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스팁버키

연성 by 꽉꽉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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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ㅇ-니!"

"안-"

.

.

.

"왕자님."

덜컹-

까,깜짝이야.. 스티브는 자신의 귀, 바로 옆에서 들리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움찔한다. 그 덕에 그의 무릎은 책상에 박아, 그의 입에선 아..! 하며 살짝 앓는 소리가 났다.

"무슨 생각 하시길래, 그렇게 불러도 안 깨세요."

스티브는 살짝 머쓱한지 하하, 웃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하루하루가 따뜻한 날씨인 이곳. 그는 이 나라 왕실의 둘째 아들이다. 첫째가 아니기에 왕위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지식을 위해 공부는 필요했다. 하지만 선선히 부는 바람과 따스한 햇살은 그를 졸게 하기에 충분했다. 분명 무슨 꿈을 꿨던 것 같은데. 사람들이 시끌벅적 했단 말이지..

"음- 아무래도 오늘은 수업은 그만해야 할 거 같네요."

그의 선생은 자신의 책을 가방에 주섬주섬 넣었다. 어차피 스티브도 수업에 집중 할 정신은 아니었으니, 일찍이 수업을 마친 거였다. 그러던 그는 멈칫하고는 스티브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혹시 오늘 뭐 하실 예정이세요?"

"음, 글쎄요. 딱히 예정된 거는.."

"그러면 오늘은 날도 좋은데, 밖에 나가보세요. 최근엔 계속 궁 내에만 계셨잖아요. 가끔 바깥 공기도 쐐야죠."

그런 그의 추천에 스티브는 '네, 고마워요.'라며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마침 할 일도 없는데, 시장이나 오랜만에 놀러 가볼까.


시끌벅적한 분위기. 자유로운 분위기. 이런 분위기는 그의 마음을 한 번 환기해 주기 충분했다. 형식대로, 억압받고. 그런 공간에서 벗어난 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양쪽에서 들려오는 활기찬 사람들의 말소리와 먹거리 냄새들. 물론 왕실의 요리를 넘을 사람은 없지만, 가끔 길거리 음식들은 그를 끌어당기곤 했다.

그는 좌우를 둘러보며 밝은 얼굴로 앞을 향했다. 가까이서, 자세히 보면 다른 사람들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재질의 옷. 확실히 귀티가 흐르는 옷이었다. 하지만 얼핏 보면 그냥 좋은 재질인가 봐, 하고 지나갈 수 있는 옷이었다. 그가 밖으로 신분을 숨겨서 나올 때마다 입는 옷이다.

그는 신분을 숨기는 데에 아주 철저했다. 아무래도 원래 신분, 귀족 신분으로 나오면 구경하는 게 참 피곤했으니까. 여기저기서 날 알아보아 아첨을 하려고 하고, 아양을 떨려 하니. 아무도 날 불편하게 대하지 않는 이런 곳이, 그는 너무나도 좋았다.

다만, 너무 편하게 대해서 그렇지.. 그가 좁은 골목을 지나가던 때, 갑자기 오른쪽에서 느껴오는 힘에 밀렸다. 그리고 이만 골목 안으로 넘어져 버렸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그의 오른쪽은 이미 여러 사람으로 골목의 입구가 막혀있었다. 나이는 그와 또래 쯤으로, 그를 민 이유는 아마..

"야, 맞지? 얘 돈 많다니까."

"옷 봐봐. 확실히 잘 사는 애야."

" 아, 알겠어. 조용 좀 해봐."

역시, 돈이다. 이곳에 오면 이런 양아치들에게 위협을 받을 건 감수해야지. 하지만 지금까지 이렇게 삥 뜯긴 적은 없었는데.. 그는 이런 참신한 경험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앞에서 형들에게 돈 좀 달라, 잘 사는 아드님인가 보다, 하는 비꼬는 말에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는 빠르게 눈을 굴리며 골목 안을 둘러보았다. 아, 찾았다.

