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운여주] 질투
진운이가 깨물어요
“폭탄…인 거 같아.”
“……뭐?”
손바닥만 한 자명종은 그 위엄을 자랑하듯 한가운데에 용이 박혀 있었다. 알람 시계의 크기에 비해 무척 거대한 용이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용 모형에 가깝지 않나.
여주는 양손으로 자명종을 들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코를 박다 못해 금방이라도 손바닥 안으로 빨려 들어갈 기세였다.
시린 뺨마저 진지해 보여 진운은 뒤에 서서 동그란 뒤통수를 내려다봤다. N109를 뭐라고 생각하는지. 딱히 궁금하지도 않지만 웃기긴 했다.
“솔직히 좀…….”
“음?”
자명종을 꼬옥 말아쥔 여주가 시계를 제 가슴팍에 붙이고는 주위를 재빠르게 훑었다. 듣는 귀가 없는 틈을 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다. 다 쓰러져가는 상가에 위험인물 따위 존재할 리 없을 텐데도.
진운은 슬며시 몸을 낮춰주다 그 위험인물이 누구인지 깨닫고 비웃듯이 웃었다. 여주와 함께하며 물든 습관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젠 생각하는 것마저 닮아가는 것 같다.
“뭔데.”
부러 애매한 거리로 몸을 숙이자 예상대로 멱살을 쥐며 몸을 바싹 붙여온다. 진운은 그의 귀가 밝지 않아 다행이라 여기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슬쩍 시선을 내리니 포효하는 용과 눈이 마주친다.
“못생겼잖아.”
“……용이?”
“응. 그래서 아무도 구매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여기에 숨겨둔 거야. 가져가서 조사해 봐야겠어.”
사달라는 뜻이다.
진운은 말이 끝나자마자 손끝을 까닥였다. 그를 알아본 주인이 굽은 등을 두드리며 걸음을 재촉했으나 그보다 여주가 빨랐다. 싹싹하게 손을 내민 여주는 진운의 주머니에 있던 돈으로 계산을 마쳤다.
그래도 전에는 가져간다는 말 정도는 했던 것 같은데.
“협회에서 지갑 훔치는 훈련도 하나?”
“조사에 필요한 일이야.”
“보고 올려.”
상관처럼 명령한 진운이 가볍게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괴상한 장식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 열 때부터 은근히 무거웠던 문이다.
익숙하게 먼저 밖으로 나선 여주는 못생긴 용을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집으로 향했다. 두 사람 모두 ‘집’으로 여기는 곳으로.
그런데 하고많은 물건 중에 왜 저런 골동품이 가지고 싶었을까.
진운은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못생긴 용과 눈 맞춤 하는 여주를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봤다. 값비싼 보석을 줘도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흥미를 잃는 여자인데. 먼지 쌓인 시계의 무엇이 마음에 들었을까.
“다른 보석도 많았어. 데려간 이유를 모르진 않을 텐데.”
“그런 건 여기도 많잖아. 들어가자마자 얘랑 눈이 마주쳤어. 운명처럼.”
“못생겼다며.”
“응, 그래서 귀여운데.”
“하…….”
알다가도 모르겠군.
진운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도 침대로 향하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여주는 자명종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시험해 봐야겠다며 푹신한 시트에 몸을 묻었다. 진운은 시각을 확인했다. 마침 낮잠 잘 시간이니 좋은 명분을 골랐군.
진운은 습관을 따르는 동물처럼 익숙하고도 자연스럽게 턱을 괸 채 방 너머를 응시했다. 어느새 이불과 한 덩어리가 된 여주가 새근새근 고른 숨을 내쉬고 있다. 머리맡엔 못생긴 용이 있었다.
얼마 전, 그는 여주가 비슷한 시각에 조는 걸 눈치채고는 아예 다른 침대를 하나 내어주었다. 여주가 임천시로 떠난 뒤엔 이따금 그 침대에 앉아보기도 했다. 다만, 그는 여주가 자고 있을 때는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단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으며…….
“하음…….”
자신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허락받지 않은 선을 넘지 않듯 진운은 여주가 부르기 전엔 잠든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그의 집이니 근처를 맴도는 것쯤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낮잠 잘 때는 침대에 앉지 않았다. 이유야 다양했으나 잠투정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늘어지게 하품한 여주는 허공에 손을 버둥거리다 근처에 있는 베개를 틈 없이 끌어안았다. 그도 부족한지 이불과 베개를 덩어리처럼 모아쥐고 터질 듯이 쥐었다.
