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운여주] 승리와 패배
동굴 꼭대기에서 둘이 놀아요
“생각해 봤는데, 져주는 거 같아.”
동굴의 꼭대기에선 커다란 소리도 바람에 먹히곤 했다. 여주의 혼잣말 역시 대체로 멀리 퍼지지 못해 묻힐 때가 잦았다. 옆자리를 차지한 상대는 그의 말에 어떠한 호응도 하지 않기에 소리가 매끄럽게 전달되든 말든 여주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그만이다.
여주는 ‘듣기만 하는 용’ 이 퍽 익숙했다. 나름대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되물을 때가 있으니 그럭저럭 괜찮은 말 상대가 아닌가.
여주는 기대 없이 뱉은 말이 툭 끊어지자 뜻밖에 메아리를 들은 사람처럼 눈을 빛냈다.
“무슨 뜻이지?”
듣기만 하는 또 다른 용이 드물게도 호응했다. 여주는 자세를 고쳐 잡고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을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서늘할 만큼 광활한 순백성에서, 여주는 홀로 먼발치에 있는 무리를 바라봤다. 손에는 그의 말을 듣기만 하는 용이 새겨진 등잔이 있었다. 바닥보다 덜 차가운 등잔을 만지작거리며 여주는 소란하게 머리를 맞댄 무리를 응시했다.
‘가위, 바위, 보!’ 제 또래로 보이는 두 사람은 무언가를 두고 실랑이하고 있었다.
‘가위, 바위, 보…….’
서로 얻으려는 물건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여주는 손을 쥐었다 펴보며 재밌어 보이는 놀이에 집중했다. 규칙은 어린아이도 알 만큼 쉬워 몇 번 보지 않아도 익힐 수 있었다. 탄식과 시기 따위가 둘 사이에 묘한 공기를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둘이 분명 친했던 거 같은데. 왜 친한 사람을 저런 눈으로 보는 걸까. 이기는 게 뭐라고…….
두 사람은 이제 원하던 물건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누가 더 많이 이겼느냐가 더 중요해 보였다. 이상한 일이다. 만약 듣기만 하는 용이 나와 말을 나누어 친해질 수 있다면, 저런 놀이쯤이야 얼마든지 져줄 수 있는데.
여주는 우는 것보단 웃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게 누구든. 미약하게 타오른 불길이 그의 안에서 일렁였다. 돌아가는 길에서 여주는 아무도 말 걸지 않는 곳에서 혼자 가위, 바위, 보를 해보았다.
지금은 다행히, 승부를 가릴 상대가 있다.
“그러니까, 좋아하면… 져주고 싶은 거라고.”
“이해를 못 하는군. 좋아하는 것과 승부가 무슨 연관이 있지?”
여주는 침묵하며 고민했다. 어려운 질문이다.
“……나도 모르겠는데. 그냥, 내가 그렇게 느꼈어.”
“그냥, 같은 건 없어.”
“진짜 그렇다니까?”
용은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았다. 시선이 성 너머 어딘가로 향했고, 여주는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익숙하고도 불편하지 않은 침묵의 시작이었다.
친한 사람과 승부를 내는 것도 그렇게나 열광할 만한 일인지 궁금했는데.
시험해 보지 못해 여주는 이번에도 혼자 주먹을 쥐어보며 가볍게 흔들었다. 멀리서 보면 손을 만지작거리는 정도였다.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으면 홀로 가위바위보를 하는 중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혼자 뭐해?”
작은 주먹 옆에 커다란 주먹이 있다. 시야에 불쑥 들어온 손에 놀란 여주가 저도 모르게 기쁜 듯 고개를 들었다.
“어……. 가위, 바위, 보…….”
“그게 뭔데.”
“몰라? 안 해봤어?”
“몰라.”
“아, 그렇구나.”
내가 알려주면 되겠다.
여주의 상체가 진운의 쪽으로 한껏 기울어졌다.
꿍꿍이만 가득한 바보 같은 고양이가 혼자 주먹질하기에 부른 것뿐인데. 대뜸 손을 잡더니 ‘가위’라며 모양을 알려준다.