그는 자신의 왼쪽 밑, 구석에 떨어진 목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곤 누군가 채 막기도 전에 빠르게 주웠다. 아마 이 마을 아이들이 가지고 놀다가 버린 목검일 것이다. 그렇기에 튼튼하지도, 날카롭지도 않았다. 거의 장난감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괜찮았다. 그는 왕실 기사단에서도 인정 받은 실력을 갖췄으니. 그 후, 그는 목검을 들어 올려 자세를 잡았다.

"야, 쟤 뭐하니?"

"풉, 푸핫! 애, 칼 좀 만져봤나 봐? 그거 위험한데~"

앞에 떠드는 셋, 그리고 뒤에는 최소 넷? 많기도 해라. 하지만 괜찮다. 멍청한 녀석들 덕분에 좁은 골목 안이니, 혼자가 더 유리하니까. 애초에 훈련 받지 않은 민간인 10명 이하는 혼자서도 처리가 가능했다.

다만, 문제라 하면은.. 이목을 끌고 싶진 않았는데. 이렇게 나오는 것도 선생을 제외한 모두에게 몰래 나오는 것이었으니, 이걸 들키면 나의 자유는 없다. 그래서 최대한 조용히, 빠르게 구경하고 돌아가는 게 중요하다. 여기서 내가 싸우면은 시간도 많이 지체 될 거야. 중상 말고, 단순히 제압하는 것이니 더 오래 걸릴 수도 있어.

그가 혼자 중얼거리는 사이, 그들은 그가 방심한 틈을 타 그에게 달려들었다. 아차. 그는 급하게 칼로 막기 위해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그때,

퍽-!

"아, 씹..! 어떤 새끼야!"

그가 뒤늦게 반격하려던 때, 갑자기 달려오던 그들은 일제히 뒤를 돌아봤다. 그 중 한명은 자신의 뒤통수를 부여 잡으며 뒤를 돌았다. 뒤에 누군가가 서 있나 본데.. 가려져서 안 보이는데..?

"야, 너희 뭐야."

"허, 넌 뭐야? 갈 길 가."

"여기 내 구역인데. 너네나 물 흐리지 말고 나가."

"뭔..ㅋㅎ 네 구역, 내 구역이 나누어져 있냐?"

그들은 한 남성과 대치를 했다. 누구 하나 밀리지 않는 상황이었다.

"..야. 너네, 나 몰라?"

아까와는 다른, 더 낮게 깔린 목소리. 감정 하나 못 느껴지는 차가운 눈빛. 마치, 지금 당장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그의 눈을 마주치게 된다면, 누구나 흠칫할 만 했다. 그리고 멍청한 그들은, 그제야 그가 누군지 생각해 냈다.

"..ㅇ,아. 미,미안.. 그, 진,짜 미안.. 몰랐어, 정말로.."

아까 나대던 그 기세는 어디 갔는지, 그들은 일제히 꼬리 내리기 시작했다. 파들거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눈을 내리 깔았다.

"사과는 됐고. 좀, 나가라고."

그의 자비에 그들은 황급히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사라진 골목에는 스티브와 그를 도운 영문 모를 남자가 서로를 마주 보며 있었다. 그리고 스티브는 그의 얼굴을 그제야 볼 수 있었다. 둥근 눈매에, 살짝 올라간 입꼬리로 볼 수 있는 꽤 장난기 넘치는 얼굴. 여자 여럿 꼬셨을 만한 외모까지.. 앞에 그들이 했던 행동으로 인해, 그가 생각했던 얼굴과는 매우 딴판이었다. 그리고 오른손에는 칼집 안에 들어간 칼. 이 칼집으로, 아까 한 명의 머리를 내려 친 건가?

"괜찮아? 어디 맞은 거 같진 않은데."

아까 들었던 목소리와는 다른 목소리. 경계심과 날카로움으로 가득 찼던 것이 아까의 목소리라면, 지금은 적당한 중저음에 배려심 넘치는 목소리였다. 아, 괜찮아. 고마워. 스티브는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었다. 먼지가 좀 묻긴 했지만. 뭐, 이건 털면 되고. 그는 기껏 주운 낡은 목검을 다시 땅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러게, 귀족 나으리가 여긴 왜 와서."

"그냥 구경이ㄴ.. 어, 잠시만. 귀족?"

