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언] 은하수 밟기
<러브앤딥스페이스> 공모전 「뜨거운 8월, 요동치는 사랑. 반투명 점거」 응모 원고.
*BGM : Sound Traveler - Moonlit Ocean
*BGM은 추천 사항으로 함께 들으시면 좋습니다. (듣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난야절(칠석)을 배경으로 한, 날조가 가미된 여름 이야기입니다.
*개인의 캐릭터 해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문에 삽입된 이미지는 픽사베이(PIXABAY)의 저작권 프리 이미지를 사용했습니다. (가공 X, 리사이징 O)
은하수 밟기
수술을 마치고 진료실로 돌아온 이서언은 의자에 몸을 부리며 검지로 눈가를 가볍게 마사지하듯 눌렀다.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온몸이 노곤한 것을 보니 한껏 팽팽하게 당겨졌던 신경이 이제야 느슨하게 풀리는 모양이었다. 책상 위에 놓인 시계를 힐끗 보곤 아직은 여유가 있음을 확인한 이서언은 눈을 감았다.
긴장하지 않는다, 고는 하지만 환자의 생사가 달린 수술에 있어 방심은 금물이었다. 그에게 생명을 맡겼던 수많은 이가 그러했듯 오늘 그가 수술을 집도한 환자도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회복 기간을 거쳐 제 발로 걸어서 병원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후의 과정이 결코 짧거나 쉽다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어쨌든 가장 큰 산은 넘은 셈이었다.
지이잉.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서언의 가운 주머니 속에 든 휴대 전화가 짧게 진동했고 그는 진동만큼이나 짧은 휴식을 마무리하며 눈을 떴다. 발신인이 누구인지 이미 짐작한 이서언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어졌고, 눈동자에는 보기 드문 희미한 웃음기가 감돌았다.
“기다릴 필요 없었는데.”
그의 일정이라면 이미 훤히 꿰고 있을 것이고, 자신이 피곤할 것을 배려해 충분히 시간을 둔 이후에 연락했을 것 또한 알았다. 물론 그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던 자신에게는 크게 필요치 않은 배려였지만. 여자가 곽헌에게 주기적으로 뇌물을 건네며 제 일정을 파악하는 것을 모른 척 두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는 생각에 피식 웃은 이서언은 휴대 전화 액정에 뜬 메시지를 확인했다.
「오빠. 나와 같이 은하수 밟기 해 보지 않을래?」
“…은하수 밟기?”
이건 또 무슨 꿍꿍이지. 이서언은 턱에 손을 괸 채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오늘의 이벤트는 그가 예상했던 난야절이 아닌 모양이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고 그는 휴대 전화를 집어 들어 간단하게 답장을 보낸 뒤 가운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여자를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 ❄ ❄
「네가 원한다면. 데리러 갈게, 조금만 기다려.」
“…대답이 이렇게 간단하기도 힘들 것 같은데. 뭔지 물어보지도 않는 건가.”
이서언에게서 온 짧은 답장을 몇 번이나 읽은 여자가 웃고 말았다. 참 그다운 답장이었다. ‘은하수 밟기’라는 제가 만들어 낸 말이 궁금할 법도 한데, 역시나 만나서 직접 물을 모양인지 답장은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짧았다.
여자는 분수대 가장자리에 앉아 아이처럼 가볍게 발을 구르며 제 앞을 스쳐 가는 사람들을 반짝이는 눈동자로 관찰했다. 왼손에는 아버지, 오른손에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까르르 웃으며 걸어가는 아이. 제게는 들리지 않는, 아마도 달콤할 말을 속삭이며 손을 꼭 마주 잡고 지나가는 연인. 느릿하게 발걸음을 맞추며 들뜬 밤의 분위기를 조용히 함께 음미하는 다정한 노부부.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더라도 오밀조밀 베를 짜는 것처럼 자신의 일상을 엮어가는 임천시의 사람들을 마주할 때마다 여자는 이유 모를 먹먹함과 가슴이 뿌듯해지는 감각을 동시에 느끼곤 했다. 그녀가 스페이스 헌터가 되기로 결심했던 이유 또한, 그들의 평범한 일상을 무탈하게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므로.
