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욱] 동행

*BGM​ : 分身バイオリン - 蜜月アン・ドゥ・トロワ (Violin Cover.)

https://youtu.be/9gNj-xqRmjo?si=v-c41dM7e1ZynGZZ

*<러브앤딥스페이스> 기욱 연성으로, BGM은 추천 사항입니다. 들으셔도, 듣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개인의 캐릭터 해석임의로 붙인 캐릭터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문에 삽입된 이미지는 인게임 일러스트사용을 허락받은 이미지입니다.


[윤슬 씨, 기욱이가 연락이 안 돼서 그러는데 혹시 작업실에 좀 찾아가 봐 줄 수 있어요? 제가 찾아가면 아무래도 아예 잠적해 버릴 것 같아서요. 고마워요, 나중에 밥 살게요!]

모처럼 한가로운… 아니, 한가로울 예정이었던 토요일 아침, 윤슬은 휴대 전화에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하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욱의 친구인 톰에게서 온 것으로, 기욱이 그의 연락을 받지 않는 모양이었다. 답장도 하지 않았는데 고맙다니 이거야말로 ‘답정너’ 아냐?

“내가 간다고 문을 열어 줄까….”

몰랐으면 모를까, 알게 된 이상 모른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윤슬은 기욱의 집 열쇠를 손에 들고 한참을 고민했다. 임무를 수행하러 임천시를 잠시 떠나 있느라 한동안 그를 만나지 못했기에 보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그림을 그릴 때면 다소 예민해지는 기욱을 알기 때문이었다. 제게 ‘맡긴다’라면서 집 열쇠를 건네 주기는 했지만, 만의 하나의 경우 정말 문을 따고 들어가도 되는 걸까? 톰이 기욱을 찾는 건 분명 갤러리 일 때문일 텐데.

한참을 고민하던 윤슬은 결국 톰의 메시지에 답장하고는 한숨을 쉬며 옷을 갈아입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고 톰의 말만 전해 주면 될 테니 방해하는 것은 아니겠지, 자신을 위로하며 그는 기욱의 작업실이 있는 백사만으로 향했다.

◆  ◆  ◆

“…기욱 씨? 안에 있어요?”

그를 불러도 보고, 벨을 눌러도 보았지만 기욱의 작업실은 적막에 잠긴 듯 고요했다. 혹시나 잠든 것일 수도 있으니까, 그럼 쪽지만 남겨 두고 나오는 건 괜찮지 않을까. 그런데 이거… 집 주인에게 허락받지 않았으니 주거침입 아니야?

한참을 문 앞에서 망설이던 윤슬은 결국 에라 모르겠다, 생각하며 열쇠를 집어넣고 돌려 문을 열었다. 그의 작업실 앞에서 오래 기다리기에는 날씨가 너무 무더웠던 탓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선 윤슬은 우선 기욱의 침실 문을 조심스레 노크했다.

“기욱 씨, 자요?”

예상했던 대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혹시 자고 있는지 확인할 요량으로 조심스럽게 문을 연 윤슬은 기욱의 침대가 흐트러진 채로 텅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고, 작게 한숨을 쉬며 베개와 이불을 탁탁 털어 침대를 정돈한 그는 작업실로 향했다. 침실에서처럼 노크를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윤슬은 이내 기척을 죽이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천장이 높은 작업실은 창문이 전부 열려 있는 상태였다. 커다란 창을 가린 반쯤 가린 커튼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이며 흔들렸고…

마치 풍경의 일부처럼, 그곳에 기욱이 있었다.

창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놓인 이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는 윤슬이 작업실에 들어선 것도 알아채지 못한 듯 했다. 기욱에게 다가가려던 그는 이내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도화지와 붓, 물감들을 발견했고, 자신이 한 발짝만 더 내디뎠다면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물감 하나를 밟아 터뜨릴 뻔했음을 깨달았다. 물감을 밟지 않으려다 휘청하며 낸 작은 발소리에 그제야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본 기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디가드 아가씨? 여긴 어쩐 일이야? 임무는 끝났어? 임천시로 돌아온 거야?”

톰이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너무나도 멀쩡한 얼굴로 제게 질문 세례를 퍼붓는 기욱을 멍하니 응시하던 윤슬은 웃고 말았다. 평소와 다를 것이 없는 모습을 보니 반갑기도 하고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하나씩 천천히 물어봐도 돼요. 임무는 끝났고, 보다시피 임천시로 돌아왔어요. 기욱 씨의 작업실에 찾아온 건 톰 씨가 당신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제게 부탁하기에 와 본 거고요. 톰 씨 연락은 왜 안 받은 거예요?”