그는 그렇게 말하며 골목 밖으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스티브는 놓치지 않고 그의 뒤를 쫓았다. 그리곤 그의 옆에 서서 그와 함께 거리를 거닐었다. 귀족이라니. 그걸 왜, 어떻게 알..아챈거지..?

"엉. 너 귀족 아냐?"

"아니, 그, 맞..긴한데.. 숨긴건데.. 티 나? 왜 안 거야?"

"일단 그 옷, 웬만큼 부잣집 아니면 못 사는 재질이던데? 스쳐 지나가면서 보면 그냥 좋은 재질로만 알겠다."

스티브는 자신이 왕족이라는 사실을 밝혀진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고, 그가 귀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아까 그 양아치들처럼, 적당히 잘사는 집안의 사람이라고만 생각하면 좋다고 생각했으니.

"그리고 아까 칼 잡는 방식 있잖아. 그거 배운 사람들만 잡을 수 있는 거야. 그중에서도 특별한. 예를 들면.. 왕실 기사단?"

그걸 대체 왜 아는 거지.

"애초에 내가 여기 사람들은 빠삭해. 근데 넌 처음 보잖아. 그니까 일단 평범하게 여기 사는 애는 아니라고 생각했지."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을 이만큼이나 파악하다니.. 자연스럽게 스티브와 함께 길을 걷던 그는 갑자기 우뚝 서더니,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스티브를 바라봤다.

"..지금이라도 경어체 써야하냐? ..요?"

대화를 나눌 수록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그에 스티브는 픽, 웃었다. 어차피 신분을 숨기고 싶었으니, 괜찮다고 스티브는 대답했다.

"아, 맞다. 아까 도와줘서 고마워. 난 스티브야."

"난 버키. 아까 말했듯이 그 자식들이 내 구역에서 물 흐리는 게 싫어서 도와줬을 뿐이야."

자기 구역이라니.. 아까 칼 잡는 것도 잘 아는 거 보니, 꽤 싸울 줄 아는 애인가? 그러고 보니 날 모르냐고 물었었지? 이 근방에서 꽤 유명한 애인가 보네. 스티브는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버키, 나 이제 가봐야 할 거 같아."

"그래? ..스티브, 너 여기 종종 나올 거야?"

"음, 아마. 시간이 되면 나올 거 같아."

스티브의 대답에 버키는 잠시 고민하더니 허리를 뒤로 돌렸다. 그리곤 한 집을 가리켰다.

"저기, 내 집이야. 나중에 나오면 저기로 찾아와. 내가 이곳저곳 소개해 줄게."

"그러면 고맙지."

그리고, 여기 근방 애들에게 경고도 해야지. 널 건드리지 말라고.

그 후, 스티브는 시간이 날 때마다 몰래 이곳으로 향했다. 어느덧 그들에겐 스티브가 버키의 집 문을 두드리면, 같이 나와 이곳저곳을 구경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크게 특별한 일을 하는 건 아니다. 그저 같이 길을 걸으며, 수다를 떠는 것이 다인 일정. 어느새 그들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은.

"버키, 넌 나의 집안에 대해 왜 안 물어봐?"

"네가 먼저 말 안 했잖아. 그럴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스티브는 살짝 감동을 한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에겐 너무나도 고마운 행동. 스티브를 위해 배려하는 행동이다. 버키는 그런 그의 표정을 보더니, 살짝 때던 입술을 닫아 웃어주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마음속으로 숨긴 채.

너에 관해 물어보면, 나에 대해서도 말해야 되잖아. 라는 말을.


터벅-

터벅-

쿵-

쿵-

큰 마찰음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 소리가 동시에 뚝, 하고 멈췄다. 왕실 기사단들은 열을 맞추어 한 곳으로 집합했다. 아무 말도 없이 고요했지만, 그 긴장감은 그곳을 잔뜩 매웠다. 그리고 이내 기사단장이 앞으로 나와 입을 뗐다.

"우리는 국왕 폐하와 왕자님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곧 사람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막아야 한다. 못 막는다, 는 것은 없다. 지켜야 한다. 알겠나?"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크게 네! 하며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눈에는 큰 사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곳을 막는 것. 곧 들이닥칠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그들이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사람 여럿이 모여있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여있던 그들의 손에는 조잡한 무기들이 들려있었다. 왕실 기사단들과 눈에 띄게 차이가 나는 무기들이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릴 때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이목을 집중시켰다.

