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언] 해빙(解氷)

<러브앤딥스페이스> 공모전 「그림자가 교차할 때」 응모 원고.

*BGM : QWER - 별의 하모니(Harmony of stars)

https://youtu.be/On6Pm4M-dQQ



*BGM은 추천 사항으로 함께 들으시면 좋습니다. (듣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이서언 관련 언더월드 스토리/일화의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문에 삽입된 이미지는 픽사베이(PIXABAY)의 저작권 프리 이미지를 사용했습니다.


해빙(解氷)



​​

“파이.”

이미 꺼져버린 휴대전화 액정을 앞발로 비비며 끼잉, 소리를 내는 작은 여우를 품에 안은 이서언은 한숨을 쉬었다.

“통화는 이미 끝났어. 약속한 대로 얼굴 보여 줬잖아.”

작은 얼굴을 들어 저를 응시하는 맑은 눈동자에 왠지 원망이 섞여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피식 웃었다. 실로 ‘여우 같다’라는 관용구에 딱 어울리는 영리한 여우였다. 다시 전화를 걸어 달라는 듯 기어코 제 휴대전화 액정을 앞발로 비비는 파이를 고쳐 안은 이서언이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은 안 돼. 나중에.”

그러자 토라진 듯 훙, 하고 콧방귀를 뀌곤 제 팔에서 사뿐히 내려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타박타박 제 갈 길을 가는 작은 여우를 보며 이서언은 고개를 작게 저었다. 그때 뜨거운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들고 옆으로 다가온 노인, 방동명 교수가 파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통화 한 번으로 달래기는 어려웠던 모양이구만. 잘 지낸다던가?”

그가 건네는 머그잔을 받아 든 이서언이 담담히 답했다.

“임천시를 떠나온 지 며칠 되지 않았으니 잘 지내고 있을 겁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애제자의 담담한 얼굴을 바라보던 방 교수의 얼굴에 이내 근심이 서렸다.

“정말, 이야기하지 않아도 괜찮겠는가? 걱정할 텐데.”

스승의 걱정스러운 말에 이서언은 가만히 시선을 들어 그를 응시하다 답했다.

“교수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일반인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기밀일 텐데요.”

“전부 다 이야기하라는 말이 아니질 않은가. 자네에게도 위험한 일일세.”

그의 말에 잠자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이서언이 말했다.

“제가 코어 전환 기지에 단신으로 간다는 것을 알게 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든 쫓아와서 잔소리를 늘어놓겠죠.”

그의 입가에 희미하게 머물다 이내 사라진 웃음을 읽어낸 방 교수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지금껏 큰 문제는 없었다지만, 어떤 돌발 변수가 생길지는 모르는 일이니. 자기장 변화에 영향을 받기라도 한다면….”

방 교수의 목소리가 벽난로에서 흘러나온 따스한 기운에 맞닿아 녹아내리듯 사그라들었다. 이서언은 노교수 또한 자신처럼 오래전 그날을 떠올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어느새 슬그머니 다가와 무릎에 올라앉은 파이의 귀 뒤를 가볍게 긁어 주는 이서언의 목소리는 마치 날씨를 이야기하는 사람의 그것처럼 담담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침묵을 메우듯, 거칠게 불어닥친 눈보라가 창문을 뒤흔들었다.

❄ ❄ ❄

​이서언은 장항산 깊숙한 곳에 자리한 코어 전환 기지로 향했다. 수년 전의 극지 전쟁 이후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폐허에는 스산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낡고 부서진 그곳에… 박제된 과거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곳에는 뜻을 품고 모였던 이들이 있었으며, 자신의 신념과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망설임 없이 전투에 참여했던 이들이 있었다. 비록 눈보라로 뒤덮인 채 시간이 흘렀을지라도 자신이 기억하는 한, 그리고 ‘소중한 사람이 위험에 처했을 때 더 이상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싶지 않다’고 결심한 이상 그 모든 것들이 단순히 과거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흔적 하나 없는 눈 위에 묵묵히 제 발자국을 찍으며 이서언은 걸음을 옮겼다.

휘이잉.

거친 눈보라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동시에, 단순히 눈보라가 아닌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이서언은 조용히 얼음 결정을 만들어 내어 손에 쥐었다.

