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

연극 데스트랩

underwater by 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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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비 오는 날만 되면 악몽을 꿔. 침대에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로 잘 자고 있다가도, 문득 눈을 뜨면 코앞에 그 애 얼굴이 보이는 거야. 그럼 난 소스라치게 놀라서 일어나려고 애를 쓰지. 근데 손가락 하나 꿈쩍할 수가 없어. 차가운 그 애 손이 흉터가 선명하게 남은 목덜미를 매만져도, 그러다 가엾다는 듯 애틋한 미소를 지어보여도. 난 입도 벙긋 못 해. 그 애 얼굴은 그때 그대로야. 하나도 안 변했어. 여름 세미나에서 처음 만났던 그 모습 말이야. 말간 얼굴, 깨끗한 눈빛. 흥분과 동경으로 반짝이던…… 그래, 빌어먹게도 순진해 보였던 그 때.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난 죽기 직전에 간신히 살아났고, 걘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브륄과 앤더슨은 팀이었던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 없을 거야. 생면부지의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우리, 아니. 나랑 걔 사이지. 그런데도 왜 난 아직 비 오는 밤마다 그 애를 볼까. 아직 사랑해서? 아니면 너무 미워해서? 어느 쪽이든 끔찍한 건 마찬가지야. 왜 감정은 머리카락 잘라내듯이 썩둑 잘라 버릴 수 없는 걸까.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기분이 대체 뭔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해. 생각할수록 구렁텅이 속에 끌려들어가는 것 같다고. 어떻게 해야 이 모든 걸 끝낼 수 있을까. 멍청한 소리 하지는 마, 내가 어떻게 살아났는데. 죽기는 싫어. 하지만 나는 이미 잊혀지고 있지. 날 제대로 기억해주는 건 세상에 딱 두 명밖에 없어. 무덤 속에 들어가 있을 마이라. 그리고 날 배신하고 떠난 그 빌어먹을 개자식. 내가 스릴러 아닌 다른 걸 쓰는 극작가였다면 어땠을까? 웃기지도 않은 로코 작가였다면. 어쩌면, 어쩌면 나도…… 아, 그 애가 다시 왔어. 밖에 비가 오는 게 분명해. 클리프,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남았다면 어서 해버려. 나 이제 들을 준비가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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