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보라

이서언 2차 연성, 봄

쪼옥, 쪼오옥―

사람이 없는 조용한 카페에서 다 마신 커피잔에 꽂힌 빨대를 쪽쪽 빨아당기는 소리만 울렸다.

이서언은 퇴근한 후에도 함께 카페에 앉아선 할 일이 남아있다며 금방 끝내겠다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노트북을 펼쳤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더라? 질문에 대답은 곧잘 하긴 했다. 물론 질문 타이밍에 비해 한 박자 느린 답들이었지만 일을 방해하기 싫어 얌전히 일하는 이서언을 구경했다. 잘생긴 얼굴 덕인지 지루하진 않았다. 그래도 스멀스멀 오르는 장난기를 숨기기란 어려웠다.

한 번은 괜찮겠지. 방해해도. 응. 괜찮지!

조용히 웃으며 팔을 쿡쿡 찔렀다. 진료 차트에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드디어 다른 곳을 향했다. 겨우 나를 쳐다본 거다. 시력이 나쁜 편도 아니면서. 손을 들어 안경을 고쳐 쓴다. 일단 일을 그만한다는 제스처는 아니었다. 나는 내게서 시선이 떨어질까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내가 신기한 거 말해줄게.”

“……. 어떤 건데?”

“꽃샘추위가 이른 봄, 봄꽃이 피는 걸 시샘한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거 알아?”

“응, 알지.”

“아… 알아?”

몰랐어? 그래서 이름부터 꽃, 샘, 추위잖아. 이서언은 음절 사이를 확실하게 띄엄띄엄 소리 내며 의미를 전했다. 지금에서야 들으면 너무도 당연한 말인데, 나는 왜 안 지 얼마 안 됐던 거지? 사실 단어의 의미를 곱씹어볼 수 있었던 건 며칠 전에 보았던 인터넷 글 덕분이었다. 벚꽃이 피기 전, 초봄. 겨울이 끝난 줄 알았더니 찾아오는 이 추위에 언제쯤 따뜻해지려나 날씨를 검색해보다 발견했다. 그래, 똑똑한 이서언이 모를 리가 없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실은, 나는 안 지 얼마 안 됐거든. 인터넷 보다 알았어. 그래서 그런지 그 뒤로 단어를 여러 번 읊어보게 되더라. 또 꽃샘추위 같은 단어가 있겠지 싶어서! 이서언은 그때가 되어서야 안경을 벗어 카페 테이블 위로 올려두었다.

“봄에 잎이 나올 무렵에 갑자기 느껴지는 추위는 잎샘이라고도 해. 꽃샘과 비슷한 단어지. 그리고 둘 다 순우리말인 것도 알아두면 더 좋겠네.”

“…오빠는 대체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우리말 겨루기’에서 봤어.”

“오빠 그런 프로그램 좋아해?”

“꽤 흥미로운 우리말 많아.”

“신기하네.”

“잘 모르겠는데.”

아주 짧게 보인 미소가 꽤 보기 좋아 더 어이없었다. 이럴 때 저런 웃음을 짓는 걸 보면 이 사람도 참 웃긴 사람이었다. 이제는 노트북을 아예 덮어버리더니 테이블 한쪽 구석으로 옮겨둔다. 다 식은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서, 그게 나를 찌른 이유야? 마치 다 알고 있다는 것 같았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말인데 왜 이렇게 긴장되는지… 직접 말을 하려니 망설여졌다. 입술을 꾹 말아물고 모른 척하려고 했는데 눈이 마주쳤다. 결국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아니, 뭐! 나중에 꽃 피면, 나랑 놀러 가자구… 그 말 하려고 한 거야.”

“데이트 신청이야?”

“…… 아니면 안 간다고 하게?”

“……. 설마.”

가자.

단 한 마디, 그 말이 뭐가 좋다고… 내가 그렇게 환하게 웃었던 걸까.