아직 형체가 채 갖춰지지 않은 유랑체였다. 탐측 기기가 없으니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자기장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개체인 만큼, 자기장 파동이 강해질수록 완벽한 형체를 이루어 자신을 공격할 확률이 컸다. 만의 하나의 경우에 대비해 최대한 마주치지 않도록 신중하게 이동한 그는 결국 기지 안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먼지가 쌓인 벙커 안을 둘러본 이서언은 옷에 먼지가 묻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벽에 아무렇게나 기대어 앉으며 숨을 골랐다.

자신이 그녀에게 약속한 기한은 사흘이었고, 그는 그 약속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전투는 이서언의 예상보다 길어져 의도치 않았던 소모전에 돌입했다. 그나마 안전한 벙커로 돌아올 때마다 그는 벽에 기대어 앉아 잠깐씩 눈을 붙였고, 그때마다 어김없이 자신의 오랜 악몽과 마주했다. 모든 생명을 다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간힘을 쓰며 버티는 자신을 비웃듯, 사신은 그 잠깐의 단잠에도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서 너는, 네가 살리고자 한 사람들을 모두 살렸는가.

너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위협하는 존재가 된다고 할지라도 너는 살리겠는가.

하얀 가운을 입은 자신, 그리고 검은 옷을 입은 사신. 요사스러울 만큼 아름답게 반짝이는 결정체에 잡아먹혀 단말마의 숨을 내쉬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향해 그는 자비 없는 죽음을 선사했다. 그러고는 얼음인지, 얼어 버린 피인지 모를 것을 손에 쥔 채 담담한 눈동자로 무언의 질문을 던졌다.

너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서언은 사신의 등 뒤에 펼쳐진 풍경을 막막한 심정으로 응시했다. 유난히도 길었던 열두 살의 여름, 나팔꽃과 아이스박스, 그네… 그리고 그는 그 다음에 이어질 장면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덮어 버릴 눈, 그리고 그 눈에 파묻혀 놓쳐 버릴 하얗고 작은 손.

“하아….”

잠에서 깨어난 이서언은 물에 빠진 사람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은 괜찮다, 몇 번이고 자신에게 다짐을 두듯 되뇌는 그의 눈앞에 말간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정확한 시간 개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해가 뜨고 지기를 네 번을 반복했으니, 자신이 약속한 시일은 이미 지난 후일 것이었다. 이서언은 다소 막막한 심정으로 제 안주머니에 들어 있을 수첩을 어루만졌다. 옷의 두께 덕에 만져지지 않을, 표지에 새겨진 줄들을 더듬으려.

그렇게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 있던 그는 이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다소 저릿하긴 했지만 제 의지대로 움직이는 오른팔을 몇 번이고 확인한 이서언은 벙커 밖으로 나왔고, 이내 검은 연기와도 같은 유랑체들이 그에게로 흐느적거리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서언이 빠르게 주먹을 쥐어 만들어 낸 얼음 결정을 던져 한 덩어리를 흩어 버리고는 다시금 얼음 결정을 만들려던 그때였다. 여기서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이서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오빠!”

유랑체를 코앞에 둔 채로 Evol이 폭주할 뻔했던 아찔한 상황에서도 그저 담담하기만 했던 이서언의 눈동자가 커졌다.

“오지 마!”

그 순간, 형태조차 온전치 않은 유랑체가 그녀를 덮쳤고 이서언은 다급히 새로 만들어 낸 얼음 결정을 던지려 했다. 그러나… 통제를 잃은 팔이 궤적을 바꾼 탓에 그가 던진 얼음 결정은 여자의 팔에 박혔다.

“……!”

비틀거리면서도 이를 악물고 일어서는 그녀의 모습 위로 온몸에 결정이 자라난 채 자신을 향해 애원하던 우지원의 모습이 겹쳤고, 이서언은 제멋대로 움직이는 오른팔을 필사적으로 붙든 채 외쳤다.

“이쪽으로, 어서!”

의식이 혼미한 와중에도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어 유랑체들을 저지하고, 저를 부축하며 벙커로 발걸음을 옮기는 가녀린 몸이 연신 흔들렸다. 초조해진 이서언은 힘이 빠지려는 다리를 애써 재촉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가 충분히 예상했지만 절대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변수가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 ❄ ❄

커다란 창을 통해 햇빛이 들어오는 한낮의 거실은 아늑하고도 포근했다. 이서언은 늘 그렇듯 제 허벅지를 베고 누워 태연히 장난을 치고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고, 이내 시선을 느낀 그녀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벌써 일주일이나 지난 일을 가지고 아직도 잔소리할 거야? 그리고, 약속은 오빠가 어겼는데 왜 잔소리는 내가 들어야 해?”

