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밀라

[닉칼] 사랑하는 나의 피터슨

나지막이 들려오는 소리. 한때는 들리지 않았던 것들. 온몸에 생명을 불어넣던 심장 박동이 느려지는 소리. 생명이 꺼져가는 소리. 정수리부터 목까지, 산뜻하여 또렷하게 내려오는 주문.

저것들의 피를 먹어야 해.

소녀의 검은 눈에서 마침내 눈물이 떨어졌다. 짭쪼름한 이것은 그녀 얼굴에 묻은 피와 섞이어 쇠 맛이 났다.

“아해야, 이리 고운 얼굴을 망가뜨리면 어찌할까, 응?”

번뜩이는 괴물의 두 눈이 오롯이 빛나 소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고풍스런 어투를 담은 괴물의 손은 아이를 찬찬히 안았다. 그 두 눈은 소녀의 얼굴을 가득 담았다가, 이내 소녀 뒤편의 피비린내를 응시했다. 괴물의 눈이 흉포하게 빛났다. 소녀는 볼 수 없어도 알았다. 바짝 닿은 괴물의 어깨에서 달짝지근한 냄새가 났다. 차라리, 소녀는 눈을 감았다. 언젠가 이 시간이 한참 지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때는 다르리라.

불길이 성을 잠식했다. 머지않아 떠오른 해는 폐허가 된 성 곳곳을 비추었으나, 해는 물론이요, 아무도 생존자를 찾지 못했다.

그저 모든 것이 꿈이기를…….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공정하신 해가 온 세상을 비추었다. 두 소녀가 묵은 방은 기나긴 복도 끝방 이었다. 어느 마음 좋은 지배인이, 빗물에 절여진 두 소녀를 위해 안전하고 아늑한 방 안에 모셔둘까! 그것도 피 냄새가 미지근히 나는 여자아이를. 루드비히는 녹색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건넸던 금화 자루를 던지며 실실 지난 밤을 회상했다. 분명 세상 물정이란 물정은 하나도 모르리라. 한 달 급여보다 묵직한 돈을 받다니! 갸륵한 하느님께서 웬 떡을 주시고, 아멘. 아멘. 아아, 절로 나오는 웃음이오다. 금화를 쥔 손바닥에도 비릿한 냄새가 나돌기 시작했다.

“저기요……. 지배인님.”

“응?”

“제 언니가……있잖아요, 언니가…….”

눈가에 맺힌 방울방울을 굳게 삼키느라 소녀는 겨우 뻐금뻐금 말하고 있었다. 전날 밤, 호텔 문을 두드리던 그 차림 그대로였다. 어제의 핏자국이 그대로 굳어 녹색 드레스를 검게 물들인 채로. 여전히 어쩔줄 몰라하며 같은 말을 번복했다. 우리 언니, 몸이 약한 언니. 루드비히는 금화에 한눈 팔렸던 시선을 소녀에게 주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찰랑거리는 금화 자루가 소녀의 허리춤에서 살랑살랑 춤을 추고 있었다.

“그래, 그래. 의사를 부를까?”

“그보다, 그보다 빨리 도와주세요. 네? 언니가, 아, 어떡해…….”

이내 발을 동동구르며 연신 손으로 이마의 땀을 닦는 소녀가 퍽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물론, 그래. 금화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그의 입맛을 돌게 했다.) 승낙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가씨, 진정해. 6층 끝방, 맞지? 어서 가보자. 내가 앞장서마. 아직 해가 거대하게 들어오지 않은 새벽과 아침 사이. 루드비히는 작은 램프를 들고 계단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요……. 이런 소리가 그의 등을 타고 흘렀다.

아, 그는 절대로 보지 못할 미소가 반짝이고 있었다.