"여러분들, 오늘입니다. 우리들이 그토록 바랐던 날이 찾아왔습니다. 많은 고통을 겪었던 우리들의 결실을 보는 날입니다. 반드시 성공해야 합니다.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 우리 모두 일어섭시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은 큰 환호성을 내질렀다. 질리도록 핍박받았던 나날들이 끝나길 빌었던 그들. 그들이 간절히 바라던 날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초조한 눈빛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는 버키가 있었다. 그의 친구, 샘은 멀리서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 가까이 와서는 툭, 치며 물었다.

"왜 그래? 답지 않게 긴장이라도 했냐?"

"..아냐."

버키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대답을 했다. 그리곤 자신의 오른손에 쥐어진 칼 손잡이를 꽉, 쥐었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버키와 샘도 그들을 따랐다. 왕실을 향해.

어제까지만 해도 사람들로 가득 찬 거리는 먼지 한 톨 날리지 않는 휑한 거리가 되었고, 사람들이 하하 호호 웃으며 웃음이 떠나질 않던 골목은 사람들의 비명으로 가득 찼다.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했던 바닥은 널브러진 사람들과 피로 물들여 져버렸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로 시작된 싸움은 점점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사람들의 거센 저항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버키도 있었다. 그는 감정 하나 느끼지 못하는 듯한 표정으로 칼을 들었다. 그가 칼을 휘두를 때마다, 그의 앞을 막던 방해물들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가 지나간 길은 막힘없이 전진할 수 있었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앞을 향하던 그가 대뜸 거리 한복판에서 우뚝, 섰다. 그리곤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는 자신의 등 뒤에서 칼을 든 채 다가오는 사람의 기척 하나 느끼지 못한 듯 보였다.

푹-!

"버키 반즈, 집중 안 하지?"

언제 왔는지 모를 샘의 도움으로 버키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는 멍하니 샘을 바라보다 눈을 두 번 껌뻑이더니, 이내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고 고맙다는 말을 끝으로 다시 앞을 향했다. ..쟤 상태가 이상한데?

그 어느 때보다 아주 길고 길었던 하루가 끝이 났다. 어느덧 어둠이 길거리를 매웠고 한참을 하던 싸움도 잠시 멈추었다. 아마 기사단들도, 시민들도, 정비를 위함이겠지. 사람들은 흩어져 회의하는 사람, 치료하는 사람, 밥 먹는 사람, 쉬는 사람 등으로 나누어졌다. 버키는 그 사이에 껴 한쪽 구석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그리곤 멍하니 바닥만 보던 때,

"뭐해, 버키."

샘은 버키의 어깨를 툭 치고는 그 옆에 털썩, 앉았다. 싸움 중이었던 아까부터 지금까지, 계속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버키가 걱정되어 온 듯 보였다. 평소와는 달리 집중도 잘 안 하고 힘도 없고. 대체 무슨 일이길래.

"너 어디 아파?"

"내가 너 보다 건강할걸?"

"그럼 뭐, 집에 놔두고 온 거라도 있어?"

"아-니."

"아니, 그러면 왜 이러는 거야?"

샘의 집요한 질문에도 버키는 얼버무리며 대답을 회피하곤 했다. 순간 샘은 칼집을 들어 올려 생각을 당최 알 수 없는 저 머리통을 날려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버키는 아침부터 싸우는 중간에도, 지금, 이 순간까지도 스티브를 생각했다. 스티브는 귀족 집안이니 이 혁명에 작은 피해라도 입을 거라고 생각했으니. 잘못하면.. 죽음까지 겪을 수도. 하지만 일개 귀족이니까.. 그렇게까지 피해는 덜 입지 않을까? 젠장. 미리 대비해 두라고 말할 걸 그랬나. 하지만 나도 정확히 언제, 어디서 하는지는 최근 들어서 알았는 걸. 게다가 스티브도 바쁜지 요즘 못 본 지도 꽤 됐고.. 잘 피했을까? 아직 사상자 중에서 스티브는 못 봤잖아. 괜찮을까? 하지만 내가 그 많은 사상자를 다 봤을 리가 없고. 도망치다가 죽었다면? 그런 거라면 내가 못 봤을 텐데. 지금이라도 찾으러 갈까? 하지만, 하지만..