그의 질문에 얼굴을 찌푸린 기욱이 뒷머리를 긁으며 투덜거렸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30분 간격으로 메시지와 전화가 계속 오면 확인하느라 맥이 끊기잖아. 아직 기한도 넉넉하게 남아 있는데 자꾸 방해하니까 일부러 안 받은 거고.”

“기한이 얼마나 남았는데요?”

“이틀?”

해맑게 답하는 기욱을 바라보던 윤슬은 한숨을 쉬었다.

“…그 정도 기한이면 보통 작품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을까요?”

윤슬의 질문에 무슨 말이냐는 듯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 기욱이 기한을 어긴 적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없다고. 나랑 하루 이틀 일한 것도 아닌데, 톰이 너무 잔걱정이 많은 거지. 기한 안에 넘길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줘.”

…연락을 제대로 받았으면 걱정할 일이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행히도 윤슬은 기욱의 말에 토를 달아 작업을 방해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아직도 제 발치에 놓여 있는 아쿠아마린 색의 물감을 집어 들어 기욱에게 내밀며 말했다.

“물감이 이렇게 바닥에 떨어져 있으면 실수로 밟을 것 같은데, 치우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 말에 윤슬의 손에 들린 물감으로 힐끗 시선을 준 기욱은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그 자리에 둬. 그 물감의 자리는 거기고, 네가 밟았다면 네 발은 예쁜 아쿠아마린 색으로 물들었을 거야. 그러면 난 커다란 도화지를 깔아 네가 마음껏 밟게 했을 테고, 나는 마룬레드 색을 밟아 너와 함께 그 도화지를 채워나갔겠지.”

기욱 외의 예술가를 만나거나 친분을 쌓아 본 적은 없는 윤슬이었지만, 작업할 때 그 공간의 물건들을 함부로 건드리거나 위치를 바꾸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는 어디선가 흘러가듯 들은 적이 있었기에 그냥 둬, 이어지는 기욱의 말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감을 제자리에 내려놓은 그는 이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궁금한 게 있어요, 기욱 씨. 물감을 묻혀 발자국을 찍는 건 어떤 느낌이에요?”

“응? 해본 적 없어? 손바닥 찍기는? 그것보다 몇 배는 더 재미있다고 생각하면 돼. 음악을 틀어 놓고 춤추듯 밟는 것도 재미있고 말이야. 너도 해보면 재미있어서 내가 보지 않는 사이에 실수인 척 바닥에 놓인 물감을 일부러 밟을지도 몰라.”

기욱의 말에 곰곰이 기억을 되짚던 윤슬이 말했다.

“어릴 때 미술 시간에 지점토에 손바닥 찍어 손도장을 만드는 건 해본 적 있어요. 그거랑 비슷한 느낌일까요?”

아리송한 표정으로 답하는 그의 표정을 응시하던 기욱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궁금하면 직접 해보면 되지. 마침 네 발 옆에 물감도 있고, 도화지도 있잖아? 훌륭한 작품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한번 해볼래? 나보단 네가 작품명을 잘 지으니, 이번에도 네게 맡길게.”

기욱의 말에 잠시 머뭇대다 고개를 끄덕인 윤슬은 양말을 벗고는 발치의 아쿠아마린 물감을 주워 들었다.

“하지만 밟으면 정말로 물감을 못 쓰게 될 수도 있으니까 밟기보다는 묻히는 걸로 할게요.”

◆  ◆   ◆

기욱은 제가 건넨 제안에 선뜻 양말을 벗어 한쪽에 고이 개켜 두고는 발바닥에 물감을 묻히는 윤슬을 보며 웃었다.

‘보디가드 아가씨’는 알면 알수록 기욱의 흥미를 자극하곤 했다. 결정하기까지는 무척이나 신중하면서도 일단 결정하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부끄러워하면서도 제 마음을 표현하는 데는 언어로든 몸짓으로든 망설임이 없는 윤슬을 보고 있자면 왠지 자꾸만 놀리고 싶어지고, 그 반응을 통해 확인하고 싶은 다소 짓궂은 마음이 생겨나곤 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나를 좋아하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그런 마음이.

기욱이 생각에 잠겨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꼼꼼하게도 물감을 펴 바른 윤슬은 제 휴대 전화로 음악까지 트는 철두철미함을 발휘했다. 이내 그의 휴대전화에서 경쾌한 피아노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아는 곡인지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춤을 추기 시작하는 윤슬을 응시하던 기욱의 눈동자가 커졌다.

춤추는 것… 맞나…?