2주 뒤에 벚꽃축제가 열려. 그날 만나자. 우리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어릴 적 매일 했던 것처럼, 그렇게.


[준비 다 됐어?]

띠링―하고 절로 켜진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발신자 ‘얼음땡!🧊❄️’ 이서언이었다. 토독, 토독. 화면을 두드리며 답했다. 그러자 답변을 확인하긴 한 건지 곧바로 수신 화면이 띄워졌다. 그것 역시 이서언이었다.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반가웠다. 응, 응, 내려갈까? 벌써 다 왔다고?! 으응, 알겠어. 내려갈게! 전화를 끊고서 꺼진 화면에 희미하게 남은 내 실루엣이 보였다. 신경 써 세팅한 헤어스타일도, 봄이라고 한껏 멋 낸 원피스도. 그리고 내 마음도. 나의 모든 것들이 마치 처음 데이트하는 소녀처럼 들떴다. 온통 분홍빛으로 물든 거리가 보고 싶었다.

나가기 전 현관 한 쪽에 놓인 거울에 내 모습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 그리고 문을 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큰 길가로 나갔을 때 익숙한 차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기대서 서있는 남자도 함께 시야에 들어왔다. 평소보다 훨씬 활동하기에 좋은 니트 차림의 이서언이었다. 기대하진 않았는데, 새삼 다른사람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모른 채 핸드폰 화면을 위아래로 쓸며 무언가 읽고 있는 듯했다. …가서 깜짝 놀래켜야지!

“…… 왁!”

“왔구나.”

“아니, 왜 안 놀라?!”

“발소리 다 내면서 와놓고 놀라길 바란 거야?”

미소 짓는 얼굴. 병원에서 볼 때보다, 카페에서 일을 하거나 논문을 읽을 때보다 훨씬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들고 있던 핸드폰은 뒷주머니에 넣은 뒤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조금은 어색하게 옆 좌석에 앉고 운전석으로 돌아와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어쩌지? 나 지금 괜찮나? 그새 머리 헝클어진 건 아니겠지? 별걱정을 하다 뻣뻣해진 몸으로 차에 올라탄 그를 빤히 쳐다보니, 한참 시선을 맞춰주곤 갑자기 훅 다가오는 게 아닌가. 황급히 몸을 뒤로 쭉 뺐더니 차체 옆으로 손을 뻗어 안전벨트를 길게 늘였다. 그리고 내 두 어깨를 등받이에 기대게 하곤 철컥― 벨트를 채워주었다. 눈만 멀뚱멀뚱 깜빡이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몸이 멀어졌다가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자신의 안전벨트도 착용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정면을 바라보며 핸들을 돌려 차를 모는 그의 모습에 한껏 얼굴이 붉어졌다. 무슨 생각을 한 거고, 무얼 기대한 건지! 나 스스로도 너무 민망해 얼굴이 홧홧해졌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창문을 내려 적당히 시원한 바람으로 식히려고 했다. 식혀야만 했다! 이대로면 꼼짝없이 들킬 게 뻔했다.

“예쁘네.”

이서언의 이 한마디만 아니었다면 더 쉬웠을 테지. 나는 괜히 목을 가다듬고 당당한 것처럼 목소리를 냈다.

당연하지! 신경 써서 꾸몄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나는 전혀 숨긴 것이 아니었던 거다. 그 똑똑한 이서언이 이런 나를 모를 리 없을 테니까.

…풍경이 예쁘다는 거야.

하늘은 맑고 날은 너무 따뜻했다. 길가에 한두 그루 심어진 벚나무는 진작 활짝 피어 있었다.

아, 진짜 짜증 나.

정말 예뻤다. 부정하기엔 완연한 봄이었으니까.

이서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오늘이 우리가,

꽃보라(떨어져서 바람에 날리는 많은 꽃잎이라는 순우리말)를 보기 좋은 날이겠지.

새빨간 내 마음과 잘 어울릴 것이다…… 민망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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