버키는 자신의 왼쪽을 바라봤다. 그 옆에는 뭘 봐, 인마. 하는 듯한 표정의 샘이 앉아있었다. 그리곤 사람들이 모인 앞을 바라보더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자신을 바라보는 샘의 어깨를 퍽, 때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유히 사라졌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의 뒤통수만 바라보는 샘만이 남아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양쪽 모두 지쳐있을 때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싸움도 끝이 났다. 기사단장을 처리하자 사기가 떨어진 기사단들은 항복을 하기 시작했다. 몇몇 기사들은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맞섰지만, 이미 기세는 한쪽으로 기울어 져버렸다. 드디어 이 혁명에도 끝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이 혁명에서 크게 기여한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이 들어온다면, 몇몇 사람들은 버키의 이름을 말할 것이다. 그만큼 그는 이 혁명에 큰 공훈을 세웠다고 볼 수 있고 이는 혁명 단장에게도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었다. 그 덕분인지 그는 항복하거나, 아직 죽이지 않은 사람들이 갇혀있는 감옥에 가볼 수 있었다.

없어. 없다고. 안돼. 대체 왜. 없는 게 나은 건가? 하지만 살아있다는 걸 내가 보고 싶다고. 차라리 없는 게.. 차라리 멀리 도망쳤다면. 나와 평생 보지 못할 정도로 먼 곳으로 갔다면. 차라리 나을 텐데. 버키는 혁명 단장의 뒤를 따라 넓디넓은 감옥 안을 둘러보았다. 철창 너머에 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봤지만, 그가 찾는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진짜 죽은 거야? 아니지? 안돼. 안된다고. 그건 아니야. 그리고 곧이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감옥 안을 울려 퍼졌다.

"버..키?"

그는 옮기던 발걸음 멈춰, 자신의 뒤로 몸을 돌렸다. 그리곤 천천히-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곳을 향해 발을 떼었다. 천천히, 하지만 급한 마음으로 그는 철창 앞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그 안에는 처참한 몰골을 한 그 아이가 있었다. 그래. 그 아이, 스티브. 애타게 찾고 찾았던 스티브. 이곳에 없었으면 하는 바람과 차라리 살아있다는 걸 보여달라는 바람 끝에 만난 인연. 그가 있었다.

스티브. 어느 곳에 가도 밝은 모습과 빛나는 모습을 보여줬던 아이. 보석이라는 것을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보석 같았던 그 아이는 지금, 흙 속에 파묻힌 보석 같았다. 얼굴에 크고 작은 상처는 기본, 머리칼도 누군가에게 잡혔었는지 산발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등 뒤로 끈에 의해 묶여있던 그의 하얀 손목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온 몸이 핏자국과 흙투성이.

"스,스팁. 스티,브. 아, 스..-"

버키는 떼어질 기미 없이 굳게 닫혀있던 입을 억지로 떼어,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찾고 찾았던 스티브의 이름을 불러댔다. 그리곤 천천히, 덜덜 떨리는 손으로 철창을 꽉 잡았다. 그러더니 그의 떨리는 오른손은 더듬대며 스티브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스티브는 그의 손길에 잠시 움찔하나 싶더니, 이내 버키의 손길을 느꼈다. 가짜가 아니야. 진짜 스티브야. 살아있는 스티브. 정말 다행- ..다행? 다행이야? 스티브가 이 안에 갇혀있는 꼴을 보고도 그 소리가 나와?

"미,미안 스티브. 난, 내,내가.. 나는 그,게.."

버키는 스티브를 매만지던 손을 머뭇거리다가 떼려 하자, 스티브는 오히려 버키의 손에 자신의 머리를 갖다 댔다. 자신의 손바닥 위에 느껴지는 스티브의 머리칼에 버키는 입술만 꽉 깨물며, 창살 사이에 팔을 넣어 스티브를 껴안았다.