“오래 기다렸어?”
문득 들려 오는 익숙한 음성에 여자가 환하게 웃으며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작 자신을 챙기지 않는다는 주변의 걱정에는 이미 익숙했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우선순위’는 분명히 있었다. 이를테면, 수술이 끝난 지 채 두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것임에도 흰색 셔츠에 검은색 넥타이, 검은색의 정장 바지를 깔끔하게 차려입고 제 앞에 다가와 선 주치의 선생님이라던가.
“왔어, 오빠? 그렇게 오래 기다리진 않았어. 천천히 왔어도 됐는데.”
분수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의 머리에 맺힌 물기를 손으로 가볍게 털어 정리해 준 이서언이 피식 웃었다.
“너도 퇴근해서 바로 왔잖아. 아직 저녁 전일 텐데 천천히 오자니 임천시 최강의 헌터님이 배가 꽤 고플 것 같아서.”
“들켰어? 아니, 그래도 버틸 만했어! 내가 뭐 밥 생각만 하는 사람도 아니고.”
민망한 표정으로 배시시 웃는 여자와 시선을 마주한 그는 웃고 말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은 사람을 대하는 데 그리 유연한 편이 아닌데도, 뻔히 읽히는 그녀의 거짓말은 왜 모른 척 넘기고 싶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려면 어떠랴, 생각하며 이서언은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여전히 웃음기 담긴 얼굴 그대로 그를 응시하며 냉큼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오빠는 뭐 특별하게 먹고 싶었던 것 없어? 오늘 힘들었을 것 같은데 든든하게 먹고 기운 내야지, 안 그래?”
“내게 먹고 싶은 걸 묻는 것보다 네가 먹고 싶은 것 중에서 내가 한 가지를 고르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
“어어, 그 말 금지! 내가 또 속을 줄 알았어?”
그럼 또 결국 내가 먹고 싶은 걸로 먹으러 갈 거잖아, 여자가 불퉁한 목소리로 말하며 입을 비죽 내밀었다. 어지간히도 속상했던 모양인지 고개까지 팩 돌리는 모습에 이서언은 웃음을 참으며 제 손에 잡혀 있는 하얗고 작은 손에 깍지를 끼었다.
“네가 먹고 싶은 것 중의 하나를 고르려는 건데, 그게 그렇게 안 될 일이야?”
“응, 오늘은 안 돼. 오빠가 내 부탁을 들어 줘야 하니까 나도 뇌물을 써야 하거든.”
여자는 늘 그랬다. 그리 빈번하지도 않은 제 부탁에 꼭 무언가 합당한 보상을 해 주려 애를 쓰곤 했고, 건강과 식단, 수면에 대한 타협만 아니라면 언제든 들어 줄 의사가 있는 이서언으로서는 그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입 밖으로 흘러나온 그의 말투는 평소보다 아주 조금, 무뚝뚝했다.
“내게 무언가 부탁을 하려면 네가 꼭 무언가를 해 줘야 하는 건가?”
티끌만큼 실린 감정이었을 뿐인데도 그것을 기민하게 알아챈 여자가 의아한 얼굴로 이서언을 올려다보았다.
“왜 심통이 났지. 누군가에게 무언가 부탁하려면 그게 당연한 것 아니야? 오빠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잖아. 그건 기본적인 예의라고.”
올곧지만 어딘가 초점이 미묘하게 빗나간 여자의 대답에 이서언은 굳이 그것을 바로잡아 보기로 했다. 오늘은, 난야절이니까.
“글쎄, 나는 너에게 특별한 사람이자 ‘예외’였으면 좋겠는데. 이것저것 재지 않고 편하게 부탁할 수 있는.”
굳이 어떠한 이름을 붙여 관계를 정의할 필요가 없는, 그런 사람.