새 침대를 처음 들이고, 진운은 그의 좋지 않은 잠버릇에 휘말려 난감했던 적이 있다. 그러니까, 터질 듯이 쥐면 안 되는 곳이 붙잡혔었다.
“으으…….”
그래도 넓은 침대를 좌우로 돌아다니는 여주가 기특하긴 했다. 좋은 건 누려야 한다더니, 그 욕심대로 전부를 누리고 있지 않은가.
피식 웃은 진운은 흘러내린 이불이 거슬려 눈썹을 까딱이다 그의 머리맡에 있는 용과 다시 한번 눈이 마주쳤다. 금방이라도 괴상한 소리를 내며 사람을 못살게 굴 것 같다. 사람을 괴롭히든 말든 그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그 사람이 여주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오래된 골동품이니 제대로 작동할 리 없지. 자명종 용과 진운은 허공에서 서로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한껏 벌어진 못난 입이, 곧 비명을 지르며 제 주인의 잠을 깨울 것 같다.
까아아아—
“……쉿.”
아니나 다를까. 고장 난 자명종이 정해진 시각이 아닌데도 알람을 울린다. 소리도 없이 몇 걸음 만에 성큼 방 안으로 들어선 진운은 용의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고 한숨을 참았다. 용이 까악— 운다는 사실을 여태 몰랐다.
그래, 내가 몰랐겠지. 이딴 것도 용이라고…….
여주의 안목에 관해 한마디 해주고 싶지만 곤히 잠든 얼굴이 바로 밑이었다. 진운은 소파에서 침대까지,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찬찬히 가늠해 보다 자명종을 본래 위치에 내려두었다. 이대로 자게 두었다가 설정한 시각이 되면 직접 깨워줄 생각이다.
“내 용…….”
진운이 소파로 돌아가려 시선을 옮긴 사이, 집요한 손길이 제 용을 찾는다.
“이런.”
시트가 바람 소리를 내며 크게 부풀었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예상하지 못한 손길에 중심을 잃은 진운이 아슬하게 그를 가두며 침대에 엎드린 것이다. 멀리서 본다면 영락없이 잠든 이를 탐하는 모습이다.
제 행동에 더 놀란 진운이 내색하지 않으며 뒤로 몸을 물렸다. 아니, 물리려 했다. 여주는 자명종 용이 그렇게나 마음에 들었는지 꿈속에서도 용을 찾고 있었다. 여주는 못생긴 용의 이상한 이름을 부르며 진운을 끌어안았다. 거칠게 다루고 싶지 않아 진운은 결국 못된 잠버릇을 받아주기로 했다.
다행히, 이번엔 잡히면 안 될 곳이 잡히진 않았다. 잡힌 곳이 등이라 거리가 가까운 게 신경 쓰일 뿐. 가슴부터 배까지 틈 없이 맞닿자 심장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모르게 쿵쿵 울렸다.
“하…….”
진운이 짧게 탄성을 흘렸다. 열이 머리로 쏠렸다가 아래를 주욱 타고 끓었다. 최대한 고개를 위로 내빼고 호흡해 봐도 물에 빠진 사람처럼 부족하기만 하다. 갈급하고, 어지럽고, 숨이 막혀서…….
진운은 귀만 새빨갛게 물들이고 소리 없이 앓았다. 얇은 숨 자락과 부드러운 살갗이 고스란히 느껴져 곤혹스러웠다. 이럴 땐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게 감각을 잊는 일에 도움이 된다.
음, 그래. 차라리 주먹을 휘두르는 게 잠버릇이라면 좋았을 텐데. 글러브를 끼고 받아주면 꿈에서도 훈련이….
“진운…….”
“…….”
최대한 생각을 돌려보려 해도 그가 다시 끌어당긴다. 벗어날 수 없는 올가미처럼. 허우적거려도 결국은 네 그물 안일 것이다.
여주는 무방비할 만큼 고른 숨을 내쉬며 그를 제 품으로 더 깊이 안았다. 체격 차가 있어 전부 안을 수 없었지만, 여주는 과한 욕심을 부리며 계속해서 등을 끌어당겼다. 세운 손톱이 따가울 법한데도 진운은 신음 한번 흘리지 않으며 달갑게 안겼다. 이젠 벗어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미 붙잡혔으니 순순히 항복하는 수밖에.