복도는 아직 고요했다. 계단을 올라가면 올라갈 수록 소녀의 드레스 속에서 난분분 춤을 추는 금화소리가 더욱 번뜩였고, 햇빛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한 계단에 미끄러지지 않을까, 루드비히는 연신 소녀를 걱정했다. 기껏해야 십년하고도 몇 년정도만 더 먹은 듯한 소녀에게 이 드레스는 길게 늘어져 있었으므로. 그래, 그는 제 장기 속부터 꾸물꾸물 올라오는 금전욕을 이런 식으로 표출했다. 숨길 기세라곤 전혀 없이. (보아라, 세상 물정 하나 모르는 이 작고 가녀린 소녀를!) 604호. 604호. 마르지 않을 침을 삼키며 그는 착실히 계단을 올라갔다.

드디어 6층에 도착했을 때, 그는 곧바로 오른쪽으로 향했다.

그것이 호텔 세르반다의 지배인, 루드비히의 마지막이었다.

오늘따라 기괴하게 꺾인 목숨은 벌써 피를 한바닥 흘리고 있었다. 아, 아쉽네. 그래도 카르밀라에게 줄 피는 충분했다. 소녀는 그의 어설픈 모자를 벗어 던지고, 머리칼을 부여잡아 끌고갔다. 다행히 이녀석은 머리가 조금 길어, 작은 손으로 잡기에 충분했다. 뒤틀린 목에서 뚜둑,뚜둑거리는 소리가 났으나, 소녀의 경쾌하고도 장엄한 구둣발 소리에 묻혔다. 소녀보다 훨씬 어린 이것이 질질 끌려가며 바닥에 붉은 장식을 흥건히 수놓았다. 뭐, 곧 검게 변질되어 바닥과 같은 색으로 어우러질 것이었다.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 Falling Down, Falling Down……..” (런던 다리가 무너지네, 무너지네, 무너지네.) 잔뜩 신이난 소녀는 영국의 오래된 노래를 흥얼거렸다. 한 박자 안에 이것의 배 위에 어설프게 놓여있던 오른 팔이 털썩, 바닥에 내려앉았다. 다시 두 박자 뒤에, 왼팔이 오른팔의 운명을 따라갔다. 노래는 영원히 반복될 것이었다. “My fair lady…….”(나의 아가씨.) 소녀는 구전 동요의 끝자락 가사에 취했는지, 반복해서 불렀다. 소녀의 언니가 기다리는 604호 앞에 도착할 때까지.

똑똑.

“누, 누구야…다가오지…마…….”

“언니, 나야.”

소리가 잠시 멈추었다. 이정도의 아량은 여유있게 하사할 수 있었다. 소녀의 목소리에 어떤 반응을 했을까? 갈증에 타오르는 목덜미를 스스로 쥐어잡으며 가련히 버티고 있을까. 문 밖으로부터 불어오는 풍요로운 냄새에 바짝 엎드려있을까.

무엇이든 다 좋았다. 모든 것은 소녀의 작은 두 손안에 있으므로.

문을 열었다.

“카르밀라.”

소녀의 상상이 옳았다. ‘카르밀라’라고 불린 소녀는 어제와 같이 축축 늘어진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이미 가신 비냄새가 언뜻언뜻 자신을 드러냈고, 늘어지다 못해 드러누울 준비를 마친 드레스 끝자락이 연신 바닥을 적셨다. 분명 창문은 꾹 닫혀있는데도, 비구름은 제 슬픔을 훌훌 털고 떠나버렸는데도, 여전히 비를 맞고 있었다. 비. 비. 빗속, 소녀의 머리카락은 빗물 세례를 받아 잔뜩 뒤엉켜서 두 눈을 가렸다. 그러나 유난히 번쩍거려 또렷하고 커다란 시선을 피할 곳이 없었다. 그 목구멍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가히 괴물의 것이었다. 고장난 생명의 마지막 발악 같은 것. “하필, 왜, 나를…나만….” 세상을 향해, 하나뿐인 하늘을 향해 몰아치는 소리. 소리가 났다. 두 팔은 이미 의지를 넘어서 움직였다. 근육과 뼈의 조화가 어긋난 듯이 어기적어기적 일어난 소녀는 착실히 제 동생쪽에 다가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언니, 이제 잘 하네?”