"미,안. 정말 미안해.. 스,티브, 미안해. 미안. 다 내, 잘못이야. 정말 미안,해.."

"버키, 난 괜찮아."

스티브의 대답에 버키는 더욱 꽉, 스티브를 껴안았다. 스티브는 자신의 손이 뒤로 묶여 있던 탓에 버키를 안아줄 수 없었고, 힘없이 버키의 팔에 자신의 머리를 툭, 기댔다.


"아까 걔랑 무슨 사이야?"

스티브와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이들은 단장의 방으로 갔다. 버키는 그곳에서 자신의 무기를 만지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고 단장은 그런 버키에게 질문을 했다.

"네? 누구요?"

"그, 아까 있잖아. 감옥에서 만난 애."

버키는 고개를 들어 단장을 바라보며 답했다.

"스티브요? 금발?"

"어, 걔."

"친구예요, 친구."

"아, 그래? 둘 다 어려서 그런가, 친구도 하고 그랬나 보네."

무슨 의미지? 스티브는 귀족인데 나랑 친구 해서 말하는 건가? 대체 무슨 의도로 말하는 거지? 비꼬는 건가? 버키가 경계심 넘치는 표정으로 단장을 바라보자, 단장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 비꼬거나 그런 거 아냐. 그냥 내 말투야. 신기하다는 뜻이었어. 왕자랑 친구 하는 게 흔한 건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며 그는 책상으로 발걸음으로 옮겼다. 그리곤 그의 뒤에서는 ..뭐? 하는 소리가 짧고 굵게 났다. 그는 멈칫하더니 몸을 뒤로 휙, 돌렸다. 그의 뒤에는 입만 살짝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하는 버키가 있었다. ..아, 설마.

"..야, 너 몰랐냐?"

"..왕자요?"

젠장. 괜한걸 알려준 거 같다. 단장은 아니라며, 잊으라고 했지만 버키는 포기하지 않았다. 버키가 연신 질문을 해댄 끝에 단장의 입이 천천히 때졌다.

"아니, 그.. 일단 걔 2 왕자야. 걔 싸움도 잘해서 반항이 좀 심했다 하더라고. 암튼 걔 끌고 오느라 애들이 꽤 고생했던데.."

잠시만. 진짜로? 정말 왕자야? 이 혁명이 일어나게 된 계기가- 순간 버키는 잠시 휘청이다가, 자신의 왼쪽 벽을 붙잡았다. 그리곤 황급히 방을 나갔다.

"야, 잠만. 버키 반즈!"

단장은 뒤늦게 버키의 이름을 불렀지만, 이미 그는 멀리 떠난 상태였다. 아마 감옥으로 가겠지? 그 아이를 만나러. 괜히 알려줬나. 하지만, 언젠간 알아야만 했던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가 더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었다. 스티브, 그는 곧 버키와 영영 못 만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스티브!"

감옥 구석에 벽만 멍하니 바라보면서 누워있던 스티브는,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비척거리며 자신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버키는 스티브의 감옥 앞까지 달려왔다.

"아, 버키. 무슨 일이야?"

"..너 집안, 너 어느 가문이야?"

"..안 물어본다며, 버키"

스티브는 갑자기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서 살짝 당황한 듯 보였으나, 무슨 의미인지 금세 눈치채고는 싱긋 웃었다. 버키는 창살에 매달리며 제발, 제발 알려줘 라는 말만 반복했다. 자신의 가문을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 사정이 있겠거니 해서 안 물어봤던 그. 그는 지금 누구보다도 스티브의 가문이 궁금했다.

"버키, 괜찮아."

"나..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한 건지 모르겠어.."

"괜찮아. 그럴 수 있어. 넌 네가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야."

"그게 너였다면, 난.. 안 했을 거야."

알아. 안다고. 위선적인 거, 아주 잘 알아. 그전까지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사람을 죽이고 또 죽였던 내가. 그런 내가 이제 와서 이딴 말 한다는 거. 이 혁명의 칼날 끝이 스티브를 향했다는 것을 알고 이제 와서 이딴 생각 하는 게, 내가 봐도 위선적인 행동이라고.

