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운정연] réconfort

틀어박힌 정연 찾아내는 진운.

*BGM : 시간을 달리는 소녀(時をかける少女) OST(Piano Cover.) - 변하지 않는 것 (変わらないもの)

*서인(@Astred_wk)님의 썰을 기반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소재 사용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운에 대한 개인적인 캐릭터 해석드림 요소(드림주의 이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문에 삽입한 이미지는 픽사베이(PIXABAY)저작권 프리 이미지를 사용했습니다.


réconfort

잔뜩 찌푸려 있던 하늘에서 한 방울 두 방울… 물방울이 떨어지더니 이내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정연은 임무가 끝나 모두 철수한 임천시 외곽의 숲에 홀로 남아 있었다. 치직, 작은 잡음과 함께 통신기가 울렸다.

 

“한정연입니다.”

[한정연 헌터, 다 철수했는데 아직 현장에 남아 있나? 근처에 남아 있는 유랑체는 없는 것 확인했다고 들었는데. 다친 곳은 없고?]

“네, 없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팀장님.”

 

이미 상황을 전해 들었으리라. 통신기를 타고 넘어오는 장선영 팀장의 걱정 어린 음성을 들으며 정연은 담담하게 답했다.

 

[부상자가 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어. 그리 심각한 정도는 아니고 임무도 잘 마무리했으니 너무 마음 쓰지 마. 오늘은 현장에서 바로 퇴근하고. 알았지?]

“알겠습니다, 팀장님. 내일 뵙겠습니다.”

 

또다시 작은 잡음을 내며 불이 꺼진, 제 손목에 채워진 작은 통신기를 한참이나 가만히 응시하던 정연은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제 팔로 얼굴을 가렸다.

 

“…한심하기 짝이 없네.”

 

오늘의 임무는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임천시 외곽의 숲에 유랑체가 출현했고, 근처에 공원이 있어 시민들의 피해가 우려되니 조속히 처리하라는 것. 파트너인 심성훈이 다른 임무로 자리를 비웠기에 유니콘 작전과 팀장인 장선영의 지시 아래 팀원들과 함께 유랑체가 출몰했다는 숲으로 향했다.

날씨가 흐린 탓이었는지 아침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다른 팀원들이 각자의 임무로 자리를 비운 탓에 현장에 투입될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되어 있었고 정연은 현장 전투 경험이 절실한 신입 헌터였다. 흔쾌히 허락해 준 선영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의지를 불태웠던 것도 잠시, 컨디션 난조 탓에 등 뒤에서 다가오는 유랑체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그를 보호하려던 팀원이 팔이 베이는 상처를 입고 말았다. 동료는 괜찮다며 정연을 다독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안함이 금세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왜 매번 이 모양인 거냐고.”

 

정연은 유니콘 작전과 기동타격대에 처음 배정받았던 때를 떠올렸다.

이름만 대도 알 법한 기업의 고명딸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과 환경에 둘러싸여 지냈던 자신은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방법도, 친해지는 방법도 알지 못했다. 정연이 정물처럼 그 자리를 가만히 지키기만 해도 그의 사회적 지위와 언젠가는 물려받게 될 재산에 관심을 가지고 친분을 쌓으려 드는 사람들은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그는 그런 관계에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했으니까.

Evol 발현도 늦은 편이어서 동기들보다 비교적 늦게 헌터로 발령받은 정연은 조직 문화에 적응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팀장인 장선영과 입사 동기인 도아린, 그리고 같은 팀의 동료들은 싫은 내색 하나 없이 그가 팀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도 누군가에게 호의를 품을 수 있다는 것, 마음으로 도울 수 있다는 것에 서서히 적응해 나가던 참이라 이번 임무만큼은 팀원들에게 민폐가 되지 않도록 잘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정연은 처음으로 생각했다.

내가 조금 더 성숙한 사람이었더라면… 어땠을까.

 

 

 

❋ ❋ ❋

 

 

 

빗방울이 점점 더 굵어졌다.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가 어느 정도 비를 가려 준다고는 해도 더 머물러 있다가는 옷이 다 젖어 버릴 터였지만 정연은 여전히 바닥에 드러누운 채였다.

아직 여름이 채 가시지 않은 무더운 저녁이었지만 부엽토가 쌓인 숲의 땅은 푹신했고 그 촉감에 위로받는 느낌이어서, 이제는 슬슬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뭉그적거리며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회색빛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왜인지, 익숙한 얼굴 하나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세상만사 초연한 얼굴을 하고서는 능글거리며 놀리다가도 때로는 뼈아픈 말을 마치 날씨 이야기하듯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 가끔은 얄미울 때도 있지만, 가끔 툭 던지는 위로에 도무지 나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남자.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한 새 일상에 스며 들어와 어느새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곤 하는 얼굴.