다리가 사선으로 얽히고 팔이 교차했다. 진운은 눈만 붙이고 일정하게 흐르는 숨소리를 들었다. 그의 숨이 음악이라면 평생을 들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벅차게 내쉬는 숨에 제 숨을 섞으며, 진운은 잠들지 못해 노래를 들었다.
까아악. 까아아아아악.
“으음…….”
머리 위에서 아주 작은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린다.
메피스토……?
그렇다기엔 소리가 무척 작지만 분명한 까마귀 소리다. 여주는 누운 채로 기지개를 켜며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간만에 푹 잤다. 이상하게 여기선 잠이 잘 온단 말이지.
손을 위로 뻗어 더듬거리면 그제야 소리의 출처가 무엇인지 떠오른다. 아, 자명종……. 여주는 까마귀 소리를 내는 용을 보며 발로 이불을 걷고 멀리 앉은 진운에게 말했다.
“이거 왜 까마귀 소리를 내? 용 아니야?”
“나도 처음 알았어, 용이 그런 소리를 내는지.”
“이상하네…. 근데 이상해서 더 마음에 들어. 특별한 거잖아? 일어나려는 시간에 정확하게 깨워주고…. 시끄러운 매피스토보다 낫다.”
앞으로 여기서 잘 때마다 써야겠어. 싱긋 웃은 여주가 상체를 세워 또 한 번 기지개를 켰다. 메피스토는 아마 근처에 있을 것이다. 여주는 자명종에 달린 용을 쓰다듬으며 들으라는 것처럼 큰 목소리로 외쳤다.
“내 용이 최고지, 역시. 시끄럽지도 않고, 생긴 것도 귀엽고. 심지어 제때 잘 깨워주고. 다른 건 이제 필요 없어.”
“…….”
“그렇지? 너도 내가 마음에 들지? 앞으로 잘 때마다 같이……. 진운?”
“듣는 까마귀가 섭섭해해.”
“뭐?”
왜 메피스토가 아니라 진운이 왔지?
여주는 귀청 떨어지게 우는 메피스토 대신 대체로 조용한 진운이 다가오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아해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침대에 나란히 앉아 손에 든 자명종을 내려다봤다.
“그게 그렇게 마음에 들어?”
“어? 응. 마음에 들어. 일단 알람 시계 역할을 착실히 수행하잖아.”
“…….”
“진운?”
왜 이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을 때면 진운은 급격히 말이 줄고는 했다. 원래도 길게 말하는 편은 아니지만…. 여주가 그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 왼쪽으로 거리를 벌리며 몸을 비틀었고, 진운은 그가 멀어지는 것과 동시에 어깨에 이를 박았다.
“아! 너, 너… 뭐 해?”
“……잠 깨라고.”
“뭐? 아니…. 잠은 다 깼는데?”
“덜 깼어. 누가 널 깨웠는지도 모르고 있잖아.”
“그거야 당연히 내 용이…. 아! 그만 좀 물어!”
어깨에 적당한 통증이 느껴진다. 콰득. 잘근잘근 살갗을 깨문 진운은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흔적을 남길 것이다. 여주의 손에 있던 자명종은 어느덧 발치를 뒹굴고 있었다. 자명종 용보다 더욱 큰 남자를 감당하느라 여주는 계속해서 뒤로 밀렸다. 손을 뻗어 떨어진 자명종을 찾자 다시 한번 물렸다. 이번엔 어깨가 아닌 목덜미였다. 입술이 부드럽게 닿는 곳. 그의 말마따나 잠이 덜 깨기라도 한 건지 밀어내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내 시계……. 잠시만!”
“확실히… 잠이 덜 깼군.”
“진운, 네가 자명종이라도 돼?”
기어코 여주를 완전히 눕힌 진운이 그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귓바퀴를 아슬하게 스쳤다.
“그 용보다 과격하긴 하지. 널 곧바로 깨울 수도 있고.”
숨 쉬는 것조차 잊어 손바닥에 땀이 배어날 때쯤. 어깨와 귓가에 입술을 묻고 있던 진운이 상체를 세워 눈을 맞췄다. 곧 코끝이 닿을 만한 거리였다.
“생긴 건…… 어때? 그 용보다 낫나?”
“…….”
여주는 진운에게 몇 번을 더 물리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자명종 용은 누가 치웠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이상한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누군가가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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