"난 정말 괜찮아."

"내가,내.. 내가 안 괜찮아."

버키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몇 명을 죽였는지, 자신이 죽인 이들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냥, 그냥 죽였다. 귀족이면, 왕족이면 다 똑같다고 생각했다. 모두 다 나쁜 놈들인 줄 알았어. 하지만, 그건 나였다.

스티브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있는 버키를 향해 힘겹게 다가갔다. 그리곤 작게 속닥이듯 말했다.

"버키, 사랑해. 언제나 널 사랑했고, 사랑하고, 사랑할 거야."

"..나도. 나도 사랑해, 스티브."

"그거면 된 거야. 알겠지?"

스티브는 마지막까지 버키를 끌어안지 못하는 몸으로 버키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자신의 이마를 툭, 창살에 기댔다. 끝내 닿지 못하는 버키의 이마를 막고 있는 창살에.


"-!"

"--! -!!"

광장을 가득 채우는 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림. 스티브는 그 가운데에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런 스티브를 바라보며 이목을 집중했다. 스티브가 나타나자마자 그 떠들썩 했던 광장은 고요함으로 가득 찼고, 그 고요함을 깨는 한 외침.

"죽어!! 죽으라고! 너 같은 놈들 때문에 내 딸이!!"

그 외침과 함께 거리는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온갖 비난의 말들이 스티브를 향했다. 스티브는 아무 잘못이 없다. 굳이 찾아보자면.. 왕자라는 사실? 오히려 그가 다음 왕이 되었다면 이 나라는 좋아질 수도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국민들의 삶을 자주 봤는데. 하지만 그들은 상관 없었다. 그저 귀족을 향해 비난을 할 대상이 필요했다. 마침 2 왕자인 스티브가 있었고.

스티브는 점점 사람들의 앞으로 다가가 섰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덜덜 떨리는 손은 어찌할 수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어른스러운 행동을 했지만, 어떻게 보면 어린 축에 해당하는 스티브가 겪기엔 너무나도 잔혹한 현실이었다. 싫어. 싫다고. 안돼. 제발. 살려줘. 죽기 싫어. 나는 아무 잘못도 안 했어. 제발 살려줘요. 안돼. 싫어. 안된다고.

스티브는 천천히 피로 물들여진 단두대에 자신의 목을 넣었다. 파들거리며 눈꺼풀이 떨렸고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렸다. 뒤로 묶인 손은 파닥였고 입을 뗐다, 붙였다 달싹였다. 그리고 그의 눈에 한 사람이 띄었다.

스티브는 피식 웃었다. 어제 안 온다고 했잖아. 잘됐어. 나도 마지막으로 널 보고 싶었거든. 내 마지막 기억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면 좋겠어. 버키, 날 향해 웃어줘. 우리 서로 웃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하자. 스티브는 활짝 웃었고 버키도 이에 답하는 것인지 입술을 피가 나도록 씹어대다가 아름답게 웃어줬다.


"진짜.. 떠나게? 너 혼자 괜찮냐?"

"응. 멀리 안 나갈게."

샘은 한참을 망설이더니 이내 자신의 머리를 파바박, 만지곤 엉거주춤 버키를 안았다. 버키도 놀랐는지 잠시 멈췄다가, 피식 웃곤 샘의 등에 살짝 손을 얹었다.

"고,마웠다. 그..동안."

"..응. 나도."

"그, 돌아올 거..냐?"

"글쎄, 상황 보고."

푸른 하늘을 머금은 듯한 호수가 있었다. 호수엔 청명한 하늘과 구름이 반짝이며 비쳤다. 버키는 멍하니 그 호수를 바라보며 자신의 칼집을 매만졌다. 그 호수에도 그의 모습이 반짝이며 비춰줬다.

스티브. 보고 싶어. 이 정도 응석은 받아줄 거지?

푸르디 푸른 호수에 누군가 붉은 물감을 풀어 놓은 것처럼 붉은 빛이 천천히 호수를 향해 퍼져갔다. 하지만 이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푸른 빛을 보였다.

고요한 호수다.

이 세상도 호수처럼, 다시 고요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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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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