 

진운.

 

익숙하면서도 입술에 까슬하게 걸리는 이름을 나직이 불러 보다 정연은 바람 빠진 듯 실소했다. 불러서 뭘 어쩌겠다고. 나약해지려는 마음을 추스르려 몸을 일으키던 순간이었다. 휴대전화가 울렸고 그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어 액정에 뜬 발신인의 이름을 확인하곤 움찔했다.

 

“…진운?”

[다른 헌터들은 다 철수한 것 같던데 혼자 거기서 뭐 해? 비 오는데 우산도 없이.]

 

아기 고양이라서 푹신한 곳을 좋아하는 건가?

평소와 다름없는 느른한 말투에 왠지 안심되는 느낌이었을까. 평소였다면 어디서 지켜보고 있느냐며 따져 물었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조금 너그러울 수 있을 것도 같다고 생각하며 정연은 피식 웃었다.

 

“네가 아기 고양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내가 정말로 고양이인 줄 알아? 웬일이야, 이 시간에?”

 

휴대전화 너머로 한참이나 침묵이 흘렀고, 전화가 끊긴 건가 싶어 액정을 확인한 정연은 여보세요? 다시금 진운을 불렀다.

 

“뭐야, 전화해 놓고 왜 아무 말이 없어?”

[좀… 의외라서. 평소의 너라면 크로우의 규율이라는 게 거래 상대를 지켜보는 거냐, 어디서 보고 있는 거냐, 꼬치꼬치 따져 물었을 거잖아?]

 

눈으로 보는 것보다 상태가 훨씬 더 엉망인 모양인데.

 

휴대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혼잣말에 그게 무슨 말이냐고 쏘아붙이려는데…

 

“…어?”

 

의도하지 않았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왜? 이렇게 갑자기?

저도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정연의 귀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리더니 전화가 끊겼다. 어린아이처럼 주먹으로 눈물을 벅벅 닦아내던 찰나, 발걸음 소리보다 앞선 익숙한 향기가 코끝으로 훅 밀려들었다. 커피와 위스키, 꼬냑, 그리고 샌달우드 향이 절묘하게 섞인, 주인을 닮아 있는 관능적인 향기.

 

“…진운.”

“아아, 그래. 한 번만 더 부르면 귀에 못이 박힐 것 같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유랑체가 나타날까 무서워서?”

 

평소의 자신이었다면 아마도 왜 놀리냐며 그를 향해 툴툴거렸을 것이다. 놀리려는 의도인 걸 알아도 괜히 한 번 그래 봤겠지. 그랬다면 그는 피식 웃으며 받아 주었을 것이고.

 

그런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진운은 정연에게 왜 우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제 코트를 벗어서 뒤집어씌우듯 입혀 주었을 뿐이었다. 비에 젖은 나무들이 특유의 향을 뿜어냈고 토독토독 잎사귀를 두드리는 빗방울이 음악 소리처럼 울렸지만, 한참이나 침묵이 흐르도록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제가 무슨 말이라도 하기를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는 것처럼.

 

“왜 아무것도 묻지 않아?”

 

훌쩍거리며 다소 잠긴 목소리로 물어 오는 정연을 향해 진운이 코웃음을 쳤다.

 

“내가 어디선가 보고 있었다는 건 방금 내가 했던 말로 이미 알았을 거고, 현장 전투 경험이 부족한 신입 헌터가 팀원들이 전부 철수한 현장에 앉아서 훌쩍거리고 있다는 건 뭔가 문제가 있었다는 거잖아. 왜, 누가 다치기라도 했어?”

 

평소처럼 핵심만 콕콕 찌르는 말투에도 왠지 미운 마음은 들지 않아, 정연은 붉어진 눈을 들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 ❋ 

 

 

처음이었다. 정연이 우는 모습을 본 것은.

 

애초에 이 아기 고양이는 겁이라곤 없는 편이었다. 제 아버지와의 커넥션을 추적해 자신에게까지 닿았다면, N109 구역과 크로우가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을 텐데도 그 크로우의 수장 앞에서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제 할 말을 또박또박 내뱉었으니까.

부러 부잣집 아가씨라고 긁어 보기는 했어도 진운은 정연이 심지가 굳고 목표가 명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목표가 흔히 말하는 건전한 의미이던, 복수가 기저에 깔린 것이던 진운에게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건전한 의미라면 제가 있는 곳까지 흘러오지도 못했을 것이고 후자라면 협상하면 될 일이니까. 이해관계에 따른 거래란 응당 그런 것이지 않은가.

그렇게 ‘제가’ 선택한 거래의 당사자가 비 내리는 날 잔뜩 풀이 죽은 채 외딴 숲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이 왜 이렇게 못마땅한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내 아버지의 딸인 게 싫었어, 진운.”

