 많은 사람들을 구하고 적을 물리쳤으니 그 대가를 받아 마땅한 거잖아.”

아이의 작은 입이 쉴 새 없이 말을 뱉어냈다. 리엔시에는 무감정한 표정으로 그런 동생을 내려다봤다.

“성녀는 모름지기 위대하고 고결한 존재라고 배웠어. 로나르힘의 상징이고 이 나라를 수호해주시는 분 아니야? 신성 제국은 라흐벤시아처럼 로나르힘을 국교로 삼은 나라였으면서 왜 성녀를 배척했던 거지?”

“렌. 나도 잘 모르겠어.”

리엔시에는 성의 없이 대답하며 책을 덮었다. 어디가, 리엔시에?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레니발렌은 누나의 무시가 익숙한 듯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종종 따라갔다. 리엔시에가 향한 곳은 공저 내에 존재하는 작은 예배당이었다.

신전의 형태를 본떠서 만든 장소는 공작저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종교적으로 사용되는 곳이기도 했다. 리엔시에는 주로 그곳에 있었다.

자신이 마음 편히 있을 곳은 그곳뿐이라는 것처럼, 그렇게 하루 종일 교회에 있는 최초의 성녀─시에레인의 상을 마주하고 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

볕이 좋은 오후였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한 색색의 빛이 교회 내부에 들어찼다. 반짝이는 빛으로 가득한 공간은 마치 이곳이 천국인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했다. 천국의 풍경 가운데 리엔시에는 의자에 앉아있었다.

여러 색으로 산화할 것 같은 빛 가운데, 그녀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곧 사라질 것 같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누나가 곧 천국으로 가버릴지도 모르겠다고 레니발렌은 저도 모르게 생각하며 리엔시에에게 다가갔다.

“리엔시에. 뭘 보고 있었어?”

“...그냥.”

“리엔시에는 밖에서 안 놀아?”

“나는 친구가 없잖아.”

“나랑 놀자.”

“너는 너무 어려.”

“너보다 3살밖에 안 어려.”

“...”

그 말을 끝으로 리엔시에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레니발렌은 익숙한 침묵에 기대어 누나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갔다. 그곳에는 성녀상이 있었다. 몇 번째 성녀인지도 모를 그냥 성녀상.

공작저의 예배당 안에는 성녀상 하나가 우뚝 서 있었는데, 리엔시에는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조형물이었다. 그저 성녀라는 상징을 조각으로 빚어낸 장식품. 리엔시에는 저것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신에게 기도라도 드리고 있을까? 레니발렌은 습관적으로 누나의 표정을 살폈다.

──제 생각이 맞기라도 한 걸까. 리엔시에는 눈을 감고 있었다. 어린 소년은 기도하는 누나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자리에서 조심히 일어났다. 그리고 뒷걸음으로 천천히 교회 출입구로 향했다.

산화하는 빛 가운데서 성녀상을 바라보며 기도를 드리는 리엔시에의 모습은 무척 아름다웠다. 마치 어느 고전 명화의 한 장면 같았다. 레니발렌은 그 성스러운 분위기에 압도되는 감각을 느꼈다. 누나는 제가 성녀인 것처럼 고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건 무척이나 눈물이 나는 광경이었다. 신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 아니라 마치 제가 성녀라도 된 것처럼. 레니발렌은 불경한 생각을 머리에서 지우며 서둘러서 교회를 빠져나왔다.

*

리엔시에는 그저 무자비한 신께 기도했다.

못난 나를 사랑해주는 이를 찾을 수 있기를. 그저 사람으로 봐주는 이를 만날 수 있기를. 나를 온전히 바칠 수 있는 연인을 만나길. 괴물이 아닌 사람으로서 사랑할 수 있는 존재와 마주치기를.

최초의 성녀였던 영혼은 또다시 죄업을 저지르고 있었다. 리엔시에는 사랑을 표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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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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