뒤의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은 채 그는 담담한 시선으로 여자를 응시했다. 피하지 않고 한동안 이서언의 시선을 묵묵히 받아낸 그녀가 미안, 작게 사과했다.
“기브 앤 테이크의 의미는 아니었어. 그냥 오늘 하루 힘들었을 것 같은데 오빠와 같이 하고 싶은 일이 있으니까… 대신에 내가 뭐라도 해 줘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지.”
한풀 꺾인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던 이서언이 깍지 끼어 맞잡은 손에 살짝 힘을 실으며 답했다.
“네가 해 줄 수 있는 일… 그래, 오늘은 이걸로 하자. 네가 먹고 싶은 것 중 내가 고르는 음식을 함께 먹으면서 ‘같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 어때?”
❄ ❄ ❄
즐거운 식사 자리였다. 각자의 일정으로 바빠 한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던 탓인지 여자는 그렇게 먹고 싶었다던 샤브샤브를 먹으며 그동안의 근황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았고, 이서언은 가끔 그래, 답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갈 무렵, 그가 여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궁금한 게 있는데, 그래서 그 ‘같이 하고 싶은 일’이라는 건 어떤 거야?”
아아, 은하수 밟기? 하며 여자가 배시시 웃었다.
“난야절이잖아, 오늘. 날씨가 맑으니 백사만에 가면 은하수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 그리 멀지 않으니 금방 다녀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괜찮겠어, 오빠?”
반짝이는 눈동자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 오는 여자를 응시하던 이서언이 피식 웃었다.
“그게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다 먹었으면 일어나자. 지금 출발하면 세 시간 내로 돌아올 수 있을 거야.”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킨 여자는 그에게 손을 내밀며 종알종알 말을 건넸다.
“오빠가 피곤하면 내가 운전할 수도 있는데, 어때?”
“…네 레이싱 실력이 뛰어난 건 이미 알고 있으니 운전은 내게 맡겨 줘. 대신 다녀오는 동안 먹을 간식을 네게 부탁해도 될까?”
이서언의 대답에 여자는 키득거리며 식당 맞은편의 편의점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간식과 음료를 골라 계산한 그녀가 이서언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는 여자가 건네는 봉투를 받아 들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간식이 이렇게나 많이 필요할 줄은 몰랐네.”
“에이, 남으면 집으로 가져가서 먹으면 되지! 그럼 갈까, 오빠?”
능청스레 말을 받는 여자를 바라보던 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백사만으로 향하는 동안 조수석에서 간식과 음료를 살뜰하게 챙기는 것은 여자의 몫이었다.
한밤의 백사만은 아름다웠다. 달빛을 받은 백사장은 은빛으로 빛났고, 밀려온 검푸른 파도는 은빛의 도화지를 적시곤 신기루처럼 사라졌다가 다시 밀려왔다. 한동안 바다를 말없이 응시하다 검은 벨벳 장막처럼 드리워진 밤하늘을 올려다본 여자가 다소 들뜬 얼굴로 아이처럼 탄성을 질렀다.
“은하수야, 오빠!”
예쁘다,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던 여자가 제 곁으로 다가선 이서언을 향해 돌아섰고, 바다와 하늘을 번갈아 올려다보던 그는 그제야 여자가 이야기했던 ‘은하수 밟기’의 의미와 인적이 드문 곳을 부러 찾아왔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서언이 바다를 향해 가볍게 손을 들어 올리자 밀려들던 바닷물이 서서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성인 두 사람이 적당히 거리를 두고 마주 볼 수 있을 정도의 넓은 공간이 생겨나자, 여자는 망설임 없이 그가 만들어 준 투명한 얼음 위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투명한 벽을 세워 파도가 밀려드는 것을 막은 덕분에 달빛을 받은 얼음 바닥이 거울처럼 빛났다. 바닥 아래로 찰랑이며 밀려드는 바닷물은 그녀가 발걸음을 뗄 때마다 얼음에 비친 별들이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 이동하는 것 같은 몽환적인 풍경을 그려냈다.