그도 그럴 것이, 박자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려 애쓰는 것 같기는 했으나 그의 움직임은 매우 뻣뻣하고 부자연스러웠다. 굳이 표현하자면 오른팔과 오른팔이 같이 움직이는 것 같았달까.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던 기욱의 입에서 풋, 하며 작은 소리가 새어나왔고, 그 소리가 들렸던지 그대로 멈춰 선 윤슬의 귀가 붉어졌다.

“웃지 마요, 기욱 씨. 나 원래 춤 못 춘단 말이에요.”

입을 비죽 내밀며 불퉁한 목소리로 투덜거린 윤슬이 붉어진 귀로도 꿋꿋이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기욱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는 웃으며 윤슬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여전히 서투른 몸짓으로 발자국을 찍던 윤슬이 기욱에게 말했다.

“저는 기욱 씨처럼 예술가가 아니라서 작품을 보는 눈은 없어요. 하지만… 이건 우리가 함께 걸은 흔적이니 제겐 세상에서 제일 멋져요.”

단단한 음성으로 제 의견을 피력하는 윤슬을 바라보던 기욱은 빙그레 웃으며 ‘춤 대열’에 합류했다.

“아니야, 네 춤도 작품도 아주 창의적이야. 세상이 정해 놓은 틀에 맞출 필요가 없는 것이 예술인 거니까.”

한 발짝, 또 한 발짝.

파란 바다를 닮은 아쿠아마린 색의 발자국만큼 불을 닮은 마룬레드 색의 발자국이 하나둘 늘어났다. 때로는 나란히, 때로는 겹친 발자국은 아쿠아마린 색이기도, 마룬레드 색이기도, 보라색이기도 했다. 리듬에 맞추어 경쾌하게 발자국을 찍어나가는 기욱을 향해 윤슬이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투덜거렸다.

“…그렇다기엔 너무 웃는 것 아니에요, 기욱 씨?”

네 반응이 귀여워서 그랬어, 미안, 하며 웃는 기욱을 흘겨보다 여전히 귀가 붉어진 채로 기욱을 끌어당겨 안은 윤슬이 문득 뒤를 돌아보곤 눈이 동그래지며 와아, 솔직한 감탄사를 내었다.

“이럴 땐 새삼 기욱 씨가 예술가구나, 느끼게 되네요.”

멋지다, 작게 중얼거린 윤슬이 한참을 고민하는 모습을, 기욱은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비록 본인은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지만, 그의 입에서 또 얼마나 멋진 제목이 나올지 기대하며 반짝이는 눈동자로 저를 응시하는 것을 그제야 알아챈 윤슬이 푸스스 웃으며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제목 잘 못 붙여요, 저. 기욱 씨 작품에 붙인 제목들도 얼마나 한참을 고민한 건데요. 그렇지만….”

다시금 한참을 침묵하는 윤슬을 바라보며 기욱은 인내심 있게 기다렸고, 이윽고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제목을 붙인다면, <동행>이라고 할래요.”

이건 기욱 씨와 ‘처음으로 함께’ 내디딘 걸음이니까, 항상 당신과 이렇게 걸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서.

윤슬의 대답에 기욱이 싱긋 웃었다.

“꼭 거창하고 멋진 제목이 아니어도 괜찮아. 그냥 네가 보고 느끼는 대로 정하면 되는 거지. <동행>, 좋은데?”

너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다는 느낌이 좋다, 기욱의 말에 그제야 안심한 듯 작게 숨을 내쉰 윤슬이 그를 돌아보며 이내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농담을 건네왔다.

“그런데, 춤은 왕자님이 리드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제가 공주님은 아니지만요.”

아아, 내가 왕자님이다?

작게 웃은 기욱이 윤슬에게서 한 발짝 물러서더니 왼쪽 가슴에 오른손을 대고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영애에게 춤을 청하는 왕자인 양 말했다.

“그럼, 다음 춤은 제가 리드하도록 하죠, 공주님.”

여전히 발바닥이 알록달록하게 물든 채로, 두 사람은 다시금 스텝을 밟으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정석적인 춤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고, 두 사람의 춤은 그 이후로도 오래도록 이어졌다. 기욱이 윤슬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길이 되었고, 윤슬이 기욱의 발자국을 좇으니 그 또한 길이 되었다. 다시금 나란히, 그리고 겹치며 이어 나가는 발자국은 결국 함께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윤슬이 붙인 제목, ‘동행’처럼.

창문으로 밀려 들어온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스치며 흔들었고, 그들만의 무도회는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윤슬이 기욱을 이젤 앞에 다시 앉히고 나서야 비로소 막을 내렸다.

밤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 여름의 끝자락이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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