“왜? 너의 아버지 정도의 사회적 지위라면 부족함 없이 컸을 것 아냐.”

 

그래서였을 것이다. 평소와 달리 농담기 없이 정연의 말을 받았던 것은. 한기를 느끼는지 희게 질린 얼굴로 그가 처연하게 웃었다.

 

“내 아버지가 내게 가르쳤던 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하등 쓸데없는 지식이었거든. 상류층들이 모인 파티에서, 어떻게 해야 조금 더 우아하고 고상한 여자처럼 보여서 보다 많은 권력과 재력을 갖춘 집안에 팔려 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도록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의 귀족 영애처럼 우아하게 상대의 약점을 찌를 수 있을까, 그런 것들.”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털어놓아 본 적 없었을 마음을 어린아이처럼 꺼내 놓는 정연의 말에 진운이 눈썹을 까딱였다.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아가씨라는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진운. 나는 결국 반쪽짜리 인간으로 성장했거든. 한정연이 아닌, 밖에 내놓기 좋은 훌륭한 트로피로. 그래서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도, 어떻게 합을 맞춰야 하는지도 모르는 서투른 어른이 되었고…”

 

그래도 오늘만큼은 잘 하고 싶었거든, ‘한정연 헌터’에게 주어진 임무였으니까.

 

버석거리는 음성은 더 이상 축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왠지 정연이 울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진운은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그래서, 그게 뭐.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했나?”

 

진운의 말에 정연이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네 말대로라면 너 때문에 다친 동료가 죽기라도 했어?”

“…무슨 그런 험한 소리를 해?”

 

정연의 반문에 진운이 피식 웃었다.

 

“그래, 핵심은 그거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

“…….”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저를 멍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정연의 머리칼을 가볍게 털어 정돈해 준 진운이 한숨을 쉬었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어.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고.”

 

동전을 가볍게 튕겼다 받으며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말하는 것치고는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 당연한 거야, 이제껏 난 누구에게 이런 말을 해 본 적이 없거든. 요는… 세상 모든 사람이 네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거나 네 실수를 책망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냥 그런 일이야, 다음에는 실수하지 않으면 된다고 넘기면 그만일 그런 일.

 

퉁명스러운 진운의 말에 여전히 멍하게 그를 바라보던 정연이 웃음을 터뜨렸고, 날 못 믿는 거야? 투덜거리면서도 그가 피식 웃었다.

 

“네가 못 믿겠다면 증명해 줘야겠네. 다음에 보자고, 아기 고양이. 거래 잊지 말고.”

“…뭐? 진운, 어디 가는데!”

 

정연의 목소리에도 여유 있게 한 손을 들어 보인 그가 모습을 감추었다. 뭐야, 데리러 온 게 아니었어? 황당한 표정으로 그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찰나, 정연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연아! 여기 있어?”

“한정연 헌터, 어디 있나? 목소리 들리면 대답해!”

 

 

 

5분쯤 뒤, 담요에 둘둘 싸여 손에 따뜻한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받아 든 정연은 도아린과 장선영에게 한바탕 잔소리를 들으며 연신 사과해야만 했다. 도아린이 그에게 눈을 흘기며 속사포처럼 쏘아붙였다.

 

“팀이 철수했으면 너도 나와야지! 비도 내리고 곧 해도 질 텐데, 쫄딱 젖어서 여기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해? 걱정했잖아!”

 

…걱정, 했다고.

 

그제야 정연은 진운이 이야기했던 ‘증명’이 어떤 의미였는지 깨달았다. 일깨우는 방법도 그답다고 생각하며 정연은 장선영의 걱정 어린 시선을 담담히 마주했고, 고개를 숙였다.

 

“임무 중 사고가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팀원들의 안전도 잘 살피겠습니다.”

 

도아린과 장선영의 눈이 커졌고, 이내 장선영이 웃으며 정연의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렸다.

 

“한정연 헌터가 아직 신입인 건 사실이지만, 이 정도의 부상이 드문 일은 아니야. 팀원에게도 사과했다고 들었고, 괜찮다고 했으니 너무 마음에 담지 마. 자, 이만 돌아갈까. 내일 출근도 해야 할 테니까.”

 

팀장님 그건 굳이 일깨워 주시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도아린의 엄살 섞인 투정에 장선영과 정연은 멀뚱히 서로를 마주보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장선영이 앞장을 서자 도아린은 그에게 얼른 따라나서라며 눈짓했고, 발걸음을 뗀 정연의 뒤로 도아린이 따라붙었다. 천천히 숲을 걸어 나가며 정연은 비로소 생각했다.

 

집에 도착하면 꼭, 전화해야겠다고.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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