진운은 내색하지 않고 그가 하는 양을 가만 지켜보았다. 여주는 신이 난 것 같았다. 입꼬리가 비식비식 올라갔고, 엉덩이는 꼬리가 달린 것처럼 자꾸만 움직였다. 가만히 좀 있으라고 콱 쥐어보려다 말았다. 이제 대충 규칙을 알았다.
“이제 알겠지? 하는 거야?”
“그래.”
“가위, 바위, 보! 하면 그때 내는 거야?”
“알았다니까.”
“가위… 바위…….”
여주는 그의 눈을 노리며 달려들 때보다 더욱 비장해 보였다.
장난치는 것처럼 위협할 때는 언제고. 왜 이까짓 시시한 일에 몰두하는지.
인간의 것은 그게 무엇이든 그와 멀어진지 오래라 깊이 생각한다고 답이 나오진 않았다. 대신 그는 번쩍 치켜든 손을 유의 깊게 살폈다.
가위를 내겠군. 어찌나 조급한지 동작이 빤하다.
“아…….”
“내 승리군. 당연한 결과야.”
“……치사해, 뭔가 수를 쓴 거지? 잘못됐어!”
“칭찬 고마워.”
“다시, 다시 해…!”
동굴 꼭대기에 앉아 줄곧 숨만 내쉬던 인간이 이젠 미간을 좁히며 역정을 낸다.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굴어 놓고 말이다.
진운은 끓어오르는 여주의 승부욕이 마음에 들어 한 쪽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정말이지, 꽤 마음에 든다.
다시 가위, 바위, 보 놀이가 시작됐다. 진운은 습관처럼 그의 손을 살피며 계속해서 이겼다.
“어떻게 계속 이겨?”
“네가 운이 없는 거야.”
“……다시 해.”
진운은 몇 번을 요구해도 선선히 응했다. 흥미 없는 이야기엔 못 들은 척하며 시선을 피하던 게 평소라 여주는 그의 반응이 신선했다.
용은 가위, 바위, 보를 좋아하는구나. 어쩌면 등잔에 새겨진 용도 그 놀이를 좋아했을지 모르겠다.
다만 진운이 계속해서 이기자 더는 분하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 존재하기 마련이니. 여주는 학습된 사람처럼 빠르게 포기했다.
“다시.”
이번 제안은 여주가 아닌 진운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기고도 다시 한번 하자며 재촉했다.
이제 그만하고 싶은데.
여태껏 몇 번이나 어울려주었으니 여주 역시 한번은 보답할 차례다. 가위, 바위, 보! 마주한 두 손이 엇갈리며 스쳤다. 손등이 짧게 살갗을 쓸고 멀어졌고, 두 사람은 천천히 서로를 바라봤다.
“이겼다! 내가, 내가 이겼어, 진운…!”
“그렇네. 네 승리야.”
“어떻게 된 거지?”
“그냥, 그렇게 된 거지.”
“그냥은 없다며.”
“…….”
“다시 해보자.”
가위, 바위, 보! 둘만 남은 고요한 동굴엔 평소와 어울리지 않는 웃음소리가 간간이 흘러들어왔다. 여주는 계속해서 이겼고, 진운은 계속해서 졌다.
그때 그 애들이 왜 목숨 걸고 이기려 드는지 몰랐는데. 이길 수 있을 때까지 들이박는 건 생각보다 기분 좋은 일이다. 상쾌하게 숨을 토해낸 여주가 승리의 주먹을 번쩍 들며 말했다.
“더 볼 것도 없어. 흐름이 내 거야.”
“……내가 운이 없군.”
“기운 내, 행운이 다시 마음을 바꿀지 어떻게 알아.”
“그럴 것 같진 않은데.”
진운이 말끝을 흐렸다. 여주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에 도전해 승리를 쟁취한 기쁨의 맛을 느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휴전한 두 사람은 다시 먼발치에 있는 구름을 바라봤다. 여주의 시야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운이 주먹을 느릿하게 쥐었다가 폈다.
져주는 건 생각보다 재밌는 일이다. 사랑인지는 모르겠지만.
웃음이 잦아든 동굴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위태로운 평화가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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