“Evol을 멋대로 사용한 건 둘째 치고, 직접적으로 자기장 파동에 노출되었으면 심장이 멈출 수도 있었어. 평소에 자각하지 못한다고 해서 네가 환자가 아닌 건 아니야.”

“그래, 우리 둘 다 무사히 귀환했고 안 죽었잖아.”

토라진 어린아이처럼 여전히 입을 비죽 내밀며 여자가 툭 던진 말에 이서언이 멈칫 굳었다. 그런 그를 올려다보던 그녀가 여전히 뾰족한 음성으로 웅얼거렸다.

“다른 사람에게서 들으면 뭔가 깨닫는 게 있긴 하구나. 아, 내가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했구나, 하고.”

미안, 순순히 사과하는 그의 뺨을 향해 팔을 뻗은 여자가 고양이를 다루듯 살살 어루만지며 조곤조곤 말했다.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고, 오빠를 지킬 만한 충분한 능력도 있어. 굳이 내게 말하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을 테니 캐묻지도 않을 거야.”

하지만, 하며 제게 올곧게 닿아오는 맑은 시선에 이서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보호받는 사람이 아닌, 대등한 위치에서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리고 이게 과한 요구는 아니라고 생각해. 그래서, 주치의 선생님의 조언이 필요해.”

어떻게 생각해?

검지를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며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였고, 이서언은 한참이나 침묵을 지켰다. 제가 살리지 못했던 이들의 목숨을 늘 등에 짊어진 채로 살아왔던 그에게 여자 또한 다를 리 없었다. 죽음을 거부하는 것은 순리를 거스르는 것이며, 그녀의 심장에 박혀 있는 결정이 어떤 병변 원인으로 나타날지는 이서언 또한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제가 꿈속에서 무수히 보았던 것과 같은 모습으로 마주한다면, 그는 아마도 우지원을 떠나보냈을 때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제 멋없는 한마디로 기쁘게 할 수만 있다면야, 처절하게 발버둥을 친다 한들 그에게는 기꺼이 감수할 만한 일이었다. 오래전 적었던 유서 속 이름은 빛이 바랬지만 이서언은 결코 그것을 그녀에게 내보일 생각이 추호도 없었고, 한여름에 한바탕 눈이 내리던 그 풍경 속 무기력한 자신으로 되돌아갈 생각 또한 없었다. 침묵을 지키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문득 의아해진 이서언이 여자와 시선을 맞추자, 낑차 몸을 일으켜 그의 목을 끌어안은 그녀가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고마워.

그제야, 이서언은 자신이 지독한 악몽 속 눈보라에 갇힌 것처럼 떨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 두려움은 본능적인 것이니 자신이 예상하는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때 어쩌면 망설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는 여자의 짧은 한 마디가 단지 자신의 의견을 존중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서언은 작게 숨을 내쉬며 제게 안겨든 작은 몸을 마주 안았고 그 온기가 다시금 그를 일깨웠다. 아직은 제게 기회가 있다고, 그러니 괜찮다고. 담담한 눈동자를 스치는 수많은 감정을 부러 모른 척해 준 여자가 웃으며 다시금 속삭였다.

있잖아, 오빠. 키스해도 돼?

정말로 멋없는 건 너네, 차라리 그 황량한 벙커 안에서 내가 너에게 했던 말들이 더 낭만적으로 들리는데, 웃으며 가볍게 타박한 이서언은 종알거리는 입술에 다가들어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미지의 저주와 운명은 끝나지 않았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어야 할 결정들은 마치 때를 기다렸다는 듯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이서언은 생각했다. 내일을 기대하고 누군가를 지킬 것이라며 의지를 가다듬게 된 순간, 이미 자신은 지려야 질 수 없는 싸움을 시작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숨을 틔워 주는 익숙한 향기에 이서언은 부드럽게 입매를 올리며 제 품에 안긴 구원을 조금 더 힘 있게 당겨 안았다.

얼어붙어 있었던 여름이 비로소,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아주, 조금씩.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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