무심도 하여라. 소녀는 제 동생의 말을 듣지도 않고 그 뒤의 시체에게 달려갔다.

녹색 소녀는 웃었다. 제 드레스 자락을 꼭 쥐고 웃었다. 세상이 떠나가도록. 머지않아 들릴 비명소리가 다 덮어지도록. 환희에 가득찬 웃음. 웃음, 또 웃음. 여기에, 두 소녀 이외의 사람이 더 있는 것처럼.

소녀의 눈은 이미 잠겨있었다. 그래도, 소녀는 착실히 피를 따라갈 줄 알았다. 본능이 그리 가르쳤기 때문에. 드레스 끝자락이 살랑살랑 움직일 때마다, 빗물이 바닥에 똑, 똑, 똑 왈츠와 같은 박자로 떨어졌고, 핏물은 남김없이 소녀의 붉은 입술 그 사이로 빨려들어갔다. 찢긴 목덜미에서 시작한 도둑질은 어느새 ‘이것’의 심장 가까이로 왔다. 심장은 분명히 멈추었으나, 소녀는 그 고동 소리를 착실히 보고 만지고 들을 수 있었다. 생생하여 반짝거리는 핏물이 묻은 두 손이 심장을 향해 더듬더듬 움직였다. 피, 피, 피. 더 줘, 제발. 부디. 나에게……

“이러지 마…….”

심장을 뜯어낼 듯 날카롭게 먹이의 가슴께를 찢으려 했던 두 손이 굳어 버렸다. 감겼던 두 눈이 희미하게 뜨기 시작했다. 소녀의 눈에 들어찬 것은 오로지 붉은 장난들이었다. 아, 모조리 자신의 짓인 질 나쁜 장난. 고로, 소녀는 죽을 듯이 주저앉았다. 생명이 떠나가고도 한참 떠난 먹이의 육체도 역시. 터져버린 울음에 핏물이 뒤섞였다. 소녀의 얼굴은 제것이 아닌 피로 짙게 물들었다. 적나라하게 파여버린 진실. 견딜 수 없었다. 무너진다. 추락한다.

“차라리…….”

뒷 말은 울음과 웃음에 삼켜져 들을 수 없었다. 소녀와 몇 발자국 멀리, 떨어졌던 녹색 드레스의 소녀는 자신만의 소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잔뜩 일그러진 소녀와는 달리, 아리땁게 휘어진 눈썹은 갈매기를 닮았다. 유독 짙게 뺀 눈꼬리는 가히 찬란하다 할 만큼 아름다웠다. 짙게 홍조를 띄운 볼 역시, 핏자국과 우아하게 어울려 소녀를 더욱 고고한 위치로 올렸다. 또각, 또각. 친히 강림하시는 구둣발소리마저 자애로웠다. 이 세상에 단 둘만 남도록, 나머지는 비바람에 쓰러져 가도록 명령하는 듯이. 그렇게.

“그러지 못하는 거, 알잖아?”

한 발, 무릎 꿇고, 한 발, 서훈 받는 기사처럼 앉은 녹색 소녀는 뒤에서부터 소녀를 감싸 안았다. 소녀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으며. 거부할 수 없는 품에 자신을 던졌다. 나 좀 봐봐.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소녀는 곧 뒤를 돌아볼 것이다. 여전히 내리치는 눈물, 흉측하게 엉켜버린 얼굴과 머리카락, 진득하게 들러붙어 영원히 떼어낼 수 없는 핏자국들.

그 모든 것을 품고 사랑하는 나의 반려에게.

“닉…….”

“그래, 카르밀라 피터슨.”

창밖에선 해가 가려진다. 구름이 침몰한다. 회색 구름. 하나, 둘, 셋, 넷, 셀 수 없을 구름. 호텔 세르반다 604호의 창가, 빗물이 세번 톡 톡 톡 단음을 치다가, 톡—톡—톡— 세 번을 장음으로, 다시, 톡, 톡, 톡.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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