얼마나 그렇게 걸었을까. 여자가 몸을 돌려 이서언과 마주 섰다.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오작교를 통해 1년에 한 번 만날 수 있었다던 옥황상제의 손녀와 하늘의 목동처럼.
“어떻게 알았어?”
주어가 빠져 있었지만 이서언은 여자의 질문을 이해했다.
“네가 바라는 거라면 뭐든 알고 싶으니까.”
낭만적이네, 이서언의 짤막한 감상에 그녀가 웃었다. 말갛게 웃고 있는 여자와 시선을 마주한 이서언은… 불현듯 심장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고작 서너 걸음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인데도 그녀와 자신 사이의 거리가 마치 닿을 수 없을 것처럼 아득하고 멀게 느껴졌던 탓이었다. 제가 만들어 낸 찰나의 환상이자 곧 사라질 신기루와도 같은 것이건만.
못 박은 듯 멈추어 서 있던 이서언이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한 걸음, 또다시, 한 걸음.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천천히 좁힌 이서언이 마침내 여자의 앞에 섰다.
“오작교가 없더라도… 네게 닿을 수 있다는 건 충분히 증명한 셈이네.”
꾸밈없는 이서언의 말에 여전히 웃으며 저를 올려다보는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그녀를 부드럽게 당겨 품에 안았다.
심장에 에테르 코어가 박힌 그녀와 다시 만났을 때도, 극지로 비밀 프로젝트를 진행하러 떠날 때도, 의료팀 파견으로 여자와 잠시 떨어져 있어야 할 때도… 어쩌면 자신은 끊임없이 그녀에게 닿을 방법을 찾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전설 속의 부부에게는 그들을 도와 줄 까마귀와 까치가 있었지만, 오롯이 여자의 행복을 위해 홀로 발걸음을 내디뎠던 그에게 그러한 기연(機緣)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그러므로… 이서언은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은 꿈이 아니라고, 제 품에 안겨 있는 여자의 온기는 환상이 아니라고.
악몽은 그저 악몽일 뿐이라고.
“고마워.”
오빠 덕분에 내가 바랐던 일이 현실로 이루어졌으니까.
여자의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이서언은 그래, 답하며 웃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제가 바랐던 것 또한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진배없었으므로.
❄ ❄ ❄
돌아오는 길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차의 유리창을 톡톡 두드리며 쏟아지는 빗줄기를 가만히 바라보는 여자를 향해 이서언이 말을 건넸다.
“난야절에 내리는 비는 견우와 직녀가 만났을 때 흘리는 기쁨의 눈물이라는 전설이 있어. 비가 내리면 그 해의 농사가 잘된다는 뜻으로 여기고 기뻐했다던가.”
“그렇구나…. 비가 내리는 걸 보니 두 사람이 만난 건가.”
낭만적이네, 그의 짧은 감상을 그대로 따라 읊으며 여자가 졸음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설핏 웃었다. 잠시 신호를 받아 대기 중인 틈을 타 이서언은 그녀에게 담요를 덮어 주었다.
“가는 동안 잠시 눈 좀 붙여. 도착하면 깨워 줄 테니까.”
그의 말에도 고집스럽게 눈을 뜨고 버티던 여자의 고개가 어느새 툭 떨어졌다. 잠들어 버린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던 이서언은 초록 불로 바뀐 신호를 확인하고는 부드럽게 액셀을 밟았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난야절을 즐기는 인파로 임천시의 밤은 대낮처럼 밝았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무덥고, 치열하며, 그럼에도 찬란한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서언은 그녀를 다시 만나고 난 이후의 여름이야말로 비로소 제 안에서 온전한 색채로 자리했음을 알았다. 그 색채는 해를 거듭할수록 색이 덧입혀져, 두 사람만의 여름으로 깊이 아로새겨질 터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떠올릴 수 있는 추억 또한 그 여름 사이사이에 선명한 잔상으로 남게 되겠지.
이서언은 부드럽게 입매를 올리며 그 색채를 향해 다시금 한 걸음 다가섰다. 유난히 무덥고 길게 느껴졌던 계절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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